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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사주의 문제
하나님은 지금도 계시하시는가?
존 맥아더
“하나님이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말은 은사주의 운동 의 찬송가가 되어 버렸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신 다고 명백히 믿는 온갖 부류의 사람들이 각종 이상한개인적인 예언들 을 공표한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악명 높은 예언은 분명 오럴 로버츠 (Oral Roberts)의 죽음을 경고하는 터무니없는 예언일 것이다. 로버츠는 1987년에 전국의 시청자들에게 자기가 채권자들의 채무 이행 마감 시한 까지 8백 만 달러를 모금하지 못 하면 하나님이 ‘그를 천국으로 데려 가시겠다고’ 위협하셨다고 말했다. 모금에 실패했다면 하나님이 그를 정말 데려가셨을지, 데려가셨다면 어떻게 데려가셨을지는 이제 그 누구도 알 수 없을 것이다. 로버츠는 마지막 순간에 플로리다의 어느 개 경주장 소유주에게서 거액의 수표를 받아 위기를 모면한 것이다.
그건 그렇다 치고 2년 후 로버츠는 자신이 수 백 만 달러를 퍼부은, 털사 에 위치한 ‘믿음의 도시(City of Faith)’ 의료 센터가 문을 닫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물었더니 하나님이 이렇게 응답해 주셨다고 주장했다.
하나님은 내 영혼에 말씀하셨다. “나는 기도와 의학이라는 나의 치유의 물줄기들을 통합하는 일에 대해 온 세상의 상상력을 사로잡을 만큼 거대한 믿음의 도시를 너에게 짓게 했다. 그러나 나는 이 계시가 털사에 국한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이제 내가 나의 치유의 물줄기 들을 통합한다는 이 개념을 모든 민족에게 알리고 모든 장래 세대에 전하기를 원하는 때가 이르렀다"
지금까지의 그 어느 때보다도 분명하게 하나님은 내 영혼에 이런 영감을 주셨다. “너와 너의 동료들은 온 세상과 온 교회와 모든 세대를 위해 기도와 의학을 통합시켰다. 이 일은 다 이루어졌다"
나는 이렇게 여쭈었다. “그래서 8년 뒤에 병원을 문 닫게 하시고 11 년 뒤에 의과 대학을 문 닫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그렇다. 내 아들이 공생애 3년 뒤에 십자가에서 ‘아버지, 다 이루었습니다.’ 라고 말한 것과 같은 식으로 사명이 다 이루어졌다"
우리는 오럴 로버츠의 오만방자함에 기가 찰지 모르지만 자기가 하나님에게서 개인적인 계시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은사주의자는 로버츠뿐만이 아니다. 대부분의 은사주의자는 때때로 하나님이 들을 수 있는 음성이나 내적인 영감이나환상을통해서든아니면자신들을도구로사 용하여 노래를 작곡하거나 시를 짓거나 예언을 말하게 하든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자신에게 말씀하신다고 생각한다.
‘라파 목장’ 의 설립자인 린다 펠(Linda Fehl)은 “성령님”이라는 제목의 노래가 담긴 테이프를 판매한다. 그녀는 자기가 암에서 나을 때 이 노래를 성령님께 받았다고 말한다. 한 기독교 출판사의 편집장은 언젠가 내 게 자신은 하나님에게서 영감을 받아 책이나 글이나 노래나 시를 쓴다는 은사주의자들에게서 매주 출판의뢰를 받는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 편집장 친구는 그런 원고들은 글이 형편없거나, 문법이 엉망이거나, 실제적이고 논리적인 오류를 범했거나, 시어를 망쳐 놓았든지 운율을 맞추려고 애를 썼으나 한 마디로 수준 미달인 시들로 가득한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독자들은 그런 주장을 하려는 사람들이 괴짜나 잘 알려지지 않은 기인이나 순진한 은사주의 신자들뿐이라고 착각하지 않으려면 국제적으로 유명한 저자이자 방송 전도자이며 캘리포니아 주 밴 나이스의 ‘처치 온 더 웨이(Church on the Way)’ 교회 목사인 잭 헤이퍼드(Jack Hayford)의 말 을 들어 보라. 헤이퍼드는 북미 오순절 연합 집회(Pentecostal Fellowship of North America)에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새 시대가 오고 있다는 말씀을 하셨다고 주장했다.
헤이퍼드는… 환상 중에 예수님이 성부 우편의 보좌에 앉아 계신 모습을 보았다고 말했다. 헤이퍼드가 본 환상에 따르면 예수님은 몸 을 앞으로 기울여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거룩한 기름이 예수님의 옷자락에 걸리자 교회 위로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나는 이제 재림을 준비하기 위해 일어서기 시작한다. 나와 함께 일어설 자들은 기름부음을 갑절로 받을 것이다"
인기 있는 저술가이며 목사인 래리 리(Larry Lea)는 이렇게 썼다.
최근에 내가 시카고에서 설교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성령님이 내게 임하셨다. 성령님은 내 마음 속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제 네게 이 나라의 실력자의 이름을 말해 주겠다.”
나는 귀를 쫑긋 세우고 들었다.
“네가 마주 대하고 있는 영적인 실력자-너의 나라를 수중에 쥐고 있는 마귀적인 실력자-는 탐욕이라는 실력자다."
우리는 분명 이 하나님의 말씀을 뒷받침할 증거를 찾기 위해 오래 도록 성경을 찾아볼 필요가 없다.
케네스 해긴(Kenneth Hagin)의 이야기는 아마도 이중에서 가장 특이 할 것이다. 그는 젊은 시절 아직 독신이었을 때 하나님이 한 여자의 도덕적인 결함을 알려 주셔서 그 여자와 관계를 끊게 하셨다고 말한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이주 특이한 방식으로 일어났다. 해긴은 하나님 이 기적을 통해 어느 주일 설교 시간에 자신을 교회 밖으로 데려가셨다 고 주장한다. 더 기막힌 점은 해긴이 설교를 전하는 설교자였다는 사실이다!
나는 갑자기 사라졌다! 한참 설교하던 도중에 나는 15마일 떨어진 어느 작은 마을의 길 위에서 있게 되었다. 때는 토요일 밤이었다. 나 는 한 건물에 기대어 있었는데 그 때 마침 이 젊은 숙녀가 길을 따라 걸어오는 모습을 보았다. 그녀가 내가 선 곳에 이를 때쯤 차 한 대가 길을 따라 왔다. 차를 몰던 남자는 길 가장자리에 차를 대고 경적을 울렸고 그녀는 그의 차에 탔다. 그 남자는 차를 후진시켜 방향을 틀더니 마을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갑자기 나는 그 차의 뒷좌석에 앉아 있게 되었다!
그들은 교외로 나가 간음을 저질렀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모습을 목격했다. 나는 계속 구름 속에 있었다. 그 순간 갑자기 내 목소리가 들리면서 구름이 걷혔다. 나는 설교단 뒤에 서 있었다. 이전에 무슨 말을 했는지 몰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래서 그냥 이렇게 말했다. “모두 함께 기도 합시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했다. 시계를 보니 ...... 약15분가량 구름 속에 있었던 셈이다.
내가교회 문 밖을 나서는 성도들과 차례로 악수를 나누는 동안 이 젊은 숙녀가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말했다. “어젯밤엔 못 본 것 같네요" 그녀가 말했다. “네, 어제 ___에 있었어요” (그러면서 그녀는 그 작은 마을 이름을 꺼냈다). 나는 말했다. “네. 나도 압니다.”
그런 미심쩍은 체험을 바탕으로 해긴은 그 여자를 성적으로 문란한 여자로 단정했고 지금까지 그녀가 간음죄를 저질렀다고 생각한다. 해긴은 이 이야기를 하고 나서 그와 비슷한 이야기를 또 했다. 이번에도 갑자기 차로 원격 이동을 해서 또 다른 젊은 여성이 도덕적인 비행을 저지르는 모습을 목격 했다는 내용이었다. 기가 막히게도 그는 이 두이야기를 하고 나서 즉시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은 광신과 현실 사이에 분명한 선 이 있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많은 사람이 체험을 추구하다가 오류에 빠진다." 그러나 해긴의 일화만큼 그 사실이 잘 적용되는 예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이 정말 기적을 통해 해긴을 차 안으로 원격 이동시켜 간음 행위를 목격하게 하셨을까? 하나님이 정말 오럴 로버츠에게 말씀하셨을 까? 하나님이 정말 린다 펠을 위해 작곡을 하셨을까? 잭 헤이퍼드가 실제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바로 옆의 보좌에서 일어나시는 모습을 보았을까? 래리 리의 예언은 정말 ‘주님의 말씀’이었을까? 그리스도인들은 아직도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에게서 직접 계시를 받고 있을까? 오늘 날에도 사람들은 (작곡이나 저술이나 설교나 가르침이나 의사 결정에 있어서) 하나님의 영감을 받고 있다고 주장해도 타당한가?
많은 은사주의자는 큰 소리로 “그렇다"고 대답한다. 예컨대 로드먼 윌리엄스는 이렇게 말했다.
성경은 참으로 하나님의 오늘날의 활동과 짝을 이루는 증언이 되어 왔다 ..... 오늘날 누군가가 하나님이나 그리스도의 환상을 본다면 그 것은 이전에도 일어났던 일임을 알아두는 것이 좋다. 누군가가 하나님에게서 계시를 받는다면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경우에도 공동체 가 운데 계시가 임했다는 사실을 알아 두는 것이 좋다. 누군가가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라고 말하면서 담대하게 1인칭으로 회중에게 선포한다 해도-심지어 성경 말씀을 초월한다 해도-그런 일은 오래 전 에도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 두는 것이 좋다. 얼마나 신기하고 놀라운 일인가! 한 사람이 성령 집회에서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면 그것은 그 사람자신의 (예컨대 당시의 화제에 대한) 생각과 의견도 아니고 단순 히 성경에 대한 해설도 아니다. 왜냐하면 개인적인 의견이 아무리 흥미롭거나 심오하더라도 성령은 그런 의견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과거 증인들의 기록이 오늘날 일어나는 일들의 모형으로서 아무리 귀중하다 해도 살아 계신 하나님이신 성령은 그런 기록들을 관통하고 초월해서 역사 하신다.
윌리엄스는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그는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의 최종적 원천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이 오늘날 주시는 추가적인 계시의 ‘증인’ 일 뿐 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윌리엄스는그리스도인들이 성경 에 마음대로 덧붙여도 되고 다른 사람들이 성경에 덧붙인 내용을 정상적이고 관습적인 것으로 받아들여도 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성경이란 성령께서 오늘날 신자들에게 영감을 주시기 위해 행하시는 일들에 대한 ‘모형’ 이라고 믿는다.
이것은 위험하리만치 상대주의적인 관점이다. 그러나 은사주의 운동 이 팽창함에 따라 이런 관점은 날로 인기를 얻고 있다. 에드워드 그로스 (Edward N. Gross)는 오늘날 교회 안의 이런 위험한 경향을 지적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모형의 시대가 왔다. 모형이 법칙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모형은 진리에 대한 인간의 인식이다. 그것은 잠정적이며 따라서 새로운 자료가 나오면 바뀔 수 있다. 모형은 개방되어 있고 끊임없이 검증받는다. 어떤 과학자도 감히 더 이상 하나의 모형이 모든 알려진 현상을 설명하는 방법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새로이 발견된 자료로 인해 그 과학자의 모형이 한물 간 낡은 도구임이 밝혀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과학의 세계는 이전의 접근 방식(닫힌 계)에서 새로운 접근 방식(열린 계)으로 진보해 왔다.
성경이 영감받은 선지자나 사도를 통한 그 어떤 새로운 계시도 더 이상 허용되지 않는 진리의 닫힌 계시라면‘모형적인 접근법’은 해석학의 잘못 되고 위험한 도구다.
이 방면에서 아무런 혼란이 없어야 한다. 기독교의 정통적 가르침은 언제나 인류에게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특별 계시가 성경의 가르침으로 제한되어 있다고 단언해 왔다.
이것이 핵심이다. 성경이 완성되었다면, 성경은 진리의 닫힌 계시를 의미한다. 성경이 고정되고 절대적인 진리의 기준을 수반 한다면,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확정하고 교리적으로 단언할 수 있다. 하나님 이 여전히 새로운 계시를 허락하신다면 하나님의 진리는 여전히 발전적으로 계시되고 있는 것이며, 만일 그렇다면 우리의 의무는 오늘날 의 선지자들이 성경에서 발견되는 표현보다 더 새롭고 명쾌한 표현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해명할 때 그들의 말을 충실하게 경청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이른바 ‘선지자들’ 의 교활한 작태를 정말로 말씀 속에 주어진 거룩하게 하는 진리보다 진일보한 것으로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은 극소수다. 나도 물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도 그로스의 생각에 동감한다. 성경은 완성되고 충분하여 더 덧붙일 것이 없는 진리의 닫힌계시다{ 유 3; 계 22:18-19). 성경은 하나님이 계시하고자하신 모든 영적 진리를 담고 있다.
영감의 의미는 무엇인가?
영어에서 ‘ 영감 받았다(inspired)’ 는 말은 원래 ‘숨을 불어넣다’라는 뜻의 라틴어 어근에서 나온 말이다. 불행하게도 이 단어는 성경에서 사용되는 “영감” 에 해당되는 헬라어의 원래 의미를 전달하지 못한다. 실제로 디모데후서 3장 16절(“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inspired] 것으로’)에는 숨을 불어 넣는 다는 개념이 발견되지 않는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이 구절에 그런 개념을 넣어서 읽는 바람에 영감의 참된 의미를 오해 하게 되었다. 이들은 하나님이 성경 원문을 기록한 이들의 말에 일종의 신적인 생명을 불어넣으셨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러나 영감을 의미 하는 헬라어는 ‘테오프뉴스토스(theopneustos)’ 인데 이는 ‘하나님의 호흡으로 된( God-breathed)’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문자적으로 이 구절을 다시 번역하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호흡으로 된 것으로’ 가 된다. 다시 말해 성경은 하나님이 신적인 생명을 불어 넣은 인간의 말이 아니다. 성경 그 자체가 하나님의 호흡이다! 성경은 하나님 자신이 말씀하신 것 이다.
많은 사람이 오해하기 쉬운 진리가 바로 이것이다. 영감이란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를 담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영감은 계시된 진리의 보석들이 성경 안에 감춰져 있다는 뜻이 아니다. 영감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자신들의 말로 기록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영감은 하나님이 단지 성경 기자들을 도와주기만 하셨다는 뜻이 아니다. 영감은 성경 말씀이 하나님 자신의 말씀임을 뜻한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호흡에서 나온 것이다.
불타는 떨기나무 속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제 가라내가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출4:12). 애가를 부른 유다의 선지자예레미야는 하나님께 이런 사명을 받았다.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 할지니라……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렘 1:7,9). 하나님은 에스겔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에게 가서 내가 네게 이를 모든 말을 너는 마음으로 받으며 귀로 듣고……그들에게 고하여"(겔 3:4, 10-11).
하나님이 어떻게 성령을 통해 말씀하시는지를 기술하고 있는 핵심 구절은 베드로후서 1장 21절이다. 이 구절은 다음과 같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 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여기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감동하심을 받은” 이라는 말로, 이는 성령에 의해 사로잡힌바 된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신학자 토머스 A. 토머스(Thomas A. Thomas)는 어린 시절 집 근처의 산기슭으로 흐르던 작은 시냇가에서 놀곤 했던 일을 다음과 같이 회상 한다.
어린 시절 우리는 우리끼리 통하는 이른바 ‘배’를 가지고 놀기를 좋아 했다. 어떤 작은 나뭇가지라도 물에 띄우기만 하면 훌륭한‘배’가 되었다. 우리는 그 ‘배’가 냇불에 떠밀려 내려갈 때 따라서 달려 내려가곤 했다. 물살이 바위 위로 급하게 흐르면 그 작은 나뭇가지도 함께 급하게 떠내려갔다. 내 어린 시절 ‘배’ 의 역할을 했던 그 작은 나뭇가지는 물살의 완벽한통제와 인도 아래 물살을 따라 물살과 함께 움직였다. 그것은 물이 움직여 주는 대로 움직였다. 성경 기자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성령님의 통제와 인도 아래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 아 성령을 따라 움직였다. 그들은 성령께서 기록하도록 인도하신 대로 기록했다. 그들이 성령께 사로잡힌 결과 그들이 기록한 내용은 정확히 성령께서 성경 속에 기록하기로 뜻하신 내용이 되었다. 그들이 기록한 것은 매우 실제적인 의미에서 그들의 말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영감에 대한 현대의 견해
그러면 성경에 대한 오늘날의 접근 방식은 어떤가? 일부 현대 신학자 들은 영감이 지속되거나 계시가 갱신될 여지도 고려하려 한다. 적어도 한 사람 듀이 비글(Dewey Beegle)만큼은 교회의 고전적 찬송가 가운데 일부는 성경과 똑같은 방식으로 영감으로 된 것이라고 믿는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일부 위대한 찬송가들은 실제적으로 시편과 동등하다. 그래서 만일 아이작 와츠(Isaac Watts),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 오거스터스 토플레디(Augustus Toplady), 레지널드 히버(Reginald Heber) 등이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살았고 그들 자신의 시대만큼 영감을 받았다면,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들의 찬송가들 가운데 일부는 히브리어 성경에 포함 되었을 것이다"
비글은 특히 19세기에 사역한 스코틀랜드의 시각장애인 목사이자 개인적으로 큰 고통을 겪던 때에 “오, 나를 내버려 두지 않을 사랑이여(0 Love That Wilt Not Let Me Go)" 라는 찬송가를 작곡한 쓴 조지 매더슨(George Matheson)의 체험을 언급한다. 여동생의 결혼식이 있던 날 밤에 매더슨 은 약혼녀가 그의 눈이 멀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를 버렸던 20년 전의 일로 인해 겪은 고통을 생생하게 떠올렸다. 매더슨은 자신에게는 선천적인 리듬 감각이 전혀 없었다고 주장했지만 단 몇 분 만에 찬송가를 작곡했다. 매더슨에 따르면 그는 “오, 나를 내버려 두지 않을 사랑이여”를 전혀 고치거나 가다듬지 않았다고 한다. 그 찬송가는 ‘높은 곳에 서 여명처럼’ 다가왔다.
비글은 조지 매더슨의 체험에 대해 이렇게 생각한다.
[그것은] 시편이 기록된 것과 같은 종류의 영감이다. 종류에 있어서 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정도의 문제였다. 성경 기자들이 하나님 계시의 통로 역할을 했을 때 그들에게는 더 많은 하 나님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러한 영감은 역사 전체를 통해 하 나님의 모든 사자에게 주어진 영감과 종류 변에서 구별되지는 않았다. 성경을 다른 것과 구별지어 주는 특정은 특별 계시가 기록되었다는 점이지 영감의 종류가 구별 된다는 점은 아니다.
비글은 성경의 정전(正典)은 결코 완결된 적이 없다고 믿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성령의 계시와 영감은 계속된다..... 이 때문에 성경의 기자와 편집자 모두를 정경 완성 이후의 해석자들과 질적으로 다르다고 간주할 근거는 없다".그는 계속 해서 이렇게 말한다.
교회가 20세기에 하나님의 영감에 대한 보다 역동적인 인식을 갖는 다면 교회의 복음 증거와 전도는 더 효율적으로 될 것이다. 성경의 독특성을 옹호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성경의 영감이 그 종류 면에서 우리 시대의 영감과 절대적으로 다르다는 측면에서만 생각하면 그로 인해 지불해야 할 대가가 너무 크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성 경 기자 및 해석자와 똑같이 하나님의 감동하심을 받고 하나님께 보 냄 받았다는 인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계 시 기록을 이 복잡한 시대에 맞춰 해석하기란 참으로 어려워서 성경 시대의 해석 과정과 맞먹는 하나님의 영감과 지혜가 필요하다.
사실상 은사주의자들은 바로 그렇게 믿고 있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 이 오늘날 새로운 계시를 주신다면 ‘성경의 독특성을 옹호’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정경이 아직도 열려 있다면 그리고 하나님이 아직도 새로운 예언, 새로운 노래, 새로운 지혜의 말씀을 주신다면, 우리는 이러한 가장 최근의 계시들을 성경과 함께 열심히 하나로 모아 연구하려고 애써야한다. 아니,새로운 계시들을 훨씬 더 부지런히 연구해야 할지도 모른다. 새로운 계시는 우리 시대, 우리 문화에 직접적으로 적용되기 때문 이다.
일부 은사주의자들은 실제로 그런 식의 논리를 편다. 그러나 그것은 최악의 오류다. 정경은 아직도 열려 있지 않다. 구약과 신약으로 이루 어진 하나님의 말씀은 유일무이한 기적이다. 그것은 천오백 년이나 되는 기간 동안 집대성되었다. 50명이 넘는 하나님의 사람들,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일점일획 이무런 오류 없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도록 기록했다. 어떤 찬송가도 성경과 비교할 만큼 가치 있는 것은 없다. 어떤 현대의 예언이나 지혜의 말도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과 같은 영역에 있지 않다. 천지는 없어져도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할 것이다.(마 5:18).
발전적 계시?
은사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방언 예언,환상 등을 통해 받았다고 주장 하는 계시가 성경과 어떻게 부합되는지를 설명하는 데 애를 먹는다. 로드먼 윌리엄스는 앞에서 살펴본 대로 이러한 은사주의적인 현상들은 단 지 성경 시대에 얼어난 일들이 새롭게 나타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누군가가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라고 말하면서 성부와의 교제를 담대히 언급한다 해도 심지어 - 성경 말씀을 초월한다 해도 - 그런 일은 오래 전에도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 두는 것이 좋다" 영적인 은사에 대 한 그의 설명은 결국 계시를 지속시키기 위한 논리로 귀결된다. “성령 안에서 오늘날의 교제는 성경의 기록에 나오는 어떤 내용에 못지않게 하나님의 생생한 임재의 장이다. 참으로 이 과거의 증언에서 배우고 마음에 새길 만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우리 시대와 장래에 새로운 일들이 일어날 것을 기대할 수 있다" 윌리엄스는 계속해서 어떻게 새로운 계시가 발생하는지를 기술한다. 그는 ‘예언의 은사”를 크게 강조 한다.
예언 속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예언은 말씀만큼이나 간결하고 심오하며 놀랍다! 집회에서 그 자리에 있는 누군가가 갑자기 말씀을 선포하고 그 결과 모임 안에서 다양하게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다"는 예언이 나오는 일도 발생할 수 있다. 예언은 보통(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예컨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축복하고 ..... 하는 식의 1인칭으로 이루어지며 ‘나와 너’ 의 만남이라는 직접성이 있다.
예언은 ‘하늘의 언어’ 가 아닌 화자의 모국어로, 화자의 폼에 밴 억양, 음파, 리듬과 말투로 이루어진다. 실제로 예언의 말은 조잡하고 비문법 척인 수도 있으며 ‘흠정역’ 식 영어와 현대 영어가 뒤섞인 것일 수도 있다. 또 유창할 수도 있지만 더듬거릴 수도 있다. 그런 것들은 사실 문제가 안 된다. 왜냐하면 예언 속에서 하나님은 당신이 발견하신 것을 사용하시며 성령은 연약한 인간이라는 도구를 통해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신다.
이 모든 것은 다시 말하지만 매우 놀랍고 신기한 것이다. 우리 대부분은 물론 성경에 기록된 것과 같은 예언의 선포에 익숙하며 그것을 기꺼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다. 우리는 이사야나 예레미야의 말씀선포에는 익숙했지만 오늘날20세기에 톰이나 메리가 그와 똑같이 예언하는 것을 듣는 데는 익숙하지 않다! 우리 대부분은 또한, 성령의 역동적인 능력으로 갑자기 예언이 다시 되살아나기 전에는 예언이 (그와 반대 되는 신약의 모든 증거에도 불구하고) 신약 시대와 더불어 끝났다고 스스로를 설득시켰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그토록 오랫동안 신약을 잘못 해석 할 수 있었는지 의아할 따름이다.
이는 현재의 은사주의적인 예언의 예들이 성경과 동등한 하나님의 계시라는 말이나 다름없다. 그러한 주장은 오늘날의 소위 ‘예언자들’ 에 의한 사기나 오류의 가능성이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에 받아들이기 어렵다. 윌리엄스도 그러한 위험성을 깨닫고 이렇게 말했다.
예언은 절대로 우연히 받아들여질 수 없다. 예언은 진실로 하나님 이 자기 백성에게 보내는 메시지이므로 선포되는 예언의 각 말씀과 교회 생활 안에서 이루어지는 예언의 적용에 대해 매우 진지하고 주 의 깊은 심사숙고가 있어야 한다. 또한 예언이 남용될 위험성 하나님께 말씀을 받은 듯이 꾸며 탤 기능성이 언제나 존재하기 때문에 영적인 분별이 필요하다.
윌리엄스는 이런 위험성을 인정하지만 참과 거짓을 구별하기 위해 어떻게 ‘주의 깊은 심사숙고’와 ‘영적인분별’을 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자신의 책 어느 곳에서도 설명하지 않는다.
아마도 윌리엄스는 「로고스 저널j (Logos Journal)에 자신의 생각을 다 음과 같이 명백히 하려고 한 것을 보면 훗날 자신이 제기한 문제를 인식 한 것 같다.
나는 어떤 식으로든 오늘날의 체험에 성경과 같은 수준의 권위를 부여할 생각은 없다. 오히려 나는 성경의 결정적 권위를 힘주어 지지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오늘날에는 성경 기자들에게 말씀하신 것만 큼 권위 있게 말씀하시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계속해서 말씀 하신다. 하나님은 신약 정경의 완성에서 멈추시지 않았다). 그러므로 하 나님은 ‘과거 증인들의 기록을 관통하고 초월하여 역사하신다.’ 왜냐 하면 그분은 지금도 여전히 자기 백성 가운데 말씀하시고 행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설명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성경의 권위와 덧붙여진 계시와의 구별은 인위적인 것으로 보인다. 어떻게 하나님 말씀의 일부가 다른 일부보다 덜 권위적일 수 있는가?
사실윌리엄스의 견해는 듀이 비글이 신봉한 신정통주의의 입장과구 별이 되지 않는다. 복음주의에서 그런 견해가 발을 붙이도록 허용한다면 성경의 유일무이성이 희생될 것이며 우리가 믿는 모든 것의 기초도 위태로워질 것이다. 오늘날 바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은사주의적인 가르침의 영향력이 점점 커져가는 까닭에 많은 교회가 교회의 주춧돌인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 즉 하나님의 말씀이야말로 신적인 권위의 유일한 기초라는 원리를 버리는 실수를 범할지도 모른다.
회중이 성경을 믿음과 실천의 최종적이고 완전하며 오류가 없는 권위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보기 시작하면 신학적 혼돈의 문은 활짝 열린 셈이다. 누구든 하나님의 계시를 말한다고 주장할 수 있고 거의 어떤 것이든 하나님이 계시한 진리로 통할 수 있다. 확실히 일부 유명한 은사주의 자들은 실제로는 거짓말과 지어 낸 이야기를 가르치면서도 하나님께 새로운 진리를 받고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성도들의 신뢰를 악용해 왔다.
아마도 그 가운데 가장 후안무치(厚顔無恥)한 예는 널리 알려진 이른바 케네스 코플랜드의‘예언’일 것이다. 그는 “텍사스 주 댈러스에서 개최된 사흘간의 ‘승리 캠페인(Victory Campaign)’ 동안에” 예수님이 자기에게 메시지를 주셨다고 주장한다. 이 메시지가 과연 성경의 그리스도께서 주 신 메시지일지 독자 스스로 판단해 보기 바란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지금은 이런 일들이 일어날 때다. 지금은 영적인 활동이 증가할 때다. 오,그렇다 마귀의 활동도 그와 동시에 함께 증가할 것이다. 그러나 불안해하지 말라.
너희가 스스로를 하나님이라고 생각한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너희를 비난할 때 염려하지 말라. 사람들이 너희를 헐뜯고 너희에게 거칠고 무례하게 말할 때 염려하지 말라. 그들은 나에게도 그런 식으로 말했는데 하물며 너희에게도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겠느냐?
너희가 나를 점점 더 닮아갈수록 사람들은 너희에 대해서도 점점 더 그런 식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들은 내가 하나님이라고 주장했다 는 이유로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러나 나는 나 자신이 하나님이 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하나님과 동행했고 하나님이 내 안에 계셨다고 주장했을 뿐이다. 할렐루야! 너희가하고 있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코플랜드의 ‘예언’은 분명히 거짓이다. 실제 예수님-신약의 예수님-은 정말로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언약적 이름을 사용하여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요 8:58). 예수님은 그런 주장을 반복적으로 하셨다(막 14:61-64; 요 5:16-18; 10:30-33). 사도 요한은 복음서 한 권 전체를 그러한 주장을 강조하고 실종하기 위한 목적으로 기록했다{ 참조. 요 1:1,14).
코플랜드는 진짜 선지자일까 아니면 베드로가 다음과 같이 경고한 거짓선지자일까? “그러나 백성 가운데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벧후 2:1). 이 질문에 대한 분명한 해답은 현대 의‘예언’이 과연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할 수 있을지에 대해 확실히 알 지 못하는 이들에게만 가려져 있다.
모든 은사주의적인 예언과 환상이 그렇게 분명하게 성경과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것들은 단순히 어이가 없다. 래리 리는 이렇게 말했다.
몇 년 전 나와 친한 한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다. “래리, 며칠 전에 당신을 위해 기도하다가 환상을 봤어요. 당신 귀가 ‘미키 마우스’ 귀처럼 큼지막하더군요. 그 코끼리 크기만 한 귀만 빼고는 다른 건 다 정상처럼 보였어요. 이 환상이 무슨 뜻인지 가르쳐 달라고 주님께 여쭈었더니 주님의 영이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래리 리는 듣는 능력이 발전했다. 영적인 귀가 발달한거야.”
은사주의자들은 유일한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성경의 유일성을 버렸고 그 결과는 영적인 무한 경쟁이다. 무언가 새롭고 비밀스런 것에 대한 갈망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역사적 기독교의 굳은 확신을 대체했다. 그리고 그것은 사탄의 거짓으로 이끄는 유혹이다. 혼란,오류,심지어 사탄적인 기만은 그 불가피한 결과다.
멜빈 하지스(Melvin Hodg않)는 ‘새로운’ 계시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밝힌 은사주의 계통의 목사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예언과 계시의 은사를 적절한 수준을 넘어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한교회가 교회 운영을 영감의 은사 에 좌우되도록 방임한 경우도 있다. 예언으로 집사가 임명되고 목회자가 쫓겨나거나 세워졌다. 대혼란이 초래되었다. 원인은 분명하다. 예언은 결코 교회 운영의 사역이나 지혜의 말씀의 은사가 차지하는 자리를 빼앗아선 안 되게 되어 있다. 바울은 우리에게 몸은 한 지체가 아닌 여러 지체로 이루어져 있으며 예언이 지혜의 말씀이나 지식의 말씀의 역할을 빼앗으면 옹 몸이 하나의 사역, 즉 예언에 의해 지배받게 된다고 가르친다. 다시 말해 온 몸이 예언이라는 한 지체의 지배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예언의 목소리는 오류가 없다는 생각이 많은 사람을 헷갈리게 했다. 어떤 이들은 자신들이 성령의 음성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모든 은사의 사역에는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협력이 존재한다.
하지스가 ‘예언과 계시의 은사’ 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라. 하지스는 하나님이 오늘날 새로운 계시를 주고 계신다고 믿는 것이 분명하다. 동시에 그는 소위 예언적 발언이 교회 안에서 문제를 일으킨다는 점을 분명히알고있다.시종일관그는은사주의적인 ‘예언의 은사’ 가 어떤 면에서든 성경의 권위보다는 못하다고 결론짓기를 부단히 회피 한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은사주의자들에게 오늘날의 예언을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거나 지나치게 강조하지 말라고 경고하고자 한다. ‘예언적 발언’ 이 조금이라도 ‘하나님의 계시’ 와 동일시될 때 그 결과는 가망 없는 혼란이다. 성경은 그 유일성을 상실하고 하지스가 묘사하는 해로운 결과가 반드시 일어난다.
모든 은사주의자가 예언을 남용하는 문제야말로 지나치게 강조된 문제 가운데 하나라는 주장에 동의하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 문제를 예언은사의 무지한 오용의 탓으로 돌린다. 이 문제에 대한 그들의 해답은 훈련을 제공하는 것이다. 어느 집단은‘선지자 학교’를 시작했다. 학생들에 대한 그들의 홍보 문구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아마도 여러분은 주님의 예언자가 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고 느끼지만 당신의 체험을 설명하거나 허심탄회하게 대화하고 조언을 구할 수있는 사람을 찾는데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선지자학교의 목표는 선지자 및 선견자 사역의 특정인 수많은 꿈과 환상에 근거와 명료성을 부여하는 데 도움을 주고 그리스도의 폼 안에서 예언 사역의 회복을 돕는 것이다. 은사의 남용 및 무지한 사용 때문에 예언 사역에 환멸을 느끼고 매력을 잃은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목욕물을 버리느라 아이까지 버리지는 말라. 당신에게 가짜에 얽힌 쓰라린 경험 이 있다면 발견해야 할 진짜가 있음을 알라 남용과 왜곡은 오직 무지에 대한 혐오 때문에 발생한다. 하나님이 당신을 위해 택하신 사명을 성취하고자 적절히 준비하려면 선지자 학교에 와서 훈련을 받으라.
이는 가짜 예언의 문제에 대한 특이한 접근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학교가 신참 선지자에게 자신의 ‘은사’를 사용하는 방법을 가르칠 수 있는가?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꿈과 환상에 근거와 명료성’을 부여하도록 가르칠 수 있는가? 참 예언과 거짓 예언의 구별은 단순히 교육의 문제인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거짓 예언은 가벼운 실수가 아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 선지자들이 허탄한 묵시를 보며 거짓 것을 점쳤으니 내 손이 그들을 쳐서 내 백성의 공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며 이스라엘족속의 호적에도 기록되지 못하게 하며 이스라엘 땅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리니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 리라:'(겔 13:9).
율법은 거짓 선지자에 대해 엄격한 처방을 내렸다.
만일 어떤 선지자가 내가 전하라고 명령하지 아니한 말을 제 마음 대로 내 이름으로 전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 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느니라 네가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그 말이 여호와께서 이르신 말씀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리요 하리라 만일 선지자가 있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제 마음대로 한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지니라( 신 18:20-22).
또 한 번의 기회는 없었다. 거짓 선지자 - 일어나지 않은 일을 예언한 사람 - 는 사형에 처해야 했다. 여호와의 말씀을 대언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은사주의자들은 어떤 신자든 원하기만 하면 하나님께 계시를 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앞에서 인용한 광고가 실린 「카리스마」 지의 같은 호에는 신자들에게‘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음성 완 들을 수 있는지’를 가르쳐 준다고 약속하고 있는 카세트테이프를 선전하는 광고도 실려 있다. 이 광고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모든 필요와 모든 상황에 대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모든 신자가 누릴 수 있는 혜택이다.’ 이 테이프에 나오는 강사인 제리 헤스터(Jerry Hester)는 자칭 ‘하루 24시간 친밀한 대화 수준에서 하나님과 대화하는 법을 가르친다’는‘음성 듣기 세미나’에 등장한다.28)
하나님께 받은 개인적인 계시를 선포하고 싶으면 선지자 학교에 가면 뇌고 하나님께 개인적인 계시를 받고 싶으면 음성 듣기 세미나에 가면 된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인들을 신뢰할 만한 성경 말씀에서 멀어지게 하고 그들에게 하나님과의 개인적 대화, 예언, 꿈, 환상 등 주관적인 수단을 통해 진리를 찾도록 가르치는 부적절한 영향을 끼친다. 또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영원한 말씀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성경을 초월하여 더 신선하고 친밀한 형태의 직접 계시를 찾게 한다. 이는 아마도 르네 파슈(Rene Pache)가 지적한 대로 은사주의 운동의 가장 불건전하고 파괴적인 경향일 것이다.
그들은 기도에 있어서 성령을 지나치게 우선시하고 은사, 황홀경 및 ‘예언 에 집착하여 성경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매일 살아 계 신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데 과거의 책에 무엇 하러 얽매이겠는가? 그러나 이것이 바로 위험한 점이다. 기록된 계시의 끊임없는 통제에 서 멸어지면 우리는 곧 주관성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리고 신자는 아 무리 좋은 의도를 갖고 있어도 급속히 일탈이나 직통 계시주의나 교만에 빠질 수 있다. 성경에 무엇인가를 빼거나 더하는 것은 금지되었다는 점을 각자 명심하자(민 4:2; 계 22:18-19). 거의 모든 이단 및 사이비 종파는 그 창시자의 가상적인 계시나 새로운 체험,즉 엄밀히 성 경적인 틀 밖에 있는 그 무엇에서 비롯되었다.
정경은 완성 되었다.
사실 성경보다 더 신선하거나 더 상세한 계시는 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돕기 위해 우리에게 사적인 계시를 주실 필요가 없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3:16-17,강조는 저자). 성경만으로 충분하다. 성경은 모든 선한 일을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한다.
은사주의에 대해 유보적인 태도를 보이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계시는 현재 완성되어 있다는 핵심적인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성경의 정경은 완성되었다. 사도요한은 신약의 마지막책의 마지막 말을 쓰면서 이와 같은 경고를 기록했다.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 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 22:18-19). 이 말씀에 뒤이어 성령은 송영을 추가하시고 정경을 완성하셨다.
에스라와 느헤미야 시대 이후 구약 정경이 완성되자 어떤 형식으로든 하나님의 계시를 선포한 선지자가 아무도 없는 4백 년의 ‘침묵의 세월’이 뒤 따랐다.
이 침묵은 하나님이 신약 시대 이전에 한 번 더 말씀하시면서 세례 요한에 의해 깨졌다. 뒤이어 하나님은 여러 사람을 감동시켜 신약의 여러 책을 기록하게 하셨고 그 마지막이 요한계시록이었다. 2세기에 접어들 면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것과 같은 완결된 정경이 널리 공인되었다. 4세기에 열린 여러 교회 공의회에서는 교회가 보편적으로 확증한 사실,즉 우리가 가진 성경 66권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유일한 참된 성 경이라는 점을 확인하고 공식화했다. 정경은 완성되었다.
구약 정경이 완성된 뒤에 침묵의 시대가 온 것처럼 신약이 완성된 뒤에도 어떤 형태로든 새로운 계시는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요한계시록 이 완성된 이래 어떤 새로운 기록된 계시나 구두 계시도 하나님에게서 나온 신적인 진리로 그리스도인들에게 보편적으로 인정받은 적이 없다.
정경이 선택되고 완성된 과정
유다서 3절은 성경의 완성에 대한핵심적인 성구다. 이 진술은 유다가 신약이 완성되기 전에 기록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경 전체의 완성을 예기하고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유3). 헬라어본문에서 “믿음”이라는 단어 앞에 있는 정관사는 유일무이한 믿음, 즉 “그 믿음”을 가리킨다. 다른 믿음은 없다. 갈라디아서 1장 23절(“다만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전에 멸하려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함을 듣고”)이나 디모데전서 4장 1절(“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같은 본문들은 “그 믿음”이라는 표현의 객관적인 용법이 사도시대에 흔 하게 나타났음을 보여 준다. 헬라어 학자 헨리 앨퍼드(Henry Alford)는 이렇게 말했다. “여기서의 믿음은 객관적이다. 즉,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내용의 총체다"
유다서 3절의 “단번에”라는 중요한 표현에도 주목해 보라. 여기에 쓰 인 헬라어는 하팍스(hapax)인데 이는 지속적인 결과를 지니고 반복될 필 요가 없이 영원히 이루어진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단번에” 전해진 그 믿음에는 아무것도 더할 필요가 없다.
유다서에 대한 탁월한 책을 쓴 조지 롤러(George Lawlor)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기독교 신앙은 변할 수 없다. 이 말은 모든 세대의 사람들이 믿음을 발견하고 경험하며 믿음대로 살 필요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이 말은 새로 생겨나는 모든 가르침은 그 정당성이 그럴듯하게 주장 되더라도 거짓된 가르침이라는 뭇이다. 이 진리의 체계 속에서 하나님이 주신 계시에 새로운 계시를 덧붙이려는 모든 주장은 거짓된 주장이며 배격해야 마땅하다.
유다서 3절에서 또 다른 중요한 단어는 “주신”이라는 말이다. 헬라어 원문에서 이 단어는 부정 과거 수동태 분사인데 이 문맥에서는 지속적 인요소가 없는 과거에 완성된 행위를 가리킨다. 이 경우에 쓰인 수동태 는 믿음을 인간이 발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셨다는 뜻 이다. 어떻게 주셨는가? 그분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최종적이고 완성된 가르침의 체계를 주셨다. 우리의 기독교 신앙은 역사적, 객관적인 계시에 의존 한다. 이 계시는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 하나님이 다시 말씀하시기 전 까지는 모든 영감 받은 예언과선지자와 그 밖의 온갖 형태의 새로운 계시들을 허용하지 않는다.(참조. 행 2:16-21; 계 11:1-13).
그동안 성경은 우리에게 거짓 선지자를 조심하라고 경고한다. 예수님은 우리 시대에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시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 할 것이라고 말씀 하셨다. (마 24:24). 표적과 기사만으로는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대변자라는 증거가 전혀 되지 못한다. 요한은 이렇게 기록했다. ‘자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 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요일 4:1).
궁극적으로 성경은 모든 것의 판단 기준이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표준이다. 사실 영어에서 정경(canon)이라는 말은 ‘규칙, 표준, 또는 척도’ 라는 뜻이다. 성서의 정경은 기독교 신앙의 척도이며 이미 완성되어 있다.
물론 역사적으로 위조된 책들이 진짜 성경으로 주장되기도 했다. 예컨대 로마가톨릭 성경에는 경외서(Apocrypha:구약과 신약의 일부문헌이 나온 때와 동시에 나왔지만 정경적인 문헌에서 제외된 글들)가포함되어 있다. 로마가톨릭교회는 경외서를 성경으로 받아들이지만 경외서는 명백히 성경이 아니다. 경외서는 역사적, 지리적, 신학적인 오류를 담고 있다.
히에로니무스(Eusebius Hieronymus,345-419 영어 이름 Jerome, 필명 소프로니우스 )는 경외서를 정경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견해를 대변했지만 일부 교부들(대표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은 경외서를 히브리어 구약성경과 동등하게 여기지는 않았어도 정경으로 받아들였다. 마지막으로 16세기에 종교 개혁자들은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 곧 성경만이 권위 있는 계시라는 진리를 확립함으로써 경외서를 영감으로 기록된 책에서 제외시켰다. 반면 로마 교회는 트리엔트 공의회 (Council of Trent, 1545-1563)에서 모든 경외서는 정경에 속한다고 진술함으로써 종교 개혁자들의 입장에 반발했다. 그 이후 개신교와 가톨릭은 지금까지 그러한 견해 차이를 유지해 왔다.
구약정경에 대해서는 구약의 마지막책이 기록된 때부터 하나님의 백성들이 일반적으로 동의했다. 유대인들은 어떤 책이 영감으로 기록된 책인지를 알았을까? 그들은 하나님의 대언자로 알려진 이들이 쓴 책들 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러한 책들을 주의 깊게 연구했고 거기서 역사적, 지리적, 신학적으로 아무런 오류도 발견하지 못했다.
초기 교회의 그리스도인들도 신약 가운데 어떤 책이 믿을 만하고 어떤 책이 그렇지 않은지를 밝히기 위해 유대인들과 비슷한 판단 기준을 적용했다. 핵심적인 판단 기준은 사도적 출처(apostolic authorship)였다. 신약의 모든 책은 사도나 사도와 가까운 사람이 쓴 글이어야 했다. 예컨대 사도가 아니었던 마가는 베드로의 동역자였다. 마찬가지로 사도가 아니었던 누가도 사도바울과 가깝게 동역했다.
초기 교회가 적용한 두 번째 판단 기준은 동의(consent)였다. 사도행전 2장 42절은 교회가 처음으로 모였을 때 성도들이 기도와 교제와 성찬과 사도의 가르침에 전념했다고 말한다. 훗날 어떤 문헌이 성경으로 인정 돼야 동} 는지를 고려할 때 그들은 이렇게 자문했다. “이 책은 사도의 가르침과 일치하는가?" 교회 속으로 비집고 들어오려는 온갖 이단 때문에 이 판단 기준은 매우 중요했다. 이단들은 사도의 가르침과 모순되었기 때문에 이단들의 교리적 오류는 쉽게 식별할 수 있었다.
세 번째 판단 기준은 교회의 반응이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책을 받아들이고 예배에 사용하고 그것을 자신들의 삶의 일부로 삼는다면, 또 한 그리스도인들이 보편적으로 그 책으로 가르침과 축복을 받고 있다면, 그것은 또 다른 중요한 승인의 표시였다.
서기 404년에 라틴어 불가타역 성서가 완성되었다. 이 판본은 성경 66 권 전체를 번역한,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번역본이다. 이 66권은 현대 영어 성경 속에 포함된 책들과 같은 책들이다. 하나님은 단번에 말씀 하셨고 하나님의 말씀은 대대로 보존되어 왔다.
사도들의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참 교회는 언제나 성경은 완결되었다고 믿어 왔다. 하나님은 계시를 주셨고 이제 성경은 완성되었다. 하나님 은 이미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은 완전하고,효력이 있으며,충분하고,오류가 없고, 절대 확실하며,권위가 있다. 성경에 무언가를 덧붙이려는 시도와 하나님이 주신 다른 계시가 있다는 주장은 언제나 이단과 광신주의자들의 특정이었지 참된 하나님의 백성의 특징은 아니었다.
은사주의자들은 스스로 성경에 무언가를 덧붙이려 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만 예언적 선포,예언의 은사 및 계시에 대한 그들의 관점은 실제로 바로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 그들은 (아무리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했다손 치더라도) 하나님의 최종적 계시에 무엇인가를 덧붙이면서 성경의 유일무이성과 권위를 훼손한다. 새로운 계시와 꿈과 환상이 로마서나 요한복음처럼 신자들의 양심에 구속력을 가진 것으로 간주된다.
일부 은사주의자들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말하는 예언적 선포와 새로운 계시의 의미를 오해하고 있다고 말하곤 한다. 그들은 성경을 변경하거나 성경과 동등해지려는 시도는 전혀 하지 않는다고 말하곤 한다. 그들은 오늘날 벌어지는 현상을,사도행전 11장 28절의 아가보의 예언과 같이 성경을 오늘날의 상황에 적용하거나 처방할 때 성경의 의미를 명확하게 밝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경의 의미를 명확히 하는 것과 성경에 무엇인가를 보태는 것의 차이는 실로백지 한 장 차이다. 그러나 성경은 자신에게 예언의 은사가 있다고 생각하는 누군가의 말을 들어야 그 의미가 명백해지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우리가 주의 깊게 부지런히 연구할 때 그 의미가 명백해진다. (사도행전 8장 28-35절에 나오는 빌립과 에디오피아 내시의 이야기를 보라).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해석하는 데 지름길은 없다.(참조. 행 17:11; 딤후 2:15).
그리스도인들은 영감과 계시의 문제에 대해 어정쩡한 태도를 취해선 안 된다. 이런 교리들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하나님의 음성과 언간의 목소리를 구별하는 데 필수적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 한다고 자처하면서 자기 생각을 말하는 는 사람은 구약 율법에 따르면 사형에 처해지게 되어 있었다.(신13:1-5). 성경은신약시대의 신자들에게 도 영들을 분별하고 예언을 사칭하는 모든 주장을 잘 판단해서 거짓 선 지자와 이단을 피하라고 권면 한다. (요일 4:1; 고전 14:29).
하나님의 말씀을 거짓된 말과 구별해 내는 일은 언제나 중요한 일이었다. 하나님은 교회 전체가 분명한 기준을 가질 수 있도록 역사적 과정을 통해 정경의 신빙성을 확립해 오셨다. 우리가 이제 그러한 역사적 기준 오 버리고 영감과 계시를 다시 정의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받아들일 능력을 스스로 손상시키는 것이다. 성경의 유일성을 무너뜨리면 하나님의 음성을 인간의 말과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질 것이다. 결국 누구나 되는 대로 말하고 그 말을 하나님 말씀이라고 주장해도 아무 도 그 주장을 부정할 권리가 없게 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 바로 그런 상황에 위태로울 만큼 가까이 와있다.
성령은 오늘날에도 분명히 교회 안에서 능력 있게 역사하고계시지만 대부분의 은사주의자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그렇게 역사하시지는 않는다. 성령의 역할은 우리가 설교하고, 가르치고, 쓰고, 말하고, 증언하고, 생각하고, 봉사하고, 생활할 때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는 일이다. 성령은 분명 우리를 하나님의 진리로 인도하시고 우리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으로 이끄신다. 그러나 성령은 절대 하나님의 말씀과 동떨어진 방법 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 일을 하신다. 인도하시고 능력 주시는 생령의 사역을 영감이나 계시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하나님이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어."라든지 “이건 내 생각이 아니야. 주님이 내게 주신 생각이야" 또는 “이건 내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 메시지야"와 같은 표현을 사용하면 오늘날 신자들의 삶에 나타나는 성령의 인도하심 이라는 문제를 혼동하게 된다.
그런 식의 혼란을 초래하는 것은 곧 성경의 유일성과 절대적 권위를 부정하는 오류에 놀아나는 것이다. 에베소서 5장 18-19절과 베드로후서 1장 21절의 단어와 개념을 뒤섞어선 안된다. 성령 충만을 받고 시와 찬송으로 서로 화답하는 것은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아 성경을 기록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다.
부흥과개혁사, 무질서한 은사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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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하나님은 지금도 계시하시는 가? - 존 맥아더 (SDG 개혁신앙연구회)
작성자 그리스도의 한 노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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