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포마을의 오랜 공동체적 삶이 담긴 문화유산
진도소포 걸군농악보Ⅱ 【별책부록】
아아어어 얼싸지화자기가 좋네
날홀리네 날홀리네
산골처녀가 나를 홀리네.
임진왜란에 유래를 둔 내력과 도둑잡이 등의 풍물특색, 그리고 상쇠의 계보가 갖추어진 서남해안 마을 굿의 원형을 유지하고 활발하게 전승되고 있는 진도소포걸군농악.
지난 2006년 12월 27일 지정될 당시 초대 예능보유자는 조열환(상쇠), 김내식(설북), 홍복동(설농기)씨였다.
상쇠의 전승계보는 박학삼-정덕관-고유관-임화춘-임월판-김홍국-김오현-조열환으로 이어진다. 지금은 김남용으로 전승되고 있다.
설북은 진도 설북의 명인이었던 박태주(별칭 북태주)에게서 17세때부터 배운 김내식(1940년생)으로 이어지고 있다. 50여 년동안 북춤의 원형을 오늘까지 유지하여 온 면모를 보이고 있다.
설농기는 김흥식-주동기-박용호,박봉선,김홍배-홍복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홍복동은 전통적인 양식의 부들상모를 제작하는 기능과 놀릴 수 있는 예능을 전승받았다.
지난 5월 1일 이날 시연과 함께 전라남도지정 무형문화재 제39호 진도소포걸군농악보(2)가 진도문화예술연구회와 진도소포걸군농악보존회(위원장 임귀현) 이름으로 발간되었다.
현재 위원은 김내식(보유자) 김병철 차현지 오형아 채영식 이인옥 김덕춘 노관민 곽순경 박연실 김순진이며 편집은 김남용씨가 맡았다. 김남용 편집자는 이번 별책부록은 <진도소포걸군농악보>를 만들면서 모은 자료를 스캔하거나 문서작업을 한 내용이라고 밝혔다.
이어 2018년 전남 인문학 기반 및 역사자원 활용사업으로 지원받은 금액 가운데서 순수제작비는 810만원으로 우선 Ⅱ권을 만든 다음에 자부담으로 1권을 발간하는 것으로 정리했다고 알렸다. 감수는 마을 출신 상쇠이기도 했던 김오현(진도군민속예술단 전 예술감독), 김현숙(전남문화재위원)씨가 수고하였다.
소포걸군농악 조사보고서(김정호 사료보존회장)에는 “1789년 기록인 『호구총서』에 목장면 소포리로 나오며 이미 이때 소금막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1432년(세종14) 기록에 해남 우수영에 있던 주량(周粱)만호가 진도의 소가포(蘇可浦)로 옮긴 기록이 있다.”라고 했다.
무엇보다 소포걸군농악을 발굴 전승하는데 가장 공헌을 한 차근현 전 진도문화원장의 소포에 정착한 유례를 꼼꼼하니 적어놓고 있다. 또한 소포걸군농악보를 78년 차근현씨가 주찬계에게서 물려받았다고 밝히고 있다.
소포농악이 최초로 소개된 것은 67년 문화재관리국이 실시한 『무형문화재조사보고』(호님편)에서다. 중앙대학 정병호씨는 68년 당시 소포농악대의 상쇠인 김흥국씨를 상대로 구술받은 것을 86년 열롸당에서 펴낸 『농악』, 「호남우도농악」 편에 자세히 수록한 바 있다.(박남인)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전국의 농악단들이 복장과 고깔이 갈수록 일률화하는 경우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 이는 진도에서 전승되고 있는 국가지정 민속인 남도들노래 시연 현장에서 모를 심는 아낙들과 북을 치는 남정네들의 복장이 예전 진도에서 직접 물을 들여 자주 입었던 중우바지나 감물 또는 쪽물 몸빼 등을 새롭게 재단하여 입어보면 어떨까 하는 입장이다.
무엇이든 획일화되어가면 재창조력을 잃기 마련이다. 더군다나 걸립패 걸군농악단이라하면 단순한 방송공연만을 염두에 두는, 지나친 화려한 복장만을 굅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한다.
천을 덧대어 기워입은 바지나 저고리가 어찌 숭이 된다는 것인가.
고깔 또한 진도의 군화로 지정된 동백꽃을 형상화한 지화로 넣어보는 시도가 필요했으면 한다.
정병호 교수는 “농기수는 흰 옷 차림을 하고 머리에 고깔을 쓴다. 상쇠중쇠종쇠는 흰 옷 차림에 삼색띠를 두르고 전립(戰笠)을 쓴다고 했다. 또한 무동(농기)은 도령복을 입고 배 모자른 쓴다. 조리중은 장삼을 입고, 흰 종이로 만든 가면에다 볏짚으로 만든 모자를 쓴다. 집사는 흰 옷에 오색 도포를 입고, 머리에는 관을 쓴다.”고 했다.
세상에 공짜점심은 없다
소포걸군농악이 오늘날까지 활발하게 전승되고 있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이미 소포마을에 소금막과 불소금을 만들던 솥단지도 다 사라지고 없다. 대신 소포간척지와 대홍포를 막아 넓은 농지를 분양해 대농들이 출현해 인력 대신 첨단 농기계들이 집집마다 들어섰다.
그래도 소포농악은 마을의 중심 문화단체로서 그 구성원이 풍부하다. 지난 80년 3월2일 진도 농악 보전마을로 지정받은 이유도 여기에 있었을 것이다. 단지 “80년 이후 민속예술이 생활을 떠나 연희용이나 공연용으로 쓰이면서 일부 형식이 변질 정형화되고 있다.”고 조심스레 우려를 내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민속이 유기체처럼 시대에 따라 변하는 속성은 진도예술의 한 특징이라 하지만 무형문화재로 화석화되어 정형화하는데 문제가 있고 지나치게 각색한 흔적이 보인다는 조사자의 의견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또한 바람직한 예술성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라도 상모놀이, 북춤, 장고놀이, 북놀이, 소고놀이, 무동놀이 등 각 분야 기능연마를 필요로 한다고 주문했다.
공짜점심은 없다는 것도 자연법칙이다. 소포걸군 농악보에 따르면 걸군패들이 다른 동네에 가서 걸립군을 칠 때 동네 책임자에게 보내는 통문, 사통 등이 있고 진법에 대해서는 입당원진법, 마당원진법 등 걸군패가 알아야 할 점을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은 농악보라기보다 다른 동네에 걸립굿을 갈 때 무식면을 하도록 주의할 점을 적고 있는 「건립패상식」이라고 본다.
어떤 분야에도 성공을 바라면 그에 따른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자기가 잘 하는데도 사람들이 자신을 따르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사람에게는 사마천 사기에 나오는 桃李不言 下自成蹊 (도리불언, 하자성혜)란 사자성어를 알려주고 싶다. 즉 “복숭아와 배나무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그 밑에 저절로 길이 생긴다.”는 뜻이다. 사람들이 몰리지 않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걸립패로서 다른 지방, 다른 동네를 찾을 때는 그 기량이 뛰어나야 할 뿐만 아니라 기강과 진법에 따른 진퇴가 분명해야만 한다.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 공짜 치즈는 쥐덫에만 놓여 있다는 말이 있다. 좋은 일은 까닭 없이 찾아오지 아니하고 재앙은 터무니없이 찾아 들지 아니한다는 뜻이다. 새로운 2세대가 이끌어가는 진도소포걸군농악보존회. 수십년 넘게 수집 보존하고 있는 관련 자료와 이를 바탕으로 한 재정리 발간 작업에 소홀히 하지 않고 각종 행사에 적극 참여하면서 보존회원들의 기량이 갈수록 일취월장해 나갈 것을 기대하고 있다.
용장성 고려항몽 추모관과 순절묘역
*진도 용장성 부근에 고려항몽 삼별초 추모관이 들어선다고 한다. 늦었지만 기꺼이 동의와 박수를 보낸다. 진도문화원에서는 매년 오월 중순 무렵 고려항몽충혼탑 앞에서 순의제를 올리고 있다. 뒤에 자리한 용장사와 홍보관에 비해 너무 황량한 충혼탑 근처에 추모관이 들어선다면 여러 가지로 유용하게 쓰여질 것이다. 이와 연계하여 앞으로 삼별초 진도입도 행사를 자체적으로 갖고있는 고군면 연동 벽파 마을에 지원은 물론 금갑까지 퇴각로 정비 및 삼별초와 관련된 지명들을 설명하는 표지판들이 세워져야 한다. 이 또한 역사의 길이기 때문이다.
자 이제 정유재란 순절묘역을 다시 살펴보자. 얼마나 많은 진도사람들이 희생되었는가. 하지만 지금까지 이곳도 매년 명량대첩축제 전날 진도문화원이 매년 약무호남제례를 올리고 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그 어떤 기념물도 찾아볼 수가 없다. 이는 자랑스러운 우리들의 조상 선조들에 대한 예우가 아니다. 1597년 초가을 명량해로에서 오직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한 목숨을 던졌던 길이 빛날 전사들. 무명용사들. 왜군들에게 보복을 당한 진도주민들. 이들의 정신을 형상화한 조형물이 반드시 들어서기를 바란다.
이동진 군수는 그 무엇보다도 임기 내에 꼭 실행 완료해주길 부탁드린다.
☆정유재란은 진도 울돌목을 중심으로 수군전이 치러진 전쟁이었다. 1597년 9월 15일 진도 벽파진에 도착한 이순신은 9월 16일 명량해협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곧바로 신안 당사도로 후퇴했기 때문에 진도는 상륙한 일본군에 의해 큰 희생을 치러야 했다. 당시 진도 관군은 군수인 송덕일(宋德馹)이 이끌었고, 명량대첩 때 전사한 진도 사람 중 관군으로 이름이 나오는 인물은 조응량 등 8명이다.
건립경위를 살펴보면 진도군 고군면 도평리와 오일시장 사이의 산기슭에 있는 이 묘역은 벽파진이나 명량진에서 15리 거리이며, 진도 설군 당시인 1440년대는 토반인 창녕조씨와 김해김씨들에게 하사된 땅이었다고 한다. 정유재란이 끝날 무렵인 1597년경부터 이 묘역이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묘역의 면적은 50,553㎡이고, 232기의 무덤이 있다. 이 묘역의 많은 봉분 중 창녕조씨나 김해김씨 등 진도 토반씨족 인물들 16기 이외에는 주인 없는 무덤들이다.
진도 군내 사족인 조응량(曺應亮)[선무원종공신], 그의 아들 조명신(曺命新)[선무원종공신], 박헌(朴軒)[병조참판 증직], 김성진(金聲振)[선무원종공신, 남원전투 순직], 김홍립(金弘立) 등의 무덤도 있지만, 나머지는 이름 없이 종군했던 현지 향민들의 무덤들로 추정된다.
진도군은 1995년부터 이곳 묘역을 다듬고 봉분을 손질해 보호하고 있다. 전라남도는 2001년 9월 27일 이 묘역을 문화재자료 제216호로 지정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