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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전예배 2016. 12. 4. [16-49] 한우리교회
*제목: 생활을 신앙화 하자. *본문: 골3:12-17
*주제: 우리의 생활은 믿음 속으로 들어가야 하고 우리의 믿음은 생활 속으로 들어가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1. 덕을 세우는 생활신앙입니다. 2. 예수님을 표준으로 삼는 생활신앙입니다. 3.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신앙입니다.
*생명의 말씀: 12.○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13.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14.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15.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16.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17.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들어가는 말) 유머. 여기에 시커먼 숯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시커먼 숯 자제로는 아무 것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시커먼 숯을 무엇에 쓰겠습니까? 숯을 쓰기 위해서는 반드시 불을 붙여야 합니다. 숯에 불을 가져다 부치면 숯이 타들어 가면서 새빨간 불덩어리가 됩니다. 이렇게 새빨간 불덩어리가 된 숯을 모아 놓으면 굉장한 일을 해 냅니다.
처음에는 숯과 불 따로 있는 둘입니다. 그러나 숯과 불이 하나가 되어 버리면 굉장한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의 생활이 따로 있고 믿음이 따로 있으면 그 믿음은 쓸모가 없고 믿음 없는 생활은 하나님 앞에 의미가 없습니다. 아무리 교회에 출석을 잘 한다고 해도 불신자의 생활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생활 속으로 들어가고 생활이 믿음 속으로 들어가서 하나가 되면 굉장한 역사가 일어납니다. 믿는 대로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의 생활은 믿음 속으로 들어가야 하고 우리의 믿음은 생활 속으로 들어가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제목을 ‘생활을 신앙화 하자’라고 정했습니다.
1. 덕을 세우는 생활신앙입니다.(12) 여러분들은 왜 옷을 입습니까? 누구를 위해서 옷을 입는 것입니까? 나를 위해서 입는 것입니까? 나 혼자 산다면 아담과 하와처럼 벌거벗고 산들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집 안에서 런닝 바람으로 또는 잠옷 입고 산들 뭐라고 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외출 할 때에는 반드시 차려입어야 합니다. 우리가 함께 더불어 살기에 항상 너를 의식하고 너를 위해서 옷을 깨끗이 입는 것입니다. 나 혼자 산다면 누더기를 입는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우리는 옷을 단정히 입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비싼 옷을 사 입으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같은 옷이라도 깨끗이 입고 단정히 입어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나에 대해서 혐오감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믿는 사람들은 옷을 하나 입어도 깨끗이 입는다’라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옷을 입는 이유는 너를 위해서 단정히 입는다는 사실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즉 옷을 잘 입는 것은 덕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 오늘 본문 12절은 우리의 정체성,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3가지로 표현합니다. 첫번째 나오는 ‘하나님의 택하사’이라는 말씀은 ‘믿는 자’라는 말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자 즉 선택받은 사람만이 하나님을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번째 나오는 ‘거룩하고’라는 말씀은 외모는 같을 지라도 하나님께서 선택한 사람에게 자기의 영을 부어 주시어 영을 받지 못한 사람과 구별해 놓는데 이 구별해 놓았다는 말이 '거룩‘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구별된 사람입니다. 셋째로 나오는 ‘사랑받는 자처럼’이라는 말씀 역시 믿는 사람을 가리키는데 하나님께서 사랑해 주시되 끝까지 사랑해 주시는 자라는 뜻입니다.
이 세 마디를 한 마디를 줄이면 ‘믿는 자처럼’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라는 말씀은 믿는 자라면 긍휼과 자비와 온유와 겸손과 오래 참음 즉 인내의 옷을 입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진짜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하나님이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는 반드시 다섯 가지 덕목으로 옷을 입듯 하라는 말씀입니다.
- 이 다섯 가지 덕목을 갖추고 사는 사람은 절대 남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습니다. 남을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손해를 끼치지 않습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 온유한 사람은 손해를 끼치지 않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손해를 끼치는 법이 없습니다. 아무리 내가 속이 상한다 해도 오래 참는 사람은 남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교회에 나오면 교회에 덕을 세우고 직장에 나가면 직장에 덕을 세우고 동네에 살면 이웃에게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믿음은 이렇게 덕을 세우는 생활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믿음이 덕을 세우지 못하는 생활로 나타날 때 그 믿음은 무용지물이 됩니다.
예) 사도바울의 변화된 삶 바울사도가 다메섹 길에서 회개하기 전에는 그에게서 긍휼이라는 것을 찾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자비를 베푸는 법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겸손이 아닌 교만으로 꽉 찼던 사람입니다. 또한 온유함을 찾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오래 참은 적이 있습니까? 믿는 사람을 때려죽이고, 잡아 가두고, 재산을 빼앗기 위해 얼마나 조급해 했습니까? 오래 참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가 얼마나 교회에 부덕을 끼쳤는지 모릅니다. 바울사도가 나중에 다메섹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돌이켜 보니 자기의 생활이 한참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골로새 교인들에게 덕을 세우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거룩함을 얻고 택함을 받은 우리 성도들은 다섯 가지로 옷을 입듯이 그 덕목을 갖추어야 합니다.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만나는 사람에게 유익을 주어야 합니다. 즉 교회에 유익을 주고 가정에 유익을 주고 직장에서 유익을 주고 동네에서 이웃에게 유익을 주는 덕스러운 생활을 해야 합니다. 덕을 세우는 생활이 우리의 믿음이 되어야 하고 믿음은 바로 이런 덕을 세우는 생활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믿는 자의 삶입니다. 여러분들의 생활도 가는 곳마다 덕을 세우는 삶으로 믿음을 꽃피우고 열매 맺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예수님을 표준으로 삼는 생활신앙입니다.(13-14) 우리의 믿음은 예수 표준의 생활로 나타나야 합니다. 02(지역번호)+116으로 전화번호를 누르면 지금은 ‘몇 시, 몇 분, 몇 초입니다’라는 안내가 계속 나옵니다.
방송국에서 안내하는 ‘몇 시, 몇 분, 몇 초’라는 것은 자기들 마음대로 하는 것입니까? 모든 시계가 맞추어야 하는 기준시계가 있습니다. 그 시계는 세계에 하나밖에 없는 시계로 영국 그리니치 천문대에 있습니다. 그리니치 천문대에 있는 시계는 세계 표준시계입니다. 그 시계에 모든 시간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 시계에 맞추어지지 아니하면 전부 틀리게 됩니다. 그 시계는 또한 태양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시간에도 표준이 있는 법입니다. 표준에 맞지 아니하는 시계는 틀린 시계입니다.
오늘 날씨가 춥습니까? 덥습니까? 제가 춥다고 하면 오늘이 추운 날씨입니까? 여러분이 건강하기 때문에 오늘 춥지 않다고 하면 안 추운 것입니까? 춥다 덥다 하는 표준을 어디에 두겠습니까? 나에게 둘 수 있습니까? 온도계가 기온의 표준입니다. 온도계로 기온을 측정하여 지금이 몇 도이기 때문에 덥다 혹은 춥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온도에도 표준이 있어야 합니다.
길다 짧다 하는 것은 자로 재보면 알 수 있습니다. 무겁다 가벼운 것은 저울에 달아보면 됩니다. 많다 적다 하는 것은 부피로 재어보면 됩니다. 이것이 다 표준입니다. 이것을 도량형이라고 합니다. 표준이 없으면 우리가 함께 어울려 사는 사회생활에 굉장히 혼란이 일어납니다. 혼란이 계속되면 무질서해지고 무질서가 계속되면 파멸이 됩니다. 그러나 표준이 있을 때 사회는 질서가 지켜지고 분쟁이 없고 평화로운 사회가 됩니다.
-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믿음에도 표준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 스스로가 잘 믿는다 생각이 되었기에 잘 믿는 것입니까? 남이 나에게 잘 믿는다고 해서 내가 잘 믿는 것입니까? 내가 표준일 수 없고 네가 표준일 수 없습니다. 우리의 표준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본문 13절을 보면 바울사도가 골로새 교인들에게 하는 말이 ‘너희들은 한번 사이가 나빠지면 왜 그렇게 용서를 못하느냐?’라는 뜻으로 본문을 제시합니다. 혹시 용서했다고 하는 경우 ‘좋아 용서했으니 없는 것으로 하자’라고 말은 하면서도 10년 후에 나에게 또 손해를 끼치게 되면 10년 전에도 그랬는데 오늘 또 그런다고 합니다. 이것이 10년 전의 일을 용서했던 것입니까? 용서하지 않은 것입니다. 용서를 못했으니까 또 들춰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십 년 전에 ‘죽을죄로 잘못했습니다’하고 회개하여 용서를 받았다고 합시다. 예수님께서 십 년이 지나서 또 죄를 지으면 ‘십 년 전에도 그랬는데 왜 또 이래’라고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용서하되 없었던 것처럼 용서하고 기억도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우리의 생활과 신앙의 표준은 내 기분이 아닙니다. 나의 이해타산에 맞느냐 안 맞느냐가 아닙니다. 분명히 “주께서 용서하신 것 같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과 생활의 표준은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장로교의 열두 신조가 있습니다. 신조라고 하는 것은 ‘믿습니다’하는 조항입니다. 그 신조 중에 첫째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유일무일한 법칙입니다’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성경은 우리의 생활과 우리의 믿음의 표준이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생활이 성경에서 벗어나면 잘못 된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아무리 열심을 내는 것 같아도 성경에 맞지 아니하면 그것은 잘못 된 신앙입니다.
잘못된 생활은 무가치하고 그 신앙은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의 생활과 신앙은 성경을 표준으로 해서 성경에 꼭 맞는 생활이요, 믿음이어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표준이 되는 성경은 바로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즉 오실 메시아를 시작으로 예수님의 죽음, 예수님의 부활, 예수님의 승천, 예수님의 재림 예수님의 천국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이 살다보면 별일이 다 생깁니다. 그럴 때 우리는 고민을 하고 힘들어합니다. 그럴 때 우리 신앙의 표준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예수님이 어떻게 살았는가’라고 생각하고 살아가면 해답이 됩니다. 즉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어떻게 살았는가를 생각하면서 우리의 생활도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3.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신앙입니다.(15-17) 감사하는 생활이 믿음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즉 믿음은 감사하는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의 별명을 감사라고 해도 좋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도둑으로 태어나는 사람도 있습니까? 어머니 태에서 출생할 때에는 누구나 똑같습니다. 그런데 도둑들과 어울리거나 작은 것들을 별거 아닌 것으로 생각하여 계속해서 훔치면 도둑이 되어 버립니다.
거짓말쟁이는 왜 거짓말쟁이가 됩니까? 거짓말을 한번 두번 자꾸 하다 보니 그 거짓말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또 거짓말을 하게 되고 그 거짓말을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또 다른 거짓말을 반복해야 합니다. 거짓말이 거짓말을 낳는 것입니다. 그렇게 계속 거짓말을 하므로 거짓말쟁이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자꾸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하면서 말로도 감사하고 마음으로도 감사하고 실제적이요, 구체적으로 감사하다보면 감사하는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본래는 도둑이 아니었는데 자꾸 도둑질하면 도둑이 되듯이 불평만 하던 사람도 계속 감사하면 감사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감기 때문에 어머니가 열이 나고 힘이 빠져서 누워있고 싶습니다. 그래도 아들 딸들에게 따뜻한 밥 한 그릇을 먹이고 싶어서 어지러워 쓰러질 것 같지만 정성을 다해 밥상을 차려 가져다줍니다. 그러면 자녀들은 당연히 어머니는 나에게 밥을 지어 받쳐야 되는 사람이요, 나는 당연히 받아야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게 되면 절대 부모에게 감사할 줄을 모릅니다. 그래서 평생 감사하지 못하고 죽습니다. 부모에 대한 고마움을 모르고 죽습니다.
‘어머니가 저렇게 불편 하지만 나를 위해서 저렇게 애를 써서 따끈하게 그리고 아주 정성을 들여 밥상을 차려주시는구나, 어머니 감사합니다’라고 하게 되면 어머니는 감기가 다 낳은 것처럼 기쁠 겁니다. 말로만 하는 감사일지라도 어머니는 그렇게 좋아합니다. 여러분의 부모님께 감사할 줄 알고 그 다음에는 자기 언니에게도 감사할 줄 알고 동생이 물 한잔을 가져다 줄 때에도 동생에게 감사하게 되면 감사하는 사람이 됩니다. 부모가 감사할 때 자녀들도 감사하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 생활은 이렇게 항상 감사로 나타나야 합니다. 남편 되는 분들도 아내가 아침이나 저녁 차려다 주면 다 먹고 나서 ‘감사합니다’라고 한마디 해보십시오. ‘나야 돈을 벌어 오는데 아내는 집에서 하는 일이 있나 밥상이나 차려 주는 것이 무슨 큰 일인가?’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아내가 집에서 하는 일과 여러분의 일터의 생활을 하루만 바꾸어 보시겠습니까? 아내가 밥상을 차려 줄 때 ‘감사합니다’라고 한마디 하게 되면 아내가 기뻐할 겁니다. 그렇게 되면 그 집안이 감사하는 집안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이처럼 감사로 꽃을 피우고 감사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본문 15-17절을 봅시다. 첫째는 ‘감사하는 사람이 되고’, 둘째는 ‘마음으로 감사하고’, 셋째는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아내에게만 감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내가 집안 살림을 잘 해주면 아내에게 감사하기 전에 ‘하나님 이 여자를 제 아내로 짝지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라는 뜻으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아들딸이 속을 썩이지 않고 잘 커주면 ‘아들딸들아 참 고맙다, 너 성적을 잘 받아 왔구나 고맙다’하기 전에 ‘하나님 이런 아들 우리 가정에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딸 우리 가정에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하나님께 먼저 감사하라는 뜻입니다. --한 해동안 사업을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이렇게 매사에 헤아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하나 하나 세어가면서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결과적으로 감사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감사를 하되 마음에서 우러나는 감사를 해야 하는 것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이처럼 우리의 믿음은 감사하는 자로, 감사하는 생활로 꽃 피우고 열매 맺어야 하겠습니다.
나가는 말) 우리의 생활은 반드시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을 떠난 생활은 불신자의 생활과 똑같습니다. 우리의 생활이 믿음으로 나타날 때 역사가 일어납니다. 항상 이웃에게 덕을 세우는 삶을 사십시오. 교회에서나 직장에서나 동네에서나 누구에게나 유익을 주고 덕을 세우는 생활로 믿음이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예의을 갖추는 신앙. 나아가 말씀이신 예수님을 표준으로 삼는 생활입니다. 말씀이 내 삶의 표준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하며 사십시오. 끝으로 범사에 감사하며 사십시오. 한 해의 마지막 달입니다. 사랑하는 가족(부모, 남편,아내, 자녀들)을 보고 감사하십시오. 사랑하는 성도들을 보며 감사하십시오. 직장에서도, 삶의 현장에서도 이웃에게 고맙고 감사하다고 표현하십시오. 그러면 물댄 동산 같은 축복의 열매가 저와 여러분의 가정에 주렁주렁 맺히게 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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