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주전장'은 위안부 영화가 아니다
[미래정치칼럼] 위안부의 세가지 주전장 : 인종차별, 성차별 그리고 파시즘
영화 <주전장>(감독 미키 데자키)은 문제작이다.
* 이 기사에는 영화의 일부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기사 수정 : 30일 오전 11시 22분]
영화 속에는 위안부를 '매춘부'로 묘사하거나 심지어 '포르노'라는 표현까지 등장한다. 그리고 위안부 소녀상에 '못생겼으니까'라며 봉투를 덮어 씌우고, 소녀상 캠페인의 배후에는 '중국 자본'의 검은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고도 한다. 어디 이 뿐인가? 위안부는 '완전한 날조'에 불과하고 한국인은 '거짓말 민족'이라고 폄훼하기도 한다. 영화는 '한국은 버릇없이 시끄럽게 구는 꼬마라서 귀여워!'라며 히히덕 거리기까지 한다. 이쯤되면 궁금하다. 왜 한국이 아니라 일본에서 개봉 금지 소송 논란이 일었을까? 그 '문제작'을 보고야 말았다.
교사 출신 감독 미키 데자끼는 일본계 미국인이다. 그는 일본을 '너희 나라'라고 칭한다. 교사로 근무하던 시절 일본 사회를 향한 비판적인 영상을 제작하기도 했던 그는 끊임없이 넷우익의 공격과 협박으로부터 시달린다. 그러던 중 한 사람을 알게 된다.
1991년 일본 사회에 위안부 문제를 최초로 보도한 우에무라 다카시 전 아사히 신문 기자와 그의 딸을 향해 '자살할 때까지 몰아넣자'고 협박하는 인터넷 여론이 그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도대체 왜 일본 우익은 위안부 문제에 대해 그토록 격렬히 반응하는 것일까? 그리고 제작기간 3년, 한국과 일본, 미국을 수시로 오고가며 그는 방대한 양의 자료와 거리낌없는 인터뷰를 통해 '위안부'라는 첨예한 역사 전쟁의 한복판으로 뛰어든다. 그리하여 영화는 이름을 얻는다. 주전장(主戰場)이다.
주전장은 런닝타임 내내 '위안부 진실'의 미로를 찾아가며 한편으로는 극단적인 논쟁의 평행선을 달린다. 브레이크 없이 달리는 기차처럼 '말 한마디' 삐끗하면 탈선과 전복으로 인한 대형사고가 날 것 같은 팽팽한 말의 긴장감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주전장은 위안부 역사 전쟁을 다루었으되, 전쟁터 그 자체보다는 역사의 배후와 척후를 살피는 데 능하다. 또한 전쟁 피해자의 목소리를 담았으되, 감정에 함몰되지 않고 말과 논리를 치밀하게 추적한다. 또한 역사 전쟁의 복판에서도 감독의 앵글은 흔들림이 없다. 주전장의 시공간에서는 위안부를 둘러싼 거짓과 진실은 식별되기 어려울 정도로 뒤엉켜 흐리고, 자칫 한순간 눈을 떼면 '적과 우리'를 혼돈하는 난망함을 경험할 수도 있다. 그래서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다.
자민당이 아닌 '일본회의'가 장악한 아베 내각의 실체
미키 데자키 감독이 진짜 말하려고 하는 것은 위안부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 김학순 할머님의 떨리는 목소리와 눈물이 영화가 끝나고도 오랫동안 마음에 머물렀다. 하지만 그 슬픔에 젖어있기에는 영화 내내 불편했고, 한편으로는 두려움까지 느껴졌던 '아베 정권의 검은 실체'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최근 전개되는 일본의 수출규제 보복의 뿌리가 어디에 닿아있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었던 실마리를 찾은 듯하였다.
영화는 충격적인 팩트 하나를 툭 하고 던진다. 바로 '일본회의'다. 맞다. 최근 조국 전 민정수석이 손에 쥐었던 <일본회의의 정체>라는 책 속에 등장하는 그 신우익단체이다. 아베 내각의 장관급 관료 20명 중 16명이 '일본회의(日本會議)' 소속이다. 1997년에 결성한 일본회의에는 놀랍게도 아베 내각 각료의 80%, 국회의원의 40% 가량이 회원으로 속해 있다. '일본회의를 지원하는 의원연맹'이 그 선봉대 격이다.
아베 총리는 창립 멤버이자 고문이다. 2명의 고문 중 다른 한 명은 현재의 '아소 다로' 부총리다. 그는 2003년 '창씨개명은 조선인이 요구해서 시작된 것'이라는 발언으로 유명한 극우 정치인의 대표격이다. 일본 정치의 1, 2인자를 일본회의가 장기 점유한 상황이다.
일본회의의 3가지 사명 '천황, 교육, 국방'
일본회의는 3가지에 집중한다. 바로 '천황, 교육, 국방'이다. 이것이 현 일본의 정치, 그리고 아베 내각 국정 운영의 핵심 키워드이다.
천황제는 '완전무결한 일본의 통치권'을 상징하며, 그 현대적 기원은 1868년 메이지유신을 뿌리로 한다. 서구열강의 산업혁명과 제국주의를 본격적으로 모방한 '일본식 부국강병의 실현'이 지상 목표였다. 국가 권력의 강력한 중앙집권화를 위해 메이지 천황은 신권을 부여받은 완전 무결한 존재로 추앙되었다.
<주전장>에 등장하는 스키타 미오 자민당 의원은 위안부 강제 징집과 난징 대학살을 철저히 부정한다. 완벽한 거짓말로 믿는다. 그 근거는 무엇일까? '일본은 결코 거짓말을 하는 나라가 아닙니다'라고 확신에 차서 말하는 미오 의원의 주장을 통해 그 실체가 드러난다. 국가와 통치자의 무오류성을 신봉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나치즘과 파시즘의 무한 엔진이었음을 기억한다.
일본 사회에서 '역사 교과서'는 금기와 개혁의 또 다른 주전장이었다. 그 시작은 '위안부의 강제동원과 정부 개입'을 처음으로 인정한 1993년 고노 관방장관 담화, 그리고 '종전 50년을 맞아 식민지 지배와 전쟁범죄에 대한 공식 사과'로 인정되는 1995년 무라야마 총리의 담화였다. 이 일을 계기로 1997년경부터 일본의 역사 교과서에 위안부에 관한 내용이 게재되기 시작한다. 놀라운 변화였다. 하지만 같은 해 출범한 일본회의 입장에서는 이것은 중대한 위기이자 도전이었다. 위안부가 실린 '잘못된 역사 교과서 수정'은 일본회의의 첫 사명인 셈이었다.
그 역사적, 사상적 동력이 '야스쿠니 역사관'임을 <주전장>은 간파한다. 즉 일본의 태평양 전쟁은 침략전쟁이 아니라 아시아 해방 전쟁이라는 무오류의 역사관이다. 결국 아베 정권의 집요한 정치 공세와 우익단체를 동원한 여론몰이의 결과로 2012년 경에는 일본의 거의 모든 교과서에서 위안부 내용은 자취를 감춘다. 위안부 역사는 '일본 제국은 항상 옳다'는 야스쿠니 역사관에 따르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거짓 역사에 다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국방의 목표는 곧 개헌으로 통한다. 아베 총리가 숙명적인 정치 목표를 개헌으로 천명하는 이유, 그리고 선거가 있을 때마다 개헌 이슈를 전면에 배치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세계 2~3위의 경제대국, 그리고 세계 6~7위의 군사비 대국인 일본이 갖지 못한 것이 바로 '정상 군대'이다.
자위대는 교전권이 없다. 평화헌법에 따라 전쟁을 수행할 수 없다. '아시아의 해방'을 위해 태평양 전쟁을 감행했다는 일본 극우세력의 입장에서는 용납되지 않는 이유다. 그리고 1960년대 들어 미국의 이익이 일본 우익의 욕망과 정확히 맞아 떨어지면서 군국주의 일본의 야망은 조금씩 싹을 키워왔고, 아베 정권과 일본회의에 의해 '개헌'을 명분으로 본격화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시작은 어디였을까? 평화헌법 개정의 씨앗은 1957년 기시 노부스케 총리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A급 전범이었으나 미일안보동맹의 카드로 면죄부를 받고, 일본 자민당 일당체제의 산파 역할을 자임했다. 그로부터 시작된 군국주의와 개헌의 꿈은 총리 임명 직전 급사했던 아들 아베 신타로, 그리고 외손자인 아베 신조 총리로 피를 타고 전승되었다.
약관의 나이로 메이지유신의 본향이자 우익 정치세력의 심장인 야마구치현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을 때 그의 일성은 '반드시 개헌을 성사시키겠다'는 포부였다. 그의 꿈이 메이지유신과 대동아공영권으로 상징되는 '아름다운 일본의 찬란한 부흥', 즉 '욱일(旭日)' 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위안부 문제는 인종차별, 성차별, 파시즘과의 전쟁
영화 <주전장>의 시선은 매우 이성적이며 합리적이다. 그가 위안부 피해자들의 나라인 한국인도 아니고, 진실과 거짓을 혼용하는 전쟁 가해자 일본인도 아닌, 미국 시민으로서의 3자적 입장에서 이 문제를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그의 영상은 소녀상 바로 앞에서 '위안부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며 한국 여행 중에 천진난만하게 웃는 일본 청소년에게 있어서나, 위안부 집회에서 '일본 정부는 진실을 밝히라'고 목청을 높이는 한국 청소년에게 있어서나 적절하고 거리를 유지한다. 시종일관 감독은 냉정하리만큼 차분하게 일본의 우익 인사들에게도 카메라를 고정하고, 깊숙이 그들의 사유체계를 클로즈업 한다.
하지만 그의 카메라도 런닝타임 2시간에 이르러서는 흔들리고 고뇌하는 흔적이 역력하다. 미국 의회에서 16살의 기억을 더듬으며 위안부 당시의 피해상을 증언하던 이용수 할머니는 힘주어 말한다.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 법'이라고.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가능한 것일까? 하지만 또 다른 피해자 고 김학순 할머니의 눈에서는 끝끝내 눈물이 흐른다. 그래서였을까? 감독은 길게는 3년, 짧게는 2시간 런닝타임 내내 참고 참았던 말을 엔딩에서야 겨우 꺼낸다.
"일본군 위안부를 기억하는 것은 그들을 추모하는 것이며 그것은 언젠가 그분들의 정의가 구현되는 희망을 뜻한다. 또한 인종차별, 성차별, 파시즘과 맞서 싸우는 것을 뜻한다."
미키 데자키 감독은 하나의 전쟁을 시작하였지만 전선은 세 곳이다. 위안부 문제는 인종차별, 성차별, 파시즘의 현대적 광기의 최전선이다. 그것은 각기 다른 이름의 전장이지만, 본질적으로는 하나의 전장이기도 하다. 그리고 7월 1일, 일본회의의 전폭적인 지원사격을 받는 아베 내각의 '경제 보복 조치' 선전포고와 함께 전쟁은 확전되고 있으며 우리가 살아가는 삶과 일터까지 침투하고 있다.
만약 총성없이 벌어지는 이 야만의 전쟁을 방관하거나 외면한다면 뼈아픈 역사는 다시 반복될 것이다. 이것은 인류 양심과 문명의 보루이며, 진실과 정의의 싸움이다. 우리가 미키 데자키의 외로운 싸움에 어깨동무해야 할 이유이자, 일본에서 상영 금지 논란이 일었던 <주전장>의 상영관 수를 늘려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첫댓글 개봉한 지 이제는 조금 된 영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