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모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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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립병원 뒤 등산로를 따라 총총히 피어있는 홍자색 꽃이 오늘따라 참 곱기도 하다.
꽃 주머니의 꽃잎 하나하나가 아침이슬을 한입 머금고 쏙 내밀고 있는 자태가
마치 연지를 잔뜩 바른 여인의 입술 같다.
그래서인지 많은 벌들이 분주하게 꽃 주위를 맴돌면서 꿀을 찾고 있다.
다른 꽃보다 꿀을 많이 담고 있나보다.
6월 초여름이 되어 밥맛이 없어지는 모습이 보이면 여지없이 등교하기 전
바로 이 시간쯤 익모초즙을 마셔야 했다.
싫다고 고집부릴 땐 하교 후에 그리해야 했다.
보릿고개를 넘던 초등학교 시절이 아지랑이처럼 아련히 떠올랐다.
"야야, 육모초가 아무리 쓰다 그래도 피난살이 만 할라?"
무릎을 베고 누워있던 어린 손주에게 나지막한 어조로 말을 끄내셨다.
그리고는 잠시 상념에 잠긴 듯 고개를 꽂꽂이 세우고
양손으로는 손주의 배를 번갈아가며 문지르고 계셨다.
"배가 덜 아프제? 할매 손이 약손이데이. 육모초즙을 마셨으니 덜 할끼다."
밥맛없고 가스가 찬 배를 움켜쥐고 있던 손주에게
어른도 써서 쉽게 먹질 못하는 익모초 즙을 어린이에게 강제로 마시게 한 것을 미안하게 생각하시는 듯했다.
쓴맛을 없애라고 하이얀 눈깔사탕 한움큼에다 꼬깃하게 접힌 돈을 용돈으로 얹어 주셨다.
"할매가 전에는 싫었는데 오늘부터 마음을 바꿀란다."
평소 삼촌한테 신경 쓰고 맞손주에게 조차 구두쇠였던 할머니가 그날따라 인자해 보였다.
벌떡 일어나서 할머니의 볼을 양손으로 쓰다듬어 보았다.
"할매, 실은 오늘 오전 공부 마치고 일찍 집에 왔다.
책보를 바깥마루에 던지고는 빙수골에 가서 미역 감는데 세 번씩이나 부르는 할매 소리 들었제.
요리조리 피해서 놀러갔다가 늦게 들어와서 구석방에 숨어있었다. 잘못했다."
손주의 말에 댓구도 하지 않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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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어머니가 아들이 야단맞을까봐 숨어 있는걸 아시고
불같은 할아버지 성품을 누그러뜨리려고 중간에서 애쓰고 계신 듯 했었다.
멍석 깔린 마당으로 끌려나가다싶이 했었는데 할아버지조차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귀가시간과 식사시간 어기는 것, 세 번씩이나 불렀는데도 답이 없었다는 건 전에 같으면 회초리 감이었다.
하지만 침묵이 흐르는 건 용서하신다는 뜻이라고 여겼다.
"나, 앞으로 할매한테 잘 할끼다." 대견스러운 말에 손주를 품에 꼭 껴안으시고는 얘기를 이어나가셨다.
"전쟁이 나도 성곡이란 데는 3면이 산이라서 오히려 피난처 같다고 생각하고 궂이 피난 갈 생각을 다들 안했지.
그런데 인민군이 들이 닥친거야. 급한 나머지 식구들이 각기 큰 독안에 들어가 숨었지.
해는 내리 찌는데 한참을 있자니 초여름의 고온에 독안이 뜨거워 혼났지.
혹시라도 인기척을 낼까봐 조마조마 했단다.
위기를 넘기는가 싶었는데 또 한 무리가 온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농산물을 저장하는 지하 굴에 피신했었제.
그리고는 안되겠다 싶어 짐을 쌌지.
영주에서 부산까지 가기로 마음먹고 대구로 내려가는 동안
이미 다부동인가 하는 인근지역을 통과하는데 좌우 산 너머에 포와 총소리가 들려와 가슴을 조렸단다.
내려가는 며칠 동안에 식구들이 더위를 먹고 지쳐가는 거야.
니 할배가 논두렁에 가서 육모초를 뜯어왔제. 피난길에 도구들이 어디 있나?
사발속에 납작한 돌을 준비하고 나무토막으로 찧어서 물을 많이 부어 마셨단다.
허기라도 면하려고. 헛간을 빌려 여름을 보내고 무사히 집으로 올라왔제."
"그럼 육모초가 살린거네요."
오후내내 요리조리 피해 다닌 것이 여간 피로하지 않았는데도 호기심에 맞장구쳤다.
"그게 좋다카는게 바로 그 때문이데이."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구황식물이란 말이 있단다. 구황약물도 매 같은 뜻이긴 하다만 가뭄과 전쟁,
천재지변 같은 상황일 때 곡식은 없고 해서 먹을 수 있는 산야초를 먹을거리나 약초로 사용하는 거란다.
육모초도 그중의 하나이지."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잘 만나서 아는 것이 많은 것 같았다.
"그러면 내가 더위 먹은 거야?" 궁금해서 물었다.
"그렇지. 너 요즈음 책도 잘 안 읽고 여름해가 쬐는 한나절에 밖에 나가 노는 데 정신없잖나?
땀띠도 나고 밥맛이 없고 배도 더부룩하고 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이 찔찔나고 맥이 없잖아?
그게 더위 먹은 증상이란다."
"할매 족집게다. 맞아, 내 아픈거 다 알아 맞추네!" 어린 마음에 할머니가 신기해 보였다.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두 눈을 할머니 입에다 고정시켰다.
"할매 얘기 더 해줘." 손주는 재촉했다. 할머니는 한숨을 크게 한번 쉬고는 말을 이어갔다.
“야야, 니 엄마가 참 고생이 많단다. 전쟁통에 서둘러 결혼해 없는 집안에서 가문은 넓지,
농사와 손님대접 하는 일 많지, 아이들도 많이 낳아줘서 고맙단다.
니도 알지만 난 조금만 꿈쩍거려도 아프니까 니 엄마를 많이 부려먹었제.
그리고 내가 잘못한게 많고... 니 엄마가 윗밭에 한 골에다
육모초 씨를 작년 봄에 부어서 지금 잘 자라고 있단다.
니가 마신 즙도 니 엄마가 정성스럽게 만들었제.”
할머니의 눈망울에 눈물이 어려 어스름한 초승달 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더 이상 물을 수가 없었다.
"말린 육모초는 말이다. 여인네 아픈데 사용한단다."
마치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병주고 약주는 듯한 얘기를 하시고는 피곤하시다고 자리를 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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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모초는 방언이고 원래 생약명은 '익모초'이다. 더할 익(益), 어미 모(母), 풀 초(草),
즉 ‘어미를 이롭게 하는 풀’이란 뜻이다.
꿀풀(순형)과의 두해살이풀로 1~1.5mm 정도로 자란다.
대마나 쑥을 닮고 세 갈래로 갈라진 긴 포크모양의 잎이 사용된다.
줄기가 모나며 자색 꽃이 피고 허브 같은 특이한 향이 난다.
생즙은 더위질환에 좋고 건조한 것은 부인과 질환의 비정상적 출혈, 생리통, 생리불순과
말초 혈행장애로 시리고 저린 증상에 효과가 있다.
그 외에도 이뇨작용, 안질, 가려움증 등에 쓰인다.
생즙은 1회 10~15g정도의 잎이 필요하고 1일 1~2잔이고 과량은 해롭다.
비위가 약하거나 임신부는 마시지 말 것이며
요구르트나 사과나 생강을 같이 넣어 즙을 만들면 마시기가 편하다.
정상을 돌아 내려오는데 때마침 삼림욕장에서 명상을 하고 있는 환우들이 보인다.
그들은 말기암 환우들로 자연치유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해 멀리서 입원한 분들이다.
올바른 생활습관을 통해 잘못된 고정관념을 깨고 감성테라피로 행복감을 극대화하는 훈련을 하고 있다.
제철음식, 제철약초가 치유에 효과가 크다는 연구물을 근거로 본다면
자연치유에 하나의 재료가 되는 익모초 또한 여기에 해당된다.
오죽하면 힘든 인생살이를 익모초에 비유했을까?
하지만 익모초도 꽃이 핀다.여느꽃보다 꿀이 많은 꽃주머니가 달린다.
대신 꽃이 피면 약효가 떨어진다.약이 되려면 꽃피기전 6월에 채취하여야 한다.
인생도 전성기의 꽃을 피우기전 역경의 과정이 값있다 했던가?.
아무튼
쓴맛에 고개를 젓지만 씹으면 씹을수록 속맛이 꿀처럼 달콤한 익모초가 시사하는 바가 있다.
‘고생 끝에 즐거움이 온다.’는 꽃말처럼 말이다. 절망의 피난살이에서도
팍팍한 세상살이에서도 작은 희망의 씨알처럼 전해지는 아침이다.
찌든 시집살이 쓴맛만 실컷 마시고 훌쩍 떠나가 버리신 어머니에게
그 꽃을 죄다 따다가 꿀을 짜서 바치고 싶은 그리움이 아침햇살 속에서 피어오른다.
첫댓글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이 익모초로 피어난 것 같습니다.
어미에게 이롭게 하는 풀, 익모초 사랑이 끝없이 이어지겠지요.
곱고 애틋한 글 잘 읽었습니다. 범선.
rosa님,곱고 애틋 한 글로 봐주시니 감사합니다.힘이 됩니다.힘을 주시는 rosa님을 위해 fighting~~~~
가끔은 불공평하신 하나님! 이라고 생각할때가 있습니다.
가진자는 더 많이 갖고 아무것도 가진것이 없는 사람이 많은데 박사님께서는
여러가지로 축복을 받은신것 같아 부러움보다 가진것에 대한 질투가 납니다.
하지만 박사님의 글로 인해 마음의 위로를 받고 살아온 날에 대해 뒤를 돌아볼 수 있어서
앞으로 살아갈 날에 대해 힘을 얻곤 합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어려움 속에서도 익모초와 같은
사람으로 다듬어질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아직 읽지 못했다는 저의 말에 핸드폰으로 읽어보라고 건네주신 그표정에서 박사님의 자랑스럼고
뿌듯해 하시는 마음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무더운 여름 아주 많이 건강하셔서 좋은 글 많이 많이 써 주세요...
에스더님,무슨 말로 위로가 되겠습니까.익모초도 원래는 잡초였겠죠. 때가 되고 경험이 풍부해지면서 먹거리로 약초로 점차 이용되어 왔겠죠.하나님은 공평하시답니다.
어린시절 양약으로는 "원기소" 한약으로는 우리 어머니가 늘 말씀하시던 "육모초",,, 박사님의 글을 읽으며 진분홍 익모초 꽃이 눈 앞에 아른거립니다 사람들에게 이로운 약을 만들려고 나름 수고 하였을 산 모퉁이 익모초 꽃 길을 걷고 싶습니다
그리고 "고마워" 한 마디 하고 싶네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