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풍부(西風賦)
-김춘수
너도 아니고 그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니라는데… 꽃인 듯 눈물인 듯 어쩌면 이야기인 듯 누가 그런 얼굴을 하고,
간다 지나간다. 환한 햇빛 속을 손을 흔들며…
아무 것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니라는데, 온통 풀냄새를 널어놓고 복사꽃을 울려놓고 복사꽃을 울려만 놓고,
환한 햇빛 속을 꽃인 듯 눈물인 듯 어쩌면 이야기인 듯 누가 그런 얼굴을 하고…
<단상(斷想)>
아무 것도 아니어서 손에 쥘 수도 움켜잡아 내 것으로 만들 수도 없는, 꽃인 듯 환한 소식인가 하면 눈물 같은 회한(悔恨)인 것도 같고, 누군가 그냥 들려주는 이야기 같은… 그런데 너무 해사해서 그만, 꿈 같기도, 환각 같기도 한, 하지만 후각을 지르는 풀냄새는, 또 활짝 핀 복사꽃을 보면 그 화사함은 우리를 현혹시킨다. 한 순간 지나가는 바람인가. 이 모든 정경(情景)을 한 순간 풀어놓고 사라지는 바람의 노래인가. 흔들리는 내 마음.
그 바람에 홀려서 지금까지 걸어온 삶. 그 바람은 손에 잡힐 듯 잡힐 듯, 꽃 같기도, 눈물 같기도, 지나간 옛 이야기인 듯도 싶게 내 마음 속에서 여전히 불고 있다. 어느덧 난 바람이 되어 있었는 지도 모를 일.
이제 그 바람을 멈추어야 한다. 그 바람을 비록 손에 잡지도 내 속에 가두어 놓지는 못했지만 바람의 비밀을 알아버렸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