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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석가 - 다카하시 신지 -
제2 장 5인의 아라한.
5. 광명에의 개안(開眼)
아포로키티 슈바라는 관자재력(觀自在力)이라는 뜻이다.
자기 자신 이외, 타인으로서는 절대로 모르는 마음의 비밀,
혼자 생각하고 있는 것이,
이 관자재의 능력 앞에서는,
일절 감추는 것이 불가능하다.
자신의 마음을 자신이 보고 알고 있는 것과 같다.
아니 그 이상의 미세한 부분까지 일목요연하게 알아버린다.
관자재력은,
인간의 표면의식(表面意識)과 잠재의식(潛在意識)이 서로 통하여 생기지만,
그것뿐만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영혼의 전생윤회의 과정에서 키워지고 축적된 , 내재된 능력이다.
일반적으로, 관자재력을 지닌 사람을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이라고 말하는데,
석가의 관자재력은, 그 정점의 능력을 가리킨다.
그래서 붓다라고 말했다.
붓다란 고대 인도말로 신(神)의 마음과 서로 통한 능력을 뜻한다.
불(佛) 혹은 불타(佛陀)라는 명칭은, 중국으로 건너가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데 관자재력에 대해서, 의문을 품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
그 능력이 전생윤회의 과정에서 축적된 것이라면,
그런 과거세가 없는 자는, 금생에서 아무리 정도(正道)를 실천해도
그 능력이 생기지 않는다고. . . . .
확실히, 붓다의 마음을 깨닫는 것은, 지난(至難)하다,
그러나 관자재보살에 가까운 능력,
즉 아라한(阿羅漢)의 경지에 이르는 것은 누구나 가능한 일이다.
금생의 수행(마음의 상태;마음의 자세)의 정도에 따라,
수호령(守護靈)외에, 지도령(指導靈)이 배후에 있어,
그 사람의 길을 안내해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때로는, 관자재와 같은 능력이 주어진다.
인간의 이 세상에서의 목적은, 정도(正道)의 실천이다.
조화된 자기 자신을 먼저 완성하는 것이다.
관자재력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 점을 혼동해서, 바른 길에서 벗어나면, 목적과 수행을 모르게 되고 만다.
한편, 코스타니야를 비롯한 다섯 명의 무사는,
붓다의 설법을 들으려고 하는 기근(機根)이 갖추어졌다.
인간의 마음을 순식간에 알아 버리는 아포로키티 슈바라에 대해서는,
다섯 모두, 바라문의 경전인 베다나 우파니샤드를 배워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코스타니야만은 마음 어딘가에 고타마의 현재 상황을,
아무리 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해 온 자신의 수행 방법에,
잘못이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타마 님.
고타마 님은 우루벨라의 숲에서 수행자의 규율을 어기고,
비린내 나는 우유를 마셨으며, 수행을 포기하였습니다.
지금은 슈바라의 경지에 이르게 되셨는데,
우리들은 수행자의 계율을 지키고, 이처럼 엄격한 육체 고행을 견디고 있는데도,
어째서 슈바라가 되지 못합니까. “
코스타니야는 붓다가 좌정하고 있는 눈앞에서 머리를 땅에 대고,
이렇게 질문하는 것이었다.
말만은 공손하였지만,
수행에 불공평이 있는듯한 생각이 들어, 그의 마음은, 역시 흔들리고 있었다.
붓다는 코스타니야의 마음속을 꿰뚫어 보고,
나머지 네 사람의 마음을 확실히 확인하고,
“너의 의문은 잘 알고 있다.
나도 지난날엔, 너와 같은 의문을 가진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의문은, 곧 풀릴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 의문을, 지금 당장 알고 싶다면,
나를 고타마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나는 붓다가 된 것이다.... “
하고 조용히 말했다
코스타니야는 위엄 있는 붓다의 말에 무의식 중에.
“예, 예.... 붓다.....”
하고, 지금의 자신의 마음에 들려주는 듯이, 큰 몸을, 조그맣게 움츠리고,
그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나머지 네 사람도, 코스타니야를 따라,
머리를 땅에 대고, 마음속의 모든 것을 내던지는 것이었다.
저녁노을이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느릿느릿 흐르는 강물 위에, 석양빛 구름이 비쳐,
밤이 다가 옮을 알리고 있었다.
잠시 후 붓다는, 느긋한 어조로 말을 계속했다.
“너희들은 한쪽으로 너무 치우친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미가다야의 수목들의 모습을 보아라.
줄기가 굵으면, 그 뿌리도 넓게 퍼져 있을 것.
가지는 줄기에서 나오고, 작은 가지는 큰 가지를 발판으로 하여,
녹색의 잎을 무성하게 한다.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수목도 있다.
만약에, 가지가 줄기보다 굵고,
줄기보다 뿌리가 작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잎이 가지보다 무거우면 가지는 부러지고 만다.
뿌리와 줄기,
줄기와 가지,
가지와 작은 가지가 조화되어 있기 때문에,
거목은 비바람에 시달려도 안정되어 있다.
뿌리를 뻗은 줄기와 가지와 잎은,
중도(中道)의 마음을 가르치고 있다.
사람의 길도 이와 같다.
마음이라는 줄기를 잊고,
법(法)이라는 뿌리를 잃고,
오관(五官)이라는 가지와 잎의 번뇌에
휘둘려지기 때문에,
올바른 인생을 보낼 수가 없다. “
다섯 사람은 고개를 숙인 채
붓다의 말씀을, 온몸을 귀로 해서 듣고 있다.
“나도 어릴 때부터, 중도에서 벗어난 인생을 걸어왔다.
권력을 배경으로, 무엇 하나 불편한 것이 없이, 유복한 생활을 누려왔다.
그러나 욕망이 채워져도,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만족한 생활을 거듭할수록, 의문이 커져 갔다.
성 안의 무사와 성 밖의 가난한 노예의 생활은, 너무나 격차가 심하다.
같은 인간이면서, 어째서 불공평한 계급제도가 있는 것일까.
태양의 빛은, 계급을 초월하여, 두루 비춰주고 있다.
인간세상만이 불공평하다.
왜 그럴까.
나는, 생모의 얼굴을 모른다.
의모에게 키워져, 아무 부자유함없이 키워져도,
생모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부터, 생모에의 그리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웃 나라와의 전쟁, 파괴, 죄없는 자의 죽음. 언제 죽임을 당할지 모르는 불안한 나날,
사계절에 따른 별장들이 있어도,
마음의 평안은 없었다.
인간의 깨달음은, 이러한 환경 속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카필라를 떠난 후의 6년 간은, 의식주(衣食住)에 신경을 쓸 필요도 없었고,
적을 의식할 것도 없는 안온한 생활이었다.
그러나 번뇌를 소멸하겠다는 가혹한 육체 고행은,
오히려 육체에 휘감기는 집착을 만들어내어,
정도를 깨닫는 것이 불가능하였다.
카필라의 가치없는 생활도,
가혹한 육체 고행도,
똑같이 정도를 자각할 수 없는 수행방법인 것을 깨달았다. “
붓다의 목소리의 파동은 다섯 무사의 마음속 깊이 울려,
눈을 감는 자.
고개를 숙이며 끄덕이는 자.
카필라의 무렵과 6년 여의 수행을 회상하는 자.
서로의 모습은 다르지만, 지금까지의 잘못을 깨닫고 있었다.
붓다는 설법을 멈추고, 코스타니야에게, 이렇게 질문했다.
“코스타니야.
그대는 가필라 성에서 기녀들이 타는 가야금 소리를 기억하겠지.
그 가야금 줄을 강하게 조이면 어떻게 되겠는가.
또 약하면 어떤 음색이 되는지 알고 있는가. “
“예, 옛...”
갑작스러운 붓다의 질문에, 코스타니야는 얼른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잠시 생각한 후에 대답했다.
“강하게 조이면 줄이 터집니다.
약하면 조화된 음색이 나지 않습니다. “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좋은지 한번 말해 보아라. “
“예,
가야금 줄은 중간 정도로 조여야만이 고운 소리가 납니다. “
“바로 그 점이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가야금 줄처럼 강하면, 끊어져 버린다.
가혹한 육체 고행은, 오히려 번뇌를 만들어내어, 자칫 잘못하면 육체를 잃게 되고
마음은 집착의 화신이 되고 만다.
육체는 인생을 항해하는 배(舟)에 지나지 않는다.
그 배의 선장인 마음이야말로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짜 자신이라는 것을 잊고,
육체의 오관(五官)에 번롱당하여, 본래의 자신을 잊고 있는 것이다.
둥근 마음의 자기 자신을 잊으면,
원망, 질투, 험담, 노여움, 욕망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진짜 자기 자신을 찾을 수가 없게 된다.
그러나 그것을 알면,
괴로움은 자신의 마음과 행위가 만들고 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태어났기 때문에(生),
병들고(病),
늙고(老),
죽어 간다(死).
인생은 괴로움이라고 말해도 좋다.
인간이 이 괴로움에서 해탈하기 위해서는,
마음과 행위에 있어서, 그 양극의 생활을 버리고,
중도의 길을 닦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마음을 상실한 가혹한 육체 고행에 의해서 번뇌를 소멸하는 것은, 극히 어렵다.
육체주(肉體舟)의 오관은, 객관적으로 모든 현상을 포착하지만,
판단은 자신의 마음이 한다.
보통은 그 판단이, 거의 현상에 사로잡힌다.
이 때문에, 생각하는 것,
행동하는 것이
마음을 잊은 현상으로 되어 새로 만들어져 간다.
자기의 형편에 불리하면, 타인에게 예사로 거짓말을 한다.
겉모양을 꾸미고, 자기 보존(自己保存)으로 날을 지새고 만다.
자신의 마음은 자신에게 충실하다.
자신의 마음에 자신이 거짓말을 할 수 없다.
이 사실은 어떤 사람도 부정할 수 없으며,
인간이 선(善)한, 신(神)의 자식이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태어날 때, 인간은 둥글고 풍부한 마음이었는데,
태어난 환경, 사상, 교육, 습관의 영향을 받아,
둥근 마음에 왜곡을 만들어 내고 만다.
그 결과, 마음의 구름이 광명의 평안을 잃어, 괴로움을 만들어 낸다.
나는 평안의 길을 찾아 출가하여,
그대들과 함께 우루벨라의 숲에서,
혹독한 수행을 6년이나 하였다.
의문과 모색 가운데서 헤매었으나, 해탈할 수 없었다.
소녀가 보시해 준 한 건으로, 그대들은
‘고타마는 타락했다.’
‘수행을 포기했다.’
라고 생각해서, 평소의 불만을 폭발시켜 우루벨라를 떠나고 말았다.
네란자라 강둑을 따라 내려가는 뒷모습을 나는 바라보았으나,
삼 씨나 깨씨만을 먹고 있어서는 육체는 망하고 만다.
육체가 망하고 무슨 수행이 있겠는가.
나는, 그때, 결심한 것이다.
육체를 회복하여, 자신을 되돌아보겠다고.
너희들과 헤어진 나는, 죽음을 각오하고,
보리수나무 밑에서, 36년 여의 자신을 반성했다.
중도(中道)라는 자(尺)를 기준으로.
그 결과는, 생(生)과 사(死)의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고, 생로병사라고 하는 것은, 일체의 괴로움이며,
이 괴로움에서 해탈하려면,
생각과 행동에, 어떤 기준을 갖고 생활을 하면 좋을까
라고 하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
차근차근 설법을 풀어가는 붓다의 말은, 그대로 빛이었다.
신리의 말은 빛으로 충만되어 있다.
듣는 자의 마음이 열려 있으면,
그 빛은, 모래사장에 물이 스며들 듯, 아무 막힘이 없이, 흘러 들어간다.
그들 다섯은, 붓다의 언혼(言魂) 속에서,
6년 여의 잘못을 깨닫고, 신생(新生)의 첫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주위는 벌써 어두워졌다.
이웃 수행자들이 땔감 꺾는소리가 들려온다.
“모두들 얼굴을 들어라.
벌써 어두워졌다.
땔나무를 모아 불을 지피고, 그 주위에서 도를 논하자. “
그들은 겨우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코스타니야, 아사지, 밧데야는, 얼굴이 먼지와 눈물로, 범벅이었다.
어느 얼굴도 감격과 감동에 젖어, 다리의 저림조차 잊고 있었다.
“예, 옛”
“예......”
아사지도 대답을 하고 일어섰다.
그러나 다리가 마비되어 비틀거리고 말았다.
오랫동안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대고 있었기 때문에, 다리가 마비되었던 것이다.
간신히 일어나서,
“땔감을 가져오겠습니다.”
하고 전부터 강변에 모아 두었던 땔나무를, 밧데야와 함께 안고 왔다.
코스타니야는 불씨를 얻으러, 이웃 수행장으로 달려갔다.
오목한 모양으로 된 장소를 골라, 다섯 사람은 원으로 둘러앉아,
붓다의 다음 설법에 온 몸을 집중시켰다.
모닥불은,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었다.
어떤 얼굴도 싱싱했다.
어제까지의 그들은, 미로에 빠진 새끼양처럼,
의혹과 혼미 속에 있었으나, 지금은 달랐다.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모닥불은, 신화(神火)였다.
햇빛에 익은 그들의 얼굴은 붉은 기를 띠고,
평안과 기쁨이, 다섯 사람을 감싸고 있었다.
붓다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고 있다.
그들의 등 뒤에, 후광(後光;오~라)이 비치고,
광명과 함께, 보사타(菩薩)들의 모습이 확실하게 보였다.
“붓다님,
모닥불의 밝음과는 다른,
무언가 황금색의 부드러운 빛이,
붓다님을 감싸고 있는데,
제 눈의 착각일까요.”
뭔가 생각에 잠긴 얼굴의 아사지가,
그 불가사의 한 현상에 대해서 이런 설명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넷의 둘레도 번갈아 비교해 보고 있다.
“아사지,
그대 눈에도 보이는가.
이 광명은, 사람마다 모두 다르다.
정직을 마음과 행동의 기준으로 해서 생활하고,
남에게 자애를 베풀고,
스스로에게 족함을 알며,
일체의 집착을 끊은 조화의 마음으로 있을 때에는,
마음에 구름이 없기 때문에, 광명에 싸이게 된다.
그대들의 둘레에도, 광명이 주어져 있다.
잘 보아라. “
붓다가 이렇게 설명하자.
아사지는, 옆에 앉아 있는 밧데야의 얼굴을 다시 한번,
이번에는 들여다보듯이, 빛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네 사람의 뒷머리에는, 둥근 황금색의 광명이 부드럽게, 빛나고 있었다.
아사지는, 머뭇머뭇하면서, 몇 번이나 자신의 눈을 비비며, 눈을 깜박거렸다.
그러는 동안, 아사지는 깨달았는지,
치밀어 오르는 감동을 누를 길이 없어, 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했다.
사로몬들의 뒤, 좌우에 빛나는 황금색 후광(後光) 속에는
저 세상의 천사들이 마찬가지로 감격하여,
눈시울을 적시고 있는 모습이, 붓다의 심안에, 확실하게 비치는 것이었다.
깨달음을 열었을 때,
몇 번인가 모습을 보였던 바후라망과 비슷한 복장을 한
혈색이 좋은 천사들의, 자비에 넘치는 광경이었다.
붓다는, 문득 지금 이곳은 미가다야와는 다른,
바로 천국이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일어났다.
주위는 어두워졌다.
숲도, 강도, 대지도, 평안한 잠에 빠졌다.
모닥불의 불길만이, 밤의 휴식을 거부하는 듯,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오르고 있다.
“사로몬들이여,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의 법을 듣도록 하라. “
하고 붓다는 말했다.
그들을 둘러보고 말을 계속했다.
“그대들은, 천국에서, 스스로 어버이를 선택해서,
육체와 인연을 맺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
태어난 환경도, 모두 자기 스스로의 의사가 결정했다.
그런데 이 세상의 생활에 길들어 감에 따라서,
어버이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잊고,
보은의 마음을 소홀히 하여 간다.
불평불만의 생활을 보내고 있는 것이 대부분의 인생이다.
그러나, 인생에 있어서의 부(富), 지위(地位), 명예라는 것은,
이 세상에 한정되는 것이며, 영원한 것이 아니다.
그것을 먼저 명심하여라.
태어날 때가 발가숭이면, 죽을 때도 발가숭이다.
그런데 이 진실을 잊고,
가난한 집에 태어나면, 마음까지 가난해지고,
반대로, 유복한 가정에 태어나면, 감사의 마음을 잊고, 타락하여 간다.
어떤 사람은, 저마다의 환경 속에서 욕망의 포로가 되어,
족함을 잊어버리고, 괴로움을 만들어 간다.
가엾다기보다, 인간이란, 얼마나 어리석은 존재인가.
사로몬들이여,
그대들은, 먼저 이러한 사실에, 눈뜨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 괴로움에서 해탈하지 않으면 안 된다.
스스로의 마음을, 스스로가 묶어 버리는, 그 쇠사슬을 푸는 데는,
올바른 마음의 척도를 가지고,
매일의 생활을 보내는 것 이외에는 없는 것이다.
비뚤어진 생각과 행동을 버리는 것이다.
미가다야의 자연을 보아라,
산천초목의 자연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살게 되어 있는 그대로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새들과 짐승들의 생활은, 얼핏 약육강식(弱肉强食)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은, 자신을 살리면서 남을 살리고 있다.
호랑이나 하이에나는, 배가 부르면, 다른 것을 습격하는 짓은 하지 않는다.
초식동물이 불어나면, 초목이 고갈되고 만다.
그렇다고 초식동물이 없으면, 초목은 자라기 힘든다.
그들은, 자연의 섭리에 따라, 자연을 살리고, 스스로도 살아간다.
자연은, 서로 의지해가면서, 전체를 조화시키고 있다.
동물들의 약육강식의 모습을 보고,
인간에게 적용하려고 하면 무리가 생긴다.
그들은, 그러한 모습을 통해서, 전체를 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서로 돕고, 또한 자연을 포함해서,
보다 높은 조화를 목표로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욕망의 와중에 스스로 빠져들어,
경쟁하기 위해 살아가고 만다.
호랑이들끼리 서로 살생하는 것을 보았는가.
신중하게 잘 생각해야 한다.
나의 법은,
대자연의 만생만물이, 서로 관계를 맺고,
전체를 안정시키고 있는 것처럼,
먼저 자기보존(自己保存), 자아아욕의 마음과 행동을 버리고,
'인류는 모두 형제다'라고 하는 심경으로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류사회에 봉사하는 것이다.
괴로움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실천하는 것이다.
괴로움이라고 생각하는 자기자신이 있어서는,
실천할 지 의심스럽다.
그러니 괴로움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자기 자신을 만드는 것이 선결이며,
자기 확립이 중요한 요건이 되어 진다.
이 요건을 충족하는 것은,
여덟 가지의 사물의 도리를, 생활의 기반에 두고, 잣대로 해서,
자기 자신의 마음과 행동을 정리하는 것이다.
바르게 볼 것,
바르게 말할 것,
바르다는 것은, 편협되지 않는 중도를 말한다.
상대방이 말하는 것,
그리고 자기 자신의 보는 방법, 생각에 편견이 있는가, 어떤가,
인간은 자칫하면, 자기중심으로 되어, 남을 상처 입히고,
자신의 마음에도 상처를 입히고 만다.
불리한 일이 있어도, 늘 제3 자의 입장에 서서,
올바른 판단과, 올바른 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바르게 생각할 것,
바르게 염원할 것,
오관을 통해서 우리들 마음속에 생기는 현상,
즉 (마음속에서) 생각나는 것, (머리로) 궁리하는 것에 대해서도,
편협되어서는 안 된다.
생각(=궁리)한다는 것은 사물을 만들어 내는 원동력이며,
창조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마음속에 부조화한 것을 생각하고, 염(念)하여 가면
머지않아 그 부조화를 사람들에게 끼쳐,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거나,
상대방의 불행을 사념하는 일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
언제나 원만한, 중도의 마음을 갖고,
노여움, 비난, 시기, 질투. 원망, 투덜대는 일 없이,
족함을 아는 마음의 상태를 유의한다면,
마음은 광명으로 가득차서, 평안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가능하다.
바르게 일을 할 것,
스스로 선택하여, 주어진 그 직업은, 그대로 천직이며,
그 일을 통해서, 인생을 공부해 간다.
일, 직업은,
인생 경험을 풍부하게 하는 새로운 학습장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직업은, 인간들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의 상호의존의 중요한 장이며,
따라서, 건강하게 일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감사는 보은으로 되어 열매를 맺는다.
농부는 들판에 나가서 정성을 다하고, 수확을 얻음으로써 생계가 유지된다.
보은이란,
남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시하는 것이다.
곤란한 처지의 사람들을 보고, 못 본 체하거나,
자기보존에 빠지는 마음은, 스스로가 괴로움의 씨를 뿌리는 짓이 된다.
일이라 해도, 남에게 해를 입히는 일은 바르다고 말할 수 없다.
올바르게 살 것,
올바른 길로 정진할 것,
올바르게 정(定)에 들 것,
치우침이 없는 인생을 걷고 있는가. 아닌가.
인간으로서의 길을 벗어나고 있지 않은가, 어떤가.
명상이라고 하는 반성을 통해서,
마음의 흐림을 개이게 한 생활이 중요한 것이다.
나는 36년 동안의 인생에서
생각했던 것,
행동했던 것,
하나하나를 반성해서, 마음의 구름을 제거하고,
일체의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능했다.
평안의 경지는, 이렇게 해서 얻어졌다.
그대들도 지금부터, 오늘날까지의 인생체험의 선악(善惡)을 반성하고,
팔정도(八正道)에 거스른 상념 행위가 있었다면,
진심으로 신(神)에게 용서를 빌고,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반성은, 장님의 인생 항로를 수행하는 인간에게 주어져 있는,
신의 위대한 자비이다.
짐승들에게 반성의 능력이 없는 것을 보면 알 일이다. “
붓다의 말은, 콸콸 솟아나는 샘물처럼, 거침없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다섯 명 사로몬의 가슴에, 빛이 되어 스며들어 갔다.
빛의 둥근 테는 확대되어 갔다.
그들 다섯은, 그동안의 수행의 잘못과, 정법의 위대성을 깨닫고 옷깃을 여몄다.
그리고 마음의 평안을 얻는 데는,
스스로가 올바른 마음과 행동을 거듭하는 것 이외에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붓다.
우루벨라에서의 행동을 용서해 주십시오. “
코스타니야는 이렇게 말하고 왈칵 울음을 터트렸다.
완고하게 굳었던 그의 마음에, 붓다의 자비의 광명이 스며들었던 것이다.
코스타니야의 큰 몸체가 앞뒤로 흔들렸다.
그의 통곡은, 초목의 잠을 깨우고, 대지를 뒤흔들었다.
모두가, 붓다의 법(法)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던 것이다.
“코스타니야,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마음이야말로 소중한 것이다.
그 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
붓다는, 이렇게 달래고, 오른손을 들어, 코스타니야에게,
신의 자비의 빛을 주었다.
코스타니야의 참회의 눈물은, 넷의 마음에도 전달되었다.
우루벨라에서의 실수는, 코스타니야 혼자만의 잘못이 아니었다.
네 사람 모두, 그때의 고타마의 행동에 의문을 갖고,
그랬기 때문에, 코스타니야와 행동을 함께 한 것이었다.
만일 다섯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한 잔의 우유가 무엇을 의미하고,
6년의 고행에 종지부를 찍은 고타마의 마음을,
알아채는 것이 가능했다면,
코스타니야의 말에 마음이 움직여지는 것은 없었을 터이다.
그들 역시.
‘고타마는 수행을 포기하였다.’
라고 보았던 것이다.
붓다의 법에 귀를 기울여, 반성해 보면,
코스타니야의 참회는, 그대로 넷의 참회이기도 했다.
아사지도 밧데야도 마하 나만도 그리고 우파가도,
마음 속에서, 우루벨라의 사건을, 깊이 반성하는 것이었다.
코스타니야는, 붓다의 자비로운 말에 대답도 못하고, 몸을 떨고 있었다.
이윽고 진정을 되찾자.
“붓다.
지금의 말씀을 잊지않고,
중도의 마음을 척도 삼아, 수행에 정진하겠습니다.
아무쪼록, 이끌어 주시기 바랍니다. “
라고 말했다.
아사지가 일어섰다.
“붓다.
저는 지금부터 팔정도의 조리에 맞추어,
지금까지의 인생의 일체를 반성하고 오겠습니다. “
그는 그렇게 말하고, 어두운 숲 속으로 사라져 갔다.
아사지가 사라지자, 계속해서,
밧데야, 마하 나만, 우파카도, 명상의 장소를 찾아, 제각기 붓다의 곁을 떠났다.
코스타니야만이, 붓다 곁에 앉아, 붓다와 함께 명상에 들어갔다.
인간 석가. - 다카하시 신지-
(주;
팔정도에 따른 생활이야말로
깨달음으로의 길이라고 가르치시면서,
부처님의 하루 일과는,
정견, 정사, 정어, 정명, 정업, 정진, 정념에 따른 생활을 하시고,
하루 일을 마치실 때는
모든 제자들과 한자리에 모여서,
제일 먼저 반성을 하셨다고 합니다.
' 대중들이여, 내가 오늘 하루 중,
내가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잘못을 한 것을 본 사람은,
부디 나를 위하여 지적하여 주시오,
( 반성은 제 3자의 눈으로 하는 것이 기준이기에.)
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차례차례 순서대로 반성을 하신 후에,
선정에 들었다고 합니다.
* 반성을 하지 않고 명상에 드는 것은,
소독을 하지 않고 수술하는 것과 같은 위험한 일입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과
나 이외의 신을 섬기지 말라... 와.
진리가 너를 자유롭게 하리라... 가
같은 뜻임을 다시 한번 생각하며,
. . . . . . .
또한,
신은 그대를 내치지 않았으니,
울고 불고,...
매달리지 말라..
신은 인간이 선(善)을 좋아하면 선(善)을 하게 하여 주시고,
그 댓가를 받게 하여 주셨다.
인간이 악(惡)을 좋아하면 악(惡)을 하게 하여 주시고,
그 댓가를 받게 하여 주셨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연꽃의 비유로 설명하셨다.
연못속에 있는 좋은 성분을 빨아들이면 향기좋은 연꽃이라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나쁜 성분을 빨아들이면 악취나는 연꽃이라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그 방법을 팔정도라는 것으로 가르치셨다.
부드럽고 사랑에 찬 말을 하면 향기나는 부처가 되는 길이고,
거칠고 난폭한 말을 하면 악취나는 악마가 되는 길이라고, , , ,
이 글을 읽는 그대에게,
삶의 가치와 기쁨을 알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빌며,
또한.
인연이 있음을 생각하나이다.
^_^
우리 모두,
매일의 생활이
1%씩,
올바른 길로 나아가기를....
첨 부 ;
우리가 이 세상에 막 태어났던 애기시절에는
지금과 같은 마음의 결점, 욕심, 등이 전혀 없었다는 점을 인정하면,
2~3세부터 7~8세 사이에 생겼던 욕심같은 것이
지금 현재 내 성격의 씨앗이 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잊어 버린 줄 알고 있었던 어린 시절의 일들이 생각납니다.
욕심의 씨앗이라고 생각되는 일들이.....
뿌리를 뽑아내지 않고 위에 난 풀만 자르는 것은,
끝나지 않는 일거리이지요.
어릴 때부터 반성을 해야하는 이유입니다.
괴로움을 만드는 내 마음의 결점을 가장 쉽게? 가장 빠르게 수정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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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힘드시겠지만 계속해서 인간석가 글을 올려주시면 좋겠습니다. 책을 구할 수가 없어서요...
알겠습니다..저작권문제 때문에,,올리기가 약간 망설여졌습니다만.
시간나는대로 올리도록 하지요..
감사합니다 열심히 읽겠습니다
실은 저희 마을에 글모르시는 할머님들께 아이패드로 읽어드리거나 제가 읽고 이야기를 해드리드거든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