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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明>十四年丁酉,春正月,送征袍皮裘於<龍湖>‧<河城>軍,饋以粱酒.
二月,以<祖天>為「荇南沛者」. <孟>后生<莘>太子.
三月,以<大房良>為「主刑大加」,<良>奏曰“天子之配,不宜失節人.<召>后‧<孟>后,皆是失節之人,不宜正后.宜以<禾>小后為正后.後宮皆用貞女,有夫之女不宜入宮.”上,黙然良久,曰“不可倉卒為之.須待吾子孫為之.”<良>曰“不垂範於前,則後襲其風而已.焉能正乎.”上卒不能用<良>言,<召>后又大怒曰“<良>為其孫女<平>氏欲封皇后,而發此不忠之言也.帝‧后,皆君也.豈有以臣辱后如是者邪.大逆大道,當腰斬以雪憤.”<良>聞之,掛巾而去.<漢素>亦待罪,請廢<平>氏,上不聽. <乙音>進攻<蔚岩>大戦,不利,上命<烏干>将兵徃救之,<于直>指<盖馬城>聲言'與<鄭共>大軍陷城,'<盖馬>軍乃退<蔚岩>.<乙音>收殘兵,退保<南口>.<烏干>‧<鄭共>囲<盖馬>,不克而還. <漢素>病免,<奧犍>「左輔」. <好>太后崩,春秋七十一.上,與<萱>皇后,極盡孝養,故含飴弄孫而結其餘年,葬于<漱帝>陵側.
<동명>14년정유{BCE24}, 춘정월, 정포征袍{정벌군복}와 털가죽옷을
<룡호龍湖{山西雁門關西北金龍池?}>와 <하성河城{大同市周邊?}>에 있는 군대들에게 보내주고,
기장 술을 보내주었다.
2월, <조천祖天>을 「행남패자荇南沛者{河套長城北邊?}」로 삼았다.
<맹孟>후가 <신莘>태자를 낳았다.
3월, <대방량大房良>을 「주형대가主刑大加」로 삼았더니, <대방량>이
“천자의 배필로는 정절을 잃은 이들은 온당치 않습니다. <소>후와 <맹>후는 모두 정절을 잃은
이들이었으니, 정후正后로 삼기엔 마땅치 않았사옵니다. 마땅히 <화禾>소비를 정후로 삼으소서.
후궁들로는 모두 숫처녀들을 쓰셔야 하옵니다. 지아비가 있는 여인들을 입궁시키심은 온당치
않사옵니다.”라고 주청하였다. 상께서는 입을 다무신 채로 한동안을 계시더니만,
“창졸간에 그리하기는 불가하겠소. 모름지기 내 자손들을 그리하게 합시다.”라 이르셨더니,
<대방량>은 “앞에서 모범을 보이지 않으시면, 후세들이 그 풍조를 이어받게 될 것인데,
어찌 능히 바르게 되겠사옵니까?”라 하였다.
상께서는 창졸간이신지라 <대방량>의 말을 따르실 수는 없으셨으며,
<소>후 또한 이를 듣더니 크게 노하여
“<대방량>은 그 외손녀 <평平>씨를 위하여 황후로 봉하려고 이런 불충한 언사를 내뱉은
것입니다. 제와 후들은 모두 역시 임금이거늘, 어찌 신하 된 자가 후를 욕보임이 이렇단 말입니까?
마땅한 도리를 크게 거슬렀으니, 당장 허리를 참하여{腰斬; 목을 참하는 것보다 중죄로 다스려서}
분함을 풀어야 하겠습니다.”라고 아뢰었더니,
<대방량>은 이 소릴 듣자 관모를 벗어서 걸어놓고 떠나가 버렸다.
<한소{大房良의 사위이며 平씨의 아비}> 또한 죄받기를 기다리며 <평>씨를 폐하길 청하였으나,
상께서는 들어주지 않으셨다.
<을음>이 전진하여 <울암蔚岩{왜곡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나, 山西省 東北端 恒山東北100Km경蔚州주변?}>을
공격하여 큰 싸움을 벌였으나 불리하였더니, 상께서 <오간>에게 명하시어 군병을 이끌고 가서
구원하게 하셨고, <우직>이 <개마성盖馬城{山西省馬邑之境?}>을 향하여 소리 질러 외치길
'<정공>의 대군과 함께하여 성을 함락하겠노라.' 하였더니, <개마>의 군대는 <울암>성으로
물러나서 지켰다. 이에 <을음>은 죽거나 상한 군병들을 수습하여 <남구南口{왜곡가능성 있으나,
涿鹿西方東城‧懷安間 南口?}>로 물러나서 지켰으며, <오간>과 <정공>은 <개마>군대를 포위하였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盖馬都城은 荇人國의 소금을 運送하기엔 容易하며 攻略하기는 어려운
桑干河 上流地境의 險峻한 곳에 位置했다?!}.
<한소>가 병으로 물러났고, <오건>이 「좌보左輔」가 되었다.
<호인>태후{芻牟外祖母즉柳花母}가 춘추 일흔하나에 죽었다. 상께서 <훤화>태후{柳花妹}와 함께
극진한 효성으로 봉양하신 까닭에 엿을 물고 손자와 노시다가 여생을 마친 것이었다.
<모수제>의 릉 곁에 장사하였다.
五月,<召>皇后生<棠>公主. 時,<蛙>王病臥,聞<好>太后丧而聖母慟甚,故添病甚危
.<帶素>以其嗣,喜其當立而洋洋,使其妻<觧花>入侍聖母而守夜看劑.
<素>素有慕聖之行,至是尤甚,至於柬間逼之,聖母以是疾作,<蛙>王少差云.
六月,上,遣<秦章>於<柵城>侍聖母疾,又遺黃金於<類利>‧<都祖>‧<都孫>‧<樟花>等各百斤.
5월, <소>황후가 <당棠>공주를 낳았다. 이 시절 <금와>왕은 병이 들어 누워있다가
<호인>태후가 죽어서 성모께서 심히 애통해 한다는 말을 들은 까닭에 병이 더욱 심해져서
위급하였다. <대소>는 자신이 후사後嗣인지라, 응당 보위에 오를 것임에 기뻐하며 양양하
여져서, 자신의 처 <해화觧花>로 하여금 성모를 곁에서 보살피며 약을 살피게 하였다.
<대소>는 평소 성모를 흠모하는 행실이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더욱 심해지더니,
틈을 살펴 성모를 핍박하였고, 성모께선 이로 인해 환후가 생기셨고, <금와>왕도 차도가
없었다고 들렸다.
6월, 상께서 <진장秦章>을 <책성柵城{東夫余都城}>으로 보내셔서 성모의 환후를 돌보셨으며,
또한 <유리類利>・<도조都祖>・<도손都孫>・<장화樟花> 등 각각에게도 황금 100근씩을
보내 주셨다{非常金을 보냈나?}.
七月,上如<北河>慰<鄭共>‧<烏干>大犒軍士.召<涉臣>,不来.
<胡>王<莫車>遣使献黃駝三十匹‧駿馬十疋,其妻<寧胡>閼氏亦送不老酒夀之曰
“願逢<東池>畔,死為寿塚人.”上厚遺而送之. 上夢見“聖母自<柵城>逃来<竜山>
<南岺>,顔色憔悴.上抱而哭之曰‘使母至此者乃我之罪也.’
聖母曰‘自此居汝之側吾将肥矣.<類利>幼而不能同来矣.’”
上,覺夢,令占之,不吉乃禱山川后土. 上以<柵城>事欲速<盖馬>之役.
以<漢素>為<玄菟>太守‧<南口>大将軍,<乙音>為<汗南>太守‧<牛壤>将軍.
以<大房彦>為<河城>将軍,<良>之子也.
7월, 상께서 <개마국><북하北河{桑干河支流인 御河? 壺流河? 懷安지역南洋河?}>로 가셔서
<정공>과 <오간>을 위로하시고 군사들을 배불리 먹이셨으며, <섭신{鮮卑王}>을 부르셨지만
오지 않았다.
<호胡{匈奴}>왕 <막거莫車{雕陶莫皋=復株絫선우}>가 사신을 보내서 누런 락타 30필과
준마 10필을 바쳐왔으며, 그의 처 <녕호寧胡{王昭君}>연지閼氏 또한 불로주를 보내고
장수하시길 빌면서 “<동지東池{卑离東池; 鄯善市東100여Km之境東湖? 武威市東北50여Km之境東湖?
居延海東湖? 魚海? 達里湖? 다른 곳?}>곁에서 만나 뵙고 싶사오며, 죽어서는 무덤을 지키는
사람이 되겠습니다.”라 아뢰었더니, 그 사신들을 후하게 먹여서 돌려보내셨다.
상께서 꿈에 “성모께서 <책성{東夫余都城}>에서 <룡산龍山{順義지역}><남령南岺>으로 도망하여
오셨는데 그 안색이 초췌하셔서, 상께서 부둥켜안고 곡하시며 아뢰길 ‘어머니를 이렇게
만든 것은 저의 죄입니다.'라 하셨고, 성모께선 ‘이제부터 네 곁에 있으면 곧 살이 붙겠지.
<유리>는 어려서 같이 올 수 없었구나.’”라 하심을 보셨다. 상께서 꿈에서 깨어나시어
령을 내려 점을 치게 하셨더니, 불길하였기에, 명산대천名山大川과 지신地神에게 비시었다.
상께서 <책성>의 일{하루속히 가족을 데려오기}로 <개마>정벌을 서두르셨다.
<한소>를 「현도태수玄菟太守」・「남구대장군南口大將軍」로,
<을음>을 「한남태수汗南太守」・「우양장군牛壤將軍」으로,
<대방언>을 「하성장군河城將軍」으로 삼으셨다. <대방언>은 <대방량>의 아들이다.
八月,<烏干>進拔<菰城>‧<東城>等三城,<鄭共>進駐<羽城>.
十六日,聖母訃音至自<柵城>,命罷<月歌會>擧国縞素,召還<盖馬>征軍於<北河城>.
聖母崩於七月而訃使因潦水而遲滯者也.使云“<蛙>王,欲殉於聖母,為群臣所扶而止.”
上,哀慟不已,遣「皇宮大加」<仇都>‧「小兄」<松義>,徃吊献賻黃金四百斤‧白金二百斤‧
銅八十斤‧玄纁十疋‧白絹二十疋‧黃紗二百疋‧檀香五十斤‧靑茶三十斤‧三酒各七缸‧
玉棺一事‧太皇后翟服二襲.鳳車三‧護軍百二十人發行.
<漢素>,拔<河陽城>,置戌而還. <召>皇后,恐上過毁,召<平>氏入宮,
又使<孟>后奏琴而慰上悅之. <沸流>‧<高婁>請徃聖母丧而遇見<類利>而還,上以其年幼世嶮不許. 遣「大仙人」<木>公献薬於<金蛙>老王誦經于聖母殯殿請分骨而還.<觧素>不肯之,<蛙>王曰“渠之母也.汝何拒之.”<東扶余>多水葬,而聖母火葬而分骨立廟,以皇后禮葬之. <漢><王鳳>以其妾妹有夫者以為宜子,而薦於其主<驁>.「京兆尹」<王章>,以為有夫女不可配至尊,言「<姜胡>殺首子盪腸之事」,<鳳>怒殺之,<漢><驁>不能禁.<召>皇后,聞之大喜,曰“<漢>天子真聖人也.<王章>之罪,大逆不道也,殺之可也.<王鳳>真外戚之賢臣也.<大房>之徒安可不誅.但恨吾黨無如<鳳>者也.”<平>氏聞之欲敀,上不許曰“雖有<王鳳>,吾非<驁>類也.汝何憂之.”
8월, <오간>이 <고성菰城>・<동성東城>등 세 성을 빼앗고, <정공>이 <우성羽城>에 진주하였다. 16일에 성모의 부음訃音이 <책성>으로부터 도착하매, 명을 내리시어 <월가회月歌會>를 파하시고 거국적으로 흰 비단옷을 입게 하셨으며, <개마국><북하성北河城>에 있는[또는, 북하성으로] <개마>정벌군을 불러들이셨다. 성모께서는 7월에 돌아가셨으나 부음사신이 큰비潦水{장마 비?}로 지체되었던 것이었고, 사자가 말하길 “<금와>왕도 성모를 따라서 죽고자 하였으나, 군신들이 붙잡아서 그만두었습니다.”라 하였더니, 상께서는 애통해 하시길 멈추지 못하셨으며 「황궁대가皇宮大加」<구도仇都>와 「소형小兄」<송의松義{松讓子}>를 보내시어 찾아가 조상弔喪하고 부의賻儀로 황금 400근, 백금 200근, 동 80근, 현훈玄纁{그윽한 분홍 비단} 10필, 백견白絹{흰 명주} 20필, 황사黃紗{黃色薄紗} 200필, 단향檀香 50근, 청차靑茶{≒五龍茶} 30근, 3주三酒{黍酒・粱酒・酪酒} 각 7항아리, 옥관玉棺 하나, 황태후적복太皇后翟服 2벌을 바치게 하셨다. 봉거鳳車 세 대에 싣고 호군護軍 120명을 딸려서 떠나보냈다. <한소>가 <하양성河陽城>을 빼앗아서 수자리를 두어놓고 돌아왔다. <소>황후가 상께서 지나치게 어버이의 죽음을 슬퍼하여 몸이 상하실까 염려하여 <평>씨를 궁으로 불러들이고 <맹>후로 하여금 거문고를 타서 상을 위로하여 기쁘게 해드렸다. <비류沸流>와 <고루高婁>가 찾아가서 성모를 조상하고 슬쩍 <유리類利>를 만나보고 오겠다고 청하였더니, 상께서는 그들의 나이가 어리고 세상이 험하여 허락하지 않으셨다. 「대선인大仙人」<목木>공을 보내시어 <금와金蛙>노왕老王에게 약을 드리고 성모 빈전殯殿{喪廳}에서 경經을 외고 유골遺骨을 나눠서 돌아오길 청하게 하셨다. <해소觧素>가 이를 따르려 하지 않으매, <금와>왕이 이르길 “그의 어미인데, 너는 어찌 못하게 하느냐."라 하였다. <동부여東扶余>에선 많은 이들이 수장水葬을 하지만, 성모를 화장火葬하여 유골을 나누었고, 사당을 세워서 황후의 예로 장사하였다. <한漢>의 <왕봉王鳳{成帝外叔}>이 자기 첩의 여동생이 지아비가 있음에도 남자를 밝혀서, 그녀를 임금인 <유오劉驁{西漢成帝}>에게 천거하매, 「경조윤京兆尹」<왕장王章>이 그녀는 유부녀이어서 지존至尊{임금}의 배필로서는 불가하다며 「<강호姜胡{姜땅 胡}>가 첫아들을 죽여서 속을 씻어냈던 일」을 얘기하여 주었더니, 이에 <왕봉>이 노하여 <왕장>을 죽였고, <한>의 <유오>는 그를 말리지 못하였다. <소>황후가 이를 듣더니 크게 반기며 말하길 “<한漢>의 천자는 진짜 천자다. <왕장>의 죄는 대역무도大逆無道하니 죽이는 것이 옳았으며, <왕봉>은 진정 외척外戚현신賢臣이었다. <대방량>무리들을 왜 죽이지 않는단 말인가. 그저 내 무리들 중에 <왕봉>과 같은 이가 없음이 한스럽다.”라 하였다. <평>씨가 이 말을 듣고서 돌아가고자 하매, 상께서는 허락하지 않고 이르시길 “비록 <왕봉>이가 있더라도, 내가 <유오> 같은 부류가 아닌데, 자네는 왜 걱정하시는가?”라 하셨다.
九月,<涉羅>女主<奕居知>遣使入貢.<涉羅>,在於<桓那>之東南,依山傍海,世襲女主.山多野少,民以魚獵為生,冡冢居岩伏,好歌舞鬼神.囯之俊秀者為女主之嬖臣,生女為巫,其最少者継之.其俗淳,實不
草[華],能為其主而盡忠.上,賜<奕居知>綾緞,命親自入朝.
9월, <섭라국涉羅國{=斯羅=斯盧=新盧=尸羅}>여왕 <혁거지奕居知>가 사신을 보내 입공하였다. <섭라>는 <환나桓那>동남으로 산을 의지하면서 큰 물가{黃河下流? 고대渤海西岸?}에 있고{작금河北省部內陸에 있었던 古代의 斯盧國 또는 斯羅國?} 여왕女王을 세습하고 있었다{赫居世는 奕居知의 아들이거나 嬖臣?}. 산이 많고 들이 적어서{현금 滄州市・衡水市・德州市周邊之境!!}, 백성들은 어렵漁獵을 생업으로 삼으면서 언덕{산}에 거주하거나 바위굴에 숨어살고 즐겨 귀신에게 노래하고 춤을 올렸다. 나라 안에선 지혜智慧와 풍채風采가 빼어난 이가 여왕女王의 폐신嬖臣{情을 나누는 男色臣下・情夫, 非公式的男便}이 되었고, 딸을 낳으면 무녀巫女를 삼고{加葉原의 巫風?}, 그중 가장 어린 이로 뒤를 이었다. 그곳은 습속이 순박하여 실로 거칠지 않고[또는, 그곳 습속은 순박하여 실로 화려하지 않고], 능히 그 임금을 위해 {죽음으로} 충성을 다하였다. 상께서 <혁거지>에게 능라綾羅를 하사하셨으며 친히 스스로 입조하라고 명하셨다{涉羅가 北夫余侯國?․服屬與否는 未詳이나 和親常況이 됨}.
十月,<木>公分骨而還,置神廟於<竜山><南岺>,安骨於玉棺之上,與<萱>皇后掛孝,<召>‧<孟>以下后妃皆以華服從之,行大祭三日. 遣「主神大加」<再思>‧「小兄」<奧天(犍子)>于<柵城>而饋神饍方物于<蛙>王,以謝分骨之恩.
命<菸狗>‧<馬黎>,引兵一万,與<鄭共>‧<烏干>,伐<盖馬>拔<蔚岩城>,進逈其都城.<燕宜>率其妻子而西走<潢>上.<菸狗>取其珍宝送于「西都」.上遣<武骨>徃犒大軍賜袍,命“勿侵掠其民使之安居服從,而<燕宜>子<小噲>代立為「盖馬王」歲修朝貢.” <樟花>生<觧素>子<山觧>,上遣使賜衣.上之初孫也,群臣上賀.上,與三后受之,賜宗戚公卿酒食.
以<奧犍>為「太輔」,<觧德>「左輔」.以<蔘花>公主為<大室>夫人.<大室>者,故<旒太后宮>也,賜翟服如皇后例.天下稍定,上漸眷親戚列封子弟,或納後宮,<蓼>主寵最高.上,春秋方殷,能御数嬪,宗戚夫人之能子而願得上子者,不問老少美醜,皆使當夕.螽斯,雖振勞耗,自多其為害不少,而不忍拒其来.以此,宗室當夕之弊久而不絶,為國之累矣.
10월, <목>공이 유골을 나눠서 돌아왔고, <룡산龍山><남령南岺>에{현금北京順義국제공항지경?} 신묘神廟를 세우고 유골을 옥관玉棺에 안장하였다. 상께서는 <훤화>황후와 더불어 소복素服{喪服}을 입으셨고, <소>후와 <맹>후 이하의 후・비 들은 화복華服{平常服?}으로 뒤를 따르면서 사흘간 큰 제사를 올렸다. 「주신대가主神大加」<재사再思>와 「소형小兄」<오천奧天(奧犍子)>을 <책성柵城{東夫余都城; 嫩江省扶裕?, 吉林省西北端雙城?}>으로 보내시어 영험靈驗한 음식과 방물方物을 <금와金蛙>왕에게 바치고 유골을 나눠준 은혜에 감사하셨다.
<어구菸狗>와 <마려馬黎>에게 명하시어, 1만병을 이끌고 <정공> 및 <오간>의 군대들과 함께 <개마>국을 쳐서 <울암성蔚岩城{현금山西省北部蔚州地境?}>을 빼앗고 멀리 있는 <개마>의 도성都城을 향하여 진격하였더니, <연의燕宜{盖馬王}>는 자기 처자식들을 데리고 서쪽 <황수潢水>북방{九原東北托克托城隣近黃水河북방?}땅으로 도망하였다. <어구>가 <개마국> 도성의 진보珍寶들을 거두어 「서도」로 보냈다. 상께서 <무골武骨>을 보내 찾아가셔서 대군들을 잘 먹이시고 겨울옷을 하사하셨으며, 명을 내리시길 “<개마>의 백성들을 노략하지 말아서 그들이 편안히 눌러살며 복종하게 하고, <연의>의 아들 <소쾌小噲>가 대신하여 보위에 올라서 「개마왕」을 하고 해마다 조공하라.”고 하셨다{☞盖馬國을 討伐하여 封國으로 整理함}. <장화{禮氏所生芻牟女}>가 <해소{柳花所生金蛙子}>의 아들 <산해山觧>를 낳았더니, 상께서 사신을 보내 옷을 하사하셨다. 상의 첫 외손자이었으매, 군신들이 하례를 올렸고, 상께서는 세 후들과 더불어 하례를 받으시고 종척과 공경들에게 술과 음식을 하사하셨다.
<오건>을 「태보」로, <해덕>을 「좌보」로, <삼화>공주를 <대실>부인으로 삼으셨다. <대실>이란 옛 <류태후궁旒太后宮>이었었더니, 황후에 준하여 적복을 하사하셨다. 천하가 바야흐로 평정되었으매{☞北夫余 諸侯國 復屬完了; 순노・갈사・졸본・환나・비류・황룡・락랑・량맥・말갈・북옥저・백웅・숙신・비리・자몽・구다・행인・섭라・개마 등등}, 상께서는 점차로 친척들을 돌보시고 자제들을 줄줄이 봉하셨으며, 혹자는 후궁으로 거두어들이셨는데 <삼화>공주를 총애하심이 최고였다. 상께선 춘추가 때마침 한창이시어 능히 여러 빈들을 거느릴 수 있으셨고, 종척의 부인으로 능히 자식을 낳을 수 있는 이들이 상의 아들을 가지길 원하였더니, 늙은 이 젊은 이 고운 이 추한 이를 불문하고 모든 이들로 하여금 밤일을 감당케 하셨다. 누리{蝗蟲}들이 일게 되면, 설사 무던히 애써서 줄여놓아도, 저절로 많은 것에 피해가 적지 않은 법인데, 그들이 찾아옴을 차마 막지 않으셨다. 이로 인하여, 종실들이 밤일을 맡는 폐해가 오래도록 끊이지 않았더니, 나라{즉, 임금}에 누가 되었더라.
十一月,鍊兵於<湖海>.<涉臣>遣牛羊犒軍又以美女数十贈于鍊兵将士而欲得歓心,将士劫其使責求愈多.<涉臣>知不可當,欲與之戦請救於<紫蒙>,<紫蒙>王<西川>恐禍及己遣使来告.上命練兵将士勿與<涉臣>構怨,又遣<吉士>於<鮮卑>慰論<涉臣>,曰“朕之伐<盖馬>也.不得已也.卿以忠誠早来臣服久矣.近日征<馬>之将有不美於卿,朕已治之矣.勿為惧慮而自誅.不變向日之忠則爾囯安矣.勿自妄動而取禍.”<涉臣>喜而自新遣其子<涉俊>為質,永為父子之囯.許之. 行聖母懴悔大經筵七日,以<奧芳>夫人為聖母庙主,秩一品「公夫人」.
11월, <호해湖海{작금山西省大同北方 葫芦海?}>에서 군병을 훈련하셨더니, <섭신{鮮卑王}>이 소와 양을 보내서 군사들을 먹이고 또한 미녀 수십을 병사들을 훈련하는 장수와 병사들에게 주어서 환심을 사려고 하였고, 이에 장수들과 군사들이 그 사신을 겁주고 책망하며 더욱 많은 것을 내놓으라고 하였더니, <섭신>은 당해 낼 수 없음을 깨닫고서 그들과 싸워보려고 <자몽紫蒙>에게 도움을 청하였고, <자몽>왕 <서천西川{紫蒙太上天王廣公子}>은 화禍를 당할까 두려워서 급기야 사신을 보내서 발고하였다. 이에 상께서는 병졸들을 훈련하는 장수들과 군사들에게 명하시어 <섭신>과 더불어 원한怨恨을 쌓지말라고 하셨으며 <길사>를 <섭신>에게 보내셔서 위로하며 의론하여 이르시길 “짐이 <개마>를 친 것은 부득이 한 것이었소. 경은 충성되게도 일찍이 찾아와서 신하로 복속함이 오래되었소. 근일 간에, <개마>를 쳤던 장수들과 군사들이 경에게 불미하였던 바는 짐이 이미 다스려놓았으니, 걱정하고 심려하다가 스스로를 벨 일은 하지 마시오. 해日{天子}를 향한 충정이 변하지 않으면, 그대의 나라는 안전할 것이니, 스스로 망동하여서 화를 부르지는 말아야 할 것이오.”라 하셨더니, <섭신>은 기뻐하며 스스로 새로이 자기아들 <섭준涉俊>을 인질로 삼아서 보내고 영원히 부자父子간의 나라가 되겠다고 하였더니{鮮卑自進服屬}, 허락하셨다. 7일간의 성모참회대경연聖母懺悔大經筵을 행하시고, <오방奧芳>부인을 성모의 사당을 주관하는 질1품 「공부인公夫人」으로 삼으셨다.
十二月,<烏桓><蘇鷄侯><元杜紀>,遣使来朝,請赦<燕宜>之罪.上曰“<燕宜>自来,可一言而决矣.何區區使人介之哉.”使去.<燕宜>,又遣使来献虎皮‧陶器,請献二女入宮,永為君臣.上曰“雖兄弟亦可,何必君臣.當相見而議也.”<燕宜>只送二女而竟不来,<陜父>奏曰“<燕宜>終始疑訝,不可不伐.”上曰“<燕宜>‧<涉臣>,皆是奸物也.不可一朝而破,徐當究其道理,不必燥燥也.” <觧朱>遣使来言“<都>后難産而崩.臨終.恨不見上而泣,血淚流下.”上,聞之慟哭,遣「皇宮大加」<仙都>‧「小兄」<松義>持金棺‧玉馬‧翟服‧鹵簿,以皇后禮治其丧.<都>后,臨崩語於<觧朱>,曰“吾死敀汝兄.勿火而漬送尸于「西都」,得與汝兄相見.”<朱>乃漬而送之.嗚呼,<都>后以<貝陵囯>漁人之女,有出天之顔色‧惱人之嬌態,為其王妃,轉為<屋>相國妃矣.聖上,以其遺命,娶之生子女,而不能告別而来期其再會.至是,崩,春秋四十八.上謂群臣曰“<都>后,朕之初妻也.事我兄弟三人而生子七人,有仁賢之德,可謂天子之配.自<余>別来,思念自苦未嘗怨尤,唯望早早相見,不意至此.今年以来,天不祚我,丧母失妻,無乃朕之失德者歟.其赦囯中死囚及捕口‧買奴.以休征伐之役,病傷軍卒,皆加祿治療,賑其妻子父母.”<都>后葬禮,悉如聖母太后禮,葬于太后陵傍,立庙曰“<都>皇后庙.” 以上女<都孫>妻<觧朱>,遣「宗府大加」<奧春>如<柵城>行禮.上,賜<都孫>黃金五百斤‧繒絮匹段‧真珠宝扇‧白馬宝車‧公主翟服,又献<蛙>王黃駝二匹‧香麝一頭‧甘草酒二缸.<蛙>王,大喜,賜<都蓀>珍宝佩玩,而護<都>后子女.
上賜創業功臣<烏伊>‧<摩离>‧<陜父>‧<扶芬奴>‧<漢素>‧<再思>‧<武骨>‧<黙居>‧<奧犍>‧<奧命>‧<奧春>‧<于真>‧<扶尉厭>‧<菸狗>‧<鄭共>‧<馬黎>‧<烏干>‧<乙耕>‧<仇賁>‧<仇都>‧<逸苟>‧<焚永>‧<吉士>‧<都喜>‧<桓福>‧<桓柏>‧<松太>‧<禾黍>等虎皮大鏡二枚香婢七口.
12월, <오환烏桓>의 <소계후蘇鷄侯>인 <원두기元杜紀>가 사신을 보내 래조하여 <연의燕宜{潢上으로 逃亡한 盖馬王}>의 죄를 면해 주시길 청하여, 상께서 이르시길 “<연의>가 스스로 찾아와서 한 마디만 하면 끝날 수 있는 것인데, 어찌 떳떳하지 못하고 구차하게 딴 사람을 끼워 넣는단 말인가!”라 하셨더니, 사신이 물러갔다. <연의>가 또 사신을 보내 찾아와서 호피虎皮와 도기陶器를 바치면서 ‘두 딸을 바쳐서 입궁시킬 것이며 영원토록 임금의 신하가 되겠다.’고 청하였더니, 상께서 이르시길 “설사 형제가 되자고 하여도 될 일을 가지고 하필 군신일꼬? 당장 서로 만나서 의견을 나누자.”고 하셨더니, <연의>는 단지 두 딸만을 보내고 끝내 찾아오지 않았다. 이에 <협보>가 주청하길 “<연의>는 모든 것이 의심스럽고 괴이하니 토벌하지 않으면 아니 되겠습니다.”라 하였더니, 상께서는 “<연의{盖馬王}>와 <섭신{鮮卑王}>은 모두가 간사한 물건들이어서 하루아침에 깨뜨릴 수는 없음이니 서서히 마땅한 방도를 찾으면 될 것이지 조급하게 애태울 필요는 없을 것이오.”라 하셨다. <해주>가 사신을 보내와서 “<도>후가 난산 끝에 돌아갔습니다. 죽음을 앞두고서 상을 만나 뵙지 못함이 한스러워서 울더니 피눈물을 흘렸습니다.”라 아뢰었더니, 상께서는 그 소리를 듣고 통곡하셨으며, 「황궁대가」<선도仙都>와 「소형」<송의松義{貫貝所生松讓子}>를 보내시어, 금관・옥마・적복과 의장을 가지고가서 황후의 예법으로 장사를 치러주셨다. <도>후가 죽음에 임하여 <해주>에게 말하여 이르길 “나는 죽으면 그대 형님에게 돌아가야 하겠소. 태우지 말고 담가서 시신을 「서도」로 보내주시어 그대의 형님과 상봉할 수 있게 해주시오.”라고 하였었더니, <해주>가 이에 담가서{屍身이 傷하지 않게 하는 液體에 적시거나 담가서} 보내면서 소리 내어 울었다. <도>후는 <패릉국貝陵國{동부여속국}>고기잡이의 딸로 하늘이 낸 안색顔色으로 다른 이들을 뇌새惱殺할 아리따운 자태이어서 그곳의 왕비가 되었다가 <옥두진屋斗辰>상국相國의 비妃로 되었었다. 성상께서 그{屋斗辰}의 유명을 좇아 혼인하고 자녀를 낳으셨으나, 이별을 고하지도 못하고 떠나오셨으며, 재회를 기약하지도 못하셨다. 지금에 와서 죽었고, 춘추 마흔 여덟이었다. 상께서 군신들에게 말씀하시어 이르시길 “<도>후는 짐의 첫 처이며, 내 형제 셋을 섬기면서 아들 일곱을 낳았소. 어질고 현명賢明한 덕德이 있었으니 가위 천자의 배필이었었소. <동부여東夫余>를 떠나온 이래로, 자신의 괴로움을 마음속에 품고서 아직까지 멀리 떨어져있음을 원망하지도 않았으며, 오직 하루빨리 만나기를 바라더니만, 불의에 이렇게 되었소. 금년 이래로 하늘이 내게 복을 주지 않아서 어머니를 여의고 처를 잃었으니, 짐이 덕을 잃음 아닌 것이 없었소이다. 나라 안의 죽음을 기다리는 죄수들과 잡혀 온 생구生口들 및 팔리어 온 노비들을 풀어주고, 정복전쟁을 멎도록 하고, 병들거나 상한 군졸들 모두에겐 봉록을 늘려주고 치료하여 낫게 하여줄 것이며 그들의 처자와 부모들을 진휼하시오.”라 하셨다. <도>후의 장례는 모두가 성모태후의 예법과 같았으며, 태후릉 곁에 장사하였고, 사당을 세워서 “<도>황후사당”이라 이름 하셨다. 상의 딸 <도손>을 <해주>에게 처로 삼아주시고, 「종부대가宗府大加」<오춘奧春>을 <책성>으로 보내서 예를 갖추어주셨다. 상께서는 <도손>에게 황금 500근, 비단 솜옷, 진주보선, 백마보거와 공주적복을 하사하시고, <금와>왕에겐 누런 낙타 2필과 예쁜 사향노루 한 마리와 감초주 두 항아리를 드렸더니, <금와>왕은 매우 기뻐하였으며 <도손>에게 진보로 된 패물과 노리개를 하사하고 <도>후의 자녀들을 보호하여 주었다.
상께서 창업공신인 <오이烏伊>・<마리摩離>・<협보陜父>・<부분노扶芬奴>・<한소漢素>・<재사再思>・<무골武骨>・<묵거黙居>・<오건奧犍>・<오명奧命>・<오춘奧春>・<우진于眞>・<부위염扶尉厭>・<부어구菸狗>・<정공鄭共>・<마려馬黎>・<오간烏干>・<을경乙耕>・<구분仇賁>・<구도仇都>・<일구逸苟>・<분영焚永>・<길사吉士>・<도희都喜>・<환복桓福>・<환백桓柏>・<송태松太>・<화서禾黍>등에게 호랑이가죽虎皮과 큰 거울大鏡 2매씩 및 향비香婢{어여쁜 비첩} 일곱씩을 하사하셨다.{☞2차 종합논공행상을 한 것임!!}...//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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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의 변
동명14년{BCE24}에 하투북방河套北方 음산산맥陰山山脈 서북방부터 옛 흉노匈奴의 북해北海{현금 몽골국의 서변}까지에 펼쳐 있던 선비鮮卑마저 자진 복속하여 와서,
현금의 하란산맥이동賀蘭山脈以東, 위수渭水 또는 하투장성이북河套長成以北, 현금 산서성山西省과 하북성河北省 전역 및 눈하嫩河‧송화강松花江‧요하하류이서遼河下流以西 그리고 바이칼호수 남‧동 방면의 숙신肅愼을 포함한 영역을 직‧간접 통치강역으로 아우르는 대연방천제국大聯邦天帝國을 이루어 낸 것이다.
어느 붓끝과 혀끝으로 이 고구리高句麗를 현금 한반도 압록강북변의 심산유곡에서 부족국가로 개국하였다고 하였는가?
이 추모경芻牟鏡은 말하고 있다. 마한馬韓은 최소한 현금 서토의 하남성河南省 락양洛陽지경에 동서로 펼쳐져 있었고, 이 마한의 동쪽에 진한辰韓이 있었고, 현금 천진시지경의 서남방에 여왕 혁거지赫居知의 섭라涉羅{사라,斯羅=斯盧=新盧}가 있었음이며, 이미 가라加羅{가야}들이 있었다고 조용히 웅변하고 있음이다.
역자가 추정하건대, 이 시절{BCE24년 이전}에 현금의 요하 동쪽이며 흑룡강 남쪽지류인 송화강‧혼동강의 이남에는 고구리도 사로{신라}도 락랑국도 한4군도 없었고, 동부여의 동쪽에는 동부여에 복속된 우산국于山國 등이 있었고, 산해경山海經에서부터 명사明史에 이르기까지 언제부터인가 거의 완벽하게 지워진 편린 같은 기록으로만 남아 있는 신비의 고대국가 부상국扶桑國 등이 CE5세기 말경까지 있었던 것이다. 첨언한다면, 역자는 이 부상국이 바로 현금 요하의 동방과 남방에서 출토되는 상대적으로 가느다란 모양의 비파형 청동검 문명과 고인돌과 거석문명의 주인이거나 그 후예로 보이며, 우리의 혈맥에는 이 땅에 본디부터 있었던 조상들의 맥박도 함께 뛰고 있다고 본다.
우리가 계승해 온 역사와 강역이 이 땅으로 밀려들어 온 것은 후세의 왕조와 조정들, 특히 소중화를 자처하면서 우리겨레의 역사를 환부역조한 근세의 이씨왕조 조선 등의 귀책사유였던 것으로 본다. 즉, 왕씨왕조 고리 말에 손에 쥐인 군권으로 왕조와 조정을 뒤엎고 따르는 백성 없이 소수의 모리배들과 함께 왕씨들을 족멸하고 두문동을 불 지르고 명분 없는 새 왕조를 열었으며, 그런 까닭에 고려조 이전의 모든 역사를 조작하고 배달‧조선 겨레를 번조선의 후예로 율곡 이이 등을 동원하여 환부역조하였으며, 그러고도 계속하여 사처 등에 비장된 사서들마저 색출하여 분서하였음을 자랑스레 소위 조선왕조실록에 명시한 것으로 보이고, 국방력을 약화시키고 문약에 흐르는 세월을 계속하다가 결국에는 겨레의 나라와 역사와 강토를 통째로 빼앗기고 백성들의 성씨와 이름을 창씨개명 하는 암울한 파국을 불러왔고, 이에 반도‧식민‧노예 사학이 창궐하게 한 것이었다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