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흐르는 소리
산길을 걷다 보면 오목한 땅에 물이 고여있고, 한편에서는 시내물이 돌을 씻어내리며
시원스레 흘러 내리기도 한다. 고인 물에는 이끼가 끼고 날 것들이 날아든다.
흐르지 않고 고여서 냄새를 풍기는 물이다. 쉬지 않고 흐르는 물에는 이끼 같은 것이 낄 틈이 없다.
맑은 물흐르는 소리는 듣는 이의 마음마저 맑게한다.
물 흐르는 소리를 가만히 들어보면, 작은 새들의 지저귐, 파종한 씨앗들이 터지며 발아하는 소리,미물들의 노래
소리가 들려 오는 듯하다. 지붕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는 살아가면서 작은 일에는 놀라지도
감동하지도 않는, 잠자고 있는 감성을 깨우는 소리인가. 찻잔에 물 따르는 소리는
작고 보잘 것 없는 것들에 대한 마음을 붓는 소리같다. 흐르는 시내물 소리는 천진한 아이들이 모여 재잘재잘
얘기 꽃을 피우는 소리다. 강으로 흘러드는 거침없는 물소리는 청,백으로 나뉘어 줄다리기를 하던 어린시절
운동회 날의 함성이다. 단체로 걸어가던 소풍길의 재미가 새록새록 되살아난다.
세상의 많은 소리 가운데서 나는 유난히 물 흐르는 소리를 좋아한다.흘러가는 물 소리는
다른 온갖 소리가 일으키는 불협화음과는 다르다. 그 속에는 흉내 낼 수 없는 음악이 들어있다.
귀 기울여 들어보면 거문고 소리같은 것이 들려 오는듯 하고
방아를 찧는 가난한 옛 사람들의 노래가 들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생활에서 오는 피로를 씻어 내리는 시원함이 있다. 다른 어느 것으로도 대신 할 수 없는,
물흐르는 소리와 물이 주는 안도감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온천에서나, 혹은 욕실에 뜨거운 물을 가득 채우고 한발을 들여 놓을 때의 기분.
발 끝으로 부터 따스함이 몸 깊숙이 스며들어, 나른하게 물 속으로 잠겨드는 기분을 느껴보라.
눈을 감고 몸에서 힘을 빼어 물에 전신을 실어보는 홀가분함.
그러는 가운데 문득 물에 대한 어떤 알 수 없는 그리움이 몸 깊은 곳으로 부터
살아나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저 멀고도 먼 태초의 추억일지 모른다. 물 속에 들어가 눈을 감고
기억 할 수 없는 옛날로 돌아가는 최면 속으로 빠져들기를 나는 좋아한다.
머리 속 생각을 모두 씻어내 버린 상태가 주는 평화를 물 속에서 느끼며,
아련하게 잊어버렸던 어머니의 품을 그리워 해 보기도 하는 것이다.
살아 있다는 것.어머니에게서 떨어져 나가 한 사람의 독립된 인간으로
세상을 살아나간다는 것이 얼마나 눈물겨운 일인지, 그리고 또 대견한지...
살고 있는 땅에서 멀리 떨어져 나가 우주로 나아간 우주인이 산소 공급줄을 매달고
우주를 떠다니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어머니의 곁을 떠나 홀로 일어서는 사람과
다르지 않아 보였다. 어떤 형태로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커다란 감동이기도 하다.
안락하게 보호되던 곳을 떠나 세찬 물살 흐르는 바다로 밀려온 사람들.
바다는 너무 넓고 너무 깊어 개인이 내는 어떤 소리도 묻혀 버리고 만다.
사람들은 소리를 높이며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려하고 세상은 그래서 더욱
시끄러워지기도 하지만, 파도에 밀리거나 암초에 부딪히며 이리저리 떠밀리며 살아있음을
한개의 목소리로 표현해 보는 작은 물 방울들의 소리는 우리들 각자가 지어보는 시,
혹은 노래소리일 것이다. 살아가는 터전이 큰 바다 같고,어쩌면 사해같은 곳이어서일까.
바다보다는 굽이굽이 흐르는 강이 좋고 개울이나 시냇물이 더 좋다.도시에
살면서 가끔 그려보는 내 꿈은 시냇물이나 작은 강이 흐르는 옆에 숲이 있고,
호젓한 숙소가 있는 곳으로 훌쩍 떠나가 보는 일이다.
세상이 정한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물소리를 들으며 깨어나
물 안개 자욱한 숲속의 새벽길을 걸어 보는 일이다.
우유빛 안개 너머로 떠오르는 말끔히 씻은 해의 얼굴을 바라 보는 일.
물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밤 늦도록 책을 읽고 생각에 잠기기도 할 것이다.
나는 고층 아파트의 아래층에 살고 있다. 그래서 위층에서 쏟아져 내리는
물 소리를 하루 종일 듣게 된다. 베란다의 홈통을 지나가는 하숫물 소리는
종일 비 오는 착각이 들게 하거나, 때로는 개울물이 되고 시냇물 혹은
폭포수가 되기도 한다. 물 소리가 멈출 때도 있지만 내 귀에는 이명이 되어
쉴 새없이 흐르고 있다. 생활이 물과 연관되어 있고 물이 없으면 살 수 없기에,
물이 내는 소리는 살아 있다는 소리요,생명이 흘러가는 소리로 들린다.
흐르는 물 소리를 들으면 이곳 저곳의 유명한 강이나 폭포가 떠오른다.
호젓한 산속에서 개울물 소리를 들으며 녹차를 마시기도 했다.
합천 해인사에서 흘러 내리는 맑은 물소리를 들으며 조그만 토방에 모여앉아 있던
그 때는 대학 초년생이었다. 투박한 다기에 차를 우려내어 나누던 차맛과 다향은
지금도 살아 있는 듯하다.종일 도자기를 빚어내고 흙 투성이의 손발을 맑은 냇물에 씻었다.
피로마져 말끔히 씻기던 물은 시리고 얼얼했다.
밤 늦도록 굴에서는 도자기가 구워지고 토방안에서는 미래에 대한
우리들의 꿈과 이야기가 촛불 아래 구워지고 있었다.
도자기 선생님의 따님이 맡아서 하던 차를 우려내는 의식은 조용하고
엄숙하기 까지 했다. 웃음 보따리를 안고 다니던 우리들이었지만
잔을 덮히고 차를 우려내는 과정을 숨 죽이고 지켜 보았다.
아이들과 남편이 자신들의 일터 혹은 학교로 떠나고 나면, 찾아드는
호젓함은 내가 꿈꾸던 산장의 호젓함에 버금가지 않는다.
볼일이 생겨 바다같이 와글대는, 그러나 살아 있음을 속속들이 느낄 수 있는
번화가에 나서기도 하지만 나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온다.
바다와 하늘을 세워 놓은 것 처럼 쏟아져 내리던 나이아가라의 폭포수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고,
한강의 물결 소리가 가까이서 들린다.모세가 건너던 홍해의 물소리가 들려 오는듯도 하다.
가 본 곳 뿐만이 아닌 아직 가 보지 못한,내 가슴 속에서 출렁이는 백두산 천지.
그 가운데서도 마음을 기울이지 않으면 들을 수 없는, 따뜻하게 흐르던
어머니의 물소리와 숨결을 찾아내는 것은 나의 작은 기쁨이다.
93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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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물은 모든 생명의 근원
하물며 흐르는 물 임 에야
더 말해 무엇할까
흐르는물 소리
들으며 새들의 지저기는 소리
아이들이 재잘대는 소리
거문고의 음악 소리 까지도
상상하고 들으며
심지어 어머니 의 배안
생명을 부여 받던 존귀한
기억 까지 더듬어 내는
시인님의 감성과 높은 인성에
힘찬 박수를 보냅니다
늘 건강 하시고
복 받는삶 되시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