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꽃”, 시인의 백년 묵향이 피어나다
글 / 김호림
특기할 일이었다. “천지꽃”이 남쪽 나라 한국에 피어났다.
천지꽃은 진달래를 이르는 조선 함경북도의 방언이다. 이 낱말은 현재로선 거의 연변 일대에서만 통한다. 그런데 “천지꽃”이라는 이름이 한국 교육과학기술부의 검정을 거친 고등학교 문학교과서에 버젓하게 나타났다. 시인 석화의 작품 “천지꽃과 백두산”이 교과서의 과목으로 수록된 것이다.
한국의 교과서에 이처럼 연변 조선족시인의 작품이 등장하는 것은 백년에 한번 피는 꽃처럼 전설로 불릴 정도.
기실 석화의 작품은 교과서에 실린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벌써 여러 편의 작품이 중국의 각종 문학선집과 중소학교의 교과서에 수록되었다. 연변문학예술연구소, 연변대학 등 국내의 유수의 문학예술연구기구와 한국, 일본 등 국외 문학예술연구기구는 이미 석화의 문학창작현상과 작품세계를 연구하고 있다.
석화는 중학교 시절이던 1976년 처녀작을 발표해서부터 지금까지 3천여수의 시를 창작했으며 “나의 고백”을 비롯하여 4부의 시집을 출판, 해내외 각종 문학상과 문예상을 30여차 수상했다. 거기에는 “천지문학상”, “장백산문학상”, “진달래문학상”, “지용시가문학상”, “전국대중가요작품상”, “해외동포문학상” 등이 망라된다.
석화는 조선족시단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일찍부터 해내외에 연변의 “천지꽃”의 향기를 풍기고 있었던 것이다.
시인의 월계관을 쓴 애송이
1976년 5월 9일은 시인의 생애에서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저의 첫 작품이 ‘연변일보’에 발표된 날이지요.” 석화는 그제 날의 감회에 잠긴 듯 잠깐 말을 멈춘다.
그날 담임교원 한병춘은 제자의 시가 실린 신문을 학교의 여러 교학연구실마다 들고 다니면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했다고 한다.
하긴 그럴 만 했다. 신문이나 잡지가 지금처럼 많지 못했던 그때 지면에 작품을 싣는다는 건 “하늘이 별 따기”와 다름이 없었다. 더구나 “연변일보”는 중국 조선족사회의 권위적인 일간지로 여간해서는 넘보기 힘든 간행물이었다. 또 문학도라는 이름 하나로도 선망의 대상이 되던 그 시절의 독특한 풍토였다. 그런데 아직 중학생인 열 일여덟 살의 애송이가 혜성처럼 홀연히 문단에 등극했던 것이다.
한병춘 선생은 바로 석화가 시인으로 성장하는 길에 구세주처럼 나타난 길라잡이였다.
석화는 1958년 대약진 운동 시기 룡정에서 태어났다. 정치운동은 그의 소년기에도 숙명처럼 계속 이어졌다. 훗날 화룡에서 소학교와 중학교를 다니던 지난 세기 60년대 후반과 70년대 초반은 동란의 “문화대혁명” 시기였다.
이때 물질적인 배고픔이 있었고 또 정신적인 배고픔이 있었다. “책이라곤 교과서 밖에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중학교에 올라온 후 갑자기 책의 세계가 나타났다. 한병춘 선생의 저택에 서가가 있었던 것이다. 석화는 마치 꽃밭을 찾은 꿀벌처럼 금세 서가에 깊숙이 빠져들었다. 조선의 시인 조기천, 김소월, 박팔양 그리고 러시아의 뿌쉬킨과 마야꼽스끼, 독일의 괴테와 하이네… 이름만 들어도 현혹할 시인들이 뭇별처럼 한꺼번에 등장하고 있었다.
“세상에는 오로지 언어로도 감동을 주는 예술이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석화가 시를 읽으면서 받은 감동은 실로 충격 그 자체였다. 그는 아예 소설이나 극작품은 한쪽에 밀어놓고 시만 찾아서 읽었다. 조기천의 서사시 “백두산”, 서정시 “흰 바위에 앉아서”, “수양버들”, “조선은 싸운다” 등은 아직도 구구절절 기억에 남아있단다.
“백락은 천리마를 알아본다.” 한병춘 선생은 석화를 그의 대학친구인 유명한 시인 김문회에게 소개했다. 석화는 이로써 정식으로 시 공부를 하게 되었으며 나중에 “연변일보”에 처녀작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던 것.
시 문학에 대한 사랑은 연변대학에 입학한 후 개인의 시 창작은 물론 문학동아리 “종소리문학사”의 창립 현장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석화는 “종소리문학사”의 초기 창설멤버의 일원이었다. 그는 친구들과 더불어 자주 시낭송모임을 가졌고 자작시를 강판글씨로 찍어냈다.
석화는 련인처럼 시우와 늘 함께 한다는 그 자체로만도 마냥 즐거웠다고 말한다.
대학의 글 마당에서 갈고 닦은 기예는 금방 나타났다. 대학을 졸업하기 바삐 석화는 시 “벗들아, 우리의 이름은 청춘” 등으로 원숙한 시인의 매력을 발산한다.
시인의 꽃의 “장례식”
대학을 졸업한 후 석화는 연변라디오방송국에 기자, 편집으로 배치된다. 이 기간 그는 짧은 몇달 사이에 6부의 녹음테이프(가사)를 출판하는 실적을 올린다. “유병걸노래집”, “구련옥노래집”, “김은희독창집”, “김상운독창집”, “한해연독창집” 등 유명한 조선족가수의 카세트노래특집의 가사는 모두 그가 창작한 것이다.
솔직히 석화는 음악부의 편집이었기 때문에 가사를 쓰는데 월등한 플랫폼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게 전부라면 누구더라도 그 자리에 설 경우 가요창작의 “코기러기”로 될 수 있지 않을까. 일찍부터 시 작품으로 명성을 날린 석화에게는 가수와 작곡가들의 청탁이 한시도 끊어지지 않고 있었다.
실제 석화는 방송국 입사 전부터 가사창작에 깊은 뜻을 품고 있었다고 한다. “세월과 더불어 오래오래 전해질 그런 노래를 써볼 욕심이 있었지요.”
흰 눈처럼 깨끗한 사랑과 풋풋한 인정세계를 펼치고 있는 가사들은 금세 작곡가의 마음을 사로잡아 오선보를 탔으며 뒤미처 가수의 감미로운 목청에 실렸다. 이때 석화는 그의 창작생애의 황금기를 맞으며 무려 수백 수의 가사를 창작한다. 가요 “동동타령”, “추억의 노래”, “어머님 생각”, “별과 꽃과 선생님”, “동그라미”, “노래를 부릅시다”, “돌다리” 등 가요는 지금도 널리 애창되고 있다.
날이 가고 달이 갔다. 방송국에서 근무한지 거의 20년 세월이 흘렀다. 애석한 그 무엇이 노래처럼 늘 가슴 한구석에 맴돌았고 그것이 풀지 못할 응어리로 되어 점점 커졌다.
“작품이 그냥 소리로만 만들어지고 책으로 남지 않는 게 늘 아쉬웠습니다.”
마침 연변작가협회 기관지인 “연변문학”에서 편집으로 초청하는 러브콜이 날아왔다. 석화는 그에게 한때 꿈의 향연을 펼쳤던 방송국을 미련 없이 떠난다. 자칫 “가요의 산원”을 포기하는 것으로 비치는 파격적인 전근이었다.
이 무렵 시인의 “자아”에 대한 고민은 하나의 정상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가 창작한 시들은 행마다 뼈를 깎는듯한 시인의 고뇌를 담고 있었다. 시 “우리는 개인가”, “나는 나입니다” 등등으로 그는 스스로 물음을 연방 제기하고 또 나름대로 그에 따른 대답을 찾고자 방황한다. 그의 말을 빈다면 시와 만나는 과정은 자아를 찾아가고 확인하며 구원하는 과정이었다.
드디어 석화는 시단에서 “나의 장례식”을 치르기에 이른다. 필묵을 던지고 문학석사 학위에 도전장을 냈던 것이다. 어제 날의 “시인”을 묻어버리고 새로운 “시인”으로 도약하기 위한 파격적인 행보였다. 2001년 그는 한국 대전의 배재대학교 인문대학원에 들어갔다. 어린 학생들과 함께 수강했지만 그 시간이 그토록 즐거울 수 없었다고 한다. 그는 모든 학과목에서 A학점을 취득, 드디어 2003년 학위론문 “김조규시문학 연구”로 문학석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이 기간 석화는 연변대학의 지인과 함께 서울과 지방의 대학, 문인협회에서 중국조선족문학알리기 세미나를 수십회 조직했으며 한국의 여러 간행물과 신문에 중국조선족문학과 관련한 론문을 십여편 발표했다. 2006년 그는 한국학술정보사에 문학평론집 “시와 삶의 대화”를 출간한데 이어 또 연변인민출판사에 “윤동주대표시 해설과 감상”을 펴냈다.
석화는 어느덧 학자풍의 시인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시인의 백년의 묵향(墨香)
운명인가 아니면 우연인가, 귀국한 후 석화가 창작한 첫 시는 또 “연변일보”에 발표된다. 련작시 “사모곡”이다. 그가 한국에서 공부를 하던 기간 연변에 계시던 양친은 모두 세상을 떴다. 부모에 대한 애절한 사랑은 나중에 시라는 이름으로 맺혀 드러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의 석화의 시는 민족의식과 디아스포라를 주제로 삼고 있으며 예전보다 한결 차원이 다른 사고와 경지를 열어 보인다.
시단에는 석화의 또 하나의 “처녀작”이 샛별처럼 떠오르고 있었다.
뒤미처 발표된 련작시 “연변”도 “사모곡”과 맥을 같이한다. 련작시 “연변”은 연변에서 살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들과 연변의 풍경, 풍습을 점점의 풍속화처럼 그려내고 있다. 한국 고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된 시 “천지꽃과 백두산”은 22편으로 된 이 련작시의 첫 시이다.
석화는 련작시 “연변”의 창작동기에 대해 “류학시절에 한국에서 그리운 북쪽하늘을 넋 없이 바라보던 시간이 있었다.”고 술회한다. 그리운 산천과 그리운 얼굴들이 흰 구름처럼 비껴있을 것만 같은 하늘이기 때문이었다.
“이른 봄이면 진달래가
천지꽃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피어나는 곳이다…”
진짜 머나먼 북쪽의 하늘아래에는 “천지꽃”의 고향이 있었고 또 연분홍의 “천지꽃”이 피어나 있었다.
석화는 충주(忠州) 석씨의 32대손으로 입북 14대이다. 그의 조부는 8세 때인 1911년 함경북도 부령에서 연변의 룡정 장재촌에 이주했다고 한다. 부친은 장재촌에서 태어나 화룡에서 생활했고 모친은 해주 최씨로 도문 출생이었다.
“저의 딸은 또 연길 태생이지요.” 석화는 인터뷰 도중에 외동딸의 자랑을 잊지 않았다.
딸 석현은 아빠보다 훨씬 더 이른 소학교 5학년 때 벌써 작품을 발표, 장편소설 “개구장이친구들”을 선후로 중국과 한국에서 출판했다. 석현은 현재 일본 도꾜대학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단다.
이처럼 조부가 이삿짐을 풀고 양친과 나, 자식을 양육한 연변에 시인은 한없는 사랑과 그리움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할아버지는 마을 뒤산에
낮은 언덕으로 누워 계시고
해살이 유리창에 반짝이는 교실에서
우리 아이들이 공부가 한창이다”
시는 또 연변에서 이주민들이 모여 살면서 집단촌이 이뤄지던 정경을 등장시키며 옛 우물인 “룡두레우물”을 시행으로 끌어들여 연변 조선족의 유구한 역사를 이야기한다.
“천지꽃과 백두산”은 석화의 가족뿐만 아닌 연변에 이주한 겨레의 백년의 삶과 꿈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것이다. 말 그대로 겨레의 연변의 백년 이주사가 “천지꽃”에 묵향으로 소담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중국민족》, 2013년 4월호
천지꽃 시인의 백년 묵향이 피어나다.hwp
첫댓글 잘 보았습니다 . 훌륭하시고 자랑스런 고구려의 후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