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양천재향경우회 산악회
제12차 산행(강화 정족산) 공지
►산행 일자 : 2025. 3. 15. (토)
►모이는 시간 장소 : 이날 08:30분
5호선 개화산역 1번 출구앞
►산행지 : 정족산 (강화, 220m)
►산행 코스
전등사 주차장→남문→강화삼랑성→
동문→남문→은행나무→전등사→
강화정족산 사고자→전등사→동문→
북문→정족산→서문→남문
<산행시간 2시간 30분>
►준비물 : 간식. 온수. 방풍자켓.
모자. 장갑 등등 기타 알아서~~~
▻산행중 막걸리는 에너지 보충용 훌륭...
막걸리 사오는것 대환영 하나 1병이외
출발전 무조건 미리 분배
►날씨 : 추후 공지
►참가비 : 없음 (뒷풀이 1/n)
▻뒷풀이시 사모포함 여성분은 1만원
▻차량봉사자는 기름값. 禁酒등 감안
뒷풀이비 면제 (4명 이상 승차시)
►참가대상 : 警友 (소속불문).
警友 가족. 警友 친구 지인 등
▶참고사항
►본 산행 및 트레킹 참가 하실분은
차량동원 등 감안 3월12일(수)까지
단톡방 댓글. 최폴리 폰 또는
문자 바람 (010-2990-0**9)
►차량 봉사 자원 환영
(특히 禁酒하시는 분)
►참가자 현재
접수중
2025. 02. 22. (토) 오후
서울양천재향경우회 산악회
회장 최 성 호....
►강화도는 역사의 보물이다~~~~
강화도는 우리나라에서 제주도. 거제도. 진도.
남해도에 이어 5번째로 큰 섬으로 한강· 임진강·
예성강을 품고있는 해운교통의 요충지로,
역사의 고비마다 크고 작은 사건의 무대로
등장했던 섬이다.
고려 때 몽고의 침략으로 수도를 천도하며
‘제2의 수도’로 떠오른 이래, 동서양
제국주의자들이 한반도를 넘볼 때 마다
강화도는 늘 최전방 전선이 되어 수난을
겪어왔다.
그만큼 선인들의 애환이 서린 흔적들이
허다하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고인돌 등 선사시대
유적부터 일제강점기 침탈 흔적까지 섬 전체에
유적이 깔려있고 하나하나 역사적 사실을
나열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한민족은 5천년 역사를 가진 단일 민족이다
단군 2333년 건국이후 끊임없이 외세침략을
받았는데 그 외침 횟수가 963회라는
얘기도 있고 993회 얘기도 있지만 힘이 없어
외침을 받아왔다는 역사적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번 강화도 트래킹에서 방문했던 그곳의
역사적 사실을 소개하는 내용의 분량이
너무 많아 극히 일부분 대충만 소개 한다
▶삼랑성(三郞城)
단군의 세 아들 부여, 부우, 부소가
쌓았다고 하여 삼랑성(三郞城). 성의 길이
2,300m 정도, 동서남북 각 방향에 성문이
있으며 전등사를 에워싸고 있다
►동문 앞에 양헌수 승전비가 세워져 있다
(병인양요 양헌수 장군의 공적 수록)
1866년 강화도를 침공한 프랑스 군대와
격전하여 승리한 승전비
▶전등사 역사
►전등사는 고구려 소수림왕 11년인
381년에 아도화상이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전등사는 한국 불교 전래 초기에 세워진 이래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사찰이다.
진나라에서 건너온 아도화상이 처음 절을
지을 때는 진종사(眞宗寺)로 불렀다고 한다.
고려 고종 46년인 1259년에 진종사 경내에
가궐을 지은 것으로 다시 기록에 등장한다.
고려는 1232년부터 1270년 사이 강화도에
임시 도읍을 정했다. 1266년 진종사는 크게
중창됐으며, 충렬왕 8년인 1282년 충렬왕의
왕비 정화궁주가 절에 대장경과 함께 옥으로
만든 법등을 기증하면서 진종사(眞宗寺)라는
절 이름을 전등사(傳燈寺)로 바꾸었다.
전등은 ‘불법(佛法)의 등불을 전한다’는
뜻으로, 법맥을 받아 잇는 것을 뜻한다.
1605년과 1614년 큰 화재로 타버렸으나
재건하여 1621년에야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1678년(숙종 4)에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사찰로 지정되어 왕실로부터 보호를 받게
되었고, 1719년(숙종 45)부터는 주지승을
도총섭(都摠攝)으로 임명하여 우대하였다.
1726년(영조 2) 영조가 직접 전등사에 와서
취향당의 제액을 쓰고 1749년(영조 25)
중수불사(重修佛事)에는 목재를 시주하여
이때 지금의 대조루(對潮樓)의 모습으로
지었다.
1909년 보관중이던 실록을 서울로 옮겨
사고로서의 지위를 잃었으나, 강화와 개성의
사찰을 관리하는 본산으로 승격되었다.
1866년 병인양요 때 피해를 보기도 하였는데,
그 당시 정족산성외부의 암자와 건물들을
프랑스군으로부터 방화되어 사라지고, 불상과
법전 등 문화재가 약탈당하기도 하였다.
특히 이곳이 관군과 프랑스군의 교전지였다.
대웅전에 들어가 보면 얼핏 낙서처럼 보이는
묵서(墨書)들이 곳곳에 적혀 있는데,
그 하나하나가 병인양요 당시 참전했던 조선군
병사들의 이름이다.
프랑스군과의 교전을 앞두고 전쟁에서 이기고
또 무사히 살아 돌아오기를 빌면서 병사들이
대웅전 불단 기둥에 자신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고 한다. 물론 이후 다들 살아남았다.
<출처 : 홍주일보 & 나무위키>
▶전등사 나부상 (傳燈寺 裸婦像)
►전등사(傳燈寺)는 호국불교의 근본 도량으로
역사와 권위를 간직한 사찰이다.
전등사 중심에 있는, 석가여래 삼존을 모신
대웅보전(보물 제178호)은 규모는 작아도
정교한 장식과 화려한 닫집으로 꾸며져 있어서
조선 중기 대표 건축물로 손꼽힌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전등사 대웅보전 네 모서리
기둥 윗부분에는 벌거벗은 여인 형상의 조각이
있다.
신성한 사찰에 그것도 부처님을 모시는 법당인
대웅전에 벌거벗은 여인의 조각이라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모습이다.(아래 사진 참고)
그래서일까. 혹자는 여인이 아닌 원숭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용과 더불어 원숭이도 불교를
수호하는 짐승으로 여기는데다가 조각상
생김새가 원숭이와 흡사해서 그런 듯하다.
그러나 대체적으로는 이 조각상을 벌거벗은
여인, 즉 나부(裸婦)로 보고 있다.
조선 광해군 때인 1614년에 화재로 말미암아
전등사의 모든 건물이 소실되자 지경 스님이
중심이 되어 대대적으로 전등사 재건 작업을
하게 되었다.
전국에서 실력 있는 목수들을 찾아내고 그 중
가장 뛰어난 자를 도편수(집을 지을 때 책임을
지고 일을 지휘하는 우두머리 목수)로 삼아
전등사 재건을 시작했다.
도편수는 고향에서 멀리 떠나온 터라 일을 하지
않는 시간에는 부쩍 외로움을 느꼈다.
그러다 보니 사하촌의 한 주막을 드나들다가
결국 주모에게 연정을 품게 되었다.
처음에는 내색도 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앓다가
어느 날 용기를 내어 주모를 불렀다.
▻오늘따라 왜 이리 심각하시대요?
►임자! 임자는 계속 이렇게 혼자 살 텐가?
▻거둬 주는 남정네가 있는데 이러고 살까요?
►임자! 내가 받을 돈이 푼푼한데 임자가
앞으로 내 돈을 맡아 주겠소?
▻저도 지아비만 바라보며 사는 여염집
여자가 되고 싶었어요.
주모는 얼굴에 화색이 돌며 웃음기를 보였다.
도편수는 주모가 자신의 마음을 받아주자
그녀가 더욱 사랑스럽게 여겨졌다.
그날 이후로 도편수는 돈이 생길 때마다
주모에게 돈을 가져다주었다.
►이제 조금만 더 모으면 집과 작은 밭
정도는 살 수 있겠지?
▻시간이 왜 이렇게 안 가는지 모르겠어요.
일 빨리 끝내고 오세요.
►당분간은 못 내려올 것 같아.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된다오.
도편수는 주모의 애교 섞인 재촉을 보니
함께 사는 것이 더 간절해졌지만 일만큼은
소홀히 하지 않고 불심을 다했다.
며칠 동안은 주막에 내려가지도 못하고
작업을 했다. 대웅보전 재건 작업도 이제
막바지에 이르렀다.
작업이 곧 마무리될 거라는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도편수는 주막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주막에는 사람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임자! 나왔어! 어디 있는 거야! 임자!
주모가 보이지 않자 도편수는 마음이
조급해져 더 큰 소리로 주모를 불렀다.
그 소리에 옆집 할멈이 사립문 앞에서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 불러도 소용없수. 며칠 전에 쫓기는
사람처럼 밤에 짐을 싸서 떠났으니까.
►잘못 보신 게지요. 주모가 뭣 때문에
그리한다 말입니까.
- 아, 이 양반아. 야반도주했다 이 말이오.
아마도 못 찾을 거요.
도편수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럴 리 없다고 부정하던 마음은
차차 분노로 바뀌었다.
작업장에서도 주모에 대한 분노와 배신감에
도통 일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며칠을 보낸 도편수는 문득
부처님을 뵐 면목이 없음을 깨닫고는
마음을 다잡아 재건 작업을 마무리했다.
재건된 대웅보전 네 모서리 기둥 윗부분에는
벌거벗은 여인 형상의 조각상이 지붕을
떠받치고 있었다.
나부상을 자세히 보면 네 개의 조각이
제각기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두 손을 모두 올리고 있는 것이 있는가 하면
한 손만 올린 것도 있고 옷을 걸친 것도 있다.
과연 도편수는 단지 복수의 의미로만
이 여인을 조각해 올려놓은 것일까. 그러나
그렇게 보기에는 이 조각상의 표정이 그리
고통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도편수는 그 여인이 대웅보전의
지붕을 떠받치며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고
죄를 씻어내길 바라는 마음으로 조각상을
만든 것이리라.
부처님을 모신 성스러운 법당의 추녀 밑에
벌거벗은 여인의 조각을 발견한 스님들이
이것을 없애지 않고 너그럽게 받아들인 것은
도편수의 진심이 전해졌기 때문이 아닐까.
정답은 도편수만 알겠지만,
나부상을 바라보며 도편수의 마음을
추측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하다.
<2011.8.11.>글, 최민정 기자 /
EBS독학사 국어국문학과 교수
▶철제 범종
►전등사에는 철제 중국 범종이 있는데,
보물 제393호로 지정되었다.
보물로 지정된 종들 중에서는 유일한
중국 종이다. 원래는 중국 허난 성 백암산
숭명사의 종이었고 해방 후 인천의 부평
군기창에서 발견하여 전등사로 옮겨졌다.
어떻게 한국으로 오게 됐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배를 통해 실어날랐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데, 일제강점기 말에 쇠붙이를
강제 수탈하던 때에 중국에서 반입한 것이
일본의 패망이후 낙오되어 인천에 남지
않았는가 추측하지만 확실하진 않다.
<출처 : 나무위키>
▶정족산 사고지
현재 정족산 사고지(鼎足山史庫址)는
정족산성 안 전등사 서쪽 높이 150m에
위치하며, 사고지의 보호철책 안쪽에는
주춧돌들이 놓여져 있다. 또한, 성내에는
수호사찰(守護寺刹)인 전등사가 사고를
보호해왔으므로 1910년 조선총독부 학무과
분실로 실록과 서적들이 옮겨질 때까지
보존될 수 있었다.
사고 건물이 언제 없어졌는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1931년에 간행된
≪조선고적도보 朝鮮古蹟圖譜≫에
정족산사고의 사진이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때를 전후해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사고 건물에 걸려 있었던
‘장사각(藏史閣)’과 ‘선원보각(璿源寶閣)’이라
쓰인 현판이 전등사에 보존되어 있다.
이 사고에 보관되어오던 정족산사고
본 실록들은 많은 변동은 있었지만, 임진왜란
때에 유일본으로 남은 전주사고본이 묘향산
사고로 피난했다가 마니산사고로 옮겨졌고,
이 마니산사고본의 잔존실록들을 옮겨서 보관,
관리해 오늘에 전해질 수 있게 된 것이다.
현재 정족산사고본 실록은 서울대학교
도서관에서 보존, 관리하고 있다.
<출처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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