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간증: 1086. [역경의 열매] 김성영 (1-25) 한쪽 팔 잃고도 잃지 않은 희망
"선생님, 박 병장 누나입니다. 사모님과 함께 제 동생을 위해 머나먼 여수에서 서울의 병원까지 와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그날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제 동생이 받은 마음의 상처를 어찌 감당했을지…. 동생은 얼굴이 '오픈된' 본인의 모습을 상상하며 치료실 앞에서 눈을 감고 눈물을 꾹 참더라고요. '내가 징그러워?'라고 묻는 동생의 말에 '하나도 그렇지 않아'라면서 빙그레 웃어줬어요. 치료실에서 동생을 부축하고 병실로 오면서 뭐라고 위로를 해줘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와 계시더라고요. 정말이지 천사를 만난 기분이었습니다. 제 동생의 눈물을 멈추게 해주신 분이 바로 선생님이니까요. 선생님께서 입으신 옷을 하나 하나 벗으시고, 본인의 상처를 보여주시며 제 동생을 위로해주실 때 정말 눈물이 나서 혼났습니다. 선생님은 동생과 저희 가족에게 희망을 주셨습니다."
내 컴퓨터에는 2006년 6월 박 병장의 누나에게서 받은 여러 통의 이메일이 그대로 보관돼 있다. 당시 메일을 주고받으며 얼마나 가슴이 벅차올랐던지….
지금까지 온갖 고난과 시련을 참고 견디며 살아온 나의 60년 삶이 절망 속에 빠져 있던 한 젊은이에게, 또 그 가족에서 용기를 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나는 박 병장의 어머니를 통해 40년 전 우리 어머니의 애타는 마음을, 그 누나를 보면서 우리 형님의 모습을 지켜보는 듯했다.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는 뼈아픈 지난날의 추억과 함께 지금은 천국에 계시는 어머니와 형님이 사무치게 그리워진다.
박 병장은 바로 40년 전 나의 모습이다. 군복무 중 감전 사고로 큰 부상을 입고 생사의 기로에서 응급조치로 한쪽 팔을 절단한 청년, 그게 바로 나였다. 10개월의 투병생활 중에 예수님을 영접하고 상이1급 국가유공자로 의병제대한 나는 1970년 10월부터 지금까지 여수제일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불편한 몸이지만 청년회장도 지냈고, 37년 동안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고 있다.
또 청년회장 때는 '충무공의 구국성지이며 손양원 목사님의 순교성지인 여수시를 예수시로 성시화하자'는 기치로 여수성시화운동본부를 창설했다. 여수공단 사택 어머니 성경공부반을 비롯해 다섯개 팀을 길게는 7년, 짧게는 3년간 인도하기도 했다.
누구는 "어떻게 이런 몸으로 그 많은 일을 하느냐"고 묻는다. 나는 그 때마다 구레네 시몬의 십자가를 떠올린다.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진 시몬. 오랫동안 주님의 사랑과 교훈을 받아온 수제자 베드로와 제자들이 외면한 그 십자가를, 길가에서 구경하던 시골사람 구레네가 지고 갔던 것이다. 그를 생각하며 나 역시 "하나님의 강권적인 사랑에 붙들려 이 작은 사명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 "죽음에서 건져주신 생명의 주님과 사랑의 약속을 지키고자 힘쓰는 것"이라고 고백한다.
정리=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
* [역경의 열매] 김성영 (1) 한쪽 팔 잃고도 잃지 않은 희망
* [역경의 열매] 김성영 (2) ‘땔감장수’ 어머니 고생에 공부로 보답
* [역경의 열매] 김성영 (3) 군 복무중 고압선 감전… 생사 갈림길
* [역경의 열매] 김성영 (4) 가슴 후비는 질문 ‘김일병… 종교있나’
* [역경의 열매] 김성영 (5) 악화되는 상처… 생명과 바꾼 왼쪽 팔
* [역경의 열매] 김성영 (6) 절망 뒤에 찾아오는 따뜻한 위로
* [역경의 열매] 김성영 (7) 밀려오는 권태… 성경책 붙잡아
* [역경의 열매] 김성영 (8) 진한 감동 준 전도팀… 마음문 열려
* [역경의 열매] 김성영 (9) 여수제일교회 출석… 교사직 맡아
* [역경의 열매] 김성영 (10) CCC와의 만남은 큰 선물
* [역경의 열매] 김성영 (11) 기차역 4분 만남 ‘뜨거운 감동’
* [역경의 열매] 김성영 (12) 손·팔 대신해주는 소중한 반려자
* [역경의 열매] 김성영 (13) 고향마을 축사 개조 호명교회 창립
* [역경의 열매] 김성영 (14) 장애 한탄… 울며 걷던 서울역 광장
* [역경의 열매] 김성영 (15) 여수시를 ‘예수시’로… 82년 첫 집회
* [역경의 열매] 김성영 (16) 신학교 대신 평신도 사역 선택
* [역경의 열매] 김성영 (17) 생활속에서 향기 나는 평신도 사역
* [역경의 열매] 김성영 (18) 내 찬송 들으시며 어머님은 그렇게…
* [역경의 열매] 김성영 (19) 어머니 성경공부 이끌며 변화의 힘 체험
* [역경의 열매] 김성영 (20) 41세때 최연소·최다득표 장로 당선
* [역경의 열매] 김성영 (21) 섬마을서 춘향전 ‘사랑가’로 복음 전해
* [역경의 열매] 김성영 (22) 美 여행후 “할 수 있다” 자신감 불끈
* [역경의 열매] 김성영 (23) 130개였던 교회 수,28년새 550곳으로
* [역경의 열매] 김성영 (24) 주어진 달란트로 노력하는 세 아들 뿌듯
* [역경의 열매] 김성영 (25·끝) “만민에 복음 전하는 소명자로 살 것”
<약력>△1946년 전남 여수 출생 △한국기독실업인회 여수지회장, 한국대학생선교회 여수지부 나사렛형제들 회장 역임 △여수기독교직장연합선교회 고문 △호남사진관 대표 △여수성시화운동본부 대표 △여수제일교회 장로
***[역경의 열매] 김성영 (2) ‘땔감장수’ 어머니 고생에 공부로 보답
나는 1946년 전남 여천(여수)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살고 있다. 아버지는 광복 전 순천농업학교를 졸업하고, 여천군청 공무원으로 근무하셨지만 내가 어렸을 때 돌아가셨다. 이 때문에 형님과 나는 가난한 시골 마을에서 어렵게 자랐다. 어머니는 우리 형제를 잘 키우기 위해 힘겨운 농사일과 삯바느질, 땔감 장수 등 온갖 고생을 무릅쓰셨다.
"'가벼운' 떡장수 어머니의 아들인 한석봉도 훌륭한 사람이 됐는데, '무거운' 나무장수 어머니의 아들인 나는 더욱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며 어린 마음에도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려고 열심히 공부했다. 그 결과 상암초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러나 가정 형편이 어려워 여수 시내 중학교에 합격하고도 진학하지 못했다. 이듬해 봄 8㎞ 거리의 면소재지 삼일중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중학교에서도 3년 동안 반장과 학생회장을 놓치지 않았고 수석 졸업했다.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첫 입학생을 뽑은 5년제 실업계 국립여수수산고등전문학교(현 전남대 여수캠퍼스)에 수석으로 들어갔다. 전문학교 1학년 때인 63년 10월에는 모범학생으로 뽑혀 당시 여수를 처음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에게 화환을 증정했다. 3학년 때는 총학생회장과 5·16장학생(정수장학생)으로 선발됐고, 수산연구직 국가공무원 시험에도 붙었다. 마침내 68년 2월24일 제1회 전체수석졸업생으로 문교부장관상을 받았다.
나는 어머니와 형님의 기쁨이요, 삶의 활력소였다. 졸업식 날, 어머니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씀하셨다.
"20개 성상(星霜)에 태산도 하 많더니, 평탄(平坦)한 길 예 있구나!"
지나온 20여년의 세월 동안 가난과 슬픔, 남편 없는 설움, 남들처럼 자식의 꿈을 제대로 키워주지 못한 가슴 아픈 사연들을 되새기며 토해내신 말씀이리라. 그러나 그날의 영광은 우리 가족에게 고생의 끝도, 행복의 시작도 아니었다.
68년 1월, 북한 무장공비 특공대의 청와대 습격 미수사건이 일어났다. 온 나라는 비상사태였고, 4월에는 향토예비군이 창설됐다. 나라 밖에서는 월남전이 격화돼 국군장병들이 증파되고 전사자도 늘어갔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의 부름을 받고, 9월 광주 31사단에 육군사병으로 입대했다. 키 181㎝, 체중 75㎏의 육척 장신에다 목소리가 우렁찼던 나는 첫눈에 향도 기수와 훈련병 대표 선서자로 뽑혔다.
광주에서 신병 기초군사교육 6주간을 마치고, 대구 육군군의학교에서 6주간의 병과교육을 받은 후 위생병이 됐다. 68년 성탄 전날 밤, 함박눈이 소리 없이 내려 쌓이는 동대구역에서 위생병 동기들은 자루가방(더블백)을 어깨에 메고 야간호송 군용열차에 몸을 실었다. 그때 한 전도팀이 캐럴을 부르며 위문품이 든 봉투를 나눠줬다. 찹쌀떡 두 개와 사탕 대여섯 개, 그리고 성경구절이 적힌 그림엽서가 들어 있었다.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시 37:4∼6) 이날 본 말씀은 곧 닥칠 내 삶의 소용돌이 속에서 큰 힘이 됐다.
***[역경의 열매] 김성영 (3) 군 복무중 고압선 감전… 생사 갈림길
나는 의정부 101보충대를 거쳐 경기도 포천에 주둔한 부대의 본부중대로 배치받았다. 입대후 6개월 만에 첫 휴가를 다녀온 뒤 더욱 성실히 군복무에 전념했다. 사격대회에서 특등사수 배지를 획득했고, 웅변대회에서도 1등하며 사단장 표창도 받았다. 마침내 모범사병으로 뽑혀 10일간의 포상휴가를 얻게 되었다.
'1969년 10월16일!' 기억 속에서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숫자들이여….
고향의 어머니에게 포상휴가를 가게 되었노라며 설레는 마음을 담아 편지를 띄우고 하루하루를 기다렸다. 그리고 휴가 출발 하루 전, 바로 그날이었다. 직속상관인 K중위가 나를 불렀다. "김 일병! 여기 고압선 전신주의 안전스위치가 고장난 것 같은 데, 한번 올라가 봐라."
나는 통신병이 아니고 위생병이란 사실을 밝혀 거부했지만 재차 명령을 받았다. 10m 높이의 전주를 어쩔 수 없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K중위가 지켜보는 가운데 좌우에 계단식으로 박힌 발판을 밟고 전주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잠깐 헐떡이는 숨을 몰아쉬고 안전스위치로 오른손을 뻗쳤다. 그 순간 '번쩍'하는 섬광과 함께 정신을 잃고 말았다. 나는 그대로 추락했다. 고압선에 감전된 것이다. 눈 깜짝할 사이 전신 화상을 입고 피투성이가 돼 바닥에 떨어진 것이다. K중위는 부근의 사단 의무중대로 나를 옮겼으나 계속 혼수상태였다고 한다. 나의 몸은 완전히 절망적인 상태로 대기 중이던 군용 구급차에 실려 서울로 급히 후송됐다.
오후 5시30분쯤. 늦가을 석양빛을 받으며 생명이 위독한 응급환자를 싣고 서울을 향해 질주하는 구급차 안에서 나는 몽롱하게나마 의식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의식이 돌아올수록 이내 참을 수 없는 통증과 갈증으로 심하게 몸부림쳤다. 곁에는 K중위와 의무대 J중위가 타고 있었다. 그들은 버둥대는 나를 꼭 붙잡고 주사를 놓았다.
"운전병! 빨리 몰아! 더 빨리!" 다급하게 재촉하는 소리를 희미하게 들으며 또 다시 의식을 잃었다. 내가 눈을 떴을 때는 환한 전등불 밑에 누워있었고, 흰 가운을 입은 낯선 군의관들과 간호장교들이 보였다.
창동57후송병원(현 국군창동병원)에서 나는 발가벗겨진 채 전신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피는 계속 배어나왔다. 오른 팔엔 링거 주사를, 오른 다리엔 AB형의 피를 긴급 수혈 중이었다. 마취상태가 풀리자 다시 성난 짐승처럼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사고 이후 출혈이 많았던 나는 상처의 통증보다 탈수로 심한 갈증을 느꼈다. 그러나 출혈이 심한 사람이 물을 많이 마시면 혈액 농도가 낮아져 위험하기 때문에 목도 축이지 못했다. 쓰라린 화상의 고통과 갈증, 그리고 불연속적으로 반복되는 고열과 오한 속에서 사경을 헤매며 기나긴 고통의 밤을 홀로 지새웠다.
점점 밝아오는 창밖을 내다보며 인간의 한계를 느꼈다. "만약 하나님이 계시다면?" 옛날 집 근처 교회당에서 귀동냥으로 전해듣던, 외롭고 곤고할 때마다 혼자 부르시던 어머니의 찬송 구절이 떠올랐다.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불쌍히 여겨 구원해 줄이 은혜의 주님 오직 예수…."
나는 알지도 못하는 주님을 그렇게 찾고 있었다.
***[역경의 열매] 김성영 (4) 가슴 후비는 질문 ‘김일병… 종교있나’
이른 아침, 치료를 받기 위해 전신을 감았던 붕대를 풀었다. "아∼!" 작은 비명과 함께 질끈 눈을 감아버렸다.
젊음이 느껴졌던 싱싱했던 내 피부는 참나무 껍질처럼 갈기갈기 찢어지고 조직이 파괴된 채 숯덩이처럼 까맣게 타 있었다. 고압선에 접촉된 오른손 바닥은 칼로 도려낸듯 깊게 홈이 파였고, 손목과 팔꿈치 부근, 왼쪽 허벅지엔 커다란 구멍이 나서 밀집 같은 힘줄이 노출된 상태였다. 왼쪽 경부와 왼팔은 완전히 타서 형체가 흐트러져 있었다.
등살은 모두 떨어져나간 듯 썰렁하고 허전했다. 사람이 전신 3분의 1 이상 중화상을 입으면 생명이 위독하다고 한다. 상처를 통해 다량의 진액과 혈액이 유출되고 세균오염에 쉽게 노출되기 때문이다. 나는 전신의 35%에 해당하는 3도 이상의 심한 전기화상을 입었기에 생명까지 위협받고 있었다.
이튿날 나는 들것에 실려 대기 중이던 구급차에 옮겨졌다. 순간 화장터가 뇌리에 스치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당황하여 새파랗게 질린 나를 보며 군의관이 말했다.
"김 일병! 안심해. 상처가 너무 심하고 장기치료가 필요하기 때문에 여기보다 시설도 좋고 의약품 보급이 잘되는 수도육군병원(현 국군서울지구병원)으로 옮기는 거야."
팔에 링거를 꽂고 후송되는 중에 나는 눈 감고 낯익은 중부전선의 산야와 고향의 어머니 모습을 그렸다. 어머니가 그리웠다. 그냥 이대로 어머니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죽을 것만 같았다.
창동57후송병원을 떠난 지 1시간쯤 뒤 수도육군병원 응급실에 도착하자 군의관 등이 '우루루' 몰려왔다. 그리고 두 명의 군의관과 한 명의 간호장교가 2시간 동안 나의 몸 이곳저곳을 치료했다. 이 병원에서도 인적사항을 조사했지만, 여전히 보호자 이름과 주소를 알려주기를 거부했다.
그리고 또다시 찾아온 고통의 밤…. 응급실은 생지옥이나 다름없었다. 나뿐 아니라 고통 중에 울부짖는 중환자들의 신음과 몸부림 때문에 처절하게 밤을 지새웠다. 다음날 아침, 10여명의 군의관들이 회진을 돌았다.
"김 일병! 좀 어때?"
그들은 말 없는 나를 지켜봤다. 그때 한 군의관이 말했다. "김 일병! 종교 갖고 있나?"
침대에 누워 문득 질문을 던진 군의관을 쳐다보았다. 나는 그의 낯선 눈빛에서 내가 죽어가고 있음을 읽었다. 어떤 군의관은 안타까운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깊은 물속에 자꾸만 거꾸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냥 체념한 듯 눈을 감아버렸다.
인간은 누구나 생명과 사명을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고 이 세상에 태어난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살아야 한다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그럼 사명이란 무엇인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생명의 존재가치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라는 하나님의 또 다른 명령이다.
일찍이 영국의 아프리카 선교사 리빙스턴은 "사명자는 사명이 끝나기 전까지는 결코 죽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때 생명의 끈을 놓지 않았기에 나 역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키 위해 지금도 애쓰고 힘쓰는 게 아닌가.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역경의 열매] 김성영 (5) 악화되는 상처… 생명과 바꾼 왼쪽 팔
"김 일병! 최소 6개월 이상 입원치료를 받아야 해. 그러니 우선 보호자가 필요해."
담당 군의관의 지속적인 성화에 못 이겨 어렴풋이 떠오른 고향 친구 황우연의 전화번호를 가르쳐줬다. 그는 당시 연세대 4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연락을 받은 황우연이 밤 10시쯤 달려왔다. 친구를 보니 가슴이 더 답답하고 목이 메었다. 황우연은 어머니가 놀라시지 않도록 잘 말씀 드리겠다며 나를 진정시켰다.
사고 발생 5일 만에 드디어 어머니를 만났다. 어머니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겠노라 애써 다짐했지만, 나를 껴안고 한참을 우시는 어머니를 보며 이내 무너져버렸다. 어머니는 붕대 감긴 상처 부위를 일일이 어루만지셨다. 그러고는 "선생님, 우리 아들 좀 살려주세요"라며 병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군의관에게 애원했다. 어머니는 내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으셨다.
내 몸에는 24시간 내내 링거액과 피가 수혈됐다. 화기(火氣)로 인해 온몸에서 물이 줄줄 흘러 2시간마다 침대 시트를 갈아야 했다. 그러면서 점점 기억력까지 상실해 생명의 한계선으로 시시각각 다가가고 있었다.
군의관이 뭔가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는 듯 어머니 앞에서 머뭇거렸다. 그는 일단 어머니의 마음부터 진정시켰다.
"아드님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팔을 절단하는 것입니다. 상처가 가장 심하고 신경과 혈관이 파열된 왼쪽 팔을 절단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절대로 안됩니다. 차라리 이 어미 팔을 잘라주세요. 죽어도 내 아들 장애인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군의관들은 어머니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비록 나 모르게 그런 말들이 오갔다고는 하나, 위생병이었던 나는 누구보다 내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살고 싶었다. 어머니를 만나기 전에는 그저 이대로 끝내고 싶었지만, 좀 더 오래도록 어머니 곁에 있고 싶었다.
어느새 어머니는 마음의 결단을 하신 듯했다.
"성영아, 너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구나. 나는 그 길을 선택하기로 했다. 절대 후회하지 않으련다. 우리 함께 이 난관을 헤쳐나가자. 너에겐 이 어미와 형이 있잖니."
"어머니, 용서하세요. 저에게 물려주신 육신을 지키지 못했어요. 평생 사죄하는 마음으로 살겠습니다."
어머니는 간호장교의 부축을 받고 군의관실에서 수술 동의서에 손도장을 찍으셨다. 엄지손가락을 꾹 깨문 어머니는 절단하게 될 나의 왼쪽 팔을 부여잡고 한참을 흐느껴 우셨다. 그리고 밤이 새도록 그 팔을 쓰다듬으셨다.
1969년 10월23일 오후 1시. 나는 이동침대로 옮겨졌고 수술실로 향했다. "괜찮다, 아들아! 힘내라"는 어머니의 음성이 수술실 입구까지 들렸다. 그리고 '철커덩' 수술실 문이 닫히고, 이제부터 나는 혼자였다. '잠을 자고 나면, 한 팔이 사라질 테지. 이제 나는 어떻게 사나?' 두려움에 입술이 덜덜 떨렸다. 그런데 그 순간, 떠오른 것이 있었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시 37:4∼6) 68년 성탄 전날 밤, 동대구역 플랫폼에서 전도팀으로부터 건네받은 엽서에 적힌 말씀이었다. 나는 그 말씀에 간절하게 매달리고 있었다.
***[역경의 열매] 김성영 (6) 절망 뒤에 찾아오는 따뜻한 위로
"성영아…."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몽롱한 중에 들리는 희미한 음성, 나를 부르는 어머니였다.
"어머니, 저… 팔… 잘랐어요?"
어머니는 내 얼굴을 만지며 속삭였다. "그래, 수술이 참 잘 됐단다."
다음날 새벽, 형님을 만났다. 내가 입대한 이후부터 형님은 고향 선배가 운영하던 사진관에서 사진기사로 일하셨다. 경주로 수학여행을 떠난 학생들의 사진을 찍기 위해 동행했다가 뒤늦게 사고 소식을 전해 듣고 밤새 야간열차를 타고 달려온 것이다.
"성영아, 살아줘서 고맙구나. 팔 다리가 없어도 상관 없다. 내가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 그저 어머니와 내 곁에서 오래도록 살아만 있어다오. 이렇게 너를 만나 목소리를 듣고, 깜빡이는 너의 눈동자를 볼 수 있어 아주 좋구나."
그러나 형님은 사진관을 오래 비울 수 없어 수술한 나의 모습만 확인하고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셨다. 그렇게 잠깐 형님을 만나고 나는 혼수상태에 빠졌다. 팔을 절단해 몸의 균형이 깨짐으로써 체온과 혈압이 급상승 급강하를 수차례 반복한 것이다. 사흘간 죽음의 고비를 넘나들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 왼팔이 없는 텅 빈 공간을 확인하고 또 다시 깊은 절망감에 빠져버렸다.
그때쯤 K중위가 처음으로 문병을 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머니는 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거듭 했다. K중위는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지금도 내 시선을 의식하고 당황해 어쩔줄 몰라하던 그의 모습이 선명하게 기억난다.
"K중위님! 거절하던 나를 강제로 전주에 올려보내더니 결국 이렇게 만들어주셨군요."
목에서 터져나오는 이 말을 억지로 삼켰다. 끝내 아무말도 하지 않고 그를 돌려보냈다. 그리고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분명 그 순간 내 입을 막으셨으리라. 만약 순간을 넘기지 못하고 그에게 원망과 불평을 쏟아냈더라면 아마도 K중위는 가슴속에 평생 지울 수 없는 대못 한개를 안고 살았을 테니까.
나는 수도육군병원으로 옮겨온 지 19일 만에 중환자실에서 3층 일반외과 병실로 옮겨졌다. 침대에 누워 오랜만에 창문으로 서울의 푸른 하늘을 내다볼 수 있었다. 마음도 한결 편안해졌다. 문득 이렇게 살아서 숨을 쉰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고 당시 전주에서 추락할 때 머리나 척추를 다쳤다면…. 그저 생각만 해도 끔찍할 뿐이었다.
그런데 그런 편안함을 느끼는 것도 잠시였다. 화상의 가장 골칫거리인 화농성균에 오염되어 상처에서 악취가 풍겨나고 피부가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한쪽에선 새 살이 돋아나면서 치료 받기가 더욱 고통스러웠다. 생살을 깎아내고 뼈를 절단했으니 그 고통을 어찌 말로 표현하리. 담당 군의관인 황용(현 남원의료원장) 중위는 그때마다 나를 격려했다.
"김 일병, 자네는 많이 배워서 잘 알거야. 영어 단어 'patient'는 '환자'라는 뜻도 있지만 '참고 견디다'라는 뜻도 있어. 부디 잘 참고 이겨내라고. 힘내. 언제나 김 일병을 응원해!"
하나님은 내 삶에 잊을 수 없는 이들을 순간 순간 만나게 하심으로써 나를 단련시키셨다.
***[역경의 열매] 김성영 (7) 밀려오는 권태… 성경책 붙잡아
1969년 11월25일,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는 강추위 속에서 나는 구급차에 몸을 실었다. 수도육군병원으로 온 지 37일 만에 부산 제3육군병원으로 옮겨야 한다는 후송 특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서울 청량리역에 도착, 후송열차 침대에 옮겨졌다. 서울의 하늘 아래 팔 하나를 버려두고 아무런 기대도 없이 부산으로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서글픔이 밀려들었다. 아침에 출발한 기차는 밤 늦게야 부산진역에 도착했다. 다시 구급차에 실려 제3육군병원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후송으로 인해 상처는 악화되었고, 나를 맡겠다는 군의관도 선뜻 나서지 않았다. 그러던 중 부산대 의대 출신 레지던트 이무웅(현 부산 펜텀의원장) 중위가 나를 담당하게 됐다.
매일 수술실에서 2시간씩 치료받았다. 고통이 심하다고 진통제인 몰핀을 계속 맞다 보면 상처가 아물 때쯤 아편중독자처럼 된다는 군의관의 말에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러나 참고 견디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날로 더해지는 육신의 고통에서 그만 벗어나고 싶었다. 병실 바닥에 담요를 깔고 새우잠을 주무시는 어머니의 고생도 덜어드리고 싶었다. 식사는 물론 대소변과 양치질도 어머니의 손을 빌리는 못난 아들….
'자살', 어느새 마음속에 새겨진 두 글자. 눈 앞의 현실에서 그만 해방되고 싶었다.
유난히 추웠던 그해 12월의 어느날, 중환자실 내 침대 맞은편에 누워 있던 박 병장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는 전방에서 총기사고로 복부 관통상을 입고 오랜 기간 어머니의 간호를 받아왔지만 끝내 눈을 뜨지 못했다. 아들의 시신을 부여잡고 울부짖는 어머니의 고통을 무슨 말로 표현하리.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 역시 감정을 다스리기 힘들었다.
"죽으면 모든 것이 해결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더 큰 슬픔이 남는구나. 내가 만약 죽는다면? 박 병장 어머니의 모습이 곧 내 어머니 모습은 아닐까. 더 큰 불효를 짓기 전에 마음을 추스르자."
자살은 절망 속에 빠진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도, 최후의 수단도 아니었다. 어머니의 고통을 생각하니 그 어떠한 아픔도 기꺼이 참아낼 용기가 생겼다.
나는 전신마취 상태에서 여섯 차례 피부이식 수술을 받았다. 하나의 깊은 상처를 아물게 하기 위해 성한 피부에 또 하나의 새로운 상처를 내야 했다. 어느새 내 육신은 만신창이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피부 이식은 참고 견딘 보람이 있어 모두 성공했고, 상처는 빠르게 아물었다. 그렇게 상태가 호전될 때쯤, 이번엔 정신적인 번민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해는 바뀌었는데, 희망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병실 생활은 권태롭고 짜증스러웠다. 밤을 꼬박 새우는 일도 허다했다. 생사의 기로에서 목숨을 건졌지만 인생의 근본 문제에 대해 수시로 질문을 던졌다. 그때부터 갈급한 마음에 책을 읽기 시작했다. 성경과 문학에 관한 책에 특히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책 한 권 보는 게 쉽지 않았다. 손으로 책장을 넘길 수 없어 베개 위에 책을 올려놓고 입술로 넘기거나 어머니와 간호장교들의 도움을 받았다. 나는 이처럼 힘겹게 소망의 빛을 찾아 나섰다.
***[역경의 열매] 김성영 (8) 진한 감동 준 전도팀… 마음문 열려
부산 제3육군병원 휴게실에서 영국의 맹인 작가 밀턴이 쓴 '실낙원'을 읽던 중 베토벤의 교향곡 '운명'을 듣게 됐다.
"어떻게 시각장애인이 가장 밝은 빛을 볼 수 있고, 청각장애인이 가장 높고 낮은 소리를 들을 수 있단 말인가. 헬렌 켈러, 르드 바이런, 프랭클린 루스벨트도 모두 장애인이 아니던가!"
바로 이것이었다. 내가 찾고 있던 소망의 빛, 그것은 보고 듣는 육신의 눈과 귀로 얻어지는 게 아니다. 바로 신앙을 통한 생명의 의지와 사랑에서 오는 귀한 선물이다. 그럼 나는 이 빛을 어떻게 만났을까.
제3육군병원에는 여러 종교단체들의 위문공연이 이어졌다. 그 가운데 목요일 오후마다 찾아오는 전도팀이 있었다. 그들은 병실마다 찾아가 위문품을 나눠주고 손을 잡고 기도해줬다. 나는 정장 차림에 새하얀 머리가 인상적이던 50대 신사가 이끄는 이 전도팀에 관심을 가졌다.
어느날 그 신사는 출애굽기 3장을 읽은 뒤 '불 타지 않는 떨기나무' 앞에 선 모세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또 사사기 7장의 '기드온 300명 용사' 이야기도 전했다. 그 말씀을 듣는데 마치 하나님 앞에 선 모세처럼 내 몸도 '덜덜' 떨렸다. 그 신사의 잔잔한 미소와 신비한 눈빛은 내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는 듯했다. 드디어 신사가 말을 건넸다. "하나님은 당신을 지극히 사랑하십니다."
그는 1·4후퇴 때 월남해 부산 세광교회를 섬기는 강세원 장로(2004년 84세로 작고)였다. 장로님은 부산 지역의 보육원과 양로원, 소년원, 군부대 병원 등을 순방하며 복음을 전하는 평신도 전도자였다.
장로님을 만나고 나는 성경을 더 열심히 읽었다. 모든 것이 새롭고 신기하기만 했다. 어머니와 목요일 오후마다 강 장로님이 인도하는 예배에 참석, 큰 은혜를 받았다. 장로님이 전하는 말씀, 부르는 찬송들은 마치 나를 위해 모두 예비된 것 같았다. 특히 장로님은 "찬송은 곡조 붙은 기도이기에 간절히 부르면 마음문이 열리고 큰 위로와 평안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찬송을 부르고 말씀을 읽는 사이 나의 눈과 귀는 어느새 하나님을 향해 열려 있었다.
"주여, 이제껏 세상의 헛된 빛에 눈이 멀어 당신의 참 모습을 보지 못하였나이다. 이제껏 세상의 헛된 소리에 귀가 멀어 당신의 참 음성을 듣지 못하였나이다. 이제껏 죄악과 오만과 무지로 인하여 당신이 살아계심을 의심하였나이다. 간절히 무릎 꿇어 비옵나니, 당신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깨달아 온 세상에 증거하고 전파하는 귀한 종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신앙고백 이후 진정한 평화와 감사가 흘러넘쳤다. 1970년 5월 하순 어느날, 어머니는 지난 밤 꿈 얘기를 들려주셨다.
"하얀 옷을 입으신 예수님이 촛불을 가득 담은 바구니를 안고 병실로 들어오셨단다. 예수님은 환자들에게 촛불을 한 자루씩 나눠주시고 이내 우리쪽으로 다가오셨지. 내가 중환자실 입구에서 '우리 아들도 촛불 한 자루 주세요'라고 했더니 예수님은 바구니를 나에게 건네시며 '중환자실 아들한테 대신 좀 나눠주라'고 말씀하시더구나." 예수님이 그 꿈을 통해 전도자의 사명을 나에게 미리 보여주신 것은 아닐까.
***[역경의 열매] 김성영 (9) 여수제일교회 출석… 교사직 맡아
1970년 7월7일 의수(義手)를 찾았다. 서울에서 잃은 팔을 부산에서 되찾은 셈이다. 육신의 한 팔은 잃었지만 영혼의 한 팔을 얻었다고 스스로 위로했지만 어머니와 나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7월31일 의병제대하고 퇴원했다. 무더운 삼복 중에 긴소매 점퍼 차림으로 병원문을 나섰다. 의수를 하고 1급 상이용사가 되어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앞으로 맞닥뜨릴 현실을 생각하니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 죽는 날까지 옷을 입혀주고 세수도 시켜주고 화장실도 따라가 도와줘야 하는데…. '전속 간호인'이 필요한 나의 귀향은 좀처럼 기쁘지 않았다. 훗날 나는 그날의 마음을 '귀향'이라는 제목으로 시 한 편을 남겼다.
"웃으며 떠난 고향 울면서 돌아가는/사나이 아픈 마음 산도 우네 물도 우네//어머니의 손목 잡고 개선귀향 다짐하며/웃으며 떠나갔던 동구밖 그 자리에/무심한 이정표가 나를 맞아 울어주네//웃고 떠난 고향길도 울며 떠난 타향길도/구비구비 돌고 넘는 인생길 서러워라//풍진 세상 넓은 곳에 사랑도 많더라만/변함 없는 참사랑은 어머니의 사랑일 뿐!/영원한 참사랑은 예수님의 사랑일 뿐!"
퇴원 2개월 후 나는 여수시청 앞에다 모교 황학수 동창회장님의 주선으로 조그만 점포를 임대하고, 원호보상금 20만원으로 사진관 '호남DP사'를 개업했다. 동기생들이 밤을 지새우며 개업 준비를 도와줬다. 능숙한 사진 기술을 가진 육촌동생과 형님이 함께 일하게 되어 불편한 나를 보살펴주었다. 본격적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그때쯤, 이웃에 살던 한 여집사님의 안내로 여수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된 여수제일교회(1906년 설립, 현 김성천 담임목사)에 출석하게 되었다. 집에서도 가까워 시간날 때마다 당시 담임이었던 배순조 목사님의 설교를 듣기 위해 10분을 걸어다녔다.
교회에 출석한 지 3개월 만에 유년부 교회학교 교사로 임명되었다. 세례도 받지 않은 상태였지만 학창시절 나에 대한 소문을 들은 김영완 부장 집사님의 특별한 주문이었다. 김 집사님은 "가르치는 것이 곧 배우는 것의 지름길"이라며 격려까지 해주셨다. 분반 성경공부를 인도할 때 철없는 아이들은 불편한 내 모습을 보고 '킥킥' 웃어댔다. 그런 아이들을 볼 때면 가슴 속에선 뜨거운 모닥불이 타오르고, 등골에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준비하자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런 노력을 아이들이 알았던 것일까. 시간이 흐를수록 변화돼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말씀을 들을 땐 귀를 곧추세웠고, 눈빛은 초롱초롱 빛났다. 우리 아이들은 어느새 사무엘 같은 믿음의 자녀들로 변해가고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37년 동안 교회학교 교사로 봉사하고 있다. 현재는 고등부 부장을 세 번째 맡고 있다. 제자들 중엔 목사 7명, 선교사 3명이나 나왔다. 그들 가운데 기억에 남는 제자가 있다. 소아마비 장애 후유증을 앓던 박정환이다. 그는 11년 전 목사 안수를 받고 서울 나눔의교회 부목사로 시무하면서 장신대학원 역사신학과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박 목사는 '서울 대현교회 95년사'를 비롯, 교회 네 곳의 교회사를 집필한 유능한 역사학도이기도 하다. 지금은 '제주 성안교회 100년사'를 공동 집필하고 있다.
***[역경의 열매] 김성영 (10) CCC와의 만남은 큰 선물
교회학교 봉사뿐 아니라 나는 교회 청년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경륜 있는 선배들과 함께 활동하면서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배웠다. 그런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여러 가지 개선할 점이 눈에 들어왔다. 우선 청년 회원들의 참여도가 떨어져 월례회가 성수된 적이 없었고, 모여도 특별한 내용 없이 헤어져 함께하고 싶은 의욕이 없었다.
그러다 1977년 여수제일교회 청년회장으로 선출되었다. 표어를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행 22:10)로 정하고 매주 목요 성경공부 모임을 이끌었다. 회원 중에 신·구약 성경을 통독한 사람이 거의 없어 우선 신약부터 읽기 시작했다. 서로 돌아가면서 성경을 읽었다. 그러나 의외로 좋은 결과가 나타났다. 말씀으로 은혜를 받을 뿐 아니라 누구나 소외되지 않고 리더로서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짐으로써 책임감과 소속감을 느끼며 청년회 모임이 빠르게 활성화돼 갔다.
이듬해 나는 청년회장에 재선됐고 표어도 '모이자! 기도하자! 전도하자!'로 정해 이번엔 전도에 열정적으로 나섰다. 전도의 방법은 한국대학생선교회(CCC) 여수지부에서 배우고 훈련받은 대로 사영리 전도법과 10단계 성경공부 교재를 활용했다. 82년 세 번째로 청년회장에 당선됐다. 그해 표어는 '여수시를 예수시로! 일어나서 함께 가자!'였다. 나의 오랜 기도와 말씀 묵상, 그리고 고난 가운데 눈뜬 역사의식으로 성령님께 받은 감동과 인도함의 작품이었다. 이것이 계기가 돼 역사적인 '여수 예수성시화운동본부'가 창설되었으니 말이다.
CCC와의 인연은 72년 가을이다. 언제부턴가 깔끔한 감색 양복 차림에 단정한 머리를 하고 방패 모양의 멋진 배지를 착용한 한 청년 신사가 교회 낮 예배에 가끔 참석했다. 그가 누구인지 궁금했다. 그러던 중 그가 먼저 내게 다가와 명함을 건네며 자신을 소개했다. 'CCC 최신석 간사'. 내가 운영하던 사진관에도 가끔 찾아오고 대화를 나누며 우리는 친해졌다. 이후 나는 CCC 여수지부 나사렛 형제들 모임에 가입하고 소그룹 성경공부반에 참여하며 본격적으로 성경의 깊이를 알아갔다. 돌이켜보면 내 인생에서 일찍이 청년시절 CCC를 통해 김준곤 목사님과 여러 간사님, 그리고 나사렛 형제들을 만난 것은 하나님의 큰 축복이며 귀한 선물이다. 무엇보다 말씀과 기도의 생활화, 전도와 선교의 사명화, 꿈과 비전의 현실화 훈련을 구체적으로 받았으니 특히 감사한다.
나는 원단 금식 수련회 때, 김준곤 목사님의 요한복음 강해 설교를 잊지 못한다. '예수님의 십자가 상흔(傷痕)'이란 제목의 말씀을 통해 다시 한번 내 상처의 특별한 의미를 깨달았다. 부활할 때 인간의 모든 장애와 흉터는 온전한 모습으로 부활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고난받은 십자가의 상흔은 부활 이후에도 그대로 남아 있게 된다. 오늘 나에게 주어진 이 고난의 상처와 흉터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축복의 통로가 됐다. 이와 함께 수많은 사람들에게 소망의 예수님을 증거하는 효과적인 방편이 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큰 영광의 상처가 또 어디 있을까.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 6:17)
***[역경의 열매] 김성영 (11) 기차역 4분 만남 ‘뜨거운 감동’
1972년 1월16일 밤 11시. MBC 라디오 '절망은 없다'란 프로그램에 내 수기가 다큐멘터리로 제작돼 30분 동안 전국에 방송되었다.
"폭풍이 부는 언덕에도 꽃은 피어나고 지진이 난 땅에서도 맑은 샘은 솟아 흐릅니다." 아나운서가 바이런의 시 한 구절을 낭송하며 시작된 '절망은 없다'는 70년대 초 누구나 살기 힘들었던 시절, 많은 애청자들의 심금을 울린 인기 프로그램이었다. 방송 이후 전국의 수많은 청취자들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방송을 듣고 새로운 용기와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제 삶이 너무나 초라하고 부끄럽습니다" "훌륭하신 어머니와 선생님을 만나뵙고 싶어요"….
나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서투른 글씨로 답장을 써 보냈다. "고난과 역경을 통하여 더욱 강하고 풍성한 삶을 살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 드립니다. 아직도 예수님을 믿지 않으시다면 꼭 교회에 나가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계속 보내오는 편지 중에는 나의 잃어버린 손과 팔이 되어주겠노라며 프러포즈를 해오는 여성들도 여러 명 있었다. 당시 나는 세 가지 조건을 놓고 반려자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 첫째, 신앙을 가진 여성일 것(은혜받지 않고는 고난을 감당할 수 없으므로). 둘째, 몸도 마음도 건강할 것(건강하지 않고는 불편함을 도울 수 없으므로). 셋째, 양가 부모님이 승낙할 것(지상 최고의 복은 부모님의 축복이므로).
그로부터 10개월쯤 뒤 여성들 중 한 명인 대전에 사는 육모 양에게 편지를 띄웠다. "형님과 함께 다음 주 목요일 서울에 갑니다. 낮 12시30분쯤 서대전역에 열차가 4분 동안 정차합니다. 그때 나오실 수 있을는지요?"
며칠 후 그녀에게서 답장을 받았다. 그렇게 하겠단다. 그 동안 편지와 사진을 교환하여 얼굴 모습은 알고 있었지만 실제 만남은 처음이었다. 플랫폼에 열차가 도착하자 자매가 차창 밖에서 두리번거리며 우리를 찾고 있었다. 형님과 나도 열차 밖으로 나갔다. 서로를 발견하고 환하게 웃으며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
상처투성이로 굳어진 손을 내밀어 그녀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녀는 두 손으로 '덥석' 내 손을 감싸안았다. 뭐라고 형언할 수 없는 뜨거운 것이 가슴속에서 소용돌이쳤다. 이내 형님은 미리 준비해간 작은 화장비누 선물세트를 전달했다. 그녀는 점심 때라 집에서 김밥 도시락을 준비해왔다며 건넸다. 4분간의 짧은 만남을 아쉬워하며 열차에 올랐다.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힌 후 정성스레 포장된 도시락을 풀어보았다.
한쪽 도시락 위엔 나무 젓가락 1개, 다른 쪽 도시락 위엔 포크와 나무 젓가락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젓가락 하나만 넣은 것은 형님 것이었고, 포크와 나무 젓가락을 가지런히 담은 것은 내 도시락이었다. 언젠가 손이 불편해 놋쇠 젓가락질이 서투르다고 편지에 쓴 적이 있는데, 그녀는 그것을 기억하고 세심하게 배려해준 것이었다. 포크를 사용해 김밥을 맛있게 먹고 음료를 마신 후 의자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하나님, 혹시 이 여성이 저를 위해 준비해주신 저의 신부는 아닌가요?"
***[역경의 열매] 김성영 (12) 손·팔 대신해주는 소중한 반려자
육애화(陸愛花). 그녀는 평범한 가정에서 5남매의 장녀로 태어났다.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건강하게 자란 그녀는 대전 시내의 한 중소기업에 다니고 있었다.
서대전역에서 4분 동안의 첫 만남 이후, 우리는 급격히 가까워졌다. 형님은 "네가 마누라 복을 누리고 싶거든 애화씨랑 결혼하라"고 충고했고, 어머니 역시 "살펴볼수록 귀덕(貴德)스럽다"며 그녀를 반겼다. 그러나 그녀의 집에선 나와의 만남을 반대했다.
어렵게 용기를 내 결혼 허락을 받기 위해 그녀의 집을 찾았다. 아버님은 "3년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셨다. 왜 3년일까. 그 정도의 시간이라면 딸의 마음이 바뀔 것이라고 확신하셨던 것이다. 하지만 그때부터 그녀는 '홍역'을 치렀다. 아버님은 딸에게 "왜 조건도 좋고 멀쩡한 남자들 마다하고 김군이냐"고 질문하셨다. 그럼 그녀는 한결같이 대답했다. "세상엔 건강한 육신을 갖고서도 정신적으로 장애를 겪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그러나 성영씨는 몸이 좀 불편할 뿐이지, 생각이 얼마나 건전하고 올바른지 몰라요. 또 누구보다 진실해요."
그녀는 결혼 문제에 하도 신경을 써 잇몸이 들떠 이빨을 모두 뽑아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불면증에까지 시달렸다. 그녀는 나로 인해 그렇게 사랑의 열병을 앓은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님은 "지금은 네가 이 길을 선택해서 좋지만, 살다보면 분명 힘든 날이 올 것이다. 집에 와서 힘들다고 내색하면 안된다. 나는 그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며 어렵게 결혼을 승낙했다.
1974년 11월5일 오전 11시 여수제일교회에서 배순조 목사님의 주례로 400여명의 하객들이 참석한 가운데 결혼식을 올렸다. 그때 내 나이 29세, 아내는 24세였다.
아버님은 나와 아내의 손을 꼭 붙잡고 "우리 애는 어렸을 때부터 입버릇처럼 '내가 꼭 필요한 사람에게 시집갈 거야'라고 하더니, 진짜 딱 맞는 짝을 만났구먼. 계속 자네 얼굴을 보니 인상이 참 좋아. 눈빛을 보니 가족들 밥은 굶기지 않을 것 같아"며 격려해주셨다.
아내는 첫날밤, 나에게 한 통의 편지를 주었다. "저는 여러 가지로 부족한 점이 많지만 정성과 사랑으로 행복한 가정을 가꾸기 위해 노력할 겁니다. 최고는 못 되어도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게요." 나 역시 아내의 선택이 결코 후회되지 않도록 행복한 가정을 꾸리며 살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아내는 현재 여수제일교회 권사회장을 맡고 있다. 지난 35년 동안 교회학교, 성가대, 여전도회 등을 섬기면서도 각종 선교 활동과 지역사회 봉사로 분주한 나의 손과 팔이 돼주었다. 왜 어려움이 없었겠는가. 결혼 이후 아내는 몸이 불편한 남편뿐 아니라 병고의 홀시어머니, 사진관 직원들, 그리고 조카들까지 보살펴야 했다.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는, 또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고는 하루도 감당하기 어려운 무거운 짐이었을 게다. 그럼에도 아내는 친정에 가서 어려움을 토로한 적이 없었다.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의 값은 진주보다 더하니라"(잠 31:10) 평생 내 옆에서 '전속 간호인'으로 살고 있는 아내 육 권사에게 그저 고마울 뿐이다.
***[역경의 열매] 김성영 (13) 고향마을 축사 개조 호명교회 창립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서원한 게 있었다. "고향 마을에 교회를 세우겠습니다."
내 고향 전남 여천군 삼일면 호명리는 가난한 농촌 마을로 다섯 개의 자연 부락이 오각형 꼭짓점 형태로 이뤄져 있다. 전통적으로 유교가 강하고 마을 진입로의 300년 이상 된 고목나무 100여 그루를 정성껏 모실 정도로 무속신앙도 깊은 편이다.
1976년 8월 나는 여수제일교회 청년들과 함께 마을회관, 고목나무 그늘 아래서 여름성경학교 하계 봉사 활동을 실시했다. 이것을 계기로 매 주일 오후 고향 마을에서 교회학교를 열었다. 교통이 불편해 8㎞는 버스로, 4㎞는 걸어다니며 5∼6명의 청년들이 헌신했다. 그렇게 예배를 드린 지 4년, 여수제일교회 청년회 후원으로 신학교에 재학 중인 황길순 전도사를 초대 교역자로 모셔왔다. 그리고 이듬해 축사를 임차·개조해 '호명교회'를 창립했다.
교회 건축을 계획한 건 이때부터다. 그럼 교회는 어디에 세울까. 이왕이면 호명리 다섯 개 마을의 중심에 세우고 싶었다. 우뚝 솟은 동산에 교회가 세워지면 그야말로 진리의 등대처럼 마을을 밝혀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곳은 마을의 성역인 효열각(孝烈閣) 사당과 인접했다. 그래도 부지를 해결하기 위해 땅 주인을 찾아갔다. 그런데 알고 보니 땅 주인은 20년 전 개인지도를 부탁 받고 하숙집에서 내가 2년 동안 공부를 가르쳤던 제자였다. 그에게 사정을 얘기하자 흔쾌히 "형님께서 부탁하시는데 어떻게 거절하겠습니까. 필요하신 대로 사용하십시오"라며 땅을 제공해주었다.
또 모교 후배가 담임 목사로 있던 고흥의 상포교회에서 첫 간증 헌신 예배를 인도하고 받은 사례비 10만원을 설계비 계약금으로 내놓았다. 교회 건축을 위한 준비 작업은 끝났다. 이제 터파기를 할 차례. 그런데 이번엔 마을 사람들이 조롱했다. "이보게, 땅은 구입했을지 몰라도 교회 건물은 못 세울 걸세. 그 땅은 온통 바위산이라 흙 한 삽도 퍼내지 못할 걸." 하지만 막상 중장비 작업을 시작하니 교회 건축 부지에는 바위가 하나도 없었다.
호명교회는 이처럼 하나를 해결하면 또 다른 난관에 부닥치고, 또 해결하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건축비가 없어 쩔쩔맬 때는 예상치 못했던 이들의 헌신이 잇따르며 감격의 순간을 맛보았다. 교회 지붕 콘크리트 공사를 하던 날, 맑은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와 1시간 이상 폭우가 쏟아졌다. 작업해둔 시멘트가 흘러내려 마무리 공사에 애를 태웠다. 그때 하나님은 노아에게 하신 것처럼, 언약의 메시지를 보여주셨다. 비가 그치면서 마을과 교회 사이에 쌍무지개가 떠올랐던 것이다. 인부와 주민들은 비로소 "하나님께서 살아서 역사하신다"며 환호했다.
고향 마을에서 여름성경학교를 시작하며 교회 건축을 꿈꾼 지 10년. 나는 991m²(약 300평) 대지에 175m²(약 53평)의 아담한 교회를 세워 봉헌했다. 현재 호명교회는 100여명의 성도가 모이면서 자립 교회로 성장했다. 3년 전 정년퇴임한 곽중국 목사님에 이어 김옥수 목사님이 시무하고 있다. 지금까지 호명교회는 목사 1명, 전도사 2명을 배출했다. 성도들과 나의 비전은 앞으로 교회 창립 100주년이 될 때까지 300명 이상의 목회자를 배출하는 것이다.
***[역경의 열매] 김성영 (14) 장애 한탄… 울며 걷던 서울역 광장
'1982년 4월26일 화창한 봄날에 사랑하는 내 둘째 딸 신희는 세 살과 다섯 살 난 두 딸과 남편을 남겨놓고 만 29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위암 수술을 받은 날부터 167일 동안 극심한 고통을 겪었던 신희는 전주예수병원 병실에서 숨을 거뒀다. 아내가 신희의 눈을 감겨주었다.'
지난 8일자 국민일보 24면 '내 삶의 찬송'에 실린 한국대학생선교회(CCC) 총재 김준곤 목사님의 글 일부다. 그것을 읽는 순간 울컥했다.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글 한 편에 숨겨있기 때문이다.
81년 11월의 마지막 주일, 나는 여수제일교회 청년회장에 세 번째로 당선됐다. '여수시를 예수시로! 일어나서 함께 가자'를 표어로 정하고 여수 지역 성시화 운동에 앞장설 것을 다짐했다. 이와 함께 새해 사업 구상으로 "초교파 전도 집회를 통해 여수 성시화 운동을 추진하겠다"면서 "강사는 김준곤 목사님이나 가나안농군학교장 김용기 장로님을 모시고 싶다"고 말했다.
그해 12월31일 밤 여수제일교회 지하식당에서 청년회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고, 40여명의 청년회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여수 예수성시화운동본부'를 창설했다. 교파를 초월한 그리스도 제자들이 여수 복음화를 위해 함께 뛰어보자며 들뜬 마음으로 새해를 맞았다.
82년 1월7일 김 목사님을 여수성시화운동 제1회 전도 집회 강사로 섭외하기 위해 서울 CCC 본부를 방문했다. 목사님을 만난 자리에서 떨리는 마음으로 여수 성시화 운동의 비전을 전했다. 그리고 5월 21∼23일 여수제일교회에서 열리는 집회에 꼭 참석해달라고 요청했다. 목사님은 흔쾌히 수락했다. 강사와 일정을 확정하고 본격적으로 행사를 준비했다. 그렇게 벅찬 기대를 안고 집회를 준비하던 4월 하순 어느 날, 김 목사님 비서실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4월26일, 김준곤 목사님 둘째 따님이 돌아가셔서 국내외 모든 스케줄이 취소되었습니다."
바로 목사님이 '내 삶의 찬송'에서 언급하신 내용이다. 눈앞이 캄캄했다. 이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 일단 장례식에 참석해 목사님부터 만나보자. 전속 간호인으로 나를 챙기던 아내에게 사정이 생겨 대신 육촌 매제를 데리고 서울로 향했다. 우리는 밤 11시 야간열차에 올랐다.
중간에 목이 말라 음료를 마신 게 화근이었다. 새벽 6시쯤 갑자기 복통이 시작됐다. 서울역 도착 즉시 나는 화장실로 달려갔다. 그런데 나는 손이 불편하고, 매제 역시 돕는 손길이 익숙지 않아 허둥대다 그만 큰 실수를 하고 말았다. 몸을 씻고 옷도 세탁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여관을 찾아 어두컴컴한 서울역 광장으로 걸어나왔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며 손가락질하는 듯했다. 제대로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오리걸음으로 광장을 빠져나오는데, 어느새 내 얼굴은 눈물범벅이 됐다.
"내가 장애인이 아니었더라도, 내가 성시화 운동을 시작하지 않았더라도, 과연 서울 한복판에서 이런 낭패를 당했을까!" 나는 마음속으로 울부짖었다. "하나님, 저는 정치인도 큰 교회 목사님도 아닙니다. 왜 손도 팔도 없는 제가 이런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까?"
***[역경의 열매] 김성영 (15) 여수시를 ‘예수시’로… 82년 첫 집회
"몸이 불편한 내가 대체 뭔데, 성한 사람들도 나서지 않는 일을 하겠다고 난리인가. 당장 관두자." 어차피 김준곤 목사님의 집회도 취소된 마당에, 더 이상 성시화운동에 미련을 갖지 말자고 다짐했다. 허름한 여관에서 몸을 씻고 옷을 대충 말려 입은 뒤 서둘러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미 장례예배를 드리고 장지로 떠난 뒤였다. 뒤늦게 마석의 공원묘지까지 따라갔으나 또다시 한 발 늦었다. 복통 때문에 온종일 식사도 거른 상태로 그렇게 서울을 헤맸건만, 김 목사님과 유가족을 조문하지 못했다.
결국 늦은 밤 여수행 마지막 열차에 몸을 실었다. 피곤함이 밀려와 이내 눈을 감았다. 그런데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누군가 나에게 말을 건넸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여수를 사랑하느냐?" 갑작스런 질문에 나는 "예, 사랑합니다"라고 외쳤다. "여수를 예수시로 성시화하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느니라." 그건 분명 주님과 나눈 대화였다. 그리고 잠시 후 주님은 세미한 음성을 들려주셨다. "내가 너의 기도를 들었고, 너의 눈물을 보았느니라.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
서울에서 여수까지 7시간을 달리는 통일호 야간열차에서 나는 참으로 황홀한 경험을 했다. 그리고 한 달쯤 뒤 김준곤 목사님의 비서실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목사님께서 기력을 회복하셨습니다. 첫 공식행사로 여수성시화운동 집회를 인도하신답니다."
이로써 여수성시화를 위한 전도집회는 다시 한번 불붙었다. 집회는 6월로 연기했다. 성경구절을 넣어 지역 방송과 신문을 통해 적극 홍보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응답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어느 날 순천지방검찰청장으로부터 만나자는 전화를 받았다. 당시는 제5공화국 군사정권 초기로, 사회 분위기도 냉랭했다. 갑작스런 전화에 나는 움찔했고, 다소 긴장된 모습으로 약속 장소에 나갔다.
박주인 검찰청장님은 순천세광교회 장로라고 했다. 그리고 "요즘 신문 방송에 계속 나오는 '여수성시화운동'이 뭐요?"라며 짧게 물었다. 나의 대답은 길고 구체적이었다.
"여수성시화운동은 여수시를 예수시로 복음화하자는 전도운동입니다. 여수는 충무공의 구국 성지이며 손양원 목사님의 순교 성지입니다. 손 목사님의 순교정신을 본받아 여수시를 예수시로 바꾸자는 것입니다. 여수제일교회 청년회와 한국대학생선교회(CCC) 여수지부가 중심이 되어 비정치·비영리·비교파라는 '3비운동'을 전개합니다. 또 기도·말씀·전도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여수성시화운동은 아름답고 자랑스러운 여수시의 새 이름 '예수시'를 창조하려는 운동입니다."
검찰청장님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무엇을 도와드릴까요?"라고 재차 물었다. 선교비를 지원해 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기도해주십시오"라고만 대답했다. 검찰청장님은 전도집회를 20여일 앞둔 5월31일 20여명의 크리스천 기관장과 함께 '고넬료회'를 창립하고, 여수성시화운동 집회를 적극 후원해줬다.
남해안의 작은 도시 여수가 변하고 있음을 느꼈다. 복음의 성지로 세워지고 있었다. 김준곤 목사님을 모시고 1982년 6월 21∼23일 여수제일교회에서 열린 제1회 여수성시화운동 집회에는 연인원 7200여명이 참석, '예수시'를 위해 뜨겁게 기도했다.
***[역경의 열매] 김성영 (16) 신학교 대신 평신도 사역 선택
1982년 6월 제1회 여수성시화운동 전도집회를 성황리에 마친 뒤 나의 선교 열정은 더욱 뜨거워졌다. 지역신문과 방송을 통한 매스컴 선교를 계속 이어갔다. 광고비는 사업하는 친척들의 도움으로 충당했다. 여수성시화운동본부 사무실 운영이 힘들어 철거 예정지로 임시 이전했지만, 나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해 선을 이뤄주시리라 확신했다.
그것만 믿고 제2회 전도집회를 준비했다. 83년 새해 어느 날, 여수제일교회 정성규 목사님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올해도 성시화 집회를 하실 겁니까?" "네, 물론이지요. 목사님." "그럼 제가 좋은 강사를 섭외했는데, 그분을 모시면 어떨까요?"
예장 합동보수 총회장이며 총회신학대학장인 황성수 목사님이었다. 황 목사님은 4·19 직후 이승만 자유당 정권이 몰락한 후에도 자유당 간판으로 참의원에 출마해 전국 최다득표를 하고, 국회부의장을 지낼 정도로 유명한 분이다. 여수시민들은 '황성수 목사'보다 그 옛날 유명했던 '정치인 황성수 박사'를 더 보고 싶어했고, 마치 선거유세장으로 사람들이 몰리듯 제2회 전도집회 역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83년 5월 23∼26일 여수제일교회에서 열린 제2회 여수성시화운동 전도집회는 1회 때보다 더 많은 1만여명의 성도들이 참석했다.
집회 광고 때마다 나는 여수성시화운동의 정체성과 당위성, 비전에 대해 호소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동기부여가 되고, 공감대를 형성해 가는 게 눈에 보이는 듯했다. 그런데, 집회를 두 번씩 치르면서 현실적인 고민을 떠안게 됐다. 주변에서 나만 보면 "왜 신학교에 가지 않느냐?"고 물었다.
황 목사님도 집회를 끝낸 뒤 "젊은 시절, 열심히 뛰었던 평신도 지도자들이 나중에는 신학교에 가서 결국 목회자가 됩니다. 현실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어요. 저의 경우도 그렇고요"라면서 신학교에 갈 것을 권했다. '목회자의 길을 가야 하는가'를 놓고 깊은 생각에 빠진 어느날, 여수의 한 목사님으로부터 헌신예배를 인도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내가 이렇게 교회를 다니며 집회도 인도하게 될 텐데, 그렇다면 나도 목사가 되어야 하는 건 아닐까?" 그때 부산의 강세원 장로님이 들려주신 말씀이 생각났다. 강 장로님은 나의 초청으로 부산에서 여수까지 오셔서 집회 3일 동안 전 과정을 참관하셨다. 그리고 한껏 격려해주셨다.
"신학교를 졸업하면 누구나 목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특정교단이나 교회에 소속되어 버리면 현실적으로 성시화운동을 펼치기 어렵습니다. 성시화운동 사명자는 한 도시에서 겨우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귀한 부름입니다. 지난 40년 동안 내가 걸어온 평신도 사명자의 길은 너무나 외롭고 힘겨웠기에 굳이 나를 따르라고는 말하고 싶지 않아요. 하나님의 뜻이라면…."
강 장로님을 통해 예수님을 믿게 된 나는 그분을 보며 평신도 사역의 길을 걷게 됐다. 내 삶의 멘토인 강 장로님은 이미 나의 고민을 꿰뚫고 이런 말씀을 들려주셨다. 그러나 절대 강권하지는 않으셨다. 스스로 이 길을 가면서 어떤 게 하나님이 보시기에 최선의 방법이요 합당한 것인지를 그저 '하나님의 뜻'을 강조하며 나에게 결정권을 넘기셨다.
***[역경의 열매] 김성영 (17) 생활속에서 향기 나는 평신도 사역
'목회자의 길을 갈 것인가, 평신도의 길을 갈 것인가.'
이미 40을 바라보는 나이에, 세 명의 자녀를 두고 있었다. 게다가 병고의 홀어머니까지…. 내가 신학교를 간다면 넉넉지 않은 가정형편에 살림은 누가 책임질 것인가. 게다가 아내에게 더 무거운 짐만 안겨줄 게 뻔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부산의 제3육군병원에 입원했을 때, 나는 오히려 강세원 장로님을 통해 감동과 감화를 받았다. 순간, 내가 가야 할 길은 이미 정해진 듯했다. '생활 속에서 크리스천의 향기를 발하는 평신도 사역자가 되자.'
이후 내가 걸어온 길은 기적의 연속이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여수·여천기독교직장연합신우회의 탄생이다. 두 번의 성시화 전도집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면서 뜻있는 분들이 모였다. 표어는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사 60:1)였다. 성시화운동의 표어인 '여수시를 예수시로! 일어나서 함께 가자!'(아 2:10)의 연장선이었다. 1984년 1월 여수직장신우회 창립예배에서 초대 회장에 남해화학 공장장인 김수안 집사를, 총무에 오윤근 집사를 선임했다. 신우회는 여수성시화운동의 공식적인 첫 열매였다.
"하나님께서 어떤 큰일을 계획하고 이루실 때는 먼저 사명자를 세우시고, 그 다음 사명자를 돕는 동역자를 보내주십니다. 그리고 물심양면으로 후원자들을 붙여주십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함께하시는 일이라면 반드시 성공하게 됩니다." 어느 유명 목사님이 나에게 들려준 조언이었다.
오 총무가 그런 동역자였다. 78년 12월 말, 사진관 문을 닫기 직전 작업복 차림의 한 청년이 가방을 들고 찾아왔다. "실례합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애양원교회를 찾고 있는데 안내를 부탁 드립니다. 저는 울산석유화학공단에서 근무하다 고향(전남 담양)에서 가까운 여천석유화학공단으로 직장을 옮겨 방금 도착했습니다. 여수의 첫날 밤을 사랑의 순교자인 손 목사님 교회에서 철야기도를 하며 보내고 싶습니다." 그 말에 무한한 신뢰를 보냈다. 그러나 이미 밤은 늦었고 마지막 버스도 끊긴 상태였다. 나는 일단 그에게 여수제일교회의 한 권사님이 운영하는 하숙집으로 안내해 줬다. 그리고 약속을 했다. "내일 아침 8시까지 이곳으로 오세요. 그럼 저와 여수제일교회에서 함께 주일예배를 드리고 애양원교회로 모셔다 드리지요."
이튿날 그는 정확한 시간에 나타났고, 함께 주일예배에 참석했다. 그가 오 총무다. 그는 여수제일교회에 등록한 후 나와 함께 청년회, 교회학교, 성가대 그리고 호명교회 봉사와 여수성시화운동에 이르기까지 충성스럽게 헌신했다. 그의 별명은 '복음의 전천후 사나이'. 지금은 교회 장로로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
솔직담백한 그의 성격은 당시 회사에서도 인정받았다. 80년대 5공화국 군사정권 시절, 직장 노조와 선교단체는 불온의 대상이었다. '도시산업선교회가 들어가면 회사가 도산한다'는 말이 언론에 오르내릴 정도였다. 그러나 오 장로는 "여수기독교직장선교회 회원들은 합리적이고 온건하며 긍정적인 생각을 가진 기도의 용사입니다. 우리는 산업평화와 노사화합을 통해 회사발전에 기여할 것입니다"라며 늘 성실한 본을 보였다.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하는 이러한 모습, 이게 바로 평신도 사역자의 사명이 아닐까.
***[역경의 열매] 김성영 (18) 내 찬송 들으시며 어머님은 그렇게…
1984년 7월28일 무더운 여름 날, 어머니는 이른 아침 아내가 정성껏 끓인 녹두 미음을 몇 번 받아 드셨다. 그리고 깨끗하게 옷을 갈아입혀 드렸다. 어머니는 나와 아내의 손을 꼭 잡으시고 잠시 후 내 품에 안겼다. 나는 한 팔로 어머니를 끌어안고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짐 벗고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495장) 어머니는 그렇게 하늘나라로 가셨다.
전날 늦은 오후, 더위에 피곤하고 지쳐 시원한 요구르트를 사가지고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어머니는 부드러운 요구르트를 참 좋아하셨다. 집에 도착해 보니 어머니는 화장실에서 혼자 머리를 감고 계셨다.
"제가 해드릴게요." 어머니는 "불편한 손으로 어떻게 내 머리를 감겨? 괜찮아"하시며 한사코 만류하셨다. 나는 손잡이 있는 바가지로 물을 부으며 천천히 어머니의 머리를 감겨드렸다. 입으로 뚜껑을 열고 샴푸를 풀어 어머니의 굳어진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감기다 보니 물이 점점 흘러내려 어머니의 윗옷이 모두 젖고 말았다. 결국 어머니는 목욕을 하시게 됐다.
동작을 멈추고 어머니의 앉으신 뒷모습을 보았다. 활처럼 굽어버린 등뼈, 무릎은 어깨 위까지 당나귀 귀처럼 솟아 있었다.
'아, 나의 어머니! 그동안 나로 인해 얼마나 고생하셨기에 저리도 온 몸의 진액이 다 빠졌을까. 이토록 초라하고 불쌍한 모습으로 어느새 저리도 작아지신 걸까.' 가슴속 깊은 곳에서 불효와 회한의 눈물이 솟구쳐올랐다. 결국 나는 그날 저녁, 뜨거운 눈물로 오랫동안 어머니의 몸을 닦아드렸다.
어머니는 내가 의병제대하고, 결혼 후에도 내 곁을 떠나지 않고 나와 함께 사셨다. 돌아가시는 그 순간까지 늘 내 걱정뿐이었다. 스물여덟 젊은 나이에 홀로 된 어머니는 그렇게 마음의 걱정을 안고 사시다 65세에 하나님 품에 안겼다. 나는 사흘 밤을 뜬눈으로 찬송가를 부르며 어머니 곁을 지켰다. 장례식 날 새벽, 잠시 눈을 붙였다.
비몽사몽 중에 흰옷을 입으신 어머니가 야구장 입구에 서 계셨다. 그때 장내 방송이 나왔다. "땅 위에서 승리자가 도착했다." 천천만만의 빛나는 옷을 입은 성도들이 야구경기 결승전에서 9회 말 역전 만루홈런이 터져 열광하듯 환호하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바로 깨어나 다시 무릎 꿇었다. "주님! 어머니를 천국으로 인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머니를 고향마을 입구 양지 바른 동산에 모셨다. 장례식 후 주일 오후면 어머니를 찾았다. 주변에선 "효자 났다"고들 했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마음의 짐을 내려놓을 수 없을 것 같았다. 평생 몸이 불편한 나만을 위해 사신 분이 아니던가. 그렇게 길을 나서는 내가 안타까웠는지, 하루는 아내가 말했다. "당신이 그토록 못 잊어 찾아가는 어머니는 지금 무덤 속에 계시지 않아요. 천국에서 예수님 옆에 계실 거예요. 하늘나라에."
3년간 주일이면 어머니를 찾아갔던 그 일을 그제야 중지했다. 그리고 어느덧 25년의 세월이 흘렀다. 지금도 가끔 꿈에서 어머니를 만난다. 어머니는 나의 한쪽 팔을 쓰다듬으며 항상 웃어주신다.
***[역경의 열매] 김성영 (19) 어머니 성경공부 이끌며 변화의 힘 체험
"어머니가 거듭나면 자녀가 변화되고 학원이 복음화된다. 아내가 거듭나면 남편이 변화되고 직장이 복음화된다. 여성이 거듭나면 여전도회가 변화되어 교회가 활성화된다. 교회가 활성화되면 전체 성도들이 변화되어 사회가 새로워지리라."
어머니와 아내, 여성도는 일체다. 한 명의 여성이 말씀과 기도로 거듭나면 가정과 교회, 사회에 얼마나 좋은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을까. 나는 여성의 역할에 대해 새삼 눈을 뜨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86년 9월, 여수공단의 대표 기업이라 할 수 있는 호남정유(현 GS칼텍스) 여수공장 직원들의 아내로 구성된 어머니 성경공부팀으로부터 모임을 이끌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여수제일교회 김옥임 권사님의 소개였다. 여수시내에서 25㎞ 떨어진 거리였지만, 버스를 타고 매주 월요일 오전 10시부터 2시간 동안 회사 유치원의 빈 교실에서 성경을 가르쳤다.
호남정유 어머니 성경공부팀을 이끈 지 한달 후 남해화학·호남에틸렌(대림)·한국화약·여수YWCA 어머니팀의 요청이 잇따랐다. 나는 1주일 내내 흩어져 있는 사택들을 찾아가 짧게는 3년, 길게는 7년 동안 어머니 성경 공부를 인도했다. 이들 모임에서 특별히 세 가지를 강조했다. 소명의식(하나님의 사랑과 부르심·사 43:1, 요 15:16), 은혜의식(신앙생활을 기쁘게 하는 법·시 116:12, 고전 15:10), 역사의식(나의 존재가치와 사명·에 4:4, 요 12:27)이다. 어머니들과 함께 성경 공부를 시작하기에 앞서 늘 말씀을 읽고, 삶속에 적용할 수 있도록 권면했다.
호남정유 어머니 성경공부팀의 김용애 집사님은 남편이 고위 임원이었지만 항상 30분 전 도착해 청소를 하고 회원들에게 전화해 안부를 챙겼다. 간식을 준비하는 등 그는 희생과 봉사의 삶을 살았다. 김 집사님의 자녀는 형제였는데, 다른 집처럼 서울로 고등학교를 보내지 않고 모두 여수시내의 학교로 진학시켰다. 여수제일교회에 출석하는 김 집사님 부부는 언제나 주일이면 두 자녀와 함께 예배당에 나와 겸손하게 무릎을 꿇었다.
성경 공부를 시작한 지 3개월쯤 지났을까. 김 집사님이 봉투를 내밀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나는 깜짝 놀라 물었다.
"여수고등학교 2학년생인 둘째아이가 이번에 장학금으로 10만원을 받았어요. 이 돈을 어떻게 사용할까 궁리했는데, 결론을 내리지 못했어요. 문득 아들이 저에게 '어머니가 알아서 하세요'라고 말하더군요. 그런데 제가 기도하면 할수록 자꾸 마음속에 여수성시화를 위해 애쓰는 김성영 집사님이 떠오르는 겁니다. 받아주세요."
문득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론 기쁘고 감사했다. 10만원이 든 봉투를 성경에 꽂고 1주일 동안 간절히 기도했다. 그리고 마침내 응답을 받았다. '소년의 장학금 10만원, 그리고 오병이어.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 남은 것 12광주리.'
여수성시화운동을 시작하면서 지역 신문과 방송을 통해 3년 동안 매스컴 선교활동을 펼쳤으나 광고비를 감당하기 힘들어 중지한 상태였다. 주변에선 성시화 회보를 발행하는 게 어떠냐는 제안도 받았다. "그래, '여수성시화' 회보를 만들자!"
***[역경의 열매] 김성영 (20) 41세때 최연소·최다득표 장로 당선
1986년 11월, 8절지 크기로 여수성시화 회보 창간호를 찍었다. 부수는 1만장. 그때 쓴 창간사의 주제는 '소망의 불씨를 키워가자'였다. 한 고교 소년의 장학금 10만원은 여수성시화 회보의 종자기금이 됐다. 회보는 매년 성탄절과 부활절에 두 차례 발행, 지금까지 53호를 찍었다.
호남정유 어머니 성경공부팀을 시작하고 4년 정도 흘렀을까. 김용애 집사님 가정에서 성경공부를 하던 날, 나는 그 '소년'을 만났다. 의젓한 청년의 모습인 그는 서울대 법대 재학중이었다. 그와 함께 온 다른 청년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사법고시를 준비중이었다. 이렇게 우수한 청년들 앞에서 무슨 말을 전해야 좋을지 갑자기 망설여졌다.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한 뒤 조용히 말했다.
"오늘 이 시간, 어머니들과 함께 새벽별 같은 두 청년이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육법전서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지켜야할 법이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천국시민이 지켜야 할 법입니다. 청년들이여 육법전서안에 지식과 지혜의 근본, 사람의 본분을 가르쳐준 곳이 있던가요? 성경은 밝히 언급해주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과 지혜의 근본이요, 사람의 본분'이라고 말입니다."
그들의 눈빛은 빛났다. 나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했던 재판은 성경에 나오는 '솔로몬의 판결'입니다. 지혜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납니다.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납니다(단 12:3). 이 말씀을 명심하길 바랍니다."
그날 본 젊은이 중 한명은 현 손철우 서울고등법원 판사다. 김 집사님의 차남으로 여수성시화 회보를 발행할 수 있도록 장학금 10만원을 후원해준 주인공이기도 하다. 다른 한명은 현 서울중앙지검 특수부 이용주 검사다. 이들 외에 많은 분들이 기억난다. 함석헌 선생님의 외손녀딸인 호남에틸렌(대림) 어머니 성경공부팀의 임정은 집사님은 매주 목요일마다 약간 지쳐보이는 나의 모습이 안타까워 남편의 자동차로 나를 집에까지 데려다줬다. 그분의 헌신에 늘 고개를 숙였다. 또 이 모임의 젊은 어머니 그룹은 여천지역에 교회를 개척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남해화학의 은재희 이영숙 권사님은 열정과 헌신의 어머니였다. 나는 어머니 성경공부팀을 통해 감사가 무엇인지, 삶 속에서 실천하려고 더욱 애썼다.
내가 섬기는 여수제일교회는 7년마다 투표를 통해 장로와 안수집사, 권사를 뽑는다. 내 나이 서른 네살 때 교회 일꾼을 뽑았다. 투표 전날 밤 아내는 "당신 장로로 뽑히고 싶으세요?"라고 물었다. 아내는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라며 말했다. "당신이 이번에 장로가 되는 건 시기적으로 안맞아요. 장로가 되면 몸과 마음, 물질을 바쳐 교회와 성도들을 섬겨야 하지만 지금 당신의 건강상태나 집안형편, 특히 나이가 젊어요. 우리교회는 전통이 있어 기라성 같은 선배 일꾼들이 많으니, 그분들에게 맡기고 마음을 비워요. 분명히 저는 내일 당신 안뽑아요."
재적의 3분의 2 득표를 얻어야 하는 장로 투표에서 나는 한표 차이로 떨어졌다. 아내의 표였다. 그리고 7년 뒤인 41세 때, 나는 당시 80년 역사와 2000명이 모이는 여수제일교회에서 최연소, 최다 득표로 장로에 당선됐다.
***[역경의 열매] 김성영 (21) 섬마을서 춘향전 ‘사랑가’로 복음 전해
1987년 장로가 되고 그 이듬해 여름 날. 시장에서 채소 장사를 하며 어렵게 생계를 꾸리던 칠순의 김 집사님 장남이 지병으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상가를 찾아갔더니 대문 앞에서 몇 명의 성도가 웅성거리고 있었다. 고인이 생전에 교회에 등록하지 않아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장례예배를 드려줄 수 없다는 것 때문에 김 집사님과 성도들이 흥분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조용히 타일렀다. 그리고 "괜찮다면 제가 장례예배를 인도해도 될까요"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집사님은 "장로님, 감사합니다"를 연발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난생 처음 상가에서부터 시립 공원묘지까지 입관·발인·하관예배를 인도했다. 장로가 되고부터 나는 늘 마음 한쪽에서 질문과 답을 주고받았다.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행 22:10) 대답은 한결같았다.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마 10:6)
한번은 정성규 담임목사님의 부탁으로 여천군 남면 두라리에 있는 대두교회에서 주일예배를 인도한 적이 있다. 그 교회를 담임했던 목사님이 자녀교육 문제로 섬을 떠난 뒤 수개월째 후임자를 찾지 못해 교회가 '표류' 중이라는 것이다. 나는 만사를 제쳐두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섬 교회로 향했다. 토요일 오후 2시 여수항에서 여객선을 타고 한 시간 남짓 거리에 있는 두라리에 도착했다. 당시 초등학교 5학년인 장남이 전속 간호인으로 동행했다. 섬 비탈 언덕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집들과 초라한 교회당의 십자가를 보고 있자니 사도 바울의 유배지 밧모섬이 생각났다.
대두교회 윤 장로님은 오랫동안 비워둔 목사님 사택에 손님이 왔다고 군불을 피워놓으셨다. 그날 밤 아들의 도움으로 옷을 벗고 나란히 잠자리에 누웠다. 그런데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아들도 나도 온 몸이 가려워 잠에서 깨어났다. 불을 켜보니 벼룩이 새카맣게 몰려 있었다. 아들은 나의 옷을 먼저 털어주고 입혀주었다. 그리고 함께 밖으로 나왔다.
하늘엔 별이 총총하고 발 아래 벼랑끝 바닷가에선 파도가 철썩거렸다. 그날 밤 우리 부자는 교회당 장의자에서 철야기도를 했고, 나는 새벽기도회까지 인도했다. 주일 낮 예배를 무사히 마치고 돌아가려 할 때였다. 윤 장로님이 "오랜만에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앞으로 사흘만 더 예배를 인도해주실 수 없으세요"라며 나의 손을 꼭 잡았다. 아들은 당장 내일 학교에 가야 하는데…. 장로님의 간절한 부탁을 뿌리칠 수 없어 결국 아내가 섬으로 들어와 아들과 교대했다. 그리고 나는 사흘 동안 부흥회를 인도했다. 성도라곤 60, 70대 노인 열명 남짓. 무슨 말씀을 전할까. 나는 춘향전의 '사랑가'를 구성지게 불렀다.
"사랑 사랑 내 사랑 어화둥둥 내 사랑… 양반집 아들 이도령과 기생집 딸 춘향이가 사랑을 했더랍니다. 그런데 둘이는 영원한 사랑의 약조를 맺고 이별을 했더랍니다. 남원골 변사또가 춘향이를 유혹하고 핍박도 했지만, 춘향이는 일편단심 오직 예수 이도령만 믿고 참고 기다렸답니다. 한양 갔던 이도령 처음 오실 때, 구걸하는 거지처럼 오셨답니다. 암행어사 이도령 다시 오실 때, 어사출두 여봐라 이리 오너라. 구세주 예수님 처음 오실 때, 가난뱅이 목수 아들로 오셨답니다. 심판주 예수님 다시 오실 때, 천군천사 나팔 불며 꼭 오신답니다."
***[역경의 열매] 김성영 (22) 美 여행후 “할 수 있다” 자신감 불끈
1987년 8월 미국 LA에서 열린 재미 나사렛형제들 전국대회 참가는 내 인생의 특별한 경험이었다. '전속 간호인' 없이 나 홀로 보름 동안 꿈 같은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비로소 장애를 극복하고 세상 밖으로 더 멀리 전진하는 계기가 됐다.
나는 간증 강사로 초청받았다. 가족들의 환송을 받으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비행기에 올랐다. 캄캄한 구름 위엔 태양이 빛나는 또 다른 하늘이 있었다. 태평양 건너 저 멀리엔 또다른 대륙이 있었다. 미국에서는 현지 나사렛형제들 가정에서 민박했다. 나는 LA나사렛 회장인 김형모 장로님 가정에 머물렀다.
첫날부터 나의 미국 여행은 좋은 만남의 연속이었다. 대구 출신으로 부동산 개발 사업자인 김 장로님은 밸리중앙교회에 출석했다. 그런데 그 교회에 여수에서 교편 생활을 했던 장로님이 계시다며 소개해줬다. 바로 70년대 초 여수제일교회 교회학교에서 함께 봉사했던 조경후 장로님이었다. 당시 여수여고 영어교사였던 조 장로님은 우리 부부의 결혼 스토리가 너무 아름다워 감수성이 예민한 여고생들에게 들려주었다. 그 덕분에 등하굣길이면 나와 아내를 보기 위해 여고생들이 사진관 앞에서 서성이곤 했다.
미국과 캐나다, 중남미에 거주하는 CCC 나사렛형제들과 가족 200여명이 모인 자리에서 사회자는 "한국의 갈릴리 여수에서 온 '절망은 없다' 주인공 김성영 형제"라고 소개했다. 나는 "타국에서의 생활이 외롭고 힘들지만, 우리는 주 안에서 한 형제자매이기에 소망의 끈을 놓지 않는 비전의 사람이 되자"고 강조했다. 많은 이들이 공감하며 갈채를 보냈다. 미국CCC 창설자인 고 빌 브라이트 박사는 "훌륭한 비전의 사람"이라며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정말 꿈 같은 만남이었고, 또 다른 기회들을 움켜쥔 순간이었다. 공식적인 전국대회를 마친 나는 뉴욕과 워싱턴에도 가보자고 용기를 냈다. 아는 사람도 없고, 불편한 몸이었지만 자신감을 갖고 여행에 나섰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홀로 뉴욕행 비행기를 탔다. 낯선 모습들 속에 동양인은 나 혼자였다. 이틀간의 여정을 마치고 워싱턴으로 향했다. 내셔널공항에서 전철을 타고 갤러리스테이션에 도착해보니, 마땅히 찾아갈 곳이 없어 작은 언덕을 넘어 한참을 걸었다. '월터리드 육군병원'이 눈에 보여 무작정 그곳을 찾아갔다. "혹시 불편한 오른손을 수술할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물론 그곳에선 "한국의 육군병원에서 진단서를 떼오면 가능하다"고 대답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워싱턴 여행 중에 나는 CBS의 간증 프로에도 출연했다.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 마지막으로 여수성시화 집회로 만났던 황성수 목사님이 개척한 로스앤젤레스 장로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했다. 나의 간증을 전해들은 한 청년 사업가는 고향에 세운 호명교회에 피아노를 기증하고 싶다고 말했다. 예수님의 계획은 어찌 이리도 선하고 아름다운지. 나는 주님의 시험을 무사히 통과했다. 그러자 주님은 피아노라는 큰 선물도 안겨주셨다.
미국 여행 이후 세상 어디든 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몸이 불편하다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게 아니다. 불편하면 주위에 도움을 요청하면 된다. 주님을 믿는 우리에게 두려움이란 '스쳐 지나가는 형식'에 불과하다.
***[역경의 열매] 김성영 (23) 130개였던 교회 수,28년새 550곳으로
1987년 미국 여행을 무사히 마친 뒤 분명 홀로서기에 익숙해졌다. 가족이 아니면 해결할 수 없다는 고정관념에서 해방된 것이다. 92년부터는 자유롭게 유럽과 이스라엘 성지순례, 일본 방문 등을 통해 또 다른 비전을 키웠다. 갈릴리 해변, 십자가의 길을 거닐며 나를 택하고 불러주심에 감사의 고백을 드렸다. 일본 삿포로에 있는 '빙점'의 작가 미우라 아야코 문학기념관을 찾았을 땐 새삼 문학이나 미술, 음악, 연극 등 예술작품을 통한 문화선교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82년 김준곤 목사님을 강사로 모시고 시작된 여수성시화운동 집회는 황성수(83년) 김진홍(88·89년) 조용기(90년) 목사님, 이원설(91년) 박사님이 잇따라 주 강사로 참여하며 큰 부흥의 불씨를 일으켰다. 조 목사님이 90년 4월 5∼6일 여수 진남실내체육관에서 인도한 집회에는 연인원 2만명이 참여했다. 92년 남서울은혜교회 홍정길 목사님을 모시고 여수성시화운동 10주년 기념성회를 여수제일교회에서 개최했다. 대회장으로서 강단에 올라 기념사를 할 때 벅찬 가슴을 누르며 다시 한번 비전을 선포했다.
"인류 역사는 꿈꾸는 사람들이 창조해 왔고, 또 꿈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우리 역사도 꿈꾸는 사람들이 창조했습니다. 일제시대 때 해방의 꿈이, 군사독재시대 때 민주화의 꿈이, 분단시대 때 평화통일의 꿈이 불가능해 보였지만, 꿈은 이루어졌고 이뤄져가고 있습니다. 여수성시화의 꿈도 그렇습니다. 이것은 아름다운 꿈이요, 위대한 비전입니다. 여수성시화는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곳에 모인 성도들은 '예수시'가 될 수 있도록 '한 사람 전도운동'에 적극 동참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여수성시화운동은 지금까지 27년간 이어져오고 있다. 여수성시화의 첫 열매로 탄생한 여수기독교직장연합신우회는 회원 수가 늘어 지금은 20개 직장선교회가 가입돼 있다. 해마다 산업평화기도회와 구국기도회, 찬양축제를 열고 있다. 또 여수 지역 4개 기독실업인회(CBMC)와 함께 '두 날개'처럼 여수지역 교회연합행사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82년 여수성시화운동을 처음 시작할 때 130개였던 교회 수는 현재 550개로 증가했다. 전체 시민의 약 30%인 10만명이 크리스천으로서 봉사와 헌신의 삶을 살고 있다. 나는 여수성시화운동이라는 겨자씨 같은 작은 믿음이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님의 권능으로 잘 자라나 지역과 민족복음화, 세계선교 운동에 동기를 부여했다고 생각한다.
여수세계박람회가 2012년에 열린다. 세계박람회 160년 역사상 인구 30만명의 지방 소도시에서 열리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왜 하필 여수일까? 하나님은 과연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신 걸까? 2012년은 여수성시화운동 30주년의 해이기도 하다. 지금 여수지역 교계에서는 여수세계박람회를 '복음 박람회'로 만들기 위해 준비 중이다. 사랑의 성자 손양원 목사님의 순교기념관과 기념공원사업 등을 전개하며 기도와 지혜, 헌금을 모으고 있다. 내가 2005년 미우라 아야코 문학기념관을 방문해 문화선교의 중요성을 깨달은 것처럼, 혹시 성자 손양원 목사님을 통해 또 다른 믿음의 씨앗들이 세계 곳곳에 뿌려지지 않을까.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역경의 열매] 김성영 (24) 주어진 달란트로 노력하는 세 아들 뿌듯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부모 자녀의 마음은 한결같다고 생각한다. 부모는 자녀를 잘 가르쳐 꿈을 이루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고, 자녀 역시 열심히 공부해 꿈을 이루고 효도하며 살기를 바란다. 하지만 현실은 부모의 바람대로, 자녀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 왜 그럴까. 그건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와 각자 노력의 결과가 다르기 때문이다.
1974년 결혼 후 하나님은 우리 가정에 삼형제를 주셨다. 모두 조산원에서 자연분만해 모유만으로 키웠다. 넉넉한 살림은 아니었지만 화목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자녀들 앞에서 한번도 큰 소리를 내 아내와 싸운 적이 없다. 또 할머니를 공경하고 섬기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효도의 중요성을 가르쳤다. 고향 마을에 호명교회를 개척하고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는 엄마 아빠의 모습을 보면서 자녀들도 철저히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았다.
아이들은 중·고등학교 시절 방학 때를 제외하곤 특별히 과외를 받아본 적이 없다. 초등학생 때부터 장남은 인내와 절제를 배우기 위해 서예를, 둘째는 적성에 맞는 태권도를, 막내는 피아노를 가르쳤다. 혹 장애인 아빠를 부끄러워할까봐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우리나라를 지키다 부상당한 훌륭한 아빠"라고 교육시켰다. 어쩌면 '세뇌'를 시켰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아이들이었기에 그마저도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1980년대 중반 프로야구가 한창 인기를 끌던 시절, 장남이 뾰로통하게 집으로 들어왔다.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아이는 "왜 아빠는 야구를 못해요? 다른 아빠들은 같이 야구장도 가고, 운동장에서 야구도 하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물론 그 아이가 아빠의 상황을 몰라서 그런 말을 했겠는가. 그렇지 않다. 일종의 어리광 아니었을까.
"그 대신 아빠는 너희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잖아. 같이 도서관에도 가고, 책도 사서 읽고, 또 너희들과 함께 나란히 앉아서 공부도 하잖아." 삼형제는 그때부터 오히려 책을 읽고 탐구하고 서로 대화하는 것을 더 즐겼다.
한번은 자녀들과 함께 오동도로 바람을 쐬러 갔다. 그때 이런 말을 했다. "얘들아, 세상을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세 가지는 무엇일까? 돈, 배경, 실력이야. 그런데 엄마 아빠는 돈도 배경도 없어. 그러니 더욱 열심히 공부해서 실력을 쌓아야 해. 돈과 배경은 있다가도 쉽게 없어지지만 한번 쌓은 실력은 영원하단다."
장남 회은(33)은 서울대 역사학과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하버드대에서 석·박사를 받고 현재 미국에서 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박사학위를 받기까지 한국고등교육재단으로부터 장학금을 받았다. 차남 회원(31)은 고려대를 나와 국내 모 항공사에 근무하다 5년 전 미국 워싱턴의 항공 컨설팅 회사로 직장을 옮겨 현재 항공 컨설턴트로 일하면서 MBA 과정을 준비 중이다. 막내 회광(28)은 서울대 경제학부에서 최우수 졸업논문상을 받고 공군 학사장교로 만기제대한 뒤 현재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에서 경영학 박사과정 장학생으로 있다.
나는 삼형제가 대학에 진학할 때마다 동일한 세 가지를 당부했다. 크리스천 대학생의 정체성을 지키고, 국가유공자 자녀로서 긍지를 가질 것과 부모님이 항상 기도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시 127:3)
***[역경의 열매] 김성영 (25·끝) “만민에 복음 전하는 소명자로 살 것”
해마다 가을이 무르익어가는 10월이 되면 깊은 묵상을 하게 된다. 군복무 중 사고로 한 팔을 잃은 게 바로 10월이다. 또 다른 이유가 있다. 1989년 10월의 어느날 밤, 여수성시화운동본부 사무실에서 만난 두 명의 청년장교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청년 대상 성경 공부를 인도하고 있을 때 육군 중위 계급장을 단 장교 두 명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여수 해안대대 교육장교 김 중위와 정보장교 정 중위였다. 시내구경을 나왔다가 우연히 성시화운동본부 간판을 보고 들어왔다는 것이다. 이후 두 사람은 매주 성경 공부 모임에 참석했다. 신실한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를 연상케 하는 청년장교들이었다. 2개월 후 각자 기도 제목을 공개하고 합심기도할 때 이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같은 기도 제목을 내놓았다. "우리가 제대하기 전 부대 안에 교회가 세워지게 해주십시오."
여수제일교회 창립 80주년 기념으로 여수해안대대에 충성교회를 세웠다. 그들의 기도 제목이 응답받은 것이다. 만기 제대한 정 중위는 총신대학원을 졸업하고 중국 선교사로, 김 중위는 이집트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다. 열정적인 그들의 선교 편지를 보면서 나 역시 다시 한번 비전을 점검해보게 된다.
돌이켜보면 여수성시화운동에 몸담았던 많은 분이 사역자로 나섰다. 초대 총무를 지낸 김홍련 목사 외에 구제수 목사, 전원국 선교사, 김재성 전도사 등 여수성시화운동은 이름도, 빛도 없이 헌신해온 숨은 일꾼들을 통해 한걸음씩 전진하고 있다.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에 이르기까지 광야 40년의 세월이 흘렀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구름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이시며 반석을 깨뜨려 생수를 마시게 해주셨다. 그리고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게 하셨다. 하나님은 죄 많은 나를 택해 작은 일꾼으로 삼으시고, 군복무 중 사고 이후 광야 같은 세상에서 지난 40년(1969∼2009) 동안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베푸시어 오늘까지 인도하셨다.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시 116:12) 나의 시 '소망의 꿈'으로 답을 대신하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