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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안태근 회장입니다. 지난 2월1일, 영상자료원에서의 세미나 후 반 년이 훌쩍 흘러버렸습니다. 저는 물론이고 여러분들의 고통이 어떠하였는지는 생략하겠습니다.
오늘 코로나로 인해 세미나를 지상 연재하며 발제토록 하겠습니다.
오늘 주제는 '안 의사 유해 매장지로 잘못 보도된 기독교 묘지의 허구'에 대한 내용입니다.
최근 네이버의 글쓰기가 시스템이 바뀌어 수정 한번 하려면 복잡해져 한 번에 발제문을 모두 올리니 읽으시고 질문을 받는 형태로 하겠습니다. 질문을 덧글로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발제-
'안 의사의 유해 기독교 묘지 매장설'은 2019년 5월 28일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이 러시아 신문 자료 24건을 모아서 분석하는 과정에서 처음 나온 발표된 내용이다.
순국 당일 감옥 뒷산에 있는 <감옥묘지-아사히신문과조선총독부 보고>에 매장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유일하게 러시아 신문이 <기독교 묘지>라고 기록하고 있다.
<기독교 묘지>가 <감옥묘지>에 옆에 붙어있기 때문에 기독교 묘지를 큰 테두리로 감옥묘지로표현할 수도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는 견해가 있다. (발제 내용 인용)
아직은 더욱 연구 되어야 할 발제이었지만 사실인양 보도되며 여러 혼란을 가중시켰다. 1910년 4월 21일의 러시아 신문기사를 인용하였지만 이 기사를 입증할 자료가 필요하다. 이러한 여러 설들이 계속 대두되는 것은 지지부진한 동산파 지역의 발굴이 대책없이 미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반박 자료를 모아 다음과 같이 이번 세미나 지상 연재를 하고자 한다.
이것과 관련하여 오보였다는 기사가 다음과 같이 이미 발표되었다.
"국가기록원이 ‘새로운 자료를 발굴했다’며 국가보훈처나 학계와 상의 없이 공개한 것도 의구심이 들게 한다."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9053001070939173001
이러한 정정 보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독교 묘지설을 믿고 있다. 아울러 그동안 발굴 지연도 면책받는 분위기이다. 이러한 오보의 상황들은 나를 비롯한 우리 사업회 회원들로선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안중근 의사의 기독교묘지 매장설에 대해 많은 분들이 잘 모르고 이미 국민들의 뇌리에서 잊혀져 있는 현실이다. 그래서 이 기사로 인해 오해의 소지가 있어 이 글을 쓴다.
뜬금없다고 할 정도로 떠오른 이 설은 그야말로 설이다. 설이 진실을 가리는 작금의 사태가 안타까워 정리를 해본다.
이미 2019년 5월, 이런 일들이 잘못됐다고 기사화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뇌리에는 중국 여순의 기독교묘지 매장설이 각인되었고 그래서 유해발굴이 안되고 있는 것처럼 알려졌다. 유해발굴 담당자들로서는 좋은 핑계거리인 셈이다. 그러한 이러한 오보로 인한 사실 왜곡이 얼마나 갈 것이며 그것이 밝혀지는 날에 입을 데미지는 생각치 못하는 것이다.
당시 보도기사들과 2019년 5월 29일, 나의 입장이다.
어제의 보도로 안 의사 유해발굴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각 신문과 방송들은 이를 일제히 보도하였는데 당시 러시아신문의 기독교묘지 매장설은 잘못된 오류였다.
그것은 당시 중국과 일본의 여러 신문들은 안 의사의 매장지를 밝혔었는데 모두 여순 감옥 수인묘지인 공공묘지에 매장하였다고 보도하였다. 확인되는 것만 6개 신문이다. 이는 당시 그곳이 수인(죄인)묘지로 만들어진 곳이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발견된 러시아 신문의 기사는 공공묘지가 아닌 기독교묘지라고 매장지를 소개하고 있는데 기자가 취재한 것도 아니고 일본 신문을 인용하였다고 밝히고 있어 기사로써 정확성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기독교묘지라는 것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 이번에 처음 들은 이름이다.
1910년 3월 26일 당시 교수형 후 교회당에 모셨다가 매장하며 빚어진 오류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이런 기사로 인해 안 의사 유해발굴이 혼선을 일으켜서는 안된다.
그러나 기사의 정확도 유무를 떠나 유해발굴에 대한 분위기를 조성한 점은 유해발굴 사업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환기시킨 점에서 좋은 일이었다. 더 늦기전에 정부 당국자들은 안 의사 유해발굴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것이다.
러시아 신문 "안중근, 사형 뒤 기독교 묘지에 매장"(조선일보 기사)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5/29/2019052900292.html?utm_source=daum&utm_medium=original&utm_campaign=news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5/29/2019052900292.html
이런 허황된 기사에 많은 사람들이 그동안의 사태를 왜곡하게 되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독자들은 이 기사를 믿게 되며 이후 정정보도조차 없는 상태에서 이것을 진실로 알게 된다. 본 사업회 세미나의 발제자였던 전 경희대 진용옥 교수조차도 이 기사를 인용하며 기정사실화하였다.
“안중근 의사, 기독교 묘지 매장”… 발굴 작업 속도 낼까?
http://www.segye.com/newsView/20190528513578?OutUrl=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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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의거 보도 러시아 신문 첫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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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01^http://v.media.daum.net/v/20190529075217794?f=o^262fqD2aW3FNImlKKk^news^article^%EC%95%88%EC%A4%91%EA%B7%BC^262fqD2aW3FNImlK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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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기독교 묘지 매장".. 발굴 작업 속도 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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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01^http://v.media.daum.net/v/20190529030740999?f=o^26vJJvx6mNxWWFD1iW^news^article^%EC%95%88%EC%A4%91%EA%B7%BC^26vJJvx6mNxWWFD1i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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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01^http://v.media.daum.net/v/20190528202847829?f=o^26CgqBwqBhQrAns25R^news^article^%EC%95%88%EC%A4%91%EA%B7%BC^26CgqBwqBhQrAns25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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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해방 위한 선구자 될 것"..러 신문 속 안중근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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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01^http://v.media.daum.net/v/20190528192535404?f=o^26rdvlI9bg9uaE8VF7^news^article^%EC%95%88%EC%A4%91%EA%B7%BC^26rdvlI9bg9uaE8VF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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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01^http://v.media.daum.net/v/20190528194232802?f=o^26ZNnEDSA69tytWvMy^news^article^%EC%95%88%EC%A4%91%EA%B7%BC^26ZNnEDSA69tytWv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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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죽어서 나는 기쁘다"..당시 러시아 신문의 '대서특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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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01^http://v.media.daum.net/v/20190528205611709?f=o^26PihjRQXZqgFkA2xZ^news^article^%EC%95%88%EC%A4%91%EA%B7%BC^26PihjRQXZqgFkA2x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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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사가 묻힌 곳은 기독교 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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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공개된 안중근 의사 관련 신문기사. [사진 제공 = 연합뉴스] 안중근 의사가 순국 뒤 매장된 곳은 당초 알려졌던 중국 뤼순 교도소가 아니라 교도소 인근 기독교 묘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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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01^http://v.media.daum.net/v/20190528173605360?f=o^26qWCkqZufiEji17IW^news^article^%EC%95%88%EC%A4%91%EA%B7%BC^26qWCkqZufiEji17I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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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의거 소식 전한 러시아 신문 최초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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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직후 체포 과정부터 사형 집행 뒤 유해 매장지까지 다룬 당시 러시아 신문기사가 국내에 처음으로 공개됐습니다.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은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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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01^http://v.media.daum.net/v/20190528151151076?f=o^26yiW8i2e6WaN0IK0W^news^article^%EC%95%88%EC%A4%91%EA%B7%BC^26yiW8i2e6WaN0IK0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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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유해 찾나..러 언론 '기독교 묘지' 최초 언급
16시간전 | 뉴시스 | 다음뉴스
【성남=뉴시스】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이 28일 공개한 안중근 의사 관련 보도가 실린 '우수리스까야 아끄라이나지(紙)'. 이 신문은 1910년 4월 21일자에 '안중근은 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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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다른 기사와 나의 의견 글이다.
국가기록원 2019년 ‘안중근 기독교묘지설' 발표에 대해 2020년 2월 10일에 쓴 글이다.
기록원 ‘안중근 묘지 오보’ 알고도 공개… 유해발굴에 혼선만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9053001070939173001
작년 5월 30일 기사이다.
잘못된 사실이라는 것이 기사로 알려졌지만 아직도 인터넷을 떠돌고 있다. 이 기사를 인용하는 사례가 이번 우리 세미나에서도 재현되었다. 뜬금없는 국가기록원의 안 의사 여순 기독교묘지 유해매장 설은 안 의사 유해발굴에 혼선만 가중시킨다.
국가 기관들이 협업없이 한 건 올리기 식으로 임하는 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런 주먹구구식 행태로 의사의 발굴이 과연 가능할 것인가? 국민의 한 사람으로 호소한다. 국가보훈처는 더 이상 혼란 사태에 방관하지말고 당장 적극적인 발굴에 나서달라.
나는 당시 즉각 기독교 묘지설 반론을 채널A 뉴스와의 인터뷰했다.
기독교 묘지설 반론, 안태근 회장의 채널A 뉴스와의 인터뷰.
2019년 5월 28일, 채널A 유주은 기자와 안중근 의사 유해 관련 인터뷰가 있었다. 러시아 신문에 보도되었다는 안 의사의 유해 기독교묘지 매장설은 명백한 오류이다.
그런 묘지도 없거니와 직접 취재하여 보도한 기사가 아니고 인용 및 추정한 가공의 기사이다. 단지 당시 러시아인들의 안 의사에 대한 관심도를 엿볼 수 있는 기사로서 의미가 있다.
“안중근, 뤼순감옥 인근 기독교 묘지에 매장”…당시 러시아 보도 공개
http://www.ichannela.com/news/main/news_detailPage.do?publishId=000000149493
나 역시 채널A와의 인터뷰에서 이를 밝혔다.
다음은 제56회 세미나 때 진용옥 교수가 발제했던 내용이다.
이 설은 2019년 5월 28일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이 하얼빈 의전(義戰)항쟁직후 러시아 신문 자료 24건을 모아서 분석하는 과정에서 처음 나온 발표된 내용이다.
교살 당일 감옥 뒷산에 있는 <감옥묘지-아사히신문과조선총독부 보고>에 매장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유일하게 러시아 신문이 <기독교 묘지>라고 기록하고 있다.
<기독교 묘지>가 <감옥묘지>에 옆에 붙어있기 때문에 기독교 묘지를 큰 테두리로 감옥묘지로표현할 수도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는 견해가 있다. (발제 내용 인용)
아직은 더욱 연구 되어야 할 발제이었지만 사실인양 보도되며 여러 혼란을 가중시켰다. 1910년 4월 21일의 러시아 신문기사를 인용하였지만 이 기사를 입증할 자료가 필요하다. 이것과 관련하여 오보였다는 기사가 다음과 같이 이미 발표되었다.
"국가기록원이 ‘새로운 자료를 발굴했다’며 국가보훈처나 학계와 상의 없이 공개한 것도 의구심이 들게 한다."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9053001070939173001
아래는 관련 제56회 세미나 사진.
러시아 신문기사
진 교수는 보도 사실을 믿고 그대로 인용 발제를 하였다. 전문가들도 잘못된 신문기사로 인해 이러한 실수를 범하는 상황인데 일반 독자들이야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문제는 정정기사는 아예없거나 작은 지면만 할애되어 있고 오보 기사는 큼지막하고 인터넷에 영원히 남아 는에 띈다는 것이다.
여순 감옥구지 박물관
이국성 위원과 여순 수인묘지 답사
다음은 그간 우리사업회가 활동하며 낸 책과 당시까지의 진실 기록이다. 비록 정부의 미온적인 진행과 사드사태로 인한 외교 마찰로 발굴 사업이 중단되어 있지만 우리의 노력은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아라!
안중근뼈대찾기사업회 회장 안태근
안중근 의사는 1909년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한다. 그리고 1910년 3월 26일 여순 감옥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일제의 계산된 시각인 오전 10시 15분에 맞추어 사형된 것인데 그것은 그 시각이 5개월 전 이토의 사망시간이기 때문이다.
안 의사는 법정에서 이토를 쏜 15가지 이토의 죄목을 열거했다. 황후를 시해하고, 황제를 폐위하고, 군대를 해산하고... 그것은 대한제국을 멸망시킨 죄목들이다. 안 의사는 독립군 의병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원흉 이토를 총살한 것이다. 그런데 일제는 하얼빈에서 여순으로 옮겨와 재판을 하고 사형에 처했다. 32살 젊은 나이에 안 의사는 순국을 하였다. 그의 유언은 "내가 죽거든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였다.
그러나 올해 순국 104년을 맞아도 그의 뼈대를 고국에 모시지 못하고 있다. 지금이라도 안 의사의 뼈대를 고국에 모셔와야 한다. 안 의사의 매장 장소는 안 의사 묘 참배자인 고 신현만 씨나 이국성 씨가 이구동성으로 안 의사의 묘가 있었던 장소라고 지목한 바 있는 곳이다. 그외 그 장소가 안중근 의사의 묘라는 증거는 얼마든지 있다. 그것은 당시 검시의(檢屍醫)의 후배가 쓴 회억록, 35년간 여순감옥구지박물관에서 근무한 판모종(潘茂忠)의 증언이다. 한 사람의 증언만 있어도 우리에게는 소중한 것인데 이렇듯 여러 사람들의 증언이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증언을 토대로 검토하고 답사한 결과 이 장소는 99% 확신할 수 있는 곳이다.
만에 하나 시신이 100년여의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없어졌을 경우도 있고 이미 타인의 손을 타서 발굴이 불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이 일을 하여야 할 것이다. 그 흙이라도 모셔와야 하는 것이다.
나는 이미 안 의사 유매 매장 추정지를 발견하여 <안중근 순국 백년- 안 의사의 유해를 찾아라!>라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방송한 바 있다. 더구나 이 다큐멘터리는 2010년 3월에 한국프로듀서연합회에서 주는 '이달의 PD상'까지 받았다.
이 다큐멘터리는 세 사람의 증언자가 남긴 지도나 인터뷰를 통해 그들이 지목하는 한 곳을 추적한 프로그램인데 국가보훈처는 오픈 마인드로 이 지역의 발굴에 착수하여야 할 것이다. 스스로 그런 지역을 찾아내어 발굴하여야 할 당사자들이 정확한 증거가 아니라며 이런 사실들을 외면하고 회피하고 있다.
나는 이 장소가 안 의사의 유해 매장지가 맞다고 우리 정부의 주무부처인 국가보훈처에 열 차례 가까이 제안을 했지만 의례적인 답변만을 들었을 뿐이고 청와대 신문고에도 제안했으나 지금껏 마찬가지 답변만을 들었을 뿐이다. 언제나 답변자는 국가보훈처의 담당자이기 때문이다.
북한은 우리 보다 먼저 안 의사 탄생 100주년인 1979년에 처음으로 발굴을 시도했다. 우리가 지목하는 그 장소를 찾아갔던 것인데 고구마 밭으로 변한 것을 보고 묘가 없어졌다고 판단하여 별 성과 없이 돌아왔다.
2008년, 남북 공동으로 추진했던 유해 발굴 사업 때 북한 대표인 정종수가 이 지역은 아니라고 발표했고 국가보훈처도 그 이야기를 듣고 이 지역의 발굴을 포기했다. 그리고 이 장소를 배제한 채 10억 원 규모의 발굴사업을 벌였고 실패로 끝났다. 즉 엉뚱한 지역을 발굴했던 것인데 일본인 묘역을 발굴하여 도자기 파편만 나왔다.
국가보훈처는 지금도 이런저런 이유를 들며 발굴을 거부하고 있다. 직접 발굴하여 조사하지 않은 내용은 어떠한 말로도 정당화 될 수 없다. 고 김영광 전의원이 그러했듯이 어떠한 증언도 존중되어야 한다. 아니라고 부정하기 시작하면 누구의 증언도 채택될 수 없다.
나는 여순감옥 동쪽의 샹양가 공동묘지 죄인묘역이 안 의사의 매장지라고 확신한다. 국가보훈처는 2008년 발굴실패에 대해서 더 이상 부담감을 갖지 않아야 한다. 부담감을 갖는 것 이상으로 무서운 것은 이를 외면하고 회피하려는 것이다. 배전의 노력으로 발굴에 힘써 더 이상 안 의사에 대한 후손된 도리를 저버리지 않아야 한다.
단 1%의 가능성만 있어도 이제 발굴하여야 한다. 99%의 가능성을 확신하는 이런 제보를 더 이상 남북한이 모두 아니라고 합의했다는 말로 마무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국가보훈처가 말하는 정확한 증거라 하면 일본의 보고문건이다. 그러나 이미 보고문건은 나나 국가보훈처도 갖고 있으며 이미 EBS에서 2010년 제작 방송한 <안중근 순국 백년> 다큐멘터리에 소개되어 있다. “안중근 금일 사형, 여순에 매장” 이 보고는 일제의 관동도독부가 본국에 보고한 문건이다. 더 확실히 매장지를 지목한 문건은 있을 수도 있지만, 없을 수도 있는 미확인 문건이다. 이 문건은 본 사람도 없고 확률상으로도 없다고 해야 할 것이 이미 안 의사의 매장 보고 문건이 있기 때문이고 같은 일로 다시 보고할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지금 그러한 문서를 본 사람도 없거니와 실재하는 지에 대한 명확한 증거도 없는 그러한 비밀문건이 나와야만 발굴사업을 본격화하겠다는 것은 발굴 의지가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의 무책임한 일이다. 관계자는 새로이 시작하는 마음으로 겸허히 이 제보를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일본도 공식적으로 그런 문건이 없다는 것이고 간혹 우호적으로 찾아보겠다고 말하는 관료들은 사실을 모호하게 하여 혼란만 가중시키고 있다. 그들의 태도를 보아서야 대답도 없겠지만 혹시라도 대답할 기회가 온다면 "찾아보았지만 그런 건 없습니다." 해버리면 그만인 상황이다. 그런 저런 일로 벌써 안 의사 순국 104주기를 맞았다. 그런데도 국가보훈처는 감나무 밑에 누워 책임감 없는 일본인들의 대답을 기다리며 감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형국이다. 그것은 결국 사업의 종료를 의미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계속해서 거론된 안 의사의 매장지는 결국 한 번도 발굴되지 않고 배제된 상태로 지금까지 왔다. 모두가 알면서도 발굴을 하지 않고 지금까지 온 것이다. 지금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다.
올해 105주년을 맞는 안 의사의 의거일인 10월 26일 전까지 가능하다면 유해발굴이 마무리되었으면 하는 열망은 우리 안중근뼈대찾기사업회의 생각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 안중근뼈대찾기사업회의 목표는 안중근 의사의 뼈대찾기와 환국이다.
더 이상 시간을 소비할 수만은 없다. 지금이라도 국가보훈처는 이 사업에 바로 착수해야 할 것이다. 단 1%의 가능성을 가지고도 미군의 유해를 발굴하려는 미국의 노력을 굳이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국가보훈처의 이런 마이동풍 식의 태도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다음은 그간의 안 의사 유해발굴 관련 경위다.
1910년 3월 26일 안 의사 순국, 일제에 의해 감옥 뒷산에 매장
1948년 김구 선생, 김일성과의 회담 시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 제안
1970년 순국 50년, 박영록 국회의원이 유해 환국을 추진하며 다시 거론
1979년 김일성의 지시로 북한 발굴단 여순감옥구지묘지 현지조사
1984년 독립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는 안중근 의사의 유해 환국을 추진 계획 발표, 재중공독립 투사유해봉환추진위원회 구성
1986년 북한 유해발굴단 두 번째 조사
1989년 10월 한국정부 조사단 여순 방문
1992년 중국과 수교 후 1998년 후진타오 부주석의 유해 발굴협조 의사표시
2000년 3월 천주교단 안중근 의사 성역화 사업 추진위원회 발족, 송영순과 사이토 미치노리 중심이 된 안중근의사유해발굴위원회 발족
2000년 정의구현사제단 중심으로 안 의사 유해 발굴 및 환국추진위원회 발족
2001년 김영광 의원 중심의 안 의사 유해봉환위원회 발족
2004년 11월 노무현 대통령, 원자바오 총리에게 협력 요청
2004년 12월 정동영 통일부 장관, 중국 외교부장 리자오싱에게 요청, 최서면 안중근의사묘역 추정위원회 활동
2005년 10월 정부 최서면의 주장 반영 안중근의사 유해발굴 추진사항 발표
2006년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유해 발굴 입장 표명
2007년 3월 한중친선협회 이세기 회장 발굴 예정 발표
2007년 4월 10일 개성에서 안중근 의사 공동발굴 및 봉환을 위한 제4차 실무회담에서 남북공 동발굴단 구성 합의
2008년 1월 외통부 유해 발굴 작업 중국에 협조 요청 발표
2008년 3월 북한 유해 발굴 불참의사 통보
2008년 3월부터 4월 27일까지 유해 발굴 착수, 실패
2010년 안중근뼈대찾기사업회 발족 현재 활동 중(이상 신운용 논문 '안중근유해의 조사. 발굴 현황과 전망' 참조)
참으로 지난한 안 의사의 유해찾기의 역사이다. 1990년 처음으로 안중근 의사의 다큐멘터리를 찍으며 알게 된 안 의사의 유해찾기는 내게 민족적 염원 이상으로 와 닿았고 20여년의 시간을 보내고 2010년 3월 26일 드디어 안 의사의 매장 추정지를 추적해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방송했다.
방송 후 담당부서인 국가보훈처 국립묘지정책과를 찾아 담당자에게 우리가 찾아낸 증거들을 전달한 바 있다. 그러나 소식은 없고 시간만 흘러갔다. 안 의사 순국 100년 땅 속의 뼈가 마냥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우리는 국가보훈처장과의 대화에 발굴을 촉구하는 제보를 계속하였다. 그러나 답변은 항상 똑 같았고 결국 국가보훈처는 이 사업을 할 의지가 없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2011년 우리는 더 기다릴 수만은 없어 안중근뼈대찾기사업회를 결성하고 중국일러여순감옥구지 박물관을 찾아 사업회 차원에서 발굴을 건의하였다. 당시 관장의 긍정적인 답변을 듣고 우리는 다음 아고라를 통해 1만 명 서명을 받고 모금에 나섰다. 네티즌들이 모금을 해주는 사이 우리도 가만 있을 수는 없어 발굴을 촉구하는 1인 시위와 추운 겨울 거리 모금을 병행했다.
그리고 외교통상부, 행정안전부, 통일부까지 관련 공무원들을 찾아 우리의 사업을 건의하였으나 그들로부터의 연락은 없었다. 게다가 도움을 청했던 중국박물관 화문귀 관장의 퇴직으로 사업 자체가 불투명해져 우리의 사업은 큰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정말 이렇게 묻혀버릴 수도 있구나 싶었지만 '진인사대천명'의 자세로 대국민 성명서 배포와 1인 시위를 시작했다. 한 사람에게라도 더 알려서 이 사업을 알려 우리의 숙원인 안 의사의 뼈대를 찾아 조국에 모시고자 함이었다.
2011년 3월, 의정부 교구의 허윤석 신부와 의논하여 "뼈대찾기"란 순 우리말로 "안중근뼈대찾기사업회"를 발족하고 김호일 전 안중근의사기념관 관장을 이사장으로 모셨다. 수많은 지인들의 도움으로 알림 활동은 계속되었고 다음 아고라 서명운동이 목표인원인 만 명을 돌파하고 이 사업은 본격화되었다. 모금을 시작하였고 중국을 방문하여 이 사업의 대상자와 회담을 갖고 드디어 올해를 맞게 된 것이다.
안 의사의 유해 진위 구분은 의외로 쉬울 수도 있으며 최악의 경우는 영원한 미궁으로 빠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일단 뼈대가 나온다는 가정 하에 상황이다.
일단 안 의사의 시신은 당시 다른 잡범과 달리 관에 안치되어 매장되었다. 다른 잡범들은 나무통 속에 쪼그리고 앉은 상태로 매장되어 일단 구분이 된다. 안 의사의 매장 추정 장소는 30평 규모로 축소되었으니 그 지역에서 나올 유골은 불과 수십 구 남짓이다. 관에 안치된 시신은 안 의사 뿐이거나 기타 많아도 두 세 구일 것이다.
두 번째, 당시 잡범을 비롯하여 모든 매장자의 시신의 이름을 써서 유리병 속에 넣어 함께 매장하였다. 그러므로 안 의사의 관속에도 유리병 안에 안중근이라고 이름이 나올 것이다. 십자가가 함께 넣어졌다는 의견도 있으므로 이 또한 유력한 증거가 될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순진하다고 하시는 분들이 있다. 그러나 당시의 관례가 그렇고 다른 사체의 사진 증거도 있다. 일본의 주도면밀함을 주장하시는 분들로서는 이해 안 되는 이야기이지만 그들의 의견 또한 검증할 수 없는 추정일 뿐이다. 나로서도 발굴하기 전까지 모든 게 미지수이니 발굴하여 보는 수밖에 없다. 발굴과정은 여러 대의 카메라로 모든 과정을 찍어둘 것이며 유리병이 나오면 바로 위성중계로 안중근 의사의 뼈대찾기 사실을 방송할 것이다.
세 번째, 시신의 부패정도에 따라 확인이 안 될 수도 있지만 왼손가락의 단지 상태도 증거가 될 수 있다. 백 년이 지난 상태이기 때문에 이것은 미지수다.
네 번째, DNA 분석이다. 이것 또한 부패 상태에 따라 확인이 안될 수도 있다. 단지 그곳 토양이 산성기가 약한 곳이라니 기대해볼 뿐이다.
이런 여러 가능성을 갖고 있는 상황으로 종합적인 판정 결과 안 의사의 뼈대임을 확인하여야할 것이다. 이 과정은 모두 카메라로 녹화내지는 생중계를 할 것이기 때문에 추호의 불미스러움이나 의문을 남기지 않고 현장에서 우리 사업회 김호일 이사장이나 다른 전문가 이사진에 의해 판명될 것이다.
안중근 의사의 유해찾기는 온 민족의 숙원사업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안 의사의 유해를 찾지 못하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못 찾는 것이 아니라 안 찾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주장하는 지역에 안 의사가 매장되어 있음을 확신한다. 그러나 지난 104년 동안 이곳에서 어떠한 일들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적어도 안 의사가 처음 매장된 지역이기 때문에 꼭 발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일은 개인이나 민간 사업회에서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했다. 이 일은 국가가 나서면 되는 일이다. 2014년 하얼빈에 안중근 기념관이 들어서고 안중근 의사에 대한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이러한 호기를 놓칠 수 없다. 중국 정부의 협조 아래 안중근유해발굴사업은 꼭 이루어져야 한다.
이제 여기서 물러설 수 없다는 일념과 지난 5년간의 우리의 활동과 발굴의 타당성, 매장 추정 지역의 검증을 주요 내용으로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아라!』 책을 발간하였다. 발굴모금을 하였지만 국가가 할 수밖에 없는 일이기에 모금액으로 출간을 한 것이다. 공무원들의 포기와 무관심으로 이 사업을 멈출 수는 없다. 부디 여러분의 관심과 관련 공무원들의 활동을 기대해본다.
책 소개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아라!』보도자료
안중근 의사의 유해 환국은 언제 이루어 질 것인가?!
유해 환국 프로젝트의 첫걸음,
안중근 의사 매장지를 찾아라!
※ 최초로 공개되는 안중근 의사 매장지 관련 사진!!
본서에서 안중근 의사의 유해가 매장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매장지와 관련된 사진을 국내 최초로 공개한다!
1. 본문 37쪽, 안의사 유해 매장 추정지
1950년대 시기의 뤼순감옥 공공묘지와 둥산포 일대 사진. 공공묘지가 한 눈에 들어오는 이 사진은, 왼쪽 중간 상단 부분에 봉분으로 주변이 둘러싸인 무덤이 눈에 띈다. 이 사진은 최초 공개되는 것으로 현재의 기독교 묘지 앞 위치에서 찍은 사진이며, 현재 모습을 촬영한 사진과 합성하면 묘지의 정확한 위치도 추정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 저자 소개
안태근(安泰根)
한국외대 대학원 글로벌문화콘텐츠학과 박사. EBS프로듀서로서 다큐멘터리와 어린이 드라마를 연출하였으며 2004년 광복절 특집 3부작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 2007년 한중수교 15주년 특집 5부작 <청사초롱과 홍등>을 제작하였다. 안중근 의사에 대한 존경심으로 1991년 <대한국인 안중근>을 연출하였으며, 2009년 3월 안 의사 의거 100년 기념작으로 <어린이드라마 스파크>에서 <대한국인안중근>4부작을 연출하였다.
안 의사의 유해발굴에 관심으로 2010년 3월 26일 EBS특집다큐멘터리 <안중근 순국백년, 안 의사의 유해를 찾아라!>를 연출하였고 현재 유해환국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중이다. 2011년 안중근뼈대찾기사업회를 발족하였고 현재는 호남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김월배(金月培)
건국대학교 경제학박사. 현재 중국 다롄에 거주하며 뤼순일아감옥구지박물관 초빙연구원으로서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 현장 조사 및 자료 발굴, 뤼순 감옥의 대외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또한 하얼빈 안중근 의사 기념관 연구위원으로 있으면서 안중근뼈대찾기사업회 중국지회장으로 활동 중이다. 수년간 매헌 윤봉길 월진회 이사직을 역임하며, 중국 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비롯한 항일기관과의 교류를 수행하였다. 현재 다롄외국어대학 외국인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관련저서로는 『안중근은 애국, 역사는 흐른다』(공저), 『안중근 의사 지식문답』(공저)이 있으며, 안중근 의사 애국주의 경제관과 지역공동체, 중국 뤼순 감옥에서 순국한 한국 독립운동가 연구, 중국동북지역의 조선인 독립운동 등 논문과 한중경제와 관련한 다수의 논문이 있다.
※ 책소개
이 책은 아직까지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발굴하기 위한 것으로, 안중근 의사의 유해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유력한 매장지를 세상에 알리고자 집필되었다.
안중근 의사는 우리나라 독립 역사상 가장 위대한 독립투사 중 한 사람이다. 그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사형선고를 받으며 남긴 유언은, 국권을 잃은 나라의 국민으로서의 답답한 심경을 토로한 것이었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2014년은 안중근 의사 의거 105주기, 순국 104주기가 되는 해이다. 하지만 국권이 회복되고 안 의사가 순국한지 10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안중근 의사의 유해는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뤼순감옥 죄수 묘역에 안장했다는 기록과 전언만으로는 정확한 유해 매장지의 위치를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정부에서 2008년에 대대적인 발굴 작업을 진행했음에도 수포로 돌아가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안중근뼈대찾기사업회’가 설립되면서 민간적 차원에서 유해 발굴에 나서고 있다. 이 책의 저자 중 한 명인 안태근 박사는 EBS PD로 재직할 당시 <안중근 순국 백 년, 안 의사의 유해를 찾아라!>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서 안중근 의사의 매장지로 매우 유력한 뤼순일아감옥구지박물관을 지목하였다. 여러 증인들의 증언과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발굴하기 위한 많은 사람들의 연구와 조사가 모두 이곳을 향하고 있다. 안중근 의사를 더 이상 낯선 타국에 남겨두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책은 안중근 의사의 유해가 뤼순일아감옥구지박물관에 묻혀 있다고 결론을 내리기까지의 과정을 상세하게 담아내었다. 중국 뤼순으로 가 현지 조사를 한 일부터, 뤼순의 역사적인 사실과 기록, 안중근 의사 서거 당시 묘지를 참배했다고 하는 증인들, 뤼순일아감옥구지박물관에서 근무했었고 근무하고 있는 직원들의 이야기를 종합하여 결론을 도출하였다.
또한 안중근 의사 유해가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을 발굴하기 위한 그동안의 노력도 담겨있다. 이는 안중근뼈대찾기사업회의 목표이기도 하여, 안중근뼈대찾기사업회가 그간 행해왔던 노력과 맛보았던 좌절 등을 수록하였다.
안중근 의사의 유해는 한시라도 빨리 발굴해 안장해야 한다. 이를 위해 정부의 각 부처는 물론 민간에서도 힘을 보태어 안중근 의사를 고국으로 모셔 와야 할 것이다. 이 책이 안중근 의사 유해 환국 사업에 조그마한 불씨가 되기를 고대해 본다.
다음은 이번 일에 대한 우리사업회의 이국성 자문위원의 의견을 들었다.
그는 중국 현장을 수도 없이 다니며 체크한 전문가이다.
안중근 의사 묘 참배자- 이국성 선생과 2020년 2월 27일 통화.
코로나19로 인해 2월의 세미나가 취소되어 만나지 못하는 이국성 선생과 통화했다.
이 선생은 1958년 부친과 함께 안 의사의 묘를 참배했던 분이다. 고령이지만 아직은 거동하는데 문제가 없다.
그분은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이회영 선생의 손자되는데 안 의사 묘 참배로 나와 인연이 되어 벌써 10 년 째 만나고 있다. 우리 사업회의 자문위원도 맡고 계시다.
세미나에 모셔 듣고자 했던 이야기는 최근 불거지는 천주교 묘지, 혹은 기독교 묘지라고 불리우는 곳에 안 의사의 매장설에 대한 정확한 사실을 묻고자 함이었다.
결론부터 이야기한다면 그건 잘못된 것이다. 천주교 묘지는 동산파 구역내에 있지만 남쪽으로 100m 앞 봉우리 능선에 있다. 그곳에 안 의사를 모셨다는 설은 우선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간다. 수인(죄인)묘지를 두고 일제가 안 의사를 천주교 묘지에 모셨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관리도 힘들고 안 의사를 특별히 그곳에 매장할 이유가 없는 일이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작년에 국가기록원이 러시아 신문기사를 발견해 인용하며 일파만파로 왜곡되었다. 곧바로 대련의 영사관이 이 건에 대해 세미나까지 가지며 왜곡된 뉴스가 사실인양 SNS에서 유령처럼 떠돌고 있는 것이다. 국가보훈처가 2008년 이후 13년째 발굴을 못하므로 벌어지는 해프닝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지목하는 안 위사 매장지역은 동산파 구역의 수인묘지 2열의 가운데 지점이다. 이 지역은 여순감옥박물관에서 정년퇴임을 했던 반무충 연구원에 의해 검증된 곳이다. 그는 북한 인사 및 나를 비롯한 한국의 방문객을 맞으며 안내를 맡았고, 이 지역에 얽힌 그간의 역사를 잘 알고 있는 분이다.
이국성 씨도 그를 만나 검증을 받은 바 있다. 우리는 같이 식사를 하며 아직도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어서 빨리 발굴이 이루어져 다시 만날 날을 고대한다.
그런가 하면 안 의사의 묘 참배 증언자 이국성 선생이 생존해있고 1930년대 여순감옥에 근무했던 검시의 고가 하쓰이치 선생이 남긴 회고록도 존재한다.
또한 이국성 선생에 의하면 매화구의 해산중학교 김소묵 교장과 김홍범 교도주임도 그곳을 방문하여 '안중근지'묘라는 나무 목비를 보았다고 한다. 두 분은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김소묵 선생은 생존하였다면 110세 가량이고 김홍범 선생은 90세 가량이다. 김홍범 선생은 1956년 민족교육연구차 안 의사 묘를 참배하였는데 별세 전까지 이곳을 찾아왔었다. 그때 안중근의사숭모회의 안응모 이사장도 동행하여 안중근의사기념관에 기록이 남아있다.
이같은 많은 증거를 놔두고 러시아 신문 기사 한 줄을 신봉해서야 되겠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