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그리스도인들은 거의 설교자들이 해석 적용한 말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래서 신간서적이 나온다거나 또는 어떤 슈퍼스타를 따라 우왕좌왕 하고 있습니다.
과학은 이론이며 원리이고 기술은 그 적용이라고 말합니다.
이를 테면 물리학이 있고 그 물리학을 응용하여 만든 기계가 있습니다.
한 때는 한국이 이 기초과학에 약하고 제조기술만 있다고 지적 받은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세에 있어서도 이와 같은 허점이 나타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엔 진리라는 영의 원리가 있으므로 하나님의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을 그 원리를 통해 받아 하나님의 자녀의 복된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듣기만 하고 그 말씀이 체화되지 않는 상태의 명목적인 신앙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와 진리로 들은 말씀이 체화되는 원리를 터득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수용하면 속사람이 변하는 이면적인 그리스도인이 되지만
진리를 거부하면 겉만 꾸미는 표면적인 그리스도인이 되기 때문입니다(롬2장)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약1:22)
엄중한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말씀을 행하는 자(포인타이)가 되고’
이 말씀은 들은 말씀을 이루어 반드시 성취하는 자가 되라는 뜻입니다.
곧 말씀이 삶의 원리가 되는 것이며 그 말씀이
자신의 장막이 되고 세마포의 옷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듣기만 하여 자기를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고 하십니다(마7:21절 이하)
사람들 위에 집을 세운 사람들은 말씀을 듣는 것만 자랑합니다.
여기서 ‘자기를 속이는 자’란 자기 자신을 잘 못 계산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식으로 믿으면 되겠지 하고 자신이 스스로 믿음을 계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오산하는 것이 현재의 기독교의 총체적인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지식만 된 것은 들은 것이 한 동안 기억되다가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양식이 된 것은 안에서 쌓여 언젠가는 밖으로 표현이 되고 나타나게 됩니다.
왜 잊어버리는가?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것 같아서"(약1:23)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취되지 않은 사람은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습니다(마7:21)
거울로 자신의 생김새를 보고 돌아서서 잊어버리고 마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성경말씀에 한 번 자신을 비춰보고 맞다 하고 잊어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약1:24)입니다.
제 자신을 보고 돌아서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완전히 잊어버립니다.
어떻게 생겼더라? 하고는 기억이 안 납니다. 들을 때 그 순간뿐입니다.
그렇지만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약1:25)
온전한 율법 곧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항상 자세히
들여다보는 사람은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되지 않습니다.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고 다시 살아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었는데 그 하늘의 보화를 잠시라도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허나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하는 생각이 가득하면 어찌 그리스도가 보화가 될까요?
세상에서 하나님은 간혹 생각해도 되지만 돈은 항상 생각해야 되는 보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돈 만큼만 주님을 생각하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죄와 사망에서 나를 자유하게 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몸에 흔적으로
지니고 있는 사람은 말씀을 삶으로 성취시켜 행함이 되는 이면의 그리스도인입니다.
그 성장의 척도에 따라 행함이 됩니다. 곧 말씀이 육신(embody)이 되어 갑니다(요1:14)
이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은 요한복음 14-16장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지만 야고보서는 히브리서를 건너 왔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로마서를 모르면 요한복음을 모르고 따라서 히브리서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야고보서를 펴 놓고는 네가 믿음이 있냐 그러면 행하라고 야단을 치게 됩니다.
자신도 되지 않는 말씀을 바리새인처럼 손 하나 까닥하지 않고 남에게 짐을 지웁니다.
저 역시 여기까지 이르기 위해 상당한 기간 말씀을 듣고 묵상하고 진리의 말씀을
깨닫고 그 길을 따라 나아가는데 많은 실패와 고난을 통해 인내를 이루어야만 했습니다.
제가 겪은 행로를 잘 알기에 사람의 관점으로 성경을 해석 적용한 인스턴트식의
말들에 익숙해진 귀를 가진 타다 남은 부지깽이 같은 사람들에게 새삼 영적인
원리를 터득하라고 다그치는 괴로움을 끼치는 것이 항상 마음을 무겁게 짓누릅니다.
그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 매일 논문(?)같은 분량을 축약해서 설명하는 게 괴롭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폐할 수가 없습니다.
마음속에 심긴 도, 곧 새 언약이며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영과 생명에 관한 말씀, 바로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
아니면 우리의 생각 곧 뇌의 구조가 바뀌지 않으므로 가치관과
인생관이 바뀌지 않는다는 일념은 절대로 포기할 수 없습니다.
며칠 전 한 성도가 주님 품에 돌아가셨는데 마지막 방문 때에 대화중에
지난 수년 동안의 말씀교제가 열매를 맺었다고 여기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건 병원에 누워 있는데 그동안 읽고 들었던 말씀이 머릿속에 가득하게
떠오르고 자는 동안에도 말씀이 앞에 환하게 열리더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게 바로 우리 뇌 속의 random connection이 말씀에 의해 의식화 되어
하나님의 나라에서 주님과 나눌 언어가 같아졌다는 말이 됩니다.
음부로 간 부자와는 확연하게 다른 의식의 상태를 보여 주었습니다. 할렐루야!
그렇지만 먼 옛날 한 목사님이 임종하실 때를 돌이켜 보면
마지막 15일 전에 제게 하신 말씀이 김목사 내가 일어나면
우리 자갈치 시장에 가서 싱싱한 놈 몇 마리 사다가 푹 고아서 같이 먹자 였습니다.
뒷골이 싸늘한 느낌이었습니다. 그 목사님에 비하면 이분은 말씀화가 된 분이죠.
결론입니다. 세상에 이거다 저거다 말들이 난무하지만 오직 자유하게 하는 율법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그 행하는 일 곧 성취되는 말씀에 따라 복을 받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 쉽고 가벼운 것이라는 사실을 터득하고
항상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는 일이 일상이고 행복입니다.
그런 자신의 존재 자체가 바로 복이며 그로인해 말씀이 성취가 되면
행함으로 나타나고 그로 인해 미래의 복까지 받으리라고 성경은 약속하십니다.
첫댓글 아멘 입니다.
저도 실제와 다르게 착각속에 살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는 목사님 표현대로 쓰자면 "이거다 저거다 말 마시고" 실제로 성령님을 만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따라서 지금 저의 기도 제목 "0"순위는 성령님께서 오셔서 내안에 그리스도가 살아계신다는 "믿음" 이 실제가 되는것 입니다.
할렐루야 말세의 key word는 바로 성령님의 내주 역사하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을 늘 묵상하고 주 안에 거하기를 사모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성령님만이 접촉점이며 플레폼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멘!
할렐루야!
좋은 신앙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