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14:26-33, 성도는 질서대로 품위있게 덕을 세워야
오늘 나누는 말씀은 11장에서 시작되어 공적 예배의 종결되는 부분입니다. 예배의 부분에서 질서를 언급하고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방법을 제시합니다. 즉 방언에 대해서 통역이 없으면 공동체 예배에서는 사용하지 말것이며 혹 통변이 있다 하여도 차서에 따라 하라고 권면합니다. 또한 예언도 세 사람이상 허용하지 말고 그 예언에 대해서 청중들이 분변하고 그 내용을 이해하여 가짜 예언이 교회안에 침투하지 못하도록 29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본문이 주는 교훈과 은혜받는 시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예배에 나올 때 어떤 마음으로 오느냐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26절을 보면“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고린도교회의 예배의 모습인데 ‘모일 때’ 여기에는 찬송시가 있고, 가르치는 말씀, 계시도 있고, 방언도, 방언통역도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고린도교회의 은사들입니다. 현재 한국교회에서 이러한 은사가 있다면 존경을 받고 자랑과 그리고 대접을 받을 은사들입니다. 대단하고 귀하고 부러운 것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시는 26절에서는 섬기고 덕을 세우는데 사용하라고 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교회에 어떤 마음과 자세로 나와서 주님께 예배를 드리느냐가 더 귀하다고 하시고 있습니다.
또한 모든 은사는 덕을 세우기 위하여. 은사가 나타나는 그 사람이 높아지고 자랑되는 것이 아니라 덕을 세우는 방향으로 발휘되어야 합니다. 찬양대가 찬양할 때, 교사가 가르칠 때 설교자가 설교할 때 기도자가 기도할 때 식당에서 봉사할 때, 무엇을 하든지 우리에게 허락된 은사를 사용할 때는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는 말을 기억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시2:11절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 할지어다” 아멘.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에 충실할 때 교회는 든든히 세워집니다.
27절“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28절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차례’‘메로스’는 ‘분배, 분깃, 나눔, 조각’을 의미하는데 이 말의 의미는 자기에게 주신 은사를 교회안에서 섬길수 있는 일정한 분깃이 있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여기에 열거된 은사를 다 주셨어도 혼자 그것을 질서가 없이 함부로 혹은 혼자서 다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시고 있습니다. 방언 역시 공동체 안에서는 통역자가 없으면 혼자 있을 때 하나님께 기도할 때만 하고 잠잠하라 하십니다. 하지 말라가 아니라 하라고 하시는데 모든 것이 교회를 세우고 덕을 끼쳐야 한다 하십니다.
답십리에 살 때 권사님이 은사를 강하게 받으셨는데 그 은사로 목사님과 마찰을 빚으셨는데 그때 권사님이 성령님이 하라시는데 목사님에게 제재를 받으니 내 영이 죽는다고 하며, 교회를 옮기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아예 멀리 이사를 가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말씀을 바로 알았더라면 지혜롭게 신앙생활을 할수도 있었는데 말입니다.
그러므로 롬12:3절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교회안에서 나의 위치, 나에게 주신 분량, 몫입니다. 그 부분을 바르게 행하는 것입니다.
고후10:13절“그러나 우리는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그 범위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곧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예언의 말씀에 대한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29절“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분별력’‘디아크리노’는 ‘철저하게 분리하다, 식별하다, 판단하다, 의심하다’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들을 때 철처하게 마음으로 의심도 해보고 따져보고 확인해보고 마음으로 들어 담으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거짓 선지가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요일4:1절“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이단에 넘어간 자들이 많은데 대 부분은 어느 교회에서 나왔다고 비판하는 것을 볼수가 있습니다. 마귀는 택하신 자들도 노리고 무너뜨리기 때문에 또 우리 앞에 광명의 천사로 나오기 때문에, 또는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고 나오기 때문에(고후11:14,15) 말씀을 바르고 정확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히2:1,2절“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함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 아멘
30절“만일 곁에 앉아 있는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31절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여기서는 양보의 원리를 전하고 있습니다. 양보는 아랫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세계에서는 먼저 믿은 사람, 먼저 깨달은 앞선 사람이 해야 된다고 하십니다.
세례요한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자신의 뒤에 오시는 주님을 위해 자신의 위치를 아낌없이 내어 드렸습니다. 요3:30절을 보면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바울은 고전10:24절에서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했습니다.
절제력이 상실된 은사는 성령의 은사라 하기 어렵습니다.
32절“예언하는 자들의 영은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제재’‘휘포탓소’는 ‘종속, 복종, 굴복’이라는 의미로서 예언의 영이 임하여 예언을 말할지라도 스스로 얼마든지 절제가 가능하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다른 것에서 성령충만하다고 해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주위를 둘러 보아 덕이 세워지지 않고 오히려 무리를 일으키는 것이라면 스스로 절제를 하라는 것입니다. 갈5장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에 마지막 열매는 바로 절제인 것입니다. 고전9:25절에도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아멘.
변명과 합리화는 성도라면 버려야 할 악입니다.
33절“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모든 성도가 교회에서 함과 같이” ‘어지러움’‘아가타스타시아’는 합성어로‘심한 무질서, 불안정, 동요, 요란’등의 의미입니다. 직역을 해보면 하나님은 무질서로 불안정으로 동요나 요란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즉 교회안에 일어나는 무질서로 요란하고 불안해하는 요소는 하나님의 탓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주 의미없이 나오는 말 중에 이것도 하나님 뜻이야 라고 하는 말은 조심해야 합니다.
이것은 창3장에서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이 아담에게 왜 먹었느냐고 추궁하실 때 말하기를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한 여자가 주어서 먹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책임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죄책에서 면제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평생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살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끝내는 그 왔던 곳,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말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그래서 하나님은 화평이라고 하십니다.
히 샬롬에 대응 헬라어 ‘에이레네’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샬롬은 완벽한 평화라는 것을 말씀입니다. 그런데 구약에서는 힘에 의한 평화라면 신약에서 화평은 서로간의 화해를 통해서 주어지는 평화입니다. 이것은 십자가로서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것을 허물고 화해가 이루어진 것을 통해 우리도 서로간의 막혔던 것을 허물어서 화평을 누리라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래야 그 예배가 열납 되고 그 기도가 열납이 되고, 그래서 성령 안에서 십자가의 보좌로 담대히 나아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살전5:13절입니다. “그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아멘.
34절“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문자적으로 하면 생물학적으로 남편과 아내를 말할 수 있습니다. 이 구절 때문에 합동이나 고신에서는 여자가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우리의 신랑은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생명의 씨를 가진 자가 남자입니다. 생명의 씨를 받아서 열매를 맺어야 하는 자들은 다 교회이고, 여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남편은 어린양 되신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요4:16절을 보면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여자와 이야기를 하다가 네 남편을 불러 오라 하셨습니다. 그러자 여자가 말하기를 나는 남편이 없다고 하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이 부분은 다음에 다시 나누기로 하겠습니다.
마치려 합니다.
은사는 질서 있게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사용하고 은사로 인해 분쟁이나 무질서로 화평이 깨지지 않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날이 갈수록 성장하고 성숙하여 품위있고 단정하게 신앙생활을 하여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인정받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권하고 축복합니다. 아멘 의정부 등대지기 하늘산소.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