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판화작가 열전(4-2)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와, 미술그룹 <Die Brücke>의 성공과 좌절(1-2)
*Ernst Ludwig Kirchner(1880-1938)
*미술그룹 <Die Brücke> (1905-1913)
미술그룹 ‘다리(Die Brücke)’의 결성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는 1880년 독일 아샤펜부르크(Aschaffenburg)에서 태어났다. 종이 제조 공장의 화학자인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 가족은 프랑크푸르트 등 도시를 옮겨다니다가 아버지가 켐니츠공과대학 교수가 되면서 안착했다. 1901년 그는 아버지가 권유하는 드레스덴 공대 건축과에 입학해 거기서 건축과 투시도뿐 아니라 미술대학처럼 소묘와 미술사도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만난다. 거기서 키르히너는 절친 브레일(Fritz Bleyl)을 만나 미술에 관해 열띤 논쟁을 주고받기 시작했고, 1905년 대학을 졸업하면서 같이 건축을 전공한 3명의 친구, 즉 브레일을 비롯해 칼슈미트 로트루프(Karl Schmidt-Rottluff), 에리히 헤켈(Erich Heckel)들과 함께 그룹 <디 브뤼케Die Brücke(다리(橋)라는 뜻)>를 결성한다.
이 4명의 젊은이들은 모두 미술에 관심이 집중돼 있었고, 미술의 새로운 표현형식과 그 의미를 확장하고자 하는 뜨거운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2년이 지날 즈음 처음 멤버 중 브레일이 나가고, 에밀 놀데(Emil Nolde), 막스 페슈타인(Max Pechstein), 오토 뮐러(Otto Mueller)가 가담한다. 이 그룹 멤버의 작품은 모두 이후 나치정권이 기획한 전시 <퇴폐미술전>에 비자발적으로 전시되는 기록을 남긴다. 또한 멤버의 독특한 활동은 이후 유럽의 미술사에서 ‘표현주의(expressionism)’라는 이름으로 등록되고 거론된다.
이들은 학교 등 기존 교육기관에서 학습되는 아카데믹한 미술은 생명력을 상실한 채 그저 습관을 반복하고 있다고 보았다. 이들은 지루한 전통적 스타일에 반발하는 동시에 상투화된 중산층의 기호와 취미에 영합하기를 거부했다. 미술은 삶의 본질에 있는 자발성과 즉흥성을 반영해야 하며, 마치 춤추는 것처럼 어떤 고양된 정신상태를 자유분방하게 즉각적으로 표현하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작업실을 마련하고 거기서 함께 작업하며, 서로 제작에 필요한 기술이나 정보를 나누었고 모델링을 함께 했다. 키르히너는 ‘브뤼케’의 선언문을 목판에 새겨 찍었다.
“우리는 모든 젊은이들에게 함께 하자고 제안한다. 우리는 미래를 짊어지고 있는 젊은이로서, 이미 자리 잡고있는 나이 든 세력들로부터 우리의 삶과 실천을 위해 자유를 쟁취하자고 주장한다”
일종의 과거와 전통으로부터의 독립선언이었다. 브뤼케 예술가들은 자신들이 엄청난 변화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확신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방식의 예술을 창조하고자 했다. 키르히너는 특히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를 존경하고 있었다. 그들은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나타나는 ’초인사상‘이 과거와 미래 사이를 잇는 ’다리‘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생각에서 이들은 당시의 유럽미술계에 불기 시작한 마티스(Henri Matisse)나 드랭(André Derain) 등의 야수파에서 몇 발자국 더 앞으로 나아갔다. 즉 대상을 보이는 대로 재현하는 객관적 묘사가 아니라, 대상이 불러일으킨 주관적 감정을 자유로운 색채와 붓질을 통해 표현하고자 했다. 카메라에 의해 기계적으로 재현되는 객관적 외양(appearance of things)보다는, 거기에 회화 특유의 감성을 더해 표현함으로써 관람자로부터도 더 큰 감성적 반응과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보았다. 오늘날에는 이러한 주관성, 즉흥성, 직관성 등이 ’표현주의‘ 미술의 주요한 특성으로 거론된다.
또한 이들에 영향을 미친 것은 이른바 ’원시미술(primitive art)‘혹은 ’부족미술‘이었다. 19세기부터 배를 타고 유럽으로 들어온 아프리카와 오세아니아 등지의 부족/토속 미술품들이 당시의 유럽 미술 전반에 엄청난 충격과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 폭넓은 영향을 잘 정리한 전시가 1985년 뉴욕의 현대미술관에서 <”Primitivism“ in 20th Century Art-부족미술과 현대미술의 친근성>이란 제목으로 열린 바 있다. 이 전시는 ”유럽의 미술이 얼마나 또 어떻게 아프리카 등의 부족/토속미술을 모방했는가?“라는 말로 요약할 수도 있는 이 전시는 미국과 유럽에서 뜨거운 화제가 됐고, 한편 새롭게 문화적 흑백 갈등을 일으키기도 했다. 전시회와 동일한 제목으로 690페이지에 달하는 카달로그가 <Ⅰ> <Ⅱ>권으로 묶여 나온 바 있다.)
그것은 그리스와 로마, 그리고 기독교 미술로 이어지는 서구의 미술적 전통과는 전혀 다른 표현과 문맥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서구 미술인들의 눈에 그것들은 매우 낯선 방식과 조합으로 만들어졌으나, 그것은 충격적이리만큼 생명과 삶의 본질을 드러냈다. 이런 이유로 마티스와 피카소 등 당시의 여러 화가들이 경쟁적으로 그 원시미술을 수집하고 연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키르히너의 작업실 사진 중에도 물 건너온 원시미술품이 보이고, 그즈음 그가 제작한 조각품들에서 뚜렷히 그 영향을 볼 수 있다. 특별히 그의 회화는 프랑스 야수파의 영향과 더불어 원시미술의 대담성, 직진성, 즉흥성, 단순성을 받아들이면서 감성과 생명력이 만나는 새로운 차원의 회화를 열었다.
전위미술의 이러한 새로운 시도들이 예술인들 사이에서 뜨거운 이슈가 되어 여러가지 평가와 논란을 주고받고 있을 때, 미술계에선 ’갑툭튀‘ 히틀러가 <퇴폐미술전>이라는 일종의 ’재앙‘에 가까운 전시회를 열어 새롭고 젊은 예술정신들을 압사시켰다. 그 재앙은 수많은 예술가들의 망명과 키르히너와 벤야민 등의 죽음을 결과했고, 이후에도 지속되다가 1945년 히틀러의 자폭과 2차대전의 종전선언과 함께 사그라들었다.
’목판화‘의 새로운 발견
건축사 학위를 받으며 졸업하자마자 곧바로 ”브뤼케“ 미술운동에 뛰어든 4명의 젊은이들은 한 작업실에 모여 함께 먹고, 마시고, 그리고, 만들며, 놀았다.
1905년에 출범하면서 ”브뤼케“가 한 일 중 가장 놀라운 것의 하나는 판화, 그 중에서도 목판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 매체에 자신들의 미학을 구체적으로 실현해갔던 일이다, 이들은 나무판 위에서 단번에 결정되는 칼질과 그것이 흑과 백의 극적 대비로 찍혀나오는 목판화의 표현주의적 특성에 주목했다.
이들은 4백년 전 알프레드 뒤러가 섬세하게 표현하던 목판을 격렬한 감성 표현과 감정 도발의 수단으로 전환시켰다. 그리하여 키르히너를 비롯해, 에리히 핸켈, 에밀 놀데, 막스 페슈타인, 칼 슈미트-로트루프, 오토 뮐러까지 각각 그 실험을 끝까지 밀고 나갔다. 회화와 마찬가지로 이들의 판화작품도 형태가 단순화되면서 왜곡됐다. 거기에 거친 칼자국과 함께 마침내 강렬한 흑백대비로 찍혀나온 판화가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들은 젊었고, 시각적 표현에 있어 ”질풍노도“와 같은 충동을 그대로 옮기고자 했다.
멤버들은 작업실을 같이 쓰면서 같이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이를테면 표현 재료와 기술 등에 관한 정보 뿐만 아니라 서로 모델을 해주기도 하고, 여성모델을 데리고 와 함께 스케치를 하는 등 공유하는 시간이 많았다. 이들의 사진 중에는 키르히너가 벌거벗고 춤추고 있고 그것을 외출복 차림의 여성들이 웃으며 보고 있는 장면도 보이는데, 이들이 얼마나 젊음 특유의 ’자유‘를 구가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키르히너는 자신의 죽음의 순간까지 같이하는 연인 에르나 쉴링을 이즈음 만났다.
그렇게 함께 한지 8년이 지난 1913년, 회원들은 ”브뤼케“를 해산하기로 한다. 키르히너가 쓴 ”브뤼케 연대기“란 글에 나머지 회원들이 동의할 수 없다는 이유로 해체를 결정하게 됐다고 하는데,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자그마치 8년 동안을 한 화실을 공동으로 쓰며 함께 작품 및 전시 활동을 해왔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젊은 날에는 사실 3년 이상 공동생활을 하는 것도 흔치 않으니까 말이다.
그때까지 회원들이 함께 한 일 중 가장 눈에 띠는 것이 판화작품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회원 모두가 판화로 폴트폴리오를 만들었고, 매년 판화집을 내고 그것으로 자금을 마련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회원들에게 있어 판화는 일종의 실험작들이어서 잘 팔리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매우 적은 숫자만 찍어서 그게 수입이 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꾸준히 제작한 그 실험작들이 이후 회원들의 큰 성과로 남았다.
오늘날에는 ’표현주의‘도 하나의 형식과 스타일이 되어 내용 없이 겉멋만 내는 회화들도 흔히 보게 되지만, 이들의 판화 작품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들이 무엇을 고민하고, 무엇을 향해 나아갔는지, 이른바 ”표현주의“라는 화풍이 무엇인지 그 순수한 상태를 충분히 감지할 수 있다.
손이 잘려나간 군인-자화상을 그리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시작하자 키르히너는 될수록 입대를 피하다가 강제징용이 코앞에 다가오자 운전병으로 자원입대를 한다. 그러나 입대 직후 포병 훈련을 받던 그는 갑작스레 신경쇄약과 정신이상 증상을 보인다. 그로 인해 그는 제대 판정을 받고 베를린으로 돌아온다. 이때부터 그는 정기적인 검진과 약을 처방받아야 하는 정신질환자로 살기 시작한다. 이즈음 그린 그림이 중 하나가 <군인인 자화상>(1915)이다. 화가는 자신을 병색 짙은 얼굴에 손목부터 잘린 오른 팔을 들고 있는 군인으로 그리고 있다.
1916년에는 의사의 충고를 받아들여 스위스의 전원도시에 요양소를 마련하고 약으로 정신의 균형을 잡으면서도 스위스와 베를린을 오가며 작업을 계속한다. 그해 10월, 프랑크푸르트에서 연 전시회가 반응이 좋아 다행히 작품이 많이 팔려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긴다. 하지만 그해 12월 우울증 등 상태가 나빠져서 지팡이를 집고서 간신히 발을 땔 수 있는 상태가 된다. 1917년부터는 주치의의 권고로 스위스의 다보스에 요양소를 마련한다.
이처럼 살얼음판을 걷듯 지병을 관리하며 지내는 중에도 그는 스위스와 베를린을 오가며 꾸준히 작품을 제작하고 발표했다. 꾸준한 작품활동의 결과 작가로서의 위치가 확고해지면서 1931년에는 베를린 미술대학의 교수가 된다.
그런데 1931년은 히틀러가 권력을 잡고 나치정부가 들어선 해였다. 이때부터 그의 형편이 나빠지기 시작한다. 독재정권의 입김이 미술계에도 스며든 것이다. 그의 작품을 찾는 갤러리와 거래가 줄어들더니 어느 날부터인가 뚝 끊겼다.
1937년은 그에게 악몽과 같은 한 해였다. 베를린미술대학의 교수에서 축출되었고, 건강이 악화되어 약처방이 강화되었으며, 무엇보다도 나치정부에 의해 <퇴폐미술전>이 준비되면서 미술관에 있던 그의 작품 639점이 몰수됐다. 그리고 그 중 32점의 유화, 판화, 조각이 <퇴폐미술전>에 작가의 의향과 관계없이 전시됐다. 그리고 베를린미술대학에서도 쫒겨난 사건도 사회와 단절된 작가의 위치를 결정적으로 인식시킨 사건이었다. 이러한 <퇴폐미술전>을 둘러싼 여러 일들이 그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다.
그가 치료를 위해 스위스에 요양하고 있는 중, 독일군이 오스트리아를 강제로 합병했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부터 피해망상을 보인다. 독일군이 스위스를 침공한 후 찾아와 자신의 작품을 압수해갈 것이란 공포에 시달리기 시작한다, 그 며칠 후 그가 마침내 스스로 세상을 떠난다. 그 때 그의 작업실에는 거의 완성을 앞둔 유화작품 <양떼들>이 여전히 테레핀 냄새를 피어올리며 작가의 싸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몸은 나치정부 하의 고국 독일이 아니라, 요양처 스위스 다보스의 흙 아래에 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