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창세전에 아버지와 함께 했던 영화란 무엇인가?
[요한복음 17: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예수께서 창세전에
아버지(하나님)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하나님)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라고 했는데
도대체 이 말이
무슨 말인가?
하나님은 인간
육체가 아니고 천지창조주로서 스스로 있는 자요
“말씀(영)” 이다. 스스로 있는 자는 스스로 있는 자의 속성에 따라서
말씀으로 자연법칙을
세워서
인간을 포함한
모든 자연만물을 창조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천년 전에 사람육체로 오신 분이지만 그 사람육체
안에 말씀(하나님의영)을 가지고 오신 분이기 때문에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 라는 말이 성립되는 것이다.
부연하자면 예수님이
가지고 오신 말씀은 자연계를 창조하심이 아니고
인간에게 말씀이라고
하는 하나님을 알려주시는 인간심령창조를 위해
오셨다. 즉 하나님은
말씀으로 인류를 비롯한 자연계 만물을 창조하셨고,
예수님은 인류에게
말씀으로 하나님을 알려주는 인간심령창조를
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자연만물을 지으시고 예수님은 인간심령창조를
하시므로 창조의
대상은 다르지만 창조의 소재는 동일한 “말씀” 이
되기 때문에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라는
말이 성립된다.
그런데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라고 했다.
즉 창세 전에도
함께 했던 영화를 지금도 함께 해달라고 했다.
창조주 하나님도
말씀이요, 심령창조자 예수님도 동일한 말씀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예수님은
예나 지금이나 “함께” 라는 말은 반드시 성립되지만
함께 영화롭게
해달라는 “영화” 란 도대체 무엇인가?
창세 전에 하나님과
예수님이 함께 가졌던 영화는 무엇이며
이천년 전에 하나님과
예수님이 함께 가질 수 있는 영화란 무엇인가?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도 예수님도 다 같이 “동일한 말씀” 이기 때문에
예나 지금이나
“함께” 라는 말은 마땅히 성립된다.
하지만 함께 하는
“영화” 란 무엇인가
이다.
함께 창세 전에
누리는 영화는 무엇이며, 함께 심령창조를 하시는
예수님 때의 영화는
무엇인가?
인간 차원에서
생각할 때, 창세 전에 하나님이 무슨 호화찬란한
영광이라도 누렸단
말인가? 절대로 아니다. 창조된 게 아무 것도 없는
창세 전인데 무슨
영화가 있단 말인가.
아무 것도 없었다.
물론 예수님 때도 예수님께 아무 영화도 없었다.
오히려 지고지난한
십자가의 고통만 짊어지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런데 왜 창세
전에도 예수님 때도 영화롭게 하는 영화를 언급하셨던
것일까? 창세
전이란 창조주 하나님이 창조직전에서
우주전체와 세계전체에
대한 창조에 임하여 있는 때를 말한다.
그리고 예수님
때도 역시 그 전체창조 중에 인간심령창조에 임하여
있는 때가 된다.
이렇게 창조에
임하여 있을 때 그 심정은 어떤 것일까?
창조란 그 말
한마디 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고 떨리는 경이로움이
있는 것이다.
하물며 창조를 하는 주체가 되어 찬란한 창조의 위업을
직시할 때 얼마나
감격되겠는가?
그리고 창조의
그 감격자체가 영화로움의 영화인 것은 참으로 당연하다.
그렇지 않는가?
이에 대한 사실적
실례 하나를 성경을 통해 알아보기로 한다.
<요한복음 11장 4-44>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함이라
하시더라.....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이렇게
죽은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려내셨다.
그런데 현재 살아
있는 우리 모두는 나사로 처럼 죽어 있는 상태이다.
왜냐면 우리는
모두 생노병사에 갇혀 있는 사망의 몸이기 때문이다.
성경 신구약은
모두 비유이다. 그러므로 초림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려내셨다는 것도
그 당시 사실이긴 사실이지만 역시 비유인데
왜 초림 때는
비유인가 하면
오늘날의 재림
때는 생노병사에 갇혀 있는 사망의 우리를 영생의 몸으로
부활시켜 주신다는
의미에서 나사로의 사건은 비유인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죽고 있는 것은 창조주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진리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
죽고 있다.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을 알려주시는
말씀을 가지고
오셔서 심령창조를 하심에 따라 죽고 있는 사망의
우리를 영생의
몸으로 바꿔주시는 창조를 하시는 것인데,
그에 대한 심령창조의
완성과 영생의 몸은 오늘의 재림 때에 성취된다.
초림 때는 비유법으로
창조를 하시고 재림 때는 그 비유를 풀어서
사실법으로 창조하시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망의
몸을 영생의 몸으로 창조를 하신다는 것은
초림 때 죽은
나사로를 살려내시는 과정에서 수차례 언급되었던 것처럼
창조란 그야말로 하나님 영광의 위업이었던 것이다.
즉 죽은 나사로를
살려내신 것은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라고
여러 번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 같은 창조의
위업과 영광을 일컬어서 창조에 임해 계시는 예수께서는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라고 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함께 했던 영화란
창조의 위대한 영광과 창조의 엄중한 영광을 뜻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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