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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관 시인의 본 53 선지식 18차. 53 노무현 대통령을 그리워하며
제 1부
노무현 대통령을 그리워한다.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노무현대통령이 죽음을 택한지 6년이 되는 해가 된다.
우리가 처음에 만났을 때 민통련이라는 조직이 탄생했던
시대
1985년 서울에서 만났는데 그날에는 부산 대표는 아니었고
인권 변호사로서의 집행책임자였던 것으로 알고
우리는 자주 서울에서 민통련 지방대표자회의에서
전국대의원대회에서 전두환 군정 종식을 위해 부산에서
정치적인 변화를 강력하게 전개하여 동서화합을 위한 결사
이것이 아니면 군정 종식을 실현할 수 없다는 신념으로
이 땅에 민주주의를 실천하려고 했던 비극의 종결
1987년 1월 14일 박종철 열사가 세상을 떠나던 비극의 시대에
전국의 대학생들이 박종철 열사의 죽음에 대한
진상을 밝히고 군정종식을 위해 저항했던 날
이한열 연세대학생이 최류탄에 맞아 죽음의 순간을
박종철의 억울함을 밝히고자 전국에서 일어났던
진상을 규명하자고 했던 날 민주인사들이 감옥에 갔고
전국에 수천 명이 감옥에 있을 때 부산지역에 인사들을
변호하는 우리의 자주 민주통일 인권변호사로 활동했다.
전국의 국민들이 박종철 열사의 죽음에 저항했던 날에
이한열의 최류탄에 맞아 쏟아졌을 때 전국에서 일어나
전두환 군부독재를 타도하고 민주정부를 세우자 이렇게
외치었던 시절에 전두환의 후계자였던 노태우는
1987년 국민 앞에 항복하는 6.29 선언을 발표하였다.
그리하여 우리는 감옥에서 석방되었고
서대문 감옥 앞에는 김영삼 김대중 정치인
민주인사들이 수천명이 환영행사를 하고
이 땅에서 최고의 행복 기쁨을 얻었던
환희의 순간을 우리는 잊을 수 없다.
이한렬열사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던 시청 앞
백만의 인파가 모여 민주주의를 외치였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이 국토위에 평화
우리가 원하는 것은 아메리카 양키의 철수였다.
아메리카가 있는 한 한반도에 평화는 오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정각이라고 말할 수 있는 행복
그것이 바로 자아를 발견하는 깨달음이다.
이 국토위에 찬란히 피어나는 민주주의 꽃
그 꽃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기다림
전국의 노동자 농민들이 원하는 세상을 창조하는 날
그날을 기다리면서 자주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런데 거제도 대우 조선소에서 이석규가 분신
분신하여 죽음에 대한 분노를 종식하는 일
우리는 대우 조선소에서 장례 위원으로 만났다.
장례를 거행하던 날 노태우 대통령 후보는 정신이 없었는지
장례를 방해하여 노무현 이상수 변호사를 구속하였고
우리는 수배자가 되어 전국을 숨어지내면서
부처님이 원하는 세상을 구현하려고 기도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개운사에서 체포되어 거제도
대우조선소에서 양생동 노조위원장의 대질을 하고
마산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았고 성주사에 유배되어
7일간 머물다가 석방이 되어 서울로 상경해
고대에서 김영삼 김대중 단일화 토론에 참석하지 못하고
김대중 대통령 후보 선거사무실에 들렸다
우리가 원하는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마음으로
영광스런 조국통일을 염원하는 마음으로
그런데 뜻하지 않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미안마 상공에서 수백명이 죽었다.
그 사건이 아직도 해결이 나지 않고 있는데
그 사건에 대한 진상을 바르게 규명해야 한다.
우연인지 몰라도 대통령 선거 시기에 일어난 사건
그 결과 노태우대통령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이 되었지
그날에 우리는 모여 너무도 억울하다고 했던 기억
지금도 서울 한복판에서 들려오고 있는 소리가 들린다.
노무현 변호사는 김대중 대통령 후보가 정치를 떠났을 때
다시 변호사로 돌아가 무료 변호를 시작했다.
노태우 대통령에 대항하기 위해 우리는 모여
광주에서 새로운 저항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한반도에 평화를 막고 있는 것은 바로 미국이라는 것을
1989년 조선대학생인 이철규가 주장했는데 그러한 주장을 한
이철규가 광주 저수지에서 죽음으로 떠 온라
우리는 광주에 모여 진상규명을 외치기 시작했다.
광주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조국의 자주 민주 통일
그것을 성취할 수 없다는 사실을 세상에 폭로했다
광주를 학살한 정권이 전투환이지만 그 배후 세력이
바로 미국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미국은 바로
광주를 학살하였다고 하는 시실을 폭로했던 저항
전국의 대학생들이 다시 노태우 정권에 대항하여
조선대학생인 이철규가 의문에 죽음에 대한 진상을
이처럼 강력한 저항은 다시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날에 나의 육신도 광주민중들과 함께 있었다는 것
그것이 나에게는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라고 말한다.
광주에 살면서 내가 살아왔던 나의 조상 집터를 찾아갔고
그 집터에는 화순 이서면 박씨 가문에 조상이라는 것을
그래서 광주의 아들이 되고자 노력했던 기억을 생각하면
광주대학에 편입하여 신문방송학과를 수학할 때 성래훈 학장과
우리는 학생이 아닌 민주화의 도반으로 다정하게 지냈다.
언제나 학교에서 친근하게 만나 민주화를 이아기 했던 그날
광주대학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조선대학교 교육대학원 입학하여
전교조 선생님처럼 교육민주화에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었는데
이돈명 조선대 총장이 나에게 말하였다. 교육자가 되는 것보다
정각을 이루어 부처님이 되는 것이 천배 만배 좋을 시
교사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면 곧 분단을 찬양해야는데
그러한 찬양을 하려고 그러는 것이냐고 말하여
나는 아주 작은 꿈이 사라지고 말았다
조선대 교육대학원을 이수하였는데 논문은
만해 시 . 『님의 침묵의 사상적 배경고찰』이라고 하여
논문 심사에 통과되어 석사가 되었다. 석사가 되어 중생을
구원하려는 마음으로 나서야 한다고 보았는데 석사가 되어도
중생을 구하는 일이 아직도 미미하다는 것을 알았다.
대 스승이 되어 중생을 구원하는 수행자가 되어야 한다고
그 말에 나는 무등산에 빈집이 있는데 그집에 살거냐고
광주에 문빈정사 신도가 빈집을 소개해 그 빈집을 빌려
무등산에 미륵정사라는 무허가 사찰을 위장으로 창건하고
미륵정사에 주지라는 허명의 주지를 하려고 했던 일
지금생각하면 어리석을 일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이 당선이 되어 역사는 문민정부라고
그렇게 불러졌는데 199년 3월 13일 김영삼 대통령은 서의현 조계종
총무원장이 3선에 도전하는데 그것을 인정해주었고
서의현 조계종을 비판하는 조계종 청년 승려들은
3선을 막기 위해 저항하였는데 김영삼 대통령은
경찰 수천 명을 조계사 대웅전을 봉쇄하고 난 뒤에
조선불교시대 승과를 패지 하였던 중중과 같은 시대
그러한 시대를 다시는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맹서하고
김영삼 대통령에 우리는 저항하여 조선불교의 저항시대를
그런 운동이 일어나고 있던 시기에 조계종 서의현 총무원장
3선을 막으니 김영삼 대통령도 이회창 총리에게 사과를 요구
하지만 조계종 젊은 승려들은 사과를 허용하지 않고
불교의 자주화를 위해 나섰는데 불교법난 대책위원장
진관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고 하여 저항했다.
조계종 서의현 총무원장 3선을 막고 본래의 수행처
그곳으로 돌아가자고 결의하였는데 그것을 어기고
주지로 임명받아 돌아가고 말았다.
지금도 그러한 주지에 임명 받아 본적 없지만
그것은 참으로 무능한 짓이라는 것을 알았다.
돈이 생기는 사찰에 주지로 갔으면 자가용도 타고
호화스런 수행자로 변했을 것인데 이처럼 초라한
그 모습이 참으로 서글프다하여 결심했다.
1994년 일본을 방문하였는데 그곳은 바로 히로시마
1945년 8월 3일과 9일에 미군에 의해서 원자폭탄이 투하
그래서 일본이 항복하였다고 하는 엄청난 피의 도시
그곳에서 나는 평화를 알았고 그곳에서 나는 전쟁 빈대
그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을 자랑으로 알고 있다.
히로시마에서 조선인들의 위령탑을 참배했을 때
조선인들의 위령탑이 강쪽에 있었던 것을 목격하고
일본인들과 같은 희생자들을 위하여 비석을 옮기는 생각
그러한 생각을 가졌던 역사를 생각하게 되었던 것은
1990년 11월 20일 불교인권위원회를 창립한 이후
위안부 할머니를 위한 집짓기 운동을 전개하였던 시기에 통도사 월하 방장께서
1억5천의 거금을 불교인권원회 위안부 할머니 집짓기 운동본부에 기탁
그것으로 인하여 위안부 문제를 알게 되었던 것을
히로시마에 와서 보고 느낀 결과 일본불교를 알게 되었다.
당시 입정교성회에서 숙박하고 입정교성회에서 회의하고
일본불교를 성찰하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의 존재를 고찰할 수 있는 시대
일본에서 시마누키 준지라는 스님을 이수갑 선생이
불교법난대책 본부에 찾아와서 면담을 요청했다.
그러한 만남을 통해서 진관을 일본 스님과 교류를 하였는데
1995년은 일본이 조선에서 패망한 50년이 되는 해였다.
일본과조선의 평화를 위하여 평화행진을 계획하고
광주 무등산에서 판문점까지 평화순례행진을 발표해
준비작업에 들어가 실천했는데 일본에서 20여명이 왔다
무등산을 내려와 광주도청 앞을 지나 망월동으로 행진
광주도청앞을 지날때 50년전에 일본깃발이 멈춘뒤
50년만에 광주도청앞을 행진하였는데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아무도 모르고 있었지만 진관은 알았다.
일본과의 화해 평화를 위해 나서자는 구호
27일간 한일 불교평화연대는 진행되어 판문점까지
철원에 있는 휴전선까지 평화순례를 거행했다.
1996년 나의 변신의 몸은 민족을 위하고 중생을 구하는 것
오직 민족을 구하여야 한다고 결심하여 동국대교 행정대학원
북한학과에 입학하여 북한학을 전공하는 학도가 되었다.
그리고 북한학과를 수학하고 있기에 북한에서 발간하는
노동신문을 볼 수 있고 금지된 금서도 읽을 수 있는
자격이 생겼다. 자격을 얻는다는 것은 행복이다.
북한에 대한 논문을 써야 하고 논문을 읽어야 하는데
북한학과에서는 참으로 자유롭다. 행복했다.
1996년 10월이 되어 국가안전기회부에서 연행되어
20일간 조사를 받고 검찰에 구속되어 죄인이 되었다.
나의 죄는 엄청난 죄를 지었다고 말하였지만
실로 나는 죄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김영삼 대통령과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기억
그것을 생각하면서 민족 분단의 병을 치유해야할
책무가 불교인들에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은
약자들을 위하는 불교가 되어야 한다는 사상
이것이 원효의 화쟁사상이라고 알게 되었다.
남북이 평화를 논하는 것은 원효의 평화였다
당시만 하더라도 원효의 화쟁 사상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있었다. 원효의 화쟁 사상
나에게는 불교계의 민중의 계보를 설정했다
부처님 당시에 가섭으로부터 출발하여 사리불
목견련 중국으로 건너와서 수백의 승려들이
도교에 추종하는 국왕에 의해서 참수당한 승려들
부견의 스승 도안과 여산에 혜원 스님 고구려 순도
백제의 마라난타 신라의 이차돈 의상 신라 말에
원칙 고려에 대각국사 고려에 보조국사 혜심국사
조선에 험허득통선사 상충 스님 허응당 보우 환성지안
백용성 만해를 생각하면서 불교의 전승의 민중을 생각했다.
감옥에서 불교학을 탐구하고 미륵연방 공화국이라는 논문을
그리고 불교의 역사 발전에 대한 연구를 시행하였다.
나의 옥중생활은 참으로 행복했다. 감옥에서 온갖 서적을
다 읽을 수 있는 시간이며 편지쓰기 시 쓰기 이러한 운동
나에게는 출가한 이후에 가장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다.
김영삼대통령 정부에서는 나에게 민주화의 휴식처를 제공했고
나는 그동안 밀렸던 학문을 열심이 연마했고 창작 시도 수백편했고
즐거운 나의 창작의 시간이었는데 밤중에 간수가 나에게 긴급
석방조치를 내릴 것 같다고 말하여 밤 11시 30분에 일어났다.
그래서 보안과장이 있는 응접실로 갔는데 담당 검사가
나에 손을 잡고 하늘을 바라보는 듯이 하소연했다.
나에 공소장이 분신되었다는 것을 말하였는데
공소장이 분실되면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여 공소장 분실에 대한 예우를 몰랐다.
그래서 공소장이 분실 된지 5일이 되었기에 새로 공소장을
만들어야 한다고 하고 본인의 직인이 있고 확인해야 할
공간을 보여주면서 손도장을 찍으라고 하소연했다.
보안과에 직원도 잘좀 부탁한다고 급신거렸다.
지금시간이 11시 50분인데 12시가 되면 자신이
시말서를 쓰고 징계를 먹는다고 말해 검사의 얼굴을 보니
너무도 측은한 생각이 들어 지금 시간이 11시 55분이라고
그래서 나는 검사의 말을 믿고 11시 59분에 도장을 찍었다.
나는 잠자리에 들었는데 참으로 이상한 꿈을 꾸었다.
교도소에 있는 버스를 타고 교도소 정문으로 나가면서
다시 돌아오는 그러한 꿈을 매일 꾸는 것이었다.
꿈을 먹고사는 나는 매일 행복한 순간이 지나갔다.
교도소에 사형수가 있는데 그 사형수하고 친하게 지냈고
교도소에서 사형당한 수가 많아 그들에게 천도의 기회를
주기 위해 나는 날마다 사형장 앞을 지나면서 나무아미타불을
수천만번 부르고 또 부르고 그들의 혼이 새롭게 태어나길
나의 온 힘을 다해 불러 극락세계로 가기를 발원했다.
2023년 1월 2일
후기
53선 지식을 종결하고 자 한다, 시인이란 책임성 있는 문학을 선언해야 하지만 시대적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엘리엇의 황무지라는 시를 발표한 시를 고찰하면서 에즈라 파운드에게 라는 시를 보냈는데 그러한 시대를 고찰해 본다,
엘리엇이 창작한 시 1922년 에 출간한 시는 영국의 모더니즘 시인이라고 칭하고 있지만 현대 문학의 초석으로 여기고 있다고 하지만 이 시가 현대를 대표하는 시라는 것에 있어서는 동이 하지 않는다,
엘리엇은 미국에서 태어났다는 기록 그가 영국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미국은 영국이 만든 식민지 나라이기에 국적을 옮길 수 있는 것이지만 미국인이 영국인이는 칭호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황무지에서 대한 시의 평은 그가 시인이라고 칭한다면 영국이나 미국에 대한 양심적인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영국 미국이 자행한 인간이 죽임에 대한 역사관을 반성ㅈㄱ 입장에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시인은 자신의 반성 자국의 만행에 대한 비판적인 시를 창작했어야 한다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에 대한 시인데 인도에서는 죽음에 대한 시는 인더스강 강가에서 보여준 무상 그러함에도 인도에서는 인간을 영국처럼 무자비하게 죽임을 가하지는 않는다, 죽은 자를 보고 시를 창작했다고 하면 그의 시는 무의미한 시라고 말할 수 있다,
황무지에 대한 시 4월에 죽음에 대한 시라는 것 그것은 무엇이냐 한국에 시인들은 황무지 시를 찬양하지만 나는 찬양하지 않는다,
2023년 1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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