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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허(呑虛 1913년 2월 20일(음력 1월 15일) ~ 1983년 6월 15일) 스님은 법호는 탄허(呑虛), 속명(俗名)은 김금택(金金鐸)인데, 스님은 고전과 역경에 능통하였다. 불승으로는 유일하게 '유불도(儒佛道)' 삼교의 사상을 종합하고, 회통한 분으로 신라 최치원 이후 최고의 학승이라고 한다. 생전 그는 유학자로서 불교에 해박했고, 불승으로서 유가와 도가의 철학에 통달했다. 탄허는 한자만 100만자에 이를 정도로 방대하고, 유불선에 통달하지 않고선 해석이 불가능한 <화엄경> 80권을 붓다 이래 최초로 자국어로 혼자 번역해낸 인물이다. 10여년 간 매일 원고지를 100장씩 쓰는 초인적인 작업을 거쳐 원고지 6만2500장 분량으로 펴낸 <신화엄경합론>은 원효·의상 이래 최대 불사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
1. 복진즉사(福盡卽死) : 복(福)이 다해 병이 온다.
탄허 스님은 66세에 위암 판정과 3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권위 있는 두 군데 종합병원 전문의의 소견이었다. 하지만 탄허 스님은 “복진즉사(福盡卽死), 복이 다해서 병이 오고 죽는 것이지, 그저 병이 온다고 죽는 것은 아니다”라며 “내가 절에 와서 그래도 복을 좀 지었으니 지금 죽지는 않는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당신은 1983년 음력 4월 24일 입적한다고 예언을 하셨다.
서우담 교림 출판 대표(사위)는 자신의 은사의 입적을 앞두고 3개월 간 잠 한숨 자지 못하고 그 곁을 지켰다. 거짓말처럼 탄허 스님은 당신의 예언에 맞춰 돌아가셨다. 입적 전, 한 제자가 탄허 스님께 “여여하십니까?”라고 묻자 “멍청한 놈, 그럼 몽롱해?”라고 하셨다. 또 “법연이 다 한 것 같으니 한 말씀 남기십시오.”라고 하자 “일체무언이다”라고 답하셨다. 그 뒤 우담을 쳐다보아 팔을 내드리니 그 팔을 베고 바로 열반하셨다.
2. 주역(周易) 500독 하다.
탄허는 스승은 제자에게 "지식이 있는 자는 경을 배워 중생에게 이익을 주도록 해야 이 세상 업보도 갚는 것"이라며 경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미 가문의 중매로 16세에 결혼해 자식을 뒀던 탄허는 만 21세에 출가하였는데 승려가 되기 전 인물 탄허는 학문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다고 한다.
“책이 없어 주역(周易) 공부하지 못하다가 처가에서 소를 팔아 주역을 사주자, 집에 돌아오지 않아 글방을 방문해 보니 흡사 미친 듯 책을 읽고 있어 아내가 문틈으로 엿보는데, 탄허는 미쳐 있었다. 한손엔 주역을 들고 한손으로 연신 무릎을 치면서 춤을 춤을 추며 큰소리로 책을 읽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처자불고(妻子不顧: 처자를 돌보지 않음) 가사불고(家事不顧: 가사를 돌보지 않음)를 하지 않겠느냐고 포기했다고 한다. 탄허 선사께서는 당시 주역을 손에 들고 500독(讀) 하셨다고 한다.”(32∼33쪽, 만 17세의 일화 중에서)
3. 장자(莊子) 강의
탄허 스님은 23세 젊은 나이에 장자를 강의 했다. 1기 청강생으로 함석헌 선생도 있었다. 탄허 스님과 천재학자 양주동(1903∼77) 박사와의 일화는 더 흥미롭다. “탄허 스님은 나이가 10살이나 많은 양주동 박사를 처음 만났을 때 큰절을 했다. 그러나 7일간 장자 핵심 강의를 듣고 난 순간 오히려 양 박사가 탄허 스님을 향해 절을 올렸다고 한다.” 이때 양 박사는 “장자가 다시 살아 돌아와도 탄허 스님만큼은 할 수 없을 것”이라고 극찬했다.
4. 탄허 스님과 속가 딸
가문의 중매로 16세에 결혼해 자식을 뒀던 탄허 스님은 만 21세에 출가하였는데 승려가 되기 전 탄허 스님은 한문에 문리가 트이고 학문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다고 한다. 스님은 장자를 읽다가 도(道)란 무엇인가에 막혀 전국 선지식과 편지를 주고 받다가 월정사 한암 스님을 찾아가서 출가를 한다. 스님 슬하에는 아들과 딸이 있었다.
38년 동안 아버지를「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스님」이라고 불러온 딸이 있다. 면암 최익현계열의 기호학파 막내동이로 한학에 달통했던 탄허 스님은 부인과 아들, 딸을 남겨두고 오대산 월정사 방한암 스님을 찾아 나섰던 것은 28세 때였다. 딸은 15세 되던 해 어머니가 손에 쥐어준 여비와 주소를 가지고 아버지를 찾아갔다가 그대로 입산 비구니가 됐다.
얼마 후 고향집을 찾아 마당에 들어선 비구니 딸을 본 어머니는『어디서 오신 스님이냐』면서 혹 탄허 스님을 아느냐고 물었다. 출가 이전의 스님의 딸은 수도정진 중 스님의 수좌와 인연을 맺어 결혼했다. 정진 중 만난 수좌는 도서 출판 교림 서우담 대표이다. 화엄학연구소장인 서우담(79) 대표는 가히 탄허의 '분신'이라 할 만한 인물이다.
5. 일본 동경대 화엄경 특강
유교, 도교, 불교에 통달한 탄허 스님이 1970년대 초 일본의 대학자 100여명 앞에서 강연을 한 일이 있다. 일본에서는 각계 전문가가 90명이 힘을 합쳐 화엄경을 번역하려다 실패를 했는데 한국에 혼자 화엄경을 번역한 스님이 있다는 걸 불교 학자 김지건 선생을 통해 듣고 동경대로 초청을 한 것이다. 이 강연에는 일본 내로라하는 불교학자 100여명이 모였다.
처음에는 탄허 스님과 문답식으로 강의를 진행하다 너무 명쾌하니까 일정을 바꿔 1주일 특강으로 진행을 했다. 1주일간 특강을 하고 나니 자존심 강한 일본 학자들 100여 명이 존경심이 일어 바닥에 엎드려 탄허 스님에게 절을 했다."고 한다. 이에 탄허 스님은 "창칼은 사람 1∼2명을 죽이는 데 필요하지만 학문은 전 인류를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는 것"이라고 한다. 이 절하는 장면을 보고 숭산 스님은 ‘자존심 강한 일본 학자들이 탄허 스님께 전하는 걸 보니 정말 통쾌하다.’ 말을 했고, 김지건 선생은 이 장면을 사진으로 남기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하고 있다.
6. 박정희 대통령와 여교수 혼담
1979년 늦은 봄 고려대에서 봉직하고 있던 한 여교수가 서울 안암동 대원암으로 스님을 찾아왔다. ‘지인의 소개로 박정희 대통령과 혼담이 오가고 있다며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러자 탄허 스님은 “결혼 좋지, 그러나 서산에 지는 해는 부상(扶桑·해가 뜨는 곳)에 잡아맬 수 있을 때 좋은 것이지!”라고 답했다 한다. 박 전 대통령의 운명을 암시하는 듯한 이 예언 때문인지 결혼은 성사되지 못했다고 한다. <조현 기자>
7. 박정희 대통령 암살 암시
탄허 스님은 장화수 박사가 객원교수로 일본국 명치대학으로, 그 뒤 미국 버클리 대학으로 떠나기 직전 인사차 찾아뵈었더니, 단둘이 있는 좌석에서 손을 살짝 붙잡고 “박정희 암살예언”을 말씀해 주셨습니다.“(1978년 2월).
“이보게 며칠 전 늙은 남자무당 하나가 찾아와서 큰절을 4배 하고는 다음과 같은 귀신들린 방언(放言)을 하지 않았겠나. 보기에 큰 귀신이 들린 신통한 남자 무당(90%는 여자 무당임)이기에 이런 때는 할(갈=喝, 스님들이 귀신 잡는 방법)을 일갈했지. ‘너 66·77에 해방되고, 33·44에 통일 되는 것 알아!’ 그랬더니 이 사람이 제정신이 아닌 듯 미쳐버리더니 ‘큰스님 어떻게 그걸 아십니까? 맞습니다. 김(金)가예요. 보(報)입니다. 태극기 속에서 권총을 꺼내 쏩니다. 박 대통령이 죽습니다.’라고 모골이 송연한 말을 내뱄지 않았겠나. 그런데 그해 10월26일 똑같은 시해사건이 서울 궁정동에서 일어났네. 이런 일을 체험해 보면 이 세상은 상식으로나 학술로만 통하지는 않는 일도 있구나 라고 여러 가지 의문을 지울 수가 없다네.”
8. 6.25 전쟁 예언
1949년 탄허 스님은 개미떼가 법당 뜰에 죽어있는 모습을 보았다. 자기들끼리 싸우다가 죽은 것인데 이 모습이 너무 불길해 보여서, 역학 원리를 통해 분석해 보니, 다음 해에 민족 다툼이 벌어질 것이 예견되었다. 이에 스님은 제자들과 함께 경남 양산의 통도사로 피신했고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했다.
하늘은 하늘의 상(象)을 보이고, 땅은 땅의 상을 보이고, 꼭 사람의 상만 보는 것이 관상이 아니다. 짐승들도 지진을 예지하는데, 하물며 그런 큰 난리는 다 미리 조짐을 보이는 것이다. 그동안 공부를 통하여 얻은 역학 원리(易學原理)로 분석해 보니 곧 난이 일어날 게 틀림없었다. 그러니 일단 어려운 상황을 피하자는 생각이었다. “스님, 오대산을 떠나 남행南行을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한암 스님께 말씀드렸다. 그러나 한암 스님은 30년 이상을 살아온 오대산을 떠날 수 없다며 완강하게 거절하셨다. 당시 내 나이 서른네 살, 인생에서 가장 혈기왕성한 시기여서 어떻게든 남행을 관철시키려고 애썼다. 더욱이 당시 스물셋, 스물넷이었던 젊은 상좌들의 장래를 위해서라도 앞으로 닥칠 난을 피해 오대산을 떠나려는 결심을 굳혔다. 내 결심이 굳건하다는 사실을 안 한암 스님은 어쩔 수 없이 남행을 허락하고, 양산 통도사 백련암으로 가서 먼저 자리를 잡고 기다리라고 하셨다. 한암 스님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오대산의 중대암에 기거하다가 3일 만에 짐을 챙겨 몇몇 상좌와 함께 남쪽으로 길을 떠났다. 기축년(己丑年) 봄, 통도사 백련암에 도착했다. 그런데 당시 통도사 주지는 우리에게 암자를 내줄 수 없다고 했다. 한암 스님께서 곧 오실 것이라는 말로 겨우 암자를 얻어 머물 수 있었다. 그러나 한암 스님은 끝내 백련암에 오시지 않았다. 30년 이상을 오대산에 머무르셨으니 움직이지 않겠다고 하신 그분의 결의 또한 대단한 것이었다. 여든 살의 고령이었던 한암 스님은 오대산에서 6·25 동란을 고스란히 겪으셨다. 그때 상원사를 불태우려고 군인들이 들이닥쳤는데, 한암 스님은 가사 장삼을 갖춰 입으시고 법당에 의연히 앉아 그대로 태우라고 단호히 말씀하셨다. 노승의 의연함에 놀란 군인들이 차마 불태우지 못하고 법당 문만 태우고 떠난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한암 스님은 1·4 후퇴 무렵에야 오대산을 떠나 천리가 넘는 남행길을 선택했고, 그 과정에서 겪은 고생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
9. 베트남 전쟁 미국 패배 예언
탄허는 베트남전쟁에서 미국의 패배도 정확히 예언했다. 당시는 미국을 도와 국군이 파병돼 남한엔 ‘미국의 승리와 월맹 타도’ 분위기가 고조되던 때였다. 미국에서 활동하던 숭산 스님이 “미국이 가지고 있는 핵무기 하나면 월남은 꼼짝 못할 것”이라고 하자, 탄허는 “역학의 원리를 볼 때 월남은 남쪽으로 화(火)인데 미국은 태방으로 금(金)이어서 금이 불에 들어가면 녹을 수밖에 없다”며 “미국이 물러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탄허 스님은 북베트남이 초강대국 미국을 이길 것이라고 장담하셨다. 놀라워하는 청강생들에게 그 특유의 입담으로 “미국은 서방 쇠며(少女→兌方, 金), 베트남은 남방의 불(中女.→離方=火)이다. 불이 쇠를 녹이니(火克金) 호지명의 북베트남이 이긴다.”는 것이었다. 탄허 스님은 남베트남은 미국의 괴뢰로 보았으며, 정통성이 없는 정부로 규정하였다. 당시 우리나라는 자유진영 남베트남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군인들을 많이 파병할 때였다. 그 때 이러한 발언은 고승이라도 중앙정보부나 정보기관에 붙잡혀 가서 곤욕을 치르는 시절이었다.
언론사 외신부나 대학가에서나 외신과 영자잡지를 보고 아주 극소수만 베트남 전쟁의 참상을 알 때였다. 하지만 언론 통제로 민중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다. 파월용사들의 승전보와 위문공연만이 신문과 방송을 도배했을 때였다. 탄허 스님만이 독특하셨다.
10. 고려대학교 학생 수련회와 폭우 희생
탄허가 1960년대 후반 오대산 월정사에 주석하고 있을 때다. 당시 고려대학교 철학과 남녀 학생 열서너 명이 하계 수련대회를 월정사에서 하였다. 수련대회가 끝나는 날 학생들은 곧바로 오대산을 내려가려고 서둘렀다. 이를 바라보던 탄허가 오늘은 산을 내려가지 말라고 학생들을 말렸다. 그러나 학생들은 여름이라 땀으로 범벅이 되고, 샤워시설도 없는 절에서 더 머무르기가 불편하였기 때문에 그 말을 듣지 않고 산을 내려갔다. 학생들은 계곡을 내려가다 갑자기 호우를 만났다. 계곡물은 급류로 변해 있었다.
위험한 상황에서 서로 손을 부여잡고 계곡 물을 건너던 학생 중 하나가 미끄러지자 나머지 학생들도 따라서 미끄러졌다. 열서너 명의 학생들 모두 급류에 떠내려가 희생당하였던 것이다. 그 후 근처 동네 사람들은 사고 현장의 계곡 부근에는 접근하지 못하였다. 밤에 산을 올라가면 귀신들이 쑥덕거리는 소리와 깔깔거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하면, 남녀 귀신들이 바위에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이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동네 사람들이 밤에 출입을 못한 나머지 탄허 스님에게 어떻게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결국 탄허 스님이 원혼들을 달래는 비문을 써주면서 그 현상은 사라졌다고 한다. 그 비문은 지금 월정사 옆에 남아 있다.
11. 탄허 스님과 역학 괘((卦)
탄허 스님이 대전 자광사에 머무르던 1970년대 후반의 일화다. 자광사에는 당시 국회의원인 윤길중씨가 자주 출입하였다. 윤길중씨는 정치인이면서도 선비가 지녀야 할 필수 교양과목인 서예와 바둑에도 일가견이 있었고, 한시를 좋아해 탄허 스님과는 통하는 면이 많았다. 탄허 스님도 바둑 실력이 상당해서 아마 5~6단들과 두어 이기는 경우가 많을 정도 실력이라서, 아마 바둑의 고수인 윤길중과는 특별히 친했다고 한다. 하루는 윤길중이 자광사에 오겠다는 약속을 해놓고 그 시간에 도착하지 않았다. 장난기가 발동한 탄허 스님은 지금 윤길중이 어디쯤 오고 있는지 알아 맞추기 위해 엽전 3개를 던져 괘를 뽑아 보았다. 탄허 스님은 그 괘를 보고 윤길중이 현재 어디쯤 오고 있다고 예측하였다. 옆에 같이 있던 사람들이 과연 그 예측이 맞는가를 확인하기 위해 전화를 걸어 보니 그 시간에 탄허 스님이 말한 지점을 윤길중이 통과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제자들 사이에서 회자된다.
12. 버스 운전사와 자동차 사고
1965년 겨울, 강원도 횡성에서 버스를 타고 진부로 가던 중이었다. 운전기사 뒤에 타고 있던 스님이 갑자기 내리자고 해서 황급히 내렸다. 날도 추운데 왜 그러느냐고 불평을 했더니 “운전기사의 미간을 보니 곧 죽을 상이다.”라고 했다. 그런데 20분쯤 가다 보니 앞서 간 버스가 전복되어 있었다.
서우담(교림 출판 대표)이 “왜 운전기사에게 말해주지 않았느냐”고 따져 물었다. 하지만 탄허의 대답은 "이미 예정된 죽음은 피해갈 수 없는 일이다." 또 “몸 성히 운전 잘하고 있는 사람한테 ‘당신 곧 죽을 것이니 운전하지 말고 한겨울 고갯길에서 차에서 내리라’고 하면 미친놈이라고나 하지 내 말을 듣겠느냐”는 것이었다.
13. 탄허 스님과 49재
탄허불교문화재단 이사장 혜거 스님은 1960년대 초 여름 영은사에서 49재를 모실 때 한밤중에 큰 바람이 불어 문짝이 흔들리고 모든 호롱불이 일시에 꺼져 모든 대중이 우왕좌왕할 때 탄허 스님만은 <금강경>을 마지막 구절까지 독송하며 동요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고 전했다. 그는 “탄허 스님은 밥 짓고 일하느라 공부할 수 없는 공양주와 부목까지 함께 공부하도록 하기 위해서 아침 공양 지을 때, 점심 공양까지 한꺼번에 밥을 짓도록 해 3년간 찬밥으로 점심 공양을 때웠을 정도로 공부하려는 이들을 돕는 데 남달랐다”고 회고했다.
14. 울진·삼척 지방에 공비 120 침투 사건
어느 해인가 동해안을 통해서 울진·삼척 지방에 공비 120여 명이 침투한 일이 있었다. 당시 나는 월정사의 한 암자에서 《신화엄경합론新華嚴經合論》을 번역하고 있었는데, 어떤 직감에 의해 공비 침투가 있기 한 달 전에 장서(藏書)와 번역 원고들을 모두 삼척 영은사(靈隱寺)로 옮겨 두었다.
갑자기 짐을 몽땅 싸서 다른 곳으로 옮기자, 도대체 무슨 일인가 하고 사람들이 의아해하며 작은 소동이 일었다. 그때 나는 다음과 같은 말로 사람들을 안심시켰다.
“몸은 떠나지만 마음은 여기 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라.”
《신화엄경합론》 번역 원고들을 모두 옮기고 난 후 15일 만에 울진과 삼척 지역에 공비 침투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거의 모든 공비가 소탕되었지만, 일부 남은 공비들이 험준하기 이를 데 없는 오대산으로 도주했다. 그 바람에 월정사를 중심으로 오대산 일대에 소탕작전이 벌어졌다. 이때 공비들을 소탕하기 위해서 동원된 군대가 얼마였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하필이면 군단 사령부가 월정사에 소탕작전 본부를 설치했다.
그동안 나는 강릉에서 한달 가량 머물다가 공비 소탕작전이 끝난 다음 월정사 암자로 돌아왔다. 그런데 내가 살던 암자 주변에 사방으로 참호를 파 놓아 암자는 완전히 폐허 상태였다. 만약 그때 필생의 노력과 심혈을 기울여 온 《신화엄경합론》 번역 원고들을 다른 장소로 옮겨 놓지 않았더라면 이 번역은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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