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회 두계학술상을 받으며
1.
제가 두계학술상 수상자가 됐다는 통보를 받았을 때 이런 생각이 일어났습니다.
그 무렵은 대구 경산 지역이 엄격한 사회적 격리 상태에서 겨우 조금 벗어나는 시기였습니다. 대구 경산은 한 달 이상 우리나라 코로나들의 집중 공격을 받았습니다. 저는 들숨과 날숨을 힘겹게 들이키고 내쉬었습니다. 들숨은 생명을 지속하는 데 가장 중요한 행위이지만, 그 들숨이 저 자신에게 치명적인 것이 될 수도 있다는 기구한 사실이 명확하게 자각되었습니다. 한 번의 들숨이 내 생애 마지막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 불교에서 가르치는 ‘죽음에 대한 호흡 마음챙김’을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이 들숨이 내 생애 마지막을 초래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다음 내뱉는 날숨은 내 삶의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더 간절했습니다. 들숨이 남에게서 나와 내 안으로 들어와 나의 일부가 되고, 날숨이 나에게서 나가 남에게로 들어가서 남의 일부가 될 것이었습니다. 나는 남의 일부요 남도 나의 일부라는 연기의 존재 원리를 절감했습니다. 두계학술상은 이렇게 힘겹게 살아가며 수행하고 있는 대구 경산 학자에 대한 지역적 배려와 위로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으로 은사 백영 정병욱 선생님의 존안이 떠올랐습니다. 지금으로부터 38년 전 동숭동 문리대 함춘원에서 있었던 정병욱 선생님 환갑기념논총 봉정식 때였지요. 백영 선생님은 “내 인생은 이제부터 시작이다.”라는 말씀으로 인사말 마무리를 하셨습니다. 그로부터 몇 달 뒤 선생님은 이 세상을 하직하셨습니다. 이제 제가 그때 선생님 나이가 되니 그 말씀이 비로소 조금은 이해되는 듯했습니다. 선생님은 마무리 단계의 삶이야말로 본격적인 삶의 출발처럼 중요하다는 뜻을 밝혀주신 것이었습니다. 두계학술상이 정년을 앞둔 저에게 수여되는 것은 마무리를 잘하라는 백영선생님의 뜻에 부합하는 것이라 소중히 받들기로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진단학회가 야담을 서사문학의 호적에 당당히 올려주신 것 같아 감사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야담은 한동안 서사문학의 적자가 아닌 서자로서 미미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오늘 진단학회가 『한국 야담의 서사세계』를 두계학술상 수상 저서로 선정해주신 것은 서사문학의 서자 취급을 하던 야담을 서사문학의 호적에 당당히 올려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로써 야담을 공부하는 학자의 불안감과 소외감, 안타까움을 해소시켜주었습니다. 격려와 추인으로 이 상을 감사히 받들겠습니다.
2.
제가 국문학 공부를 시작할 무렵에는 한국 근대문학의 형성을 주체적으로 해명해야 한다는 시대적 과제가 주어져 있었습니다. 저도 그에 부응하겠다 결단을 내리며 야담을 선택했습니다. 조선 후기 사실주의 서사문학의 한 영역인 야담은 우리나라 사실주의 근대소설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그 점을 입증하려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 어수선하게 뒤엉켜 존재하는 야담 작품들에다 정연한 질서를 부여하는 갈래론을 정립하려 노력했습니다. 야담의 실정을 아는 사람이라면 야담 갈래론이 얼마나 절실한 과업인가를 알 것입니다.
그러나 야담 갈래론을 정립하여 근대소설의 형성과정을 설명한다는 과업에 짓눌린 탓에 야담 작품 자체의 풍요로운 지혜와 폭넓은 상상력을 억압하거나 은폐하는 지경에 이르렀는가 봅니다. 사명감만으로 야담을 연구하는 나날은 답답하고 암담하여 행복하지 않고 미안하기만 했습니다.
3.
그러다가 연구년을 얻어 미국 예일대학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고색 짙은 예일대학 도서관에서 『아라비안나이트』, 『마하바라타』, 『데카메론』 등을 읽었습니다. 이들은 아라비아와 인도에서 비롯하여 서구로 전파되어 서구의 다채로운 서사문학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이들을 읽으면서 저는 우리 야담이 그에 견줄 수 있는 당당한 서사 작품임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야담은 우리나라 서사 문학의 원천이며 귀결일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다양하게 활용될 수 있는 모티프의 바다와 같은 존재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야담만의 고유한 특색을 체계화하여 세계에 널리 알려야 한다는 패기가 일어났습니다. 서양과 중국의 서사문학에 비해 단연 두드러지는 야담만의 특색이야말로 야담의 진정한 가치가 될 것입니다. 야담은 모티프나 서술형식, 등장인물들의 발화 방식, 상호 관계에 이르기까지 고유의 특색과 가치를 지닌다는 사실을 머나먼 예일대학 도서관에서 확인하며 몸을 떨었습니다.
4.
제가 야담을 새로 읽게 된 또다른 계기가 있었습니다. 이번 두계학술상 시상식 장소를 관악 캠퍼스 중심부에서 이곳 후문 입구로 옮겨온 것도 코로나 탓이 아니라 그 사연의 간절한 이끌림 덕이라 믿습니다.
이곳 호암교수회관 앞길을 지나 산쪽으로 올라가면 아파트 몇 채가 나타납니다. 인헌아파트입니다. 40여 년 전 그곳은 200여 채의 판잣집으로 구성된 철거민촌이었습니다. 관악구 상도동 등에서 철거당한 사람들을 임시로 수용한 봉천7동 산동네입니다. 판잣집 벽에는 일련번호가 표시되어 있었습니다. 대학 시절부터 야담으로 석사논문을 쓸 때까지 저는 그곳에서 살았습니다.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그곳까지는 걸어서 반 시간 걸렸습니다. 가는 차가 없으니 걸어갑니다. 낙성대 지나 개울을 건너는 지점에는 키 작은 팻말이 섰습니다. 거기, “무거운 짐을 지고 수고하는 자들아 모두 나에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라는 『마태복음』 11장 구절이 새겨져 있었지요.
동네의 공동화장실 앞에는 아침마다 긴 줄이 만들어졌습니다. 우리는 멀리 밭 한가운데 우물로 가서 물을 지고 왔습니다. 제가 살던 방은 아궁이가 막혀 방안의 물이 밤새 얼어붙었습니다. 동네 대부분 남자는 실업자여서 술에 취해 밤늦게 돌아오곤 하였고 아니면 하루내내 드러누워 애국가가 나올 때까지 흑백 티비를 보았습니다. 그 동네는 이른바 도시빈민들이 사는 철거민촌이었습니다.
밤마다 의식인양 부부싸움이 났습니다. 폭력의 피해자는 언제나 아주머니들이었습니다. 남자들은 세상에 대한 피해망상을 가졌고, 그 망상을 잊기 위한 분풀이가 필요한 것 같았습니다. 남자로서 저는 동네 남자들의 폭력에 가담하는 가증스런 공모자가 되다가도 울부짖는 아주머니가 되어 밤새 끙끙댔습니다. 유년의 아비규환이 되살아났습니다. 철거민 동네는 아주머니들로 하여금 잔혹한 폭력에 노출되게 하는 절망의 공간이었지만 그녀들은 포기하지 않고 그 공간을 끝까지 짊어지고 이끌어갔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자기 코밑으로 옮겨 오자 자기 동네를 ‘대학촌’이라 불렀습니다. 동네 아주머니들은 자기 자제를 그 대학으로 보내는 대신 스스로 대학의 청소부나 식당조리사가 되었습니다. 저는 대학촌에 사는 유일한 대학생이었습니다.
조리사가 된 아주머니는 배식대 앞에 줄을 서있는 그 수많은 학생들 가운데서 용케도 저를 발견하고는, ‘우리 동네 학생’ ‘우리 동네 학생’ 부르며 다가와 밥과 반찬을 고봉으로 얹어주었습니다. 제가 아침밥을 먹지 못하고 온 것을 알고 있었지요. 아주머니들은 동네 구멍가게에서 만나면 이런저런 이야기로 삶의 고단함을 저에게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우리 동네 아주머니들에게 저는 희망이고 자부심의 원천이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그분들은 언제나 저를 보고 ‘우리 동네 학생 열심히 공부하여 꼭 성공하셔요.’ 이렇게 축원해주었습니다. 저도 그들이 잘되기를 기도했습니다.
세월이 많이 흐른 어느 날, 제 학문이, 야담 연구가 메말라 갔을 때, 제 기억 속 그분들이 소환되었습니다. 그분들은, ‘우리 동네 학생 보아요, 야담이 뭐 그리 대단한 것인가요? 야담은 우리들 이야기랍니다.’ 하고 속삭여 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랬습니다. 야담은 그렇게 절망하며 서럽고도 안타깝게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였습니다. 저는 우리 동네 아주머니의 기억을 소환함으로써 야담 연구의 새길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저의 암담함과 등장인물의 절망이 이어졌고, 서술자의 연민에서 야담의 궁극적 지향을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양반들의 과거담이나 여인에 대한 관음증 이야기에서조차 삶의 서러움과 절망 탓에 생의 바닥을 허우적대는 민중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들에 대한 연민의 흔적을 찾아낸 제가 대견스럽습니다. 그래서 대학촌 아주머니들에 대한 한없는 감사함과 애틋함을 느낍니다.
5.
도식적 이분법으로부터 야담과 저 자신을 해방시키자 야담의 다채롭고 역동적인 모습이 살아났습니다. 야담에서 이상향, 운명, 꿈, 절망과 아이러니, 대안적 욕망 등을 찾아내고 그것들을 근간으로 하여 새로운 담론을 창출한 것은 그런 내려놓기의 결실이라 믿습니다.
야담은 소설을 성립시키는 중간다리일 뿐 아니라 그 자체의 고유한 서사원리와 서사세계를 구축한 당당한 독립된 갈래였습니다. 이런 당당한 인식에 이르기까지 야담을 함께 공부해온 동지들의 치열한 노력이 있었습니다. 그 공조와 지지에 의해 오늘의 제가 있게 된 것을 감사드립니다.
6.
야담 연구자로 살아온 지난날을 되돌아봅니다. 저는 대학촌 우리 동네에서 저 앞 길을 거처 산길로 올라가 후문을 통과했습니다. 도서관 규장각과 백영 정병욱 선생님 연구실로, 세월이 지난 뒤에는 담촌 서대석 선생님 연구실로 가서 하염없이 책을 읽었습니다. 때로는 연구실에서 밤을 지새우기도 했습니다. 산길을 오르고 내려가노라면 이런 세상에 도대체 야담 같은 것을 읽고 이러쿵저러쿵 글을 쓴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고 민중들의 삶에 어떤 위로와 계기를 마련해드릴 수 있을까 회의와 자책이 일어나곤 했습니다. 박사가 되어 대학교수가 된 뒤에도 제 학문의 길은 대학촌에서 밤새 아비규환을 겪고 새벽을 맞이해서 동네를 나서서 후문을 지나 규장각과 선생님 연구실에 도착하여 책을 읽다가 점심 때가 되어 식당으로 가서 아주머니에게 발견되어 고봉의 점심을 얻어먹고 다시 연구실로 가서 책을 읽다가 우리 동네로 돌아가며 스스로 꾸중하고 미안해하고 조금은 자득하는 그 어름이었습니다. 40년 세월 동안 제가 이 언저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를 저도 확실하게는 잘 모르겠습니다. 가난한 유년과 청년의 삶이 거기 깃들어 있기 때문일 것 같기는 합니다. 그래도 제가 간절한 초발심을 간직했기 때문이기도 할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곳은 제 학문의 출발의 자리이며 초발심의 자리입니다. 초발심이 즉 정각(初發心時 便正覺)이라는 『화엄경』의 가르침을 되새깁니다.
야담에서 삶의 슬픔과 절망을 읽어내고 다시 반전을 통해 희망의 불씨를 찾아낸 여정에는 언제나 우리 동네 대학촌 아주머니들의 슬픈 얼굴빛과 다정한 목소리가 함께 했습니다. 오늘 이렇게 기쁜 날 저기 인헌아파트가 아닌 봉천7동 대학촌에서 한 무리 아주머니들이 왁자지껄 달려오실 것만 같습니다. 자세히 들어보면 이런 소리가 들립니다.
“와, 우리 동네 학생, 상 탔다! 우리 동네 학생 성공한 모습 가보아야지!”
동네 아주머니들이 너무나 좋아합니다. 잠시 뒤 그 분들 뒤로 인헌아파트의 모습이 우람하게 솟아오릅니다. 아파트의 그림자가 그 분들을 덮칠 듯 따라옵니다. 홀연 아주머니들의 그 모습 그 음성이 사라집니다. 그 옛날 아파트 건설을 이유로 대학촌이 철거당할 때, 우리 동네 아주머니들은 아파트 입주권만 잠시 손에 넣었을 뿐, 그 누구도 따뜻한 물이 나오는 저 드높은 아파트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 분명합니다. 뿌리 못내린 서러운 삶을 살다 가신 우리 동네 아주머니 아저씨들을 그리워합니다. 명복을 삼가 빕니다.
7.
저 세상에 계시는 백영 정병욱 선생님과 성산 장덕순 선생님 감사합니다. 여기 와주시어 과분한 축사를 해주신 서대석 선생님, 그리고 권두환 선생님, 민현구 선생님, 이종묵 선생님 거듭 감사드립니다. 책을 잘 만들어 상까지 받게 해주신 돌베개 한철희 사장님과 이경아 편집장님 고맙습니다. 『민족문학사연구』에 장문의 서평을 써주신 엄태웅 교수님께도 감사드립니다.
대학촌 아주머니만큼 저를 보살펴주시고 자랑스럽게 여겨주신 부모님과 형제자매께 감사드립니다. 이 자리를 빛내 주신 모든 분께 이 영광을 올립니다.
2020.6.12. 이강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