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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소망교회에서 신앙생활을 배우는 분들을 위한
신앙생활 가이드
새소망교회를 소개합니다…
새소망교회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를 배우고 익힙니다:
1.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2. 하나님의 경륜
이를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사명을 확신하며 실천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 공동체를 세우고자 합니다.
우리가 이 두 가지를 배우겠다고 정한 까닭은, 이 두 가지를 배우면서 여기까지 이르렀기 때문이기도 하고, 지나고 보니 이 두가지 가치를 배우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오늘을 살아가는데 매우 절실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1.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먼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은 사실 사도 바울이 사도행전 20장 24절에서 고백한 말입니다. 그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의 장로들과 고별인사를 합니다. 그 고별인사에는 앞으로 다가올 환난과 고난을 각오하면서 길을 떠나는 사도의 결의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사도행전 20:24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명을 복음 전파에 두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전해야 할 복음이 은혜의 복음임을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 때문에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만큼 그의 복음은 동족의 신앙과 달랐으며 혁신적이었습니다. 사실 그 자신도 동족들과 같이 유대교 신앙에 갇혀 있었지만 그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나서 자신의 협소한 생각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리고 자신과 같이 그릇된 전제 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을 일깨우는데 자신의 삶을 바쳤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은혜의 복음이란 사실 율법에 갇힌 신앙을 극복하자는 초청이며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제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소개하는 하나님은 유대교의 전통과 혈통 안에 갇혀 계시는 분이 아니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헬라인이나 야만인을 포함하는 만인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 말은 만인이 하나님 앞에서 한 가족이며 한 공동체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깨우침을 얻은 후에 하나님의 복음이 은혜의 복음임을 강조했습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율법과 전통에 매여 하나님의 큰 뜻을 저버리고 있다는 강한 확신 위에서 하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이런 주장을 성경을 통해 확실하게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경륜’이라고 불렀습니다(엡 1:9)
사도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경륜은 성경 전체를 통하여 흐르는 하나님의 의도와 계획입니다. 그것은 세상에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경륜이므로 그것을 사도 바울은 ‘은혜의 경륜’(엡3:2)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그렇게 일찍부터 부지런히 배우는 유대인들도 하나님의 경륜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도 바울은 그것을 ‘비밀의 경륜’(엡 3:9)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2. 신앙생활과 고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비슷한 경험을 합니다. 사도행전을 읽어 보면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과 유사한 고난을 사도 바울이 겪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체포와 심문, 그리고 재판과 거짓증인들, 죽음을 각오하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로 결심한 것 등은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증거하면서 동시에 예수님의 길을 걸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말하는 은혜의 복음이나 하나님의 경륜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며 세계 만민을 하나로 묶으시며 공존과 공생의 길로 안내하시는 분임을 증거하는 복음입니다. 그리고 그 복음은 교리나 전통에 매인 사람들로부터 위험하다는 판단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사도 바울도 자신의 죽음으로써 은혜의 복음이 진실하다는 것을 입증했습니다.
복음이 죽음을 통해서 비로소 그 진실성을 입증한다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어쩌면 구도의 과정이 그만큼 험난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며 자신을 미워하는 것이며 심지어 자신을 죽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죽음을 통과해야 비로소 열리는 문이 있습니다. 그것이 진리의 문입니다. 신앙은 진리의 문을 찾아 떠나는 구도의 과정입니다. 그 과정은 무지와 편견에 사로잡힌 자신을 발견하는 입문의 과정에서부터 그 진리가 옳고 선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확신하는 과정, 그리고 그 진리를 위해서라면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쳐도 좋다는 완성의 과정을 포함합니다. 이 모든 과정이 신앙의 길입니다.
3. 우리가 걸어온 구도의 길
우리가 여기까지 온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주님의 섭리가 있었습니다. 사실 평생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이름의 우산 아래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어떤 계기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새롭게 깨닫기 시작합니다.
저에게 있어서 그 일은 2014년 1월에 만난 책, ‘열 가지 키워드로 쓴 복음’(The Gospel in Ten Words, Paul Ellis)을 읽으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거기서부터 저는 하나님이 은혜의 하나님이심을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폴 엘리스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끝난 전쟁을 싸우고 있다고 안타까워합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주의에 갇혀 자신과 타인을 괴롭게 하는 신앙생활로 나타난다고 그는 확신했습니다. 그의 이런 생각을 더 알아보기 위해 저는 그의 책, 스무 개의 질문에 대답한 복음’(The Gospel in Twenty Questions)과 ‘초월적 은혜의 복음’(The Hyper Grace Gospel)을 읽고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목회자들 중에 스티브 맥베이(Steve McVey, 1954~ )와 앤드류 팔리(Andrew Farley, 1972~ )도 있습니다. 앤드류 팔리의 대표도서는 The Naked Gospel인데 이를 저는 우리말로 번역하면서 ‘순수한 복음’이라고 했습니다(2016). 다른 출판사는 이를 ‘벗기고 더 벗겨라’로 옮겼습니다. 우리 교회는 스티브 맥베이의 글, ‘은혜의 영성’을 함께 읽고 공부했습니다. 이것은 지난 2001년 영락교회에서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스티브 맥베이 목사가 강연한 녹취록입니다. 그 주요 내용은 그의 책, Grace Walk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이런 저자들의 글을 읽으면서 저의 생각은 조금씩 치료를 받았으며 은혜의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몸부림의 흔적들은 미출간된 번역물로서 우리 교회의 추천도서 목록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목회자의 종으로 살아갑니다. 그들은 무엇이 진리인지를 알아보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목회자의 말이 과연 그러한가 하는 질문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진리에 대한 판단을 다른 사람에게 맡겨버렸습니다.
4. 진리를 따르려는 용기
무엇이 진리인지를 스스로 확증할 수 없다면 사람은 결국 둘 중의 하나에 붙들려 있습니다. 그 하나는 타인의 권세 아래 스스로 굴복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자신의 아집에 갇혀서 도무지 새로운 생각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결국 타인의 굴레에 묶여 자신이 스스로 정한 우물에 갇힌 개구리처럼 살게 될 것입니다.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사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무지와 아집이라는 우물에 빠져 있습니다. 인간이 성숙한다는 것은 우물에 빠진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용기를 내서 그 우물을 벗어나 더 넓은 세상을 향해 길을 떠난다는 의미입니다. 일찍이 서양의 철학자 플라톤은 동굴의 비유에서 모든 사람이 사물의 본질이 아닌 현상을 보고 그릇된 판단을 하고 있다고 진단했습니다.
구도의 길은 본질을 알고자 노력하는 과정입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남이 정해준 대답이 아니라 스스로 대답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문제에 대하여 질문해 보고 그 근본 문제와 목적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런 과정에서 비로소 우리는 무엇이 옳은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에 대하여 좀더 명확한 대답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구도의 길은 혼자 사막에 앉아서 찾기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도의 길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앞서서 걸어가고 있으며 또한 길벗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벗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면서 그들의 생각을 듣고 동시에 자신의 생각을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그 과정도 구도의 길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독서와 대화는 자신의 견문을 넓히는 소중한 기회입니다.
5. 교리에 대한 질문
이런 과정을 지나오면서 제 마음 속에 솟아오르는 질문들이 있었습니다. 그 질문들은 대부분 교리로 굳어진 것에 대한 의문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아담의 죄가 모든 사람에게 전가된다는 원죄론이 그것입니다. 아담의 죄 때문에 모든 사람이 죄 가운데서 태어나며 죄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교리는 인간을 이미 어떤 틀로 규정하여 그 틀에 갇히게 만드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기독교회가 교리로서 바라보는 인간관은 매우 어둡고 부정적입니다. 기독교리가 말하는 인간은 죄인일뿐입니다. 수동적으로 구원을 기다리는 존재입니다. 인간의 전적인 타락 교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간절하게 필요로 하는 데는 유익이 있을지 몰라도 인간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성경 안에서도 보니 부모의 죄가 자녀에게 유전되지 않으며 오로지 범죄한 그 사람에게 죄값을 물을 것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겔 18:4, 20).
제가 보기에 기독교회는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기 위해서 부지런히 가르친 후에 구원을 받게 하고 나서는 다시 거룩한 성도로 만들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거룩하고 진실하게 살라고 말하면서도 실제로 그렇게 살 수 있으리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매우 큰 모순입니다. 우리에게는 인간에 대한 더 나은 설명이 필요합니다.
두 번째 질문은 하나님 나라 즉, 천국에 대한 것입니다. 천국은 어디에 있습니까? 천국은 하늘에 있는 세상입니까? 우리가 죽음의 강을 건널 때 비로소 들어가게 되는 곳이 천국입니까? 이 질문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는 우리에게 가까이 온 세상이며, 우리가 기도하면서 우리 가운데 임하기를 바라야 하는 세상이라는 깨우침으로부터 나왔습니다.
천국을 사후에 영혼이 들어가는 세상이라고 규정해 놓고 모든 교리를 거기에 맞추기 때문에 기독교회의 이야기는 세상을 이끌어갈 동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중세시대라면 모를까, 사람의 이성이 주도적으로 자신과 세상에 대해서 생각을 하는 시대에는 죽어서 천국에 간다는 식의 이야기는 더 이상 사람들을 바르게 일깨워 올바른 길로 안내할 지도가 될 수 없습니다. 그 이야기는 결국 이 세상과 인간에 대해서 극도로 수동적이 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성경 이야기가 좀더 다양한 상상을 들려준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이 들려주는 하나님 나라는 천상에서 사후에 시작된다는 이야기들은 사실 성경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이교도들의 신화나 중세 세속적인 전설이나 민담에서 나온 것임이 밝혀졌습니다. 그 이야기들은 사도 바울과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낯선 것입니다.
6. 사도들의 복음
사도들은 세상을 변화시킬 강력한 힘을 가진 이야기를 듣고 배우고 전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이야기입니다. 그것을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사도들은 아브라함의 언약으로부터 시작하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언약하신 대로 새로운 시대를 열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 위대한 새 시대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확신했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부활은 이 모든 언약이 성취된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보증하는 증표라고 제자들은 굳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고 나서 이제 ‘때가 찼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때가 찼다는 말은 하나님이 오래 전에 예언자들에게 약속하신 때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오랜 계획이 이제 성취될 때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복음은 단지 예수님을 믿으면 죄 용서를 받고 구원받는다는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복음은 구약성경 전체의 이야기에 깊이 뿌리를 내린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과 스토리에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최초의 복음을 들은 사람들은 모세오경을 암송하고 시편과 예언자들의 글을 매 안식일에 읽고 묵상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온 우주의 창조주이심을 하늘이 노래하고 땅이 화답한다는 신앙의 노래를 부르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몸에 새기고 살았으며, 그들의 조상들로부터 들어서 뼈에 각인된 하나님의 약속이 어느 때나 이루어질까 간절히 기다리며 살고 있었습니다.
비록 자신들의 현실은 여전히 포로생활 중이지만 그 옛날 애굽에서 자기 백성을 불러내신 하나님이 언젠가 다시 자기 백성을 건져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늘 노래하기를,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이키실 때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시편 126)와 같은 포로에서 해방된 기쁨을 노래하는 시편을 암송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날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므로 반드시 자기 백성을 돌아보실 것이라고 그들은 굳게 믿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나사렛 예수께서 나타나셔서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라고 외치셨을 때 그들은 지금이 바로 그때인가 하면서 큰 기대를 가지고 나사렛 예수께 모여들었습니다. 그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부모형제를 버리고 예수님의 제자가 될 정도로 전폭적인 지지와 기대를 가지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이제 그들 조상들이 대대로 기다리던 바로 그 메시아의 시대가 개막되었다고 그들은 확신했습니다.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메시아에 대한 그릇된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는 영적인 세상인데 유대인들은 세속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기대했다는 것입니다. 정치적인 메시아를 바랐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결국 예수님을 죽이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런 주장이 옳을까요? 하도 많은 목회자들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우리는 다시 물어보지도 않고 그 말이 맞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초대교회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바라는 하나님 나라를 배우고 꿈꾸었다면 그들은 당시의 세상에 아무런 영향도 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이야기는 전혀 매력적이지도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과도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아마 그들에게 이상한 이야기처럼 들릴 것입니다.
7. 구약성경 이야기의 뿌리에서
예수님의 복음은 단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아닙니다. 광야에서 선포된 그 메시지는 예언자들의 이야기와 맞닿아 있으며, 구약성경의 기나긴 이야기에 그 뿌리를 든든히 내리고 있을 때 비로소 힘을 받습니다. 이런 이유로 마태는 자신의 복음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라고 말문을 열었습니다. 그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는 아브라함의 언약과 다윗의 언약을 성취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복음을 이해하려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언약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은 필수불가결입니다.
요한복음에서도 예수님에 대하여 소개할 때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요 1:45)라고 말합니다. 사도들의 전도 현장에서도 예수님에 대하여 설명할 때 사도들은 언제나 모세의 율법과 예언자들의 글을 인용합니다. 예수님 자신도 자신을 제자들에게 설명하실 때 구약성경의 이야기를 인용하셨습니다(눅 24:44).
이 부분에 대한 설명에 대해서도 우리는 조금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과 예언자들의 글에 어떤 이야기가 있길래 그 이야기들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일까요? 이것은 예수님의 삶과 사역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성경구절은 이사야 53장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로 알려진 이사야의 예언대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셨다는 설명이 가장 일반적입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서 우리의 죄는 용서받고 우리는 구원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8. 구원이란 무엇인가?
하지만 여기서 즉시 솟아오르는 질문은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하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출애굽의 그림으로 설명됩니다. 그것은 포로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심판에서 건짐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의롭게 된다는 말이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원이라는 말이 가지는 그림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행동에서 나온 말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며 포로에서 돌이키게 하십니다. 그것은 이전 지위를 다시 회복하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하나님이 본래부터 주신 인간의 지위와 본분을 회복하고 살아간다는 말이 됩니다.
인간의 본래 지위와 본분이 무엇입니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고 피조세계를 관리하고 다스리는 왕 같은 임무를 받은 존재입니다. 특히 아브라함의 자손인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제사장의 나라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장차 천하만민에게 복을 주시기 위하여 택함을 받은 제사장들입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은 온 세계를 위한 하나님의 프로젝트에서 중요한 동반자요 동역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본래 이스라엘이 가진 지위와 본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은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그들은 세계 열방을 위한 하나님의 동역자나 제사장이라기보다는 도리어 세계 여러 나라의 조롱거리가 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왜냐하면 로마의 압제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성전은 강도의 소굴이 되었고 그들의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백성을 선도할 능력과 비전을 상실했습니다. 그들의 상황은 암흑 그 자체였습니다.
바로 그들에게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바로 지금이 은혜 받을 만한 때요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이라고 외쳤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다’고 외쳤으며, 요한계시록에서는 예수께서 ‘내가 속히 오리라!’고 일곱 번이나 말씀하셨습니다. 이 모든 말씀은 이제 하나님의 뜻이 성취될 때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경륜이 이루어질 때가 찼다는 의미입니다(엡 1:9).
이런 위대한 선언은 창조주 하나님이 만물을 붙드시고 주관하시면서 그 계획하신 바를 반드시 이루실 것을 확신한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고백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바로잡으시고 택하신 백성을 통해서 전부터 예비하신 선한 일을 이루실 것을 굳게 믿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 자신들이 부름받았으며 자신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선한 일을 시작하셨으니 이제 곧 이루실 것을 확신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더 열심히 주의 일에 나서고 사람들을 독려합니다.
9. 하나님의 경륜은 무엇인가?
그러면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의 글에 기록된 하나님의 계획은 무엇입니까? 마땅히 이루어져야 할 하나님의 경륜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에서 중심이 되었고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꿈꾸던 환상이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비전이었고, 사도 바울이 말한 바, 하나님의 비밀의 경륜이었습니다.
그 환상은 모든 성도가 마음에 그리고 사모할 판타지이자 간절한 기도의 내용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실현되는 세상입니다. 그런 세상에 대하여 예언자들은 말하기를, 황무지와 사막이 생명 가득한 평원이 되리라고 했고, 사나운 짐승들이 어린양과 함께 뒹구는 세상이라고 했습니다. 그 세상에서는 모든 사람이 예언자들처럼 하나님의 신에 감동되어 하나님의 뜻에 정통합니다. 심지어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하나님을 인정하는 지식이 온 땅에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세상은 이 세상 그 어느 곳 하나도 어둡거나 음울한 곳이 없이 광명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마치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그 자체로 하늘에서부터 땅으로 내려온 것과 같을 것입니다. 모세는 모든 사람이 다 예언자되기를 소원했습니다. 주님이 다스리는 바로 그런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런 세상을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사도들의 마음에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었을 것입니다.
10. 그리스도인의 희망과 삶
신실하신 하나님이 그런 세상을 곧 주실 것을 믿었으므로 그들은 주님이 속히 오실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들의 수고에 대하여 주님이 상을 주실 것을 확신했기에 적은 일에도 충성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강한 기대와 확신 때문에 그들은 짐승의 표를 거부하고 어린 양의 표를 받은 것을 자랑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에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요 약속이며 희망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었으며, 그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일으키셨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죽을 몸도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일으키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몸으로 다시 살아 주님이 열어 주시는 새로운 세상을 물려받을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리고 그 세상에서 처음부터 바라던 대로 왕 노릇하여 충만한 세상을 만들 것을 고대했을 것입니다.
이로 보건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오직 구약성경에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이스라엘 하나님의 이야기에 기초하며, 그 이야기를 통해서 의미를 가지게 되고, 오늘 우리에게도 실제적인 희망을 부여합니다. 이런 관점으로 복음을 설명하는 이가 영국의 신학자 톰 라이트(Tom Wright, 1948~ )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어떻게 생활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새소망교회의 담임목사로서 함께 신앙을 배우고 익히는 여러분을 위해 가이드가 될 글을 써야겠다고 시작한 글을 이제 마무리할 단계가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언급한 내용을 정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우리가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면 좋을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우리는 신앙생활이 구도의 길임을 기억합시다. 구도의 길이란 진리를 찾고 따르는 삶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찾을 때 비로소 우리는 타인의 굴레와 자신의 무지에서 벗어나 사람답게 살 수 있게 됩니다.
구도의 길은 진리를 배우는 것으로서 성경 말씀이 들려주는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전체를 고루 읽고 배움으로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을 평생의 과제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성경을 배우고 그것을 따라 살겠다는 다짐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주신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사람이 인생을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결심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단지 설교의 소비자로 살지 말고 설교를 재료로 자신의 생각을 키워가는 훈련을 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우선 설교를 잘 듣고 읽어서 무엇을 말하려는지 파악하고,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미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과 비교하여 새로운 의문이 생기거든 더 깊이 공부해 봅시다. 그리고 설교자와 다른 교우들과 더불어 자신이 느낀 점을 나누어 봅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함께 성장할 수 있습니다.
사람마다 기호와 관심사가 다르며 지식과 이해도도 다릅니다. 하지만 진리를 찾고자 하는 마음만 있다면 어디서 출발하든지 간에 선한 결말에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지도하시고 인도하시는 분은 진리의 성령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고 계시다는 점을 늘 기억하고 도움을 청하고 적극적으로 따릅시다.
우리 교회의 설교들은 거의 대부분 시리즈별로 정리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관심이 있는 주제들부터 하나씩 공부해 나갈 수 있습니다.
참고 자료
새소망교회 시리즈 설교 안내
https://cafe.daum.net/Wellspring/6zBK/310
새소망교회의 담임목사로서 교우 여러분과 함께 구도의 길을 걷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질문이나 나누고 싶은 은혜가 있으면 언제든지 저에게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과 함께 더 좋고 더 풍성하고 더 충만한 삶을 열어갈 것을 기대합니다.
2022년 8월 13일
새소망교회 담임목사
조해강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