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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영성/ 민수기 12장
(설교자: 마경훈목사, 비전교회)
모세가 재혼을 했습니다. 아내는 구스 여자인데 흑인이었습니다. 구스 족속은 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와 아라비아 반도 그리고 앗시리아 지역 등에 널리 퍼져 정착한 검은 피부색의 함족 계통입니다. 모세가 취한 구스 흑인 여인에 대한 몇 가지 설이 있습니다.
➀‘구스’를 ‘미디안’과 동일시하여 여기 나오는 ‘구스 여자’가 모세의 본처인 ‘십보라’였다고 보는 설입니다. 그러나 십보라는 모세가 소명을 받기 전 도피 생활 중에 결혼한 상대인데,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문제 되었을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구스 여인이 모세의 본처 십보라라는 설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➁모세가 자기 아내 십보라가 살아 있는데, 첩을 취하였다는 견해입니다. 그 당시에는 일부다처제가 허용되던 시기였으나 모세의 경건함을 볼 때, 이 설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동행했고 하나님은 그를 대면해서 보시는 친밀한 사이였는데, 모세가 본처가 있는데 첩을 두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➂모세가 그의 아내 십보라의 사망 후 재혼하였는데, 바로 그 새 아내가 ‘구스 여자’였다는 주장입니다. 유대 전승도 이 사실을 뒷받침해 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때 함께 애굽을 탈출해 나온 잡족 가운데 한 여인과 재혼했거나, 이디오피아 공주와 재혼했다는 설입니다. 저는 세 번째 설이 타당하다고 생각하는데, 이디오피아 공주는 아니고 출애굽 당시에 함께 나온 잡족 중에 한 여인이었을 것으로 봅니다.
모세가 흑인을 아내로 삼은 것 때문에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했습니다. 모세는 그들에게 대항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3절에서 갑자기 모세의 온유함에 대해서 언급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그들에게 당하는 모습을 보시고 모세를 대신해서 싸워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세 사람은 회막으로 나아오라” 그들이 회막으로 나아가니 여호와께서 강림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론과 미리암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환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였느니라. 그런데 내 종 모세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내 온 집에 충성된 자다. 모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하지 아니하였다. 모세는 여호와의 형상을 보는 자인데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느냐” 말씀을 마치신 여호와께서 그들을 떠나시며 미리암을 치셨시니, 미리암이 나병에 걸렸습니다. 그의 몸이 눈과 같이 되었고 살이 반이나 썩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미리암을 나병으로 심판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는 그 마음의 교만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에게는 은혜를 주시지만 교만한 사람은 대적하십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미리암이 하나님의 종을 비방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향한 비방을 모세를 세우신 하나님을 향한 비방으로 보신 것 같습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미리암이 모세를 육신적인 관계로만 대했기 때문입니다. 이때 미리암과 아론은 모세를 자신들의 동생으로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본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관점에서 바라봤습니다. 미리암은 모세의 누나고 아론은 모세의 형입니다. 육신적으로는 그들이 모세보다 손위가 맞습니다. 하지만 영적인 권위는 모세가 앞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육신적인 관계로 영적인 질서를 무너뜨렸던 것입니다.
미리암이 심각한 나병에 걸리니 아론은 두려웠습니다. 아론은 모세에게 도움을 구했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미리암이 부정하게 되었으니 7일 동안 진영 밖에 가두고 그 후에 들어오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미리암은 모세의 중보기도로 치료되었습니다.
오늘은 본문의 내용으로 ‘모세의 영성’을 살펴볼 텐데, 사실 모세의 영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성의 그림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추구해야 할 영성의 방향입니다.
1. 포용의 영성입니다
1절에 보니 모세가 구스 여자, 흑인을 취했습니다. 미리암과 아론은 모세가 이방 여인을 취한 것을 용납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구스여자를 받아드릴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그릇의 크기가 모세의 그릇의 크기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모세는 흑인을 포용했으나 그들은 흑인을 포용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에게는 인종차별이 없습니다. 행 17:26입니다.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하나님은 아담을 만드셨고, 모든 사람은 아담 안에서 태어나 아담 안에서의 한 가족이기에 인종차별은 없어야 합니다.
창 12:3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주신 약속입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를 축복하시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땅의 모든 족속이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 때문에 유대인들만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포용력은 믿음 안에서 무한정입니다. “누구든지 오라”입니다.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만났던 곳입니다. 성막은 가로 100규빗 세로 50규빗 크기입니다. 미터로 환산하면 대략 가로 50m, 세로 25m 정도입니다. 성막의 규모에 비해 성막의 문은 아주 넓습니다. 20규빗이었으니 거의 10m입니다. 성막의 문은 양의 문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줍니다. 그 문이 크고 열려있다는 것은 누구든지 오라는 메시지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구원은 남녀노소, 빈부귀천의 차별이 없습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을 포용하십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자신들의 하나님으로만 국한 시키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민의 구세주로 보내셨습니다. 롬 3:29입니다.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하나님은 유대인의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유대인만의 하나님은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십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먼저 모든 인종을 포용하라는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인종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지고 모든 민족에게 나아가야 합니다. 또 하나는 우리의 그릇을 넓혀야 합니다. 내가 어떤 사람까지 포용할 수 있느냐가 나의 그릇의 크기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인간적으로 용납하기 힘든 사람들이 많습니다. 속이 뻔히 보이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우리 속이 뒤틀리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람을 밀어내서는 안 됩니다. 넓은 가슴으로 어떤 사람도 받아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탕자를 거부했던 형의 심보를 뛰어넘기를 원하십니다. 탕자를 받아드린 아버지의 넓은 마음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2. 온유한 영성입니다
3절입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모세는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모세의 온유함은 타고난 것은 아닙니다. 모세는 다혈질적인 사람이라 젊을 때는 사람을 쳐 죽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그가 광야에서 훈련받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함으로 온유한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온유하십니다. 주님이 온유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구원 받지 못했습니다. 주님이 공생애 기간 동안 사람들에게 당하신 수치와 모욕은 말로다 할 수 없습니다. 특히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과정을 보면 치욕적입니다. 사람들은 주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손바닥으로 때리며 선지자 노릇하라고 조롱했습니다.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가시관을 엮어 머리에 씌웠습니다. 그리고 갈대를 주님의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였습니다. 그들은 주님에게서 갈대를 빼앗아 주님의 머리를 쳤습니다. 주님은 온갖 모욕을 참으셨습니다. 힘이 없어서 당하신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고, 우리를 구원하는 길이었기 때문에 받아드리신 것입니다. 만약 주님이 온유하지 못하셨다면 그 자리에서 자신을 희롱하는 자들을 다 죽이셨을 것입니다. 주님이 온유하셨기 때문에 십자가를 받으셨고, 그래서 우리가 구원 받은 것입니다.
우리도 온유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온유함도 모세처럼 선척적인 것이 아닙니다. 후천적입니다. 우리가 온유해지려면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온유함은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충만하면 온유합니다.
온유함의 특징을 말씀드립니다. ➀온유함은 부드러움입니다. 다른 말로하면 하나님께 길들여짐입니다. 하나님이 좌하시면 온유한 사람은 좌합니다. 하나님이 우하시면 온유한 사람은 우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부드럽게 움직여지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소나 말을 타고 버티는 경기를 ‘로데오(rodeo)’라고 합니다. 들판에서 자유롭게 살던 말은 사람이 자기 등에 올라타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넘치는 힘으로 아무도 올라타지 못할 정도로 강하게 날뜁니다. 그러나 그런 말도 조련사가 길들이면 사람의 말을 잘 듣습니다. 말이 힘을 잃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말의 힘은 그대로입니다. 다만 주인이 말의 힘과 방향을 조정할 수 있게 된 것뿐입니다. 이런 말이 온유한 말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다섯 번이나 거절했습니다. 야생마 같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하나님이 두려워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했고 하나님께 아주 부드러운 온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하라시면 하고 하나님이 멈추라시면 멈추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온유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라시면 하고 하나님이 멈추라시면 멈추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지난 주일에 공동의회에서 정관을 만들었습니다. 정관은 자칫 잘못 사용하면 하나님의 인도를 가로막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부분에 삽입한 내용이 있습니다. “특별한 성령의 인도가 있을 때는 당회에서 내용을 나누고 성령의 인도를 우선적으로 따른다.”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과 사회생활에서 항상 하나님의 인도에 열려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경이나 성령의 음성으로 말씀하시고 인도하시면 부드럽게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가야 합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온유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➁온유함은 따뜻함입니다. 모세는 자기를 대적하던 백성들을 위하여 중보하던 따뜻한 사람이었습니다. 본문에서도 자기를 대적하던 미라암이 나병에 걸리자 미리암을 위하여 중보기도 하던 따뜻한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따뜻하다 못해 뜨겁습니다. 주님의 뜨거운 사랑이 있었기에 우리가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께 대한 부드러운 순종과 동시에 우리를 향한 뜨거운 사랑이었기에 온유함의 표현입니다.
우리도 따뜻한 사랑으로 사람을 대해야 합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따듯한 사랑이지 얼음 같이 차가운 율법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변화시키시는데 차가운 율법으로 하지 않으시고 따뜻한 복음으로 하셨습니다.
거북이는 약해 보이는 동물입니다. 거북이가 큰 소리로 으르렁 거리는 소리를 들어보았거나 무엇인가를 파괴하는 모습을 보신 분은 없을 것입니다. 거북이는 온순합니다. 그러나 거북이는 어마어마한 힘을 갖고 있습니다. 15kg정도 나가는 거북이는 움츠린 목을 몸무게가 100kg 쯤 되는 사람이 뺄 수 없게 버티는 힘이 있습니다. 그렇게 힘이 좋은 거북이의 목을 빼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따뜻한 불 가까이에 놓아두면 됩니다.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기 위해 태양과 바람이 내기했을 때, 거센 바람은 실패했지만 태양이 따뜻하게 빛을 비추자 나그네가 외투를 벗었습니다. 따뜻한 사랑이 가장 큰 힘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승리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강한 사람입니다.
3. 친밀한 영성입니다
여기서 친밀함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입니다. 2절은 미리암과 아론의 말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그 말을 여호와께서 들으셨습니다. 대화도 질이 있습니다. 대화한다고 다 같은 대화가 아닙니다. 그들이 하나님과 대화했던 것과 모세가 하나님과 대화했던 것은 다른 차원입니다. 6-8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내가 환상이나 꿈으로 대화했다. 하지만 내 종 모세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했다. 은밀한 말로 하지 않았다. 그리고 모세는 나의 형상을 보는 사람이다.” 미리암과 아론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수준은 백성들보다 깊은 수준이었습니다. 하지만 모세하고는 비교가 안 됩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대면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명백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아론이나 미리암과는 차원이 다르게 하나님과 친밀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셨습니다. 요 17:21입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아버지는 예수님 안에, 예수님은 아버지 안에 거하셨습니다. 그렇게 친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는 아버지와 예수님의 친밀한 관계를 말씀하시면서 또 우리가 그렇게 되기를 간절하게 원하시는 주님의 소원이 나옵니다.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하나님은 삼위일체로 존재하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각각의 인격을 가지고 계시면서 본질상 하나이십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완벽한 조화와 친밀함 속에 거하십니다. 우리도 그렇게 삼위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친밀한 영성을 가지는 세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➀예수님을 영접하여 거듭나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납니다. 그러면 삼위이신 성령님이 그 사람 속에 거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친밀함 유지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 갖추어진 것입니다.
➁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시 25:14입니다.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여기서 ‘친밀함’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소드’는 본래 ‘비밀 회담’을 의미합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아무런 비밀도 없이 그의 뜻을 보이신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이 말은 ‘비밀스런 교제’, ‘밀접한 관계’를 뜻합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에게 친밀하게 하십니다.
경외라는 말은 두려움을 의미하지만 공포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하나님 향하여 갖는 경건한 두려움입니다. 시 2:11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하나님을 섬깁니다. 그는 두려워서 떨지만 공포심을 갖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을 즐거워합니다. 경외는 너무나 좋지만 함부로 할 수 없는 관계입니다. 우리에게 경외감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하지만 하나님을 향한 경건한 두려움 때문에 언행심사를 조심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➂기도해야 합니다. 모세가 하나님과 친밀할 수 있었던 것은 기도생활 때문이었습니다. 출 33:11입니다.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눈의 아들 젊은 수종자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모세는 친구와 이야기 하는 것 같은 친밀한 기도를 했습니다. 모세는 기도로 하나님과 친밀함을 유지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과 친밀해야 합니다. 그 비결은 기도입니다. 신 4:7입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이 가까이 함을 얻은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가까이 하여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해지는 비결도 기도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과 친밀하십니까? 시간을 정해놓고 하나님을 만나십니까? 모세가 하나님과 친구처럼 대화했던 것처럼 그렇게 기도하십니까? 여러분! 기도하면 하나님과 가까워집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시 73:28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가까운 사람이고 복 있는 사람입니다.
4. 충성 된 영성입니다
7절에 보니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의 충성을 인정하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온 집에 충성했습니다. 예수님도 충성하셨습니다. 성경에 모세와 예수님의 충성을 함께 언급한 구절이 있습니다. 히 3:5,6입니다.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 신실하였고 6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 모세는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 신실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신실하셨습니다. 여기서 신실이라는 말을 개역성경에서는 ‘충성’으로 번역했습니다.
우리도 충성 돼야 합니다. 충성 된 영성을 갖기 위한 9대 원칙이 있습니다.
➀하나님께 충성해야 합니다. 우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의 충성의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한 자매가 있었습니다. 명문 여자대학 성악과를 졸업하고 모 시립 합창단 단원이기도 했습니다. 그 자매는 돈을 받고 노래하러 다녔습니다. 결혼 축하 30만 원, 회갑잔치 축가 20만 원 등의 가격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청년들의 모임에서 그 자매에게 찬양을 하라고 하면 “내가 이래 뵈도 프로인데, 아무 때나 노래할 수 있나!”하면서 거절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이 자매에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목에 이상이 온 것입니다. 목이 부어 음식물도 제대로 삼키지 못하고, 제대로 말도 못했습니다. 그 자매는 그 일로 인해 정신을 차렸습니다. 목소리로 밥 먹고 사는 사람이 목소리가 나오지 않으니까, 그제 서야 눈물로 기도하며 하나님께 매달리고, 친구들에게 기도를 요청했습니다. '내가 잘못했다,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 목소리가 다시 회복되기만 하면 이제는 하나님을 열심히 찬양하겠다.'라고 중보 기도를 요청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자매에게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노래를 잘하는 달란트를 주셨는데 자매는 하나님께 충성하지 않고 돈벌이만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충성되지 못한 것입니다.
➁하나님의 집에 충성해야 합니다. 모세와 예수님이 하나님의 온 집에서 충성하셨던 것 같이 우리도 하나님의 집에서 충성해야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일군입니다. 일군은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충성해야 하는데, 하나님은 성도에게 하나님의 집을 맡기셨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교회에서 충성해야 합니다.
➂맡겨진 일에 충성해야 합니다. 성경은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은 각자에게 맡겨진 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일에 충성해야 합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인류구원의 사역을 맡기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일에 충성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고 죽기까지 충성하셨습니다.
➃직분에 충성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충성 되게 여기셔서 직분을 맡기셨습니다. 하나님은 직분자들에게 충성을 원하십니다. 교회에는 직분에 충성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 교회가 건강합니다.
➄적은 일에 충성해야 합니다. 달란트비유에 보면 주님은 적은 일에 충성한 사람에게 많은 것을 맡기셨습니다. 충성된 사람이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 앞에 큰 복을 구합니다.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작은 일에는 충성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절대 큰 복을 못 받습니다. 작은 일, 적은 물질, 작은 능력을 주셨을 때 충성해야 하나님께서 큰 것을 맡기십니다.
➅세상일에도 충성해야 합니다. 교회 일이나 영적인 일만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세상일도 사명으로 알고 하나님의 일로 생각해야 합니다. 나의 직장, 가정 등 내가 속한 곳에서 맡고 있는 일이 나의 사명입니다. 그래서 학생은 공부에 충성해야 하고, 회사원은 회사 일에 충성해야 합니다. 군인은 군복무에 충성해야 합니다. 다니엘이 그랬습니다. 다니엘의 대적들은 다니엘을 고발한 근거를 찾고자 했으나 너무나 충성되어 허물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니엘은 기도와 예배에 충성했던 것처럼 사회생활에도 충성했습니다.
➆죽도록 충성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주님은 죽도록 충성하라고 하셨습니다. 초기 기독교의 그리스도인들의 충성은 말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사자에게 먹히면서도 믿음을 지켰고, 화형을 당하면서까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의 병사들은 “도대체 저들이 믿고 충성하는 분이 누구 길래 저렇게 충성할 수 있는가?”라며 궁금해 했습니다.
지금 이 시대 대한민국에서는 초대교회처럼 목숨을 걸고 신앙생활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목숨을 걸만한 시대가 온다면 우리는 우리의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며 주님에게 충성해야 합니다. 그런 순교자적인 신앙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는 것처럼 서울대학은 잠간 열심히 공부해서 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평소에 지속적으로 열심히 준비한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순교적인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나 변함없이 충성한 사람이 그 날에 빛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며 자아를 죽이며 주님에게 복종하고 충성해야 합니다.
➇재물에 충성해야 합니다. 주님은 사람들이 불의한 재물에 충성하지 않으면 그들에게 어떻게 참된 것을 맡기시겠느냐고 하셨습니다. 돈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지 않는 사람에게 어떻게 영적인 것을 맡길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➈성령의 열매로 충성해야 합니다. 가지는 열매를 맺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무에 붙어있어야 하고 나무로부터 진액을 충분히 공급 받으면 저절로 열매가 열립니다. 성령의 열매도 그렇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노력해서 맺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충만하면 성령님이 주시는 생명과 능력으로 충만하게 열매 맺는 것입니다. 성령충만하면 성령의 열매가 저절로 열립니다. ‘노력이 아니라 저절로’ 중요한 것은 성령 충만을 받는 것입니다.
5. 중보의 영성입니다.
13절에 보면 모세가 미리암의 치료를 위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미리암을 고쳐주셨습니다. 모세는 사역기간동안 늘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서 중보자로 사역했습니다. 모세는 중보자로 두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먼저는 하나님 편에서 백성에게 나아갔습니다. 모세의 이 중보 사역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했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또 모세는 백성의 편에서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중요한 순간에 중보기도자로서의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노를 거두셨습니다. 모세의 중보는 예수님의 중보의 그림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중보자이십니다. 예수님은 두 가지 측면에서 중보자이십니다. 먼저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유일한 중보자이십니다. 요 14:6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만이 아버지께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십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롬 8:34입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우리를 정죄할 자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영원한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중보기도까지 하고 게십니다.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구원 받았고 예수님의 중보기도 때문에 믿음으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도 중보자로서의 영성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두 가지 면에서 중보의 영성을 발휘해야 합니다. 먼저는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과 예수님 사이의 다리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또 하나는 기도의 자리에서 다른 이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딤전 2:1-3). 우리는 우리와 관련된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특별히 지도자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입니다.
중보기도와 관련된 간증하나 하겠습니다.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설교 준비를 하고 있는데, 성령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 가게에 가면 방황하는 영혼이 있을 것이니 가서 전도하라.” 성령께서 그 목사님에게 역사하신 것입니다. 목사님은 성령의 인도에 순종해서 그곳에 갔습니다. 거기에는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그 청년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가 집으로 돌아가서 자기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이제 저도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오늘부터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아들을 끌어안고 울면서 말했습니다. “얘야, 나는 네 영혼이 너무 안타까워서 3일 전부터 물 한 방울도 마시지 않고 목숨을 걸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었단다. 그런데 네가 오늘부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나님은 그 아버지의 기도를 들으시고 목사님에게 역사하셔서 가게로 가서 복음을 전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청년 아버지의 기도를 들으시고 목사님을 사용하셔서 그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중보기도의 능력입니다.
오늘은 자기를 비방하다가 나병에 걸린 미리암을 위하여 기도한 모세를 통해서 ‘모세의 영성’이라는 제목의 말씀을 나누웠습니다. 1. 포용의 영성입니다. 2. 온유한 영성입니다. 3. 친밀함의 영성입니다. 4. 충성 된 영성입니다. 5. 중보의 영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