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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의 강역을 확인하는 것은 고조선 연구의 출발점이 된다. 왜냐하면 강역이 확인되어야만 고조선에 관한 자료를 이용하는 지리적 범위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고조선의 강역이 한반도에 국한되어 있었다면 한반도에 관한 기록과 한반도내의 유적 유물만을 고조선 연구의 사료로 이용해야 한다. 그러나 고조선의 강역이 만주지역을 포괄하고 있었다면 만주지역에 관한 기록과 만주내에 있는 유적 유물까지도 고조선 연구의 사료로 포함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고조선의 강역에 대한 분명한 인식 없이는 고조선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전반에 걸친 연구가 바르게 될 수가 없다. 고조선의 강역이나 국경에 관한 연구는 있었던 그대로를 확인하는 작업이다. 따라서 그것은 바르게 연구되었을 경우 학자에 따라 다른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학자의 역사의식이나 사관의 차이에 따라 다르게 말해질 수 있는 것도 아니며 그래서도 안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연구는 사료에 따라 과학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간 고조선의 강역이나 국경이 학자에 따라 달리 말해지는 이유는 그에 관한 사료가 빈약하기 때문이라고 일반적으로 믿어져 왔다. 그것을 분명하게 밝힐 수 있는 사료가 없기 때문에 학자마다 다르게 추상적인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으로 인식되어져 왔던 것이다. 사료가 빈약하다거나 그렇지 않다거나 하는 판단은 학자의 주관적인 기준에 의한 것이다. 실제로 후대에 관한 사료에 비하면 고조선에 관한 사료는 빈약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고조선의 서쪽 국경에 관한 사료는 결코 빈약하거나 연구를 하기에 충분하지 못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매우 분명한 기록들이 있기 때문이다. 종래에는 이러한 기록들을 미처 발굴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고조선의 강역이나 국경을 고증함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점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첫째로, 새로운 문헌기록이나 고고자료는 계속해서 발견되고 있고 앞으로도 발견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종래에 언급된 불충분한 사료나 그것을 토대로 한 연구결과에 연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둘째로, 불충분한 사료를 토대로 한 종래의 연구는 잘못된 결론에 도달했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그러한 결론을 기초로 해서 논리를 전개하거나 그러한 결론들을 종합하여 결론을 도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연구방법은 또 하나의 잘못된 결론에 도달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셋째로, 고조선 연구의 가장 기본되는 사료는 그 당시의 기록이어야 하는데, 한국내에서는 아직까지 그러한 자료가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중국의 기록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중국 문헌 가운데서도 史記와 漢書 및 西漢시대와 그 이전의 고조선에 관한 기록이 기본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동일한 책 안에서도 고조선시대에 해당하는 西漢 초기 이전에 관한 기록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넷째로, 종래의 연구에서는 史記 朝鮮列傳과 後漢書 東夷列傳, 三國志 東夷傳 또는 그 이후의 문헌 기록을 주된 사료로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것은 잘못이다. 後漢書 東夷列傳이나 三國志 東夷傳 또는 그 이후의 문헌들은 중국의 東漢시대(서기 23년~220)와 三國시대(서기 220년~265년) 및 그 이후의 시대에 관한 기록이 주된 것이다. 따라서 고조선이 붕괴된 후의 상황을 전해 주고 있는 것이다. 史記 朝鮮列傳은 위의 문헌들보다는 앞선 시대에 관한 기록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고조선에 관한 내용이 아니라 衛滿朝鮮에 관한 것이다. 그 첫머리에 衛滿朝鮮이 건국되기 전 고조선과 중국의 관계에 대해서 잠깐 언급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내용 자체만으로는 고조선과 중국의 국경을 알 수가 없다.
고조선 말기인 중국의 戰國시대로부터 西漢 초기까지 서기전 5세기경부터 서기전 2세기 경까지의 고조선 서쪽 국경은 란하와 碣石山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戰國시대 燕나라와 秦帝國이 쌓았던 燕長城과 秦長城은 바로 이 고조선과 중국의 국경선상에 위치에 있었다. 西漢 초에 이르러서는 고조선의 서쪽 국경이 西漢지역으로 옮겨져 고조선의 강역이 확대되었다. 이러한 고조선의 국경은 지금의 遼西지역에 衛滿朝鮮이 건국되기까지 변화가 없었다.
고조선 중기인 서기전 16세기경까지도 란河 유역은 고조선의 강역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보다 앞선 고조선 초기의 서쪽 국경은 분명하게 알 수가 없으나 란하 유역은 중국의 영역이 아니었던 것만은 분명하며 고조선의 영향력 아래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고고자료에 란하 유역은 고조선과 동일한 문화권이었던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遼東은 고조선과 중국의 국경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그간 일부 학자들은 고대의 遼東을 지금의 遼東과 동일한 위치였던 것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었다.
遼東에는 두 가지의 다른 개념이 있었다. 하나는 중국인들에게 있어서 그들 영토의 동쪽 끝인 '極東'을 의미하는 遼東이고, 다른 하나는 秦帝國과 西漢의 행정구역이었던 遼東郡이었다. 일반 의미의 遼東은 西漢 초까지는 지금의 란하 유역으로부터 遼西에 이르는 지역이었으나 지금의 遼西지역에 漢四郡이 설치되어 그 지역이 중국의 영토에 편입된 이후에는 지금의 遼東지역으로 이동하였다. 따라서 고조선시대의 遼東은 지금의 遼東지역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서쪽인 지금의 란하 유역이었던 것이다. 秦帝國과 西漢의 행정구역이었던 遼東郡은 란하 하류유역에 위치하였는데 지금의 碣石山 서쪽지역이었다.
秦.漢시대의 동북부 국경선에는 秦長城(만리장성)이 있었는데, 그것은 란하 하류 동부유역에 있는 지금의 碣石山지역에서 시작되어 서쪽으로 란하를 가로질렀다. 遼東郡은 秦長城과 접하여 그 서쪽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행정구역이었던 遼東郡은 일반 의미의 遼東의 서남부 일부를 형성하고 있었으며 遼東의 대부분이 고조선의 강역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遼西지역에 漢四郡이 설치되어 그 지역이 중국 영토에 편입됨에 따라 일반 의미의 遼東은 지금의 란하 동쪽으로 이동하였고 遼東郡은 그대로 란하 유역에 위치하였다. 일반 의미의 遼東과 행정구역인 遼東郡은 멀리 떨어져 있게 되었던 것이다. 遼東郡은 행정구역의 개편이 있기까지는 그 위치가 변동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상과 같이 遼東은 두 가지의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시대에 따라 그 위치와 상호간의 지리관계에도 변화가 있었다. 그러므로 옛 문헌에 遼東이 등장할 경우 그 遼東의 의미와 지리적 위치를 먼저 확인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고조선의 서쪽 국경을 고증한 결과로서 다음과 같은 사실도 확인되었다. 지난날 일부 학자들은 고조선과 중국 사이에 東胡의 영토가 있었을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고조선은 중국의 燕.秦帝國.西漢帝國 등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따라서 고조선과 중국 사이에 東胡의 영토가 있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지난날 일부 학자들은 고조선이 그 말기에 燕나라 장수 秦開의 침략을 받아 서부 영토 2천여 리를 빼앗겼던 것으로 인식해 왔다. 그것도 사실과 다르다. 고조선은 붕괴되기까지 그 서쪽 국경이 란하 유역에서 동쪽으로 이동한 적이 없다. 오히려 때에 따라 란河 서쪽으로 이동하였다. 따라서 그러한 견해도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秦開의 침략은 일시적인 것이었고 고조선은 서부 영토를 바로 수복했을 뿐만 아니라 燕나라의 영토 일부를 빼앗아 침략을 응징하기 까지 했던 것이다.
그간 일부 학자들이 고조선의 서부 국경에 대해서 잘못 인식하고 있었던 원인은 사료를 충분히 섭렵하지 못했고 사료의 선택이나 해석 등에 있어서도 합리적인 방법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고조선 초기의 서쪽국경을 분명하게 밝히지 못하였다는 문제점은 아직도 남는다. 그러나 어느 나라 역사에서나 고대국가의 국경을 초기부터 말기까지 구체적으로 밝히기는 어렵다. 따라서 어느 한 시기의 강역이 확인되면 그것을 그 국가의 국경에 대한 일반개념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조선의 서쪽 국경은 란하 유역이었다고 일반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고조선의 서쪽 국경을 마무리 지으면서 참고로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지난날 일본은 만주에 그들의 괴뢰정권인 滿洲國을 세운 바 있는데 그 서쪽 국경은 지금의 란하 유역이었다는 점이다. 滿洲國의 서쪽국경이 고조선의 서쪽 국경과 동일했던 것은 우연의 일치였을까? 아니면 일본 학자들은 역사적으로 그 지역의 중국의 영역이 아니었고 고조선의 강역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러면서도 그들은 고조선의 존재를 부인하여 만주를 한국과 중국의 역사로부터 분리시키고자 한 것은 아니었을까?
고조선에 관한 연구는 한국의 옛 기록을 기본사료로 채택하는 것이 바람직하겠다. 그러나 한국에는 기록이 충분히 남아 있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역사연구에 있어서 가장 기본되는 사료는 연구대상으로 삼은 사건이나 사실과 같은 시기 또는 그로부터 오래지 않은 시기의 기록이다. 그런데 한국에는 고조선 당시의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그뿐만 아니라 고조선에 관한 기록을 싣고 있는 문헌 가운데 가장 오래된 三國遺事나 帝王韻紀마저도 고려 후기에 편찬된 것으로 고조선이 붕괴된 후 무려 1,300여 년이 지난 후의 것이며 그 내용도 매우 간략하다. 따라서 고조선연구는 중국문헌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다행히도 고조선 당시 또는 고조선이 붕괴된 후 오래지 않은 시기의 중국문헌에 고조선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중국문헌의 기록에 고조선에 관한 사료가 충분하게 남아 있는 것은 아니지만 고조선의 서쪽 경계에 관한 사료는 고증에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남아 있다. 고조선의 서쪽 경계는 중국의 동북부 경계가 되기 때문에 중국역사의 일부분으로서 그곳에 대한 기록이 비교적 충실하게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중국문헌이 한국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중국의 역대 사서들은 중국역사책일 뿐이며, 중국의 다른 문헌들도 중국인들의 관심사의 기록일 뿐이다. 따라서 한국사나 한국에 대한 모든 문제가 기록되어 있기를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조선의 국경에 관한 기록도 중국인들의 관심지역인 고조선의 서쪽 경계, 바꾸어 말하면 중국의 동북부에 관해서는 기록이 어느 정도 남아 있지만 고조선의 북부나 남부에 관해서는 그렇지 못하다. 따라서 문헌만을 의존하여 고조선의 북부 경계나 남부 경계를 밝히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그런데 근래에 한반도와 만주지역에 대한 고고발굴이 활발해지면서 고조선의 북부와 남부의 경계를 확인하는 것이 가능해 졌다.
고조선의 중기인 서기전 16~14세기 이후 고조선의 북쪽 경계는 대체로 지금의 黑龍江 유역과 그 상류인 어르구나하유역이었으며 남쪽 경계는 한반도 남부의 해안선이었다. 그리고 고조선의 세력은 필요에 따라 때로는 동북쪽으로 黑龍江을 넘어 연해주지역까지 미치기도 하였다.
이러한 고조선의 강역은 고조선 초기부터 유지되어 왔을 가능성이 많은데, 고조선 초기에 관한 자료는 아직 충분하지 않다. 이상과 같은 고조선의 北界와 南界에 대한 고증 결과를 이미 확인된 고조선의 서쪽 경계와 연결시켜 보면 고조선은 北京 근처에 있는 란河 유역과 碣石山지역을 중국과의 경계로 하여 지금의 河北省 동북부로부터 內蒙古自治區 동부 , 遼寧省 전부 , 吉林省 전부 , 黑龍江省 전부 및 한반도 전부를 그 강역으로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난날 고조선 연구자들은 고조선의 사회수준이 매우 낮은 단계였을 것이라는 선입관을 가지고 있었다. 고고학적으로 고조선시대가 초기부터 청동기시대였다는 사실도 근래의 발굴결과에 의해 밝혀진 것이며, 과거에는 고조선 전기는 신석기시대 정도일 것으로 인식하였다. 그러므로 옛 문헌에서 고조선의 사회수준을 높이 평가했거나 강역이 넓었던 것으로 표현한 기록들을 발견하고서도 그 내용을 애써 부인하려 하였다. 그 결과 고조선에 대한 모든 연구 결과는 실제보다 낮게 평가되어 나타났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그러한 선입관을 지워 버리고 고대의 문헌기록과 고고학 자료에 따라 객관적인 자세로 연구를 진행해야 할 것이다.
한반도와 만주지역에 처음으로 출현한 고대국가인 고조선이 그렇게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주변의 모든 세력들이 석기를 사용하던 시기에 靑銅武器와 靑銅儀器를 가진 씨족이나 종족의 위력을 상상해 볼 필요가 있다. 만약 오늘날 지구상에 있는 여러 나라 가운데 어느 한 나라만 핵무기를 소유하고 있다면 그 나라의 위력은 어떠하겠는가? 그 나라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주변의 나라들을 정복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의 청동무기는 그와 같은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고조선의 국경은 분명하지 않았을 것이라 거나, 매우 유동적이었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고조선의 지리연구가 마치 부질없는 일인 것처럼 독자들을 오도하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말은 고대사의 인식부족에서 나온 것이다. 철기시대 이전의 고대국가의 강역은 후대의 領域國家처럼 면적을 기초로 하여 선을 긋는 식으로 형성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지식은 고대사를 전공하는 학자들 사이에는 상식에 속하므로 따로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은 것이다.
고조선의 국경은 유동적이었을 것이라는 표현은 옳다. 국경은 여러 기지 이유로 항상 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당연한 것을 가지고 고조선의 역사지리 연구자들이 마치 고조선의 강역이나 국경은 전혀 변화가 없었다고 주장한 것처럼 말장난을 하는 것은 학자의 자세가 아니다. 고조선 연구자들이 고조선의 국경변화를 구체적으로 말하지 못하는 것은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인 것이다. 정도에 차이는 있지만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조선과 같은 고대국가의 경우 사료가 충분하지 못한 것은 비슷하다. 따라서 사료에 의해서 확인된 것만을 근거로 하여 그 강역이나 국경을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고조선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기본적인 문제 가운데 하나가 고조선의 연대일 것이다. 고조선은 언제 건국되었으며 언제 붕괴되었는가? 그리고 고조선에 단군은 몇 명이나 있었으며 그들의 재위기간은 얼마나 되었는가? 이러한 문제는 고조선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갖는 가장 기본적인 의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에 대해서 아직 아무도 분명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이 글은 이러한 의문에 대한 해답을 구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상고시대의 연대가 부정확한 것은 한국사에만 있는 현상이 아니다. 다른 나라의 역사에서도 비슷하다. 중국사의 경우 정확한 연대가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西周 려王때에 國人暴動이 일어난 서기전 841년이다. 그 이전의 연대는 정확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은 편의상 옛 문헌에 기록된 바에 따라 그보다 앞선 商나라의 건국 연대나 西周의 건국연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고대의 여러 문헌에 동일한 문제에 대한 연대가 각각 다르게 나타날 경우 학자들은 자신의 판단에 따라 그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해서 사용하게 된다.
예컨대 중국 고대의 여러 문헌에 기록된 商나라의 멸망 연대(이것은 西周의 건국 연대가 된다)는 서기전 1122년, 1116년, 1111년, 1070년, 1067년, 1066년, 1050년, 1047년, 1030년, 1027년, 1018년 등인데, 이 가운데 어느 것이 정확한 것인지는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학자에 따라 서기전 1066년이나 111년, 1122년 등을 채택하고 있다.
고조선의 연대에 대한 해답은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사료가 있을 때에만 가능한데, 아직은 그러한 사료가 충분하다고는 말하기 힘들다. 그러나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고조선의 건국 연대와 붕괴 연대의 추정을 가능하게 하는 기록이 三國遺事와 帝王韻紀에 보이고 이와 관련된 고고자료도 상당히 축적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문헌자료와 고고자료를 종합하여 검토하면 그 가능 연대를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자료에 나타난 고조선의 건국 연대는 三國遺事 古朝鮮條에 기록된 箕子 망명 연대로부터 역산한 서기전 2622년, 三國遺事 古朝鮮條와 帝王韻紀에 고조선 건국 연대로 기록된 서기전 2400~2300년, 최근에 단군릉에서 얻어졌다고 주장한 서기전 3000년경 등이 있다. 이러한 연대를 그간 얻어진 고고자료 및 그 연구결과와 비교하여 볼 때 고조선의 건국은 서기전 2300년보다 아래로는 내려오지 않을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고조선의 역년을 三國遺事는 1,908년간이라 하였다. 그러나 帝王韻紀는 箕子朝鮮이 고조선을 계승한 것으로 보고 고조선의 역년으로 1,028년간과 1,038년간 이라는 두 가지를 싣고 있다. 그런데 箕子朝鮮은 고조선의 서부 변경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箕子朝鮮이 고조선을 계승한 것으로 본 帝王韻紀의 기록을 채택하여 고조선의 붕괴 연대를 산출하면 서기전 400년경이 된다. 그럴 경우 고조선이 붕괴된 후 건국된 신라와 고구려의 건국 연대인 서기전 57년과 37년 사이에는 300년 이상의 시간공백이 있게 된다. 그런데 문헌기록을 통해 볼 때 서기 4세기 초까지도 조선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고조선의 후계세력이 존재했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서기전 400년경에 단군의 혈통이 끊기었거나 단군의 통치가 완전히 끝났다고 보기는 어렵다. 아마도 이 연대는 단군이 독자적으로 고조선을 통치할 능력을 상실한 연대이고, 그 후부터 단군은 고조선의 거수국 가운데 세력이 가장 강한 부여의 도움을 받아 고조선을 통치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고조선이 완전히 붕괴된 것은 신라와 고구려 등이 독립국으로 출발한 서기전 57년과 서기전 37년보다 조금 앞선 서기전 2세기 말이나 1세기 초였을 것이다.
고조선의 붕괴 요인은 대내적인 면과 대외적인 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대내적인 것으로는 철기의 보급에 의한 경제구조와 사회질서의 변화에 따른 통치조직의 이완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대외적으로 衛滿朝鮮의 건국과 영토확장 및 西漢 武帝의 漢四郡 설치 등에 따른 고조선 영토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한 전쟁으로 인한 국력의 손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국내외적으로 어려운 상황은 고조선의 붕괴를 가져왔을 것이다.
고조선은 무려 2,300여 년 동안 존속하였다. 이 기간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수십 명의 단군이 있어야 하는데 학계로부터 사료의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三國遺事와 帝王韻紀에서는 고조선의 건국자인 壇君 王儉 한사람의 이름만 확인될 뿐이다. 그러나 檀奇古史, 壇君世紀, 揆園史話 등에는 47명의 단군 이름이 실려 있는데, 아직 이 책들에 대한 書誌學的 검토나 그 내용에 대한 분석적인 연구가 충분하게 되어 있지 않다.
고대사회에서는 그 나라의 도읍이 정치와 경제, 문화의 중심이었다. 이러한 사정은 고조선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따라서 고조선의 중심지 변천은 그 도읍 이동을 고찰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어느 시대나 도읍의 이동에는 그럴 수 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정치상황이 있었던 것이다.
종래에 고조선의 중심지 변천에 대한 연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연구의 대부분은 문헌에 기록된 바에 따른 고조선의 도읍 이동과정을 추적한 것이 아니었다. 고조선의 건국세력은 중국으로부터 한반도로 이주해 왔을 것이라는 선입관을 가지고 고찰되었다. 따라서 종래의 연구는 고조선의 중심세력은 중국으로부터 만주를 거쳐 한반도로 이주하였을 것으로 보았다. 그 결과 한국과 중국의 고대문헌에 나타난 고조선의 도읍지와 그 이동에 관계된 기록이나 고고자료가 바르게 해석되지를 못하였다.
고조선에 관한 가장 오랜 한국문헌인 三國遺事 古朝鮮條에는 고조선의 도읍지가 다섯 곳으로 나타난다. 阿斯達, 平壤城, 白岳山阿斯達, 藏唐京, 阿斯達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위치에 대해서는 언급되지 않았다. 그런데 중국의 고대문헌에는 고조선의 도읍지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儉瀆이라는 지명이 만주에 세 곳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들의 지리적 위치를 확인하는 것이 가능하다. 따라서 고조선의 강역 변화와 고조선에서 일어났던 정치상황들 가운데 고조선으로 하여금 천도를 하도록 만들었던 사건들이 위에 언급된 儉瀆들의 지리적 위치를 합리적으로 설명하여 준다면 그곳들을 고조선의 도읍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단순히 고조선의 도읍 이동이나 중심지 변천에 대한 연구로서만 의의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고조선으로 하여금 도읍을 이동하도록 만들었던 당시의 강역 변화나 정치상황들이 사실이었음을 입증해 주는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이를 더 구체적으로 인식하도록 할 것이다.
고조선의 도읍지 위치와 천도하게 된 경위를 보면 다음과 같다. 고조선은 원래 阿斯達이라는 명칭을 가진 고을나라였는데, 그 도읍명도 阿斯達로서 고을나라 이름과 동일하였다. 당시의 도읍은 지금의 평양이었다. 다시 말하면 고조선은 원래 지금의 한반도 북부에서 출발한 고을나라였던 것이다. 그런데 아사달고을나라는 그 강역을 만주지역까지 넓히게 됨에 따라 도읍을 지금의 遼河 하류 동부유역에 있은 遼寧省 本溪市지역으로 옮겼는데, 이곳이 平壤城이었다. 이때 黃河 유역의 나라들과 교류를 갖게 되면서 아사달의 뜻을 한자로 표기한 朝鮮이라는 국명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던 것 같다.
고조선은 계속해서 서쪽으로 영토를 넓혀 지금의 란하 너머까지를 그 판도에 넣게 되었다. 이때에 黃河 유역으로의 진출을 꾀하고 黃河 유역의 세력들이 팽창해 오는 것도 견제하기 위해 지금의 란河 유역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이곳이 白岳山阿斯達이었다. 그런데 箕子 일족이 西周로부터 고조선의 서부 변경인 란하 하류유역으로 망명해 오자 고조선은 이들을 란하 하류유역에 거주하도록 하고 거수국을 삼아 국경의 수비를 맡기고 지금의 大凌河 동부유역 北鎭 동남지역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이곳이 藏唐京이었다.
그런데 그 후 衛滿이 西漢으로부터 란하 하류유역으로 망명하여 箕子의 후손인 準王으로부터 정권을 빼앗고 箕子朝鮮의 도읍이었던 王儉城에 도읍한 후 西漢의 外臣이 되어 영토를 지금의 大凌河 유역까지 확장하였다.
그리고 西漢 武帝가 衛滿朝鮮을 멸망시키고 지금의 遼河까지의 遼西지역에 漢四郡을 설치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렇게 되자 고조선은 더 이상 大凌河 동부연안의 藏唐京에 도읍을 할 수 없게 되어 다시 동쪽으로 도읍을 옮기게 되었는데, 그곳은 고조선이 고을나라시대에 도읍했던 지금의 평양으로서 阿斯達이었다.
이상과 같은 상황으로 보아 고조선이 처음으로 阿斯達인 지금의 평양에 도읍했던 시기는 고을나라시대로서 고조선의 건국연대인 서기전 2400~2300년 이전이며, 平壤城인 지금의 遼寧省 本溪市지역에 도읍했던 시기는 고조선이 朝鮮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한 서기전 2400~2300년경부터였을 것이다. 그리고 白岳山阿斯達인 지금의 란하 유역에 도읍했던 시기는 箕子가 망명 온 서기전 1100년경 이전이며, 藏唐京인 지금의 大凌河 동부유역 北鎭 동남지역에 도읍했던 시기는 箕子가 망명 온 서기전 1100년경부터 漢四郡이 설치된 서기전 108년까지이고, 고조선이 도읍을 다시 阿斯達인 지금의 평양으로 옮긴 것은 玄토郡이 설치된 서기전 107년경부터 고조선이 붕괴되기까지 였을 것이다.
古朝鮮(壇君朝鮮)과 기자조선.위만조선.한사군의 관계에 대한 그간의 통설은 이들이 수직적인 계승관계에 있었다고 보아 왔다. 즉 古朝鮮(壇君朝鮮) -> 箕子朝鮮 -> 衛滿朝鮮 -> 漢四郡의 순서로 역사가 전개되었다는 것이다. 한국사 교과서나 한국사 개설서 등에 서술된 내용을 보면 위의 체계 가운데 箕子朝鮮에 대해서는 직접 언급을 하고 있지 않지만 箕子의 후손인 準王을 고조선의 마지막 왕으로 서술하고 위만이 그로부터 정권을 빼앗아 衛滿朝鮮을 건국했다고 기술하고 있으므로 실제로는 箕子朝鮮을 인정한 것이 된다.
그런데 위와 같은 종래의 체계가 통용되어 오고 있으면서도 이들의 위치에 대한 고증은 거의 행해진 바가 없었다. 지난날 통용된 것을 의심하지 않고 그대로 답습해 왔던 것이다. 漢四郡의 위치에 대해서도 기본사료를 통한 근본적인 검토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한 상황에서 일본인들이 대동강 유역에서 중국의 유물을 발견하고, 그것을 근거로 하여 그곳을 漢四郡의 樂浪郡지역이라고 발표하자 그것을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유물은 여러 가지 이유로 생산된 곳을 떠나 다른 지역에서 출토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유물이 어떤 연유로 그곳에서 출토되었는지를 설명하는 데는 조심성이 필요하다. 더욱이 그 유물이 출토된 지역에 관한 문헌기록이 있을 때에는 그것을 참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도 樂浪郡의 성격이나 유물에 대한 연구가 학자들에 의해 진행되고 있지만, 그 위치 고증은 하지 않은 채 대동강 유역을 樂浪郡의 위치로 일단 인정하고 논리를 전개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연구자세는 가장 기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것으로 바람직하지 않다. 대동강 유역이 漢四郡의 樂浪郡이 아니었다면 그곳에서 출토된 유물은 樂浪郡의 유물이 될 수 업는 것이며, 다른 명칭이 붙어져야 하는 것이다.
箕子朝鮮과 衛滿朝鮮, 漢四郡의 지리적 위치는 함께 고찰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 결과는 모두가 같은 곳으로 나타나야 한다. 이 가운데 어느 하나의 위치만을 고증하고 그 결과만을 고집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서로 계승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들의 위치를 고증한 결과 이들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위치가 동일한 곳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 고증에는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중국의 고대문헌에는 箕子朝鮮, 衛滿朝鮮, 漢四郡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 충분히 남아 있다. 이들의 위치를 연구하는 규명하는 것은 이들 자체에 대한 연구일 뿐만 아니라 고조선의 실체를 정확하게 인식하는 데 있어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닐 것이다.
衛滿朝鮮은 衛滿이 箕子의 후손인 準王의 정권을 빼앗아 성립되었고, 漢四郡은 西漢 武帝가 衛滿朝鮮을 멸망시키고 그 지역에 설치하였다. 箕子朝鮮, 衛滿朝鮮, 漢四郡은 수직적인 계승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동일한 지역에 위치해 있었어야 한다. 이들의 위치를 하나하나 고증하여 그것들이 동일한 지역으로 확인되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치밀한 고증은 이루어진 바가 없다.
중국의 옛 문헌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箕子朝鮮과 衛滿朝鮮, 漢四郡은 지금의 遼西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중국의 商, 周 교체기인 서기전 12세기 말에 箕子 일족은 고조선(단군조선)의 변방인 지금의 란하 하류 동부유역으로 망명하여 고조선(단군조선)의 渠帥國이 되었다. 그 후 서기전 195년에 西漢으로부터 망명한 衛滿은 기자의 40여 세대 후손인 準王의 정권을 빼앗아 衛滿朝鮮을 건국하였다. 그리고 衛滿은 西漢의 외신이 된 뒤 고조선(단군조선)지역을 침략하여 영토를 확장하여 그 영토가 란하로부터 大凌河 유역에 이르렀다. 서기전 108년에 西漢 武帝는 衛滿朝鮮을 멸망시키고 그 지역에 樂浪, 臨屯, 眞番의 세 郡을 설치한 후 여세를 몰아 고조선(단군조선)을 침략하여 서지건 107년에 玄토郡을 설치하였다. 따라서 樂浪, 臨屯, 眞番은 란하로부터 大凌河 유역에 걸쳐 있었고 玄토郡은 大凌河와 지금의 遼河 사이에 위치해 있었다. 箕子 일족의 망명지였고 衛滿朝鮮의 건국지 였던 란하 하류 동부유역은 후에 漢四郡의 樂浪郡 朝鮮縣이 되었다.
종래의 통설과 같이 漢四郡의 위치를 지금의 遼河 동쪽과 한반도 북부로 볼 경우 많은 모순이 나타난다. 漢四郡이 설치되어 있었을 당시에 지금의 遼河 동쪽과 한반도 북부에는 고조선을 계승한 여러 나라들이 있었으므로 漢四郡이 동일한 지역에 이 나라들과 겹쳐서 있었을 수는 없는 것이다. 대동강 유역에는 당시에 崔理王이 다스렸던 樂浪國이 있었는데, 종래에는 이에 대한 기록을 樂浪郡에 관한 기록으로 잘못 인식하였다.
일본인들이 대동강 유역을 발굴하고, 그 지역이 樂浪郡이었다고 주장하기 위해 제시한 유적과 유물의 해석에도 많은 오류와 의문점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그 유적들의 조성 연대가 漢四郡이 설치된 西漢시대가 아니라 東漢시대 이후였다. 그리고 그 지역이 漢四郡의 樂浪郡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결정적인 유적이나 유물은 단 하나도 없었다. 유물은 여러 가지 연유로 생산된 곳으로부터 멀리까지 이동한다. 그러므로 중국의 유물이 출토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대동강 유역을 漢四郡의 樂浪郡지역으로 볼 수는 없는 것이다.
6)고조선 후기 강역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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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이제사 알았습니다...조선의 영토를...
단군조선의 영토 입니다..
고조선이라는 명칭보다는 단군조선이 좋을것 같습니다^^
북한에서 주장하는 기원전 3천년경 단군조선 건국은 제 생각에는 아마 그 무덤이 단군이 아닌 다른 사람의 무덤이던지(신시배달 시대의 무덤이니) 아니면 단군의 조상(모계쪽으로 올라간다던지) 혹은 전후삼한설 처럼 전후 단군조선이 있던거라고 생각합니다.(물론 단기고사에서 전기와 후기로 나눕니다만 이 구분이 아닌 기원전 3천년경 건국한 조선과 기원전 2300년경(여기서도 설이 3개있다는... 2350년정도와 2333년과 2308?년) 조선으로 나눈다는 얘기입니다). 너무 옛날이라 기원전 3천년경 조선은 전해지지 않았을까 합니다
이게 어떻게 고조선의 영토가 될 수있죠??? 그럼 장안성 외각에 있는 단군피라미드는 뭘로 설명하실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