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고한 기호의 세계 ―주근옥의 「갈대 속의 비비새」론 (시문학 통권 제383호, 2003. 01) 남기택 (강원대학교 교수, 문학박사, 문학평론가) 1 주근옥 시집 「갈대 속의 비비새」(현대시, 2002)가 지닌 무게는 가볍고도 무겁다. 그의 시편들은 대개 쉽게 읽혀지지만 깨달음으로 가는 긴 사유의 고통을 반드시 수반한다. 이는 장문의 「자서」를 통해 드러나듯이, 그만한 고통의 산물로서 기호주의자 주근옥과 그의 시가 만들어지는 생래적 맥락이기도 하다. 그렇게 우리는 주근옥의 시를 통해 자연의 활력과 문득 눈부시는 삶의 혜안을 접하게 된다. 그의 시가 보여주는 경쾌하고도 속 깊은 행보는 식을 줄 모르는 열정과 실험의식에 바탕하고 있다. 시인은 어느덧 환갑을 바라보는 완숙의 경지에 이르렀지만, 시작에 임하는 자세와 시정신만큼은 그 어느 젊은 사유보다도 치열하고 의욕적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다함 없는 에너지와 정열이 오늘 주근옥의 시를 있게 하는 원동력일 것이다. 주근옥의 시는 현실에 대한 천착에 바탕하고 있다. 그에게 현실은 시의 막이 열리는 무대와도 같다. 다단한 삶의 형상은 주의 깊은 관찰과 상상력에 의해 기호화되고, 그리하여 그 무대는 흔한 통속극의 장과는 먼 거리를 지닌다. 무대는 곧 마당일 터 주근옥 시의 마당은 삶의 굴곡과 외양들이 전통적 정서와 세련된 연출로 펼쳐지는 상징의 장이라 할 수 있다. 주근옥의 시선은 완곡하면서도 지극한 자기 중심의 질서로 판들을 정리하고 이합집산을 주관하고 있다.
2 그런 맛과 구조를 전형적으로 볼 수 있는 시가 시집 첫 장에 실려 있다. 「빈 마당」이 그것인데 이 작품은 한 판 인생이 돌아가는 역학과 역설적 의미에 대한 관망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대처로 다 나가고 빈 마당에 사내가 옹기를 갖다 놓는다 대문으로 들어와 뒷문으로 나가고 뒷문으로 들어와 개구멍으로 나가고 무너진 흙담을 밟고 넘어와 큰 옹기 안에 작은 옹기 큰 옹기 앞에 더 큰 옹기 꽉 꽉 들어찬 마당 옹기 사이로 게걸음치며 요리조리 헤매다가 사내는 하나씩 들고 나간다 빈 마당에 달빛이 쏟아지지만 자꾸 흘러 넘친다 ―「빈 마당」 전문
이 시에 나타난 것처럼 ‘빈 마당’이란 우리 삶이 펼쳐지는 무대의 의미를 지닌다. 삶은 그렇게 “대문으로 들어와 뒷문으로 나가고/뒷문으로 들어와 개구멍으로 나가”는 부정의 과정일 수 있고, “큰 옹기 안에 작은 옹기/큰 옹기 앞에 더 큰 옹기”가 놓인 혼동 속이며, “게걸음치며 요리조리 헤매다가” 결국 “하나씩 들고 나”가야 할 지양과 고투의 과정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빈 마당’에 놓인 인생이기에 우리는 그 삶의 무대에 외롭게 놓인 슬픈 에필로그의 주인공에 그치는 것인가. 그러나 죽음과 같은 인간의 선험적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 아닌 듯 「빈 마당」에는 ‘달빛’이 드리운다. 한 인간을 둘러싼 모든 관계가 소원해지더라도 항상적으로 넘쳐흐르는 달빛은 자연의 하나인 인간이 그것처럼 한결같아야 한다는 강밀한 은유일 수 있다. 「빈 마당」에서 펼쳐지는 ‘사내’ 곧 시인의 모노드라마는 이처럼 혼란의 여정 속에서도 여명을 암시하며 기호들의 한 판 축제를 열어 나간다. 그 자세는 지극히 겸손하다. 이어 논의해야 할 내면화와 구조화의 긴밀한 연관과 같은 정치함과는 상대적으로, 어떤 작품을 통해서든 그것을 풀어놓는 겸양의 자세를 쉽게 만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먼 산 위의 유유자적과는 다른, 모든 차이를 원칙 없이 인정하는 다원주의와는 다른 태도임을 또한 우리는 볼 수 있다.
솔새 한 마리가 어깨에 똥을 떨어뜨리고 참 별것이 다 놀고 간다고 생각하는 날은 그래 일조 원을 먹고도 똥 냄새가 나지 않는 사람보다 그래도 미물 냄새가 나는 내가 파릇파릇 속잎이 돋아나는 감나무 등걸에 기댈 수 있는 내가 나를 바라보며 속으로라도 중얼중얼 욕할 수 있는 내가 내가 …(중략)… 푸른 홍시 하나가 되어 홍시 하나가 되어 다 파먹힐 수만 있다면 ―「솔새의 똥을 받으며」 부분
그 차이는 무엇인가. 위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주근옥 시의 화자는 “일조 원을 먹고도 똥 냄새가 나지 않”음을 조롱하는 비판의 자아요 “나를 바라보며……욕할 수 있는” 반성적 자아이며, “파릇파릇 속잎이 돋아나”고 “감나무 등걸에 기댈 수 있는” 소통의 존재이고, “다 파먹힐 수만 있”도록 바라는 탈주체의 관점에 선 그것이다. 일상의 우연을 시화하는 맥락에서 이와 같은 다양성의 차원이 교차되는 흥미를 느낄 수 있는 것은 주근옥 시의 매력이자 의미심장한 의도이기도 하다. 일상적 소재처럼 그 시의 문법이란 게 편안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 역시 현실에 착목한 입론의 미덕임을 간과해선 안 된다. 이러한 관점이 흔한 통속극의 그것과는 다른 것임은 위에서도 전제한 바 있지만 이를 교감하고 증거하는 것이 남은 과제일 텐데, 여기서는 소위 몰(mole)적인 주체중심주의를 벗어나는 데 있는 주근옥 시의 발생적 맥락만을 우선 주목하기로 한다. 그의 시편들 속에는 주된 화제로서 다양한 자연의 형상들과 주체의 양태(mode)들이 등장하고 있다. 그리하여 주근옥 시의 퍼소나는 “지천명을 넘기고/이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나는 아직도 일 학년”(「다시 일 학년이 되어」)인 듯하고, “아버지, 처음으로 느끼는/체온이 뼛속으로”(「櫛來」) 느끼며, “하나 더하기 하나는 몇입니까/나는 오십이 다 되어/처음 자신 있게/―하납니다”(「더하기」)처럼 동일성의 논리를 부정하는 존재로 변모된다. “하늘과 산과/호수 위에도//노을은 지지 않고/내 앞에 앉아”(「내 앞에」) 노는 형상은 어떠한가. 인간을 중심으로 자연을 이원화하고, 개체의 사유로써 대상을 동일화하는 방식과는 이질적인 주근옥 시의 수사를 역시 보게 된다. 이러한 친자연적이고 탈주체적인 형상들로써 주근옥 시의 입론이 전통적인 목가적 상상력에 그치지 않는 ‘계산된’ 태도임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3 실로 그 과정은 시적 소재의 외형상 친밀함과는 이질적이며 의도적인 주근옥식의 내면화를 기도하고 있다. 한편 그것은 수박값을 흥정하는 전복된 계산을 통해서 소극화되기도 한다.
수박 한 통에 얼마랑가 이천 오백 원짜린디 이천 원만 주시게라 이왕이면 삼천 원 받으쇼잉 농담 말고 가져가시게라 삼천 원 아니면 안 가져가겠당께 …(중략)… 깎아준다는디도 안 판다니 두 사내가 수박을 밟고 서서 씩씩거린다 ―「수박」 부분
덜 받겠다는 수박 장수와 더 주겠다는 손님이 입씨름을 벌이는 이런 장면은 분명 전도된 풍경이다. “깎아준다는디도 안 판다니” 라는 비문법 역시 이 작품의 전도성을 읽는 또다른 재미일 수 있다. 단순한 오기(誤記)일 수 있는 이 행은, 사투리의 외형 이외에도 ‘팔다’를 ‘사다’로 혹은 ‘깎아주다’를 ‘더주다’로 교체하는 일상적 어법의 파괴를 통해 자동화된 사고를 지연시키는 효과를 수반하는 바 오히려 ‘명기(明記)’가 되기도 한다. 요컨대 「수박」에서는 보편화된 자본의 논리와 이로 인한 세상사의 각박함을 상상의 풍경으로써 위안받고자 하는 심정을 엿볼 수 있으며, 그것이 곧 이 작품이 주는 웃음의 의미일 것이다. 또한 주근옥 시는 짐짓 관찰자의 시점으로 삶의 허망함을 비극화되기도 한다.
그 짐이 점점 커져 가게를 사서 부려 놓고 그 비단가게 더 점점 커져 읍내에서 제일 큰 극장이 되고, 대전의 빌딩이 되고 슬슬 바람도 핀다는 유언비어가 나도는 어느 날 그는 쓰러졌다, 남들 다 가는 평양구경 본처 상봉 못하고 빌딩의 주인은 그의 부인 이름으로 바뀌고 소달구지 끌고 매형 집을 오가던 그의 처남은 극장 주인이 되었다, 달아 달아 노오란 강냉이 시멘트 물 바닥에 낳은 개구리 알 속의 보름달아 ―「튀밥 장사 어 서방」 부분
젊은 날의 모든 고생을 바쳐 오른 “빌딩의 주인” 자리를 제대로 영위하지 못한 채 쓰러져갈 수밖에 없었던 기구한 ‘어 서방’의 인생은 결코 어 서방만의 것이 아니다. 여기서 상징적으로 드러난 인생의 아이러니가 어찌 특정 인물만의 그것일 수 있겠는가. 물론 이 작품에는 오랜 세월 같이 한 삶을 통해 관찰된(“우리 집 앞마당 판잣집에 살던 어 서방”) 시적 진실이 있다. 화자는 그러한 삶의 이력을 개인의 묘비명으로 한정하지 않는다. 종결부에서 처리되고 있듯이 이 작품은 “시멘트 물 바닥에 낳은 개구리 알 속의 보름달”처럼 흔한 풍경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며, 그에 담긴 슬픔의 정조를 회색의 색채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적 문맥에서 감추어진 시선과 외화된 형상 사이에는 치밀한 계산이 존재한다. 안팎의 현실을 적절히 조율하는 거리화된 포즈야말로 시를 주조하는 주근옥의 태도라 할 만하다.
도깨비 채송화 개망초꽃 간월도에도 월리사 마당에도 달은 없고 승용차만 서 있구나 횟집에 앉아 국물을 마시며 이마의 땀을 닦는 사람아 거울 속의 내 머리통인가 조금은 찌그러졌구나 ―「달달 무슨 달」 부분
따라서 주근옥 시의 풍경은 단지 풍경으로 그치지 않는다. 달이 사라지고 승용차만 가득 찬 문명의 마당인 풍경을 묘사하는 위 작품에서도 시인의 현실 감각을 볼 수 있다. 전도된 풍경을 바라보는 화자의 착잡한 심정은 “거울 속의 내 머리통인가/조금은 찌그러졌구나” 라는 독백으로 표현된다. 이렇게 자연과 문명이 만나고, 그들이 화하여 펼치는 현실의 이상과 반목이 정제된 형식을 통해서 상징화되는 것이 주근옥의 주된 시법 중 하나이다. 또한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언어와 사유 자체가 찌끄러질 수 있다는 모티프이다. 언어라는 기호는, 이를 주조하는 인간의 사유라는 의식 체계는 결코 완전한 것일 수 없다. 주근옥 시의 기호들이 항상적 미결을 수반하면서도 그것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지향하는 것 역시 결국은 찌그러진 거울과 그 속에 비친 머리통처럼 완전할 수 없는 언어와 사유를 인정하는 태도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한 계산이 닿는 피치 못할 대상으로 정체성의 영역을 들 수 있다. 우리는 시집 곳곳에서 주근옥의 시적 자아가 당면한 아픔의 깊이를 체감할 수 있다. 예컨대 「더하기」 「밤을 새우고」 「오십견」 「러닝셔츠」 등의 작품을 통해서 자아의 정체성을 확인하고자 하는 시적 고뇌를 들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극한 자존과 결백의 삶을 「솔새의 똥을 받으며」 「내 앞에」 등의 시편들은 고백하고 있다. 유년의 기억이나 추억의 풍경으로 오늘의 삶과 자기 정체성을 반추하는 형식이 눈에 띄는 것도 동궤의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다시 일 학년이 되어」 「강을 바라보며」 「松風庵에 가고 싶네」). 그러나 그것은 앞에서도 살펴본 바 있듯이 완성된 자아라는 지향점을 향하지 않는다. 오히려 탈개체적이고 비동일화를 인정하는 관점에서 정형의 한계를 벗어나고자 하는 고투의 흔적들이 곧 자성(自省)의 시편들이라 하겠다. 그러기에 더욱 괴롭고 한 편의 결론은 여지없이 미끄러진다. 그 절정은 환상의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심리극이라 하겠는데 「문」은 전형적 예시가 될 수 있다.
사내가 첫째 문에서 나와 둘째 문으로 들어가고 셋째 문에서 나와 넷째 문으로 들어가고 다섯째 문에서 나와 여섯째 문으로 들어가고 일곱째 문에서 나와 두리번거린다
누군가 첫째 문을 열고 부르셨습니까 둘째 문을 열고 부르셨습니까 …(중략)…
사내는 차례차례 쫓아가 무릎 꿇고 빈다 그 분 어디 계십니까 손가락질만 해 주십시오 눈짓만이라도 해 주십시오 일곱 개의 문이 쾅 닫힌다 사내는 금시 허물어진다 ―「문」 부분
이와 같은 「문」의 전개는 이상(李箱) 이래 자아의 혼란과 심리적 고뇌를 다루는 일반적 문법 중 하나가 되어 왔던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이 작품이 이상과 같은 철저한 자의식의 세계로 한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일곱 개의 문”이 지니는 상징 역시 「문」만의 것이지만, 그 외에도 이 시는 “서서히 무대가 밝아지며/상상의 아파트 현관문을 사이에 두고” 있노라는 배경이 가시적으로 제시되는가 하면, 무대의 주인공은 노숙 생활을 하고 돌아온 해고 근로자 ‘이억만’과 남편을 알아보지 못하는 아내 ‘하말순’임이 명명되고 있다. 이들의 이야기는 비록 환상의 무대 위에서 “일곱 개의 문이 쾅” 닫혀버리는 절대 단절을 경험하지만, 그러한 단절을 계기하는 현실적 삶이 또한 구체적 형상으로 매개되어 있다는 점에서 사회극적 요소를 지니기도 하는 것이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는 “상상의 현관문” 앞에서 우리는 이억만과 함께 “계속 문을 쾅쾅 두드”리며 정체성을 찾아나가고자 한다. 이처럼 주근옥의 시선은 현실의 내면화를 통한 긴장의 시편들을 빚어내고 있다. 시집의 말미에 실린 장시 「풀무가 序詩」는 역사와 민족 정체성으로 관심의 영역이 이전해간 결과라고 하겠다. 이 작품은 8연 289행에 이르는 규모의 민족 서사시라 할 수 있다. 민족의 역사와 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서시’의 뉘앙스를 넘어 장구한 민족의 알맹이 정신을 시 속에 형해시키고자 한 야심찬 의도를 담고 있다. 그리하여 이 작품은 1연의 단군 탄생으로부터 고주몽, 혁거세, 문무왕과 김유신, 서동과 선화 공주, 왕건, 전봉준에 이르는 파란한 역사의 정신을 그리게 된다. 그 과정에서 운율을 지키려는 패턴이 반복됨으로써 시적 긴장이 떨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판의 주술로써 민족의 정체와 기상을 담아내려 하고 있으며, 종연에 이르러서는 전봉준의 죽음을 형상화하면서 “오오 파랑새가 된 넋/새야 새야 파랑새야/전주 고부 녹두새야/어화어화 어너리 넘자 어여라/저 건너 불머리 쾅쾅 굴러라” 하는 여전한 진행형의 담금질을 종용하고 있다. 「풀무가 서시」와 같이 일견 과잉한 듯한 주근옥의 의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 편의 시에 민족의 역사를 통째로 그려내며 풀무의 노래를 시도하는 과감함이 지닌 효과는 무엇인가? 이는 시를 읽는 독자로 하여금 기호를 넘어서는 잉여의 의미를 상상하게 만드는 주근옥 시의 장치라 할 수 있다. 현실을 반향하는 내면은 하나의 정체를 반성하며 오히려 그것을 해체한다. 또한 역사를 관통하며 언어가 담지 못하는 미결의 의미를 지향한다. 주근옥 시는 이른바 기교와 재기가 범람하는 오늘의 시단에 울리는 만파식적(萬波息笛)의 가무를 의도하고 있는 것이다.
4 이제 우리는 이 시집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작품들인 단시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소절(素節)이라 일컬어지는 3행의 단시들은 「감을 우리며」(1988) 이래 시인의 주된 관심 대상이 되어 왔다. 이들 작품은 대개 2음보 1행의 지극히 짧은 형태로서 전통적 율격과 위배되면서도 의도적으로 자수를 제한하는 엄격한 정형의 형식을 시종일관 유지하고 있다. 그리하여 자연과 풍경을 있는 그대로 형용하되 의미의 단절과 비약을 도모한다. 짧은 행간 사이에는 묘사의 의미망을 넘어서는 무엇, 즉 기의적 차원을 넘어서 새로운 의미 연쇄를 허여하는 기제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짐짓 평범하면서도 정해진 기의에 닿지 못하는 기표들의 연쇄 효과를 의식한 시화가 2부에 집중된 3행 단시들의 집합이라 할 수 있다.
쓰러진 팔레스타인 시체 머리 위로 스쳐 지나가는 수녀님의 가린 코와 입과 눈 ―「코와 입과 눈」 전문
이 작품은 팔레스타인의 비극을 “스쳐 지나가는” 수녀의 모습에 대한 형상화이다. 짧은 형식의 정제된 표현 속에는 유사 이래 그쳐본 적이 없는 인종과 국가간의 대립이 소재화되고 있으며, 종교적 형이상학과 현실 사이의 어찌할 수 없는 간극이 설정되어 있다. 지금도 걸프만에서 쏘아올리는 미 항모의 미사일들은 성지 바그다드를 초토화시키고 있다. 「돌멩이」에서의 소년의 비극 역시 유사한 ‘간극’을 담고 있는데(“이스라엘 총구 앞에서/힘껏 던지려고 벌린/소년의 팔과 돌멩이”), 이러한 현실을 바라보는 태도는 철저한 형식화의 의도에 의해 내밀도의 긴장으로 응축된다. 그런 긴장은 정형의 틀이 지니는 세계관의 한계를 벗어나고자 한다는 점에서 현재적 담론으로 기능할 수 있다. 소위 내용과 형식의 이분법이 깨어지는 새로운 표현을 지향하고 있는 차원인 것이다. 이처럼 그의 기표체계는 전(前)기표적이고 반(反)기표적인 기호체계를 지향한다. 주근옥의 시편들은 이렇듯 현실의 내면화라고 하는 긴장의 조율이 전제되어 있다. 「코와 입과 눈」이나 「돌멩이」 등은 현실의 모순과 비극을 다루고 있는데, 그 외 자연에 대한 관찰과 묘사가 3행 단시의 주종을 이룬다 하겠다.
신축 빌딩 용접공을 올려다보고 있는 누렁이 목덜미 상처에도 눈발이 ―「눈발」 전문
「눈발」은 주근옥의 3행 단시가 전개되는 방식을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눈발이 날리는 풍경은 ‘신축 빌딩 용접공’과 그를 ‘올려다보고 있는 누렁이’ 사이의 긴장 속에서 전혀 색다른 내용으로 전화된다. 또한 그 누렁이의 ‘목덜미 상처’에 담긴 아픔의 흔적이 새로운 의미망을 개방한다. 따라서 「눈발」의 눈을 매개로 한 장면은 겨울날 흔히 볼 수 있는 설경의 의미를 넘어 용접공과 누렁이, 그리고 누렁이의 상처가 인과하는 새로운 의미의 영역을 추상화한 풍경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잉여적 의미의 생산이야말로 정형의 형식이 결코 한정하지 못하는 새로운 표현의 차원이라 할 수 있겠다.
창살에 붙은 배추벌레 고치에도 고드름이 매달려 ―「고드름」 전문
「고드름」 역시 외형상 드러나는 고드름에 대한 묘사가 주된 의도라 보기 어렵다. 고드름이 매달리는 대상은 “창살에 붙은/배추벌레 고치”라 하여 제목이 주는 상투적 지각작용으로부터 낯선 경험을 감각케 하는 것이다. 2행까지의 묘사 대상으로부터 3행의 단절을 시도하는 방식 역시 「누렁이」와 유사한 구조라 하겠다. 일상적 풍경을 소박하게 담는 겸양의 태도에는 내심 완고한 의도가 담겨 있다. 그 속에서 「고드름」은 새롭게 주조되고 있는 것임을 재삼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이 겨냥한 효과가 무엇인가는, 시인들에게 드문 일이긴 하나, “사실적인 랑그 차원의 사전적 의미를 잠재시키고 그 심층에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낼”(「자서」) 목적을 두고 있음이 이미 고백되어 있다. 2부에 실린 어떤 시들을 보더라도 표현과 의미의 상당한 격차를 느낄 수 있다. 소절이 주는 정제된 느낌은 기존의 언어관, 즉 기표의 제국을 겨냥한 치열한 게릴라전이 지극히 정제된 형식을 통한 교전임을 느끼는 형국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구조와 효과는 「도마뱀」에서도 반복된다.
전기 철조망에 걸려 죽은 도마뱀 뱃가죽에도 가랑비 ―「도마뱀」 전문
이 작품의 제목은 ‘도마뱀’이지만 전기 철조망에 걸린 비극적 운명과 그 배면에 뱃가죽을 적시는 가랑비가 등장한다. 역시 2, 3행에 걸쳐 “도마뱀/뱃가죽”의 생략된 조사라든가 “뱃가죽에도 가랑비”라는 급박한 의미 전환 혹은 명사형 종결은 얼마든지 이어질 또다른 풍경을 상상케하는 독특한 효과를 낳고 있다. 이처럼 3행 단시의 주조를 이루는 자연과 풍경의 소재들은 그것들이 놓인 자리와 기존의 퍼스펙티브를 가볍게 뛰어넘으며 새로운 의미를 생성해내고 있다. 그것이 짧은 정형의 형식을 통해 선문답처럼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주근옥의 시를 읽는 또다른 재미임이 분명하다. 또한 그러한 비약의 체험은 문명의 그늘에 가린 종달새의 운명처럼 무엇인가의 결여를 동반하고 있다. “강물이 불어오르”고 “강물 안으로 밀리”며 “뻐꾸기를 올려다보”아야 하는 “갈대 속의 비비새”처럼(「갈대 속의 비비새」) 주근옥의 선시들은 변하지 않는 정형의 형식에 갇힌 듯하지만, 경계의 속에서 경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삶과 시를 찾고자 한다. 주근옥 단시의 전략은 그리하여 정형을 통한 새로운 생성을 추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시적 묘사와 진술의 일반적 차원, 즉 시적 화행(話行)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면서 새로운 의미를 겨냥하는 방법이라고도 볼 수 있다. 여기서의 생성, 즉 정형의 형식이 결코 한정할 수 없는 미결의 의미망은 주근옥의 시가 굳이 화행의 효과를 거부하는 주된 이유가 될 수 있겠다. 그는 소위 자유시를 쓰면서도 지극한 정형성을 추구한다. 지금 다루는 소절의 시편들이 바로 그것이다. 언표행위(enunciation)에 대한 관심은 기표의 물질성, 즉 언어 이외의 것을 기표로 환원하는 ‘기호의 전권’을 거부한다. 사실 시는 동질적 체계로서의 언어, 정보적 매체로서의 언어를 뒤집는 ‘시적 언어’를 매체로 하며, 그리하여 개별적 화행으로서 혹은 무궁하고 독자적인 의미로서 그 근대적 존재 이유을 지닌다. 물론, 시적 의미와 시인의 상상력 사이에 궁극적 동일성을 상정하는 낭만주의로부터 일체의 객관적 문학성을 전제하는 형식주의적 관점이 실재하며, 그리하여 다성(多聲)이 원천봉쇄되는 부르주아적 장르로서 시의 선험적 한계를 선언하는 바흐친식의 비판이 무성하기는 하나, 근대 이래 시의 역사가 개별적 화행 추구의 역사였음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주근옥의 단시들이 내포하는 문제의식과 효과는 이중의 부정을 함의하게 된다. 정형을 통한 의미의 생성이 한 축이라면 화행 역시 언어를 매개하고 있다는 회의가 또다른 그것이다. 결국 언어는 완전할 수 없다는 믿음이 주근옥의 시가 발생하는 주요한 이론적 실천적 근거가 된다. 그러한 회의와 더불어 시에 대한 믿음, 시적 ‘표현’에 대한 완고한 믿음을 결합해야 하는 난제가 주근옥의 소절 시편들에서 풀리고 있음을 우리는 볼 수 있다. 일견 완곡한 어법의 근저에 수이 눈돌리지 않는 고집스러운 시선이 있다. 그의 시편들은 갈대 속에 웅크린 겸양의 낮은 자세로 그려지지만, 한껏 날아오를 비비새의 몸짓처럼 웅대한 비약을 지금 이 순간도 꿈꾸고 있다.
5 주근옥의 시에 대한 열정과 새로운 형식을 찾는 탐색은, 「갈대 속의 비비새」로 보건대, 그치지 않는 여정으로 계속될 것이다. 때로는 삶 속에 한 편의 요술상자처럼 “얏 하는 순간” 어느덧 “이제 육십 년이 다 되”(「상자」)어버리는 허망함이 왜 없으랴. 하지만 “무를 뽑아낸/구멍 속”의 그 허허로운 틈 사이로 “눈송이가/날아”(「무」)듦을 직시하는 자세야말로 주근옥의 시를 존재케하고 새롭게 추동하는 샘과 같다. 부정 속에 긍정이 있고 정형을 통해 미결의 의미망을 허여하는 그 극한의 절제된 노력을 통해 새로운 시의 경지를 기대해 본다. 과연 그의 시들은 내용과 표현이 기의와 기표 관계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들뢰즈식의 입론을 철저히 추구하고 있는 듯하다. 그리하여 그의 시들은 기표의 제국을 벗어나는 데 성공하고 있는가? 내용과 형식으로 환원되지 않는 새로운 표현의 영역을 3행단시를 비롯한 계산된 기호들은 거느리고 있는가? 이에 대한 결정을, 지금 이 자리에서, 기대한다는 것 역시 하나의 형식논리임을 주근옥의 시들은 암암리에 증거한다. 인간의 언어를 비웃으며 기호들의 자유를 향하는 자와 그 시들에게 어떤 선언이 가능하겠는가. “신록을 보며 걷다가/화염에 불이 붙어/날뛰는 노파”(「신록을 보며」)의 열정과 신기만이 그 ‘날뛰는’ 기호들의 배치를 응시할 뿐이다. 결코 쉽지 않을 그 여정에 잠시 틈나는 때가 있다면, 보다 따스한 겸양의 미덕을 부디 이론으로부터 풀어놓기를 우리는 바란다. 다소 어눌하고 솔직한 면면이 때로는 사람 사는 모습의 생기를 느끼게 하듯이, 두 번 세 번 완고하게 겹쳐진 기호의 그늘은 전혀 다른 식의 계기, 예컨대 정을 그리는 동기가 되기도 할 터이다. 더더욱, 본의와는 전혀 다르게, 우리는 역시 그의 기호들이 소위 보편적 문체로 유지되고 있음을 본다. 기의로 환원되는 기표의 위상을 재고하자는 형상들이 오히려 중심의 형식을 거느리고 있는 아이러니. 그의 시가 소절만을 집중하지 말아야 할 하나의 이유가 되지 않을까 하는 우문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시문학 통권 제383호, 2003. 06. 01).
참고자료 SUR LES ROUES/Gueune-Ok JOUH 구조의미론(Structural Semantics); A.J.Greimas/주근옥 역 의미론선집(On Meaning); A.J.Greimas/주근옥 역 정념의 기호학(The Semiotics of Passions); A.J.Greimas, Jacques Fontanille/주근옥 역 미니멀리즘; C.W. 할렛, 워런 모트/주근옥 역 주근옥의 미니멀리즘 시선집 한국시 변동과정의 모더니티에 관한 연구_주근옥 한국 현대시사에 대한 철학적 고찰의 빛나는 성과_장수익(한남대 국문과 교수)
* 주근옥의 홈페이지 http://www.poemspace.net/ (새가 나오면 클릭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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