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29일~30일 까지 1박2일로 맹자학당 벗들이 ‘조선의 정신 양백지간에서 발흥하다’라는 주제로 경종대왕 태실 - 도담삼봉 - 온달산성 - 어의곡리 - 소백산 트래킹 - 베틀재 - 부석사 -성혈사 - 소수서원 소백산 주변을 다녀왔다.
2013년 7월 29일 새벽 5시 30분에 청소년수련관에서 출발했다. 첫 번째 목적지는 충북 충주시 엄정면에 위치한 경종대왕 태실이었다.
▲ 서오릉에 있는 장희빈의 대빈묘 © 시흥시민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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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대왕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경종의 어머니 장희빈이다. 조선시대 여성 중에 가장 낮은 자리에서 높이 오른 여인이며, 그녀의 삶 자체가 반전에 반전을 하는 극적 요소가 가장 많은 삶이었기에 현대에도 시대의 아이콘인 여인이 장희빈의 역을 맡으면서 시대의 악녀와 요부에서 자신의 삶을 가장 치열하게 살아낸 여인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이는 앞으로도 시대에 맞는 또 다른 장희빈이 계속 태어날 것이다.
▲ 망초꽃이 흐드러지게 핀 경종대왕 태실 오르는 길 ©최영숙 |
| 경종대왕의 태실로 오르는 산길은 온통 망초꽃밭이었다. 경종대왕 태실은 1975년 8월 20일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6호로 지정되었다. 태봉(胎峰)에 위치한 조선 제20대 왕인 경종(景宗:1688~1724)의 태를 안치한 태실로 그가 태어난 이듬해인 1689년(숙종 15) 10월에 건립되었다. 경종은 숙종(肅宗)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희빈장씨(禧嬪張氏)이다. 1688년(숙종 14)에 태어나 이듬해에 세자로 책봉되고 1720~1724년까지 재위(在位)하였다.
경종이 일찍 죽자 1726년(영조 2) 9월 8일 영조는 선왕의 태실을 웅장하게 꾸미고 태실비를 세워 순호군(巡護軍) 16명이 지키게 하고 3년마다 안위제(安慰祭)를 지냈다.
1831년(순조 31)에 도굴된 적이 있고 1928년에는 조선총독부에서 태실의 관리와 유지가 어렵다는 이유로 전국의 태실을 창경원(창덕궁) 안으로 옮겼다. 이때 경종의 태실도 파헤쳐져 태항아리는 옮겨지고 석조물들은 훼손된 상태로 방치되다가 1976년에 중원군(지금의 충주시)에서 복원하였다. 태실은 원형 대석(臺石) 위에 종처럼 생긴 탑신석을 놓고 그 위에 모임지붕처럼 생긴 팔각형 옥개석을 올린 석종형부도(石鐘形浮屠) 형식이다. 옥개석의 윗면(낙수면)에는 합각선이 뚜렷하고 꼭대기에는 보주(寶珠:탑의 상륜부에 있는 구슬 모양의 장식)를 조각하였다.
태실 주위에는 여러 모양의 석재들로 가구(架構)한 8각형 석조난간(欄間)이 둘러져 있다. 태실 앞에는 1726년(영조 2)에 세워진 경종대왕태실비가 서 있는데 귀부와 이수가 잘 갖추어졌다.
도담삼봉으로 가는 길에 반야월 선생의 울고 넘는 박달재로 유명한 박달재 고개를 잠시 들렀다.
박달재는 충청북도 제천시의 서쪽에 있는 고개이다. 봉양면 원박리와 백운면 평동리 경계에 걸쳐 있으며, 박달치 · 박달령 · 박달산(500m)이라고 전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동람도」에는 청풍의 남쪽에 박달산(朴達山)이 월악산과 함께 표기되어 있다. 동일 문헌에 "박달산 현 서쪽 35리에 있다. 공전사(公田寺)가 박달산에 있다."라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해동지도』에는 제천현 근우면과 원서면 사이에 박달치로 표기되어 있다. 『여지도서』(제천)에는 근우면과 원서면 사이에 박달산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현의 서쪽 35리에 있다. 주유산의 남쪽 줄기이다. 바로 고려 때 김취려가 거란군을 막았던 곳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조선지도』에는 고교천과 부산 사이에 박달치로 표기되어 있으며, 『1872년지방지도』에는 서면에 박달령으로 표기되어 있다.
박달은 밝달을 한자로 옮긴 백산(白山) 혹은 백 뫼에서 유래된 것으로, 음독 중심의 이두식 지명이다. 『제천 · 제원사』에 의하면, 지명의 유래와 관련하여 박달과 금봉의 전설이 전해진다. 즉, "경상도의 젊은 선비 박달이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으로 가던 중 백운면 평동리의 한 농가에 묵었고, 그 집의 딸 금봉과 사랑에 빠져 과거에 급제한 후 함께 살기를 약속했다. 그러나 박달은 과거에 떨어져 평동에 돌아가지 못했고, 금봉은 박달을 기다리다 상사병으로 한을 품은 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며칠 후 평동에 돌아온 박달은 금봉의 죽음을 슬퍼하다 금봉이 고갯마루를 달려가는 모습을 보고 금봉을 잡아 껴안았으나 낭떠러지로 떨어져 죽었다. 이에 사람들은 박달이 죽은 고개를 박달재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꼬마 신선 박달과 꼬마 선녀 금봉은 현재 제천시를 상징하는 캐릭터이다. 관련 지명으로 박달재 터널이 있다.
▲2012년 3월 30일 반야월 선생 장례 행렬이 '울고 넘는 박달재'에 잠시 머물었다. ©최영숙 |
| 박달재에 오르니 이곳저곳에서 울고 넘는 박달재 노래가 흘러나왔다. 여러 가수 들이 부른 다른 느낌, 같은 노래가 들려왔다. 2012년 반야월 선생의 장례식 사진을 담았을 때가 생각났다.
울고 넘는 박달재 / 박재홍
천둥산 박달재를 울고넘는 우리임아 물항라 저고리가 궂은비에 젖는구려 왕거미 집을 짓는 고개마다 구비마다 울었오 소리쳤오 이 가슴이 터지도록 부엉이 우는 산골 나를 두고 가는 임아 둘아올 기약이나 성황님께 빌고가소 도토리 묵을 싸서 허리춤에 달아주며 한사코 우는구나 박달재의 금봉이야
<울고 넘는 박달재〉는 대한민국 건국 직후인 1948년 박재홍이 부른 트로트 곡이다. 반야월 작사, 김교성 작곡의 곡으로, 발표했을 때부터 인기를 끌며 박재홍은 대스타가 되었고 노래에 담긴 서민적인 정서가 공감을 얻어 이후로도 오랫동안 애창되고 있다. 반야월이 악극단 지방순회 공연 중 충주에서 제천으로 가는 길에 농부 내외인 듯한 남녀의 이별 장면을 목격하고 작사했다는 일화가 있다.
반야월 선생은 제천시가 추진 중인 ‘한국 가요 100년사 기념관’이 완공시기에 박달재 정상에 유골을 함께 묻힐 예정이라고 한다. 반야월 선생의 유골이 제천에 안치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반 선생의 고향 마산시에서는 ‘수목장은 고향에서 치르도록 해달라”고 요구한다고 한다.
울고 넘는 박달재를 지나 도담삼봉으로 향했다. 도담삼봉은 충청북도 단양군의 매포읍 도담리에 위치하며 단양 8경 중의 하나로 남한강 가운데 솟아 있는 세 개의 봉우리이다(고도:148m). 『신증동국여지승람』(단양)에 "도담(島潭)이 군 북쪽 24리에 있다. 세 바위[三巖]가 못 가운데 우뚝 솟아 있고, 도담에서 흐름을 거슬러서 수백 보쯤 가면 푸른 바위[蒼壁]가 만 길이나 된다. 황양목(黃楊木)과 측백(側柏)이 돌 틈에서 거꾸로 났고, 바위 구멍이 문과 같아서[巖穴如門] 바라보면 따로 한 동천(洞天)이 있는 것 같다."고 수록되어 있다. 도담삼봉과 함께 석문에 대한 기록이 처음 나타난다. 같은 책에 도담삼봉을 삼도(三島)로 표현한 김내문(金乃文)의 시도 소개되어 있다.
도담리쪽 강가에서 볼 때 상류쪽인 왼편에 있는 봉우리가 '첩봉' 또는 '딸봉'이고, 하류쪽인 오른편 '북봉'을 '처봉' 또는 '아들봉'이라고 한다. 중봉을 '남편봉' 혹은 '아버지봉'이라 부른다. 세 봉우리 가운데 가장 높은 중봉에는 현재 '삼도정'이라는 육각의 정자가 세워져 있다.
조선의 개국공신 정도전(鄭道傳)은 도담삼봉과 이웃한 지금의 단양읍 도전리에서 태어났고 도담삼봉에서 아호를 따서 삼봉이라 하였다. 도담삼봉의 유래에 대해서 정도전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진다. 도담삼봉은 원래 강원도 정선군의 삼봉산이 홍수 때 떠내려 온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매년 정선에 세금을 내고 있었는데 소년 정도전이 "우리가 삼봉을 정선에서 떠내려 오라 한 것도 아니오. 오히려 물길을 막아 피해를 보고 있으니 도로 가져가라."고 한 뒤부터 세금을 내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는 격동의 시기에 이성계와 함께 조선을 건국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그러나 자신이 꿈꾼 성리학적 이상세계의 실현을 보지 못하고 정적 이방원에 의해 피살되었다. 신원이 복원되지 못했다. 고종 때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경복궁 설계 등에 참여한 정도전의 공을 인정하면서 복원되었다. 정도전은 삶과 죽음 복원까지 고려와 조선 두 왕조의 마지막과 처음을 함께 했다.
정도전은 이색의 문하에서 정몽주·이숭인·권근·이존오 등과 어울려 경서·사기에 대해 토론하며 지식을 넓혔는데, 특히 삼봉은 문장에 능하고 성리학에 밝았다. 공민왕 11년(1362)에 진사시에 급제하고 이듬해 충주사록에 임명되어 관직을 시작한 후 방원과 방석의 왕위싸움에 말려들어 방원을 죽이려 한다는 오해를 받아 억울한 죽임을 당하기까지 36년 동안 파란 많은 역정을 보냈다.
정도전은 충주사록에 임명되었다가 공민왕 15년(1366) 부모상을 당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이후 4년 동안 부모상을 치르면서 삼봉과 영주에서 학문과 후세교육에 힘썼다. 이 때 조선을 이끌어 나갈 정치이념을 세우기로 결심하고, 각종 서적을 탐독했고 정독했다. 정몽주 선생이 보내준 맹자를 하루 1장, 또는 반 장 이상을 읽지 않았다고 한다. 공민왕 19년(1370)에는 성균관 박사에 임명되어 우왕에게 대학을 강의하기도 했다. 이때는 고려 조정에서 친명파와 친원파의 대립이 심했고, 사상적으로도 억불숭유(抑佛崇儒) 흐름이 나타나고 있었다. 이때에 정도전은 불교적인 관념사회를 유교적인 현실사회로 이끌어 가는데 앞장서는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다. 귀양 당시 쓴「심문천답」,「심기리편」,「불씨잡변」등의 내용은 당시 사회병폐가 불교의 비현실적인 풍조 때문으로, 유교적인 이념만이 사회를 혁신하는 가장 좋은 길이라는 주장을 담고 있다.
이러한 주자학 이념에 기반을 둔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시켜줄 만한 인물을 찾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이성계였다. 1388년 요동정벌에 나선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최영을 죽이고 권력을 잡자 정도전은 우군총제사가 되어 친원파를 몰아내고 조선 개국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정도전은 자신을 한 그루 소나무에 비유하며 이성계에게 개국에 참여 의사를 비쳤다는 시가 한 수 전해온다. ‘창망한 세월에 한 그루 소나무 청산에 자라서 몇 만 겹인가? 다른 해가 있다면 서로 만날 수 있을까? 인간사는 곳이면 어디든 따르리(蒼茫歲月一株松 生長靑山幾萬重 存在他年相見否 人間府伊使陳從)’ 공양왕 2년(1390) 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이성계가 명나라를 공격할 의향이 없음을 밝히고 돌아왔다. 그러나 삼봉은 그의 급진적인 사상과 주저 없는 대담한 성격으로 인하여 구세력인 정몽주에게 몰려 다시 봉화로 귀양을 갔다. 2년 뒤 한 때 풀렸으나 다시 예천옥에 갇혔고, 정몽주가 이방원에 의해 죽임을 당한 뒤에야 다시 풀려나 조선의 개국에 앞장섰다.
태조 2년(1394) 서울을 한양으로 옮길 것을 주장하여 뜻을 이루자, 모든 제도를 새롭게 하여 국가기틀을 다졌다. 이 해「조선경국대전」을 지어 조선의 문물제도를 새롭게 만드는데 공헌하였고 다시 이듬해 정총(鄭摠)등과 더불어 『고려사』 37권을 지어 태조에게 바쳤다. 태조 6년(1398) 조선에서 올린 글이 명나라를 업신여기는 문구가 있다 하여, 명나라가 그 글을 쓴 공부·윤순 등을 명나라로 보내라고 하자 정도전은 명나라가 조선을 너무 업신여긴다고 분개하여 명나라를 칠 것을 주장하고 군사훈련과 군량미 비축에 힘을 기울이다가 태자 방석과 방원의 왕위 계승 싸움에 말려 방원의 습격을 받아 죽음을 당했다. 삼봉 정도전은 여말선초 격동기 속에서 자신의 혁신적인 사상을 펼쳐 조선의 새로운 제도를 마련하는데 크게 공헌한 사상가요, 정치가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즉 여말선초의 격변기에 꼭 필요했던 혁명가였던 것이다. 단양읍내로 들어가는 상진리 근린공원에는 그의 뜻을 기리는 삼봉정도전선생숭덕비가 건립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정도전의 복원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高宗 2卷, 2年(1865 乙丑 / 청 동치(同治) 4年) 9月 10日(壬申) 3번째기사 대왕대비가 정도전에게 공로를 회복시켜주고 시호를 추증하라고 명하다 대왕대비(大王大妃)가 전교하기를,
“법궁(法宮)의 전각(殿閣)들이 차례로 완성되었다. 정도전(鄭道傳)이 전각의 이름을 정하고 송축한 문구를 생각해보니 천 년의 뛰어난 문장으로서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무학 국사(無學國師)가 그 당시 수고를 한 사실에 대해서는 국사(國史)나 야승(野乘)에 자주 보이는데, 나의 성의를 표시하고 싶어도 할 곳이 없다. 봉화백(奉化伯) 정도전에게는 특별히 훈봉(勳封)을 회복시키고 시호(諡號)를 내리도록 하라. 그리고 해조로 하여금 봉사손(奉祀孫)의 이름을 물어서 건원릉 참봉(健元陵參奉)으로 의망하여 들이도록 하라.”하였다. 정도전은 자신을 한 그루 소나무에 비유하며 이성계에게 개국에 참여 의사를 비쳤다는 시가 한 수 전해온다.‘창망한 세월에 한 그루 소나무 청산에 자라서 몇 만 겹인가? 다른 해가 있다면 서로 만날 수 있을까? 인간사는 곳이면 어디든 따르리(蒼茫歲月一株松 生長靑山幾萬重 存在他年相見否 人間府伊使陳從 다음 행선지인 온달산성으로 향했다. 온달과 평강공주의 이야기를 삼국사기에 실린 대로 읽는 재미는 남달랐다. 온달전의 전문을 옮겼다.
三國史記 卷第四十五 列傳 第五 온달(溫達)전에 의하면
온달 (溫達 은 고구려 평강왕 (平岡王:평원왕) 때의 사람이다. 용모가 못 생겨서 우스울 정도였지만, 마음속은 환하고 똑똑했다. 집이 매우 가난하여 항상 음식을 구걸해서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너덜너덜한 옷을 입고, 해진 신발을 신은 채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을 왔다 갔다 하였으니, 당시 사람들이 그를 보고 ‘바보 온달 (愚溫達)’이라고 하였다. 평강왕 의 어린 딸은 잘 울었다. 왕이 놀리며,“너는 항상 울어서 내 귀를 시끄럽게 하는구나. 어른이 되면 사대부(士大夫)의 아내가 되기는 어렵겠다. 마땅히 ‘바보 온달 ’에게 시집가야겠구나.”라고 하였다. 왕은 늘 이처럼 말하였다. 왕의 딸이 16세가 되자, [왕은 그녀를] 상부(上部) 고씨(高氏)에게 시집보내려고 하였다. 공주(公主)가 대답하였다.
“대왕(大王)께서는 항상 말씀하시기를 ‘너는 반드시 온달 의 아내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어찌 그 말씀을 고치려 하십니까? 평범한 사내도 말을 반복하지 않는데, 하물며 임금께서는 어떻겠습니까! 그러므로 ‘임금은 실없는 말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대왕의 명령은 잘못되었습니다. 저는 감히 명령을 받들 수 없습니다.” 왕이 화를 내며, “네가 나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고 한다면, 진실로 나의 딸일 수 없다. 어찌 같이 살 수 있겠는가! 마땅히 네 갈 곳으로 가거라.”고 하였다. 이에 공주(公主)는 값비싼 팔찌 수십 개를 팔꿈치에 걸고서 궁을 나와 홀로 갔다. 길에서 한 사람을 만나 온달 의 집을 물었다. 이에 온달 의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온달의] 장님인 늙은 어머니를 보고, 가까이 다가가 절을 하고, 그 아들이 있는 곳을 물었다. 노모가 대답하였다.
“내 아들은 가난하고 또한 누추합니다. 귀한 분께서 가까이 할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지금 당신의 냄새를 맡으니 향기로운 것이 범상하지가 않고, 그대의 손을 만져보니 부드러운 것이 마치 솜과 같습니다. 반드시 천하(天下)의 귀한 분이실 겁니다. 누구의 속임수에 빠져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아마도 내 자식은 굶주림을 참지 못하고, 산 속으로 느릅나무 껍질 을 가지러 간 듯한데,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공주(公主)는 집에서 나와서 산 아래로 갔다. 느릅나무 껍질을 메고 오고 있는 온달 을 보고, 공주(公主)는 그에게 [자신이] 품은 생각을 이야기하였다.
온달 은 얼굴빛을 바꾸며,
“이는 어린 여자가 마땅히 할 행동이 아니니, 분명히 사람이 아니고 여우귀신일 것이다. 나에게 다가오지 마라!”고 말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갔다. 공주는 홀로 돌아와 사립문 아래에서 묵었다. 아침이 밝자, 다시 집안으로 들어가 온달 과 그 어머니에게 자세히 말하였다. 온달 이 우물쭈물 결정을 내리지 못하자 그 어머니가 말하였다.
“제 자식은 매우 누추해서 귀하신 분의 배우자가 되기에 부족하고, 저희 집은 지극히 가난하여 진실로 귀하신 분이 계실 곳이 되지 못합니다.” 공주가 대답하였다.
“옛 사람들의 말에 ‘한 말의 곡식이라도 찧을 수 있고, 한 척의 베라도 꿰맬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진실로 마음을 같이 할 수 있다면, 어찌 반드시 부귀해진 다음에야 함께 할 수 있겠습니까?” 이에 값비싼 팔찌를 팔고 농지와 집, 노비 및 소와 말 그리고 그릇붙이를 구입하여 살림살이에 필요한 물품을 모두 갖추었다. 처음 말을 살 적에 공주(公主)가 온달에게 “시장 사람들의 말을 사지 말고, 반드시 국마(國馬) 중에서 병들고 쇠약해 내놓은 말을 골라서 사 오세요.”라고 하였다. 온달 은 그 말대로 하였다. 공주가 매우 열심히 기르니 말은 날마다 살찌고 건장해졌다. 고구려에서는 매년 봄 3월 3일 [註 001] 마다 낙랑 (樂浪)의 언덕에 모여 사냥하였는데, 잡은 돼지와 사슴으로 하늘과 산천(山川)에 제사를 지냈다.
그날이 되자, 왕이 사냥을 나갔고, 여러 신료와 5부(五部)의 병사가 모두 왕을 따랐다. 이때 온달 도 그동안 기른 말을 가지고 따라갔다.
온달은 말을 타고 달리는 데 항상 앞에 있었고, 사냥으로 잡은 동물 또한 많아서 [참석자 중] 비견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왕이 불러와 성명(姓名)을 묻고는 놀랐고, 또한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이때 후주 (後周) 무제 (武帝) 가 군사를 내어 고구려 (遼東) 를 정벌하고자 하였다.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이산 (肄山)의 벌판에서 맞아 싸웠다. 온달은 선봉(先鋒)이 되었는데 힘을 다해 싸워서 참수(斬首)한 것이 수십 급(級)이었다. 여러 군사들이 이긴 틈을 타서 맹렬히 공격해서 크게 이겼다. 전공을 평가하게 되자, 온달 을 첫 번째로 삼지 않는 이가 없었다. 왕이 기뻐하며
“이 사람이 내 사위다!”고 말하고, 예의를 갖추어 온달 을 맞이하였으며, 관작(官爵)을 주어 대형(大兄) 으로 삼았다.
이로부터 온달은 왕의 총애를 받아 부귀영화가 날로 더해갔고, 위엄과 권세가 매일처럼 높아졌다. 양강왕 (陽岡王:영양왕)이 즉위하자, 온달 (溫達)이 왕께 아뢰었다.
“생각컨대 신라가 우리 한북(漢北)의 지역을 빼앗아 군현(郡縣)으로 삼으니, [註 002] 백성은 몹시 가슴아파하며, 지금껏 부모의 나라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대왕께서는 저를 어리석다고 생각하지 않고 군대를 주신다면, 한 번 가서 반드시 우리의 땅을 되찾아 오겠습니다.” 왕이 허락하였다. 온달은 출정하기에 앞서 맹세하기를
“계립현 (鷄立峴)· 죽령 (竹嶺)의 서쪽 지역을 되찾아오지 못한다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하였다. 드디어 가서 아단성(阿旦城) 아래에서 신라군과 싸웠는데, 온달은 흐르는 화살에 맞아 쓰려져 죽었다.온달을 장사 지내고자 하였지만, 관(柩)이 움직이지 않았다. 공주가 와서 관(棺)을 어루만지며“죽음과 삶이 결정되었습니다. 돌아가시지요!”라고 하자, 드디어 [관을] 들어 묻을 수 있었다. 대왕이 이를 듣고 비통해 하였다.
삼국사기에 실린 온달전을 읽으면서 새로웠다, 바보스러워 보이지만 마음속은 환하고 똑똑했던 온달과 공주를 처음보고 어린 여자가 할 일이 아니라며 단호하게 돌아섰던 온달, 아들보다 과분한 여인이 며느리로 들어오는 것을 보며 두려워하는 온달의 어머니, 농담으로 말을 했다가 바보온달에게 딸을 시집보낸 평강왕, 아버지의 놀림을 그대로 믿고 바보온달에게 시집와 자신의 의지로 장군으로 새롭게 탄생시킨 평강공주, 온달장군이 되어 장렬히 전사했으나, 어머니는 장군보다 바보온달로 오손도손 살기를 원하지 않았을까 하는, 많은 이야기들이 이어서 생각이 났다.
사적 제264호. 1979년 지정. 성의 둘레 683m, 동쪽 높이 6m, 남북쪽의 높이 7∼8m, 서쪽의 높이 10m, 성의 두께 3∼4m. 영춘을 돌아 흐르는 남한강 남안의 산에, 길이 70cm, 너비 40cm, 두께 5cm 크기의 얄팍한 돌로 축성한 성으로, 약 100m 정도가 붕괴된 것 외에는 대체로 현존한다. 동 ·남 ·북 3문(門)과 수구(水口)가 지금도 남아 있다. 성내에는 우물이 있었다고 전하나 지금은 매몰되어 물이 조금 나올 정도이며, 곳곳에서 삼국시대 및 고려 때의 토기조각을 볼 수 있다.
온달산성에서 내려오는 길에 무지개를 만났다. 온달산성에서 만난 소낙비는 마음속 근심들까지 모두 씻어내는 듯했다. 여행의 즐거움은 이렇게 예견되지 않은 자연과의 만남이 아닐까 싶었다.
▲ 충북 단양군 가곡면 어의곡리의 계곡에 입수하다 ©하세용 |
| 온달산성에서 만난 소낙비 덕분에 일행들의 옷들이 모두 젖었다. 숙소로 이동했다. 충북 단양군 가곡면 어의곡리의 계곡의 물은 맑고 시원했다. 일행들은 계곡물에 입수했다. 여인들의 웃음이 계곡을 잠시 흔들었다. 소백산 자락의 밤하늘은 별이 총총했고 바람은 청량했다. 2013년 7월 30일 새벽 5시 일찍 일어난 일행들과 소백산 연화봉에 위치하고 있는 천태종 총본산 사찰인 구인사를 갔다. 구인사를 들어서면 마치 다른 세계로 들어선 느낌이 들었다. 중국 사찰에 들어온 듯 단층이 아닌 3~4층의 전각들이 다른 곳과 달랐다. 새벽에 왔음에도 사찰이 활기에 차 있었다. 구인사의 도서관이 인상 깊었다.
구인사는 고려 의천국사에 의해 중국에서 온 선과 교를 종합한 종파이다. 조선시대 상월원각 대조사에 의해 중창되어 맨 위의 대조사전에 모셔져 있다.
▲ 숙소인 자연의 집의 자연식 아침식사 © 최영숙 |
| 인심이 넉넉한 자연의 집 여주인은 토종닭으로 백숙을 해주었다. 아침식사는 이곳으로 안내해준 일행과 주인이 텃밭과 소백산에서 자란 야채들로 신선하고 담백한 음식을 만들어 주었다. 일행들은 감사한 마음으로 먹었다. 다음에도 또 머물고 싶은 숙소였다. 마구령으로 갔다. 백두대간 마구령은 부석사 인근 임곡리에서 남대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충북 단양군 영춘면과 강원 영월군 김삿갓면을 마주한다. 장사꾼들이 말을 몰고 다녔던 고개라 마구령(馬驅嶺)이라 하고, 경사가 심해 논을 매는 것처럼 힘들다 하여 ‘매기재’라고도 불린다. 그 이름만큼 고갯길은 험하다. 길은 좁고 발밑으로 깎아지른 벼랑이 아슬하게 서 있다. 돌고 도는 굽이마다 하늘이고, 돌고 돌아서면 좌우가 벼랑이다. 한고비를 넘으면 하늘에 성큼 다가서고, 한굽이를 돌면 하늘 끝에 닿는다. 마구령은 하늘로 오르는 고개다. 어느덧 하늘에서 내려가는 풍경은 오르는 것보다 훨씬 수려하다. 남대리에 내려서면 주막거리를 알리는 커다란 표지석이 발걸음을 세운다. 마구령을 넘어 다니던 행상과 선비들이 쉬어가던 주막이 꽤 번창했음을 넌지시 알려주는 지명이다. 산 너머 마을에 장이 서는 날이면 이웃의 단양과 영월 사람들이 나무와 약초 등을 지게에 지고 주막거리를 지나 고치령을 넘어 순흥장과 단산장을, 마구령을 넘어 부석장을 다녔다.
이곳 남대리는 영주 순흥면에 유배와 있던 금성대군이 ‘단종복위운동’을 주도할 때 병사를 양성하던 곳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오고, 단종이 잠시 머물렀다는 빗적거리에 단종쉼터와 단종대왕비가 조성돼 있다. 단종쉼터는 집 안에서 말하는 소리가 밖으로 새나가지 않아 ‘생방터’로 불리며, 단종의 수하와 금성대군 사이에 밀지가 오간 곳이라는 말이 전해 온다.
부석사로 왔다.
부석사는 의상대사(625~702년)가 신라 문무왕의 명을 받아 창건한 절이다. 그러나 원래의 건물은 거의 남아 있지 않고 현재의 건물은 대부분 복원한 것이다. 부석사(浮石寺)라는 이름에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의상이 당나라에서 유학하던 도중 당 관리의 딸이 그를 연모하게 되었다. 그녀는 의상에게 당이 곧 신라를 칠 것이라고 경고했고, 의상은 이를 고국에 알리기 위해 급히 귀국길에 올랐다. 처녀는 의상을 따라가기 위해 물가로 달려갔으나, 의상이 탄 배는 이미 뭍을 떠난 후였다. 그녀는 바다에 몸을 던졌고, 이를 보고 감명한 하늘은 그녀를 용으로 다시 태어나게 했다. 그후 당의 침략을 막은 의상은 이 절을 지었다고 한다.
수녀님들이 사진을 담았다. 수녀님들의 진지한 모습을 보는데 마음이 따뜻해졌다.
현재의 부석사는 산비탈에 서서 골짜기 전체를 차지하고 있다. 그중 조사당(祖師堂)은 지금은 위대한 선사로 추앙받고 있는 의상을 기리기 위해 지어졌다. 1377년에 창건, 1490년에 재건된 부석사는 고려 시대부터 남아 있는 몇 안되는 목조 건물 중 하나이다. 그러나 역시 부석사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무량수전(無量壽殿)이다. 무량수전에는 '무한히 수를 누린다'는 뜻이 담겨 있다. 기록에 의하면 현재의 우아한 목조 건물 역시 1377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비례의 조화나 구조의 마감 등은 그 이전의 건축 양식을 반영하고 있다. 화강암 토대 위에 장방형 다주식 전각을 올리고, 박공이 있는 지붕에는 기와를 덮었다. 배흘림 기둥 위로는 처마를 받치는 역피라미드꼴의 이음매를 얹고, 남쪽에는 격자 창살의 창을 냈다. 무량수전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 중 하나로, 한국의 목공 기술을 엿볼 수 있는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무량수전 안에 모셔진 국보 45호 소조여래좌상이 근엄하게 내려다보고 계셨다. 공예기술의 진수가 있는 성혈사 나한전으로 왔다.
신라 의상대사가 소백산 기슭에 초암사를 지을 때의 일이다. 매일 서까래가 조금씩 없어져서 이상하게 여긴 스님이 서까래를 찾아 인근 숲을 돌아다니다 한 곳에 수북히 쌓여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스님은 서까래가 쌓여 있던 주변의 풀을 주워 모아서 그 자리에 초막을 지었다. 그 초막이 바로 성혈사의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스님이 초암사를 짓고 수행을 하다 협소한 탓에 이 절을 창건하였다고도 전한다. 절 아래 300m 쯤 떨어진 곳에는 성인이 나왔다는 굴이 있는데, 내용 그대로 절 이름을 ‘성혈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성혈사는 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세웠다고 한다. 지형에 따라 건물을 자연스럽게 배치한 성혈사 나한전은 부처님의 제자인 나한을 모신 곳이다. 임진왜란(1592) 이후 새롭게 지은 것으로 생각하는데 1984년 수리를 할 때 발견한 기록에 따르면, 조선 명종 8년(1553)에 처음 지었고 인조 12년(1634)에 다시 지었음을 알 수 있다. 건물 규모는 앞면 3칸·옆면 1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앞문의 창에 조각을 만들어 장식하였는데, 특히 가운데 칸에서 물고기, 게, 동자상, 연꽃, 새 등의 뛰어난 조각과 공예기술을 엿볼 수 있다.
▲ 성혈사에서 주지 스님에게 차를 공양 받다 ©최영숙 |
| 주지스님이 차를 대접하면서 질문했다. "나한전 문양에서여의주를 보셨습니까?" 일행들은 사진들을 살펴보았다. 용의 발톱 앞에 있는 여의주를 겨우 찾을 수 있었다. 여행을 하면서 잠시 쉬어가게 자리를 펼쳐준 주지 스님이 감사했다. 녹음이 우거진 지금의 성혈사도 싱그럽지만 성혈사가 가장 아름다운 계절은 10월이다. 성혈사로 들어오는 길은 영주의 사과들이 붉게 익어갔다. 향긋한 사과향이 앞서 마중 나왔던 예전에 왔을 때의 기억들이 새로웠다.
유가사상의 보금자리인 소수서원으로 왔다.
* 백운동서원[ 白雲洞書院 ]
1542년(중종 37)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고려의 유현(儒賢) 안향(安珦)의 사묘(祠廟)를 세우고 1543년(중종 38)에 학사(學舍)를 이건(移建)하여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설립한 것이 이 서원의 시초이다. 그후 1544년 여기에 안축(安軸)과 안보(安輔)를, 1633년(인조 11)에는 주세붕을 추배(追配)하였다. 1550년(명종 5) 이황(李滉)이 풍기군수로 부임해 와서 조정에 상주하여 소수서원이라는 사액(賜額)과 《사서오경(四書五經)》 《성리대전(性理大全)》 등의 내사(內賜)를 받게 되어 최초의 사액서원이자 공인된 사학(私學)이 되었다.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철폐를 면한 47서원 가운데 하나로 지금도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서원의 건물로는 명종의 친필로 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란 편액(扁額)이 걸린 강당, 그 뒤에는 직방재(直方齋)와 일신재(日新齋), 동북쪽에는 학구재(學求齋), 동쪽에는 지락재(至樂齋)가 있다. 또한 서쪽에는 서고(書庫)와 고려 말에 그려진 안향의 영정(影幀:국보 111)과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大成至聖文宣王殿坐圖:보물 485)가 안치된 문성공묘(文成公廟)가 있다. 1박 2일의 일정을 모두 마쳤다. 소백산기행의 소감을 물었다.
서경옥 시흥환경단체사무국장은“새로운 추억과 함께 옛 인연의 향수를 즐길 수 있는 기회였다.” 김영자 문화해설사는 “온달산성에서 소낙비는 마음속까지 시원하게 하는 청량제 같았다. 함께한 벗님들과 물속에 풍덩 빠졌던 추억이 오래 갈 것 같다. 다음 기행이 기다려진다.” 박종남 자유기고가는 “일상탈출, 자연이 주는 편안함과 역사유적지에서 느끼는 조상의 숨결이 새로운 에너지원이 되었다.” 문희섭 경희고려한의원 원장은 “월악산 모임을 마치고 소백산 계곡으로 찾아든 늦은 밤 열화와 같은 맹자 도반들의 환영에 감동했습니다. 그리고 밤하늘을 수많은 별과 은하수 불꽃놀이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소산서원, 부석사 성혈사 문화기행 무더운 여름 아랑곳없이 도반님들의 가슴이 더 뜨거웠음을 느꼈습니다.” 이상애 소래고도서관 사서는 “지난해 지리산 기행에서 재미와 공부 그리고 신나는 추억이 많아서 이번 기행은 그런 재미가 없으면 어쩌나 했었는데... 선생님이 준비를 많이 해선지 하늘이 도와선지 행복한 기행으로 기억될 거 같다. 개인적으로 정도전에 대해 알아야 할 것 같아 소설 정도전을 보면서 고려 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간언하신 이존오 조상님을 다시 생각하는 시간이 되어서 의미 있었고 기행을 즐기는 학우들을 보면서 함께 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조미령 학우는 “처음 가는 설레임과 걱정으로 고민했던 부분이 참 소인이다 싶을 정도로 즐거움이었습니다. 역사 기행이 주는 배움과 즐거움 속에서 피로감은 찾을 수 없었고 남는 자산을 쌓아온 듯합니다. 소수서원 문화해설을 들으면서 역사의 재미를 한층 더 상승 되었고 정도전의 새로운 사실과 이야기를 따라 기행하며 나누는 맛 또한 즐거움이었습니다. 성혈사 오름과 마구령의 지남 또한 모르고 지나는 시간 속에 알찬 소득이었습니다. 역사이야기와 멋진 여행 함께해 뿌듯함과 함께 감사를 드립니다.”라고 했다. 심우일 맹자학당 훈장선생님은 “조선의 정신을 알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고 했다.
12명의 맹자학당 벗들과 함께한 1박 2일의 역사기행은 온달산성에서 만났던 시원한 소낙비가 지나간 후 만난 무지개처럼 먼 훗날 이 날들을 떠올리면 빙긋 미소가 떠올려질 그런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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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수고하셨어요 심우일 샘 그리고 모든 맹자 도반님들 즐거웠습니다. 해맑은 아해들 처럼^^
오랜만에 들러 읽다 보니 추억이 새록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