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자들의 도시
모 카페의 안내문에서 "심심한 사과 말씀을 드린다”라는 문장이 화제가 됐었다. 누리꾼들은 "심심한 사과? 난 하나도 안 심심해", "앞으로 공지 글은 생각 있는 사람이 올려라"라는 댓글을 달며 카페 측에 집단적으로 항의했다. ‘심심(甚深)하다’란 의미를 모르는 이들의 반응이었다.
문해력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사례들은 더 있다. 한 고등학교 수업에서, 교사가 영화 ‘기생충’의 가제는 데칼코마니였다고 말하자, ‘가제’를 ‘랍스터’로 이해했다는 이야기, ‘무운을 빈다’는 말에서 ‘무운’을 ‘운이 없다’는 뜻으로 잘못 전달한 방송 뉴스, ‘금일’을 ‘금요일’로, '사흘'을 '4일'로 알고 있는 이들도 있었다.
OECD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실질 문맹률이 75%에 이른다고 한다. 국민의 75%는 문장의 뜻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눈뜬장님이란 관용적 표현이 딱 맞아떨어지는 현상을 보고 있다.
문해력이 떨어지니 맞춤법도 엉망이다. '삶과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골이 따분한 성격', '나물할 때 없는 며느리', '곱셈 추위', ‘주신 용돈은 욕이나게 쓰겠습니다’, ‘신의 가오가 있기를’, ‘권투를 빕니다’, ‘저한테 일해라 절해라 하지 마세요’ 등등으로 쓰는 경우가 늘고 있다.
정부에선 “전 세대에 걸쳐 문해력을 높일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 제공”을 강조하며, 대중의 실질 문맹률 해결에 나서는 모양이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한자어로 된 우리 말이 너무 어렵다거나, 굳이 어려운 말을 배워야 하느냐는 식의 반응이 나오고 있다. 유튜브 동영상과 다양한 미디어 등으로 정보를 습득하고 있는 디지털 영상 세대들을 문맹으로 몰아가는 것이 바람직한가를 따지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 말은 어렵고 문자 텍스트는 따분하기만 한데 그렇다면 시는 어떨까. 4D 영화와 게임을 즐기고 메타버스 공간을 활보하는 세대에게 문자 텍스트는 그저 1차원 평면 세계에 놓인 기호에 불과할 텐데 과연 시가 자리할 곳은 있을까. 비유와 함축으로 뭉쳐진 시. 깊이 생각하고 음미해야 하는 시. 감정을 이입하고 사유와 상상으로 빈틈을 채워야 하는 수고로운 시. 설령 그 안에 우주와 시원으로 통하는 세계의 문이 개시의 소망을 안고 두근거리고 있을지라도 시는 여전히 그 가치를 입증할 수 있을까.
집단 전체가 보지 못하는 도시, 볼 수 없으니까 자신이 주체로 살아갈 수 없는 도시. 최근에 벌어진 일들을 생각해 보면 주제 사마라구의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를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다시 질문을 하게 된다. 눈뜬장님들을 인도하는 한 줄기 빛, 과연 문학과 시가 그 역할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심심한 사과를 드린다. 시를 읽고 쓰고, 오랫동안 시를 강조했으나 여전히 암흑뿐인 세상에 대해, 누구의 길도 인도하지 못하는 시의 무능함에 대해, 그리고 아무도 읽지 않는 시를 지나치게 옹호해 온 과오에 대해, 대중 여러분께 심심한 사과를 드린다. 앞으로는 ‘일해라 절해라’ 하는 ‘골이 따분한 성격’을 버리고 ‘나물할 때 없이’ 편안한 당신의 이웃이 되도록 노력하겠다.
서기 2022년 겨울, 여기는 눈먼 자들의 도시. 당신들의 ‘권투’를 빌며, 신의 ‘가오’가 당신들과 함께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시여, 문학이여, ‘삶과 고인의 명복’을 빈다.
최금진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