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 11. 17 추수감사주일. 신매교회
풍성히 주시는 하나님
[본문] 마 14:13-21
올해도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였습니다. 올해는 좀 특별한 게 날이 더워서 가을이 늦게 시작되고 이제야 단풍이 곱게 물들었습니다. 예년에는 추수감사절이 되면 날이 좀 추웠는데, 올해는 따뜻하고 시원합니다. 특히 금년에는 태풍도 오지 않고, 태풍 피해도 없고, 농작물이 잘 자랐습니다. 금년에는 벼농사가 풍년인 것 같은데, 요즘은 정부가 수매를 많이 하니까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습니다. 뉴스에 잘 나오지도 않고, 사람들은 농사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어쨌든 하나님은 금년에도 우리에게 풍성히 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추수감사주일로 지키는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소위 5병2어 이적이라고 하지요, 이 사건을 통해 풍성히 주시는 하나님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사건이 일어난 장소는 벳새다 빈들입니다. 갈릴리 호수 북쪽에 있는데, 약간 북동쪽에 있습니다. 가버나움 맞은편에 벳새다가 있고, 그 뒤쪽에 넓은 들이 있습니다. 수천, 수만 명이 앉을 수 있는 평평한 넓은 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그곳으로 휴가를 떠났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식사할 겨를도 없이 바빴기 때문에, 한적한 곳에 가서 조용히 쉬면서 제자들을 교육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배를 타고 벳새다 빈들에 갔는데, 그만 무리들에게 들켜버리고 말았습니다. 휴가를 떠날 때에는 몰래 살짝 가야 하는데, 제자들이 배를 타고 어디로 가는지 무리들이 다 보았습니다. 그래서 무리들은 육지로 달려서 먼저 벳새다 빈들에 도착해서 “어서 오십시오. 많이 기다렸습니다.” 하였습니다. 참, 기가 차지요. 모처럼 조용히 휴가를 가지려고 했는데, 사람들이 알고는 많은 무리가 따라왔습니다. 남자 어른들만 오천 명이니, 여자들과 아이들을 합치면 1만 명 가까이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할 수 없이 휴가를 포기하고 무리를 가르치셨습니다. 천국 복음을 가르치셨습니다. 일종의 부흥회입니다. 갑자기 계획에 없던 부흥회를 했는데, 저녁이 되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배가 꼬르륵 꼬르륵 고파옵니다. 식사 때가 되었는데 빈들이라 먹을 게 없습니다. 식당도 없고 마을도 조금 떨어져 있습니다. 날이 저물어 어두워지는데 먹을 게 없으니 큰일입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이 있듯이, 일단 배가 불러야 뭐가 됩니다. 부흥회도 일단 배가 차야지 배가 고프면 말씀이 안 들어옵니다. 그런데 이 많은 무리를 어떻게 먹입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어떤 소년이 가지고 있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기도하시고 나서 떼어서 나눠 주시니, 보리떡과 물고기가 자꾸 자꾸 나왔어요. 이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남자만 오천 명 되는 사람이 배불리 먹고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두 바구니 가득 차게 거두었습니다.
그러면 이 사건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 것일까요? 많은 사람은 생각하기를, 이 사건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가르쳐 준다고 합니다. 이 이적을 통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그리스도이심을 보여 준다고 합니다. 이것이 이 사건의 참된 의미이고 이 이적의 목적이라고 설명합니다.
물론 이것도 중요합니다.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통해 무리가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고 믿어서 영생 얻기를 원하십니다. 구원 얻기를 원하십니다. 소위 영혼 구원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오병이어 이적은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건 무엇일까요? 어렵지 않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은 우리의 경제 문제도 해결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배고픔의 문제, 육신의 문제도 예수님이 해결해 주십니다. 경제 문제도 예수님이 해결해 주십니다. 한국 교회 성도들은, 영혼 문제는 하나님이 해결해 주시지만, 물질 문제는 사람이 각자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둘로 나누어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원론이지요.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말했습니다. “이곳은 빈들이요 날도 저물어 가니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15절) 무슨 말입니까? 각자 해결하게 하자는 것입니다. ‘먹는 문제, 물질 문제, 민생 문제는 각자 해결하도록 하자.’ ‘무리를 해산해서 각자 마을에 가서 사 먹게 하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말씀을 전하셨으니 됐고 ..., 우리는 영혼 문제만 책임지지 물질 문제는 각자 알아서 해!’ 이런 식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냐. 그게 아니야. 경제 문제도 내가 해결해 준다. 물질 문제, 배고픔의 문제도 내가 해결해 줄 수 있어. 내가 그것을 보여 주마.’ 하십니다. 그래서 보여 주신 사건이 오병이어 사건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까? “먼저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게로 가지고 오너라.”고 하십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그것을 내게로 가지고 오너라.”고 하십니다. 그리고는 무리로 그룹을 지어 앉게 하셨습니다. 50명씩, 100명씩 앉게 하셨습니다. 둥글게 둥글게 둘러앉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셨습니다.
19절의 ‘축사(祝謝)하다’는 무슨 뜻일까요? ‘축(祝)’은 빌 축입니다. ‘사(謝)’는 사례할 사입니다. 그래서 우리말 성경의 ‘축사’는 축복과 감사를 합친 말입니다. 그러니 오늘날 우리가 보통 말하는 ‘축사’와는 다른 말입니다. 어떤 모임이나 행사에 가서 ‘축사(祝辭)한다’고 하면, 이것은 축하의 말을 한다는 뜻입니다. 이 때는 말 사(辭) 자를 씁니다. 그러나 성경 이곳의 ‘축사하다’는 것은 축복하고 감사하다는 뜻이지, 축하의 말을 하다는 뜻의 ‘축사(祝辭)’와는 다른 말입니다. 또 돼지나 가축을 키우는 건물을 ‘축사(畜舍)’라고 하는데, 전혀 다른 말입니다. 다 한자가 다릅니다.
어쨌든 예수님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축사했습니다(헬라어 원어로는 ‘축복했다’임). 그런데 성경의 다른 곳들에 보면 ‘감사하다’(유카리스테오)로 되어 있는 곳들도 있습니다(마 15:36; 요 6:11). 성경의 또 다른 곳들에서는 ‘축복하다’(율로게오)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마 14:19; 막 6:41; 8:7; 눅 9:16). 이렇게 ‘축복하다’와 ‘감사하다’가 번갈아 가면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왜 여기에 ‘축복하다’(율로게오)는 단어가 사용되었는가 하면, 유대인들은 식사를 시작할 때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이 기도를 ‘축복’(브라카)이라고 합니다. 이때 기도하는 것을 ‘축복하다’(바라흐)고 합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식사를 시작할 때 음식을 앞에 두고 기도하는데, 이것을 ‘축복하다’(바라흐)라고 합니다. 히브리어 ‘바라흐’의 의미는 첫째, 하나님을 송축하다, 칭송하다; 둘째, 하나님께 복을 빌다; 셋째, (하나님이 주어가 될 때에는) 복을 주다는 뜻이 됩니다. 우리말의 ‘축복하다’는 단어는 첫째, ‘복을 빌다’; 둘째, (기독교에서) ‘복을 주다’는 의미가 있습니다(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다”는 말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이때 ‘축(祝)’은 ‘빌다’는 뜻이 아니고 별 의미가 없습니다). 따라서 식사 기도할 때 ‘축복하다’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감사하다’고 하는 것보다 뜻이 깊고 풍부합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먼저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나서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이것을 제자들이 무리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없어지지 않고 자꾸 자꾸 나왔습니다. 그래서 무리가 빵과 물고기를 배불리 먹고 남았습니다. 그리고 남은 것을 거두었더니 열두 바구니 가득 차게 거두었다고 합니다(20절).
그러면 열두 바구니 가득 차도록 남은 것을 거두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왜 배불리 먹고 남았을까요? 왜 딱 맞게 주시지 않은 것일까요? 혹시 예수님이 능력 조절을 잘못하셔서 그런 것일까요? 기도를 너무 세게 하셔서 그런 것일까요? 그래서 능력이 넘쳐버린 것일까요? 아닙니다. 기도를 너무 세게 해서 문제가 생긴다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기도해도 모자라지 넘치는 법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모든 것을 알맞게 하시지 너무 세게 하시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면 왜 배불리 먹고 남았을까요? 그것은 우리 하나님은 풍성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인색한 하나님이 아니라, 째째한 하나님이 아니라, 풍성히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로 배불리 먹고 남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배불리 먹고 남아서 열두 바구니 가득 거두게 하는 하나님이십니다. 풍성히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마태복음 15장에 보면, 비슷한 사건이 또 나옵니다. 떡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로 남자만 4천 명이 배불리 먹은 사건입니다. 보통 ‘7병2어 이적’이라 말하는데, 정확하게는 7병 3, 4어 이적입니다. ‘두어 마리’라고 했는데, 헬라어 ‘올리가’는 ‘약간의’(a few)란 뜻입니다. ‘서너 마리’가 맞을 것 같은데 편의상 ‘2어’라 부릅니다. 7병2어 사건 때는 어른 남자만 4천 명이 배불리 먹고, 남은 것을 일곱 광주리 가득 거두었습니다. ‘바구니’가 아니라 ‘광주리’입니다. 대개는 ‘광주리’가 ‘바구니’보다 더 크다고 봅니다(cf. 고후 11:33). 배불리 먹고 남은 것을 일곱 광주리 가득 거두었다는 것은 ‘우리 하나님은 풍성한 하나님'이시다, ‘우리로 배불리 먹고 남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구약 성경의 룻기에 보면 룻이 나옵니다. 모압 여인인데, 유다 땅 베들레헴에서 온 유대인과 결혼했는데, 남편이 일찍 죽고 청상과부가 되었습니다. 이방 여인에다가 남편은 없고 과부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땅도 없고 재산도 없고 ... 처량합니다.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낯선 땅 유대 땅으로 왔는데, 친척도 없고 친구도 없고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때 유력한 자 보아스가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땅이 많고 재산이 많은 보아스가 나타나서 룻에게 은혜를 베풉니다. 한량없는 은혜, 까닭 없는 은혜를 베풉니다. 룻이 보아스의 밭에서 보리 이삭을 줍는데, 보아스가 와서 “내 밭에서 이삭을 줍고 다른 밭으로 가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일꾼들에게 말합니다. “너희는 조금씩 이삭을 뽑아 버려서 그 여인으로 이삭을 줍게 하라.” 그래서 룻은 수월하게 이삭을 많이 주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보아스는 룻에게 물을 줍니다. 그리고 식사 시간이 되자 “이리로 와서 같이 빵을 먹으라.”고 합니다. 그리고 보아스는 룻에게 볶은 곡식을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룻기 2장 14절에 “룻이 배불리 먹고 남았더라.”고 합니다. 풍성한 은혜입니다. 보아스는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우리에게 한량없는 은혜를 베푸시는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자격 없는 우리에게, 파산한 이방 여인과 같은 우리에게 까닭 없는 은혜를 베푸시는 예수님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룻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룻은 배불리 먹고 남았습니다. 그리고 룻은 배불리 먹고 남은 것을 가지고 가서 시어머니에게 드렸습니다. 그래서 시어머니 나오미도 배불리 먹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먼저 우리로 풍성히 누리게 하고, 그 다음에는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나누어 주게 합니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도 은혜를 받아 같이 즐거워하고 복을 누립니다. 그래서 추수감사절은 이웃과 함께 나누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처럼 풍성히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장 1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그 풍성한 대로 우리의 모든 쓸 것을 채우시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이런 풍성한 하나님으로부터 풍성한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그 풍성한 대로 여러분의 모든 쓸 것을 채우고” 있습니까?
“ 네~” 라고 대답할 사람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은 것 같아요. 한국 교회의 성도들은 “물질은 죄야!” “돈은 일만 악의 뿌리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소위 신앙이 좋다고 하는 사람들이 ‘우리는 물질을 멀리하고,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풍성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빈약한 하나님’, ‘결핍의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면 세상일이 잘 안 되고 깨지고 터지고 부서지고 망하고 ... 그래서 “두 손 들고 주님께 나아옵니다.”고 합니다. 그래야 신앙 좋은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성도들은 늘 ‘가난한 하나님’, ‘모자라는 하나님’, ‘나의 것을 빼앗아 가는 하나님’, ‘결핍의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도 보면, “주시옵소서!”라고 합니다. 하나님에게서 빼앗아 오듯이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안 주시려고 하는데, 나는 기어코 받아내야 하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싸워서 빼앗아 오듯이 기도합니다. “주시옵소서!” “안 주시면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협박합니다. “안 주기만 해 봐라. ...” 어떤 사람은 자포자기하고 탄식합니다. “하나님, 왜 그러십니까?” “저하고 무슨 원수가 졌습니까?” 이 모든 것의 배경에는 하나님을 인색한 하나님으로 보고, 우리를 괴롭히는 하나님으로 보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게 아니다. 그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보여 주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풍성한 하나님입니다. 우리로 배불리 먹고 남게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배불리 먹고 열두 바구니 가득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한없이 인자하시고 자비로우시고 선하시고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은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하십니다(마 7:9-11)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좋으신 하나님,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 풍성한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 우리에게 풍성히 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로 배불리 먹고 남게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배불리 먹고 열두 바구니 가득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런 하나님을 믿고 나아가는데, 현재 우리의 상황이 넉넉지 못하고 현실이 어렵고 힘들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바로 하늘에서 복이 떨어지고 금덩어리가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처음에는 어려운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또 때때로 어려운 일이 닥칩니다. 본문에 보면 무리들은 예수님을 따라 빈들에 왔다가 예상치 못한 어려운 일에 부딪혔습니다. 저 한적한 곳 빈들에까지 예수님을 따라와서 천국 복음을 듣는 게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말씀을 듣고 진리를 배우고 영적으로 배불렀습니다. 마음에 평안과 기쁨이 가득하였습니다.
그런데 육신은 어떠했습니까? 해가 저물어 저녁이 되니 배가 고파왔습니다. 은혜받았다고 배가 안 고픈 것이 아닙니다. 육신은 육신의 원리를 따라 움직입니다. 신체의 메카니즘은 독자적으로 움직입니다. 예수님을 따라왔다가, 부흥회 참석해서 은혜받다가 어려운 현실을 맞이한 것입니다. 먹을 게 없습니다. 미처 준비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1.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떡을 가지고 하늘을 우러러보았습니다. 19절 중간에 “...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문제 해결이 있습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 121:1-2)
그래서 어려울 때, 답답하고 안 풀리고 일이 잘 안 될 때에는, 가만히 있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나아와 기도해야 합니다. “배고프고 가난한 게 복이야.” 하면서 가만히 있으면 안 됩니다. “물질은 죄악이야. 아무것도 없어야 하나님을 잘 믿거든.” 하면서 가만히 있는 것은 불교적입니다. ‘모든 것은 공이야. 헛된 것이야.’ 하는 것은 불교입니다. 물질을 악하게 보는 것은 영지주의입니다. 헬라 철학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합니다. 물질은 선한 것입니다. 괴로울 때, 힘들 때, 어려울 때 우리는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하늘을 우러러보았습니다. 그럴 때 문제 해결이 있고, 빈들에서도 배불리 먹고 남는 이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2.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하늘을 우러러보시고 축사하셨습니다(19절 끝). 하나님께 먼저 감사드린 것입니다. 몇 개 안 되지만 작은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먹을 것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빵과 물고기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나서는 복을 빌었을 것입니다. 원어로는 ‘축복하다’(율로게오)입니다. 여기서 ‘축복하다’는 것은 하나님께 복을 비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음식을 먹는 자들이 힘을 얻고 건강하게 하시고, 그래서 더욱 하나님을 잘 섬기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옵소서.”
이렇게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복을 빌 때, 즉 하나님을 잘 섬기고 하나님 뜻을 이루게 해 달라고 기도할 때, 하나님은 그 기도를 기쁘게 들으시고, 오천 명이 넘는 사람이 다 배불리 먹고 남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풍성히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도 궁핍할 때, 어려울 때 가만히 있지 말고 하나님께 나아와 기도해야 합니다. “고난이 복이야. 고난이 더욱 은혜야.” 하면서 신앙 좋은 것처럼 허세 부리지 말고, 자만하지 말고,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와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처지와 형편을 아시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 풍성히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 앞에 나아와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빌립보서 4장 6절에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현재 어려운 상황에서 좌절하지 말고, 체념하지 말고, 여러분의 입을 열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또 감사함으로 구하시기 바랍니다.
3. 마지막으로, 우리는 부족할 때 감사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감사한 시점을 보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었을 때였습니다. 한 사람 먹을 분량밖에 안 됩니다. 그러니 얼마나 작고 초라합니까? 예수님의 제자 중의 하나인 안드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요 6:9) 제자들이 볼 때도 ‘너무 적다. 초라하다.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비관적입니다. 자조적입니다. 오늘날 같으면, “나는 한 달에 백만 원밖에 못 벌어. 이걸 가지고 월세 내고, 전기료 내고 하면 도대체 어떻게 살라고? 말도 안 돼! 어떻게 감사가 나와?” 이런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절망적 상황에서도, 아주 조금밖에 안 되는 상황에서도 감사했습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여러분, 배불리 먹고 나서 감사한 것이 아닙니다. 먹기 전에, 배고플 때, 어려울 때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어떻습니까? ‘나중에 돈 벌어서 대박 나면 감사하겠습니다.’고 합니다. ‘목사님, 다음에 잘되어서 대박 나면 헌금도 많이 하고, 교회당도 새로 짓고, 목사님도 팍팍 후원하겠습니다.’고 합니다. 항상 다음에 하겠대요. 배불리 먹고 나서 감사하겠대요.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는 배고플 때 감사해야 합니다. 물론 배부를 때도 감사하고요. 가난하든 부유하든, 어떤 상황에 있든지 현재 상황에서 감사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장 11절에서 뭐라고 말합니까?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여기서 “어떠한 형편에든지”는 것은 원어 표현에 의하면 “내가 지금 처해 있는 형편에서”라는 뜻입니다. ‘지금 있는 상황에서’ 자족한다, 만족한다, 곧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잘되면 만족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만족하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로마의 감옥에 있습니다. 가택연금 상태에 있습니다. 쇠사슬에 묶여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상황에서 만족하고 있다, 감사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어떤 형편에 있습니까? 어떤 처지에 있습니까? 그러나 여러분이 지금 처해 있는 그 상황에서 눈을 들어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먼 훗날 감사하겠다고 하지 마시고, 지금 처해 있는 그 형편에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는 상황에서, 말도 안 되는 부족한 상황에서 하늘을 우러러 감사 기도드렸습니다. 그랬더니 남자만 오천 명이 되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남았습니다.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이적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풍성히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도 우리 가운데 풍성한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도하며 나아가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더욱 하나님을 잘 믿고 잘 섬기며 하나님을 찬송하고 감사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하여, 범사에 배불리 먹고 남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열두 바구니 가득 거두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2024년 11월 17일 추수감사주일 신매교회 설교. 변종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