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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남산(終南山) 및 백산(栢山) 봉수대(烽燧臺) 위치 고찰
[글을 읽기 전에 참고할 사항 1]
이 글은 "2016년도 밀양향토사연구회 년보"에 기고하는 글입니다
그리고 밀양시민 등 여러 사람에게 알리는 글입니다
사시사철 종남산을 등산하시는 분
년말년시 종남산 해넘이, 해돋이, 정월대보름 달맞이 행사를 하시는 분
봄철 종남산 진달래 축제 할 때 종남산을 찾으시는 모든 분께서는
종남산 정상에 세워진 봉수대는 원래의 봉수대 위치가 아닌 곳에 세워진
역사를 왜곡하는 것임을 다음과 같이 알려드립니다
향토 유적(봉수대)은 원형대로 영원히 보존되어야 하고
향토 역사(봉수대 원래 위치)는 바르게 영원히 전승되어야 하며,
어느 누구도 향토 역사(원래의 위치에 원형으로 복원된 봉수대)를 왜곡해서는 안됩니다.
[글을 읽기 전에 참고할 사항 2]
이 글을 읽는 분의 편리를 위해 알립니다
본문의 "문장 단락 구분 부호"의 "순차별 부여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 로마자 숫자(순차별) (예시 : Ⅰ. Ⅱ. Ⅲ -- )
○ 아라비아 숫자(순차별) (예시 : 1, 2, -- )
○ 가, 나, 다, 라 ----- 순차별 (예시 : 가, 나, -- )
○ 중괄호(반괄호) 안에 아라비아 숫자 순차별 (예시 : 1), 2), -- )
○ 중괄호(반괄호) 안에 가, 나, 다, 라 ----- 순차별 (예시 : 가), 나), -- )
○ 동그라미 안에 아라비아 숫자 순차별 (예시 : ① ② -- )
○ 검은색 동그라미 안에 아라비아 숫자 순차별 (예시 : ❶ ❷ -- )
○ 검은 동그라미 (예시 : ● ● -- )
이 부호 배열은 관청에서 공문서 작성 때 준용되는 부호 순차 배열입니다
단, 아래 본문에서 우측으로 한 칸씩 들여쓰기를 해야 하나,
지면(紙面) 관계상 순차별 한 칸씩 들여쓰기를 생략했습니다
원문
□ 기고자
손흥수
○ 밀양시지명위원회 위원(현)
○ 밀양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현)
○ 밀양향토사연구회 고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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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재국
○ 밀양시지명위원회 위원(현)
○ 밀양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현)
○ 밀양향토사연구회 위원(전)
○ 다음(Daum) 카페 밀양광장 운영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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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 차 ]
Ⅰ. 머리말
Ⅱ. 종남산(남산)봉수대 위치 고찰
1. 봉수대(烽燧臺) 입지(立地) 기본원칙
2. 봉수대(烽燧臺)와 봉군숙소.초병초소와의 이격(離隔)거리 기준
3. 봉수대(烽燧臺) 위치 조사 기본원칙
4. 봉수대(烽燧臺) 위치 조사 내용
5. 지리지.고지도의 봉수대 위치 축약식 표기 원칙의 이해
6. 동아대학교박물관 종남산봉수대 조사팀의 종남산봉수대 위치 착오 조사 내용
7.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의 종남산.백산봉수대 위치 착오 조사 내용
8. 언론에 보도된 종남산 정상의 봉수대 복원 반대 보도문
Ⅲ. 주.군.현의 남산의 개념과 종남산 정상의 유적발굴 평면도의 진실
1. 주.군.현(州.郡.縣)의 남산(南山)의 개념(槪念)
2. 종남산(終南山) 정상(頂上)의 유적 발굴 평면도(平面圖)의 진실
Ⅳ. 종남산(終南山) 조망권역 확인
1. 종남산 제1봉 정상의 조망권역 확인
2. 종남산 제2봉 정상의 조망권역 확인
3. 종남산 제2봉 6부능선 봉수대 터(봉군 숙소 겸 초소)의 조망권역 확인
Ⅴ. 백산봉수대(栢山烽燧臺) 위치 고찰 및 조망권역 조사
1. 백산봉수대(서낭당 및 돌탑 부근) 조망권역 조사
2. 백산봉수대(송산마을 동쪽 끝 백산) 조망권역 조사
3. 백산봉수대(칠정마을 뒷산) 조망권역 조사
Ⅵ. 자암산봉수대(子巖山烽燧臺) 위치 및 조망권역 조사
1. 자암산봉수대(子巖烽燧臺) 위치 조사
2. 자암산봉수대(子巖山烽燧臺) 조망권역 확인
Ⅶ. 밀양광장에 게재한 종남산봉수대 관련 글들
Ⅷ. 맺는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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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남산(終南山) 및 백산(栢山) 봉수대(烽燧臺) 위치 고찰
우리는 누구든지 잘못된 것을 당연히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역사는 바로 알고, 후세에 바로 보전시켜야 합니다
역사유적은 바른 위치에 복원하여, 후세에 바로 보전시켜야 합니다
봉수대는 바른 위치에 복원하여, 후세에 바로 보전시켜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관변향토사학자들은 권력의 눈치를 보면서 관변에 서성이고 들락거리면서
관변(관청)에서 잘못된 일을 하면 잘못되었다고 말을 못하고
오히려 잘못된 행위를 동조하기도 했으며, 그것은 역사학자, 향토사학자로서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관청에 자주 출입하는 관변향토사학자들은
더 나아가 관청에서 잘못하는 즉, 역사를 왜곡하는 일을 보면
더 큰 의무와 책임으로 무장된 역사의식으로 관청의 잘못을 적극적으로 바로잡아야 하나,
그렇지 못했습니다
관청의 잘못된 일 즉, 엉뚱한 위치인 종남산 정상에 봉수대를 만드는 것을
재야향토사학자 손흥수와 도재국 등은 결단코 반대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관청은 혈세를 낭비하면서까지 종남산 정상에 잘못된 봉수대를 만들었습니다
봉수대 위치를 엉뚱하게 정상에 만든 것은 역사를 왜곡시킨 사건으로 참으로 개탄스럽습니다
종남산봉수대(終南山烽燧臺)는 역사지리서에는 남산봉수대(南山烽燧臺)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웅부(雄府) 밀양도호부(密陽都護府)의 남산(南山)에 있기 때문에 우리의 선조들은 남산봉수대로 명명했습니다
종남산봉수대는 제1봉의 정상에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종남산봉수대는 제2봉의 정상에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종남산봉수대는 제2봉의 6부능선에 있었으며,
지금 정상에 만들어 놓은 형태로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역사적 유적은 원래의 위치에, 원래의 형태로 복원하여
후세에게 보전시켜야 하는 것이 지방자치단체의 책임과 의무입니다
아래 글은
밀양의 재야향토사학자 도재국과 손흥수가 종남산봉수대의 원래의 위치를 고증한 기고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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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문 ]
Ⅰ. 머리말
봉수(烽燧 : 烽燧制度)는 변방(邊方)에 외적(外敵)의 침입으로 국가 안위(安危)에 관한 변고(變故)가 일어날 때 조정(朝廷)에 급보(急報)하기 위하여 조선(朝鮮) 초기 이래 근대 통신수단이 출현하기 전까지 국가(왕조) 최고의 통신수단이었다. 봉수(烽燧 : 불과 연기를 피워 신호를 하는 제도)의 종류에는 서울의 경(京)봉수, 해안의 연변(沿邊)봉수, 내륙의 내지(內地)봉수 등 세 종류가 있었다. 경봉수는 전국의 모든 봉수가 집결하는 중앙봉수로서 서울 목멱산(木覓山 : 지금의 남산)에 위치하여 목멱산봉수(木覓山烽燧)라고도 했다. 봉수의 선로에 따라 직봉(直烽)과 간봉(間烽)으로 구분하기도 했다.
봉수 시설 중, 연변봉수(沿邊烽燧) 즉, 해안가의 봉수대는 왜구 등의 봉수대 침입 및 파괴를 대비해 높이 7.5m, 둘레 21m, 대 아래 4면 폭이 각각 9m인 연대(煙台)를 쌓고 그 바깥에 깊이와 폭이 각각 3m인 참호를 팠으며, 다시 그 바깥에 위를 뾰족하게 다듬은 말뚝지대를 설정했다.
또 내지봉수(內地烽燧) 즉 내륙(內陸)의 봉수는 연변봉수보다는 위험이 적으므로 연대(煙臺)를 쌓지 않고 아궁이만 설치했으나, 아주 위험한 곳에는 연대를 쌓았으며, 짐승이 침범할 위험이 있을 때는 둘레에 담을 쌓기도 했고, 연대나 아궁이 위에는 반드시 연통(煙筒)을 만들어 바람으로 연기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방지했는데, 우리 밀양지역의 상동면 유산마을 뒷산에 있는 『분항봉수대(盆項烽燧臺)』가 내륙 봉수대의 원형(元型)을 거의 유지하고 있어 문화재로 지정해야 겠다.
『내륙 봉수대의 시설 기준』으로 보아 종남산봉수대가 잘못된 위치에 복원된 것은 차치(且置)하고라도 『거대한 연대(煙臺) 시설』이 『원형(元型)의 복원(復元)인지 여부(與否)』도 매우 의문스럽다. 그리고 실재로 존재했던 『제2봉의 6부 능선 봉수대의 “연대(煙臺) 구조(構造) 부분”』에 대해서도 새롭게 검증할 필요가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내지(內地) 봉수대의 시설로서 『봉군의 숙소 겸 초소의 시설』이 『불이나 연기를 지피는 시설(맨땅에 담장으로 구획하여 연기나 불을 지피는 시설)』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하면 종남산 정상에 거대한 연대(煙臺)만 설치해 놓고(봉군의 숙소 겸 초소 시설의 복원은 하지 않고), “이것이 종남산봉수대를 100% 복원한 것이다” 라는 것은 “봉수대의 전체 시설 중에서 50% 정도만 복원해 놓고 100% 복원했다” 라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이런 사항을 볼 때 종남산봉수대의 원래의 위치는 종남산 정상도 아니고, 종남산 제2봉의 정상도 아닌, 『종남산 제2봉의 6부 능선의 현재 석축(石築)이 뚜렷이 남아 있는 종남산봉수대 봉군 숙소 겸 초소인 유지(遺址)』가 확실하다는 것이 유적(遺蹟)의 존재로 증명되었으며, 이에 대한 명확한 증거와 논리적 근거를 다음과 같이 손흥수와 도재국[이하 ①2인 공동 필자이면 “필자(손흥수, 도재국)”으로 하고 ②도재국 단독이면 “필자(도재국)”, ③손흥수 단독이면 “필자(손흥수)”로 표기한다]의 논고(論考)로 전개한다.
※ 참고 : 필자(손흥수와 도재국)는 현재 밀양시지명위원회 위원 및 밀양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봉수대(烽燧臺)는 성보(城堡)와 더불어 국가의 중요한 군사시설이었던 만큼 그 설치와 관리에도 최고의 보안을 요하는 시설이었고, 봉화대(烽火臺)의 통보 방법은 야간(夜間)에는 횃불을 비추고, 주간(晝間 : 낮)에는 연기를 피워 긴급(緊急)한 상황을 연락(連絡)하는데 평상시(平常時)에는 한 번[일거(一炬)], 적이 나타나면 두 번[이거(二炬)], 적이 국경 가까이 오면 세 번[삼거(三炬)], 국경에 침입하면 네 번(사거(四炬)), 적과 접전이 되면 다섯 번[오거(五炬)]을 올리되, 봉화(烽火)의 신호(信號)가 불가능(不可能)하면 봉군(烽軍)이 직접 달려가서 연락하도록 되어 있었다
봉화(烽火)의 도달 소요 시간은 북로봉수(北路烽燧)의 경우, 제1 기점(起點)인 함경도 중암(中巖)으로부터 서울 아차산까지 소요되는 시간은 대략 12시간이 소요된 것을 감안하면, 제2거의 간봉(間烽) 기점인 가덕도 천성산봉수대에서 제8간봉노선(종남산봉수대 등)을 거쳐 영천(永川)의 제2거 직봉을 거쳐 목멱산봉수대까지 도달하는 시간은 대략 5시간 정도 소요되었을 것으로 필자(도재국)는 추정되어, 초병(哨兵)이 초소에서 연대(煙臺)로 “한달음”에 달려가서 봉화를 올리는데 걸리는 시간은 늦어도 10분 내외로 화급하게 올려야 할 것이므로, 종남산봉수대의 숙소 겸 초소가 현존하는 임도변의 유지(遺址)에서 40분 정도 걸리는 제2봉의 정상이 아니라는 것이 더욱 명백해 진다. 초병이 제2봉의 정상에서 보초를 서야 한다는 것은 명백하게 잘못되었는데 그 증거는 현존하는 봉수대 유지(遺址 : 종남산 제2봉의 6부 능선)와 그 부근에서 양(兩) 방향 대응 봉수대가 조망권역(眺望圈域)에 훤히 들어오기 때문에, 굳이 더 높은 위치에 연대(봉수대)를 만들어 더 힘든 보초와 힘드는 관리와 어려운 운영을 자초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봉수대를 제2봉의 정상 또는 제1봉의 정상에 건립하는 것은 시원하게 뚫린 지름길을 두고 좁고 험한 먼 길을 둘러둘러 가는 꼴이나 마찬가지이다.
봉수(烽燧)의 관리는 중앙에서는 병조(兵曹)의 무비사(武備司)가, 지방에서는 관찰사(觀察使) 또는 수령(守令) 등 모든 군사 책임자가 관장했다. 근무수칙은 매우 엄격하여 봉수 정보를 신속·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한 규정으로 근면(勤勉)하게 복무한 봉수군은 승진 또는 표창했으며, 반면에 간망(看望)을 게을리하거나 결번(缺番)·거짓봉화·방화하는 경우와 오장(伍長)이나 수령(守令) 등 관계 요원이 감독을 게을리한 경우에는 엄벌로 다스렸다. 적정(敵情)이 일어났는데도 연변봉수에서 거화를 제대로 하지 않아 아군이 피해를 입었을 경우에는 관계자들을 참수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전국을 크게 5로(路)로 나누고 각 선로가 경봉수(京烽燧)에 도달하는 봉수를 차례로 싣고 있다. 전국 주요 선로는 경봉수를 중심으로 제1거는 두만강 변의 우암(牛巖)에서 함경도·강원도를 거쳐 양주 아차산에, 2거는 동래 다대포에서 경상도·충청도를 거쳐 광주(廣州) 천림산봉수(天臨山烽燧)에, 3거는 평안도 강계로부터 황해도를 거쳐 서울 모악산(母岳山)에, 5거는 서남해변의 돌산포에서 전라도·충청도를 거쳐 양천 개화산에 이르는 봉수선로였다.
※ 천림산봉수(天臨山烽燧)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금토동 소재
[사진 1] 우리나라 봉수노선도 (종남산봉수대 : 제2거 제8간봉)
※ 제8간봉(間烽) 노선은 밀양 종남산(남산)봉수대를 거쳐 영천에서 제2거 직봉(直烽) 노선에 합류한다.
※ 봉수 노선
○ 기점 : 가덕도 천성산 - 김해 분산 - 김해 자암산 - 밀양 백산 - 밀양 종남산(남산) - 밀양 추화산(성황) - 밀양 분항산 - 청도 남산 - 청도 팔조령 - 영천 성황당 - 신녕 여음동 - 의성 마산 - 안동 남산(봉지산) - 영주 성래산 - 풍기 죽령 - 단양 소이산 - 청풍 오현 - 충주 심항산 - 음성 가엽산 - 죽산 건지산 - 용인 보개산 - 광주(성남) 천림산 - 서울 목멱산(남산)
우리 밀양시 관내에는 제2거(直烽)에 속하는 제8간봉(보조노선)이 가덕도의 천성봉수대(天城烽燧臺)로부터 여러 봉수대를 이어받아 김해 봉하마을 동쪽의 자암산봉수대로부터 『밀양시 하남의 백산봉수대(栢山烽燧臺) - 종남산봉수대(終南山烽燧臺 : 一名 南山烽燧臺) - 추화산봉수대(推火山烽燧臺) - 상동면 유산마을 뒷산인 분항봉수대(盆項烽燧臺)』를 거쳐 경북 청도군의 남산봉수대와 영천(永川)의 직봉(直烽) 노선으로 이어지는 4개의 봉수대가 있었다.
19세기 말에 접어들자 급격한 근대화로 인해 새로운 통신수단이 도입되고 때를 같이하여 일본을 필두로 외세 침투가 본격화되면서 봉수제도는 항일 의병(義兵)들의 간헐적인 통신수단으로 이따금 이용되었을 뿐 정규 통신수단에서는 도태되어 1895. 5. 9 법적으로 공식 폐기되었다. (위 밀양 지역 외의 대부분은“다음 카페 옛생돌 나무님의 논고”에서 발췌)
오늘날은 봉수(烽燧)의 역할과 기능이 상실되었지만 국가 안보에 중대한 군사시설이었던 봉수대의 유지(遺址) 전부는 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유지(維持) 관리되었어야 마땅한데도 불구하고 일부 봉수대는 그 유허(遺墟)조차 사라져 찾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필자 도재국은 손흥수 선생과 30년 이상 고향 향토사 조사 및 연구에 매진하면서 『재악산(載岳山) 산명 복원 활동 및 고려시대 “효심(孝心)의 난(亂)” 고증(考證)』 등 향토사 발굴 등에 노력하면서 사라져가는 밀양의 봉수대 유허 조사에도 매진하고 있고, 공동(共同) 조사 과정과 결과를 모아 다음과 같이 공동으로 글을 쓴다
밀양의 봉수대 터(遺墟)를 조사한 결과 하남읍 백산리의 백산봉수대 터(址)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종남산봉수대는 원래의 봉수대 터(址)가 종남산 제2봉우리의 6부 능선(稜線)에 봉수대의 봉군(烽軍)의 숙소 겸 초소가 명백하게 남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밀양시가 동아대학교박물관 종남산봉수대 조사팀의 『밀양종남산봉수대복원자료수집기초조사보고』에 의해 원래의 봉수대 터가 아닌 종남산 정상(頂上)에 복원이랍시고 해 놓았고, 추화산봉수대는 본래의 위치에 복원되어 있고, 분항봉수대(盆項烽燧臺)는 봉수대 터 안에 사설(私設) 개인 묘지(墓地)가 들어선 채로 쓸쓸하게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종남산봉수대의 원래의 위치에 대해서 향토지리지인 『밀양지(密陽誌)』와 『밀양지명고(密陽地名攷)』에 기록된 위치와 밀양시에서 복원한 종남산봉수대 위치가 서로 다르고, 국가급 문화재연구소인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에서 최근에 경남.부산.울산지역의 봉수대 터를 조사하여 발간한 『경남지역 봉수 Ⅲ』에도 서로 다르게 기록하고 있고, 또 전술한 바와 같이 동아대학교박물관의 종남산봉수대 조사팀의 보고서도 사실을 왜곡하고 있어 필자(도재국, 손흥수)는 수 년간 관련되는 봉수대를 모두 조사하여 두 개의 원래 봉수대 위치를 명확하게 하였다.
밀양의 대표적인 지리지인 『밀양지(密陽誌)』 549쪽에는 「종남산봉수대」의 위치를 종남산 제2봉의 정상에 있다” 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밀양지명고(密陽地名攷)』부북면(府北面) 편(篇) 사포리(沙浦里) 조(條)에는 「남산(南山) 붕우재(봉화대:烽火臺)」는 종남산(終南山) 둘째 봉우리 정상(頂上)에 있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전에는 김해(金海) 자암산(子巖山) 봉화대(烽火臺)에 응(應)하였으나 거리가 너무 멀어 불편하였으므로 조선(朝鮮) 후기(後期)부터는 하남(下南) 백산리(栢山里) 후산(後山)에 “백산봉화대(栢山烽火臺)”를 신설하여 응(應)하였으며, 북으로 「추화산(推火山:용평리(龍平里 뒷산)봉화대(烽火臺)」에 통보(通報)하게 되어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2개의 지리지에는 모두다 ”종남산봉수대가 종남산 제2봉의 정상에 있다“ 라고 기록하고 있어, 실재로 이 기록이 맞는지 여부를 검증하기 위해서 이 글을 작성한다.
먼저 결론적으로 말하면 「종남산(남산) 봉수대가」 종남산 제2봉의 정상에 위치하는 것이 아니고, 「종남산 제2봉의 6부 능선」에 위치하고 있었고, 「백산봉수대」는 「백산의 정상 : 서낭당 부근」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백산리 송산마을 동편의 뒷산」에 있었다 라는, 것이 필자(손흥수, 도재국)의 의견이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러한 사실을 조사, 확인하는데 평생을 심혈을 기울여온 필자(손흥수, 도재국)는 종남산봉수대 및 백산봉수대의 원래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하여 ①향토지리지인 밀양지(密陽誌)와 밀양지명고(密陽地名攷) 분석 ②국가급 문헌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분석 ③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에서 발간한 『경남지역 봉수 Ⅲ』분석 ④밀양시에서 종남산봉수대 위치 조사.확인을 위한 동아대학교박물관 종남산봉수대 조사팀에 용역.발주한 『종남산봉수대복원자료수집기초조사보고서』분석 ⑤“봉수대(烽燧臺) 위치 조사 기본원칙”에 입각한 여러 항목 조사.분석 등을 통하여 두 개 봉수대의 원래의 터(위치 : 遺墟 : 墟)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Ⅱ. 종남산 봉수대 위치 고찰
※ 종남산봉수대(終南山烽燧臺)를 일명(一名) 남산봉수대(南山烽燧臺) 또는 남산봉(南山烽)이라고도 함.
옛날에 운영하던 봉수대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사라져 그 위치가 분명하지 않을 때 본래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봉수대가 위치하는 지역과 해발고에 따라 다르지만, 종남산봉수대의 경우에는 다음과 같은 기본원칙을 반드시 거쳐서 조사를 해야 한다.
1. 봉수대(烽燧臺) 입지(立地) 기본원칙
필자(도재국, 손흥수)는 오랫동안 종남산 및 백산봉수대의 원래의 위치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불특정 여러 사람들을 만나 봉수대의 위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모두다 다음과 같이 대답을 하였다
『봉수대는 산의 제일 높은 꼭대기에 만드는 것이 맞다. 이유는 제일 높은 곳에 봉수대를 만들어야 사방이 훤히 잘 보이므로 봉수 전달이 잘 된다』
이 대답은 얼핏 보면 맞을 수가 있으나, 전혀 맞지 않다 즉, 다음의 “봉수대(烽燧臺) 입지(立地) 기본원칙”에 정면으로 위배되기 때문이다. 봉수는 봉군(烽軍)이 관리하기 때문에 산꼭대기에 위치하면 봉군 즉, 인간이 자연의 악(惡) 조건에 부딪혀 관리에 매우 어렵게 되어 봉수대를 운영할 수가 없게 된다.
가. 봉수대 최적의 입지는 해발고가 가장 낮은 위치
봉수대 근무 인원과 근무환경, 봉군 거주지에 관한 내용은 다음을 참고하면 좋을 것 같다.
『봉수군과 오장은 매 소(所)마다 정원이 5명·6명·10명 또는 10여 명 등으로, 교대는 5일·10일(경봉수는 6일 교대)로 변천되었다. 경봉수(京烽燧)는 세종 28년 10월부터 정원이 20명으로 늘어 매 소마다 2명 입직(入直)이 상하 양번(兩番)으로 나누어 근무했다. 봉수군은 성실한 근무와 출퇴근 편의를 위해 가능한 한 인근 지역 주민을 중심으로 차출했다. 따라서 봉수대가 산꼭대기에 위치하면 식수가 부족하고, 마을과 멀러 떨어져 식량과 부식 공급이 어렵고, 한겨울에는 추위가 엄습하여 요즘처럼 보온이 잘 되는 의복이 없었기에 초병 근무가 매우 힘들고, 위급 시 관도(官道 : 驛院) 및 관청과의 연락 시간을 지체시키고, 이로 인해 화급을 다투는 “즉각 봉수 운영”에 지장을 준다. 높은 산꼭대기는 평지보다 더 많은 구름과 안개 일수가 일어난다. 안개와 구름이 끼면 봉수 전달이 불가능해 진다. 그러면 봉군(烽軍)이 평지는 역마(驛馬) 또는 도보(徒步)로, 산길을 도보(徒步)로 위급 사항을 전달해야 한다(이상은 “다음 카페 옛생돌 나무님의 논고”에서 발췌)』
종남산 정상에 봉수대가 위치하면 6부 능선에 위치하는 것보다 봉수대(산꼭대기)에 오르는 시간이 40분 이상 더 소요가 된다. 이는 화급(火急)을 다투는 전달 사항을 봉수(불과 연기)로 하면 10분 정도면 봉수가 피어올라 전달이 되는데, 산 정상까지 달려올라 가려면 무려 40분 이상 더 걸리며, 『특히 구름 등으로 대응 봉수간 조망이 되지 않을 때, 봉수 전달이 불가능한 봉수대와 그렇지 않은 봉수대가 있을 때, 봉수를 전달하는 데는 역마와 인력, 봉수, 평지와 산길을 달려야 할 때는 평균 소요시간을 추정하면 40분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릴 수가 있다』. 적이 만약에 기마군단(騎馬軍團)으로 달려온다면 40분 또는 그 이상만큼 더 빨리 달려와서 군사의 방어와 백성의 피난 준비의 시간이 모자라 아군을 더 많이 죽이고 민가(民家)와 국가 재산(관아 등)을 더 많이 불태우고 백성의 피난을 더디게 하여 더 많은 백성이 적으로부터 더 많이 죽임을 당하게 되어, 이길 수 있는 전쟁, 버틸 수 있는 전쟁을 패전(敗戰)으로 몰릴 수 있는 상황에 이르게 할 수 있다.
나. 양(兩) 방향 봉수대 조망권 확보되는 곳이 최적(最適)의 봉수대 위치
최적의 봉수대 입지는 양(兩) 방향 봉수대의 조망권역이 확보되는 곳이다.
따라서 봉수대 최적 입지의 기본원칙은 위 “가”와 “나”를 반드시 동시에 충족시키는 장소가 최적의 입지이다.
2. 봉수대(烽燧臺)와 봉군숙소(烽軍宿所).초병초소(哨兵哨所)와의 이격(離隔) 거리 기준
가. 봉수대의 봉군 숙소와 초소, 봉수대(煙臺) 등 시설물 개념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봉수대 하면 불(烽)이나 연기(燧)를 올리는 봉수대(연대 : 煙臺)만을 머리에 떠올린다. 그리고 전국의 여러 곳에 봉수대를 복원해 놓은 것을 보면 봉수대 즉, 연대(煙臺)만 거대하게 복원시켜 놓았다. 구조 측면에서 보면 이건 대단히 잘못된 것이고 실재로는 복원이라 볼 수 없다. 그 이유는 옛날 대부분의 내지 봉수대는 지금과 같이 거대한 견치석 등으로 또 거대한 구조로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복원한 봉수대를 보면 봉군(烽軍)의 숙소(宿所)와 초병(哨兵)의 초소(哨所)를 같이 복원(만들지) 하지 않고 연대(煙臺)만 만들어 놓은 것은 큰 잘못이다. 봉수대와 봉군의 숙소 겸 초소는 “이와 잇몸”, “물체와 그림자”, “숟가락과 수저”, “컴퓨터의 하드와 소프트웨어”와 같이 항상 “한 세트”로 되어 있어야 제 기능과 역할을 하기 때문에 복원을 하려면 관련 시설물을 함께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봉수 노선이 주노선(主路線 : 直烽)인가, 간선(幹線)인가에 따라 연대(煙臺)의 숫자가 달라지고 연대(煙臺)의 입지(위치)가 달라진다. 직봉(直烽)은 연대(煙臺)가 여러 개이고 간봉(間烽)은 연대가 1개이다. 일반적으로 종남산봉수대는 간봉(間烽)이므로 연대(쉽게 표현하면 불과 연기가 피어오르는 돌 또는 흙으로 된 “연통 또는 불筒”)가 여러 개가 아니므로 연대가 들어 설 자리가 넓지 않은 좁은 위치에도 들어설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종남산봉수대의 연대 위치가 『종남산봉수대가 유지(遺址 : 石築 위치)』의 아래쪽인 넓은 평평한 터가 아니고, 축대의 위쪽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러 사람들이 말하기를 5개의 연대를 모두 설치하려면 석축 위쪽으로 30미터 정도의 위치에는 "평평한 지형"이 넓지 않아 5개의 연대를 설치할 수가 없어, 종남산봉수대 연대의 위치가 석축(石築)의 아래쪽이라는 것이 다수설이었으나, 이 주장이 맞지 않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그리고 석축 아래의 임도 바로 아래 쪽에서는 백산의 3개 지점(봉수대 추정지)이 모두 조망되지 않는다.
나. 극한(極寒) 상태하, 봉군의 숙소와 초소 시설의 위치 개념
일반적으로 사람들은“봉군의 숙소와 초소가 따로 있고, 또 봉군(烽軍)은 초소에서 보초를 서며, 연대(煙臺)가 초소로 겸용되었다” 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종남산봉수대의 경우 이것은 아주 잘못된 생각이다.
필자(도재국)의 생각은 “봉군의 숙소와 초소는 같은 구내(區內)의 같은 시설물 또는 같은 건물 안에 설치되어야 한다” 이다. 그 이유는 봉수대는 산속에 위치하므로 한겨울에는 남부지방은 영하 15도 이상, 중부지방은 영하 20도 이상, 북부지방은 영하 30도까지 오르내리는 극한(極寒)의 상태에서 봉수대 즉, 비바람을 피할 수 없는 바깥인 연대(불筒 : 봉수대) 옆에서 보초를 설 수가 없다.
그래서 종남산봉수대의 경우에는 숙소와 초소.병기고를 겸용하는 건물을 지어 숙소에서 보초를 섰다는 것이 정설이다. 필자(도재국)가 6부 능선의 봉군 숙소 건물의 잡목과 잡초, 전죽(箭竹)을 전부 베어내고 건물지(建物址)를 조사한 결과, 건물을 구획한 벽의 기초바닥이 드러났는데, 숙소와 병기고.창고.초소로 추정되는 구획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종남산봉수대의 터를 조사한 결과 건물을 지을 때, 대응 봉수 방향으로 조망권역에 차폐물(여기서 차폐물이란 일시적으로 차폐 역할을 하는 잡목 등은 차폐물의 범주에 해당하지 않고 이동시킬 수 없는 고정된 자연지형물인 산을 말함)이 전혀 없으므로 창문을 내면, 방안에서 창문을 통해 대응 봉수에서 불이나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겨울에도 장작(연료)만 충분하면 따뜻한 상태에서 보초를 설 수가 있다. 이는 필자(도재국)가 현장을 확인한 결과 충분히 가능한 결과였다.
다. 봉군의 숙소 겸 초소와 봉수대와의 이격(離隔) 거리 “한달음”의 개념
종남산봉수대의 경우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옛 종남산봉수대의 봉군 숙소를 현존하는 석축 건물지(建物址)로 인정은 하나, 봉군이 종남산 제2봉 정상에 있었던 연대(煙臺 : 불통 또는 연통)에서 보초를 섰다” 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대단히 잘못된 생각이다. 종남산 봉수대의 연대는 종남산 제2봉의 정상에 있지도 않았다. 그 이유는 봉군의 숙소 겸 초소는 한 구내에 겸용하였고, 연대와의 거리는 “한달음”에 뛰어갈 수 있는 거리에 위치하였다고 본다. 위급한 봉수가 대응봉수에서 올랐을 때 아무리 늦어도 10분 정도 이내에 봉수를 올려야 한다. 그런데 봉군들이 현존하는 터(2봉의 6부 능선)에서 숙식과 보초를 선다고 가정할 때, 어느 한 쪽에서 봉수가 올랐을 때 봉군은 10분 정도 이내에 봉수를 올려야 하는데, 지금의 봉수대 터에서 종남산 제2봉의 정상까지 40분(제1봉일 경우는 시간이 더 소요) 정도 뛰어 올라가 봉수를 올린다면 적(敵)에게는 40분의 침입 시간을 더 빨리 주고, 아군(我軍)에게는 방어 준비를 40분 늦게 주는 꼴이 된다. 즉, 적에게 유리하게 아군에게 불리하게 한다. 상세한 내용은 필자(도재국, 손흥수)가 전설(前說)한 바와 같다
그래서 봉군은 같은 구내(區內)의 숙소와 초소에 복무해야 하고, 불과 연기를 올리는 봉수대(연대)와는 “한달음”에 달려갈 수 있는 위치에 봉수대를 설치해야 한다. 필자(도재국, 손흥수)는 “한달음의 거리”를 “산속의 지형”에서는 “50미터 이내”로 본다. 실재로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종남산봉수대의 불과 연기를 올리는 연대(불통 또는 연통) 터가 지금의 봉군 숙소 겸 초소의 터에서 제2 봉우리 방향으로 30미터 정도 떨어진 약간 평지처럼 된 위치라고 말하고 있다.
필자(도재국)의 선조(先祖)인 대구(大邱)에서 밀양으로 이거(移居)한 성주도씨(星州都氏) 입밀양조(入密陽祖)인 도만추(都萬秋)의 둘째 아들인 도계적(都啓迪)의 묘소(墓所)가 지금의 종남산봉수대(南山烽臺) 봉군(烽軍) 숙소 겸 초소 바로 아래에 있었는데 2009년에 종남산 숭모원(星州都氏崇慕園)으로 이장(移葬)을 하기 전까지 250년 동안 후손들이 이 봉수대 바로 옆을 지나다니며 벌초와 성묫길로 이용되었다는 이야기를 집안 어른들로부터 들어 왔다. 대동보(大同譜)에도 묘소의 위치를 남산봉대하(南山烽臺下)로 기록하고 있다. 그 길(벌초와 성묫길)이 지금의 종남산 임도(林道)인 것이다.
종남산봉수대의 “봉군의 숙소 및 초소 터”에서 대응(對應) 봉수인 남쪽의 자암산봉수대 및 백산봉수대와 북쪽인 추화산봉수와 분항봉수대가 훤히 조망된다. 그러니까 종남산봉수대가 종남산 정상 또는 제2봉의 정상에 입지(위치)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다. 여기서(석축 위치) 대응 봉수인 추화산,백산봉수는 말할 것도 없고, 더 먼 곳에 있는 분항 및 자암산봉수대까지도 훤히 조망된다. 이 부분은 아래에서 다시 입증을 하겠다
3. 봉수대(烽燧臺) 위치 조사 기본원칙
종남산봉수대의 원래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10가지 조사 기본원칙을 반드시 연계(連繫)하여 조사하여야 한다. 그러나 동아대학교박물관 종남산봉수대 조사팀은 종남산봉수대 위치를 조사하면서 “현존하는 봉수대 유적 증거물을 증거물이 아니다” 라고 하고, 13 가지 항목을 전부 연계해서 조사도 하지 않았으며, 보고서 내용도 쉽게 이해가 되지 않게 조사를 하였다. 또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도 "팔봉산”에 “남산봉수대”가 있었다고 하여, 남산과 종남산을 별도의 산으로 보는 우(愚)를 범했다. 또 아래 여러 항목 중에서 몇 가지 항목만 조사하고 나머지 항목은 조사를 하지 않으므로써 원래의 봉수대 터가 아닌 종남산 정상에 봉수대를 복원이 아닌 복원을 하고, 팔봉산을 남산봉수대 위치라고 발간된 책에 버젓이 발표하기도 하여 이해할 수 없는 결과를 도출시켜버렸다.
재차 강조하지만 다음의 항목을 반드시 전부 연계하여 조사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하여 종남산 정상에 종남산봉수대를 잘못 복원시켜 놓았고, 한국화이바 제2공장 위치인 상남면 평촌 북쪽 국도변 옛 호치(狐峙 : 여시태고개)와 연접한 “팔봉산”을 “남산봉수대 위치”로 잘못 조사하였다.
● 봉수대(烽燧臺) 위치 조사 기본원칙
가. 향토지리지(鄕土地理誌)를 조사한다
나. 향토지명지(鄕土地名誌)를 조사한다
다. 봉수대 위치로 추정되는 주변의 지형.시설물(地形.施設物)을 조사한다
라. 봉수대 위치로 추정되는 주변 마을주민들의 전해오는 이야기를 조사한다
마. 봉수대 위치로 추정되는 주변의 지명(地名)을 조사한다
바. 지명과 지리에 관한 각종 문헌(文獻)을 조사한다
사. 봉수대 위치로 추정되는 주변 묘지 소유자(후손)들의 의견 청취한다
아. 관련 지방자치단체의 의견을 청취한다
자. 고지도에 표기된 봉수대의 위치를 조사한다
차. 밀양문화원의 의견을 청취한다
카. 양(兩) 방향 대응 봉수의 조망권역(眺望圈域)을 조사한다
타. 종남산봉수대를 수백년간 지켰던 신목(神木)의 도벌(盜伐) 상황을 조사한다
파. 재야(在野) 향토사학자의 의견을 반드시 청취한다 (설명문 삽입 추가)
하. 봉수대 위치로 추정되는 주변에 전죽전(箭竹田)이 있는지를 조사한다 (항목 추가)
4. 봉수대(烽燧臺) 위치 조사 내용
필자(도재국, 손흥수)는 수 년간 종남산봉수대 및 대응 봉수대 위치를 다음과 같이 조사하였다
가. 향토지리지(鄕土地理誌)
■『밀양지(密陽誌)』 549쪽 : 「종남산봉수대」의 위치를 종남산 제2봉의 정상에 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 필자(도재국, 손흥수) 조사 결과 : 종남산 정상 및 제2봉의 정상에는 봉수대의 흔적이 전혀 없다
나. 향토지명지(鄕土地名誌) 조사 내용
1) 밀양지명고
■『밀양지명고(密陽地名攷)』부북면(府北面) 편(篇) 사포리(沙浦里) 조(條) : 「남산(南山) 붕우재(봉화대:烽火臺)」는 종남산(終南山) 둘째 봉우리 정상(頂上)에 있었다
● 필자(도재국, 손흥수) 조사 결과 : 종남산 정상 및 제2봉의 정상에는 봉수대의 흔적이 전혀 없다
다. 봉수대 위치로 추정되는 주변의 시설물(施設物)인 봉군숙소 겸 초소 조사 내용
■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현존하는 “종남산봉수대 봉군 숙소 겸 초소의 유지(遺址)”를 조사하지 않았다
■ 동아대학교박물관 종남산봉수대 조사팀에서는 현존하는“종남산봉수대 봉군 숙소 겸 초소의 유지(遺址)인 시설물 축대(돌로된 축대)”를“산 위에서 굴러 내려 쌓인 돌무지”로 조사했다.
● 필자(도재국, 손흥수) 조사 결과 :
전죽(箭竹)과 잡목을 베어내니 사진 상의 축대 외에도 건물 내부 벽의 기초가 있었다. 남산(南山) 붕우재(봉화재:烽火嶺)에 남아 있는 돌로 된 축대(석축)를 종남산봉수대의“봉군(烽軍) 숙소 겸 초소 터”로 확인했다. 봉군의 숙소가 초소로 겸용되었고, 봉수대(烽燧臺) 즉, 연대(煙臺)는“한달음”에 달려갈 수 있는 제2봉의 정상 방향으로 30미터 정도의 위치에 있었다 라고 본다.
라. 주변 마을주민들의 언전(諺傳)
1) 부북면 전사포리 신당마을주민
2) 상남면 기산리 우곡.이연마을주민
3) 상남면 남산리 남동.구법마을주민
필자(도재국)가 듣기로는 위 마을주민들은 전해오는 이야기로“남산봉화령에 종남산봉수대가 있었다”라고 전해오고 있다
특히“남동.구법마을 주민들”은 1960년대 말(末)까지만 해도 봉화령(봉수대 터)와 신당[新塘 : 필자(도재국)의 고향마을]마을을 경유하여 밀양장(密陽場)을 보고 오가는 것을 필자(도재국)는 어릴 때 장날마다 직접 보았다.
마. 봉수대 위치로 추정되는 주변의 지명(地名) 조사 내용
부북면 전사포리 신당마을에서 상남면 남산리 남동마을로 넘어가는 고개를“봉화령(烽火嶺, 봉화재)이라 한다. 신당마을과 남산마을 잇는 이 길은 지금 종남산 임도가 개설되어 있는데, 옛날에는 산중대로로 이용되어 말양장날이 되면 남산리 주민들이 밀양장을 보러 다니는 길로 이용되었다. 또 이 봉화령(일명 봉우재) 바로 아래에는 상남면 기산리 우곡마을 바로 뒷산이다. 이 마을 출신인 밀양축협장을 역임한 고(故) 이인호 선생도 생전(生前)에 종남산봉수대가 우곡마을 바로 뒷산인 ”제2봉의 6부 능선“에 있었다고 증언을 했고, 종남산 정상에 봉수대를 만드는 것을 반대했다.
바. 지명과 지리에 관한 각종 문헌(文獻) 조사
1) 밀주지(密州誌)
卽府之案山山頭有池 峯北有祈雨井 東麓有烽燧
위에서“東麓”이라 함은“종남산 정상의 동쪽에 제2봉이 있고, 제2봉의 어느 산록에 봉수대가 있었다”라는 뜻이다
사. 봉수대 위치로 추정되는 주변 묘지 소유자(후손)들 의견 청취 내용
1) 필자(도재국)의 입밀양조(入密陽祖)인 도만추 (都萬秋 : 300년쯤 전 대구에서 밀양으로 移居)의 둘째아들 도계적(都啓迪)의 묘소(墓所)가 봉화령(烽火嶺) 바로 아래에 있었는데 대동보(大同譜)에 그 위치를 “남산봉하(南山烽下)”로 기록하고 있음.
○ 성주도씨(星州都氏) 1797년 정사(丁巳) 대동보(大同譜) 사본(밀양광장 게재)
○ 성주도씨(星州都氏) 1934년 갑술(甲戌) 대동보(大同譜) 사본(밀양광장 게재)
아. 동아대학교박물관 및 가야문화재연구소의 종남산봉수대 위치 조사팀의 밀양시 의견 청취 여부
1) 동아대학교박물관 종남산봉수대 조사팀 및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에서 종남산봉수대 원래 위치를 조사할 때 밀양시의 의견 청취 여부 및 그 내용을 현재까지 필자(도재국, 손흥수)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본고(本考)의 별도 항목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필자(손흥수)가 밀양문화원 회원에게 종남산봉수대의 정상 건립을 반대하는 홍보물을 배부했을 때, 그 당시 밀양시와 업무적으로 평소 관련이 있는 밀양문화원의 장(長)으로서 홍보물 배부를 금지시킨 사건(아래 기록함)과 필자(손흥수)가 공사 관련자에게 공사 중단을 요청했을 때 전혀 말을 듣지 않은 것 등을 상기할 때 밀양시의 의견은 뻔한 것이었을 것이다.
자. 고지도(古地圖)에 표기된 봉수대 위치 조사 내용
『"종남산 봉수대"가 종남산 제2봉(峰)의 6부 능선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고지도는 다음과 같다. 필자(도재국)가 서술한 바와 같이 종남산 제2봉의 정상을 남산봉(南山烽)이라 표시하고 그 남산봉 정상에 봉화를 표시한 것은 “봉화대가 남산 즉, 종남산 제2봉의 정상에 있었다” 라는 것이 아닌, “제2봉의 어느 산록(6부 능선)에 있다” 라는 것을 의미한다.
1) 국립중앙도서관, 8번 각읍지도(各邑地圖)
2) 규장각, 필사본(방안식) 비변사인방안지도 밀양부
3) 규장각, 필사본(회화식) 경주도회(慶州都會) 좌통지도(左通地圖)
4) 규장각, 필사본(회화식) 지승(地乘) 밀양부
5) 규장각, 필사본(회화식) 여지도(輿地圖) 밀양부
6) 규장각, 필사본(회화식) 해동지도(海東地圖) 밀양부
7) 규장각, 필사본(회화식) 광여도(廣輿圖) 밀양부
차. 밀양문화원의 의견을 청취한다
필자(손흥수)에게는 종남산봉수대 건립 때 다음과 같은 일을 겪었다.
『종남산 봉수대 위치』가 종남산 정상이 아니고, 제2봉의 6부 능선에 있는 봉군들의 숙소 및 초소 유지(遺址)의 석축(石築)이 있는 곳이라고 하면서, 공사 관계자 측에 종남산 정상에 봉수대 복원을 해서는 아니 된다고 여러 차례 반대를 했으나 이를 무시하고 공사를 강행했고, 도리어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또 어느 날 밀양문화원 회원들이 단체로 타지(他地)로 관광버스 2대에 나누어 타고 문화유적 답사를 갈 때 필자(손흥수)가 종남산봉수대 위치가 종남산 제1봉의 정상이 아니고, 제2봉의 6부 능선에 현존하는 석축(石築)의 장소라고 기록된 홍보물을 버스 한 대에는 필자(손흥수)가 직접 회원들에게 나누어 주고, 다른 한 대의 버스에는 지인에게 부탁하여 회원들에게 좀 나누어 주라고 부탁을 하였는데, 며칠이 지난 후에 지인에게 “회원들에게 홍보물을 나누어 주었는지” 물어 보았더니 “문화원장이 나누어 주지 마라” 하여, “나누어 주지 않았다” 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 밀양문화원장은 밀양시의 입장에 동조하여 종남산봉수대 원래 위치가 종남산 제1봉의 정상이라고 주장했고, 봉수대 복원을 찬성했다.』
필자(손흥수)는 수시로 문화원 회원을 물론 불특정 밀양시민들에게 밀양의 역사와 지명에 대한 내용을 항목별로 홍보물을 작성하여 나누어 주면서 향토사를 알리는데 노력하고 있다. 지금까지 시민에게 배부한 것만 해도 수십 가지 항목에 수 만장이 된다.
종남산봉수대 위치 조사 및 건립 당시 밀양문화원장의 역사관이 이 정도였으니, 지금에 와서 그 당시의 의견이 어떠했는지를 조사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 당시 밀양문화원장과 밀양시장은 업무적으로 가까워 보였다.
카. 양(兩) 방향 대응(對應) 봉수 조망권역을 조사한다
봉수대의 위치를 고증하기 위해서는 해당 봉수대뿐만 아니라 양(兩) 방향의 대응 봉수와의 조망권역을 반드시 조사해야 한다.
향토 문헌의 각 기록과 고지도의 봉수대 표시 장소, 실재 복원 장소와 옛 종남산봉수대 터의 뚜렷한 흔적을 두고도 정확하게 조사를 하지도 않고,
①종남산봉수대 위치가 종남산 제1봉의 정상이다,
②종남산 제2봉의 정상이다“. 라는
갑론을박이 밀양 사회에서 분분한 것은 참으로 한심했고, 종남산 제1봉에 봉수대를 복원한 것은 잘못이다.
따라서 필자(도재국, 손흥수)는 관련 기관,단체 등의 이제까지의 잘못된 논리와 잘못된 조사, 잘못된 복원 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종남산봉수대의 원래의 위치는 ”종남산 제2봉의 6부 능선“이라는 것을 본고(本考)에서 다음과 같이 계속해서 증명한다.
타. 종남산봉수대를 수백년간 지켰던 신목(神木)의 도벌(盜伐)
종남산 임도(林道)가 개설되고 얼마 되지 않아 종남산봉수대 공사를 시작하였다. 옛 종남산봉수대 터 뒷 담벽에 거대한 괴목(槐木 : 일명 귀목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주변 마을 사람들 이야기로는 수령은 적어도 500년은 더 되었을 것이다. 이 나무는 종남산 신목(神木)으로 불렸고, 500년 이상 종남산봉수대를 지켰던 수호신(守護神)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목(神木)으로 불렀고, 주위 사람들은 일부러 올라가 촛불을 켜고 치성(致誠)을 드렸다.
나무가 도벌된 후에도 텅 빈 신목의 위치에 지금도 일부 사람들은 지나가면서 두손을 모아 고개 숙여 간절하게 치성을 드리는 것을 필자(도재국)는 가끔 보았다.
거대한 종남산 신목은 깊은 산중대로(山中大路)인 봉화령(烽火嶺 : 봉화재 : 봉화고개 : 봉우재)를 넘는 사람들에게는 한여름에는 쉬어가는 장소로, 멀리서는 이정표(里程標)로도 이용되었다. 나무가 워낙 커서 밀양시내 대부분의 지역인 읍내 전체와 삼랑진읍 임천.거족, 단장면, 산외면, 상동면, 부북면, 상남면, 하남읍 등에서도 이 나무가 보였다.
필자(도재국)가 서술하였지만, 이 신목은 입밀양조 둘째 아드님이신 도계적 선조님의 묘소에 수백년동안 년년세세(年年歲歲) 집안사람들이 벌초와 성묘, 묘사를 다니면서 쉬어 가던 장소여서 신목이 도벌된 후로 더욱 안타까웠다. 봉수대 터 주변에는 봉군들이 이용했던 우물과 채전(菜田), 천수답(天水沓)도 있었다.
주위 사람들은 멀리서 종남산 신목을 바라보면서“저 나무가 있는 곳이 종남산봉수대 터가 있는 곳이다”하고 말들을 하곤 했다. 그런데 종남산 임도가 개설되고 얼마 안 있어“종남산봉수대를 종남산 제1봉의 정상에 만든다”라고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고, 필자(손흥수) 등은 밀양시에 “종남산 정상이 봉수대 위치가 아니므로 건립하지 마라” 라고 항의도 하곤 했다. 그런 시기에 어느 날 갑자기 종남산봉수대 터에 있었던 거대한 신목이 사라졌다. 멀리서도 거대한 나무가 보였는데, 어느 날 자고 나서 종남산 쪽을 바라보니 신목이 사라진 것이었다.
필자(손흥수, 도재국)가 도벌된 후에 현장을 살펴보니, 포크레인으로 거대한 나무를 뿌리째 파서 가져가 버리고, 작은 나뭇가지 하나 남기지 않고 청소까지 하였고, 구덩이까지 다시 매워놓았다. 중장비도 소형이 아닌 대형 중장비라야 베고 캘 수 있을 정도의 거대한 나무였다. 통상적으로 보통의 나무 도벌꾼이라면 지저분한 잔가지는 남기고, 또 구덩이도 되매우지도 않는다. 필자(도재국, 손흥수)는 종남산 임도만 개설되지 않았다면 대형 포크레인과 덤프트럭도 올라가지 못했을 것이고, 신목을 도벌하지도 못했을 것인데 ----- 라고, 현장을 보고 장탄식을 했다.
파(13). 재야(在野) 향토사학자의 의견을 반드시 청취한다(설명문 삽입)
일반적으로 역사학자(歷史學者)를 관변역사사학자(官邊歷史學者)와 재야사역사학자(在野歷史學者)로 구분한다
향토사학자(鄕土史學者) 또한 일반적으로 관변향토사학자(官邊鄕土史學者)와 재야향토사학자(在野鄕土史學者)로 구분한다
사전(辭典)에서 “관변(官邊)”은 “정부측” 또는 “관청측”으로 정의하고 있다.
또 사전(辭典)에서 “재야(在野)”란 “벼슬하지 않고 민간에 있음” 또는 “(정치인이나 저명 인사로서) 공직(公職)에 있지 않거나 정치 활동에 직접 나서지 않고 있음”으로 정의하고 있다.
필자(도재국)는 39년의 지방공무원을 하면서 관청에서 향토사에 대한 업무는 보직(補職)을 맡을 수가 전혀 없었다. 그러나 관변향토사학자(官邊鄕土史學者)와 재야향토사학자(在野鄕土史學者)의 역사의식과 활동 등에 대해 똑똑히 보아왔고, 평생 향토사에 대해서 관심이 있어 개인적으로 조사 및 연구 활동을 해왔고, 퇴직 후에도 개인적으로 이렇게 활동하고 있다.
참고로 도재국과 손흥수는 2015. 5. 10부터 밀양시지명위원회 위원으로 2016. 9. 6부터 밀양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그 이전에는 관변(官邊)의 어떠한 활동에도 관여할 수 없었고, 지금도 재야(在野) 활동을 하는 입장이다
❶“관변(官邊)”이란 글자 그대로 “관변에서 서성거린다” 라는 뜻이고
“관변(官邊)”에서 서성거리면
○ “관변 세력과 교류”할 수도 있고
○ “그들 나름대로의 명예(예우)”를 얻을 수도 있고
○ “관변 세력과 교류”할 수 있다는 것은 향토사 관련 모든 영역에서 그들과 적어도 뜻을 같이 할 수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말 할 수 있다.
❷“재야(在野)”란 글자 그대로 “들판에서 외롭게 서성거린다” 라는 뜻이다
○“들판에서 외롭게 서성거린다” 라는 말을 경상도식(慶尙道式)으로 말하면
○“쓸쓸갱빈” 즉, “쓸쓸한 강변에서 서성거린다” 라는 뜻이다
○“쓸쓸한 강변”에서는 무엇을 얻기는 커녕
“모진 공격”을 받아도 어떠한 원군(援軍)도 없다 라는 뜻이다
○ 여기서 “모진 공격”이란 “바른 역사, 진실된 역사를 파헤치면
힘 있는 자와 힘 있는 측으로부터 공격과 위협을 당한다 라는 뜻이다.
○ 쓸쓸갱빈에 서면, 겨울이 오면 삭풍과 눈보라에 저항해야 하고, 여름이 오면 작열하는 햇빛에 달궈진 조약돌에 더욱 뜨겁고, 몰아치는 태풍과 쓸려오는 강물에 마구 휩쓸린다.
즉 “관변의 향토사학자 등이 정치, 종교 등의 세력과 가까이 교류하므로써 향토사를 왜곡해서는 안 된다” 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필자(도재국, 손흥수)가 지명위원 또는 향토사연구위원 활동을 한다고 해서 결코 “관변(官邊)에 서성이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 두며, 평생 재야(在野)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다.
하(14). 봉수대 위치로 추정되는 주변에 전죽전(箭竹田)이 있는지를 조사한다(추가)
종남산봉수대 터
사진은 필자(도재국)가 봉군의 숙소 겸 초소 터에 전죽이 자라고 있는 것을 베어내고 찍은 사진이다
전죽이 축대와 건물 터를 잠식하여 파괴하고 있어 베어내고 있다
전죽(箭竹)이란 “살대 또는 화살대”를 말한다. 그러니까 전죽전이란 화살대(화살을 만드는 대나무)를 재배하는 밭을 말한다. 전죽은 평평한 밭뿐만 아니라 산비탈 등 어느 곳이나 잘 자란다.
필자(손흥수, 도재국)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봉수대와 산성 주변에는 반드시 전죽전(箭竹田)이 있다. 전죽전이란 꼭 밭이 아니라도 산비탈에 형성되어 있다.
봉수대와 산성은 군인이 주둔하는 중요한 군사시설이고, 활과 화살은 군인의 기본(개인) 병기(兵器)이다. 그래서 군인이 주둔했던 봉수대와 산성 주변에는 반드시 전죽전(箭竹田)이 있고, 종남산 제2봉의 6부 능선의 임도변 옛 종남산봉수대 터에는 지금도 전죽(箭竹)이 자라고 있다.
※ 종남산 임도(林道)를 오르다 보면, 임도의 좌측에는 “상남면 우곡마을과 상남보건지소”로 내려가는 표식(말뚝식 스테인리스 스텐 표식)이 있고, 바로 맞은편인 임도의 우측에 봉수대 터(석축)의 언덕에 봉군(烽軍)들이 재배했던 전죽(箭竹)이 지금도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동아대학교박물관 종남산 봉수대 조사팀이 “봉수대의 봉군 숙소 겸 초소의 축대와 축대 옆에 지금도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전죽(箭竹)”을 눈여겨(석축과 전죽전을 연계하여) 조사했다면 『종남산 제2봉의 6부 능선의 임도변 옛 종남산봉수대 터의 석축(石築)』을 『돌무지』라 하지 못했을 것이다.
참고로 ❶밀양의 용두목에서 금시당(驪州李氏 齋舍)을 지나 살래마을(활성1통)까지 이어지는 비탈길을 따라 자라고 있는 전죽(箭竹)은 산성산[山城山, 일명 일자봉(一字峰), 원래 산명은 산성산이 아닌 자씨산(慈氏山)임] 북쪽의 호두산성(虎頭산성)과 자씨산 남쪽의 자씨산성(慈氏山城), 추화산성(推火山城), 추화산성봉수대(推火山城烽燧臺), 밀양읍성(密陽邑城)의 방어를 위한 무기인 화살 재료로 사용한 밀양부(密陽府)에서 관리한 전죽전(箭竹田)이었고, 이러한 증거가 이 일대를 고지도(古地圖)에 전죽전(箭竹田)으로 표시하고 있다. 또 활성1통을 전천(箭川)이라 하는데, 이 지명은 “살내마을”에서 유래하였다. “살래”의 “살”은 “화살의 살인 전죽(箭竹)”에서 유래했고, 천(川)은 마을 앞의 응천(凝川, 밀양강)에서 따온 것이다.
❷상동면 금산리 유산마을 뒷산의 분항봉수대 주변에도 지금도 전죽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❸다만, 고려 명종대(明宗代)에 “효심(孝心)의 난(亂)” 때 농민군이 축성(築城)한 보두산성(산외면 엄광리 뒷산)과 소천봉산성(상동면 솔방마을 뒷산), 대암산성(산외면 희곡리와 산내면 용전리 경계 東川邊)에는 전죽전(箭竹田)이 없는 이유는 농민군이 관군과 전투를 하면서 급히 쌓은 산성이므로 전죽전을 조성할 수가 없었다는 것을 추정해 볼 수 있다. 또 전죽전이 없다는 것은 이러한 산성을 효심 농민군(農民軍)이 쌓았다는 것을 더욱 명백하게 증거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❹전죽(箭竹)은 봉수대 및 산성이나 깊은 산속 독가촌(獨家村) 특히 사찰 등의 뒷면 울타리 또는 사방림으로 매우 유용하다. 사방림(砂防林)에 대해서는 별론으로 하고, 울타리로 유용한 것을 좀더 상세하게 말하면, 바람이 없는 고요한 날이면 적 또는 도둑 등이 “두꺼운 전죽 울타리”를 통과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인간이기에 산승(山僧)이라고 두려움이 없을 수 없다. 산승이 법당에서 기도를 올릴 때 적 또는 도둑, 자객 등이 사찰에 침입하기 위해 전죽 숲을 통과한다면 전죽 잎에 스치는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도저히 숨길 수가 없다. 이러한 바스락거리는 소리는 봉수대의 봉군이 초병근무를 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전죽은 화살 재료로써, 방어용 울타리로써 매우 유용하였고, 봉수대 주변에는 봉군이 반드시 전죽을 재배 및 관리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봉수대 위치를 조사했어야 했는데, 동아대학교박물관 종남산봉수대 조사팀이 이를 조사하지 않았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5. 지리지.고지도의 봉수대 위치 축약식 표기 원칙의 이해
옛 왕조시대에는 지리지(地理誌)를 작성할 때는 고도(高度)의 축약(縮約) 방법을 취했다. 이는 지리지 내용을 새길 목판 제작과 판각, 한지(韓紙)의 제조와 서책(書冊)의 인영(印影)을 위한 재정과 인력 부족이 원인이었다. 또 고지도를 제작할 때는 방안식(方眼式)은 목판으로 대축척(大縮尺)으로 제작.판각하고 회화식(繪畫式)은 소축척(小縮尺)으로 하여 지맥(支脈)의 형상까지 상세하게 그렸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전국 지리지와 방안식(方眼式) 고지도를 편찬.제작할 때는 지명 위치 서술 등을 축약하여 기록하거나 대축척 지도를 판각했으며 회화식(繪畵式) 고지도를 그릴 때는 소축척(小縮尺) 지도를 주로 붓으로 그렸다. 즉, 신증동국여지승람 편찬의 예를 든다면 남산봉수대의 위치를 기록할 때는“밀양부(密陽府) ○○방향 ○○리(里) 남산(南山)의 ○○봉(峰) ○○능선(稜線)에 있다”를 축약하여“밀양부(密陽府) 남산(南山)에 있다”로 표기했다. 이렇게 기록한 이유는 모든 지리지의 내용을 축약하므로서 목판의 수량과 완성된 책의 분량을 줄이기 위해서다.
필자(도재국)가 『국역신증동국여지승람』을 글자 크기 12포인트, 줄간격 160포인트로 하여 출력을 해 보니, A4용지로 대략 2,300쪽 정도의 분량이 되었다. 만약에 모든 지명과 지맥, 하천 등의 위치 서술 등을 축약하지 않고 상세하게 기록한다면 전체 분량이 지금보다 몇 배나 더 늘어날 것이며, 늘어나는 분량만큼 목판을 판각, 인영(印影)한다면 국가의 엄청난 인력과 재정 등이 소모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소축척 회화식 고지도”를 그릴 때는 주로 붓으로 그리기 때문에 산과 봉우리, 능선(지맥)을 상세하게 그릴 수 있지만 “봉우리의 몇 부 능선”까지는 지면(紙面)의 한정(限定)으로 세밀하게 표시하기만 매우 힘들다. 그래서 예를 들면 “종남산봉수대가 종남산의 제2봉의 6부 능선에 있었다면, 6부 능선에 봉수대를 그리는 것이 아니고, 일반적으로 제2봉의 정상에다 봉수대 그림을 그려 놓았다” 이것이 회회식 고지도에 표기된 봉수대 표시의 기본원칙이었다.
그런데 후세 일부 향토사학자들이 회화식 고지도의 독도(讀圖)하는 방법을 잘 몰라서 봉수대 그림이 봉우리 정상에 그려져 있으니까 그걸 보고 “봉수대가 봉우리의 정상에 있다”라고 지리지(地理誌)에 기록을 하므로써 “제2봉의 6부 능선에 있었던 봉수대의 위치”를 후세 지리학자 등은 “제2봉의 정상에 있었다” 라고 기록으로 하므로써, 더 후세(後世) 사람들에게 봉수대 위치의 혼란을 일어키는 원인을 제공했다
6. 동아대학교박물관 종남산봉수대 조사팀의 위치 착오 조사 내용
1997년도에 밀양시에서 종남산봉수대 위치 조사.확인을 위하여 동아대학교박물관 종남산봉수대 조사팀에 용역.발주한 『종남산봉수대복원자료수집기초조사보고서』를 분석한 결과, 이 보고서는 종남산봉수대의 위치를 왜곡하고 있고, 실재 종남산봉수대의 유지(遺址)를 둘러보고도 "돌무지" 라고 조사한 보고서 내용이 발견되었고 이는 잘못된 조사이다. 동(同) 보고서의 왜곡 및 조사 누락된 부분 등을 지면(紙面) 관계상 다 언급하지 못하고 요점만 다음과 같이 살펴본다
가. 동(同) 보고서 “Ⅲ. 종남산 봉수대” 조사 내용(원문)
[봉수대 위치 조사 기간 : 1997. 10. 30 ~ 1998. 1. 28]
1) 위치와 현황 (53쪽 ~ 55쪽)
■ 원문(原文) 요약 내용
가) 밀양시 상남면 남산리 종남산 정상에 있다
나) 봉수대 시설이 전파되어 흔적이 없다
다) 위치에 대한 밀양지역의 견해
①종남산 제1봉
②종남산 제2봉
③부북면 후사포리에서 상남면 남산리까지 종남산 8부 능선을 따라 개설된 임도 부근에 보이는 “돌무지”는 “산 위에서부터 내려온 돌들이 모여진 것”으로 일반적인 봉수대 유적에서 발견되는 토기편이나 특별한 유물들이 확인되지 않았으며, 지형적으로도 봉수대와 부속시설이 들어설 입지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았으며, 특히 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어 수풀이 우거지면 조망권역이 충분히 확보되지 않아 신속히 신호를 주고받아야 하는 봉수대가 들어서기에는 부적격한 지역으로 판단된다.
④그리고 제1봉은 과거 군용헬기장으로 조성되었던 지역이고
⑤제2봉은 현재 군용헬기장으로 사용되고 있는 지역이어서 지표상에는 헬기장의 표식만 있을 뿐 봉수대의 흔적은 확인할 수 없게 되었다
⑥그러나 두 지역 모두 정상부가 평평하고 넓어 봉수대가 입지하기에는 아주 양호한 지형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⑦그런데 봉수대가 있었던 지역에는 그와 관련되는 유물의 파편이나 담장이나 연대가 훼손되는 과정에서 흩어진 석재들이 주변지역에 흔적을 남기기 마련인데 제2봉의 경우에는 이러한 흔적들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도판 57, 58) 즉, 당시의 기와편이나 토기편 같은 유물들이 전혀 검출되지 않았으며 작은 자연암반들이 간간이 지표면에 노출되어 있음에도 깨어진 석재들은 매우 드물고 헬기장의 표식으로 흰색 페인트를 칠한 일부의 잔돌들만 잡초에 나타나고 있었다
⑧종남산 정상부인 제1봉에는 현재 산불감시초소가 들어서 있고 삼각점과 종남산 산정을 표시하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그런데 이 지역의 지형은 원형의 봉우리를 삭평하여 평탄하게 다듬고 아랫 부분을 돋구어 평탄하여 도면 22, 23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전체적인 평면 형태는 장방형에 가까운 지형으로 조성되어 있다. 이러한 특징은 봉수대와 부속건물지가 들어서기에 아주 적합한 지형일 뿐만 아니라 석재와 기와편, 토기편들이 매우 풍부하게 지표면에 노출되어 있으므로 이 지역에 봉수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조사를 실시하였다.
2) 위치와 현황 (53쪽 ~ 55쪽) 원문(原文) 요약
위 원문을 단락별로 나누어 살펴 반박하면 다음과 같다
■ 원문 [1]
③부북면 후사포리에서 상남면 남산리까지 종남산 8부 능선을 따라 개설된 임도 부근에 보이는 “돌무지”는 산 위에서부터 내려온 돌들이 모여진 것으로 일반적인 봉수대 유적에서 발견되는 토기편이나 특별한 유물들이 확인되지 않았으며, 지형적으로도 봉수대와 부속시설이 들어설 입지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았으며, 특히 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어 수풀이 우거지면 조망권역이 충분히 확보되지 않아 신속히 신호를 주고 받아야 하는 봉수대가 들어서기에는 부적격한 지역으로 판단된다.
3) 원문에 내용에 대한 필자(도재국)의 반박 내용
●의견문 [1]
현장 조사를 있는 그대로 조사했다면, 위 원문을 다음과 같이 기록해야 맞다. 이 내용은 현장을 둘러보면 어느 누구라도 인정할 수 있는 현장 모습이다. 모든 것은 “역사적 현장”이 묵묵히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동아대학교박물관 종남산봉수대 위치 조사팀은 이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또 더하여 왜곡시켜 버렸다. 필자(도재국 : 2016년 현재 65세)는 이 현장을 여러 번 둘러보고 안타까웠다. 고향마을의 뒷산이기에 어릴 때부터 이 현장이 종남산봉수대 터라고 들어 왔기에, 사실의 심한 왜곡과 부정(不正)에 더욱 안타까웠다. 또 이 조사보고서를 인정, 승인한 문화재청 등도 책임이 있다고 본다.
●“원문 [1]”을 “현장의 모습”대로 보고서를 작성한다면 다음과 같다
③필자(도재국과 손흥수)가 동(同) 장소에 조사를 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부북면 후사포리에서 상남면 남산리까지 종남산 6부 능선을 따라 개설된 종남산 임도(林道) 부근의 전죽(箭竹) 숲속에 있는 돌로된 축대는 “돌무지”가 아니다. 즉, 돌무지가 아닌“특수한 건축물(봉수대 숙소 및 초소)의 축대”이며, 산 위에서부터 굴러 내려온 돌들이 아니다. 이 축대돌은 부근의 제법 큰 돌을 주워 모아 견고하게 축대를 쌓은 것으로 일반적인 봉수대 유적에서 발견되는 봉수대의 봉군 숙소 및 초병들이 보초를 서는 건축물의 축대와 벽면 기초의 흔적이다. 필자(도재국 : 2016년 현재 65세)의 고향은 이 봉화령의 바로 아래인 “밀양시 부북면 전사포리 신당마을”이고, 옛날부터 이 유지(遺址)는 “종남산봉수대의 유지”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종남산봉수대 석축(石築)은 너무나 견고하게 쌓았기에 600년 풍상(風霜)에도 지금까지 거의 완벽하게 남아 있다.
[사진 2] 600년 비,바람에도 굳건히 버티고 있는 종남산봉수대 석축(石築)
※ 동아대학교박물관 조사팀은 이 석축을 산 위에서 굴러 내려온 "돌무지"라 했다
필자(손흥수, 도재국)가 이 장소의 지표면을 작은 나무 막대기로 낙엽을 긁어내고 약간만 파 보았는데도 투박한 기와 파편(봉수대 지붕 기와 파편)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또 지형적으로도 봉수대와 부속시설이 들어설 입지 조건이 갖추어져 있다. 특히 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어 해발고도가 낮음에도 불구하고 양쪽의 대응 봉수 방향으로 바라보면 우거진 수풀 사이로 북쪽의 추화산봉수대가 환하게 보이고, 남쪽으로는 백산봉수대 및 자암산봉수대도 환하게 보여, 조망권역이 충분히 확보되어 신속히 신호를 주고받아야 하는 봉수대가 들어서기에 아주 적합한 지역으로 확인되었다. 시야(視野)를 차폐하는(가리는) 잡목들은 하루만 베면 모두 제거할 수 있다.
동(同) 보고서에, “숲이 우거져 조망권이 확보되지 않는다” 라는 조사자의 주장은 매우 부적절하다. 봉수대 주변의 조망권을 가리는 잡목들은 24시간 365일 수백년을 근무하는 봉군들이 제거해야 할 그들의 복무 중의 기본이고, 그러한 잡목(차폐목)들은 봉군(烽軍) 5명 정도면 단 하루만에 다 베어낼 수 있는 량이다. 차폐목이 서 있는 산지(山地)의 면적으로 보아서 연료로 쓰기에도 부족할 정도의 차폐목 수량이다. 그리고 폐목(베어낸 나무)은 봉수대 숙소의 연료로, 봉화를 올리는 연료로 사용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불구하고 “나무(잡목)가 조망권을 가려서 봉수대 입지로 부적합하다” 라는 대학교수 등으로 구성된 조사팀의 보고서 내용은 필자(도재국, 손흥수)에게는 그들이 이 지역을 왜 자세하게 조사하지 않았는지 매우 의문스럽다.
다시 언급하지만, 사실이 이런데도 불구하고 잡목이 우거져 조망권이 확보되지 않는다는 대학 교수 등으로서의 조사자의 의견과 이런 이유로 봉수대 입지 조건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교수 등의 주장은 매우 불합리하다. 필자(도재국)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는 분들이 계신다면 지금 당장 어느 누구라도 이 장소에 올라가 보면 확인이 된다. 밀양시청에서 출발하여 승용차로 임도로 오르면 거리로는 6km 정도이고, 25분 정도면 현장에 도착할 수 있다.
④제1봉(종남산 정상)은 과거 군용헬기장으로 조성되었던 지역이고
⑤제2봉(종남산 제2봉 정상)은 현재 군용헬기장으로 사용되고 있는 지역이어서 지표상에는 헬기장의 표식만 있을 뿐 봉수대의 흔적은 확인할 수 없다
⑥두 지역 모두 정상부가 높아 사방의 조망권은 확보되나, 해발고도가 높아 봉수대 운영은 매우 부적합한 것으로 보인다. 또 해발고도가 높다고 해서 대응봉수의 조망권이 무조건 완전하게 확보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백산봉수대 및 자암산봉수대에서 종남산 제1봉과 제2봉 정상이 조망되는지 여부를 그쪽 봉수대에서 조망을 해 보아야 하는 문제점이 남아 있고, 그러한 확인까지 필자(도재국, 손흥수)가 한 결과, 종남산 정상과 제2봉의 정상은 원래의 종남산봉수대 터가 아니라는 것이다. 자세한 조사 결과는 별도 항목에 기록한 것과 같다.
⑦종남산 제1봉에는 봉수대가 있었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확인되지 않았고, 동(同) 조사팀에서 트렌치 하기 전에는 표면에 봉수대와 관련되는 유물의 파편이나 담장이나 연대가 확인되지 않았고, 평소에 헬기장의 표식으로 흰색 페인트를 칠한 일부의 잔돌들만 잡초에 나타나고 있었는데, 동아대학교박물관 종남산봉수대 조사팀에서 트렌치를 하여 출토된 유적의 파편들을 동 보고서 상의 사진을 통하여 본 결과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봉수대 유적물로는 보기 어렵다는 것을 먼저 말하고 싶다.(출토된 자기와 토기의 사진 전부는 다음 카페 밀양광장의 게시판에 있음)
⑧종남산 정상부인 제1봉에는 현재 산불감시초소가 들어서 있고 삼각점과 종남산 산정(山頂)을 표시하는 표석(標石)이 세워져 있다. 그런데 이 지역의 지형은 군용헬기장 조성으로 원형의 봉우리를 삭평하여 평탄하게 다듬었고 아랫 부분을 돋구어 평탄하다
3) 구조와 특징(도면 22, 23) (55쪽 ~ 57쪽) 원문(原文)
■ 원문 [2]
57쪽 圖面 22. 調査地域 測量圖
4) 終南山烽燧臺 圖版
■ 원문 [2]
149쪽 圖版 62. 烽燧臺 頂上部 트렌치에 露出된 圖形 竪穴構造(上)와 全景(下)
3) 구조와 특징(도면 22, 23) (55쪽 ~ 57쪽) 원문(原文)
4) 終南山烽燧臺 圖版
●의견문 [2]
필자(도재국)가 동아대학교박물관의 종남산봉수대 조사팀의 용역보고서 위 “원문 2”에 해당하는 부분을 조사, 분석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149쪽 圖版 62. 烽燧臺 頂上部 트렌치에 露出된 圖形 竪穴構造(上)와 全景(下)의 수준점 표시판(돌)』과 『57쪽 圖面 22. 調査地域 測量圖』를 비교한 결과, “원형의 지름”과 “삼각점 표식돌의 한 면(面)의 길이”를 직선으로 여러 “면(面)으로 연결(나열)한 길이”와 비교한 결과, 시굴 사진 속의 연대(煙臺 : 환상구:環狀構) 지름과 평면도 상의 연대의 지름을 서로 정확하게 맞추어 볼 수가 없어 동 조사보고서를 수긍하기가 어렵고 특히 연대(煙臺) 전체를 시굴한 평면도(平面圖)도 없어 신빙성에 많은 의문이 간다』
●의견문 [3]
5) 필자(도재국)가 동아대학교박물관의 종남산봉수대 조사팀의 용역보고서 중, 보고서에 게재된 자기와 토기의 사진 등을 살펴 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일반적으로 봉수대에서 출토되는 토기(기와)와 자기(식기)는 투박한데 비해, 동 조사보고서에 게재(출토)된 토기와 자기 등의 파편은 대부분이 제사용(祭祀用) 건축물 등의 유지(遺址)에서 출토되는 고급(高級) 자기와 토기인 점으로 추정되어 기와 파편 외는 봉수대의 유물로 보기가 어려우며, 고급 자기 등이 제사용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증거가 『密陽誌』 629쪽 종남산(終南山) 조(條)에 “종남산 제2봉에 봉수대가 없었고, 산봉우리(제1봉의 정상)에는 억석암지(抑石庵址)가 있었다” 라는 기록이 있다』에서 “억석암지(抑石庵址)”즉, 억석암(抑石庵)의 유물로서의 자기 등의 파편으로 보인다.(사진 등의 상세 내용은 다음 카페 밀양광장 게시판 참조).
『따라서 봉수대 유지(遺址) 조사를 할 때 출토된 고급스러운 자기와 토기는 억석암지의 유물임이 확실해 보이며, 『57쪽 圖面 22. 調査地域 測量圖』의 동쪽 “H” 자(字) 석열(石列) 유지(遺址)는 봉수대의 부속건물의 유지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이러한 단정은 봉수대의 연대와 거의 붙어 있어, 매일(每日) 신호를 할 때 불을 지피는 상황을 감안할 때 화재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또 이런 식으로 건물과 봉수대를 가깝게 설치하는 예가 없다. 결론적으로 『“H” 자(字) 석열(石列)』은 군용헬기장의 착륙장 표식으로 보인다』
동 조사보고서를 분석한 내용 또한 지면상 전부 여기에 게재할 수 없어, 다음(Daum) 카페 밀양광장의 “종남산봉수대 게시판”에 지형도 및 사진, 설명문 등과 함께 상세하게 게재를 해 놓았으므로 참조하기 바란다.
7.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의 종남산.백산봉수대 위치 착오 조사 내용
2015년도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에서 발행한 『경남지역 봉수Ⅲ(경남, 부산, 울산의 내지 봉수)』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4. 밀양시(57P ~ 87P), 가. 백산봉수대(57P ~ 60P), 나. 남산봉수대(61P ~ 71P), 다. 추화산봉수대(72P ~ 80P), 라. 분항봉수대(81P ~ 87P)”참조하기 바란다.
[이에 대한 원문(原文)의 전문(全文)은 필자(도재국)가 다음(Daum) 카페 밀양광장에 올려 놓았다]
가. 종남산봉수대 위치를 잘못 조사한 내용
위 책에 기록된 4개의 봉수대 중에서 종남산봉수대는 위치가 잘못 조사되었고, 백산봉수대의 위치는 명확하게 설정하지 못하고 있다. 먼저 종남산봉수대 위치가 잘못 조사된 부분부터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1)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에서는, 61P 복원된 남산봉수대 “개요”에 위치를 “종남산 정상”이라 했다.
2) 필자(도재국, 손흥수)가 조사한 결과, 남산봉수대 위치는 종남산 정상이 아니고, 종남산 제2봉의 6부 능선이다
3)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에서는, 현황(남산봉수대 제원)을 연대 13.4m × 8.2m 라 했다.
4) 필자(도재국)가 조사한 결과, 실재로 이러한 연대가 있었는지 의문이다. 의문을 제기하는 이유는 위 『4) 終南山烽燧臺 圖版 ●의견문 [2]』의 사유에 기인한다. 즉, 내지(내륙) 봉수의 연대는 일반적으로 별도로 설치하지 않는다는 견해에 따른다면 그렇다는 것이다.
5)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에서는, 62P ~ 66P, 남산봉수대(추정) “개요” 상, 남산봉수대는 현재의 팔봉산이라 했다.
6) 필자(도재국)가 조사한 결과, 팔봉산에는 남산봉수대가 없었다. 그 이유는 동 보고서 64P에 게재된 해동지도(海東地圖)의 밀양부 남산봉수대 고지도를 보면 필자(도재국)의 주장이 맞다는 것을 확인을 할 수 있다. 동 지도는 소축척 회화식 고지도이다. 따라서 지맥별로 산의 능선을 아주 세밀하게 그리고 있는데, 종남산 정상에서 부북면 전사포리 동암동 마암산(馬岩山)마을까지의 지맥을 살펴보면 산의 능선이 『종남산 정상 - 종남산 제2봉 - 종남산 제2봉의 6부 능선의 옛 종남산봉수대 터 - 관음사(절) - 마암산 - 예림』까지 선명하게 그려 놓았다.
그리고 종남산 제2봉의 6부 능선에서 다시 하나의 지맥이 갈라져 나와 남쪽으로 이어지는데 산꾼들은 이 지맥을 비슬지맥이라 한다. 이 지맥 산록에 현재 들어선 마을과 산봉을 살펴보면, 『종남산 제2봉 - 상남면 연금마을 뒷산 - 팔봉산 - 호치(狐峙) - 한국화이바(평촌공장) - 붕어등 - 어은동 - 낙동강변 오산(마을)』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눈여겨 볼 지명은 『호치(狐峙)』인데, 이 호치는 지금의 상남면 무량원마을과 연금리 금동마을을 넘나들던 여시태고개 즉, 야시고개인데 지금은 국도 24호가 왕복 4차선으로 개통되어 있고, 북서쪽 비탈이 팔봉산의 비탈이다. 다시 말하면 팔봉산의 남동쪽 비탈의 산록이 『호치(狐峙)』이다.
그런데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에서 2015년도 발행한 『경남지역봉수Ⅲ』64P 상단에는 설명문이 있고, 하단에는 해동지도(海東地圖)가 있는데 참조 바란다.
원문(原文)대로 설명문을 전재(轉載)하면서, 필자(도재국)의 의견을 같이 삽입한다
❶64P →『현재 남산봉수대가 복원된 곳은 종남산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고지도[①해동지도 밀양부 : 도재국 삽입 문장]상에 위치로 보아, 종남산뿐만 아니라 그 남쪽에 위치한 남산[②종남산의 제2봉인데,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에서는 현존하지 않는 별도의 산인 “남산”으로 보고 있음 : 도재국 삽입 문장]에도 봉수대[③이 봉수대는 종남산 제2봉의 6부 능선에 있었던 원래의 남산(종남산)봉수대임 : 도재국 삽입 문장]가 확인된다. 이를 시기별로 살펴보면, 먼저 해동지도(1750, 64P 하단 지도)에서는 밀양읍성을 기준으로 남서쪽의 종남산에는 봉수대 표시가 없으며, (그) 남쪽의 남산[이 산은 별도의 남산이 아닌, 종남산의 제2봉을 가리키는 것이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가 고지도의 독도(讀圖)를 잘못하여 존재하지도 않는 남산으로 만들었다 : 도재국 삽입 문장]에는 봉수대가 확인된다.
19세기 후반에 제작된 고지도[65P 3개의 고지도 중에서, 맨 아래 지도인 “그림 25. 밀양부 남산봉수대(1872년 地方地圖) : 도재국 삽입 문장]를 살펴보면 「朝鮮 後期 地方地圖」에는 현재 종남산[남산은 종남산의 동산이명(同山異名)이다. 소축척 회화식 고지도에는 종남산과 남산 2개를 같이 사용 및 표시했고, 대축척 방안식 고지도에는 같은 산군(山群)에 있는 여러 봉우리를 하나의 봉우리로 통합 표시했는데,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에서 이러한 사항을 모르고 고지도를 독도하다 보니 이런 잘못된 보고서를 작성했다 : 도재국 삽입 문장] 의 위치에 남산봉수대로 표시되어 있는 반면, 「大東輿地圖 1861」 : [56P 중간의 그림 24. 밀양부 남산봉수대(大東輿地圖) : 도재국 삽입 문장] 고지도가 표시되어 있다.
따라서 종남산, 남산 두 곳 모두 봉수대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이 문장에서 큰 실수를 했다. 종남산과 남산은 같은 산이고, 해동지도에 표시된 종남산 오른쪽에 봉화불과 함께 표시된 남산은 종남산의 제2봉인데, 이 남산을 호치(狐峙) 옆의 현재의 팔봉산으로 본 것이다. 1개의 봉수대를 2개의 봉수대로 잘못 독도(讀圖)했다 : 도재국 삽입 문장]
❷64P → 한편 「東輿圖(19세기 중엽)」: [68P 맨 위 고지도 : 도재국 삽입 문장] 에는 현재 종남산(고지도상 牛齡山) : [우령산에 봉수대가 있었는지는 도재국과 손흥수는 금시초문임]과 남산[지금의 종남산 봉수대임 : 도재국 삽입 문장] 두 곳 모두 고깔 형태로 봉수를 표시하였다.
종남산[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에서는 우령산을 종남산으로 오인하였다 : 도재국 삽입 문장]에는 채색되어 있지 않은 반면 남산[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에서는 남산을 종남산이 아닌 현재의 팔봉산으로 오인하였다 : 도재국 삽입 문장]에는 빨간색으로 채색되어 있다.
이렇듯 두 봉수대에 채색에서 차이를 둔 점은 봉수의 기능 또는 존속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우령산에 봉수대가 있었다면, 자암산 - 종남산 제2봉의 6부능선에 위치한 자암산봉수대 - 종남산봉수대 - 추화산봉수대 - 분항봉수대로 이어지는 노선에 봉화를 올리면 지금의 무안면과 청도면 지역에는 봉수 연락에 않되어 변방의 변고를 알리는 급보를 신속히 알 수가 없다. 그 이유는 자암산봉수대와 백산봉수대, 종남산봉수대, 추화산봉수대, 분항봉수대의 해발고가 낮아 무안면과 청도면 지역은 동쪽인 밀양부 쪽의 지맥이 높아 봉화가 피어 오르는 것을 볼 수 없기 때문에 보조기능의 봉수대가 우령산에 존치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 도재국 삽입 문장]
❸64P → 지금까지 고지도를 살펴본 결과, 남산봉수대는 몇 차례 노선이 변경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남산봉수대는 조선 초기에 종남산 제2봉의 6부 능선에 최초로 설치된 이후로, 1894년 봉수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노선이 변경된 사실이 전혀 없다 : 도재국 삽입 문장]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 이유는 현재 복원된 종남산은 입지상 대응 봉수를 조망하기 어렵고, [현재 복원된 종남산봉수대는 입지상 대응 봉수인 추화산봉수대는 조망이 잘 되나, 남쪽의 백산(송산)봉수대는 조망이 되지 않고(백산의 서낭당과 돌탑 부근에서는 종남산 정상이 보임) : 도재국 삽입 문장], 고지도에는 봉수대가 종남산이 아닌 남산[이 남산은 종남산의 제2봉인데,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이 남산을 팔봉산으로 오인하여 조사보고서를 잘못 작성해버렸다 : 도재국 삽입 문장]에 주로 표기되어 있기 때문이다.
❹필자(도재국)가 확인한 결과,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에서 작성한 위 ❶ ❷ ❸ 내용 중에서 『비슬지맥(琵瑟支脈)이 종남산 정상 - 종남산 제2봉의 6부 능선의 원래의 종남산봉수대 터 - 금동마을 뒷산 - 호치(狐峙) - 한국화이바 평촌 공장 - 붕어등 - 어은동 - 오산 - 낙동강』에서 끝이 났고, 『종남산 제2봉의 6부 능선의 원래의 종남산봉수대 터 - 마암산 - 예림에서 끝나는 일명 마암산지맥』의 분간을 하지 못하고, 주군현(州.郡.縣)의 남산(南山)과 그 남산의 이명(異名 : 本名)을 분간하지 못하므로 인해서 팔봉산을 남산으로 오인(誤認)하여 이름을 짓고, 이 남산을 비슬지맥의 호치 옆의 팔봉산으로 오인하여 위 문장을 작성하므로써 고의(故意)는 아니지만 “종남산(一名 남산)봉수대가 팔봉산(남산)에 있었다” 라고 문서를 잘못 작성하였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이름 그대로 봉수대 등 문화재를 조사, 홍보하는 국가기관이다. 이런 기관이 이런 잘못된 책을 만들어 여러 곳에 배포하므로써 선의(善意)로 한 행정행위(行政行爲)지만, 결론적으로는 행정기관과 일반인들에게 사실이 아닌 것을 진실로 믿도록 하고, 향토사(鄕土史)를 왜곡하는 결과가 되었다.
나. 백산봉수대(栢山烽燧臺) 위치를 잘못 조사한 내용
1) 58P 19. 新增東國輿地勝覽 제26권 “密陽都護府”를“梁山都護府”로 오기되어 있어, 이를 “密陽都護府”로 수정해야 함.
8. 언론에 보도된 종남산 정상의 봉수대 복원 반대 보도문
密陽의 역사가 흔들린다남산봉수대 ``역사적 검증 미흡하다``
[2005-01-14]
밀양시가 2001년 사업비 3억원을 투입해
추화산 제2봉에 복원한 추화산봉수대에 이어
상남면 종남산 제1봉에 남산봉수대 복원 공사를 위하여
문화재청으로부터 사업비를 확보하고 착공 단계에 들어갔다.
복원사업비는 2억6천만원으로 밝혀져 있다.
이 복원사업에 대하여
밀양 향토사학가들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검증이 미흡하다는 우려와
제2봉설의 목소리가 힘을 얻어가고 있다.
◈봉수대(烽燧臺)는?
봉수는 국경 변방의 긴급한 상황을 조정 또는 변경의 기지에 알리는
군사상의 목적으로 설치된 통신수단이다.
산정과 산정을 잇는 봉수대는
밤에는 횃불로서, 낮에는 연기로서 신호하여 의사를 전달하였다.
우리나라에서 봉수의 기원은
가락국의 수로왕이 허황후를 맞이할 때 ‘봉화로 신호했다’는
『삼국사기 가락국기』의 기록을 근거로 하고
국법으로 봉수제도가 확립된 시기는 고려 의종3년(AD 1149)이다.
봉수의 중요 연락 노선은
함경도의 경흥, 경상도의 동래, 평안도의 강계와 의주, 전라도의 순천 다섯 군데를 기점으로 하여
모두 서울의 남산(목멱산)을 종점으로 연결하였는데
이 다섯 군데를 직봉이라 하였고 보조노선을 간봉이라 하였는데
두 노선이 교차되는 것을 합봉이라 하였다.
봉수의 신호체계를 보면
평상일에는 연기를 1번 올리고,
적이 나타나면 2번,
적이 국경 가까이 접근했을 때는 3번,
국경을 침범하였을 때는 4번,
교전이 붙으면 5번을 올렸다.
그러나 구름이 많거나 바람이 심하게 불면 봉수신호가 불가능하므로
봉군이 차례로 달리거나 역참의 말을 이용하여 위급함을 알렸다.
◈밀양의 봉수대는?
밀양에는 백산봉수(임란이후 설치), 남산봉수, 추화산봉수, 분항산봉수가 있었는데
고종 31년(AD 1894)에 봉수제도가 완전히 폐지될 때까지 이용되었다.
밀양의 봉수는
가덕도 연대산봉수대에서 칩입하는 왜적들의 동태를 파악하여
⇒ 녹산 봉화산(일명 성화례산)
⇒ 김해 분산
⇒ 자암산
⇒ 밀양 백산
⇒ 종남산
⇒ 추화산
⇒ 분항산
⇒ 경북 청도의 남산으로 전보하는 제8번 간봉선에 해당된다.
◈市가 종남산 제1봉에 남산봉수대를 복원하려는 이유는?
市는 종남산의 제1봉에 군사용 헬기장 공사가 이루어지면서 그 흔적이 없어진 상태이고,
1봉의 헬기장이 2봉으로 옮기면서 2봉 역시 흔적이 없어졌으며
봉수대 위치에 대한 여러 가지 設로 애매한 상황이라
1997년 동아대학교박물관 종남산봉수대 조사팀에 시굴 및 학술조사를 의뢰하였다.
97년 10월 30일부터 98년 1월 28일까지 약3개월에 걸친 발굴조사를 토태로
조사단은 ‘복원자료수집기초조사보고서’를 작성하였고
市는 이 보고서를 토대로
2000년 8월 31일 지방기념물 227호로 지정받고 복원작업에 착수하게 되었다.
◈조사보고서 내용은?
제1봉은 군헬기장으로 조성되었던 지역이고
제2봉은 현재 군용헬기장으로 사용되고 있는 지역이어서
지표상에는 헬기장의 표식만 있을 뿐 봉수대 흔적은 확인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러나 두 지역 모두
봉수대가 입지하기에 아주 양호한 지형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제1봉은 석재와 기와편 토기편들이 매우 풍부하게 지표면에 노출되어 있었고
제2봉에는 이러한 흔적들이 전혀 나타나지 않아
제1봉에 봉수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조사를 실시하였다.
이번 조사에서도
봉수대의 상부구조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는 확보하지 못하였지만
출토유물이나 지형적인 특징을 참고로 하여
이와 관련이 깊은 추화산봉수대를 통하여 그 구조를 추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아마도 정상부에는 화구시설 등이 있었을 것은 명확시 되며,
정상부임에도 많은 석재들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주변으로는 별로 높지는 않을 지라도 석축담장이 둘러싸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과거 종남산의 상부시설은 군용헬기장 건설로 인하여 완전히 파괴되었기 때문에
그 위치조차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웠다.
또 그에 대한 여러 이견(異見)이 있었으나
이번 조사를 통하여 종남산 제1봉 정상부에 봉수대가 위치하고 있었음이 명확시 되었다.
◈향토사학가의 제2봉 주장은?
가. 검증이 미흡하다.
제2봉은 현재 군헬기장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발굴조사 조차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헬기장 건설과 그동안의 이용으로 표면이 정리된 상태에서 지표면에 흔적이 없는 것은 당연하며,
헬기장이 파기된 제1봉의 지표면 흔적만으로 추정과 발굴 작업이 이루어져
추화산과 유사한 점을 들어 명확시 한다고 판단을 내린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만약 제2봉에 대한 발굴 작업도 함께 이루어졌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라는 판단이다.
나. 봉수대의 역사적인 운영체계에 따르면 제2봉이 더 신뢰성을 준다.
봉수대에는 여러 명의 봉졸이 있었고,
기상으로 인하여 봉수로 통신이 불가능할 때는 차례로 달리거나 말을 이용하여 위급을 알렸다는 점에서
봉수대는 봉졸이 거주하는 마을과 가까운 곳과
낮은 곳에서부터 통신수단이 적합한 곳을 우선적으로 선정하여 운영하였을 것이라는 게 일반적이다.
제1봉과 제2봉은 모두 봉수대가 위치하기에 적합한 지형적 조건을 갖춘 곳이고
제2봉의 가까운 아래쪽에 봉졸들이 기거했던 마을 흔적이 있는 것을 보아
제2봉에 봉수대가 있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한다.
봉졸들이 살았던 마을 터는 제1봉과 제2봉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고
1봉에서 2봉을 넘어 선 곳에 위치하고 있다.
다. 밀양의 역사가 기록된 ‘밀주지’에 제2봉에 봉수대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밀주지(密州誌)란? 밀양은 삼한시대 ‘미리미동국’이란 부족국가로 시작하여
신라에 병합되어 ‘밀성군’으로 되었고
고려시대에 ‘밀주군’이 되어 여러 번 변경되었다가
조선시대에 들어 밀양군으로 되었다.
밀주지는
조선시대 숙종 때 우리 지방의 역사를 정리하였고 구한말 재정리 되었으며
현재 참고하고 있는 밀양역사 서적으로는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 밀주지 기록 내용은 ?
원문 :
卽府之案山山頭有池 (추之以石)
峯北有祈雨井 (祭山靈)
東麓有烽燧 (南應金海子巖北應推火)
해설 :
(밀양)부의 맞은편에 있는 산으로 산마루에 못이 있는데 (돌로써 우물의 벽을 쌓았다)
산봉우리의 북쪽에는 기우제를 지내는 샘이 있어 (비오기를 비는 제사를 지냈다)
동쪽 기슭(제2봉을 말함)에는 봉수대가 있는데 (남쪽으로는 김해의 자암산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추화산에 응하였다)
이렇게 밀주지가 제2봉에 봉수대가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으며,
최근 문화원에서 발간한 ‘지명고’에도
제2봉에 봉수대가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고,
국내 거의 대부분 정보사이트 검색을 통하여 보아도 제2봉으로 기록되어 전하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市는 용역비를 투입하면서까지 전문발굴단을 통하여 조사가 이루어졌고
이미 지방기념물로 지정되었으며
문화재청의 승인을 득하여 복원에 대한 공사 발주 및 착수 단계에 돌입한 상태인 만큼
증거가 불충분한 제2봉 주장을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향토사학가들은
우물의 돌벽과 기우제 단 등이 있었던 제1봉에 대하여
지표면에 노출된 흔적만으로 이루어진 발굴조사에 충실하기보다
제2봉이 군사용 헬기장이라 발굴절차 과정이 어렵고 시간이 걸린다 할지라도
정확한 발굴조사와 역사적 고증을 거쳐야 한다는 주장이다.
많은 사업비가 투입되는 봉수대 복원은
시민들에게 살아있는 교육장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며
또한 밀양인들의 긍지와 자부심이 될 것인 만큼 역사적 고증이 불확실한 복원은 그 의미가 있을 수 없다는 이야기다.
특히 이번 복원공사에서는 관광자원화를 위하여
봉졸들이 살았던 마을까지 복원하여 역사적 현장감이 있는 복원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고 있다.
●위 신문보도에 대한 필자(도재국)의 입장
먼저 밀양신문 박영배 기자님의 향토 사랑과 종남산봉수대의 원래의 위치 고증을 위해서 기고를 하신 일에 대해 이 게시판을 통해 큰 고마움을 전합니다. 그리고 기사 내용에 대해 저의 의견을 다음과 같이 올립니다
제1봉이든, 제2봉이든 간에
봉수대가 높은 산봉우리에 있는 것만이, "봉수대 최적의 입지"가 아닙니다
봉수대가 제1봉(峰)이든, 또는 제2봉(峰)이든 간에
만약에 "산(山) 정상(頂上 = 봉우리)에 봉수대가 있다" 라는 선입감에서
봉수대 유허(遺墟)를 조사, 발굴, 고증한다면 큰 문제입니다
봉수대의 유허를
만약에 이런 식으로 조사, 발굴, 고증하였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남산(종남산)봉수대가 남산 제2봉에 있다” 라는 것은
“남산(종남산) 제2봉의 산 능선(稜線)의 어디엔가 있다” 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밀주지에 “東麓有烽燧”의 “동록”이란 제2봉의 산 능선(稜線)의 어디엔가 있다”라는 뜻입니다.
이런 전제 하(下)에
"봉수대 최적의 입지 기본원칙"에 따라
지표조사 등의 발굴작업을 하여, 고증을 하는 것이
그 당시 “남산(종남산)봉수대 유허의 조사, 발굴, 고증 용역단의 임무"일 것입니다
종남산 정상에는 "봉수대 공사 개요"가 봉수대 표지석 뒷면에 새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봉수대 공사 개요"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비문에 동아대학교박물관 종남산봉수대 조사팀의 조사,발굴 내용을 새기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따라서 그 당시의 “남산(종남산)봉수대의 조사, 발굴, 고증 용역단”이
이런 “봉수대 최적의 입지 기본원칙”에 따라 용역 작업을 수행하였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Ⅲ. 주.군.현의 남산의 개념과 종남산 정상의 유적발굴 평면도의 진실
1. 주.군.현(州.郡.縣)의 남산(南山)의 개념(槪念)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에서 고지도인 해동지도(海東地圖)를 독도(讀圖)할 때 착오를 일어켜 종남산 제2봉의 6부 능선에 있는 종남산(남산)봉수대를 상남면 한국화이바 제2공장 부근의 팔봉산(상남면 조음 뒷산)으로 오인(誤認)하여 중대한 문제를 일어켰다. 즉 종남산 제2봉의 6부 능선에 있는 남산봉(종남산봉수)를 팔봉산봉수대라 하고 그 팔봉산을 남산(南山)이라 오인하였다. 따라서 종남산봉수대 위치 정립에 중대한 착오를 일어킨 남산(南山)과 이에 대응하는 진산(鎭山)에 대한 개념을 명백하게 하므로써 해동지도에 그려진 실재 남산봉(南山烽)의 위치를 정확히 하고자 필자(도재국)는 다음과 같이 글을 쓴다.
가. 남산(南山)과 안산(案山)의 개념
남산(南山)은 주.부.군.현(州.府.郡.縣)의 관아(官衙)에서 남쪽으로 쳐다보아 마주보는 산을 남산(南山)이라 하고 일명(一名) 안산(案山)이라 한다. 국도(國都)로서의 한성(漢城) 왕궁을 마주보는 남쪽의 산을 남산(南山 : 서울의 남산)이라 하고 원래의 산명은 목멱산(木覓山)이다. 이와 같은 개념으로 밀양부(密陽府) 관아 남쪽을 마주보는 산을 남산(南山)이라 하고 본래의 산명은 종남산(終南山)이라 한다. 그러니까 하나의 산에 풍수지리적인 차원에서 붙인 이름이 남산이고 본래의 산명이 따로 있다는 뜻이다.
또 남산을 안산(案山)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개념은 마을에서도 가끔 사용한다. 그만큼 남산으로서의 안산의 중요성은 크다. 마을에서의 안산 개념의 예를 든다면 사포일반산업단지 남쪽의 “사포마을 남쪽 맞은편 산명이 삼태봉(三台峰)”이고 사포사람들은 옛날부터 이 산을 안산(案山)이라 불러오고 있는데, 필자(도재국)의 고향마을이 전사포리 신당마을(2009년경 산업단지 입지로 전부 철거)이었는데, 마을의 동쪽에 남북으로 3개의 봉우리가 나란히 있고 새벽에 동쪽 하늘을 쳐다보면 유난히 큰 별인 삼태성(三台星)이 빛나고 있어 삼태봉이라 이름이 붙었는데, 3개의 봉우리 중, 가장 북쪽에 있는 봉우리가 사포마을의 안산이 되는 것이다.
남산(南山)은 희망과 안정, 평온의 뜻을 내포한다. 모진 겨울이 지나가고 이른 봄이 찾아올 때쯤이면 풍류묵객(風流墨客)들은 영남루에서 멀리 종남산을 쳐다보며 잔설(殘雪)이 양(羊)떼처럼 점점이 박혀 있는 풍경을 시문(詩文)에 담아냈고, 시냇가 버들이 한창 물이 오를 때는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남산을 바라보며 노래하고, 농부는 밭을 갈고, 관헌은 고을의 풍년을 기원하며 정사(政事)를 펼쳤다. 이것이 한 고을의 중심에 자리잡은 남산(南山)에 대한 향토 풍경과 민족적 서정(抒情)이다.
나. 진산(鎭山)과 둔덕(屯德)의 개념
남산에 대응(對應)하는 산을 진산(鎭山)이라 한다. 남산의 반대 개념으로 진산(鎭山)은 주.부.군.현의 뒤쪽 즉, 북쪽에 위치하고 있어 북쪽의 흉(凶)한 세력인 외적(外敵 : 주로 북쪽 오랑캐) 등으로부터 고을을 방어(防禦 : 鎭)하는 개념이 내포된 산의 이름이고, 또 자연적으로는 하루종일 남쪽 중천(中天)의 따뜻한 햇빛과 온기(溫氣)를 받아 모으고 북쪽의 세찬 북풍을 막아 한 고을을 보위(保衛)하는 뜻을 가진 산으로서의 밀양의 진산은 화악산(華岳山)이다. 산명에서 보는 바와 같이 남쪽에서 멀리 화악산을 바라보면 남향인 화악산은 온종일 환한 햇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고 있어 “빛날 화(華)”와 “거대한 산의 뜻 즉, 큰 산의 뜻을 담은 악(嶽 = 岳)”을 따서 화악(華嶽 : 華岳山)이라 했고, 이 화악산을 일명 둔덕(屯德) 또는 둔덕산(屯德山)이라 한다. “둔덕”의 둔(屯)은 군사와 관련되는 글자이다.
다. 밀양(密陽)의 남산(南山) 및 진산(鎭山) 차원의 지명 변천 사례
삼한시대 밀양의 읍락국가였던 미리미동국(彌離彌凍國) 이래 밀양의 지명이었던 밀성(密城)은 비밀스러운 수많은 성(城)의 뜻을 가졌지만, 그 후 지명의 미화(美化) 단계를 거치면서 따뜻한 햇빛이 빽빽하게 내리쬔다는 뜻에서 밀양(密陽)으로 변했고, 빽빽한 햇빛(열량)을 가장 많이 필요로 하는 벼(쌀) 육종지(育種地)로서 우리나라 최적의 장소가 과거의 영남작물시험장으로 우리나라 최고의 다수확 품종인 통일벼를 만들어 4천만 국민을 굶주림으로부터 해방시킨 최고의 농업육종기관이었다는 것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필자(도재국)가 위와 같이 장황하게 남산(南山)과 진산(鎭山)의 개념을 설명하는 이유는 향토사(鄕土史)와 역사(歷史)에 관심을 갖는 분이라면 일반인은 말할 것도 없고 향토사학자 또는 사학자로서 남산과 안산, 진산과 둔덕에 대한 개념을 정립한 상태에서 향토사 조사, 연구 등을 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역사 인식을 강조하기 위해서이고, 이러한 역사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을 갖지 못하는 상태에서 봉수대 또는 산성, 지명, 지리, 역사 등등을 조사, 연구한다면 역사적 사실이 아닌 방향으로 왜곡될 수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이다
라. 남산(南山)과 진산(鎭山)의 사전적(辭典的) 의미
남산(南山).안산(案山)과 진산(鎭山).둔덕(屯德)의 사전적(辭典的)인 뜻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남산(南山) : 남산에 있는 산
2) 안산(案山) : 풍구지리설에서, 집터나 묏자리의 맞은편에 있는 산을 이르는 말
3) 진산(鎭山) :
가) 지난 날, 도읍이나 성시(城市) 등의 뒤쪽에 있는 큰 산을 이르던 말 [그 곳을 진호(鎭護)하는 주산(主山)으로 삼아 제사를 지냈음]
나) 도읍(都邑)의 뒤에 자리잡고 있는 산
4) 둔(屯) : 둔을 치다(勒兵守)
5) 둔덕 : 두두룩하게 언덕진 곳
※ 화악산을 멀리서 쳐다보면 이런 형상으로 보인다
6) 둔땅 : 둔답(屯畓)과 둔전(屯田)을 아울러 이르는 말
7) 둔병(屯兵) : 어떤 곳에 머물러 있는 병사. 둔전병(屯田兵)의 준말
8) 둔영(屯營) : 군사가 주둔한 곳
9) 둔전(屯田) : (왕조 때) 주둔하고 있는 군대가 군량(軍糧)을 지급하도록 마련된 밭
10) 둔전병(屯田兵) : (왕조 때) 군사적 중요 지대나 군사가 오래 머물러야 할 곳에 주둔하여 둔전답(屯田沓)을 짓던 병종, 평시에는 토질르 경작하고 전시에는 전투원으로 동원되었음
마. 해동지도 밀양부에 표시된 비슬지맥과 마암산지맥 독도(讀圖)
1) 마암산지맥(馬岩山支脈)
해동지도에 표시된 지맥(능선)을 보면 종남산 정상에서 제2봉을 거쳐 마암산(馬岩山), 예림(禮林)까지 그려져 있다. 필자는 편의상 이 지맥(6부 능선 봉수대 터 ~ 예림 구간)을 일명 “마암산지맥”이라 칭하며, 지맥에 다음과 같은 지명과 역사적 유적인 종남산봉수대 터가 있다.
가) 종남산 제2봉 6부 능선 : 종남산봉수대 터
나) 마암산(馬岩山) : 밀양시 부북면 전사포리 동암동에 속한 자연마을
다) 예림(禮林) : 밀양시 상남면 예림리
2) 비슬지맥(琵瑟支脈)
비슬지맥은 대구 팔조령 부근의 비슬산(琵瑟山)의 지맥이 남(南)으로 달려 화악산과 밀양시 청도면 앞고개, 마흘리고개(羅峴, 日峴), 우령산, 영현(鈴峴 : 鈴峙), 종남산 정상, 종남산 제2봉 6부 능선 상의 종남산봉수대 터, 상남면 연금마을 뒷산, 팔봉산[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에서는 이 산을 “남산(南山)”이라 기록하였음], 호치(狐峙), 한국화이바 평촌공장, 붕어등(鮒魚嶝), 오산을 지나, 낙동강에서 끝이 난다.
붕어를 한자로는 부어(鮒魚)로 표기한다. 따라서 붕어등을 한자로는 부어등(鮒魚嶝)이라 표기한다. 붕어등은 밀양시 상남면 외산리 어은동(魚隱洞)마을 뒷산을 말하며, 어은동마을은 낙동강과 상남천이 합류하는 부근으로 마을 앞 늪지대는 물고기가 많아 물고기가 숨어있다는 라는 뜻으로 어은동(魚隱洞)이라는 지명이 붙었고, 그 마을 뒷산이 붕어등(鮒魚嶝)인데 밀양지명고(密陽地名攷)에 상세하게 나와 있다.
필자(도재국)가 비슬지맥(琵瑟支脈)을 중언(重言)하는 이유는 이 비슬지맥이 마암산지맥과 구분된다는 뜻이며, 또 남산봉(南山烽 : 남산봉수대)이 비슬지맥의 호치(狐峙 : 여시태고개) 부근의 “팔봉산”에 있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이 팔봉산도 원래는 산봉우리가 뾰쪽하다는 뜻에서 필봉산(筆峰山)이었는데, 어느날 누군가가 “팔봉산”으로 둔갑시켜 버렸다. 한글 “필” 字가 “팔” 字로 오인되어 함부로 사용하다 보니 이렇게 된 것 같다. 이와 마찬가지로 팔봉산에 봉수대가 없었는데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같은 국가적인 역사연구기관이 이 산에 봉수대가 있었다고 책까지 펴냄으로써 산 이름 왜곡에 이어 또 존재하지도 않았던 봉수대도 있었던 것으로 왜곡되는 것은 잘못되었다
바. 붕어등지맥(鮒魚嶝支脈)의 호치(狐峙)와 영은사(靈隱寺)와 상남천(上南川)
해동지도에 표기된 지명과 그림(河川)을 독도(讀圖)하면 다음과 같다. “독도란 고지도를 읽는다 즉, 이해한다” 라는 뜻인데, 필자(도재국)가 계속 언급하는 이유는 고문헌과 고지도와 관련한 지지(地誌) 등을 보면 독도(讀圖)로 많이 표현하기 때문이다.
1) 호치(狐峙)
앞 장(章)에서도 서술하였지만, 이 『호치(狐峙)』 지명이 기재된 해동지도(海東地圖)는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가 종남산봉수대의 위치를 왜곡시켰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또 앞으로도 남산봉(南山烽)이 팔봉산에 있다는 왜곡을 방지하는 가장 중요한 지명으로 남아 있기 때문에(팔봉산의 위치를 알려 주는 이정표 역할을 함) 별도 항목으로 다시 언급을 하겠다
이 지명(호치:狐峙)은 “팔봉산이 해동지도에 표시된 남산봉이 아니다” 라는 역사적인 매우 중요한 지명(地名)이기에 언급한다. 고지도인 해동지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호치(狐峙)”는 남산봉(南山烽)이 표시된 일명(一名) 마암산지맥(馬岩山支脈)과는 전혀 다른 별도의 지맥인 비슬지맥(琵瑟支脈)에 위치한다. “호치(狐峙)”바로 남쪽이 지금의 한국화이바 평촌공장이며, 호치는 상남면 평촌리와 연금리를 경계로 하는 고개의 이름으로 일명 여시태 또는 야시고개이다. 옛날에 여우가 많이 서식했다는 뜻이다.
[사진 3] 해동지도(海東地圖) 밀양부(密陽府) 종남산봉수대 부근
※ 비슬지맥과 마암산지맥의 분기점(제2봉 6부능선)에 종남산봉수대(南山烽)가 있다
2) 영은사(靈隱寺)
해동지도에 표기된 영은사(靈隱寺)는 종남산 정상의 바로 남쪽인 지금의 상남면 남산리 구법마을이다. 구법마을을 일명 구베기마을로 남산리의 중심마을로 이 마을의 바로 뒤쪽인 종남산 정상의 바로 아래에 자리했던 밀양의 유서 깊은 고찰이었으나 조선시대에 폐사(廢寺)되었다. 원래의 종남산봉수대는 영은사에서 동쪽으로 500미터 정도 떨어진 비슬지맥과 마암산지맥이 갈라지는 위치 즉, 종남산 제2봉의 6부 능선에 위치했다. 따라서 필자(도재국)는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영은사 지명을 강조한다.
3) 상남천(上南川)
해동지도의 종남산과 영은사에서 남쪽으로 “부남이동면(府南二同面)”이 기록된 지점까지 표시된 하천이 지금의 상남천이다. 상남천의 오른쪽 지맥(능선)에 호치(狐峙)라고 표시되어 있다. 즉 호치가 표시된 지맥이 비슬지맥 이라는 것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상남천의 하천 줄기를 설명한다
사. 해동지도 밀양부에 표시된 지명 설명
필자(도재국)는 고지도 독도(讀圖) 능력이 떨어지면 역사를 왜곡시킬 우려가 있다는 지적을 항상 한다. 특히 원래의 종남산봉수대가 위치한 지맥 구분을 잘못하여 즉, 마암산지맥과 비슬지맥의 분기점(해동지도에는 南山烽이 종남산 제2봉에 그려져 있음)에 위치한 남산봉(南山烽)을 비슬지맥의 팔봉산에 있다는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의 잘못된 주장을 볼 때 독도(고지도를 이해하는 방법)의 중요성은 더욱 강조된다. 따라서 위에 게재된 해동지도에 표시된 지도를 일반인들이 좀더 이해하기 쉽게 “면(面) 단위 지명”을 설명하고, 다른 지명 등은 지면 관계상 생략한다.
1) 하서면(下西面) : 지금의 밀양시 무안면, 청도면
※ 외서면(外西面): 지금의 밀양시 청도면(1912년 이전에는 경북 청도군 外西面)
2) 상서이동면(上西二同面) : 지금의 밀양시 초동면
3) 상서삼동면(上西三同面) : 지금의 밀양시 무안면 덕암(德岩), 중산(中山), 고라(古羅), 웅동(熊洞), 가례(佳禮)
4) 부남면(府南面) :
①옛날에는 지금의 상남면, 하남읍 전역
②그후 지금의 밀양시 상남면 전역
5) 부남초동면(府南初同面) : 지금의 밀양시 상남면 전역
6) 부남이동면(府南二同面) : 지금의 밀양시 하남읍 일부
※ 해동지도에 지금의 상남면 평촌 일대로 표기 했으나 착오임
7) 부남삼동면(府南三同面) : 지금의 밀양시 하남읍 지역 일부
8) 하동면(下東面) : 지금의 밀양시 삼랑진읍 전역
9) 하동초동면(下東初同面) :
①옛날에는 금음물리(今音勿里), 광탄(廣灘)
②지금의 밀양시 삼랑진읍 전역(林川,崇眞,龍星,靑鶴 제외)
※ 금음물리(今音勿里)는 현재 임천(林川), 숭진(崇眞), 용성(龍星), 청학(靑鶴)으로 됨.
10) 하동이동면(下同二同面) : 지금의 밀양시 삼랑진읍 임천,숭진,용성,청학
11) 중동면(中東面 一名 천화면:穿火面)
① 처음에는 지금의 밀양시 산내면, 산외면, 단장면 전역
※ 상동면(上東面)과 하동면(삼랑진읍)의 중간에 있다 하여 중동면(中東面)임
12) 중초동면(中初同面) : 지금의 밀양시 산내면(穿火산내면)
13) 중이동면(中二同面) : 지금의 밀양시 산외면(穿火산외면)
14) 중삼동면(中三同面) : 지금의 밀양시 단장면
※ 위와 같은 지방행정구역은 일제통치기간인 1912년 ~ 1914년 사이에 지금의 『면(面) 행정구역체제』로 개편되었고, 산업화의 시작과 함께 농촌인구의 도시로의 이동으로 면(面)이 읍(邑)으로 승격, 다시 도시로의 대이동(大移動)으로 수많은 동(洞)으로 분화되었다.
2. 종남산(終南山) 정상(頂上)의 유적 발굴 평면도(平面圖)의 진실
[사진 4] 보고서 57쪽, 圖面 22, [調査地域 測量圖]
※ 위 평면도 내용 중에 환상구[環狀構:연대(煙臺)] 외는 봉수대로 추정되는 내용은 거의 없는 것으로 보임.
[사진 5] 보고서 149쪽, [圖版 62, 烽燧臺 頂上部 트렌치에 露出된 圓形 竪穴 遺構(上)와 全景(下)]
※ 환상구[環狀構:연대(煙臺)] : 위 사진 동그라미 안
앞 장(章)에서도 서술하였지만, 이 평면도는 종남산봉수대 위치를 왜곡하는 가장 중요한 단서이기 때문에 별도 항목으로 다시 언급을 한다
위 평면도는 동아대학교박물관의 종남산봉수대 위치 조사팀의 보고서에 게재된 것으로 필자(도재국, 손흥수)를 비롯한 종남산봉수대의 원래 위치를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이 평면도뿐만 아니라 본 대학박물관 조사팀의 조사보고서를 인정하기가 어렵다.
즉, 많은 사람들은 동아대학교박물관의 조사보고서를 믿지 않고, 유적(遺蹟)인 봉수대 시설의 석축(石築) 등을 보고 “원래의 종남산봉수대 터는 종남산 제2봉의 6부 능선”으로 알고 있다.
사실이 이런 데도 불구하고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까지도 2015년도에 동 대학박물관 종남산봉수대 유적 조사팀의 조사보고서를 인용하여 『경남의 봉수Ⅲ』책 속에 이해하기 어려운 이 평면도를 게재하여 동 대학박물관 조사팀의 봉수대 위치 왜곡을 또 인용(인정)하였기 때문에 필자(도재국, 손흥수)는 동아대학교박물관 조사팀이 작성한 보고서 상의 평면도를 게재하여 조사의 잘못을 널리 알리고자 다시 설명을 한다.
전술(前述)한 바와 같이,
❶동아대학교박물관 동(同) 보고서 57쪽의 도면 [22, 조사지역 측량도 평면도] = [위 사진 4] = [남산봉수대 평면도(동아대학교박물관. 1997)]에 보면
(1) “추정 봉수대”와 “추정 건물지”
왼쪽(서쪽)의 “추정 봉수대”와 오른쪽(동편)의 “추정 건물지”가 있다
(2) 추정 봉수대
추정 봉수대는 봉수대(煙臺)로 설명하는 그림(사진)이다.
(3) 추정 봉수대의 삼각형 축대 기초
추정 봉수대의 삼각형 축대 기초는 얼핏 보면 연대(煙臺)를 보호하는 돌담으로 보는 것 같으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아닌 것 같다.
(4) 추정 봉수대의 삼각형 축대 기초 중에서 남북(南北)으로 설치된 석열
추정 봉수대의 삼각형 축대 기초 중에서 남북(南北)으로 설치된 석열은 오른쪽 추정 건물의 방화벽으로 보는 것 같으나, 전혀 그렇지 않다. 군용시설의 어떤 표지로서의 삼각형 석열(石列)이다.
(5) 추정 건물지(建物址)는 봉군(烽軍)의 숙소 겸 병기고, 초소 등?
추정 건물지(建物址)는 봉군(烽軍)의 숙소 겸 병기고, 초소 등?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설명하는 것 같다.
(6) 추정 봉수대의 삼각형 축대 기초를 둘러싸고 있는 원형의 축대 기초석
추정 봉수대의 삼각형 축대 기초를 둘러싸고 있는 원형의 축대 기초석은 추정 봉수대의 지반을 구획하는 낮은 축대 즉, 평탄면의 축대로 보이며 축대의 높이는 추정 봉수대 지표면(地表面)과 같을 것으로 보인다.
(7)“표고점 표지석”이 그려진 “원형(圓形) 기초석 석열”
“표고점 표지석”이 그려진 “원형(圓形) 기초석 석열”은 봉수대의 불꽃이나 연기가 피어오르는 [①연대(煙臺)]로 설명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8) [연대(煙臺)]로 설명하려는(보려는) 수혈(竪穴) 원형(圓形) 그림]
[연대(煙臺)]로 설명하려는 수혈(竪穴) 원형(圓形) 그림은 동(同) 보고서 149쪽의 [②圖版 62, 烽燧臺 頂上部 트렌치에 露出된 圓形 竪穴 遺構(上)와 全景(下)] = [위 사진 5]와 연계해서 다시 언급하겠다.
(9) “추정 봉수대”와 추정 건물지”의 거리가 10미터 정도
위 사진에서 보듯이 “추정 봉수대”와 추정 건물지”의 거리가 10미터 정도로 매우 가깝다
(10) “추정 건물지”의 삼각형 석열(石列)은 군용헬기장.군사시설의 어떤 표지
추정 건물지의 삼각형 석열(石列)은 군용헬기장 및 군사시설의 어떤 표지로 보인다. 그러니까 추정 건물지의 H 字 석열(石列)은 군용 헬기 이착륙장 표지이고, 삼각형 석열(石列)은 군용시설의 무슨 표지판으로 보인다. 봉수대의 시설은 전혀 아닌 것 같다.
(11) 문제점 (두 건물에 가깝게 위치해서 화재에 매우 취약)
추정 봉수대가 봉수대이고 추정 건물지가 봉수대에 딸린 관리동 건물(봉군의 숙소 겸 초소.병기고 등으로 사용한 건물)이라면, 2개의 건물이 너무 붙어 있어 화재에 매우 취약해 보인다.
왜야하면 봉수대(煙臺)에서는 매일 낮에는 연기를 올리고, 밤에는 불을 피워 대응 봉수에 전달해야 한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365일 500년 동안 불과 연기를 피웠다면 화재가 나도 많이 났을 것이다. 종남산 정상과 한참 아래의 주변은 겨울부터 봄까지는 일년초의 마른 풀로 덮혀 있고 항상 센 바람이 분다.
관리동(管理棟)에는 불과 연기를 피우기 위해 마른 풀을 연료로 저장해 두었을 것이다. 연기를 피울 때는 늑대(이리) 등의 마른 똥을 연료로 사용한다고 전해 오지만 늑대(이리)의 똥을 항상 채취하기가 힘들기 때문에 건초를 사용했을 것이고, 야간에 불꽃을 올리기 위해서는 건초(乾草)가 반드시 필요했을 것이다. 또 겨울과 봄의 건조한 날씨에 화약처럼 매마른 건초(마른풀)에 작은 불똥이라도 날아들면 봉수대 관리동 건물은 바로 잿더미로 변한다.
그래서 필자(도재국, 손흥수)는 봉수대(煙臺)와 봉군의 관리사가 너무 가깝게 붙어 있어 추정 건물지가 봉수대의 관리동 건물이 아니라는 판단을 내리며, 이 건물지(建物址)는 밀양지(密陽址)에 기록된 억석암지(抑石庵址)의 터로 보인다. 이렇게 보는 이유는 종남산 정상에서 봉수대 관리동의 지붕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투박한 기와 파편보다는 제사용 등으로 사용되었을 고급스러운 무늬가 있는 자기(瓷器)와 토기(土器)가 많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옆의 추정 봉수대로 표시한 시설물은 <첫째> 건물 간(間) 너무 가깝게 있어 봉수대 시설물이 아니라는 것이며, <둘째> 출토되는 자기와 토기로 보아서 제사용으로 사용한 고급스러운 것이고, <세째> 억석암이 종남산 정상에 있었다는 밀양지의 기록을 연계해 볼 때 종남산 정상에는 봉수대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여진다. 그리고 종남산 정상에 <네째> 군용헬기장이 있었기에 추정 건물지와 추정 봉수대를 평탄한 지면(地面)으로 만들고 그 둘레에 빗물에 흙이 씻겨 흘러내리지 않도록 지면과 평탄하게 석축 등을 쌓은 것을 필자(도재국, 손흥수)는 다른 산정(山頂)의 군용헬기장에서도 많이 보았다. <다섯째> 추정 건물지의 “H 字 석열(石列)”은 군용헬기의 이착륙장을 표시한 것이며 건물지(建物址)의 흔적이 아니다. <여섯째> 추정 건물지의 “H 字 석열(石列)”을 둘러싼 원형(圓形) 석열 또한 군용헬기 이착륙 표시인“H 字 석열(石列)”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12) 표고점 표지석의 1면의 길이가 11.5cm
추정 봉수대 그림(사진) 속에 사각형 표고점의 표지석(石)이 보이는데, 이 표지석은 당시에 국토교통부에서 각 지방자치단체에 업무를 위탁(지시)하여 토지와 지적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부서에서 관리를 했는데, 그 표지석의 재질(화강석)과 규격(가로 × 세로)이 전국적으로 통일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표지석의 1면의 길이가 11.5cm” 인데 이 규격은 [②도판 62, 봉수대 정상부 트렌치에 노출된 원형 수형 유구(상)와 전경(하)] = [위 사진 5]의 사진 속의 원형 수혈구의 기초석 등과 비교해서 길이를 가늠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는 것을 필자(도재국)은 보고 있다.
(13) 평면도의 삼각점과 수혈유구 속의 삼각점 사진, 원형 연대
①동아대학교박물관의 동(同) 보고서 149쪽의 종남산봉수대 도판 즉, [②圖版 62, 烽燧臺 頂上部 트렌치에 露出된 圓形 竪穴 遺構(上)와 全景(下)] = [위 사진 5]과 ②동(同) 보고서 57쪽의 도면 [22, 調査地域 測量圖 平面圖] = [위 사진 4] 속의 연대(煙臺)의 지름과 ③삼각점 표지석의 1면의 길이와 비교해 보면 즉, 삼각점 표지석 평면을 여러 개로 직선으로 연결해 보았을 때 그 길이가 원형 수혈 유구의 지름과 비교해서 의미 있는 점을 발견할 수가 있다(원형 연대 전부를 시굴한 사진을 공개해야 맞는 것 같은 데 그렇지 않았다)
(14) 원형의 연대 기초석의 크기와 석축 연대 하중 지탱 여부
또 ④동아대학교박물관의 동(同) 보고서 149쪽의 종남산봉수대 圖版 즉, [②圖版 62, 烽燧臺 頂上部 트렌치에 露出된 圓形 竪穴 遺構(上)와 全景(下)] = [위 사진 5] 속의 圓形 竪穴 遺構에 보이는 기초석(基礎石) 3개의 크기가 높고 육중(肉重)한 석축(石築) 연대(煙臺)의 하중(荷重)을 받칠 수 있는 적정한 기초석(基礎石)인지가 매우 의문이다.
(14) 원형의 연대(수혈 유구) 기초석(사진) 3개의 크기와 출처
동아대학교박물관의 동(同) 보고서 149쪽의 종남산봉수대 圖版 즉, [②圖版 62, 烽燧臺 頂上部 트렌치에 露出된 圓形 竪穴 遺構(上)와 全景(下)] = [위 사진 5] 속에 보이는 기초석 3개는 약간 짙은 회색(불에 그을린 흔적)이 보이는데, 이러한 돌은 “추정 건물지(建物址)”와 “추정 시설물지[施設物址 : 同 보고서는 ”추정 봉수대“로 기록]로 미루어 보아 억석암지(抑石庵址)와 관련된 “돌”로도 볼 수 있다. 조금만 내려가면 우물이 있는 계곡에 한 아름 정도 되는 돌이 많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주먹보다 좀 큰 돌”을 기초석으로 했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15) 종합 판단
위 (14번)까지 종합해 보면, 동(同) 보고서 57쪽의 도면 22, 조사지역 측량도의 “추정 봉수대” 그림의 둥근 형태 안에 있는 시설물 중에서 연대(煙臺)와 물을 흐르게 했을 것으로 보이는 직선의 도수로(導水路) 같은 표시와 “추정 건물지”의 바깥쪽의 사각형 안에 둥근 형태의 석열(일부만 석열)과 “H 字 석열(石列)”과 “직선의 도수로(導水路) 같은 것”만 봉수대의 유적으로 일단 보여지는데
“봉수대 시설로 여겨지는 것” 중에서도 “직선의 도수로? 같은 것”은 조사과정에서 조사팀이 그려 넣었는지(판 것인지) 여부가 확인이 안되며(구덩이로 판 것으로 보임),
순수하게 “봉수대 시설이라 할 만한 것”은 “표고점”이라 기록된 부분의 “조그마한 둥근 형태[반쯤 석열(石列)이 있는 부분으로 그림에 보임)]만이 『봉수대의 불과 연기를 올리는 ”연대(煙臺)“』로 보이는데, 위 (1) ~ (14)와 특히 (12) (13) (14) 등과 연계하여 보면, 이것이 과연 ”연대(煙臺)의 유구(遺構)“인지 조차도 의문이 간다.
(16) 동(同) 보고서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
실재 종남산봉수대의 유적(遺蹟)이 종남산 제2봉의 6부 능선에 엄연히 존재하는 상태에서, 위의 15개 항목의 내용을 종합해서 보면, 종남산 정상에 종남산봉수대의 유적이 나왔다고 작성한 동(同) 대학교박물관의 보고서가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는 필자(도재국, 손흥수)를 비롯한 이 글을 보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끝없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전술(前述)한 관련 글과 수많은 사진은 『다음(Daum) 카페 밀양광장의 종남산봉수대 게시판』에 상세하게 게재되어 있으므로 참조하기 바란다.
Ⅳ. 종남산(終南山) 조망권역 확인
1. "종남산 제1봉 정상"의 조망권역 확인
가. "자암산봉수대”가 보인다
나. 백산봉수대의 "서낭당 및 돌탑 부근"은 보인다
다. 백산봉수대의 "송산마을 북동쪽 백산 산록"은 은산(銀山)에 막혀 보이지 않는다
2. "종남산 제2봉 정상"의 조망권역 확인
가. "자암산봉수대”가 보인다
나. 백산봉수대 "서낭당 및 돌탑 부근"은 은산(銀山)에 막혀 보이지 않는다
다. 백산봉수대 "송산마을 북동쪽 백산 산록"은 보인다
3. "종남산 제2봉 6부능선 봉수대 터(봉군 숙소 겸초소)"의 조망권역 확인
가. "자암산봉수대”가 보인다
나. 백산봉수대 "서낭당 및 돌탑 부근"은 은산(銀山)에 막혀 보이지 않는다
다. 백산봉수대 "송산마을 북동쪽 백산 산록"은 보인다
■ 필자(도재국)의 종남산(終南山) 조망권역 최종 확인 및 사진 촬영(2016.11.25)
❶종남산 제2봉 정상에서 백산 조망권역 최종 확인 및 사진 촬영
필자(도재국, 손흥수)가 종남산에서 백산봉수대(3곳)와 자암산봉수대, 추화산, 분항봉수대 조망권역을 확인한 것이 벌써 수 년째, 여러 번이다. 보통은 날이 맑은 날 올라도 정상에 오르면 백산과 자암산 방향이 자주 흐릿하다. 또 자암산은 너무 멀어 망원경으로 보지 않으면 봉수대 위치 구분이 어려울 지경이다.
오늘(2016.11.25)은 글을 기고(寄稿)하기 전에 백산봉수대(3곳)와 자암산봉수대 조망권역을 최종적으로 확인을 하고 사진을 찍기 위해, 5시 반경에 집을 나와 차를 몰아 종남산 임도(林道) 팔각정에 주차하고, 산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지난 밤에 새벽 2시까지 "기고문"을 수 차례 검토하고, 잠이 오지 않아, 뜬눈으로 밤을 새워 컨디션도 좋지 않았다.
일정이 급하여 일찍 산을 오르기로 마음을 먹고 손전등으로 길을 밝혀 제2봉 정상에 도착했다. 아직 날이 새지 않아 한참 기다린 후에 하남읍 백산(栢山) 방향을 살펴보려 했으나, 정상(제2봉)의 헬기장 남쪽은 키가 큰 소나무와 잡목이 병풍처럼 막아 서 있어, 시야가 완전히 막혀 버렸다.
나뭇가지 사이로 손바닥만한 시야(視野)가 확보되는 곳을 겨우 찾아 "송산마을 북동쪽 백산 산록"을 사진을 찍어 확인해 보니, 육안(肉眼)으로 보였던 "송산마을 북동쪽 백산 산록"이 흐릿해서 사진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다시 시야가 확보될 만한 곳을 겨우 찾아보니, 제법 굵은 소나무라서, 높이 올라야 보일 것 같았다. 소나무는 반쯤 죽어 삭다리가 군데군데 있어 오르다가 가지가 부러져 떨어질 수도 있을 것 같고, 6미터 정도는 올라가야 시야가 확보될 듯 했다. 깊은 산속에 혼자라서 오르다 떨어지면 큰 사고라도 날 것 같았으나, 올라야 했고, 죽을 힘을 다해 올랐다. 소나무 가지를 잡은 팔은 간밤에 잠을 못 자서 힘이 쭉 빠졌다. 손을 떼면 큰일이다.
이를 악물고 한 쪽 팔은 나무를 잡고, 시야가 확보될 듯, 말 듯한 나뭇가지 사이에 팔을 겨우 뻗어 "송산마을 북동쪽 백산 산록"의 사진을 몇 장 찍고, 나무에서 내려와 확인해 보니 육안(肉眼)으로 보였던 "송산마을 북동쪽 백산 산록"이 스마트폰 카메라에는 뿌연 화면만 보였고, "송산마을 북동쪽 백산 산록"은 보이지 않았다.
시청에 벌채 허가를 받고, 일꾼을 불러, 전기톱으로 큰 나무 10그루 정도는 베어 내어야만 시야가 트일 것 같으나, 당장 어쩔 수가 없었다. 이 위치(헬기장, 제2봉 정상)에서는 “송산마을 북동쪽 백산 산록”은 약간만 보이고, “백산 정상의 서낭당과 돌탑이 있는 곳”은 은산(銀山)에 막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소나무에 올라 육안으로 본 “송산마을 북동쪽 백산 산록”을 그림으로 그렸다. 지면 관계상 "기고문"에는 흐릿한 사진과 그래픽한 그림을 올릴 수 없고, 카페 게시판 글의 끝에 "흐릿한 사진과 그래픽한 그림"을 증거로 올린다.
❷종남산 제1봉 정상에서 백산 방향 사진 촬영
위와 같이 제2봉 정상에서 사진 촬영은 실패하고, 제1봉 정상으로 올랐다. 시간이 좀 지나 백산 방향이 제2봉 정상에서 보는 것보다 좀 더 맑게 보였다. “송산마을 북동쪽 백산 산록(山麓)”을 제외한 "돌탑과 서낭당이 있는 부분"과 “칠정마을 뒷산”이 희미하게 보였다. 종남산 제1봉의 정상에서 본 백산 방향의 전경 또한 지면 관계상 "기고문"에는 올릴 수 없고, 카페 게시판 글의 끝에 증거로 전에 찍은 사진과 같이 올려 놓는다.
❸종남산 제2봉의 6부 능선에 있는 원래의 종남산봉수대 봉군의 숙소 겸 초소의 터에서 백산 방향 사진 촬영
하산(下山)하여 임도변에 있는 “종남산 제2봉의 6부 능선에 있는 원래의 종남산봉수대 봉군의 숙소 겸 초소의 터(상남면 기산리 우곡마을로 내려가는 표지석이 있는 곳)”에 도착하여, 필자(도재국)가 2년여 전에 잡목과 전죽(箭竹)을 베어내었던 곳을 잠시 둘러보고, "송산마을 북동쪽 백산 산록"의 전경을 찍었다. 이곳에서는 “백산의 돌탑과 서낭당 부근”과 칠정마을 뒷산은 은산(銀山)에 막혀 보이지 않는다. "송산마을 북동쪽 백산 산록"의 전경 사진도 지면 관계상 "기고문"에는 올릴 수 없고, 카페 게시판 글의 끝에 증거로 올려 놓는다.
[사진 6] "종남산봉수대 - 백산(송산)봉수대 - 자암산봉수대" 조망 노선
※ 백산봉수대가 송산 뒷산에, 종남산봉수대가 제2봉 6부 능선(축대)에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❹오늘 위와 같이 최종적으로 확인한 결과, 종합 설명은 다음과 같다.
①종남산 제1봉 정상
- 해발고도가 높아 봉수대가 들어서면 관리가 매우 힘든다
- 백산의 중앙부(돌탑 및 서낭당 위치)는 잘 보인다
- "송산마을 북동쪽 백산 산록"은 은산(銀山)에 막혀 보이지 않아 봉수대 입지로 부적합하다.
②종남산 제2봉의 정상
- 제1봉의 정상과 같이 해발고도가 높아 봉수대가 들어서면 관리가 매우 힘든다
- 백산의 중앙부(돌탑 및 서낭당 위치)가 은산(銀山)에 막혀 보이지 않는다
- “송산마을 북동쪽 백산 산록”은 은산(銀山)에 막혀 겨우 보여, 주간(낮) 봉수 시(時), 바람이 불 때(연기가 흩어질 때) 은산(銀山) 뒤로 흩날리면 연기가 보이지 않으므로, 정찰병에게 봉수신호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아 봉수대 입지로 부적합하다.
③남산 제2봉의 6부 능선에 있는 원래의 종남산봉수대 봉군의 숙소 겸 초소의 터
- 해발고도가 낮아 제1,2봉의 정상보다 봉수대 관리가 매우 용이하다
- 백산의 중앙부(돌탑 및 서낭당 위치)가 은산(銀山)에 막혀 보이지 않는다
- “송산마을 북동쪽 백산 산록”의 시야가 제2봉의 정상에서 보는 것 보다는 넓어, 주간(낮) 봉수 시(時), 바람이 불 때(연기가 흩어질 때) 제2봉 정상에서 정찰병이 관찰할 때 보다 연기가 더 잘 보여, 제2봉 정상보다 봉수대 입지 조건이 유리하다.
※ 사진과 그래픽한 그림은 카페 게시판 글 끝에는 게재를 하고, 지면 관계상 "기고문"에는 게재를 생략한다.
Ⅴ. 백산봉수대(栢山烽燧臺) 위치 고찰 및 조망권역 조사
종남산봉수대의 정확한 위치를 조사하기 위해서는 종남산봉수대와 백산봉수대의 다음의 위치에서 서로 반드시 연계(連繫)하여 조망권역을 조사해야 한다. 참고로 동아대학교박물관 및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의 종남산봉수대 위치 조사팀은 이런 조사를 했다는 내용이 보고서 및 간행한 책에 전혀 보이지 않는다.
□ 원래의 종남산봉수대 터와 조망권역(眺望圈域)
□ 종남산 제1봉의 조망권역(眺望圈域)
□ 종남산 제2봉의 조망권역(眺望圈域)
□ 백산 정상 서낭당과 돌탑 인근 조망권역(眺望圈域)
□ 백산리 송산마을 북동쪽 끝 뒷산(백산 산록) 조망권역(眺望圈域)
□ 백산리 칠정마을 뒷산의 조망권역(眺望圈域)
□ 자암산봉수대의 위치와 조망권역(眺望圈域)
필자(손흥수, 도재국)는 수 년 동안 3개 봉수대의 7(종남산 3, 백산3, 자암만 1)개소를 황사(黃紗) 등으로 시야(視野)가 흐리고 숲(雜木)으로 전방(前方)이 차폐( 遮蔽)된 악조건 속에서도 원지(遠地)는 망원경을 통해 확인하고, 여러 차례에 걸쳐 현지 조사를 한 결과를 다음과 같은 결과를 도출했다
먼저 “백산봉수대는 그 흔적이 전혀 없다”. 마을 주민들에게 탐문을 해도 아는 사람들이 없다. 그래서 백산봉수대의 위치는 양쪽 방향 대응(對應) 봉수의 조망권역을 확인하면 그곳이 백산봉수의 위치라는 것을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백산봉수대의 위치 고찰 또한 원칙은 종남산봉수대 위치 고찰과 같은 맥락에서 조사되어야 하나, 백산봉수대는 마을과 가깝고 넓은 평야의 중앙에 위치한 “낮고 작은 산”이기 때문에 종남산봉수대와 같이 마을과 멀리 떨어진 “높고 큰 산”에 위치한 봉수대의 조사 기준을 다 같이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봉수대(烽燧臺) 입지(立地) 기본원칙” 중에서 백산(栢山)의 정상부가 거의 다 길고 균일한 해발고도이므로 “봉수대 최적의 입지는 해발고가 가장 낮은 위치”의 일반적인 적용은 무의미하고, 문제는 “대응 봉수 방향인 양(兩) 방향 봉수대의 조망권이 확보되는 곳을 찾아야 그곳이 백산봉수대 최적의 봉수대 위치”이므로, 이러한 위치를 찾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마을과 바로 붙어 있어 ”봉수대(烽燧臺)와 봉군(烽軍)숙소(宿所).초병(哨兵)초소(哨所)와의 이격(離隔) 거리 원칙“을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도 아니다
백산봉수대는 임진왜란(壬辰倭亂) 이후에 설치되었기에 그 역사가 깊지 않아 위치에 대한 문헌과 자료도 거의 없어 “봉수대(烽燧臺) 위치 조사 기본원칙”을 적용하여 조사하는 것도 어려웠다
그러나 필자(손흥수와 도재국)는 수 년간 백산과 자암산, 종남산을 연계하여 번갈아 조망권역을 확인하기 시작했는데 그 잡목이 차단되어 어려움이 매우 컸다.
백산봉수대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서 조망권역을 확인했다. 송산마을 북동쪽 백산 산록에서는 제2봉의 6부 능선 주변은 보인다. 또 칠정마을 바로 뒷산에서는 종남산 정상이 보인다. 상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백산봉수대(서낭당 및 돌탑 부근) 조망권역 조사
[사진 7] 백산봉수대 위치 추적 3개소(동그라미 표시)
※ 백산봉수대가 '송산 북동쪽 백산 산록"에 있었다는 것이 자암산,백산(송산 북동쪽 백산 산록),
"종남산 제2봉 6부능선" 3개 지점의 조망권역 조사에서 확인되었다
가. 백산봉수대(서낭당 및 돌탑 부근)에서는 “자암산봉수대”가 보인다
나. 백산봉수대(서낭당 및 돌탑 부근)서는 “종남산 제1봉의 정상”이 보인다
다. 백산봉수대(서낭당 및 돌탑 부근)에서는 "종남산 제2봉의 정상”이 은산(銀山)에 막혀 보이지 않는다
라. 백산봉수대(서낭당 및 돌탑 부근)에서는 “종남산 제2봉의 6부 능선의 현존하는 종남산봉수대의 봉군 숙소 및 초소. 봉수대 터”가 은산(銀山)에 막혀 안 보인다
2. 백산봉수대(송산마을 북동쪽 백산 산록) 조망권역 조사
[사진 8] 송산마을 동쪽 끝에서 바라 본 "종남산 제2봉의 6부 능선의 종남산봉수대"
※ 이 위치에서는 종남산 제2봉의 정상이 은산(銀山)에 막혀 약간만 보인다
가. 백산봉수대(송산마을 동쪽 끝)에서는 “자암산봉수대”가 보인다
나. 백산봉수대(송산마을 동쪽 끝)서는 "종남산 제1봉의 정상”은 은산(銀山)에 막혀 보이지 않는다
다. 백산봉수대(송산마을 북동쪽 끝 백산 산록)에서는,“종남산 제2봉의 정상”은 보인다
라. 백산봉수대(송산마을 북동쪽 끝 백산 산록)에서는 “종남산 제2봉의 6부 능선의 현존하는 종남산봉수대의 봉군 숙소 및 초소. 봉수대 터”가 보인다
3. 백산봉수대(칠정마을 뒷산) 조망권역 조사
종남산 정상에 봉수대가 존재하려면 백산봉수대는 칠정마을 뒷산에 있어야 한다
가. 백산봉수대(칠정마을 뒷산)에서는 “자암산봉수대”가 보인다
나. 백산봉수대(칠정마을 뒷산)에서는 “종남산 제1봉의 정상”이 보인다.
다. 백산봉수대(칠정마을 뒷산)에서는 “종남산 제2봉의 정상”이 보인다
라. 백산봉수대(칠정마을 뒷산)에서는 “종남산 제2봉의 6부 능선의 현존하는 종남산봉수대의 봉군 숙소 및 초소. 봉수대 터”가 은산(銀山)에 막혀, 보이지 않는다
Ⅵ. 자암산봉수대(子巖山烽燧臺) 위치 및 조망권역 조사
1. 자암산봉수대(子巖烽燧臺) 위치 조사
필자(도재국, 손흥수)는 수년 전에 자암산봉수대 정상에 올라 백산 및 종남산(남산)봉수대 조망권역을 다음과 같이 확인했다. 이러한 확인 작업은 종남산 및 백산봉수대의 조망권역과 위치를 확인하는데 있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다. 그런데 동아대학교박물관 종남산봉수대 조사팀과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조사팀에서는 이런 조사를 한 흔적이 보고서에서 발견되지 않았다. 종남산봉수대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서 반드시 조사해야 할 항목을 조사하지 않고 작성(조사)한 결과보고서에 의한 밀양시와 경상남도, 문화재청의 종남산봉수대 위치 확인 및 승인을 했다면 이해하기 힘들다.
2. 자암산봉수대(子巖山烽燧臺) 조망권역 확인
자암산봉수대에서는 칠정 뒷산, 백산의 2개소, 종남산의 3개소가 조망이 된다. 자세한 것은 자암산봉수대 북쪽 방향의 잡목을 전부 벌채를 해야 가능하다. 대체로 백산과 칠정 뒷산은 평야지대 중앙의 낮은 구릉이고, 종남산은 멀리 있는 높은 산이므로 조망권이 확보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Ⅶ. 밀양광장에 게재한 종남산봉수대 관련 글들
필자(도재국)는 종남산봉수대와 백산봉수대의 정확한 위치 고증(考證), 종남산 정상에 봉수대의 연대(煙臺)를 잘못 복원한 것을 널리 알리기 위해 “다음(Daum) 카페 밀양광장”을 통해서 오래 전부터 올린 글의 일부를 본고(本考)에 다음과 같이 게재를 하여 종남산봉수대에 대한 역사의 진실을 알리고 싶다. 원문(原文)과 더 많은 글과 사진은 밀양광장을 통해서 참고하시면 좋겠다.
※ 밀양광장 http://cafe.daum.net/historymiryang/
● “종남산 봉수대 터”에 표지석 건립 요청
밀양시 또는 사회단체 등은 우선 원래의 “종남산 봉수대 터”에 표지석을 세워야 합니다. 삼백만원 정도는 세울 수 있습니다. 삼백만원은 개인에게는 큰 돈입니다. 또 "개인"일지라도 누구라도 형편이 되시는 분이 계시면, 이러한 표지석을 하나 세워주시면, 더욱 고맙고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는 영광스러운 일이 될 것이고 향토사를 빛내는 일이 될 것입니다
[ 표지석 건립 의견 ]
『조선시대 원래의 ”종남산 봉수대 터“』표지석은 3백만원 정도면 충분히 세울 수 있다고 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종남산 임도를 오르내리면서 볼 수 있도록 “종남산 임도” 바로 옆인 “봉군(烽軍)의 초소 겸 숙소의 축대 앞”에 세우면 됩니다. 위기로부터 밀양과 나라를 구했던 첨병인 수 백, 수 천, 수백 만명의 봉군(烽軍)의 피와 땀과 영혼이 서려있는 원래의 터인 이곳에 봉수대를 복원하는 것은 선현(烽軍)에 대한 우리들의 최소한의 예의입니다
●밀양지(1987 밀양문화원 발행) 546 페이지에는
"조화원(助火院)이 있고, 예림리 안마을로 추정된다" 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저(도재국)가 보기로는 밀양지(密陽誌)의 기록 중에서 조화원 위치 설명이 잘못되었다고 본다.
그 이유는 "조화원(助火院)" 이라는 원(院)의 명칭 자체가 "봉수대를 지원하는 원(院)"입니다.
밀양부(密陽府)에서 "자여도(自如道)"로 이어지는 역로(驛路)인 "상남면 기산리 우곡마을 앞 역로변(驛路邊)"이 "조화원(助火院)" 의 위치가 맞다고 봅니다. "밀양지에 이미 예림리 안마을로 기록되어 있다" 라고 해서, 그냥 고착화시키면 더욱 안 됩니다. 밀양지(密陽誌)에도 "추정"이라고 해 놓았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가장 타당하고, 적정한 위치로 "조화원의 위치"를 비정(比定)해야 합니다. 수 백년 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 조화원에 대해서 지금 발굴해서 흔적(유물)이 없어면, 증거 채택이 않된다는 "책상 앞에 앉아 고루한 주장만 하는 기존 사학계의 증거 채택 논리"는 이제, 버려야 합니다
●종남산 임도(林道) 상의 "종남산 봉수대 초소(숙소) 터"의 "종남산 당산나무(느티나무 : 신목 神木)" 도벌 사건 발생
밀양 향토사학자 지경(地耕) 손흥수 선생에 의하면, "종남산 당산나무(느티나무 : 신목 神木)"는 "종남산 봉수대" 복원 공사 전에 도벌되었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상한 것은 일반적으로 "수 백년된 거목(巨木)"을 도벌해 갈 때는 나무의 잔가지와 잔뿌리는 남겨 놓는데, 나무뿌리를 통째로 포크레인으로 뽑아갔고, (나무의 잔가지와 잔뿌리도 흔적도 없이 가져갔고), 거대한 나무뿌리를 포크레인으로 뽑은 자리는 나무를 도벌한 표시가 나지 않게 흔적도 없애고, 주변 지형과 비슷하게, 자연스럽게 해 놓았다는 말을 틈이 나면 되풀이 했다. 이런 흔적은, 일반 도벌꾼의 소행으로 보기에는 무언가 이상했다는 것이다
●동아대학교박물관 종남산봉수대 조사팀, 종남산봉수대 복원자료수집
1997년도 「동아대학교박물관 종남산봉수대 조사팀」소속 「이동주」의 「밀양 추화산ㆍ종남산 봉수대 복원자료수집 기초조사 보고서」의 11 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이 학술조사기간이 기록되어 있다 <前略> 밀양시에서는 추화산 및 종남산 봉수대 주변의 유구(遺構) 조사를 통해 봉수대의 정확한 위치와 복원 형태 및 향후 보존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서 본 대학교 박물관에 시굴을 포함하는 학술조사를 의뢰하여 왔다. 이에 본 대학교 박물관에서는 조사단을 구성하고 1997년 10월 30일부터 1998년 1월 28일까지 조사 작업을 실시하였다 <11 페이지 끝>
봉수대 터 조사 날자의 정확을 기하기 위해 작성하며, 또 많은 사람들이 이를 알고자 하기 때문이다
●경상남도, 문화재청, 「종남산 봉수대 유지」 2000.8.31 경상남도 기념물 227호 지정
동아대학교박물관 종남산봉수대 조사팀에서 조사한 "종남산 봉수대" 자료를 근거로 경상남도는 관련법 등에 의거 문화재청의 협의를 거쳐 2000.8.31 「종남산 봉수대」 터를" 경상남도 기념물 제227호"로 지정하였다. 이는 절차상의 하자를 없애기 위한 법적 수순이었고 "종남산 봉수대" 복원을 위한 법적 절차였다.
●밀양시, "종남산 봉수대" 복원공사 기간 : 2004.11 - 2005.5
위 기간에 「종남산 봉수대」 복원 공사를 밀양시 문화관광과에서 시행하였습니다. 봉수대는 연기와 불꽃이 오르는 연대(봉수대:烽燧臺 = 煙臺)와 봉군의 초소(숙소 겸용)가 항상 같이 있습니다. 봉수대를 복원하려면 연대(봉수대)와 초소(숙소)를 같이 복원해야, 완전한 복원입니다. "종남산 봉수대" 평면도는 저(도재국)가 혼자서 초소(숙소)를 정비를 한 후에, 줄자로 재어서 그린 도면입니다. "종남산 봉수대"의 앞면 축대 사진,
동아대학교박물관 종남산봉수대 조사팀은 봉수대 터를 조사하면서 "봉수대 학술 용역조사 결과 보고서"에 이 축대(石築) 시설을, "산 위에서 굴러 내려온 “돌무지"라고 기록하고, "봉수대 초소(숙소 겸용)의 터가 아니다" 라고 결론을 짓고 "종남산 정상"에 가서 조사를 하여, 그곳이 "봉수대 터다" 라고 결론을 짓고, 밀양시는 이 결과를 경남도와 문화재청에 보고를 한 후에 문화재청의 승인을 받아 경상남도는 종남산 정상을 "종남산 봉수대 터"라고 결론 지어 "종남산 정상"을 "밀양 남산(종남산) 봉수대 터"로 결정하여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했습니다
밀양시는 이를 근거로 하여 종남산 정상에 "종남산 봉수대"를 복원하였습니다. ①교수 등으로 구성된 "동아대학교박물관 종남산봉수대 조사팀" ②경상남도(문화관광과) ③밀양시 ④문화재청 등 4개 기관의 "밀양 남산(종남산) 봉수대"의 "유적 조사와 봉수대 복원"에 대해서 관련 기관은 재(再) 조사를 해 줄 것과 그 결과에 따라, 역사의 사실대로 봉수대와 초소(숙소 겸용)를 다시 복원을 해 줄 것을 우리들은 강력하게 요구합니다
종남산 제2봉의 6부 능선의 옛 종남산봉수대 터(석축 및 그 주변)에서 조사하신 분께 묻습니다. 이것이 어찌 "산 위에서 굴러 내려온 돌무지"입니까 ! 너무나 이해할 수 없는 조사 결과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명확한 "종남산 봉수대" 유적지입니다. 이 귀중한 역사 유적을 정비하지 않으면 전죽(箭竹)과 잡목이 축대 사이로 파고들어, 결국은 이 축대마저도 무너뜨릴 것입니다. 밀양시는 더 이상 이를 방치해서는 않됩니다. 밀양시는 "종남산 봉수대" 유적지를 하루빨리 정비해야 합니다. 일 년에 단 1회씩, 인부 몇 명만 동원하여 잡목만이라도 베어내면, 무너지고, 사라지는 귀중한 "종남산 봉수대" 유적을 보존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안타까운 상황을 계속 주시할 것입니다. "종남산 봉수대" 정비(잡목 및 전죽 일부 제거)후, 확인한 대략적인 평면 상태(사진)
전죽(箭竹 : 전투용 화살을 만드는 대나무)을 베어 내니, 담장이 환하게 드러났습니다. 강(强) 추위 속에 하루종일 정비작업을 했습니다. 오전에 시작한 정비작업이, 점심 때가 지나, 해질 무렵에 역광(逆光)이 되어, 사진이 흐릿합니다.
초소 내부, 이곳도 전죽을 베어 내니, 내부 벽체(돌담)이 드러났습니다. 무너지고, 사라지는 안타까운 밀양의 "종남산 봉수대"의 역사 유적지, 초소 뒷편은 낮은 언덕으로 무너지고 있습니다.
혼자서 잡목을 벤 후, 줄자로 거리를 재려니, 매우 불편하였습니다. 봉수대와 초소(숙소 겸용) 위치도(사진), 필자(도재국)는 "종남산 봉수대" 유적지 보존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날은 60년 만에 제일 추운 날씨라고 일기예보를 했습니다. 산속은 눈발이 간간이 날리고 있었습니다. 하루종일 일을 하다보니, 60년만에 제일 추운 날씨에도, 등에서는 땀이 흘러, 내의(內衣)가 다 젖었습니다.
무너지고, 사라지는 소중한 "종남산 봉수대"의 유적지(사진). 담장 속에서 올라오는 작은 나무가 굵어지면서(팽창하면서), 담장을 무너뜨리고, 또 고목이 쓰러지면서, 충격으로 담장을 다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릴 때 잡목을 제거해야 합니다.
일반 주택 담장보다 훨씬 두꺼운 봉수대 초소(숙소)의 담장 초소 앞면(사진), "종남산 봉수대"의 초소 내부에 전죽을 베었습니다. 잡목에 의해 파괴되는 "종남산 봉수대"의 유적지(사진), 초소 남쪽면, 잡목이 자라면서 담장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밀양시청 문화재 담당 부서 에서 작은 신경만 써도, 인부를 동원하여 제거할 수 있습니다.
주변에는 밀양시에서 많은 인부를 동원하여 재선충 나무(소나무)를 베어서 군데군데 쌓아 (덮어) 놓았습니다. 봉수대는 법적으로는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았지만, 이 봉수대 터는 엄연한 문화재이고 밀양지역에서 가장 뚜렸한 흔적이 있는 봉수대 유적이고 이 정도로 양호하게 유적이 남아 있는 봉수대로는 전국에서도 드물 것입니다.
문화재와 유적은 밀양시청 문화관광과 의 업무입니다. 인부 몇 명만 동원하여 1년에 한 번씩만 초소(숙소)의 잡목과 백산봉수 와 추화산 방향으로 조망권을 가리는 초소 앞의 아카시아를 베어내면 이 아까운 유적을 온전하게 보존할 수 있을 것인데 매우 안타깝습니다.
"종남산 봉수대" 터가 아닌 종남산 정상에는 2억 6천만원이란 예산으로 잘못 복원을 해 놓고 진짜 "종남산 봉수대"의 유적지는 이렇게 방치해 놓았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입니다.
밀양시는 잡목 등에 의해 자연적으로 파괴되는 "종남산 봉수대"의 유적지를 원형대로 복원하고, 잘 관리를 하여야 합니다.
밀양시에서 마음만 먹어면, 얼마든지 복원할 수 있는 "종남산 봉수대 터"(사진), 종남산 임도와 초소 언덕과 내부의 무성한 전죽(사진), 임도가 개설되어, 복원(건축)에 필요한 자재 운반이 용이하여 밀양시에서, 얼마든지 복원할 수 있는 "종남산 봉수대 터" 위치입니다. 옛 원형(조선시대 봉수대 표준 모델)대로 복원하면 현재 정상에 복원?한 거대한 형태로 복원하지 않아도 됩니다.
조선시대 봉수대 표준 모형은 "봉수대(연대)의 높이가 3 미터 정도"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석재(石材)도 정상의 그런 거대한 돌이 아닙니다. 봉수대 봉군의 초소(숙소 겸용)도 같이 복원해야 합니다.
현재 세대와 미래 세대에게 역사의 진실을 왜곡되게 알리지 말아야 합니다. 역사 왜곡은 모든 것을 왜곡시키는 본보기가 되어, 결국은 법을 어기고, 개인과 국가를 피폐시키는 결과로 귀결시키는 불행이 될 것입니다. 역사의 사실대로 "종남산 봉수대" 복원의 용기있는 결단을 바랍니다
●2012. 1. 31 "남산(종남산)봉수대 유허"를 현장 답사하다<24>
엄청 추운 날씨이다. 60 몇 년 만에 찾아온 한파가 매섭게 몰아친다. 오전 8시가 조금 넘어 점심 대용으로 “썰은 가래떡” 한 움큼과 찬물 한 병(보온병이 아니므로 따뜻한 물을 넣어 봤자, 산정山頂에 도착하면 얼음물이 된다) 봉수대 유허(遺墟) 정비(잡목 및 대나무 제거용)를 위해 낫 및 톱을 등산용 가방에 넣고 삼문동 집을 출발해서 밀주교를 건너 맘산마을에서부터 종남산 봉우재 방향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그 당시 봉수대는 국방상, 군사상 중요한 요새였다. 특히 남산(종남산) 봉수대는 봉수대로서의 중요한 역할도 했지만, 밀양을 지키는 방면의 요새로서도 그 중요성이 있었다.
국가 및 지방급 문화재 유물이지만 아무도 돌보지 않는 봉수군의 애환과 영혼이 깃든 "남산(종남산) 봉수대 유허"는 너무나 쓸쓸했다. 봉수군들은 매서운 추위 속에, 찌는 듯한 무더위 속에 사시사철 수백년 동안 민족과 조국을 위해, 외적의 침입을 알리기 위해 이 외로운 산정(山頂)의 봉수대에서 청춘을 보내고 영혼을 묻었다. 국가과 국민, 민족과 조국을 위한다면 종남산을 찾는 어느 누구라도 이 쓸쓸한 유허에서 잡목 한그루, 잡초 한 포기라도 베고 뽑아서 선조들의 얼을 헛되게 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간절했다.
나는 이 유허에서 하루종일 잡초와 잡목을 베고 유허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대나무 숲에서 희미하나마 유허의 상태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살을 에는 듯한 추위도 잊은 채, 점심 시간도 잊은 채 해가 넘는 것도 잊은 채 작업을 계속했다. 해가 서산을 넘을 무렵, 곧 눈과 비가 올 것 같은 날씨였다. 장갑이 헤어지고, 손가락이 튀어나와 얼은 손이 아팠다. 해가 넘을 무렵에 어느 정도 유허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었다. 혼자서 유허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30미터 짜리 줄자의 끝을 고정시켜 겨우 겨우 현장을 실측했다. 그리고 집에 와서 "남산(종남산) 봉수대"의 관리 막사 평면도 를 완성했다. 평면도 : 17 "남산(종남산) 봉수대" 평면도<13> 사진, 참조
●2012. 1. 30 하남읍 백산리 칠정마을 끝에서
멀리 "남산(종남산)봉수대 유허" 방향으로 사진을 찍다 <22>
오늘도 혹한의 날씨이다. 수년째 이 곳에서 봉수대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같은 사진을 찍었다. 멀리 "남산(종남산) 봉수대" 관리 막사 유허가 보인다. 국도25호 하남읍 파서리 아래 은산마을 지점에서 봉수대 유허 방향으로 찍었다.
●2012. 2. 1 김해 "자암산 봉수대"에서 조망되는 "남산(종남산) 봉수대" <30>
"자암산 봉수대"에서 "백산 봉수대" 및 "남산(종남산) 봉수대" 방향으로 찍은 사진입니다. 해가 넘어가서 사진이 희미하게 보입니다. 좌측 : 덕대산, 우측 종남산, 바로 앞에 하남 백산, 멀리 좌측 : 덕대산, 우측 종남산, 좌측에서 우측으로 "남산(종남산) 제1봉", 제2봉, "남산(종남산) 봉수대" 유허 위치(봉화재), 바로 앞에 백산봉수대가 있는 백산 동록(東麓), 그 다음에 파서리 은산마을 뒷산, 멀리 좌측에서 우측으로 "남산(종남산) 제1봉", 제2봉, "남산(종남산) 봉수대" 유허 위치(봉화재), 좌측 : 덕대산, 우측 종남산, "남산(종남산) 봉수대" 위치 최종 확인
2012. 2. 1 현재 3개의 봉수대를 현장 확인하고, 그 시야(조망)을 확인한 결과, "남산(종남산) 봉수대"의 위치가 현재의 종남산 제2봉에서 남쪽으로 뻗은 6부 능선상의 종남산 임도상의 봉화재(봉우재)에 있는 봉수대 유허가 있는 위치 및 그 주변이 "남산(종남산) 봉수대" 위치 라는 것이 정확하게 입증되었습니다.
●밀양 종남산(終南山)과 "남산(종남산) 봉수대" 위치 조사
본인(도재국)은 "남산(종남산) 봉수대" 정확한 위치 고증을 위해 수년간 조사를 해 왔으며 영하 10도가 넘는 혹한기인 올해 1월 말에 종남산 현지 및 밀양시 하남읍 백산봉수대와 김해시 진영읍 자암산봉수대를 현지 조사했습니다
현지 조사를 하면서 봉수대 시야(視野) 각도(角度) 확인을 위해 찍은 사진은 차후 올려 드리겠습니다. 2015. 10. 4(일) 다시 확인한 원래의 "종남산 봉수대" 위치도, 종남산 전경, 2015. 10. 4(일) 다시 확인한 결과, 원래의 "종남산 봉수대" 위치는 우측 화살표 방향입니다.
2012. 2. 2(목) "남산(종남산) 봉수대" 유허 및 백산봉수대, 자암산봉수대 현지에서 봉수 시야(角度) 확인 결과, 남산(종남산) 봉수대의 위치는 유허의 위쪽입니다
2015. 10. 4(일) 다시 확인한 결과, 원래의 "종남산 봉수대" 위치는 우측 화살표 방향 30미터 정도입니다.
봉화재는 일명 봉우재라고 불렸는데 특히 사포 신당마을(산업단지로 철거)은 봉화재와 가장 가까운 마을로서, 주로 "봉우재"로 불렀으며, 봉우재(봉화재)는 밀양부(密陽府) 중심부와 상남면 남산리(구배기) 등을 연결하는 중요 고갯길이었습니다. 봉우재에는 봉수대 유허가 지금도 남아 있으며 밀양시 부북면 사포 및 상남면 예림리.기산리.남산리 마을의 연세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이 봉우재 고개의 봉수대 유허에서 옛날부터 봉화불을 올리던 자리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주도씨 22世 서재공파 사묵(思默) 도계적(都啓迪 : 1693~1758)의 묘소가 현재의 봉수대 유허(옛터)의 남쪽 200m 불곡(佛谷 부처골)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그 후손들이 300년 가까이 밀양시 부북면 전사포리 신당마을에 세거(世居)하면서 신당마을에서 부처골(佛谷)산소 벌초와 성묘.묘사로 250년 동안 해오면서, 봉우재의 봉수대를 지나다니면서 500년 정도된 괴목나무 그늘에서 쉬어 가기도 했으며 그 후손들은 어른들로부터 괴목나무가 있던 이 봉수대 터가 옛날에 봉화불을 올리던 자리라고 들어 왔습니다
지금 임도는 선묘(先墓)가 있던 벌초길과 거의 나란히 있고 필자(도재국)는 20세가 넘는 이후로 년년세세 선묘에 벌초와 성묘.묘사를 위해 40년 가까이 다녔으며 부친(2016 현재 92세)도 17세 되던 해 부터 집안 어른들과 20여년 전까지 선묘에 벌초 등을 위해 해마다 봉우재를 넘어면서 봉수대 옛터를 지나다녔다고 증언하고 계십니다.
[봉수대 시야 확보 여부 확인]
종남산 정상에서 보면, 백산리 송산(북동쪽 산록)은 아예 보이지 않으며, 백산의 정상 부분과 서쪽은 보인다. 또 종남산 제2봉 정상에서 보면 백산의 정상과 서쪽 부분은 보이지 않으며, 백산리 송산 북동쪽만 보인다. 다만 칠정마을 뒷산은 보인다. 멀리 자암산봉수대는 보이는데, 망원경으로 보아야 자암산이 겨우 보인다.
그리고 종남산 제2봉의 6부 능선인 봉우재(종남산 봉수대 봉수군 관리사 및 대응봉수 정찰초소)에서 보면 백산리 송산 북동쪽 산록은 보이나, 백산의 정상과 그 서쪽 부분은 전혀 보이지 않으며, 김해 자암산봉수대는 보인다. 또 자암산봉수대에서 보면 백산(송산 북동쪽 산록)봉수대와 "남산(종남산 제2봉 6부 능선) 봉수대"가 보인다.
위의 증거를 바탕으로 결론적으로 말하면 "남산(종남산) 봉수대"는 지금의 종남산 제2봉의 6부 능선 봉우재(봉군 숙소 및 정찰 초소) 바로 위 지점임이 입증되었다.
(2015. 10. 4 다시 확인 결과, 사진의 우측 화살표 표시 부분이 봉수대 위치이며, 초소에서 제2봉 방향 약 30 미터에 봉수대 위치임)
●東江先生遺集 >密陽志(일부)
<前略(전략)>
寺十一(사11),
1. 曰載岳(왈재악), 在彦陽界(재언양계)
2. 曰崇眞(왈숭진), 在無訖驛北(재무흘역북)
3. 曰石骨(왈석골), 在慶州界(재경주계),
4. 曰萬魚(왈만어), 在崇眞寺東(재숭진사동), 世傳其山洞中大小巖石(세전기산동중대소암석),
皆有鐘聲磬(개유동성경), 宿世海中龍魚(숙세해중용어), 化石而然云(화석이연운)
5. ※ 曰仇朴(왈구박), 在南山烽燧之西(재남산봉수지서)
※ 구박사(仇朴寺)는 "남산(종남산) 봉수대"의 서쪽에 있다
6. 曰靈隱(왈영은). 在鈒浦東(재삽포동)
7. 曰安東(왈안동), 在五方洞西(재오방동서)
8. 曰臺山(왈대산), 在無台里西(재무태리서)
9. 曰鞍馬(왈안마), 在要濟院西(재요제원서)
10. 曰征戰(왈정전), 在豊角縣東(재풍각현동)
11. 曰湧泉(왈용천), 在星州界(재성주계), 而湧泉(이용천)
載岳爲巨刹(재악위거찰), 應府紙用及北人霜華白絹等紙役(응부지용급북인상화백견등지역),
舊時居僧累十百人(구시거승누십백인), 今不過四五十云(급불과사오십운),
此其一府境土大較(차기일부경토대교), 而厥土多上上(이궐토다상상),
山水居什之四(산수거십지사), 故値歉歲不至大窘(고치겸세불지대군)
<後略(후략)>
□ 사진(지도) 설명
○ 하얀선 : 종남산 임도로서, "옛날에 산중대로(山中大路)"로 이용,
○ 주황색선 : 조선시대 "밀양 남산(종남산) 봉수대"와 "조화원(助火院)"을 연결하는 군사용 산길(봉수대의 烽軍과 驛院의 관헌이 다니는 산길)
○ 노란선 : 현재의 등산로
□ 曰仇朴(왈구박), 在南山烽燧之西(재남산봉수지서)
"신익전"은 밀양도호부 부사를 역임한 분입니다. 부사(府使)를 역임한 분이 기록을 잘못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가 부사를 하는 동안, 군사상 중요한 시설인 봉수대는 그의 지휘 감독하에 엄격히 관리되었습니다. 봉수대가 종남산 정상에 있었다면 『曰仇朴, 在南山烽燧之南』으로 기록했을 것입니다. 정상에 있지 않았기에 『曰仇朴, 在南山烽燧之西』로 기록했습니다.
=== "남산봉수대의 서쪽에 있다"의 해석 ===
○ "사포 - 남산봉수대(봉화재 또는 봉우재) - 구박마을(남산리)" 구간의 임도 구간은 "옛날의 산중대로"와 거의 일치하며
○ 조선시대 "밀양 남산(종남산) 봉수대"에서 "구박마을"은 서남쪽에 위치하지만 옛날 방향을 표시할 때는 "가는(향하는) 길의 방향"을 "방향"으로 표시했으며 이런 기준으로 방향을 보면, "밀양 남산(종남산) 봉수대"에서 "종남산 임도의 정자"가 있는 길의 방향이 "서쪽"이므로 "신익전의 밀양지"에『曰仇朴(왈구박), 在南山烽燧之西(재남산봉수지서)』로 기록했습니다 즉, 봉수대가 종남산 정상에 있었다면, 『曰仇朴(왈구박), 在南山烽燧之南(재남산봉수지남)』으로 기록해야 합니다
●"남산(종남산) 봉수대" 평면도 <13>
봉수대는 봉수대 관리 막사 및 대응봉수의 정찰대, 봉수대(봉홧둑 : 연대)으로 구성됩니다. 봉수대 관리 막사는 봉수군 숙소 및 병기고(무기고 : 총.검.활.화살)와 봉수에 필요한 도구를 보관하는 창고로 구분됩니다. 적에게 봉수대 관리 막사가 침탈당하여 봉수군이 전멸하거나 무기를 침탈당하면 봉수(불과 연기)를 올리지 못하게 됩니다. 즉, 능선 또는 산봉우리에 위치한 봉수대는 종남산 정상에 조성된 봉홧둑처럼 봉홧둑을 높게 축조할 이유가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봉홧둑(연대 : 불이나 연기를 올리는 높은 단)보다 봉수대 관리 막사와 대응봉수의 정찰대(정찰초소), 봉수군의 무기고, 숙소 등이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요즘 각 지방자차단체에서 봉수대 복원을 하면서 봉수대 즉 불과 연기를 올리는 봉홧둑(연대)만을 강조하여 복원을 하는데 이는 봉수대 구조를 잘못 이해하거나, 간과하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봉수대를 아무리 잘 복원해 놓아도 봉수대 관리 막사와 대응봉수의 정찰대(정찰초소), 봉수군의 무기고, 숙소 등의 중요성을 간과하면 봉수대 역사를 잘못 이해하기 쉽습니다.
따라서 봉수대를 복원하려면 봉홧둑(연대)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봉수대 관리 막사와 대응봉수의 정찰대(정찰초소), 봉수군의 무기고, 숙소 등도 같이 복원해야 합니다.
다음은 "남산(종남산) 봉수대"를 현지 답사하여 본인이 실측한 평면도 등을 공개하며, 구획된 부분의 용도는 본인이 추정하여 올립니다. 봉수대 관리 막사 등의 담장은 일반주택의 담장과는 달리 견고한 성벽식(城壁式)으로 견고하게 축조되었으며 지붕은 화재에 대비하고, 오랜 세월에 대비토록 기와로 덮었고 봉수대(관리 막사 유허)에는 투박한 기와 및 백자.옹기 등의 파편이 발견되었습니다. 봉수대 관리 막사 등의 평면도 사진
●광여도(廣輿圖) 밀양부(密陽府) 검토 결과
○ 朝鮮을 郡縣別로 나누어, 繪畵式으로 그린 古地圖
○ 面別, 山岳, 烽燧, 군사용 船材封山, 院, 驛, 倉, 津, 섬(島), 河川, 祠堂을 표시
○ 지명 표시 형태로 보아, 국방상 필요한 軍事 地名을 중점 표시
○ 密陽府의 주요 표시 지명(내용)
- 石南嶺 바로 남쪽 지역을 中初同面으로 표시
- 石骨寺 북쪽 지역을 古㫆面(청도군 운문댐 西岸 수몰지역)과 古㫆倉을 표시
- 石骨寺 남쪽 凝川쪽을 上東面으로 표시
- (載岳山)일대를 船材封山으로 표시
- 盆項烽燧 표시
- (甘勿里) 일대를 中二同面으로 표시
- 古曳 일대를 船材封山으로 표시
- (金谷) 주변에 東倉 표시
- 府北面 표시
- 華岳山과 鳳泉寺(현재 廢寺) 표시
- (淸道面)일대를 下西面으로 표시
- 推火山에 城隍熢으로 표시
- 鄕校 뒷산을 龍駕山으로 표시
- 嶺南樓를 邑治로 표시
- (현재의 단장면 서쪽) 일대를 中三同面으로 표시
- 終南山 남쪽의 南山熢 서쪽에 靈隱寺(현재 廢寺) 표시
- (武安面의) 表忠祠와 忠孝祠가 있는 지역을 上西三同面으로 표시
- 禮林書院이 (後沙浦)에 표시
- (武安面)에 水安驛과 院, 西倉을 표시
- (初同面) 일대를 上西二同面으로 표시
- (上南面) 일대를 府南初同面으로 표시
- 無屹驛과 院을 표시
- (三浪里)에 統營倉 三浪津과 三江祠 표시
- (龍頭목) 주변에 凝川津 표시
- 父庵寺 남쪽에 下東初同面 표시
- 鵲院棧路 옆에 南倉과 下東二同面 표시
- 良洞驛과 金洞驛 표시
- 栢山烽 동쪽에 府南二同面, 남쪽에 覓禮津 표시
- (守山)쪽에 府南三同面과 守山津, 守山倉, 國農所 표시
- (初同面) 남쪽에 上西初同面, (낙동강변)에 孫哥津 표시
- 中沙島(현재 밀양)와 落沙島(현재 김해)는 密陽府 관할로 표시
○ "종남산 봉수대" 위치 확인
- 종남산 제2峰의 아래인 봉우리에 남산봉(南山熢) 표시한 것을 보아
- 종남산 봉수대가 종남산의 정상도, 제2봉도 아닌
- 정상과 제2봉의 아래에 있다는 것을 표시하고 있어
- 현재의 봉수대 터인 종남산 6부 능선임이 증명이 됩니다
○ 읍치(邑治) 소재지
- 현재의 官衙가 아닌, 영남루에 있었음을 확인시켜 주고 있습니다
○ 제작(지도를 그린) 년도와 제작자에 대해서
-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의 광여도 설명에는
- 광여도를 그린 시기와 사람을 알 수 없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 이것은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 이유는 조선팔도의 각 군현별(요즘으로 치면 시.군.구별)로 그렸기 때문에
- 수많은 군현별 지도를 조정에서는 군현에서 제작해서 제출된 지도를 취합만 했을 뿐이고
- 제출된 지도에 특별한 이상이 없으면, 조정에서 승인했을 것이고
- 특별한 이상이 없으면 조정에서 새로 그리는 등의 감수 작업까지는 하기가 어려웠을 것으로 보입니다
- 제출된 지도의 원래의 지도는 군현에서도 누가 언제 그린 지도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 그러나 우리 밀양부의 지도를 필자(도재국)가 대략 살펴보면 위와 같은 지명이 표시되어 있고
- 폐사된 사찰과 읍치 소재지 기록을 다른 밀주지(밀양지) 등과 비교해 보면
- 제작 년대는 읍치가 영남루에 있을 때의 지도이며
- (武安面의) 表忠祠와 忠孝祠가 있는 지역을 上西三同面으로 표시한 것을 보아
- 또 최소한 표충사당을 단장면으로 옮겨오기 이전의 지도로 확인이 됩니다
- 진상한 지도의 제작자는 밀양부 관아이며(원 제작자는 불명), 古來로 전승된 지도에 가감을 했을 것으로 보여집니다
- 동아대학교박물관 종남산봉수대 조사팀은 종남산 봉수대 위치 학술용역조사를 정확하게 하지 않고
- 바르게 조사하지 않은 학술용역조사 결과로써 경상남도문화재 자료로 고시하는데 문화재청이 승인하고
- 그 승인의 바탕 위에 경상남도가 종남산 봉수대 터를 경상남도문화재자료로 고시하고
- 이를 근거로 밀양시가 종남산 봉수대를 복원한 것은 잘못입니다
- 원래의 위치에 봉수대를 복원하기를 강력하게 요청합니다
○ 광여도 밀양부 검토자 : 도재국 (레나)
위에서 보신 바와 같이
서울대학교 규장각의 고지도 및 국립중앙도서관의 고지도와
현장의 “종남산 6부 능선의 봉군 초소(숙소) 유적지”에 의해서
“종남산 봉수대” 위치가 명명백백하게 확인이 되었습니다
이제 어느 누구도
“종남산 봉수대”의 위치가 위 여러 사진과 고지도에 표시된 “종남산 제2봉의 능선”
즉, “종남산 6부 능선의 봉군 초소(숙소) 유적지”가 아니라는 것을 부정하지 못합니다
문화재청도, 밀양시도, 역사학계도, 어느 누구도 부정을 못합니다
●[1] 표고점의 도근표(삼각점) 사진과 크기와
종남산봉수대 "원형 수혈식 유구"의 "축대 기초석"의 크기 비교
동 보고서의
57 페이지 도면 22
59 페이지 도면 23
61 페이지 직경 3.5 미터 환상구(環狀區)
149 페이지 도판 62 원형(圓形) 수혈(竪穴) 유구(遺構) (上)가 있다
57 페이지에는, 종남산의 추정 봉수대의 연대(煙臺)로 추정되는 "원형 수혈식 유구"가 보인다.
61 페이지에는 직경 3.5 미터 환상구가 있다 라 하고
149 페이지 도판 62 수혈(竪穴) 유구(遺構) (상)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표고점(삼각점 도근표)의 표지석의 크기를 기준으로 하여
연대(煙臺)로 추정되는 기초석으로 보이는 사진의 돌의 크기를 가늠해 보고
57 페이지 :
環狀構(61 페이지) 원형(圓形) 수혈(竪穴) 유구(遺構)
149 페이지 :
도판 62. 봉수대 정상부 트렌치에 노출된 도형 수혈유구(상)와 전경(하)
圖版 62. 烽燧臺 頂上部 트렌치에 露出된 圖形 竪穴遺構(上)와 全景(下)
조선시대 연대(煙臺)의 높이가 3 미터로 본다는 이 보고서상의 기록을 근거로 하여
1. 연대(煙臺 : 불을 피워 불꽃이나 연기가 올라가는 통)의 3.5 미터 정도 직경의 기초석으로서 크기가 적정한지 여부
2. 표고점의 표지석의 크기를 기준으로 원형 수혈식 유구(遺構 : 연대로 추정)의 직경 3.5미터 정도가 적정한지 여부를 알아보고자 한다
표고점 표지석 사진과 크기 : 가로 세로 각각 11.5 cm
삼문송림 체육공원 "그네" 쪽으로 내려가는 제방 위의 표고점(삼각점) 표지석
표고점 표지석 사진과 크기 : 가로 세로 각각 11.5 cm
●[2] 표고점의 도근표(삼각점) 사진과 크기와
종남산봉수대 "원형 수혈식 유구"의 "축대 기초석"의 크기 비교
●[3] 표고점의 표지석(삼각점) 사진과 크기와
종남산봉수대 "원형 수혈식 유구"의 "축대 기초석"의 크기 비교
보고서에는 "圓形" 또는 "圖形"으로 혼재 표기
"보고서 149 페이지" : "도판(圖版) 62"의 원본 사진
확대한 사진
"환상구 우측의 돌(하얀색 2개)"은 색깔로 보아, "좌측의 기초석(약간 검은 색 3개)"과는 다른 돌로 보입니다
좌측의 동그라미 안의 3개의 돌(기초석)은 자연석이 아닌, 다듬은 돌로 보입니다
환상구(環狀構)를 보충 설명한 표식
환상구의 둘레석(기초석) 크기와 직경에 대한 생각
"표고점의 표지석" 사진과 크기 : 가로 × 세로 각각 11.5 cm
"표고점의 표지석"은 어디에 설치되었건 간에, 크기는 모두 동일합니다
이 표지석은 삼문동 송림 북쪽의 "체육공원 그네 맞은편의 제방 위"에 있습니다
●"종남산 봉수대"의 당산나무(느티나무)는 문화재 이상의 가치가 있다
종남산 봉수대"가 중요하기 때문에 문화재에 준하는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했다. "종남산 봉수대"에 있었던 당산나무는 봉수대와 역사를 같이한 증거물로서 또 나무 자체가 보호수로서 문화재의 가치가 있고 인근 마을 주민들의 토속 신앙의 기도처 등으로 귀중한 나무이므로 밀양시가 보호했어야 할 종남산의 보물이었고, 밀양의 보물이었으나 밀양시가 도벌(盜伐)로부터 보호, 보존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수백톤의 돌로 종남산 정상을 누르고 있는 것은 종남산에 대한 모독이다
모든 산의 정상에 표지석을 세울 때 거대한 돌로 정상을 누르면서 표지석을 세우는 것은 우리 민족이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천신을 산신으로 보는 민족 토속신앙 측면에서 아주 불경스러운 일이다. .
산악인들이 매년 초에 산신에 대한 제사를 올린다. 즉, 시산제이다. 산의 표지석은 사람으로 치면, 이름표와 같다. 이름표는 가슴에 다는 것이 맞다. 산의 표지석을 산 정상에 세우는 것은 사람의 이름표를 머리에 붙이는 것과 같다.
이치가 이럴진데 종남산 정상에 거대한 봉수대를 만든 것은 사람의 머리에 커다란 바위를 얹어 놓은 것과 같은 형국이다. 우리나라의 수많은 봉수대 가운데 "종남산 봉수대"처럼 한 고을의 남산의 정상에 봉수대를 설치한 곳은 드물 것 같다.
한 고을에는 남산과 진산이 있다. 남산은 종남산이고 화악산은 진산이다. 남산과 진산은 한 고을을 대표하고 그 고을의 태고적부터 지금까지, 선조의 영혼이 서린 명산이다. 이런 명산의 정상을 거대한 돌로 누르고 있으면 그 고을의 영혼을 누르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우리 밀양사람들은 우리 밀양인의 영혼을 누르고 있는 잘못 복원한 「종남산 봉수대」를 정리하고 원래의 자리에 「종남산 봉수대」를 복원해야 한다. 그리고 산의 표지석은 정상에서 조금 비껴서, 산 정상의 북쪽을 기준으로 하여 우측에, 남쪽을 향하여 세워야 한다.
●밀양유감(密陽儒監, 1951년, 밀양향교)에 기록된 봉수대 운영 규정
이 문헌은 향토사학자인 박순문 변호사가 제공했습니다. 밀양의 봉수에 대해서 고증할 수 있는 상세한 기록이 있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규장각, 회화식 여지도, 밀양부(지도 및 주기 따로 작성)중, 주기에는 봉군을 100명으로 기록
규장각 회화식 여지도(輿地圖), 밀양부. 규장각 고지도 회화식 여지도는 밀양부(지도)와 "밀양부 주기(地誌)"로 각각 제작(작성)되어 있다. 그 중에서 "밀양부 주기"에는 봉군을 100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규장각, 지승(地乘) 밀양부 지도 및 주기
1. 주기에 군사 자료 기록
2. 주기에 용두목을 "전죽전"으로 표시
3. 용두목 전죽전
- 용두목 전죽전은 밀양도호부 관아, 자씨산성, 호두산성, 추화산성, 밀양읍성의 화살 제작용으로 관리되었던 것 같다
- 종남산 봉군 초소 주변 전죽과 종류가 똑 같다
4. 참고
우리 밀양인들은 용두목에서 금시당 쪽으로 가는 "용두 비알길(비탈길)"에 많은 전죽이 있는 것을 보면서, 여기에 왜 전죽이 있는지, 자생했다고들 대부분 믿고 었었으나 오늘 규장각의 고지도를 보고서, 밀양부 관아에서 심고, 관리했던 전죽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종남산 정상에서 발견된 고급 자기 파편은 정상에 봉수대가 없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 자기 파편은 봉수대에서 사용된 자기가 아닌, 당각(堂閣)에서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한 제기의 파편이다. 즉, 종남산 정상에는 봉수대가 있었던 것이 아닌, 제사를 위한 당각이 있었다는 증거이다. 종남산 정상에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당각의 부지가 입지했기 때문에 봉수대 부지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종남산 정상에 봉수대가 없었다는 또 하나의 명백한 증거이다. 당각이 있었다는 것을 기록한 고문헌이 있었는데, 어떤 이유에서 그 고문헌이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있다. 자세한 이야기를 언급할 수 없어 현재로서는 매우 안타깝다.
●구름에 종종 덮히는 종남산 정상은 봉수대 위치로 적합한 장소가 아닙니다
오늘은 이른 아침부터, 12시가 넘는 지금까지 종남산 정상은 구름에 덮혀 있습니다. 종남산 정상이 봉수대 위치가 아니라는 명백한 역사적 증거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오늘 오전 저는 밀양시 삼문동 고수부지 체육공원을 운동하면서 구름에 덮혀있는 종남산 정상을 쳐다보았습니다. 저는 매일 삼문동 둔치 체육공원(둔치)를 한 바퀴씩 돌기 때문에, 종남산 정상이 종종 구름에 덮혀 있는 것을 봅니다. 조선시대에 종남산 정상에 봉수대를 만들었다면 외적의 침입했을 때 백성을 더 많이 죽이고, 백성의 집을 더 많이 불태우게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 밀양에는 북방 외적(外敵)이 침입하여 밀양 땅을 짓밟았고 남쪽으로부터는 왜적(倭敵)이 침입하여 밀양 땅을 유린했습니다. 종남산 정상에 봉수대를 만들었다면, 구름에 덮혔을 때 대응 봉수에서 외적(外敵) 침입의 봉화 신호가 있었을 때 볼 수가 없어 집니다. 종남산 정상은 하루종일 구름이 덮혀 있어도 "종남산 제2봉 6부 능선의 종남산봉수대"에는 하루종일 구름 한 점 없어 봉화 신호가 가능해 집니다.
필자(도재국)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해 보시려면 구름이 낀 날, 종남산 정상을 쳐다보시면 확인이 됩니다. 무안, 청도, 초동, 삼랑진 무월산 고개 너머를 제외하면 밀양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종남산 정상을 조망할 수 있습니다. 구름에 덮힌 종남산 사진을 곧 올려 드리겠습니다.
Ⅷ. 맺는말
[사진 9] 밀양부(密陽府) 관아에서 바라본 "종남산(남산)봉수대"
봉수대의 ①봉군(烽軍)이 숙식하는 숙소 ②경계보초를 서는 초소(哨所) ③불(烽)과 연기(燧)를 올리는 연대(煙臺)의 위치와 설치 등에 대해서 전술(前述)했다.
다시 언급하지만 종남산봉수대는 제1봉의 정상도, 제2봉의 정상도 아닌, “제2봉의 6부 능선의 봉군의 숙소 겸 초소가 있는 곳”에 있었다는 명백한 증거를 여러 항목에 의해 입증을 했다.
그리고 ①봉군(烽軍)이 숙식하는 숙소 ②경계보초를 서는 초소(哨所)는 같은 구내에 있었고, ③연대(煙臺)는 이 숙소 겸 초소에서 “한걸음”에 내달을 수 있는 곳에 위치해야 하며, 이에 따라 언전(諺傳) 등에 의해 연대(煙臺)의 위치는 숙소 겸 초소에서 제2봉의 정상 방향 30미터쯤의 약간 평평한 곳이 위치했다고 했다.
또 “제2봉의 6부 능선의 봉군의 숙소 겸 초소가 있는 곳”은 북쪽 대응 봉수인 추화산봉수(推火山烽燧)와 더 먼 곳에 있는 분항봉수(盆項烽燧)가 환히 조망되고, 또 남쪽 대응 봉수인 백산봉수(栢山烽燧)와 더 먼 남쪽의 자암산봉수(子巖山烽燧)까지도 환히 조망된다
필자(손흥수, 도재국)는 원래의 종남산봉수대 유허(遺墟)를 여러 번 둘러보면서 너무나 안타까운 상황을 보고 서글펐다. 원래의 종남산봉수대 유허(遺墟)가 종남산 6부 능선의 임도변(林道邊)에 엄연히 남아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부정하고, 왜곡하고, 방치하고, 종남산 정상(頂上)에 봉수대를 건립한 것은 역사 발전에 맞지 않는 일이다.
원래의 종남산봉수대는 지금도 방치되어 잡목의 뿌리가 파고들어, 남은 축대조차 뭉개고 있다. 500년 동안 봄.여름.가을.겨울 하루도, 단 몇 초도 쉬임이 없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우리의 선조들이 종남산 신목(神木)과 함께 보초를 섰다.
하루 12명의 봉군들이 24시간 365일 500년 이상 보초를 섰고
봄에는 긴긴 해에 등가죽에 붙은 배를 움켜쥐고 보초를 섰고
여름에는 작렬하는 뙤약볕 아래 보초를 섰고
가을에는 주린 배를 산나무 열매로 채우면서 보초를 섰다.
엄동설한에는 삼베옷에 스며드는 죽음보다 더한 살기어린 한파 속에 나라를 지켰다.
종남산봉수대 초병(봉군) 500년간의 연인원 2,190,000명
그분들은 우리의 선조(先祖)이고 향토의 첨병(尖兵)이었다.
[500년간의 경계근무 봉군(烽軍) 장정(壯丁) 숫자]
12명(1일 3교대) × 365일(1년) × 500년 = 2,190,000명 !
우리 모두는 행정기관에 부탁하고 싶다.
우선 봉수대 안팎의 잡목(雜木)을 하루빨리 베어내고, 또 대응 봉수 방향의 차폐(遮蔽) 잡목도 베어 내고, 조그마한 “표지석”이라도 설치하여 “이곳이 원래의 종남산봉수대 터이다”라고 해야 한다.
그리고 연인원(延人員) 2,190,000명 선조[先祖 : 장정(壯丁)]의 피와 땀과 영혼이 서려있는 “종남산(남산)봉수대”에 정상적인 표지석와 추모비를 세워야 한다. 그리고 봉군들의 숙소와 초소를 복원해야 한다. 또 연대(煙臺)도 복원해야 한다. 어쩌면 그 시대의 연대(煙臺)의 원형(元型)은 “분항봉수대(盆項烽燧臺)의 연대(煙臺)가 없는 봉수대”와 비슷할 지도 모른다. 『연대(煙臺)의 구조(構造) 부분』만은 다시 검증을 해 보아야 한다.
종남산 정상에 세워진 봉수대의 거대한 연대(煙臺)는 허울좋은 역사의 왜곡일 따름이다. “종남산 정상의 봉군의 숙소도 초소도 없는 반쪽짜리 절룸발이의 거대하고 육중한 연대(煙臺)”는 “사라져가는 원래의 봉수대 터(墟)”를 바라보는 우리들의 안타까운 마음의 무게만큼이나 가슴을 짓누르고 있다.
종남산(終南山) 임도(林道) 바로 옆에 원래의 종남산봉수대 유허(遺墟)가 있어 그곳에 봉수대를 복원한다면, 엄청난 예산을 들여 종남산 정상에 바위덩어어리 같은 견치석을 끌어올렸던 와이어윈치 시설을 안해도 되고, 종남산 임도를 통해 관련 자재(건축물 자재)를 싸게 운송할 수 있다. 마음만 먹어면 언제든지 복원할 수 있다. 원래의 종남산봉수대 터에 원형(元型)의 봉수대를 복원하는 일은 향토 역사를 바르게 하는 일이다. 우리는 자손대대로 종남산봉수대의 잘못된 역사(잘못된 복원, 잘못된 위치 등)를 가르쳐서도 안되고, 물려주어서는 안된다.
우리 모두는 오늘도 바른 역사를 존중하고, 또 후세에게도 바른 역사를 전승(傳承), 보존(保存)케 해야 하는 의무와 책임이 있다. 이와 함께『천황산(天皇山)을 재악산(載岳山)으로 복원하고, 재약산(載藥山)을 수미봉(須彌峰)으로 변경하는 것』도 바른 역사를 존중하는 일이다.
※ 참고 사항
『고대(古代) 밀양의 읍락국가였던 미리미동국의 산성(山城)』『종남산봉수대의 원래 위치 복원』 『재악산(載岳山) 산명 복원』 『고려시대 농민군인 밀성(密城) 효심의 난』 『고려시대 삼별초를 지원한 밀양인의 항몽독립운동』『단장면 정승동(政丞洞) 고려 정승 김용(金鏞) 관련 지명 유래』『밀양의 마을 사진』『밀양의 마을 지명 유래』등 밀양역사 발전을 이룩한 큰 물결의 중심에 섰던 수많은 사건과 밀양의 어제와 오늘의 모습, 밀양에서 일어나는 시시각각 뉴스와 행사, 세상의 흐름 등 수많은 글과 사진이 “다음(Daum) 카페 밀양광장”에 올려져 있습니다.
□ 밀양광장 http://cafe.daum.net/historymiry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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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고문 수정 내용
Ⅲ. 주.군.현의 남산의 개념과 종남산 정상의 유적발굴 평면도의 진실
1. 주.군.현(州.郡.縣)의 남산(南山)의 개념(槪念)
기고문 70 페이지, 111 페이지 : 무리 "군(群)"을, 고을 "군(郡)"으로 수정
Ⅶ. 밀양광장에 게재한 종남산봉수대 관련 글들
●구름에 종종 덮히는 종남산 정상은 봉수대 위치로 적합한 장소가 아닙니다
기고문 159 페이지 "외적(倭敵)"을, "왜적(倭敵) 및 외적(外敵)"으로 수정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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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남산봉수대 (終南山烽燧臺) 백산봉수대 (栢山烽燧臺) 위치 고찰
종남산봉수대 (終南山烽燧臺) 백산봉수대 (栢山烽燧臺) 위치 고찰
종남산봉수대 (終南山烽燧臺) 백산봉수대 (栢山烽燧臺) 위치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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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남산봉수대 (終南山烽燧臺) 백산봉수대 (栢山烽燧臺) 위치 고찰
종남산봉수대 (終南山烽燧臺) 백산봉수대 (栢山烽燧臺) 위치 고찰
종남산봉수대 (終南山烽燧臺) 백산봉수대 (栢山烽燧臺) 위치 고찰
다음 부터는
지면(紙面) 관계상 "기고문"에는 게재하지 못한 글과 사진, 그림들(그래픽)입니다
종남산봉수대 (終南山烽燧臺) 백산봉수대 (栢山烽燧臺) 위치 고찰
종남산봉수대 (終南山烽燧臺) 백산봉수대 (栢山烽燧臺) 위치 고찰
종남산봉수대 (終南山烽燧臺) 백산봉수대 (栢山烽燧臺) 위치 고찰
1. 종남산 정상에서 백산 방향 조망
종남산봉수대 (終南山烽燧臺) 백산봉수대 (栢山烽燧臺) 위치 고찰
종남산봉수대 (終南山烽燧臺) 백산봉수대 (栢山烽燧臺) 위치 고찰
종남산봉수대 (終南山烽燧臺) 백산봉수대 (栢山烽燧臺) 위치 고찰
종남산봉수대 (終南山烽燧臺) 백산봉수대 (栢山烽燧臺) 위치 고찰
종남산봉수대 (終南山烽燧臺) 백산봉수대 (栢山烽燧臺) 위치 고찰
종남산봉수대 (終南山烽燧臺) 백산봉수대 (栢山烽燧臺) 위치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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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남산봉수대 (終南山烽燧臺) 백산봉수대 (栢山烽燧臺) 위치 고찰
종남산봉수대 (終南山烽燧臺) 백산봉수대 (栢山烽燧臺) 위치 고찰
종남산봉수대 (終南山烽燧臺) 백산봉수대 (栢山烽燧臺) 위치 고찰
2. 종남산 제2봉 정상에서 백산 방향 조망
제2봉 정상에서 백산 방향으로 시야가 흐려, 사진 촬영이 불가능하여
육안으로 본 것을 위와 같이 그렸음
종남산 제2봉의 정상(헬기장)에서 나무가지 사이로 백산 방향으로 보면,
잡목과 소나무가 병풍처럼 막혀(우거져) 보이지 않는다.
종남산 제1봉 정상에서 바라본 제2봉 정상(헬기장)
종남산봉수대 (終南山烽燧臺) 백산봉수대 (栢山烽燧臺) 위치 고찰
종남산봉수대 (終南山烽燧臺) 백산봉수대 (栢山烽燧臺) 위치 고찰
종남산봉수대 (終南山烽燧臺) 백산봉수대 (栢山烽燧臺) 위치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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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종남산 제2봉 6부능선(봉군 숙소 겸 초소)에서 백산 방향 조망
종남산봉수대 (終南山烽燧臺) 백산봉수대 (栢山烽燧臺) 위치 고찰
종남산봉수대 (終南山烽燧臺) 백산봉수대 (栢山烽燧臺) 위치 고찰
종남산봉수대 (終南山烽燧臺) 백산봉수대 (栢山烽燧臺) 위치 고찰
동그라미 안이 백산봉수대가 잇엇던 "송산마을 북동쪽 백산 산록"이다
- 노란선은 백산봉수대 설치 전의 봉수 전달 노선
- 파란선은 백산봉수대 설치 후의 봉수 전달노선
- 임진왜란 때 봉수를 전달하는 과정에 자암산과 남산(종남산 제2봉 6부능선)이 너무 멀어
- 봉수 전달이 어려워 백산봉수대를 신설했다
- 필자(도재국)가 2개의 봉수 노선을 구분하기 위해 2개의 노선을 약간 띄워 표시했으나
- 실재로는 2개의 봉수 노선이 일직선으로 같음.
대구광역시 달성군과 경북 청도 경계의 "비슬산에서 종남산 정상, 제2봉 6부 능선 옛 종남산봉수대터를 거쳐
팔봉산, 호치, 붕어등, 어은동, 오산, 낙동강"까지를 비슬지맥이라 한다
필자(도재국)는 위 본문 글에서 "제2봉 6부 능선 옛 종남산봉수대터를 거쳐
팔봉산, 호치, 붕어등, 어은동, 오산, 낙동강"까지를 편리상 "붕어등지맥"이라 했다
600여년 전에 쌓은 "종남산 제2봉의 6부 능선"에 있는
"종남산봉수대 봉군(烽軍) 숙소 겸 초소의 축대"
(동아대학교박물관 조사팀은 이 축대를 "돌무지"로 왜곡했다)
종남산봉수대 "봉군 숙소 겸 초소"의 평면도(아래)
[이 평면도는 필자(도재국)가 잡목과 전죽(箭竹)을 베어내고 확인하여 그린 것이다)]
2018.8.26 수정 내용 :
봉수대의 연대(연조) 위치는 위 도면의 좌측 검은 큰 동그라미로 추정됨
도벌되기 전의 느티나무의 위치는 우상(右上, 우측 상단부, 노란 동그라미)의 위치임
종남산봉수대 (終南山烽燧臺) 백산봉수대 (栢山烽燧臺) 위치 고찰
종남산봉수대 (終南山烽燧臺) 백산봉수대 (栢山烽燧臺) 위치 고찰
종남산봉수대 (終南山烽燧臺) 백산봉수대 (栢山烽燧臺) 위치 고찰
종남산봉수대 터(址)에 있었던 거대한 종남산 신목(神木) (1951년 촬영 사진)
500여년 동안 "종남산봉수대와 봉군(烽軍)"과 함께 했던 거대한 종남산 신목(神木)
- 저 거대한 종남산 신목(神木)은 600 여년 전에 종남산봉수대의 봉군(烽軍)이 심었다
(1894년 봉수제 폐지)
- 저 거대한 신목은 봉수대가 운영되던 500여년 동안은 만인(萬人)에게 "종남봉수대의 위치"로 알려주었고
- 무더운 여름에는 봉군들에게 그늘로, 오가는 길손에게는 잠시 쉬어가는 쉼터로 이용되었고
- 수십리 떨어진 밀양 곳곳 마을사람들에게는 이정표의 역할을 했다
- 저 거대한 종남산 신목(神木)이 있었던 자리가 "원래의 종남산봉수대 자리"였다
- 종남산 임도(林道)가 개설되고 난 후,
- 종남산 정상에 "역사적 사실과 맞지않는 봉수대"를 만들기 전에 누군가가 "종남산 신목"을 베어 버렸다
- 종남산 신목과 종남산봉수대 바로 앞에는 종남산 산중대로(山中大路)가 열려 있었고
- 종남산 신목과 종남산봉수대는 종남산의 동서남북의 수많은 산록 마을의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던 산중대로의 길목에 있었다
- 종남산봉수대와 신목이 있었던 산마루 길은 수백년 전부터 밀양의 대(大) 사찰(寺刹)이었던 영은사(靈隱寺)를 오가던 수많은 신도들이 수없이 다녔던 길목이었다.
- 종남산봉수대와 신목이 있었던 산마루를 종남산 봉화령(烽火嶺)이라 불렀고, 동서남북으로 산중대로가 열려 있었다
- 종남산 신목과 종남산봉수대 터의 산중대로는 수 백년동안 수많은 길손들이 오갔던 쉼터였다
- 종남산 신목에 수백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제각각의 소원과 가정의 안녕과 지역과 나라의 안전과 평화를 위해 치성을 드렸다
- 종남산 정상에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는 봉수대가 만들어지기 전에, 왜, 신목이 도벌되었을까 !!!
- 종남산은 알고 있다 !!!
- 왜, 그 때, 종남산 신목이 무참히 잘려지고 뿌리째 파헤쳐졌는지를 !!!
- 종남산 신목을 도벌한 도벌꾼은 좀도둑이 아닌, 큰 도둑이 아니었을까 ???
- 종남산의 향토 역사(봉수대 역사)를 지워버린 큰 도둑
- 우리는 몰라도, 그 큰 도둑을 종남산은 알고 있다.
- 그 큰 도둑이 종남산 신목을 무참히 잘라버리므로써, 후세 사람들에게 원래의 종남산봉수대의 터를 감춰버리는 결과가 되었다
- 그 큰 도둑이 종남산 신목을 무참히 잘라버리므로써, 후세 사람들에게 원래의 종남산봉수대의 흔적을 지워버리는 결과가 되었다
- 종남산 신목과 종남산봉수대는
- 수많은 밀양인의 수백년의 삶과 애정과 애환과 서정과 희망이 서려 있었다
- 그러한 종남산 신목을 무참히 베어버려, 밀양인의 수백년의 삶과 애정과 애환과 서정과 희망 또한 무참히 없애버렸다
- 우리는 바른 역사, 바른 향토사를 보존해야 한다
- 우리는 향토 역사의 사실을 전승하고 자손대대로 물려주어야 한다
- 종남산봉수대 터에 있었던 종남산 신목을 무참히 베어버린 큰 도둑은 어디에 있건 간에 역사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 종남산봉수대의 역사를 왜곡하는 자들은 어디에 있건 간에 가슴에 손을 얹고 당신들이 한 짓들을 생각해 보아라
종남산봉수대와 봉군(烽軍)과 500여년을 같이 했던 종남산 신목(神木)
봉수제도가 폐지된 지 100년이 넘었으니까, 도벌되지 않았다면 수령(樹齡)이 600년을 넘었을 것이다
이 사진은 1951년도에 찍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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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향토사연구회 발행 "밀양이야기(제7집)"의 뒷면 표지
"봉수대 사진"의 오해(오인) 방지를 위한 설명
필자(손흥수, 도재국)는
본 책(밀양이야기 제7집)에 "종남산봉수대 및 백산봉수대 위치"에 대한 글을 기고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밀양향토사연구회에서 편집한 본 책의 "뒷면 표지"에는
종남산봉수대가 아닌, 추화산봉수대 사진(아름다운 봉수대 사진)을 올려 놓았습니다
아래(책 뒷면 표지)의 봉수대 사진에는 "추화산봉수대 사진"으로 표시를 하지 않아
본 책(밀양이야기)을 보시는 분들에게 종남산봉수대로 오해(오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즉, "아름다운 종남산봉수대를 왜 철거해야 하나?" 하는 의문을 갖게 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필자(손흥수, 도재국)는 오해(오인)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아래(책 뒷면 표지) 사진은 "추화산봉수대 사진"임을 알려 드립니다
밀양이야기(제7집) 책 (표지 앞면)
밀양 추화산봉수대(推火山烽燧臺) 사진
밀양이야기(제7집) 책 (표지 뒷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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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뚱한 곳(종남산 정상)에 만든 종남산봉수대
철거해야 할 엉터리 종남산봉수대
위 봉수대는 원래의 위치(종남산 제2봉 6부 능선)에 만들지 않고
"역사적인 근거가 없는 종남산 정상"에 만들었으므로, 반드시 철거를 해야 합니다
종남산 정상은 사람의 머리(정수리)에 해당합니다
밀양의 남산인 종남산 정상을 거대한 바위로 짓누르는 이 엉터리 봉수대는 반드시 철거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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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사항 ===
종남산(終南山) 및 백산(栢山) 봉수대(烽燧臺) 위치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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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주.군.현의 남산의 개념과 종남산 정상의 유적발굴 평면도의 진실
1. 주.군.현(州.郡.縣)의 남산(南山)의 개념(槪念)
기고문 70 페이지, 111 페이지 : 무리 군(群)을 고을 군(郡)으로 수정
Ⅶ. 밀양광장에 게재한 종남산봉수대 관련 글들
●구름에 종종 덮히는 종남산 정상은 봉수대 위치로 적합한 장소가 아닙니다
기고문 159 페이지 "외적(倭敵)"을 "왜적(倭敵) 및 외적(外敵)"으로 수정
위 댓글은, 기고문 발간 후, 확인 결과, 잘못된 글자(내용)을 바로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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