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15:12-19절 부활은 영원한 구원의 생명을 소망하는것
기독교를 부활의 종교라고 부르는 이유는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기독교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핵심 되는 두 기둥은 십자가와 부활이며, 사도들이 목숨 걸고 전했던 복음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부활이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부활의 중요성을 과거, 현재, 미래~ 세 가지 관점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지금 현재에서 부활 신앙을 자기 말로 설명하지 못하면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 안으로 깊숙이 들어온 그리스도인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1. 부활은 역사적으로 실재하는 사건입니다.
과거적 관점에서 부활의 의미는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사건입니다,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조작해서 만든 허구가 아니고, 역사적으로 실재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 성도 중에 ‘죽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가 있는가?’ 하면서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바울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12절 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없다 하느냐’ 이것은 부활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에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1.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지 못하셨을 것이며(13)
2. 우리의 전하는 복음도 헛것이며(14),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고.(14)
3. 뿐만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거짓 증거자가 될 것입니다.(15)
4.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을 것입니다.(15)
5. 그렇다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것이고(16)
6.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며(17)
7. 예수를 믿는다 해도 죽으면 멸망할 것이고(18)
8. 믿는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장 불쌍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19) 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아멘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갑자기 일어난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이미 구약 성경에서 예언된 내용이 성취가 된 사건입니다.
신약은 항상 구약에 그림자가 있는데 왕하4장에 보면 수넴여인의 아들을 엘리사가 살려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도 여럿을 살리셨습니다. 과부의 아들이 있고, 나사로가 있고, 야이로의 딸이 그렇습니다. 바울도 창가에 걸터 앉았다가 떨어져 죽은 청년 유두고, 구제를 잘하는 여제자 다비다를 살린 사건, 이렇듯 부활이란? 기독교가 전하는 진리 가운데 핵심 중에 진리입니다.
그런즉 부활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주장대로라면 그리스도도 살아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복음의 선포와 그것에 대한 믿음도 허사가 되고 맙니다. 그럴 경우 사도들은 자연스레 거짓말쟁이가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전히 자신의 죄 안에 갇힌 삶을 사는 것이 됩니다. 나아가 부활이 없으니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자들도 영원히 망한 것이 되고 맙니다. 이런 주장대로라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참으로 불쌍한 존재들이 됩니다. 그런 만큼 잘못된 부활 교리에 마음을 주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바울이 선포한 복음의 핵심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 성도의 일부는 육체적 부활을 부인했습니다. 당시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은 영지주의자들이 부활이 없다고 주장한 것은 결국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파괴하는 행위였습니다. 바울은 이들의 가르침과 거짓된 사상을 배격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부활이 없다면 그것은 이천년 동안 속삭여 온 사탄의 거짓말입니다.
이처럼 부활이 가짜라는 것만 증명되면 기독교의 모든 것이 다 무너져버리기 때문에 사탄은 지난 이천년동안 "부활은 역사적으로 실재하지 않았다"는 수많은 가설을 만들어 기독교를 공격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기록할 당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자들이 오백 명이나 된다고 했습니다. 3절“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6절“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이것은 부활의 목격자가 아직도 살아 있다고 증언을 합니다.
다시 말하면 부활이 없으면 결국 구원도 없습니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은 죄의 결과입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죽음은 영원한 파멸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이기는 것은 곧 죽음을 이기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죽음을 이기는 것이 부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분을 믿는 내 자신에게도 죽음을 이길 수 있는 특권을 주신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잘못된 이론들과 사상들이 난무하면서 신앙의 정체성에 큰 혼란을 가져옵니다. 말씀으로 거짓된 것들을 분별하여 복음의 반석위에 굳건하게 서가야 하겠습니다. 부활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부활은 구원으로 인도하는 영생의 관문입니다. 구원의 시작을 보여주신 예수님을 온전히 믿고, 신뢰하므로 구원의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 부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영원한 구원의 생명을 소망하는 삶입니다(16~19절).
16절은 13절의 내용을 반복하면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하여 죽은 자가 부활할 것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13절“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즉 부활이 없다면 예수님도 부활하지 못하였습니다. 부활이 있기에 우리 주님이 부활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14절)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분리시킬 수 없는 구속적 사건임을 재차 강조하고 있습니다.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을..’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죄 가운데 있고, 결국 영원한 멸망만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활 소망은 궁극적으로 이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게 됩니다. 만일 성도가 바라는 것이 이 세상의 삶뿐이라면 그들은 모든 사람 중에 가장 불쌍한 자들일 것(19절)이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내 생활이 무기력해 지고, 목적도 상실한 무의미한 삶이라고 여겨질 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묵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이 분명함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나’라는 존재는 영원한 나라를 소망하며 이 땅에서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존재임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는 부활에 대해 입술로만 고백하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살아내야 하겠습니다.
적어도 영원한 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간다 하면서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인 것처럼 아등바등 살아가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부활은 다른 사람의 밭에서 농사를 짓다가 발견한 보석과 같은 것입니다. 나의 전 재산을 팔아 그 밭을 산 것처럼 나의 삶의 전부를 바쳐 부활의 기쁨을 누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입니다. 간밤에 잘 자고 새로운 아침을 맞이하는 것처럼 부활도 이 세상에서의 모든 수고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었다가 광명한 새 아침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나라에 내 인생을 투자하기를 결단해 봅시다. 그러므로 영원한 구원의 생명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것이 부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치려합니다.
토마스 아담스는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 신앙의 대상일뿐만 아니라 우리 소망의 본보기이기도 하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해 우리의 믿음이 더욱 견고해질 수 있고. 또 기독교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에 있습니다.
오늘도 헛된 거짓 사상에 걸려 넘어져 나의 신앙을 빼앗기지 않도록 명심하고, 분명하고 확실한 부활의 소망 속에서 살아갈 뿐만 아니라 기쁨과 행복의 인생으로 인도하시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전하고, 누리는 삶이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하늘산소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