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희(朱熹)명칭(名稱)의 고찰(考察)
중국 자양월간(紫陽月刊) 32기(2000년 4월)에 주문공(朱文公) 명칭(名稱)에 관한 고찰(考察)이 발표되었다. 우리 종, 문중(宗, 門中)에는 상당한 교양(敎養)이 있는 사람도 문공(文公)의 자(字), 아호(雅號), 기타 별명(別名)을 구별하지 못하므로 혼동(混同)하거나 오용(誤用)하는 경우가 있으므로 이를 번역(飜譯)하여 소개한다.
주문공(朱文公) 또는 문공(文公) 할아버지라고 번역(飜譯)하지 않고 주희(朱熹)라고 직역(直譯)한 것은 주자학회(朱子學會)에서 주희(朱熹)를 고유명사(固有名詞)로 결정하였기 때문임을 이해하기 바란다.
주희(朱熹)
주희(朱熹)가 우계(尤溪)에서 출생할 때에는 부친 주송(朱松)이 진회(秦檜)에게 파면당하고 서당에서 글을 가르치고 있었다. 주송은 송(宋) 정권(政權)의 남하 이후 국사(國事)를 비판(批判)하고 간신(奸臣)이 정권을 잡아 사회가 암흑시대였으므로 자식이 성장하면 광명세상(光名世上)이 될 것을 희망하여 天亮(천량: 날이 밝음)의 뜻을 담아 희(熹)라고 작명하였다. 또한 주가(朱家)는 오행학설(五行學說)을 숭상(崇尙)하였으며, 주희시대(朱熹時代)는 화(火)에 속하였으므로 희(喜) 밑에 화(火)를 첨가하였다.
심랑(沈郞)
주희(朱熹)는 우계(尤溪)에서 출생하였다. 그곳에는 심계(沈溪)라는 한 줄기 하천이 있었다. 주송은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심랑(沈郞)이라고 작명하였다.
십이랑(十二郞)
고대(古代) 가족제도(家族制度)는 같은 항렬(行列)의 형제를 배열(排列)하는 습관이 있었다. 주희는 같은 항렬(行列)의 제 십이(第 十二)이므로 십이랑(十二郞)이라고 불렀다.
원회(元晦)
주희(朱熹)는 유년(幼年)에 부친을 잃고 부친의 명(命)에 따라 오부리(五夫里) 유자휘(劉子翬) 선생 등 세 사람에게 의지하였고 오부리(五夫里)에서 자랐다. 옛날 학자(學者)는 성년(成年)해에 자(字)를 취하였는 바, 주희(朱熹) 보호인(保護人) 유자휘(劉子翬)는 원회(元晦)라고 지어주었다.
木晦于根(목회우근)
春客曄敷(춘객엽부)
人晦于身(인회우신)
神明內腴(신명내유)
회(晦)의 뜻은 어둠, 숨김이며 시(詩)에서 주희(朱熹)를 위하여 원회(元晦)라고 하여 외부에 나타나지 않고 도덕(道德)이 내부(內部)에 축적(蓄積)되기를 바라는 뜻을 희망하였다.
중회(中晦)
주희(朱熹)는 자신이 원(元)은 사덕(四德)의 머리이므로 감당하기 어렵고 마음이 불안하다 하여 결국 중회(中晦)로 개자(改字)하였다.
자양(紫陽)
주희(朱熹)의 조적(祖籍)은 강서성 무원(婺源)이다. 무원 남쪽에 자양산(紫陽山)이 있다. 부친이 건양(建陽)에 온 후 주희는 고향에 대한 생각을 잊을 수 없어서 그가 있는 곳에 ‘자양서당(紫陽書堂)’이라고 써 붙였다. 그때 사람들은 자양부자(紫陽夫子)라고 불렀다.
주: 夫子=스승의 존칭. 공자의 존칭.
朱氏 후예가 朱文公을 朱夫子라고 부르는 것은 옳지 않다.
운곡노인(雲谷老人)
순희 연대(淳熙年代) 건도(乾道) 2년 주희(朱熹)는 건양노봉(建陽蘆峰)의 운곡(雲谷)에 여행 갔을 때에 즉흥시(卽興詩)를 지었는데, 그 산명(山名)을 따서 운곡노인(雲谷老人)으로 낙관(落款)하였다.
회옹(晦翁)
건도(乾道) 2년 주희(朱熹) 41세 때 풍경(風景)이 수려(秀麗)하고 그윽함을 그리워하여 산에 한천정사(寒泉精舍)를 세우고 거실을 회암(晦庵)이라고 불렀다. 이후 회옹(晦翁)이라는 이름을 쓰게 되었다.
고정(考亭)
주희(朱熹)는 소흥(紹興) 3년에 건양현(建陽縣) 고정(考亭)으로 이사하여 제자들에게 강학(講學)하였으므로 고정학파(考亭學派)라고 부르고 학자(學者)들은 그를 고정선생(考亭先生)으로 불렀다.
창주병수(滄洲病叟)
주희(朱熹)가 고정(考亭)으로 이사하여 죽정사(竹精舍)를 세웠는데, 맞은편에 아름다운 녹주(綠洲)가 있어서 창주(滄洲)라고 불렀다. 그로 인하여 창주정사(滄洲精舍)로 개명(改名)하였다. 그는 만년에 발병을 앓고 있었으므로 창주병수(滄洲病叟)라고 하였다.
둔옹(遁翁)
‘遁’은 달아날 둔, 숨는다는 뜻이다. 주희(朱熹) 말년(末年)에 위학지죄(僞學之罪)에 몰려 정권(政權)을 장악(掌握)한 한탁주(韓侂冑)의 지명수배(指名手配)를 당하여 대단히 곤란하였다. 그는 학생(學生)으로서 은거(隱居)하기를 바랐으며 제자(弟子)에게 강학(講學)하고 저서(著書)에 힘쓰며 국가대사(國家大事)는 논의하지 않고 의지소침(意志消沈)하여 은퇴피세(隱退避世)할 뜻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둔옹(遁翁)이라 불렀다.
다선(茶仙)
경원학문사건(慶元學問事件) 때에 주희(朱熹)는 사방으로 화(禍)를 피하고 있었다. 학생을 위하여 대구편액(對句扁額)은 쓸 수 있었으나 본명(本名) 서명(署名)은 할 수 없었다. 일찍이 무이암차(武夷岩茶)를 좋아하는 사람을 다선(茶仙)이라 하듯이, 고전삼양계산서원편액(古田杉洋溪山書院扁額)은 다선(茶仙)이라고 명제(命題)하였다.
문공(文公)
주희(朱熹)는 생전에 이학(理學: 性理學)을 숭상(崇尙)하였으며 사후(死後)에 송, 가정 원년(宋, 嘉定元年)에 황제(皇帝)가 그의 오류를 바로잡기 위하여 문공(文公)의 시호(諡號)를 내렸기에 후세에 주문공(朱文公)이라 존칭(尊稱)하였다.
신국공(信國公)
송, 이종 보경(宋, 理宗寶慶) 3년 정월(正月)에 신국공(信國公)으로 추증(追贈)되었다.
휘국공(徽國公)
송, 소정(宋, 紹定) 3년 9월 주희(朱熹)를 휘국공(徽國公)으로 봉(封)하였다.
주: 휘국=중국 안휘성의 약칭
주희의 조적이 안휘성 무원이었으므로 안휘성 휘국공이라는 뜻임.
제국공(齊國公)
원, 지정(元, 至正) 22년 2월 원, 조정(元, 朝廷)이 주희(朱熹)를 제국공(齊國公)으로 개봉(改封)하였다.
중국 민학통신 13기(閩學通信 13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