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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목사의 성지순례 회고록
1. 성지순례의 동기
성지 순례를 하게 된 동기는 여성 장로이신 이모님의 제안에서였다. 기독교 텔레비전 방송을 보시던 중 대전 중문침례교회를 시무하는 장경동 목사가 집회를 인도하는 특별 성지순례 프로그램 광고를 보신 까닭이다. 일단 예약금 수 십만원을 송금하면서 예약을 하고 이삼일 후 잔금 모두를 송금하려 할 때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하였다. 이모님께서 대전에 가셨다가 운동 중 무릎관절을 다치셨다는 것이다.
예약금을 치룬 상황에서 여행을 가느냐 마느냐 곤란한 상황인데 이모님은 나만 다녀오라신다. 결국 그런 전차로 하여 나 홀로 여행을 진행키로 했다.
이집트, 이스라엘, 요르단 3개국을 여행하는 성지순례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근 200만원에 가까운 큰 돈이 이모님 덕분에 치러지고 가슴설레는 순례가 시작된 것이다.
2. 출발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한 것은 2005년 11월 2일 오후 4시 경이였다. 집결시간은 7시경이었지만 좀 일찍 도착하여 공항을 둘러보며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였다. 공항 지하로 내려가면 저렴한 식당도 여러 개 있고 사우나탕이니 당구장도 있고 쇼핑할 곳도 몇 곳 있었다. 직원들이 주로 이용하는 양푼 비빔밥집도 있었다. 자주 드나들던 공항이지만 새로운 발견이랄까? 저녁 7시 경 기독교여행사 직원들과 미팅이 있었고 9시 15분 비행기에 무사 탑승하였다. 집결지에서 나와 한 방을 쓰게 된 사람은 50대 중반의 신사분이였고 그분은 내가 아는 어떤 부자집 아저씨가 쓰던 그런 여행가방을 가지고 있었다. 그분은 예의바르고 엄격한 자제력을 가진 분 같아 보였다. 우리 순례 여행팀은 총 37명이였고 나는 팀 대표로 선출되었다. 그 여행팀의 유일한 목사직분자였기 때문이다. 약간의 충격이 되었다. 왜냐하면 37명 중 목사가 나 혼자라니 ... 몇 명은 되려니 했는데 예상이 빗나갔다.
무려 15시간 가까운 비행이 시작된 것이다. 우리가 탑승한 비행기는 대한항공 소속이다. 먼저 평균시속 6~700킬로미터 속도로 10시간을 날아 아랍 에미리트의 두바이 공항에 도착하여 중간 후식을 2시간 정도 갖고 또 두어 시간을 더 날아가 이집트 카이로에 도착했다. 이륙후 1시간 경에 중국 텐진 상공을 지나는데 비행속도는 시속 855킬로미터였다. 깊은 밤 11시경에는 북경 상공을 경유했다.
두바이까지 가는 비행은 정말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애써 잠을 자고저 하였으나 마땅치 않아 비행기 후미에 두자리가 창 쪽으로 비어 있어 그 두 자리를 침대삼아 이리눕고 저리 누우면서 별별 짓을 다하며 잠을 청했으나 무수히 드나드는 스튜디어스 아가씨들 발걸음에 수없이 잠이 깨었다. 이따금씩 둥그스름한 비행기 창밖을 내다보면 언제나 북두칠성이 선명하게 보인다. 밤새도록 북두칠성은 우리를 지켜보았다. 어스레한 새벽빛이 보이려할 때 중동특유의 사막지형이 보이기 시작한다. 바닷가 쪽에 무슨 공장처럼 보이는 건물들이 듬성 듬성 보이고 불빛들이 눈에 띈다. 가끔은 어느 도시의 불빛들, 바다에서 고기 잡는 배들인가의 불빛들만이 눈에 보인다. 어스름한 새벽빛이 보일 무렵, 비행기 실내조명들이 켜지면서 여승무원들이 뜨거운 물수건을 나눠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른 아침식사를 주는데 나는 오믈렛 요리를 청하여 먹었다. 기내식은 언제나 흥미롭고 맛깔스러우면서 특이하다. 자그마한 네모쟁반에 사각형 플라스틱 접시들에 여러 가지 과일들과 반찬들이 담겨있는 모습은 귀엽기도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가볍고 하얀 프라스틱 커피잔은 얼마나 앙징맞은가!
그렇게 10시간을 날아가 두바이 공항에서 잠시 2시간 정도를 쉰다고 하니 너무도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두바이 공항은 예상보다 현대적이고 여성들도 히잡을 쓰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얼굴을 드러냈고 활달해 보였다. 중동인들은 아프리카인과 아시안인의 중간 쯤 되보이는 피부와 골격을 가졌다. 여성들은 볼륨도 있고 거무스름하면서 건강해 보이는 피부와 속눈썹이 짙고 예쁜 눈매가 특이해 보였다. 두바이의 환률은 70DHD가 20달러 정도라 한다.
사진 몇 장을 찍었고 이곳저곳 상점들을 살피던 중 다시 두어 시간의 비행이 시작되었다. 비행기는 같은데 승무원만 바뀌었다. 카이로까지는 약 2400킬로미터를 더 날아가야 한다.
카이로로 가는 도중 비행기 창밖의 장면은 참으로 특이했다. 생전 처음 보는 그 사막지대 바로 그것이다. 가도 가도 가끔씩 유전지대에서 뿜어내는 불빛과 연기가 보일 뿐 한없어 보이는 모래밭과 광야지대가 계속되었다. 너무도 생소한 장면들이다.
그러다가 홍해 근처에 이르러 아침 햇살이 제법 밝아지면서 선명한 광야의 풍경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바위산맥들이 대지의 갈비뼈처럼 드러나기 시작한다. 광야는 불그스럼한 진흙 빛 그 자체이다. 홍해 쪽 해안선은 그야말로 구름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아마 시나이반도 쪽으로 접어 들었나보다. 나일강과 강변에 수많은 농작지들이 연결되어 있다. 피라미드가 혹시 눈에 띌려나 살펴보았지만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서 비교적 나지막하면서 흙빛이 많은 서민적인 건물들이 즐비한 카이로 시내를 통과하여 착륙하게 된다. 두바이에서 출발한지 3시간 45분은 지난 것으로 보인다.
3. 이집트 카이로 도착
카이로 공항은 그야말로 오래된 그리고 그리 크지 않은 자그마한 공항이다. 김포공항보다도 더 작고 낡아 보이고 짐을 찾는데도 남대문시장의 두어 배는 복잡하고 소란스럽다. 우리의 일행 한분은 짐을 찾지 못해 안달을 하였다. 한 10여 분만에 겨우 짐을 찾아 버스에 올랐다. 이집트의 원래 국가명은 “미스르” 라고 한다. 이집트 현지 가이드는 에집트에서는 18세나 19세면 대개 결혼한다고 한다. 남자는 결혼하려면 1년치 봉급과 집을 장인에게 주어야하고 그러려면 돈을 많이 저축해야하니 거의 30세는 되어야 결혼할 수 있는 형편이 된다고 한다. 이집트의 연간 강수량은 지극히 작아 농사짓기는 불가능하고 농삿물은 나일강을 끌어올려야만 한다고 하고 그 수량은 넉넉하여 풍요로운 경작을 하는데 부족함이 없다고 한다.
사실 이집트에서는 구름을 전혀 보지 못했다. 시내산 주변을 날아올 때도 높은 돌산 근처에 거무스레한 구름 약간만이 산을 감싼 솜방망이 처럼 겨우 눈에 띄일 정도니까 말이다.
4. 이집트 관광
버스를 타고 옛날 의 수도였던 지역의 시내건물들과 아기예수피난교회, 피라밋지역을 둘러 보았다. 옛날의 수도 카이로지역은 구(舊) 카이로로 부른다. 그쪽은 이삼층 정도의 건물이나 작은 회교 성전 같은 것이 즐비한데 대부분의 건물의 일부가 무덤이고 주인들이 살기보다는 세든 사람들, 또는 무료로 들어와 사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무덤의 도시, 죽은자의 도시 라고 할 수 있다. 공동묘지 건물들이 얼마나 많은 지 다 알 수는 없다. 가난한 사람들은 그곳을 빈민촌으로 삼아 삶을 유지한다. 아기예수 피난교회는 그리 큰 규모는 아니고 지하통로 같은 곳을 지나 골목을 좀 더 이리저리 지나가서 소재하고 있다. 콥틱교회(에집트 기독교회)에서 관리하고 있는 모양이다. 점심은 도시락 백반과 불고기, 무슨 장아찌 같은 것과 이집트 오렌지를 주었다. 밥은 찰기가 있었고 제법 맛깔스러웠다.
카이로 시내는 다소 질서가 없어 보였다. 그곳의 자동차들은 한마디로 20년 이상 사용한 중고차들의 경연장이라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차들이 녹슬고 찌그러지고 낡고 길가 곳곳에는 고장난 차들이 엔진이 멈춘 채, 견인차나 수리공을 기다린다. 특이한 점은 차들 사이로 마차와 말들이 질주한다는 것이다. 15세정도의 어린 소년들이 말을 타고 포장도로를 신나게 달리는 모습은 용감하면서도 늠름해 보이기도 한다. 그 뚜가닥! 뚜가닥! 하는 말발굽 소리는 지금도 귀에 생생하다. 얼마 즈음 더 가니 피라미드가 가까워졌다고 한다. 돌벽돌 같은 것을 계속 쌓아 만든 원조 피라미드를 보았다. 그 높이가 대충 60여 미터는 되 보인다. 다소 더운 햇빛을 맞으면서 약 200미터 정도 걸어가니 어느 지하무덤으로 내려가는 문에 다다른다. 무덤지기에게 입장권을 주고 내려가보니 규모는 작았지만 피라미드의 일부를 들여다 보는 맛을 조금 느끼게 된다. 무덤지기는 누군가에게 한국 볼펜을 달라고 한다. 별것을 다 달라는구나하고 생각했는데 그만큼 이집트의 물자가 부족하다고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여행기념품은 1달러였다.
그림 엽서니 피라미드 모형들이니...모두 1달러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집트를 “원(1)달러의 나라”라고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별칭을 붙여 준다. 그리고 좀더 버스를 타고 가서는 우리가 흔히 그림엽서에서 보던 바로 그 피라미드와 스핑크스가 보게된다. 버스정류장 마당이 제법 넓다. 수십대는 정류할만하였다. 쇠창살로 막아놓은 입구를 통과한 후, 계단 얼마와 돌 건물 사이의 통로를 수십미터 지나니 스핑크스와 피라미드가 눈에 선명하게 보인다. 사진들을 마구 찍기 시작했다. 제법 많은 서양인들도 여럿 보인다.
몇 명씩 모여 단체사진들도 찍었다. 약 30여분을 소모하고나서 우리는 구 카이로 시내를 빠져나와 수에즈 운하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한참을 동쪽으로 달려가서 수에즈운하가 위로 흐른다는 터널(그 터널은 일본사람들이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확인불가이다)을 지나 한참 더 가서 “마라의 샘”에 도착한다. 모세 때에 사람이 먹지 못할 쓴물이였으나 하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셔서 단물이 되어 식수로 썼다는 그 우물이다. 마라의 우물물은 지금도 있긴 하지만 관리상태가 엉망이라서 입장권도 없고 관ㄹ리비도 안받는지라 우물 속은 잡쓰레기가 둥둥 떠다니고 풍경은 쓸쓸한 편이다. 잡상인들만 몇 명 있고 남쪽으로는 바다와 야자수 몇 그루가 보일 뿐이다. 사진 몇 장 찌고 우리는 다시 버스에 오른다. 그리고 계속 몇 시간을 달린다.끝없는 광야, 시나이 반도로 들어가는 것이다. 역삼각형 모양의 땅이다.
이 땅의 오른편과 왼편으로 홍해가 기다란 손가락 처럼 올라와 있고 그 왼편(시나이반도 서쪽) 하다에 시내산이 있다. 그리고 시나이반도는 서편 에집트와 동편 이스라엘의 완충지대이자 광야지대이며 한편은 전투지역이다. 중동전쟁의 상당부분이 여기에서 치러졌고 지금도 길가에는 흙더미들을 도로 주변에 수없이 쌓아올려서 총격전을 벌일 때, 방패막이로 쓸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 이집트의 적이란 곧 이스라엘 군대와 정부일 것이다. 시나이 반도는 엄청난 규모의 비무장지대로 변해 있었다. 곳곳에서 이집트 군의 초소들이 관광객들을 검문한다. 우린 계속 허허벌판의 광야를 달려 저녁 아주 늦게 한 호텔에 도착한다. 규모는 작은 편이었다. 새벽 2시경 기상하여 시내산 등반에 올라야하니 일찍 잠자리에 들라고 한다. 모기들이 공습준비를 하는라 윙윙거린다. 역시 싸구려 호텔은 싸구려 호텔인가보다. 짝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자야했다고 내게 훗말을 했다.
5. 시내산 등정
두세 시간 눈을 붙였을까 기상하라는 신호가 들린다. 나와 룸메이트 되시는 분은 서둘러 일어나 후렛쉬와 점퍼등을 챙겼다. 사발면 준비는 필수. 룸메이트는 공직을 지낸 분 같은데 경북 봉화군 출신이라하니 나와 본적지가 가은 경상북도 분이 아닌가! 왠 동향인? 반갑게 우린 10여 일간의 짝꿍으로서 친밀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짝궁은 앞으로 짝이라 부르겠다. 그 짝은 낙타를 타고 시내산 중반 까지 가기로 했고 나는 도보로 가기로 했다. 그 깜깜한 밤에 그야말로 찬란하면서도 영롱해 보이는 밤별을 쳐다보며 강행군이 시작됬다. 무려 3000여 미터나 되는 붉은 바위로 된 고산 등정을 감행한 것이다. 거의 네시간 정도를 계속 걸어 올라가는데, 씩씩거리며 낙타들이 사람들을 태우고 올르내리는 중반을 지나면 산 정상 근처는 가파른 길이 많다. 그러나 그 구간이 그리 길지는 않았다. 산 정상 근처 산장에서 사발면을 먹고 힘을 다시 정비하여 막바지 코스를 기어 올라갔다(가이드가 사발면이 없어 내가 여분으로 준비한 것을 먹였다. 이 탁월하고 놀라운 준비성이란!). 아직도 내 다리는 건재한 편이다. 할렐루야!
산정상에 올랐을 즈음 뿌연 새벽 빛이 먼 남쪽 수평선을 물들일 즈음 우린 몹시 추위를 느끼기 시작했다. 옷이란 옷은 다 껴입고 움츠리면서 찬바람을 맞아야 했다. 우린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다. 몇 곡을 부르는 가운데 동이 터오면서 일출이 시작된다. 여기 저기서 환호를 질렀고 외국인들이 신비롭게 우리를 바라본다. 사진을 찍느라 정신들이 없다. 그리고 우린 예배를 드리기 위해 서쪽을 바라보고 앉았다. 찬송을 또 부른다. 그런데 기적적인 이리 또 하난 일어났다. 우리가 앉은 큰 바위에서 아랫쪽 길이 있는데 그리로 어디서 본 듯한 사람이 올라오는 것이 아닌가! 김경환 목사였다. 평택에서 수년간 개척 목회의 희노애락을 나누었던 바로 그 목사다. 같은 경기평안지방회에 가입하여 얼마 전 충북 괴산교회로 이전해간 김 목사 부부가 아닌가! 내가 “김경환 목사!” 하고 부르자 그쪽도 깜짝 놀라서 쳐다본다. 세사에 만날 곳이 없어서 이 먼 나라 이 낯선 산 이 어려운 꼭대기에서 만나다니! 세상이 좁은 것인가 하나님 은혜가 지극히 큰 것인가? 그렇다. 하나님 은혜가 지극히 큰 것일게다. 그렇지 않구서야 이리 될수 있단 말인가. 김 목사 부부와 나는 사진 몇 장을 찍고 다시 보길 기원하며 헤어졌고 몇몇을 다시 보았다. 그 부부는 고려여행사를 통해 충북 괴산지역 목회자 부부들과 동행하여 왔으며 여선교회에서 500만원을 헌금하여 왔다고 한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나는 시내산 산정 예배에서 신명기 28장 말씀을 주제로 하여 설교하였고 마치는 기도 후 바로 하산 길에 올랐다. 내려가는 중도에 또 김 목사 부부를 만났다. 하산하고 시내산 아래있는 캐더린 수도원에 다다랐는데 한 일행이 안내려왔단다.30여분을 기다렸다. 그분은 연로하신 여자 권사님이신데 산에 올라 갈 때도 낙타를 탔는데 중심을 못 잡아 떨어져서 이마에 혹이 났고 내려올 때도 기력이 없어 다시 낙타를 타셨다. 그분을 보호하느라고 뒤따라오는 한국 가이드가 혼쭐이 났다. 그래도 크게 안 다치셨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캐더린 수도원에는 모세의 떨기나무가 있는 곳이라는데 그날이 문을 닫는 날이라 들어가 보진 못했다. 호텔에 돌아 와 늦은 조반을 먹고 다시 버스에 오른다. 기억에 남는 음식은 짭쪼름한 올리브 열매나 시큼하면서 짠맛이 좀 나는 치즈, 그리고 한참 기다려야 주는 계란후라이. 그리고 무화과 열매로 만든 쨈.
아침 먹고 출발한지 두 어 시간 정도 되었을까? 한국인이 경영하는 시나이반도 동쪽 식당에 다다랐다. 그쪽은 홍해가 바라다 보이는 낮은 언덕이 있는 지역인데 나는 도저히 점심을 먹을 수 없어 식당 안에 들어가지 않고 밖에 앉아 있다가 산비탈에 중동지역 아카시아나무(법궤를 만들었다는 바로 그 조각목)가 있다는 말에 그리고 올라갔다. 근 100여 미터를 가니 그곳에 조각목이 있다. 우리나라 아카시아나무 잎 모양이기는 한데 그 작기가 백분일은 되는 양 작았다. 내가 그 나뭇가지를 조금 떼어가 이집트 현지 가이드에게 보여주자 그도 의아해하며 그곳으로 달려갔다. 그리곤 가지를 잘라와 여러 사람에게 보여준다. 거기서 또 김목사 부부를 보았는데 그는 내게 야자열매 말린 것을 세 박스 사서 선물로 주었다. 나중에 귀국해 먹어보니 큰 대추같이 생긴 것이 달기가 보통이 아니었다. 누가 말하기를 그 열매 세 알이면 광야를 건넌다는데 과장이 좀 심하긴 하지만 칼로리가 높긴 하다.
점심 후 버스로 좀 더 이동하다가 홍해 바닷가에 잠시 들렸다. 맑기가 한이 없다는 그 바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넜다는 그 바다이다. 일행들은 발을 담그고, 나는 작은 콩알만한 돌 몇 개를 주웠다. 한참을 또 달려가니 “타바”라는 국경지대가 나온다. 거기가 에집트 관할구역의 끝이다. 에집트인들은 비교적 유순하면서 친절하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명랑하고 활달해 보이긴 하지만 긴장되 보인다. 우리 일행과 함께한 함국 가이드는 두 명, 부산 기독교방송 이사로 있는 남자 분과 기독교방송 노컷 뉴스 취재기자인 한 자매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에선 그 두 사람의 짐을 항상 샅샅이 뒤져 보았다. 아마 네 차례나 월경할 때 마다 그러했다. 계속 되는 테러 상태에 있어서 일 것이다.
6, 이스라엘 입경
한참 후 다소 까다로운 검색 절차를 통과하여 국경을 넘어 이스라엘 측 버스에 올랐다. 이집트 것보다 좀 더 널찍하고 깔끔해 보인다. 운전기사는 자그마한 체구의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스포츠머리를 한 50대 아저씨였다. 이스라엘 현지 가이드는 결혼한 지 오래되지 않은 젊은 청년 선교사이다. 이스라엘에 들어서자 곧 나는 색다른 점을 발견한다. 그것은 하늘에 뭉글 뭉글 구름이 덮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강수량은 100ml 가 넘는다고 한다.
거기에 이슬이 내리는 량이 약 200~300ml 가 된다고 하니 이집트의 십여 배가 넘는다.
그래서 젖괴 꿀이 흐르는 땅이라 했나 보다. 처처에 나지막한 나무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야자나무들도 꽤 눈에 뜨인다.
휴게소에 들러보니 제법 많은 음료수 우유 과자 식료품들이 즐비하고 알지 못하는 희브리어들이 빼곡이 적혀있다. 물론 못 읽는다. 내가 입학한 후부터 신학교가 4년제가 되어 히브리어가 필수로 되었고 내가 공부할 때만해도 헬라어 중급까지만 배웠고 3년제였기 때문이다.
사실 혼자 독학은 했지만 다 잊어버렸고 알파벧 약간만 기억날 뿐이다. 알렙 베드 낄멜 딸렛...같은 것 말이다. 어쨌든 거기서 화장실도 가고 과자나 건과류를 약간 사서 먹으며 뭉개구름을 다시금 우러러 본다. 오랜만에 보는 뭉게구름이여! 그렇게 세쨋 날은 저물어 가고 있었고 어둠이 창밖에 가득 차면서 어느 해안가를 따라 버스는 다리고 있다. 아마 거기가 사해였나?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두어 시간여를 갔는지 잠간 내리잔다. 왜냐하면 거기 근처 길가에 (가면서 서쪽, 혹은 왼쪽) 소금 기둥이 된 롯의 아내가 있다고 한다. 캄캄한 밤에 어스름하게 산비탈에 서있는 높이 5~6미터 정도의 솟아있는 바위가 보인다. 그리고 근처 돌멩이들은 다 짜단다. 아무 돌이나 주워 혀를 대보니 참으로 소금 맛이 진하게 우러난다. 김장철에 이곳에서는 소금걱정은 안 해도 될듯하다고 했더니 일행들이 박장대소한다.
깜깜한 사해를 흘깃 바라보며 다시 버스에 탑승하고 북쪽으로 부지런히 달려갔다. 두어시간 가까이 달렸는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예루살렘에는 라마다 르네상스 호텔에 도착했다. 난생 처음 1류 호텔이라는 데에 투숙하는 순간이다. 짐을 차에서 내리려고 잠시 기다리는데 왠 찬바람이 마구 불어온다. 갑자기 덜덜 떨릴 정도로 추운 것이 아닌가. 아니 덥디 더운 중동지역에 왠 냉풍? 잠시 더 기다리는데 와들와들 정신없이 춥고 떨리는게 아닌가! 여행가방을 받아들자 마자 로비로 얼른 들어 왔다. 이 무슨 특이한 경험이란 말인가? 사막의 밤은 몹시 춥다더니 그래서인가보다.
한국 가이드는 찬양연습을 해야 한다며 서둘러 방 키를 나눠주고 사라졌고 잠시 후, 저녁만찬을 즐길 수 있었다. 숱한 샐러드들, 빵과 케잌, 다양하 고기요리들이 뷔페로 차려져 있다.
이스라엘 산지에서 나는 것인지 배 같기도 하고 사과 같기도한 작고 녹색나는 표주박 모양의 과일도 있고 간식으로 먹는 치즈들, 뻐터 꿀, 각종 잼들이 풍성하다. 상당히 수준 높은 저녁이었다. 과일 몇 개, 치즈와 작은 빵 몇 개를 야식으로 호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그렇게 우리는 밤을 맞아 잠자리에 들었다.
7. 예루살렘과 나사렛
아침 6시에 기상하여 약간 간편한 식사를 한 후, 우리는 먼저 예루살렘 옛도시 부분으로 갔다. “안토니 문”이라 불리는 곳으로 가서 예수님의 십자가 길을 향해 가는 것이다. 빌라도의 법정, 베데스다의 연못, 십자가의 길(비아 돌로로사)을 보았다. 그날은 안식일이라 유대인들은 상점문을 닫았고 팔레스타인 사람들만이 가게를 열었다. 골목길들은 돌덩이들로 포장되 있었다. 마치 프랑스의 골목길 같다고 할까. 필리핀에서 온 천주교인 같은 이들이 작은 십자가를 매고서 찬송을 부르며 우리 일행을 지나쳐 갔다. 어느 빵집은 무교병 비슷한 빵들을 잔뜩 만들어 진열해 놓았다. 다소 울퉁불퉁했지만 그래도 걸을 만은 하다. 상상보다 작은 골목들과 계단들이 많았고 예수님의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골고다 기념교회까지 이르렀다.
비교적 낮으막한 산동네(우리나라에선 달동네라고 하지만)를 오른 기분이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곳, 예수님의 시신을 내려놓은 곳 따위에 넓적한 돌들이 놓여있다. 천주교나 알메니안 교회 등에서 만들어 놓은 유적지이니 원형이 보존됬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신빙성이 전혀 없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골고다 기념교회는 상당히 규모가 큰 편이었다. 우리는 다시 그곳을 빠져나와 버스에 올라 나사렛 쪽을 향해 북서쪽으로 달려갔다.
우리가 한참 후 다다른 곳은 가이사랴 바닷가였다. 가이사랴 항구는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로마의 침략의 근거지이다. 로마식 야외 원형극장과 석조건물들이 몇몇 성채와 함께 남아있다. 지중해는 우리의 동해바다 처럼 시원하고 장쾌한 파도의 몰려옴이, 멋진 남성적 성격을 갖은 듯 하다. 바람이 좀 불어서였을까? 처음 보는 생소한 두터운 잎을 갖은 돌나물 같은 화초들이 벌판에 가득하고 하늘은 참으로 푸르고 맑았다. 원형극장도 둘러보고 사진도 여러 장 찍었다. 로마시대의 건축물의 잔해들이 근처에 넘어져 있고 흩어져 있다.
가이드의 서두는 집합소리에 다시 버스로 오면서 하드 두 개를 샀는데 하나에 2,500원 씩이나 달랜다. 짝과 같이 두 개를 사서 나눠먹었는데 아몬드가 든 짙은 우유크림 맛이 나는 하드이다. 물가는 거의 일본 수준인듯 싶다. 버스는 열심히 달려 잠시 후, 갈멜산에 다다른다. 엘리야가 뭔가를 보여준 바로 그곳이다. 산은 역시 남산의 절반이나 되려나 그리 높진 않다. 거기에 엘리야의 동상이 서 있는데, 한 손에 칼을 들고 한 손엔 우상숭배자의 머릿채를 거머쥐고 목을 자르는 살벌한 장면이 우뚝 서 있다. 높이는 5미터나 될 듯하다.
기념교회 옥상으로 올라가면 이스르엘 평야가 한 눈에 들어온다. 비옥한 땅을 사이에 두고 숱한 쟁탈전을 가나안 족속들과 벌여온 바로 그 평야란다.
우리는 다시 버스로 므깃도에 다다랗다. 므깃도 요새는 다 허물어진 작은 성채였다. 거기서 보면 북쪽 방향으로 므깃도 평원이 보인다. 바로 거기가 말세의 큰 전쟁이 있을 곳이라고 성경에 기록된 장소이다. 므깃도에서 서쪽인듯 한데 약 100여 미터를 걸어가면 지하통로가 나오고 그리로 쭉 내려가면 식수로 사용했던 샘터가 나온다. 전쟁 중 병사들이 마시는 비상식수장이다. 아직도 물은 제법 량이 충분히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좀 더 걸어 터널을 빠져나왔다. 50여미터 이상을 걸어 나오니 버스가 기다린다. 그리고 나사렛으로 달렸다. 그런데 꽤 시간이 흘러도 점심을 주지 않는다. 아침 먹고 무려 8시간이 지나서야 나사렛에 도착하여 다들 허기에 죽을 지경이다. 거기다가 버스 내의 안내방송 마이크도 잘 안 들려 우리 일행들은 짜증이 날대로 나고 원망이 보통이 아니었다.
어느 식당에 가니 접시 두어 개를 포개놓고 제법 많은 관광객들이 앉아 있다. 나사렛에 도착한지 한 시간 즈음 더 지난 후 식사를 마주하게 됐다. 싸구려 빵조각들과 약간의 고기요리를 주었다. 그리고 양이 안 찬 것을 알았는지 스파게티를 주었다. 별것은 없었지만 그저 만족해야 했고 나이든 주인은 깐깐한 태도로 손님을 대했다. 나사렛은 산동네였다. 약간 높은 산동네이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고 지금도 아담한 소도시로 자리 잡고 있다. 그곳에는 아직도 유대인들의 거주 숫자가 많지 않다고 한다. 온건한 블레셋 사람도 많이 있다고 한다. 이어 가나혼인잔치 교회로 일행은 출발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일행중 한사람이 내 샌달을 밟아 샌달 끈이 뜯어져 버렸다. 나는 함께 갈수가 없어 차에 남아서 차 안에 있는 노란 포장용 테잎으로 신발을 수리해야 했다.
30여분 후, 일행이 돌아왔다. 짝은 나사렛 기념 포도주를 두병 사 왔다. 나중에 호텔에 돌아와 먹어 보니 역한 향내가 난다. 다음날 아침, 한 병은 호텔에 버려두고 말았다. 싸구려 저질 포도주였다. 컴컴해서야 우리는 갈릴리 바다 근처에 소재한 호텔로 다시 돌아 왔다. 그 호텔의 이름은 졸단(요단) 리벌 사이드 호텔이였다. 갈릴리 바다의 시원하고 청량한 바람을 느끼며 그 방은 그렇게 지나갔다. 문제가 생겼는데 , 우리 일행은 관광버스를 교체해 달라는 항의를 너도 나도 여행사 측에 하게 되었다. 차내에서 안내방송이 거의 안들리기 때문이였다. 기독교여행사 측에선 난색을 표현했다. 나는 가이드에게 정 그러면 메가폰이도 구해달라고 요구했다. 가이드는 그것도 도무지 불가하다고 했다 가이드는 이미 목이 쉰 상태였다. 우리 일행 중 몇몇은 관광을 보이코트 하겠다며 화를 내기도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한 장로님은 결국 여행사 사장을 찾아가 항의하여 버스를 교체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한다. 장경동 목사가 주제한 갈릴리 해변 예배는 갈릴리 동쪽으로 가서 개최 되었고 버스시간으로 족히 40여분은 달려간 듯 하다.
우리 일행은 호텔로 돌아와서 기독교방송 여행사의 처신을 비난했다. 나는 한국가이드에게 너무 심하지 않냐고 항의했다. 9시간 만에 밥주는 여행사가 어디있냐고! 그리고 성의를 보여 마땅하지 않느냐고! 그리고 방으로 돌아와선 또한 저질 포도주를 약간 비난했다. 치사한 이교도 놈들 운운하며! 그리고 피곤한 눈을 붙였다. 짝궁과 함께... 내일 두고 보자 속으로 을르면서.
8.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여행 떠난 지 벌써 제 5일.
갈릴리 바다 선상예배가 있었다. 나는 어제 은혜롭지 못한 기억이 있어 일행들을 떠나보내고 나중에 선착장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한 30분을 걸어 도착한 그곳은 평화로웠다.
근처의 나무들, 꽃들, 비둘기들을 보았다. 수 십 개의 별들이 모여있는 듯한 묘한 꽃을 보고 버스 운전사들에게 무슨 꽃이냐 물으니 다들 모른단다. 후에 나는 그 꽃을 “갈릴리의 별들”이라고 이름 붙였다. 씨앗을 수십 개 훑어 가방에 넣었다. 나중에 귀국하여 봄이 되어 씨앗들을 심어보았는데 기후와 토양이 달라서인지 전혀 싹을 틔우지 못하고 사진으로만 남아있다. 갈릴리 바닷물을 손으로 만져 보았다. 너무도 시원하였다. 그러는 중 선상예배를 마친 일행들이 돌아왔다. 그리고 우리 버스를 찾아갔다. 여행사 측에서 버스를 교체했다. 할렐루야! 그리고는 우리 여행엔 큰 문제가 없었다. 9시간 만에 밥을 주는 일도 없어졌고 내가 코치한 대로 중도에서 쥬스나 아이스크림등을 간식으로 대접하며 지혜롭게 가이드를 하게 되었다. 진작 그럴것이지 !
우리 일행은 갈릴리 주변 코스를 돌기 시작했다. 베드로 수위권 교회, 팔복교회 등등. 갈릴리 해변가는 너무도 평화롭고 온화했다. 우리나라의 봄 진정한 봄과 같은 평화가 넘쳤다. 햇빛은 온화함을 더해 주었고 우리는 감사의 찬양을 하였다. 할렐루야!
이제 사해 쪽으로 다시 남하하게 된다. 내려오면서 여리고 휴게소에서 점심 도시락을 먹었다. 가이드는 김치까지 준비했고 불고기도 곁들였다. 김치냄새는 타국인들에게 실례가 된다하여 잔디밭으로 멀직이 떨어져 먹었다. 그래도 즐거웠다.
사해 근처 엔게디는 대충 지나치고 쿰란사본(사해사본)이 발견된 쿰란동굴 발견지역으로 갔다. 성경을 사랑하여 숱한 학자들이 사본을 제작하였고 금욕생활을 하면서 로마의 침략 시에는 그 사본들을 지키고저 교묘히 동굴 속에 감춰두었던 바로 그 지역이다.
우리는 다시 버스를 타고 더 남하하여 사해 해수욕장으로 들어섰다. 그곳의 수영장 처럼 만들어 놓은 내부욕조에 먼저 들어갔는데 짜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리고 사진에 본데로 뒤로 벌렁 드러누으니 몸이 둥둥 뜬다. 야 그것참 신기하네! 각국나라 사람들이 벌거벗고 물에 몸을 띄워보느라 여념이 없다. 한국가이드가 밖으로 나가보자하여 다들 밖으로 나가니 욕탕에서 바닷가까지 약 200미터 정도 떨어진 사해 해수욕장까지 가는 셔틀오픈카가 운행된다. 수영복만 입은 채 가보니 소금덩어리들이 수없이 널려있고 소금 결정들이 물밑으로 허옇게 덮여있다. 물이 다소 차가워서 나는 곧 되돌아와 따스한 욕탕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한 시간여를 보내고 다시 버스에 올랐다. 저녁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예루살렘으로 향해 차는 달렸고 구 예루살렘 건너 편 쪽에 있는 선물가게에 잠시 정차했다. 나는 화보집과 선물 얼마간을 가족들을 위해 샀다. 한구말로 된 성지소개 책자가 있었다. 그것은 매우 좋은 자료가 될듯하여 얼른 사고 말았다. 잘한 선택이었다. 다시 르네상스 호텔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나의 짝은 피곤하여 드러누웠다.
나는 예루살렘의 밤을 그냥 보내기 아쉬워서 근처에 있는 성서박물관과 히브리 국립박물관, 히브리대학을 찾아갔다. 모두 문을 닫았고 부근 은 어두웠다. 약간의 가로등만이 건물을 비추었고 굵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니 왠 비? 점점 비는 굵어지고 소나기에 가까웠졌고 나는 흠벅 젖고야 말았다. 히브리 도서관 쓰레기 통에서 주워 뒤집어 쓴 종이 박스도 힘을 발휘치는 못했다. “이것은 소나기처럼 쏟아 붓는 여호와의 은혜의 비로다!”라고 속으로 되뇌이며 조금의 추위도 느꼈다. 신발도 엉망이 되었다. 약간 길을 헤매면서 물에 젖은 생쥐 꼴로 돌아오니 문지기 할아버지가 이미 호텔 문을 걸어 잠그고 앉아있다. 나는 그에게 문을 열어달라고 했고 그는 이내 문을 열었다. 나는 영어로 “나는 히브리박물관과 대학을 보았어요!”라고 자랑스럽게 말하자 그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그러냐고 대꾸해 주었다. 사실 나가기 전에 그곳에 다녀오겠다고 그에게 말하고 나갔었기 때문에 문지기 할아버지에게 있어 그리 당황스런 일은 아니었다. 비오는 밤, 어둠 속에서 찍은 그 건물들의 사진은 지금도 희미끄리하게 내 사진첩에 남아있다. 언젠가는 꼭 다시 가보고 싶은 곳들이다.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고 이미 잠들은 내 짝궁의 왼쪽 창가 침대에 나는 누워 잠이 들었다.
제 6일 밤이 지나간다.
9. 예루살렘에서 요르단의 수도 암만으로
제7일이 밝아 왔다. 비교적 가볍게 아침을 먹고 짐을 챙겨 호텔을 떠났다. 오늘의 여정은 감람산 일대와 베들레헴, 그리고 요르단 구경을 통과하여 암만까지 가는 것이다.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베들레헴이였다. 그곳은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약 30분 정도 내려간 것으로 생각된다. 그 지역은 유대인 관할지역이 아니었다. 상당히 높은 콘크리트 담벽이 길을 막았다. 테레방지용 장벽이다. 그 장벽은 얼마 전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테러를 막기 위해 최근에 세워져 매스콤에 소개된 장벽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은 언제 끝날지 모를 처절한 앙숙관계로 계속 남아 있을 것 같다. 검문을 통하여 안으로 들어서니 점포나 모든 집들의 출입구는 죄다 철문으로 되어있다. 데모나 데모진압 때의 총격이나 폭발로부터 집을 보호하려는 것이 그 목적이다. 늘 긴장된 삶의 모습의 상징인 것이다.
베들레헴은 팔레타인 인의 자치구역 중 하나이다. 그래서 그 지역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검문을 하고 현지 가이드도 한다. 현지 가이드에게 초코바를 하나 주었더니 그는 이스라엘 현지 가이드에게 “저 사람이 나에게 ‘스위트’를 주었다고 좋아한다. 그 사람은 제법 날씬하면서도 키가 큰 편이었고 매유 유순해 보이는 사람이다. 중동 지역에선 단맛이나는 모든 과자나 사탕, 초컬릿 종류를 스위트(단 것:sweet)라고 부른다.
곧장 아기 예수 탄생 교회를 찾아갔는데 비가 탄생지는 예배당의 지하 쪽에 위치해 있고 곳곳에 향초가 타고 있었다. 빼빼로 과자처럼 가느다란 흰초, 회갈색 향초들이 경배용으로 매매되고 있었다. 나는 약간 타고 남은 초 몇 개를 챙겨 가방에 넣었다. 지하계단으로 조금 내려가니 알메니안 교 사제들이 예배를 드리는데 그 제단 같은 곳 아래에 돌이 있고 그 돌 위에 황금 별의 모양이 덮여져 있다. 바로 그곳이 예수탄생 지점이라는 것이다. 사제의 발 아래에 있는 그 별은 촬영하기가 다소 어려웠지만 간신히 촬영에 성공했다. 화면이 다소 가리워졌지만 그래도 제법 선명하게 촬영되었다. 우리는 또 검문을 통과하여 예루살렘으로 향하였다. 그리고 통곡의 벽을 향하여 약 20분가량을 비탈진 언덕길을 걸어내려 갔다.
마침 비가 오기 시작한다. 거기서도 입장객들에 대한 검문이 있었다. 입장할 무렵 비는 조금씩 굵어졌다. 관광객들이 통곡의 벽으로 가서 기도하였는데 우리 일행 중 어느 젊은 장로는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기도 했다. 옛날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성전이 서 있었던 그 곳이 이젠 그 기초만이 남아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초 위엔 회교 성전이 황금 돔을 입은 채 우뚝 서 있다. 우리는 그곳을 떠나 건너 편 감람산 쪽으로 이동했다. 비는 점점 그쳐졌다.
감람산은 바로 건너편 산언덕에 있다. 통곡의 벽과 감람산은 서로 마주보는 가까운 건너 편 산동네 같다.
감람산 주변에는 승천기념교회, 눈물교회, 주기도문 교회, 겟세마네교회 등이 있고 특히 승천교회는 예수께서 승천할 때 디디고 올라가신 돌이 놓여있는데 예수님의 발자국이 거기 패여있다고 하는데 아무리 봐도 발자국 같지는 않았다. 사실 믿음이란 보는 것보다 믿음 그 자체로 숭고한고 아름다운 것이 아니겠는가!
감람산 건너 편 언덕 길에서 우리는 사진 촬영을 몇 차례 하였다. 특히 예루살렘 성전 쪽은 좋은 촬영배경이 되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역시 회교성전의 황금 돔이다. 햇살에 유일하게 금빛을 발산하는 그 건물 말이다.
겟세마네 동산 교회는 감람산 아래쪽에 있는데 문을 닫는 시간이라서 내부는 보지 못했다. 담장 너머로 조금 보았을 뿐이다. 나중에 그 내부는 인터넷으로 보아야 했다. 천 몇 백 여년이 되었다는 감람나무도 역시 인터넷으로 보았다. 예수님 당시 서 있었던 감람나무는 실존하지 않는다는 말도 있다. 그 말이 맞을 듯도 하다. 아쉬움 속에서 우리 일행은 감람산을 내려왔다. 내려오는 도중 수없이 즐비하게 널려있는 네모난 상자모양의 돌무덤들을 보았다. 주님이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의 무덤들이란다. 예루살렘 성전 터 언덕과 감람산 사이의 아랫 계곡은 그야말로 엄청난 수의 성도들의 무덤들이 빼곡이 널려 있었던 것이다. 비는 완전히 그쳤고 우리는 버스에 올라 요르단으로 향하게 되었다. 버스는 북향하여 우리를 여리고를 지나 요르단 국경 쪽으로 동진한다. 여리고 휴게소에서 약간 늦은 점심을 도시락으로 먹고 더 가서 벳산 검문소까지 갔다. 거기서의 검문은 그리 엄하진 않았다. 거기서 이스라엘 가이드와 작별을 하면서 약간의 선교헌금을 나 몇 십 불을 개인적으로 드렸다.
이스라엘 북동부에 있는 벳산 검문소에서는 짐꾼들이 꽤 많이 있었고 거의 의무적으로 짐을 맡기고 팁을 줘야한다고 한다. 검문소 내부 구역에는 면세점이 있었고 시원한 음료와 코코넛열매로 만든 초코렛도 팔았다. 요르단 화폐 1디나르는 1.5 미국달러였다. 아내가 좋아하는 것이라서 코코넛열매로 만든 초코렛을 몇 봉지를 샀는데 그리 비싸진 않았다. 그리고 화단 건너편엔 요단강물이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고, 그 강은 그리 크진 않아 폭은 약 4~5미터 정도 될 듯 했다. 검문소 내부 구역에서 요르단 선교사님을 만나 안내를 받았다. 그 선교사님은 50대 후반이거나 60대 초반으로 보였고 비교적 탄탄한 체격의 160cm정도의 크지 않은 키를 가졌고 흰머리는 좀 많았으나 건강하시고 유머도 많으신 분이였다. 선교사님은 요르단의 화폐단위를 설명하셨고 나는 거기에 맞춰 쇼핑을 하였다.
요르단에 진입하면서 날이 조금씩 어두워진다. 남쪽으로 한참 내려가다가 마을들을 보았는데 꽤 서민적이거나 시골스럽다. 각종 과일들과 야채들이 많이 있다. 더욱 어두워질 무렵 우리 버스는 동쪽을 향했고 그곳은 고산 지대로 올라가는 길이다. 버스는 산 언덕길을 구불텅 구불텅하며 한없이 올라간다. 마치 강원도 대관령을 올라가는 것 같다. 대관령을 오르길 한배반 이상을 계속 그렇게 올라갔는데 암만이라는 요르단 왕국의 도시는 높은 산지 위 평원이 자리잡은 도시란다. 그래서 성경에는 갈렙이 “이 산지를 내게주소서“라는 말이 그래서 생겼다고 선교사님은 말씀하신다. 암만가도 산길이라서 암만인가?
한참 올라가니 산 아래 동네의 불빛들이 마치 높은 하늘에서 비행기로 마을을 내려다 보이는 듯 하다. 좀더 밤이 깊어져서야 암만의 호텔에 도착했다. 호텔의 이름은 아레나(Arena)였고 암만시 11941번지에 소재한다. 요르단 사람들은 매우 친절하고 명랑해 보였다.
나는 짐을 풀고 곧장 이메일을 보내고자 홀 로비에 놓인 컴퓨터를 사용키로 했다. 그러나 접속이 잘 되지 않아 약 40분을 고생하다가 결국 국제전화로 아내와 통화하게 된다. 아직도 중동지역 구가들은 인터넷 보급이나 수준이 후진국형이라고 생각된다. 1급 호텔 컴퓨터가 386수준이라니 말이다. 이스라엘에서도 인터넷을 쓰려면 신용카드를 써야한다고 한다. 한국은 1,000원이면 한시간 씩 컴퓨터를 쓸 수 있는데 왠 신용카드? 역시 한국은 전산망 강국이다. 그리고 4명의 일행들과 거리 산책에 나섰다.
예상외로 건널목이 없어서 무단횡단의 위험을 감수해야했지만 그래도 다양한 종류의 점포들을 구경했고 특히 “스위트”를 만들어 즉석에서 파는 점포들은 매우 인상적이다. 꿀과 기름, 밀가루, 견과류나 건과일 따위로 만든 이런 과자들은 중동인들이 매우 즐겨하는 간식이요 별식이란다. 약 1시간 반정도의 산책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왔다. 그리고 짝과 포도주를 음미했다. 짝은 이미 거나하게 취한듯 보인다. 그는 첫 아내를 잃은 다소 우울증을 겪고 있는듯하다. 포도주를 마시지 않으면 잠을 잘 이루지 못한다. 아내와 열심히 믿음생활을 했으나 급작스레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크게 충격을 받고 실의에 빠지기도 했다. 그럴만도 하겠지...어찌 사람으로서 멀쩡할수 있겠는가! 대화 중에 알고보니 나의 짝은 용산고등학교 대선배가 아닌가! 같은 본적지 경북 봉화, 같은 고등학교. 우리는 너무도 놀라워했다. 짝은 초혼한 아내를 병으로 사별하고 재혼한 처지인데 본처 소생의 딸이 하나있고, 그 딸은 선교사와 결혼한 온누리 교회 회원이란다. 그는 후에 아프리카 등지의 선교사로 딸 부부가 가면 거기서 봉사하며 살 것이란다. 그의 신앙은 그리 돈독하진 않았고 비록 정통적인 신학을 갖진 못했으나 신실하고 보수적인 사람이다. 훗날 하나님께서 그를 축복하시고 연단하시어서 훌륭한 선교의 스폰서로 쓰실 것을 굳게 믿는다. 나는 줄곧 여행기간 동안에 “그리하실지라도의 신앙”과 “별세신학”에 대해서 이야기했고 그는 자기의 신앙에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발견한 눈치였다. 나는 그가 은근히 걱정도 되었지만 그래도 그를 믿기로 했다. 어서 새 힘을 얻어야 할텐데...하고 말이다. 얼마 후, 샤워를 하고 잠을 청했다. 여행을 마치고도 나는 그를 가끔씩 그리워했다..
10.암만과 페트라
제 8일.
호텔의 아침식사는 비교적 양호했다. 예루살렘 호텔보다는 다소 간소하지만 그래도 먹을 것이 꽤 있다. 특히 요르단 치즈는 맛이 좋았다. 그들도 역시 올리브열매를 많이 먹는다. 날씨는 쾌청했다. 요르단에는 선교사들이 여러 명 들어와 있다고 한다. 현재 요르단은 친미국가이고 외교의 줄타기 선수인 전 요르단국왕 후세인의 노력으로 비교적 순탄하게 치리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라크 전쟁으로 상당수의 부유한 이라크 인들이 입국해 있고 비공식적으로 미군부대들이 몰래 활동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들의 생활수준은 우리보다는 많이 낮지만 양순하면서도 온건한 민족성을 갖은 듯 하다.
암만 시내를 빠져나가는 중, 찻길 가에 가로수들이 특이하여 보였다. 다들 비스듬이 누워있는 듯 보이는 가로수들이다. 선교사님이 설명하시기를 여기 암만엔 바람이 한 쪽으로만 계속 세게 불어 (아마 편서풍이라고 하신 것 같다) 나무가 어렸을 때부터 비스듬히 누워서 자란다는 것이다. 그 각도가 제법 커 무려 25도에서 심한 것은 30도 까지 기울어서 자라고 있었다. 또 비유한 즉은 인간의 성장도 그 환경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하기야 우리도 예수님의 믿음의 환경 속에서 자랐으니 이런 복을 누리려니 생각된다.
모세가 돌아가셨다는 느보산 기념교회를 먼저 올라갔다. 요르단 현지 가이드가 따라 붙었는데 여자였다. 피부는 희고 눈은 크고 후덕해 보이는 퉁퉁한 여자였다. 나이는 40대 초반 즈음 되 보인다. 상냥하고 밝은 성격의 소유자다.
느보산은 제법 높은 편이다. 버스는 동편에서 서쪽으로 올라간다. 기념교회에서 서쪽으로 나와 뜰 끝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사해와 이스라엘 지역이 한 눈에 들어온다. 그 기념교회 후원에는 모세의 불 뱀 모양의 기둥 조각이 있고 남쪽 후원에는 느보산 유적지 발굴 때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다시 하산하여 높고도 웅장해 보이는 돌산을 여러 개 지나서 우리는 모압평지를 지나게 된다.
그곳은 바로 성경에서 나오는 다윗의 조상 중의 한 사람인 나오미의 며느리 룻이 살았던 곳이다. 이방의 땅이었던 모압에서 남편이 죽고 남편의 형제가 또 죽고 쌍과부가 된 두 며느리 중 한사람이던 룻이 살던 곳 말이다. 모압 평원은 고산지대지만 지중해성 강우량이 제법 넉넉하여 농사가 비교적 잘 되는 곳이란다. 많은 염소들과 양을 방목하기도 좋은 곳이란다.
우리가 점심을 먹은 곳은 대로변의 관광물품도 팔고 식사도 할 수 있는 제법 널직한 한 지붕 아래의 탁 터진 실내를 가진 건물이다. 거기서는 요르단 서민들의 일상적인 식사를 제공했는데, 그들만의 얇고 부드러운 화덕에서 구운 빵과 팥과 콩 종류로 만든 되직한 소스가 인상적이다. 특히 직화로 구운 치킨과 샐러드는 잘 어울렸다. 서민적이면서도 정성스레 준비된 메뉴를 모두가 칭찬했고 식당 직원들도 기뻐했다.
점심 식사 후, 십자군 운동의 한 거점인 카락 성에 도착했다.
십자군 당시 지어진 산언덕 위에 지어진 돌 성인데 정교해 보이진 않았지만 튼튼해 보이긴 했다. 돌은 흰빛을 띈 연갈색 돌들이 대부분이다. 거기서 사먹은 피스타치오는 소금에 버무려 제법 맛이 좋았다. 몇몇 요르단 꼬마들과 나눠먹었는데 아이들이 개구진 것은 어디나 동일하다. 골목길 아래에서 봉고차 같은 것들이 올라와서 보니 한국차 봉고, 그레이스 따위인데 꽤 여러 대가 올라온다. 이곳 요르단은 한국 중고차가 상당히 많다. 이스라엘에선 현대차나 한국 신차들에 종종 눈에 띄고 한국 경제에 신선한 발전이 눈에 띄이는데 경제력이 더 낮은 요르단에는 한국 중고차가 점령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크고도 크신 은혜요 역사하심이다. 만약 한국에 기독교가 안들어왔거나 못들어왔다면 어찌 됬을까 생각하니 아찔한 느낌마저 든다.
대충 둘러보고 버스에 다시 올라 페트라를 향하였다. 페트라(Petra)는 바로 바위라는 뜻이다. 베드로란 이름도 바위란 뜻이다. 요르단의 유적지 중 가장 크고 거창하다. 세계 불가사의 중 하나란 말도 있다.
페트라는 깍아 지른 듯 매우 크고 높은 바위 사이에 난 길들이 무려 걸어서 40여분을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중간 지점에 큰 광장과 성전이 있고 그 건축미는 매우 탁월하고 세련되 있다. 그리스 신전과 이집트 신전을 합성한 듯한 웅장하고 섬세한 디자인이다.
더 가면 광장이 나오고 거기엔 원형극장 같은 것도 나온다. 로마시대에 사용했던 극장이란다. 요르단도 로마의 침략 앞에 어쩔 수 없었던 약소 지역이였던 것이다. 거지 중에 상거지 같이 꽤죄죄한 두소녀와 한 소년이 달걀모양의 옥석을 사라고 한다. 물론 거기도 “원달러”였다. 아이들이 가련해 보여 나는 그 물건을 사고 또 가방에 넣어주었던 치즈와 사탕들을 주었다. 아니들은 좋아했고 나중에 또 한 소녀에겐 1달러를 그냥 주었다. 가난 때문에 아이들은 제대로 학교도 다니지 못하는 눈치였다. 페트라 입구에서 말을 타고 갈수도 있다. 마차도 있다. 일행 중 어떤 이는 말이 아니라 노새라고도 하는데 잘 모르겠다. 그러나 아직은 생생한 다리가 있는데 왠 말이겠는가! 중간 지점에서 김경환 목사 부부를 또 만났다. 사진도 더 찍었다. 김 목사는 사진을 보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는 신용이 별로 없는 사람이다. 지금 무려 7개월이 다 되었고 두어 주 전에 사진을 보내주마 약속 전화도 있었지만 여전히 사진은 오지 않았다. 페트라를 되돌아 빠져 나오자 날이 저문다. 페트라 근처의 호텔에 투숙하여 저녁을 먹었다. 다소 신통치 않았지만 그런데로 먹을만은 하였다.
11. 페트라에서 카이로로
제9일이 되었다. 아침 식사를 간단히 하고 버스에 오른다. 바위투성이인 고산지대를 계속 통과하면서 요르단 서남쪽을 향했다. 요르단 남부 홍해 근처에 “타바”라는 국경지역으로 간단다. 여전히 검문은 계속됐다. 다시 이집트 가이드를 만났다. 그의 체격은 다소 마르고 작은 편이며 피부는 다소 검은 편이다. 그의 말투는 국내의 내적치우의 권위자인 어느 목사와 닮았다. 이집트 현지 가이드는 키가 크고 좋은 체격이고 밝고 친절한 사람이다. 국경을 넘어와 이집트 관할구역 잔디밭에서 도시락을 먹었다. 늘 넉던 수준의 백반과 불고기, 김치 따위였다. 국경 넘는데만 족히 한시간은 걸린 듯 하다.
이집트로 넘어오기 전 잠시 기다리는 곳에서 짝과 나는 그들의 무알콜성 맥주를 두 캔 사서 맛을 보았다. 시원하고 쌉살한 맛이 그럴듯하다.
제 9일은 그야말로 버스 속에 거의 갇혀 지나갔다. 이집트 령의 시나이 반도로 다시 들어선 버스는 계속 카이로로 향해 달렸다. 졸다 깨다 졸다 깨다 하다가 오후 시간부터인가 간증시간을 갖었다. 간증이 끊임없었다. 계속되는 간증 순서 중 휴게소에 들려 망고 쥬스를 얻어먹었다. 그리고 또 버스에 탑승, 점심식가 후 무려 9시간은 달린것 같다. 그리고 마침내 지겹디 지겨운 버스 속의 하루가 끝날 무렵 카이로에 왔다.
그 무렵인가 우리가 숙박했던 어제의 요르단 어느 고급 호텔이 테러를 당하여 상당수의 사상자가 났다는 뉴스가 있었다 한다. 나는 속으로 "우리야 다소 산꼭대기 쪽의 후진 호텔에서 잤으니 다행이 무사했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카이로 시내에서 불고기로 저녁 식사를 마쳤다. 반찬은 초라했고 그들의 서비스는 지극히 인색했다. 더 이상의 반찬이나 요리는 없었다. 여행지의 마지막 만찬으로서는 달갑지 않았다. 나는 버스를 타기 전에 잠시 길 가의 신문가판대에서 주인 여자와 젊은 교사와 이집트의 국민들에 경제생활에 대해 영어로 이야기했다. 두 사람은 이집트 국민이 가난하고 정치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동의 해 주었다. 이집트의 대통령에 장기집권과 경찰국가로서의 지나친 억압이 국민들을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고인 물은 썪는다는 원리 때문일까?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한국을 많이 축복하셨다고 하며 작별인사를 하고 버스로 왔다.
우리는 카이로의 쉐라톤 호텔에 들어섰다. 그런데 왠 악기소리 노랫소리가 요란하다. 알고 보니 호텔을 빌려 하는 결혼식이란다. 신랑신부 모두 잘 생기고 아름다웠고 백 명도 넘는 하객들이 모두 덩실 덩실 춤을 추고 흥이 절로들 난다. 어느 나라나 돈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크고 화려한 결혼식을 하나보다. 밤 11시가 다되어 간다. 우리 숙소는 본채 건물에서 매우 커다란 수영장을 통과하여 한참 걸어 들어와야 있는 외져보이는 단층빌라 같은 건물이다. 목욕을 하고 잠자리에 드니 거의 새벽 1시가 다되어 간다. 짝은 역시 먼저 곯아떨어져 세상모르고 주무시고 있다.
12. 카이로를 떠나 귀국길에 오르다.
제 10일 째날. 아침 식사는 그런데로 좋았다. 장 경동 목사를 식당에서 만나 가벼운 인사를 하였다. 그는 체격이 크고 우람해 보인다. 피부는 거무스레하고 눈은 부리부리한 편이다. 그의 설교는 매우 개그적이다. 그러나 아쉬움은 있다. 본의는 아니겠지만 설교의 권위가 떨어진다는 점, 때론 어떤 듣는 이에게는 상처가 된다 점 등이다. 모든 설교자들이 조심해야 할 부분이다.
아침 식사 후, 급히 짐을 챙겨 공항으로 떠나게 되었다. 나일 강도 지나고 서민들이 사는 지역도 지나고 부자 동네도 지났다. 서민지역의 집들은 2층이나 3층 정도인데 온 가족들이 다 모여 살고 옥상에는 반드시 녹슨 철근들이 삐죽 삐죽 나와 있는데 아들이 장가를 들거나 자손이 더 많이 태어나면 거기에 연이서 층을 늘리는 방법으로 집을 짓는 것이 관례라 한다.
출근하는 큰 길 가에는 오래된 중고차들이 여기 저기 엔진 멎은 채, 여전히 수리공을 기다리고 있었고 트럭 한 대는 커브 길에 뒤집어져 배추 같은 야채들이 길 가에 흩어져 뒹굴고 있었다. 고가도로 지역도 통과하여 좀더 가다보니 신도시 지역이 나온다. 대통령 궁도 있고 관청도 많다. 거기에는 좋은 석조건물들도 제법 있고 길도 상당히 넓게 잘 정비되어 있다. 부자동네란다. 우리는 오전 10시 근처에 카이로 공항에 도착했다. 그리고 출국수속을 밟고 대한항공 항공기에 탑승하였다. 한없이 지루한 비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물론 두바이에 잠시 들리겠지만.... 잠시 두바이에서 쇼핑시간을 갖었다. 두바이를 떠나는 귀국 비행기에서 뒷자리 세 개가 비어있는 것을 발견하고 나는 얼른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서너 시간을 잠을 제대로 잘 수 있었다. 덕분인지 덜 지루하게 비행하였다.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하니 11일째 되는 아침 9시 35분경이 되었다. 기독교여행사에서 미흡한 부분이 많았지만 그래도 후반부에 성의 보여 주었다는 점에서 고맙게 생각한다. 그러나 일정이 너무 빠듯하고 강행군 적인 일정이어서 수없이 버스에서 졸았던 기억이 난다. 기독교여행사는 보다 더 세련되고 자연스러운 여행일정을 만들 필요가 충분히 있다.
물론 이번 여행은 힘들기도 했지만 은혜로웁고 감사한 성지순례 3개국 여행이었다고 추억할 수 있었다. 샬롬!
2006.6.16. 대략 회고하여 기록하다.
( 참고:춘풍래선교회 카페 앨범으로 오시면 사진들을 볼 수 있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