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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계공(石溪公)행장 해설
공의 휘는 학문(鶴文)으로 자는 문구(聞九)요. 호는 석계(石溪)이며 성은 전(全)씨이니 관향은 정선(旌善)이다. 백제 온조왕 때에 십제공신(十濟功臣)으로 환성군(歡城君)에 봉하신 휘(諱)섭(聶)은 시조이시다. 휘(諱):선(愃)은 봉익대부이며 정선군(旌善君)에 봉하였다.
몇 대를 전하여 신라(新羅)에 이르러 휘(諱):우상(羽相)은 봉익대부(奉翊大夫)이며 광문학사(廣文學士)이다. 이분의 아드님 휘(諱):이갑(以甲)은 고려 개국공신으로 시호는 충렬(忠烈)이며 정선군 (旌善君)에 봉하였다. 이분의 아드님 휘(諱):보인(輔仁)은 이부상서(吏部尙書)이니, 경서(經書)에 밝아 숙유(宿儒)라 일컬었으며, 시호는 문경(文敬)이니, 문헌비고에 기록되어있다. 문경공(文敬公)의 아드님 휘(諱):언(彦)은 밀직부사(密直副使)이며 부사(副使)의 아드님 휘(諱):위정(威正)은 판도판서(版圖判書)이다. 판서(判書)의 아드님 휘(諱):총(寵)은 판전의사사(判典儀寺事)이다. 전의사사(典儀寺事)의 아드님 휘(諱):순(淳)은 국자좨주(國子祭酒)이다. 좨주(祭酒)의 아드님 휘(諱):양(諒)은 병부낭중(兵部郎中)이다. 낭중(郎中)의 아드님 휘(諱):석록(錫祿)은 병마도통사(兵馬都統使)이다. 도통사(都統使)의 아드님 휘(諱):존걸(存傑)은 대장군(大將軍)으로 영인군(寧仁君)에 봉하였으니, 동사(東史)에 나타나있다. 영인군(寧仁君)의 아드님 휘(諱):수룡(守龍)은 경상도도순사(慶尙道都巡使)이며 마전(麻田)에 있는 오현사(五賢祠)에 배향되어있다. 도순사(都巡使)의 아드님 휘(諱):의(懿)는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이며 시호는 위열(威烈)이다. 위렬공(威烈公)의 아드님 휘(諱):공렬(公烈)은 금오대장군(金吾大將軍)이니, 고려사(高麗史)에 일이 등재되어있다. 대장군의 아드님 휘(諱):숙방(淑方)은 우헌납(右獻納)이다. 헌납(獻納)의 아드님 휘(諱):영보(英甫)는 밀직부사(密直副使)이며 도원군(桃源君)에 봉하였다. 도원군(桃源君)의 아드님 휘(諱):윤장(允臧)은 석릉군(石陵君)에 봉하였다. 석릉군(石陵君)의 아드님 휘(諱):우도(于道)는 병부시랑(兵部侍郎)이다. 병부시랑(兵部侍郎)의 아드님 휘(諱):성길(成吉)은 낭장(郎將)이다. 낭장(郎將)의 아드님 휘(諱):신(信)은 통정대부(通政大夫)부사직(副司直)이다. 부사직(副司直)의 아드님 휘(諱):방(䨦)은 장사랑(將仕郞)으로 동몽교관(童蒙敎官)이다. 사랑(仕郞)의 아드님 휘(諱):진우(振羽)는 중직대부(中直大夫)이다. 중직대부(中直大夫)의 아드님 휘(諱):천주(天柱)는 좌상시(左常侍)이다. 좌상시(左常侍)의 아드님 휘(諱):만춘(滿春)은 양주목사(楊州牧使)이다. 목사(牧使)의 아드님 휘(諱):정규(井奎)는 성균생원(成均生員)이다. 생원(生員)의 아드님 휘(諱):감(瑊)은 좌통례(左通禮)이다. 조선(朝鮮)에 들어와 휘(諱):응조(應祖)는 어모부호군(禦侮副護軍)이니, 선조(宣祖)갑진(甲辰:1604)년에 익성공신(翼聖功臣)에 추증하고 임하군(臨河君)에 봉하였다. 임하군(臨河君)의 아드님 휘(諱):용(龍)은 아호가 석천(石泉)이다. 임진왜란에 의주(義州)까지 임금님을 호종(扈從)하여 공신(功臣)으로 책록(策錄)되었으며 석릉군(石陵君)에 봉하였으니 공에게는 5대조가 되신다.
고조부의 휘(諱)는 대준(大俊)이며 생원이다. 증조부의 휘(諱)는 언남(彦楠)이며 첨추(僉樞)이다. 조고(祖考)의 휘(諱):천량(天良)이며 군자감정(軍資監正)이다. 고위(考位)는 휘(諱):진원(進元)이며 비위(妣位)는 전주이씨(全州李氏)강구(康九)의 따님으로 효녕대군(孝寧大君) 보(補)의 후손이다. 영조(英祖) 무인(戊寅:1758)년에 예천 금곡리(金谷里)의 세제(世第)에서 공(公)이 태어나 얼굴 모습이 출중하고 타고난 성품이 어질고 후덕하여 보는 이들이 모두 특별하게 여겼다. 7세에 글자를 받아 아버지에게 배우면서 독려(督勵)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깨닫는 것이 물 흐르듯 하였다. 자라나 타성(他姓)의 스승에게 나아가 경사를 통독(通讀)하며 침식을 잊을 지경에 이르렀다. 여러 해 동안 과거공부를 하여 또한 능하다는 명성이 있어 서당의 스승이 사랑하여 원대함으로 기약하였다.
사람들이 간혹 과거에 나아가기를 권하니, 사례하며 말씀하기를 “우리집안은 석릉군(石陵君)이 공훈으로 책봉된 이후에 비록 벼슬이 이어 나왔으나 청현(淸顯)의 직분에 있으면서 저지를 당한 것은[見枳]짐짓 자손들이 떨치지 못하고 문호가 쇠체(衰替)한 때문이라. 또 지금 선발이 공평하지 못하여 뇌물이 따르고 있어 자잘한 작은 재주로 중고(中古)에 합격하니, 이것이 메추라기가 남쪽으로 날아가려고 도모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렇다면 구하다가 얻지 못하여 낭패하고 돌아오는 것 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바를 따라 견묘(畎畝:밭두렁)에서 늙어가는 것이 나을 것이라.”하고 한 번도 여러 사람을 따라 새재를 넘지 않았으니 뜻을 세움이 견고하고 확실하니 천성이 그러하였다. 사람들이 이 때문에 더욱 우러러보았다.
부모를 섬김에 집안이 가난하여 봉양할 수 없어도 힘을 다해 받들며 혼정신성(昏定晨省)의 예절과 숙수(菽水)의 제공에 어른의 지체(志體)의 봉양에 모두 어김에 없었다. 을묘(乙卯)년에 외간상(外艱喪)을 당하여 슬퍼함이 제도를 넘어 거의 멸성(滅性)에 이르고 초하루와 보름에는 반드시 산소에 올라가 호곡하며 3년을 하루같이 하니 향리에서 순효(純孝)라고 칭찬하였다.
스스로 생각하기를 살고 있는 곳이 선대의 고장(故庄)이 아니며 또 가세가 곤궁하여 이사가 불가한 것이 아니기에 드디어 관향인 정선(旌善)에 들어가 선대의 묘소에 전배(展拜)하고 산수를 낱낱이 유람하여 돌아오는 길에 단구(丹邱:강원도 원주)의 명승을 완상(玩賞)하고 내려오며 적성(赤城:문경)에 이르렀다. 적성은 본래 승국(勝國:高麗)의 시대에 작성현(鵲城縣)의 터였다. 전야가 조금 넓었으나 시장(市場)의 번잡함을 혐의하여 석항(石項)의 수진계(水眞溪)에 이르러 집터를 보았다. 돌아와 약간의 전토를 마을 사람에게 부탁하여 친산(親山)의 향화(香火)를 부탁하고 권솔을 데리고 와서 전일 지점해둔 곳에 띠 풀을 베고 몇 칸의 집을 지어 전거(奠居)할 곳으로 삼고 낮에는 농사일하고 밤에는 글을 송독하니 윗사람도 슬퍼하지 않고 아랫사람들도 탄식하지 않고 몇 해가 되지 않아 조금 넉넉하여 삼복(三伏)더위와 추운 섣달을 지낼만하였다.
기미(己未)년에 내간상(內艱喪)을 당하여 거상을 한 결 같이 아버지를 위해 거상(居喪)할 때와 같이 하였다.
일찍이 성력(星曆)에 조예가 깊어 무릇 원옥(垣屋)을 다스리는 여부와 무덤과 집의 좌향 배치 등에 많은 것을 손수 계획하니, 지관(地官)들도 모든 것이 잘 되었다고 칭찬하였다. 언제나 대학(大學)과 중용(中庸) 두 책을 책상에 두고 아침저녁으로 살펴볼 자료를 삼고 고금의 격언(格言)과 요긴한 어휘가 심신에 절실한 것을 십여(十餘) 조목을 베껴 모아 좌우(座右)에 걸어두고 젊은이들에게 외우게 하니, 가까이 살던 골짜기의 어리석은 사람들이 모두 깨닫지 않음이 없으며, 공이 알뜰하게 권하여 가르치고 사색(辭色)으로 꾸미니, 처음에 어긋난 이들도 마침내 한곳으로 돌아오는 효험이 생겨 서로 말하기를 “산간의 야박하던 풍속이 모(某) 노야(老爺)의 힘을 입어 인후한 풍속으로 돌아왔다.”하였으니, 그것은 공께서 자기의 마음을 미루어 사람들에게 미치게 한 것으로 많은 것이 이와 같았다.
살던 곳 동쪽에 산록이 있어 위로는 가파르고 아래는 평평하고 넓어, 소나무 대나무 그늘이 가려있고 시냇물이 흘러내려 매일 그 사이에 소영(嘯詠)하며 장구(杖屨)로 거니는 곳으로 삼았으니, 지금 후손들이 지은 석계정(石溪亭)이 바로 이곳이다.
병신(丙申)년 여름에 미양(微恙:가벼운 병)으로 며칠을 지나거늘 자손들이 의약의 처방을 고하니 물리치며 말씀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명(命)이 있거늘 어찌 약으로 연명하겠는가? 그렇게 하지 말라.”하시더니, 6월 6일에 자리를 바르게 하고 유연(悠然)히 서거하시니 춘추(春秋)가 78세였다. 마을 뒷산 계좌(癸坐)에 장사하였으니, 치명(治命)을 따른 것이다. 배위(配位)는 한양조씨(漢陽趙氏) 사인(士人)운영(雲永)의 따님이며 부덕(婦德)이 있었다. 기축(己丑)년에 태어나 기해(己亥)년에 돌아가시니 공의 산소와 같은 산의 해좌(亥坐)이다.
아드님 두 분을 두어 득성(得成), 만성(萬成)이다.
득성(得成)의 아들은 필흠(弼欽), 규흠(奎欽)이며, 만성(萬成)의 아들은 광숙(光淑)이다.
필흠(弼欽)의 아들 호영(浩榮)은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이며, 호익(浩翼)과 호형(浩亨)이다.
규흠(奎欽)의 아들 호양(浩養)은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이며, 호기(浩基)와 호술(浩述)이다.
광숙(光淑)의 아들은 규하(奎河)이다. 현손 이하는 기록하지 않았다.
아! 공이 훈신(勳臣)의 자손으로 일할 만한 때를 만나 권세를 믿고 올라가 아는 훈신들과 예전에 요지(要地)에 있던 사람들에게 곁눈질한다면 부귀를 돌차간(咄嗟間)에 마련할 수 있었으나, 본래의 성품이 욕심이 없고 담백하여 문달(聞達)을 구하지 않고, 몸소 행하여 실득(實得)하므로 위험을 피하고 편안함을 물려주는 것과 선대를 받들고 후세를 넉넉하게 하는 것을 제일의 진리로 삼았기 때문에 후손들이 번성하며, 이 고을에 사는 이들은 모두가 진실하고 전아(典雅)하며 신중하여 독서하는 풍미(風味)가 있어 사람들이 바라보게 하니 묻지 않아도 전(全)씨 집안사람임을 알 수 있다.
그들의 타고난 바탕의 아름다움과 습성의 두터움은 지례(芝醴)의 근원에서 온 것이리라. 그렇다면 지금 여남(汝南)에서 달마다 평가하던 것으로서 공을 논평하면서 한 집안의 서업을 중흥한 사람이라 하니 이것은 실제의 말이다.
세상에 명리에 속박되고 욕심의 불길이 타올라 일시에 명성이 도도하여 필경에는 후손들에게 재앙을 심어 놓은 사람들과 비교한다면 그 득실을 돌아보면 과연 어떠하겠는가?
내가 후세에 태어나 비록 당일에 말씀을 듣지 못하였으나, 풍성(風聲)을 듣고 우러러 경모한 것이 오래되었다. 어느 날 공의 후손 주병(周炳)씨가 삼종제 용탁(用鐸)군과 함께 공의 유사(遺事) 한 통을 갖고 와서 나에게 행장을 부탁하거늘 사양하지 못하고 가져온 유사(遺事)를 근거하여 위와 같이 서차(序次)하여 입언(立言)하는 군자의 재택(財擇)의 만일을 대비하였다.
세무오중양절 경주후인 손명원 근장
石溪公 行狀
公諱鶴文 字聞九 號石溪 姓全氏 系出旌善 百濟溫祚王時 以十濟功臣 封歡城君 諱聶 爲始祖 至諱愃 奉翊大夫 封旌善君 累傳 至新羅諱羽相 奉翊大夫 廣文學士 生諱以甲 麗朝開國功臣 諡忠烈 封旌善君 生諱輔仁 吏部尙書 以明經稱宿儒 諡文敬 事載文獻備考 生諱彦密直副使 生諱威正 版圖判書 生諱寵 判典儀寺事 生諱淳 國子祭酒 生諱諒 兵部郎中 生諱錫祿 兵馬都統使 生諱存傑 大將軍 封寧仁君見東史 生諱守龍 慶尙道都巡使 享麻田五賢祠 生諱懿 門下贊成事 諡威烈 生諱公烈 金吾大將軍 事載麗史 生諱淑方 右獻納 生諱英甫密直副使 封桃源君 生諱允臧 封石陵君 生諱于道 兵部侍郎 生諱成吉 郎將 生諱信 通政副司直 生諱䨦 將仕郎 童蒙敎官 生諱振羽 中直大夫 生諱天柱 左常侍 生諱滿春 楊州牧使 生諱井奎 成均生員 生諱瑊 左通禮 入李朝 有諱應祖 禦侮副護軍 宣廟甲辰 追拜翼聖功臣 封臨河君 生諱龍 號石泉 壬亂扈駕龍灣 賜功臣號 封石陵君 於公爲五代祖 高祖諱大俊 生員 曾祖諱彦楠 僉樞 祖諱天良 軍資監正考諱進元 妣全州李氏某女 孝寧大君補后 英廟戊寅 生公于醴泉琴谷里第 貌相岐嶷 性賦仁厚 見者咸異之 七歲受字 學于先公 不待鞭督而曉解如流 稍長就外傅 通讀經史 至忘寢食者 累年 間治公車業 亦有能聲 塾師愛之期以遠到 人或勸以赴擧 謝曰吾家自石陵君 封勳以來 雖簪組相承 而淸顯見枳者 徒以子姓不振 門戶衰替故也 且今選拔 不公賄賂隨之 以區區小技 取中高第 奚異於斥鷃之圖南 則與其求而不得良貝而歸 孰如從吾所好 生老於畎畝也 一不隨衆踰嶺 立志牢確 天性然也 人以此益仰之事父母 家貧無以爲養而竭力而奉之 定省之節 菽水之具 志體俱無違 乙卯丁外憂 哀毁踰制 幾乎滅性 朔望必上墓號哭 三年如一日 鄕里以純孝稱之 自以爲所居本非先庄 且家勢窮約 非搬移不可 遂入旌善貫鄕 展拜先墓 歷覽山水 復路賞丹邱之名勝 逶迤至赤城 赤城本勝國時鵲城縣 基田野 稍闢而嬚其市肆煩鬧 到石項之水眞溪而胥宇焉 歸以略干田土 付之里人 托親山香火 盡室而來 誅茅於前日指點處而構數間屋子 爲奠居之地 晝而耕耨 夜則誦讀 上無戚戚 下不咨咨 不數年而稍可伏臘 己未遭內艱 居制一如前喪 嘗深於星曆 凡垣屋之治否 塚宅之向背 多手自措畵而術者皆稱善 常以曾思二傳作案實而爲朝夕省覽之資 抄聚古今格言要語 有切於身心者十餘條 揭之座右 使年少輩 傳誦之 居近峽俗 愚蠢無有巴會 公諄諄勸誨 假以辭色 始之參差者 卒有同歸之效 相與語之曰山間薄俗 賴某老爺而歸厚云 其推已及人 多類此 居之東有山 麓上崔嵬而下平衍 松篁陰翳 澗水流瀉 日嘯詠其間 爲杖屨盤旋之所 今后孫所構石溪亭 是也 丙申夏 以微恙 過數日 子孫輩告以醫藥 却之曰死生有命 豈可以藥餌延壽哉 勿爾也 六月六日 正席悠然而逝 享七十八 春秋葬于村後癸坐原 從治命也 配漢陽趙氏 士人雲永女 有婦德 生己丑 卒己亥 墓同原亥坐 有二男 得成萬成 得成男弼欽奎欽 萬成男光淑 弼欽男浩榮 義禁府都事 浩翼浩亨 奎欽男浩養 義禁府都事 浩基浩述 光淑男奎河 玄孫以下 不盡錄 嗚呼 公以勳臣之世 處有爲之時 席勢扳援 眄眛於勳契舊要之間 則富與貴 咄嗟可辦而素性恬淡 不求聞知 以躬行實得 避危遺安 爲承先裕後之第一義諦故 後晜之繁衍 居是坊者 類皆恂恂雅飭 有讀書風味 令人望之 不問知其爲某家人 其生質之美 習性之厚 未始非芝醴根源之有自來矣 則今汝南之評公 以一家中興之業者 是實際語也 視世之縶於名韁 熾於慾火 一時聲熖 畢竟種禍於來人者 得失顧何如也 余生也後 雖不能警咳於當日 而聞風慕仰者久矣 日 公之后孫 周炳氏 與其三從弟用鐸君 齎公遺事一通 責余以善狀 辭不獲已 據來本而叙次如右 以備立言君子財擇之萬一云爾
歲戊午重陽節 慶州后人孫明遠謹狀
[자료제공] 문경문화원장 전홍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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