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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선현(先賢) 주자(朱子)
주자(朱子)의 휘(諱)는 희(熹), 자(字)는 원회(元晦), 혹은 중회(仲晦), 호(號)는 회암(晦菴)・자양(紫陽)・둔옹(遁翁)・회옹(晦翁)・목재(牧齋)・졸재(拙齋)・공동거사(共同居士)・운곡노인(雲谷老人)・창주병수(滄州病叟) 등으로 자서(自署)하였으며, 사람들은 고정선생(考亭先生)이라 칭하였다. 시호(諡號)는 문공(文公)・태사공(太師公)・신국공(信國公)・휘국공(徽國公) 등이다.
유상존칭(儒像尊稱)으로는 주부자(朱夫子) 또는 주자(朱子)로 부른다.
1. 大賢의 탄생지 우계
주희(朱熹)의 관적(貫籍)이 휘주(徽州)・무원(婺源:지금의 江西省)이다.
남북조 시대(南北朝 時代)에는 신안군(新安郡)이었던 관계로 그가 자서(自署)할 때는 ‘신안인(新安人)’이란 문구를 자주 사용했던 것이다.
주희(朱熹)는 남송(南宋) 고종, 건염(高宗, 建炎) 4년(1130) 9월15일 지금의 복건성(福建省) 남건주(南建州) 우계현(尤溪縣) 관수(關水)의 남쪽 공산(公山) 기슭에 있는 아버지 주송(朱松)의 친구인 정안도(鄭安道)의 별장 계남관(溪南館) 우사(㝢舍)에서 (어머니 축씨, 祝氏) 태어났다.
송, 영종(宋, 寧宗) 경원(慶元) 6년(1200) 3월9일에 건양고정(建陽考亭)에서 일흔한 살에 세상을 떠나 복건성(福建省) 건양현(建陽縣) 당석리(唐石里) 대림곡(大林谷)에 부인 유씨(婦人劉氏)와 합장(合封)으로 장사를 지냈다.
2. 위대한 先賢 朱子
가태, 연간(嘉泰, 年間)(1201~1204년)에 문공(文公)으로 증시(贈諡)되고, 이종 보경(理宗 寶慶) 3년(1227)에 태사(太師)에 증위(贈位), 신국공(信國公)을 증봉(贈封)했다가 휘국공(徽國公)으로 개봉(改封)되었다.
순우 원년(淳祐 元年・1241)에 공자묘(孔子廟)에 종사(從祀)되었으며 청(淸)나라 강희 연간(康熙 年間)에는 중국십철(中國十哲)의 하나로 받들어지게 되었다.
그는 남송(南宋)의 대유(大儒)로 사상가이자 교육자였으며 원(元)나라, 명(明)나라, 청(淸)나라 시대에 걸쳐 주희(朱熹)의 사상과 저작 교육방침이 위정세력의 국정(國政)운영 및 모든 배우는 사람들에게 있어 학문의 토구(討究)와 증진 향상에 다방면으로 존숭(尊崇) 신봉(信奉)되어서 직접 이름을 부르지 않고 주자(朱子)라 경칭(敬稱)해서 공자(孔子)와 맹자(孟子)의 다음가는 위대한 인물로 받들었다.
중국(中國)의 이러한 주자학(朱子學) 존중의 기풍은 후일 한국(韓國)과 일본(日本)에까지 크게 영향을 미쳐 한때는 그 기세가 중국을 능가할 정도에 이르렀던 시절도 있었다.
3. 先代․先塋이 있는 무원, 문공산
강서성 무원구 자양현 탄촌가 18번지 무원시내 외곽 무원박물관 뒤 500m 정도에 다원 주씨 시조(茶院朱氏始祖)인 괴(瓌) 고료공(古僚公) 일명: 다원제치공(茶院制置公) 묘소가 있다. 묘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茶院府君夫婦合墓
癸 山 丁 向 皇宋淳熙丙申春月
茶院朱氏始祖顯 考瓌古僚公 妣杜氏夫人 合墓 奉祀遠溪宣敎郞熹百拜
언제나 그리워하던 시조님에게 송나라 순희 황제 병신년 봄에 다원 주씨 시조 괴 고료공 비 두씨부인 묘소에 후손 선교랑 희 백배 올립니다.
告 始祖 茶院府君 墓文
一去鄕井 二十七年 喬木興懷 實勞夢想 玆焉展掃 非悼增深
所願宗盟 共加嚴護 神靈安止 餘慶下流 凡在雲仍 畢霑玆蔭
酒餚之奠 惟告其哀 精爽如存 尙祈鑒嚮 淳熙三年 中春朱熹
다원시조 부군님 묘소에 글을 올립니다.
고향에 다녀간 지 벌써 27년이 되었습니다. 높이 자란 나무를 보니 그리워지는 마음 간절합니다. 지나간 수고로움을 꿈속에서도 생각합니다. 깨끗하게 청소하고 돗자리를 깔고 보니, 애도하는 마음 더욱 깊어집니다. 바라옵건대 종묘사직에 맹세한 바를 후손 모두가 함께 엄숙하게 지켜나갈 것입니다. 영혼과 혼백이 편안하게 이르고 좋은 일을 하신 보답으로 후손들이 경사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 모두가 조상님의 음덕으로 그 은택이 두루 미치나이다. 맑은 술과 맛있는 음식으로 정성을 다하여 전을 드리오니 오직 슬픔은 신령님께 고하고 마음은 살아계시는 것과 같습니다. 바라옵건대 기도하는 마음으로 굽어 살피소서.
1176년(순희 3년) 봄에 주희가 삼가 찬합니다.
관갱촌(官坑村)에는 주자의 선영(先塋)이 있는 문공산(文公山)이 있다. 문공산(文公山)의 옛 이름은 연꽃의 꽃잎 같은 모양의 봉우리가 아홉 개가 솟아 있다고 하여 구로 부용첨(九老 芙蓉尖)이라 하였다. 그러나 송(宋)나라 영종(寧宗)이 주자의 시호를 문공(文公)으로 내리자 주자의 증조부(曾祖父) 대(代)까지 묻힌 선산(先山)이라 하여 후세 사람들이 문공산(文公山)이라 부르게 되었다.
문공산(文公山) 입구로 들어가면 주희기념관(朱熹記念館)・패루(牌樓) ・혜음정(惠蔭亭)・숭성문(崇聖門)을 지나게 된다. 조금 산비탈을 오르면 청석돌 판으로 된 계단을 이루고 있는 송나라 옛 역도(驛道)의 모습이 잘 보존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무원에서 요주로 통하는 옛 역도로서 800년 세월을 지켜 온 도로가 완벽하게 남아 있다. 역도상에는 ‘적경정(積慶亭)’이라는 노정(路亭)이 있는데, ‘역경(易經)’의 ‘적선인가 필유여경(積善人家 必有餘慶)’에서 취해 온 이름이다. 역도를 조금 더 올라가면 충효문(忠孝門)을 지나게 된다. 충효문에 들어서면 삼나무 군락지가 있다. 이곳에는 주자의 5대 조모 정씨(程氏)의 묘소가 있고, 조금 옆의 한천정사에는 만세종사(萬世宗師) 주자 소조 동상과 선조들의 초상화가 있다.
주자는 21세에 처음 성묘를 하였고 그 후 순희 3년 47세 때에 두 번째이자 마지막인 성묘 길에서 약 3개월 가량 머무르게 된다. 문공산 묘소 주변에 있는 삼나무는 주자가 첫 성묘(省墓)를 가서 24그루를 심었는데, 현재 16그루가 남아 있다. 최고로 높이 자란 나무는 약 40m에 달한다.
4. 주자의 부친 주송
주자(朱子)의 부친(父親) 주송(朱松・1097~1143)의 자(字)는 교년(喬年)이고 호(號)는 위재(韋齋)이다. 22세에 태학(太學)을 졸업하고 진사가 되었다. 처음에는 상서랑(尙書郞) 겸 사사(史事)로 있었으나 조정과 의견이 맞지 않았다.
당시 송(宋)나라는 금(金)나라와 대치하여 남하(南下)한 상황(狀況)인 데다 인재등용(人才登用)의 길이 혼란한 상태였다. 그때 중앙에서 지방관 시찰차 내려온 호세장(胡世將)에게 주송(朱松)은 금나라 침략으로부터 중앙수복의 대책을 올리게 되니 호세장이 감탄하여 조정에 보고하게 되었고, 사극가(謝克家)의 추천으로 고종(高宗) 황제에게 비서성(秘書省) 정자(正字)의 벼슬을 부여받아 국가중흥의 대책을 논의하였다. 그러나 주전파의 재상(宰相) 장준(張俊)이 물러나고 화전론(和戰論)자인 진회(秦檜)가 집권하자 중흥의 북벌(北伐)론자인 주송은 진회의 분노를 사게 되어 요주(饒州) 자사(刺史)로 좌천되었다.
주송(朱松)은 자사직을 사양하였고 이상 관직에 머물 생각이 없었다. 훗날 건주(建州) 정화현위(政和縣尉)에 임명되어 민중(閩中)으로 부임하면서 부친 주삼(朱森)과 모친 정씨(程氏)를 모시고 떠났는데, 근무 시절 부친(父親) 승사부군(承事府君)의 상(喪)을 당하였다. 고향으로 가려고 하였지만 가계(家計)가 어려웠고 또한 ‘방납(方臘)의 난(亂)’으로 길이 막혀 버렸다. 이러한 사정으로 끝내 고향 무원(婺源)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정화현(政和縣)의 호국사(護國寺) 곁에 부친 장례(葬禮)를 지냈다. 이후 주송(朱松)은 영영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생애를 마치게 됨으로써 자손들은 건주(建州) 지역에서 세거(世居)하게 되었다.
5. 어머니 축씨(祝氏)
주자의 어머니 축(祝)씨에 관해서는 아버지만큼 상세한 전기(傳記)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주자 자신이 쓴 ‘상서이부원외랑 주군유인축씨광지(尙書吏部員外郞 朱君孺人祝氏壙誌)’라는 짧은 문장이 유일하게 정리된 전기이다.
북송 원부(元符) 3년(1100)에 휘주(徽州) 흡주현(歙州縣)에서 반주축가(半州祝家)라고 불렸다는 흡주현의 자산가 집안인 축확의 여식으로 태어났으므로 주송보다 세 살 아래인 셈이다. 그녀의 사람됨에 관해서는 인후단숙(仁厚端淑)이라고밖에 적혀 있지 않다. 주송과 결혼한 것은 정화 7년(1117) 18세 때의 일이다. 이때 신랑은 아직 무명의 학생이었는데, 한눈에 그의 기량을 간파하여 혼담을 추진시킨 것은 신부의 아버지 축확이었다.
결혼 후 얼마 되지 않아 황망한 타향살이가 시작되었고 시부모도 봉양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시부모 모심에 있어서는 효근독지(孝謹篤志)하여 사람들이 따라하기 어려운 바가 있었다”라고 주자는 유교적 가치체제 하에서 여성에게 보낼 수 있는 최고의 찬사를 보냈다. 건도 5년(1169) 9월 축씨는 73세의 나이로 죽는다. 이때 주자 40세, 이른바 정론(定論)이 확립된 시기였다. 해를 넘겨 정월 뒷산 건양시(建陽市) 거구진(莒口鎭) 천호(泉湖)의 양지바른 곳에 매장했다. 백수 아자봉에 있는 주송의 묘지와는 백리의 거리에 있다.
6. 주자를 大賢으로 키운 스승들
주자는 7세 무렵에 우계(尤溪)에서 건구(建甌)로 갔으며, 14세에 부친 주송(朱松)이 별세(別世)한다. 부친 주송(朱松) 위재(韋齋)는 병이 심해지자 손수 글을 작성하여 살림살이를 친구인 소부 유자우(少傅 劉子羽)에게 부탁하였다. 그리고 적계 호원중(籍溪 胡原仲), 백수 유치중(白水 劉致中), 병산 유자휘(屛山 劉子翬)와 영원한 이별을 하면서 당시 14세인 아들 주자를 돌아보며 당부를 하였다. “이 세 분은 나의 벗이고 그 학문이 모두 연원(淵源)이 있으며 평소 내가 경외(敬畏)했던 분들이다. 내가 이제 죽거든 네가 이 분들에게 가서 아버지와 같이 섬기며 오직 이 분들의 말씀을 들어라.” 위재(韋齋)는 이렇게 유언(遺言)을 남기고 운명(殞命)하였다.
위재(韋齋)는 본래 정자(程子)의 고제자(高弟子)인 귀산 양시(龜山 楊時)에게 수업한 예장 나종언(豫章 羅從彦)의 제자이고, 호적계(胡籍溪) ・유백수(劉白水)・유병산(劉屛山)・연평 이동(延平 李侗)과는 경외(敬畏)하는 벗으로 지내는 사이요 동문(同門)이었다.
위재의 부탁을 받은 소부 유자우(少傅 劉子羽)는 숭안(崇安) 오부리(五夫里)에 있는 자신의 집 근처 담계(潭溪)의 시냇가이자 병산(屛山)의 기슭에 집을 짓고 주자를 자신의 아들처럼 거두어 살게 하였다. 소부 유자우(少傅 劉子羽)는 당시 간신 진회(秦檜)에 의해 탄핵된 항금(抗金)의 명장(名將)이었다.
주자(朱子)는 소부 유자우(少傅 劉子羽)의 주선으로 어머니 축씨(祝氏)를 모시고 오부리(五夫里)에서 안정된 삶을 살게 되었다.
그곳에서 부친의 유언대로 세 사람의 스승 적계 호원중(籍溪 胡原仲)・백수 유치중(白水 劉致中)・병산 유자휘(屛山 劉子翬) 문하(門下)에서 공부를 하게 되니, 선생(先生)들은 자신들의 자제(子弟)나 다름없이 기르며 학업(學業)을 전수(專修)하여 주었다. 또한 유백수(劉白水)는 자신의 딸을 주자에게 시집보내어 사위로 삼았다. 그러나 유병산(劉屛山)과 유백수(劉白水)는 차례로 세상을 하직하게 되었고, 오직 호적계(胡籍溪)만이 남아 주자(朱子)에게 오랫동안 수업(修業)을 전하게 된다.
7. 朱子가 50여 년을 살아온 오부리
오부리(五夫里)의 현재 행정구역은 복건성(福建省) 무이산시(武夷山市) 오부진(五夫鎭)이다. 건양시(建陽市)에서 약 60km이고 무이산(武夷山)에서도 약 60km, 건구(建甌)까지는 80km 정도 떨어진 거리다. 오부리는 청(淸)나라 때의 옛 마을로 고색창연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그리고 주자가 14세에 들어가 거처한 후 건양고정(建陽考亭)으로 옮겨가기까지 50여 년을 거주하였던 유적지(遺蹟地)이다.
오부리 마을에 들어서면 기현산록(起賢山麓)으로부터 흘러 내려오는 담계(潭溪)는 병산서원(屛山書院) 유허지가 있는 병산(屛山)을 감아돌며 흐르고, 건너편 사촉산(蜡燭山) 아래로 흐르는 적계(籍溪)는 오부리 본 마을을 안고 흐르다가 마을 끝에서 담계(潭溪)와 합류하여 흐른다. 오부리 마을이 처음 조성된 시기는 오대십국(五代十國)의 남당(南唐)시절로 추정한다.
마을 복판으로 들어가는 어귀는 백세방(百歲坊)으로부터 시작하여 적경방(積慶坊)을 지나면 문헌교(文獻橋)가 있고, 조금 더 가면 추로방(鄒魯坊)이다. 여기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담계(潭溪)가 흐르고 병산(屛山) 아래에 주자가 심었다는 800년이나 된 아름드리 장(樟)나무 고목(古木)이 버티고 서 있고, 자양루(紫陽樓) 입구에는 ‘주희고거 자양루 유지(朱熹故居 紫陽樓遺地)’라는 표석이 서 있으며, 들어가는 문에는 ‘주자고거(朱子故居)’ 라고 쓴 현액이 걸려 있다.
소부 유자우(少傅 劉子羽)가 마련해 준 집 이름을 자양루(紫陽樓), 혹은 자양서당(紫陽書堂)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조상(祖上)의 원적(原籍)이 휘주(徽州) 무원(婺源) 자양산(紫陽山)이었기에 조상의 근원지(根源地)를 생각하며 명명(命名)한 것이었다. 현재의 자양루(紫陽樓)는 옛 건물이 아니다.
긴 역사 속에서 중수(重修)를 계속해 오다가 민국시절(民國時節) 주자(朱子)를 존숭(尊崇)했던 국민당(國民黨) 숭안현(崇安縣) 현장(縣長) 첨계량(詹繼良)이 청(淸)나라 때 제작된 유씨 종보(劉氏宗譜)에 게재된 자양루(紫陽樓) 기록을 참고하여 중건(重建)하였다. 문화혁명(文化革命) 시절에 예외 없이 훼손(毁損)된 것을 1999년에 대대적으로 중수(重修)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비록 옛 건물은 아니지만 자양루(紫陽樓) 유허지에다 남은 문헌(文獻)을 근거하여 복원하였기에 옛 정취(情趣)를 더듬어볼 수 있다.
자양루(紫陽樓) 안쪽 정침 가운데에는 주자의 소조동상(小調銅像)이 앉아 있고, 정침 뒤쪽으로 가면 ‘신종추원(愼終追遠)’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그 아래에는 민(閩)땅의 시조 주삼(朱森), 주자의 부친 주송(朱松), 다원 주씨 시조(茶院朱氏始祖)인 다원제치 주고료 주괴(茶院制置 朱古僚 朱瓌) 세 사람을 모셔 놓고 향을 피우도록 단이 설치되어 있다. 양쪽 방 중 이름 하나는 부친의 호를 붙여 위재(韋齋)라 하였고, 또 하나는 예재(禮齋)라고 하였다. 그리고 별실들의 이름은 회당(晦堂)・경재(敬齋)・의재(義齋)・몽재(蒙齋) 등으로 명당실기에 있는 그대로이다.
주자가 만년에는 건양고정(建陽考亭)으로 옮겨가서 거처하다가 별세하기 5년 전에 부친 위재(韋齋)의 묘소를 오부리 적력산(寂歷山)에 이장하였는데, 자양루(紫陽樓)는 후손들이 묘소를 수호하는 재실(齋室)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마을 한가운데로 들어가면 중화방(中和坊)을 지나간다. 바로 올라가면 유림방(儒林坊)이고 중화방 조금 앞쪽 삼거리에 아란석(鵝卵石) 길이 나오는데, 이 길이 바로 주자가 800여 년 전에 자양루(紫陽樓)에서 흥현서원(興賢書院)을 오고가며 걸었던 길을 추모하여 이름을 붙인 주자항(朱子巷)이다.
마을 안에는 주자(朱子)가 적계 호원중(籍溪 胡原仲)에게 수학(修學)하고 주자(朱子)도 제자들에게 강학(講學)한 흥현서원(興賢書院)이 있고, 학당 위쪽 중앙에는 주자의 낙관이 찍혀 있는 ‘계왕개래(繼往開來)[옛것을 이어 미래를 열자]’ 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그리고 적계승경(籍溪勝境)을 지나면 송유(宋儒)의 종가(宗家) 유씨가사(劉氏家祠) 등이 있다. 그리고 오부리에는 역사적으로 가장 비중이 있는 오부리 사창(五夫里社倉), 또는 주자사창(朱子社倉)이 있다.
오부리는 주자가 14세에 어머니 축씨(祝氏)를 모시고 들어가 실제 벼슬생활 7여 년을 제외하고 65세에 고정서원(考亭書院)으로 거처(居處)를 옮겨 가기까지 약 44년을 거처하고 왕래한 곳이며, 주자의 문물유적(文物遺蹟)을 다양하게 느껴볼 수 있는 곳이다.
8. 총명 영오한 주희의 유년 시절
주희(朱熹)는 어려서부터 총명영오(聰明穎悟)하였고, 그의 아버지 주송(朱松)은 청의(淸議)를 주장하다가 재상(宰相) 진회(秦檜)와 틀어져 벼슬을 버리고 은거해 아들을 가르쳤다.
4살 때 부친 위재(韋齋)가 하늘을 가리켜서 “저것이 하늘이다” 하였더니 주자는 “하늘 위에 무엇이 있습니까?”라고 반문하였다. 5살에 공부를 시작하였고 8살에 효경(孝經)을 배웠다. 한 번 읽어 보더니 책 위에 ‘만일 이렇지 않으면 사람이 될 수 없다’라고 써 놓았다. 아이들과 모래톱에서 노는데, 홀로 단정히 앉아서 손가락으로 모래 위에 무엇을 그렸다. 살펴 보니 8괘(八卦)였다. 10세에는 ‘맹자(孟子)’를 읽고 “성인(聖人)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다” 하는 말에 감동하고 반문하였다.
주희는 열아홉에 진사(進士)에 급제하여 천주 동안주부(泉州 同安主簿)가 되었으며 스물네 살에 연평(延平) 사람 이동(李侗)에게 배웠는데, 이동은 바로 정이(程頤)의 재전(再傳) 제사(諸詞)였다. 그런 인연으로 주희는 소위 낙학(洛學)의 정통(正統)으로 계승발전(繼承發展)시키기에 이른 것이다.
9. 宋, 先賢의 발자취
송, 효종(宋, 孝宗) 초에 상서(上書)를 올려 문학(文學) 및 도교(道敎)와 부처의 설(說)을 배격(排擊)하고 ‘대학(大學)’에서 이르는 격물치지(格物致知) 성의정심(誠意正心)의 이학(理學)으로서 군주(君主)의 덕을 광보(匡輔)코자 하였지만 가납(嘉納)되지 못하였으며, 흥륭(興隆) 원년(1163)에 부름을 받아 대답하는 좌석에서도 여전히 격물치지(格物致知)를 거론하고 대금정책(對金政策)도 항전방어(抗戰防禦)와 강경한 척화(斥和)를 주장하였으므로 당시의 집정 세력과 맞지 않았다. 무학박사(武學博士)에 제수(除授)되었지만 사퇴하고 저술(著述)과 강학(講學)에 힘썼다.
순희(淳熙) 5년(1178), 그가 마흔아홉 살 적에 남강군(南康軍)을 다스려 백성들의 이익을 꾀하고 폐단을 제거하여 정치와 교화가 잘 시행되었으며, 주돈이(周敦頤)의 사당(祠堂)을 건립하고 거기에 정이천(程伊川)과 정명도(程明道) 형제를 배향(配享)하였다.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중수(重修)해 당시의 명망 있는 선비를 초빙하여 강학(講學)을 하도록 하였으며 동 8년(同八年) 8월 제거양절동로상평다염사(提擧兩浙東路常平茶鹽事)로 개임(改任)하여서는 모든 군(郡)에 사창법(社倉法)을 건의하였고, 다음해 그 직책에서 물러나 궁관(宮觀)의 한직에서 우유(優遊)한 것이 다섯 해나 되었다. 순희(淳熙) 15년 명을 받고 입경(入京)해서 연화전(延和殿)에서 일을 보던 중 순희(淳熙) 16년에는 비각수찬(秘閣修撰)에 제수되었다. 장주(漳州)에 개임(改任)되어서는 세금 부과를 감면하고 풍속을 바로 고치고 사경(四經)과 사자서(四子書)를 간행한 데 이어, 담주(潭州)에 개임(改任)하여서는 오랑캐 무리를 귀순시키고 학교를 일으켜 교화(敎化)를 밝혀 정치 업적이 상당히 증진되었다.
영종(寧宗)이 즉위하면서 환장각 시강(煥章閣侍講)을 제수, ‘대학(大學)’을 진강(進講)하여 조정 안팎의 예의(禮義)에 관한 견해를 다수(多數) 밝혔으며 당시의 권신 한탁주(韓侂冑)를 공박했다가 권외(圈外)로 몰리게 되었고, 간악한 무리배들이 수시로 그를 무고 모함하고 그의 학설이 위학(僞學)이라 배척을 일삼아 경원(慶園) 2년(1196) 드디어 관직에서 축출되었지만 전혀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제자들에게 강학(講學)하는 일과 미완성 저작(著作)에 대한 마무리에 박차를 가하였다.
10. 큰 별이 지다.
주자(朱子)는 병석(病席)에서 세상을 떠나려고 할 때 손수 유서(遺書)를 써서 아들 재(在)와 고 제자(高 弟子)인 범염덕(范念德)과 황간(黃幹)에게 사후의 일을 위탁하고, 특히 학문을 부지런히 연구할 것이며 남겨 놓은 자기의 저술(著述)을 교정하여 줄 것을 유언(遺言)하였다. 다음날 아침 간호(看護)하고 있던 문인(門人)이 가르침을 청하니 “뜻을 굳게 가져라”라고 대답하였다. 온공(溫公)이 상례(喪禮)를 문의하니 “그것은 대단하지 않다”고 하였다.
또 의례(儀禮)에 대하여 문의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정좌(正坐)하여 의관(衣冠)을 바르게 하고 베개 위에 눕자 숨이 졌다. 주자의 상례(喪禮)에 참여한 문인(門人) 모두가 의례(儀禮)에 따라 상례(喪禮)를 마쳤다.
주희(朱熹)의 문인(門人)으로서 지금도 그의 이름을 알 수 있는 사람이 530여 명에 달하며 그가 세상을 떠나자 장례(葬禮)에 모인 사람이 수천 명이 넘었다고 전한다.
주자(朱子)는 약 50년 동안 네 황제(皇帝・고종:高宗, 효종:孝宗, 광종:光宗, 영종:寧宗)를 섬겼으나 9년 동안 지방에서 봉직하고 40여 일 동안 조정(朝廷)에서는 황제의 측근에서 직언(直言)하며 진강(進講)하는 업무를 수행하였다. 주자(朱子)는 요직(要職)은 맡지 않고 대부분의 벼슬은 명예직(名譽職)이나 봉사직(奉祠職)을 수행하면서 후학양성(後學養成) 학문연구(學文硏究) 저작저술(著作著述) 활동으로 생애(生涯)를 장식하였다.
11. 朱子의 學文과 著書
그의 학술상 공헌(貢獻)은 유가학설(儒家學說)을 철저하게 정리해서 계통과 조리를 세우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이론을 확립시킨 점에 있는 바, 결국 그는 송(宋)나라 초기부터 성(盛)해지기 시작한 이학(理學)을 집대성했던 것이다. 한(漢)과 당(唐)으로 이어져 내려온 지루한 경전주소(經傳注疏)의 방법을 시정, 경전(經傳)의 요지를 드러내 밝혀 놓는 것을 목표로 대대적 주석(註釋) 사업을 전개하여 중국학 연구에 신기원(新紀元)을 마련하였고 역사자료의 정리 또한 그의 커다란 학술 사업 가운데 하나의 중대과제였다.
주희의 교육정신과 학문수양 방법은 그의 대학장구서(大學章句書)와 중용장구서(中庸章句書)의 집주(集注)에 잘 나타나 있다. 가까운 데서 시작하여 먼 데까지 이르게 하고 평이한 데서 시작하여 심오(深奧)한 데까지 이르게 하는 것으로, 먼저 자신의 덕을 닦는 것을 기본에 두고 착수하여 하늘의 이치와 사람의 본성에 온오(蘊奧)를 깨우쳐서 성인의 경계와 영역에 들어 참여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그는 사람됨이 청렴・결백・명석・성실・소박하였고 명예와 이익에 담박(淡泊)하였으며, 사악과 부정을 통렬히 배격하고 권세와 존귀를 제재(制裁)해 가면서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또한 축출(逐出)되고 박해(迫害)를 겪으면서도 결코 지조를 굽히지 않았다. 관직생활 중의 여가와 한야(閑野)의 무위(無位)에 놓여졌을 때 정력을 기울여 강학과 저술에 진력(盡力)하여 마침내 등신(等身)의 저서를 완성하였고, 그의 학설(學說)이 천하 후세에 전파 보급되어 공자(孔子)와 맹자(孟子)를 계승(繼承)한 위대한 사표(師表)로 숭상(崇尙)되기에 이르렀다.
그의 저작(著作)이 81종(八十一種)에 달하나 그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것이 사서장구집주(四書章句集注) 19권이며, 사서(四書)의 명칭은 주자(朱子)에 의해 확립되었고 원(元)나라 인종 황경(仁宗 皇慶) 2년(1313)부터는 국가고시의 지정서(指定書)로 쓰기 시작하여 명(明)과 청(淸)시대에도 계속되어 내려왔다. 그래서 주희의 집주(集註)는 글 배우는 사람의 필독서(必讀書)가 되었고 경문(經文)과 비등한 권위를 갖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밖에 유가경전(儒家經傳)을 풀이한 것으로 주역본의(周易本義) 12권, 역학계몽(易學啓蒙) 4권, 효경간오(孝經刊誤) 1권, 시집전(詩集傳) 8권, 사서혹문(四書或問) 39권,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 37권, 논맹집의(論孟集議) 34권, 중용집략(中庸輯略) 2권과 역사에 관한 것으로 통감강목(通鑑綱目) 59권, [범례(凡例)는 주희가 수정(手定)하고 강목(講目)은 모두 그의 문인(門人)이 지었다.] 송명신언행록(宋名臣言行錄) 24권, 이락연원록(伊洛淵源錄) 14권과 그밖에 여조겸(呂祖謙)과 합작인 근사록(近思錄) 외에 소학서(小學書) 문공가례(文公家禮)도 오래 적부터 널리 읽히고 연구된 주희(朱熹)의 저술(著述)이고 그가 지은 시(詩)와 문장을 모은 것으로 주자대전집(朱子大全集) 112권이 전한다.
국제도서관협회(國際圖書館協會) 진귀본(珍貴本) 마이크로필름에 인류사상(人類史上) 가장 많은 저서(著書)를 남긴 사람이 주자(朱子)라 하였다.
12. 朱子의 家族
주자는 스승인 백수 유치중(白水 劉致中)의 딸과 혼인하였고 부인 유씨(劉氏)는 주자의 나이 47세(丁酉, 1176년 11월)에 별세(別世)하였다.
(유씨((劉氏)는 사후(死後)에 석인(碩人)의 칭호를 받았다.)
주자의 자녀는 3남5녀였다. 장남 숙(塾)은 주자보다 10년 먼저 타계하였으며 차남 야(埜), 삼남 재(在)가 남았고 장녀 손(巽)은 유병산(劉屛山)의 양자인 유평(劉平)의 아들 유학고(劉學古)와 혼인하였다. 차녀 태(兌)는 고 제자(高 弟子)인 황간(黃幹)에게 시집을 가고 셋째딸의 이름은 계사(癸巳)인데 15세에 요절하였고, 넷째딸의 이름은 남아 있지 않으나 고 제자(高 弟子)인 범염덕(范念德)의 아들 범원유(范元裕)와 혼인하였고 다섯째딸의 이름이 남아 있지 않고 어린 나이에 조사(早死)하였다.
손자(孫子)로는 감(鑑)・거(鉅)・전(銓)・탁(鐸)・질(銍)・현(鉉)・주(鑄) 일곱 명이고 손녀(孫女)들은 아홉 명이며, 증손자(曾孫子)는 여섯 명으로 연(淵)・흡(洽)・잠(潛)・제(濟)・준(濬)・징(澄)이고 증손녀(曾孫女)는 일곱 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