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수님은 나의 집안이 기울어지고 우리 가족이 흩어지게 되었을 때, 친정 동생인 조순필씨를 따라 나의 형님 은호씨와 함께 만주로 떠났었다. 그러나 1개월만에 나의 형님이 타계하셨고, 3년 동안의 이국생활의 외로움을 당시 번창하고 있는 태을도(太乙道)를 믿으며 위안을 받고 살았다.
이 때 형수님의 조카 조철제(趙哲濟)씨는 적극 태을도(太乙道)를 신앙하였고, 마침내 <태인(泰仁)으로 가라>는 계시를 받기까지에 이르렀다. 그래서 이들 일가는 짐을 꾸려 만주생활을 청산하고 충남 서산군 태안면으로 떠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후 감곡 황새마을로 옮겼다. 이것은 조철제씨가 태인(泰仁)을 태안(泰安)으로 잘못 알았기 때문이고, 황새마을은 태인이 가까운 지역이었던 것이다.
나의 형수님은 만주에서 떠나올 때 그곳에 매장했던 나의 형님 유골을 온몸에 나누워 묶었고, 그 위에 어린아이를 엎어 감추어 가지고 압록강을 건너 태인에다 묻었다. 그리고 후일 익산 불법연구회에 귀의 했을 때, 다시 북일면에 이장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나의 형수님은 열녀(烈女)라고 할 수 있는 훌륭한 분이었다..
이렇게 하여 정착하게된 조철제씨는 태을도의 도주(道主)가 되었으며 이에 따라 교명도 무극대도(無極大道)라 개명하였다. 그리고 나의 형수님은 무극대고의 일원으로 상당한 역할을 하게 되었고 이 소식은 창녕에 있는 우리에게 전해졌으며, 나는 나의 가족을 데리고 새로운 보람과 희망을 안고 모든 가산을 정리, 이사하게 된 것이다.
내가 무극대도에 인연을 갖게 된 것은 어쩌면 대종사님을 만나기 위한 또 한 번의 고비였을지 모른다. 그러니까 무극대도는 <강증산교>의 한 종파라 볼수 있다. 증산은 1871년 전북 정읍군 이평면에서 탄생하였다. 어려서부터 남다른 구도일념(求道一念)으로 공부하였으며 31세 되던 1901년 전주 모악산에 있는 대원사(大願寺)에서 기도 정진으로 대도(大道)를 깨달았다고 하니 때는 7월 5일이다. 그리하여 1909년 39세로 세상을 마칠때까지 9년동안 많은 기행(奇行)과 이적(異蹟)으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면서 종도(從徒)들을 얻었던 것이다.
증산은 또한 1907년 6월 정읍 입람산 대흥리에 사는 차경석(車京石)을 만나 그의 집에 머물러서 천지공사(天地公事)를 더욱 격식을 갖추어 행사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후천 신세계로 개벽(開闢)되는 운도(運度)를 본다고 하며 이제는 선천운(先天運)이 ,지나가고 후천운(後天運)이 열리는 지상극락 즉 지상선경(地上仙境)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예언과 함께 소위 <신세계(新世界) 조화정부(造化政府)>를 꾀하는 천지공사(天地公事)를 보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증산이 떠난 후 몇몇 수제자들은 통합 종단을 이루지 못하고 각자의 주장대로 교파를 이루는 가운데 크게 교세를 얻은 두 파가 있었으니 그 하나는 차천자교(車天子敎)요, 또 하나는 조천자교(趙天子敎)였다.
나는 큰 포부와 기대속에 조철제의 무극대도에 귀의하였고, 거기에서 행해지는 의식과 가르침을 눈여겨 보게 되었다. 적어도 인간의 바른 길을 제시해 줄 것을 염원하는 구도(求道)의 눈으로, 그러니 비록 나의 짧은 안목이었지만 내게 비쳐진 이들의 신앙모습은 수궁할 수 없는 면들로 일관되었고, 도대체 무엇을 위한 삶인지 알 수가 없었다.
스스로 천자를 자칭한 도주(道主) 조철제씨는 궁궐 모양의 집을 지어 호화로운 생활을 즐겼다. 그러나 종교로서 갖추어야 할 교리 제도 교단중 가장 중요한 교리가 형성되지 않아 소의경전 하나 없었다. 다만 1년 24절후에 소와 돼지를 잡아 치성을 드려 운수가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이었고 개안(開眼)을 꿈꾸면서 시천주조화정(侍天主造化定) 영세불망만사지(永世不忘萬事知) 지기금지원위대강(至氣今至願爲大降) 이라는 주문만을 외었던 것이다.
이들은 자기들이 바라는 운수를 얻으려면 집안에 수저 하나도 남겨서는 안된다고 하여 있는 바를 온통 털어 바쳐야만 후천세계에 새 운수를 받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억압속에 짓눌려 살던 민중들은 그래도 한 줄기 희망을 안고 가산을 탕진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기만 하였으며 전국 각지로 퍼져만 갔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말하는 제갈량 이상의 지략을 가질 수 있다는게 반하였고 광신적 열성으로 한 동안 바치기만 했던 것이다.
나의 형수님은 물론 어머님과 아내 여동생까지 이곳에서 무극대도를 신봉하면서 곤궁한 생활을 이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나의 눈이 비쳐지는 무극대도의 실태는 점점 그 부조린의 덩치가 커져만 갔고 나의 최초의 구도일념은 퇴색되어만 가시 시작했다.
3년 동안의 세월속에 내가 격은 이들의 모습은 허망한 것이었고 그래서 또 다른 세계에의 갈구가 싹트기 시작했다. 나에게 있어서 도주(道主)는 사돈간이었지만 낱낱이 비쳐지는 상황을 곧바로 충고할 수도 없었다. 요행수에 속아 도통을 바라보고 모여드는 대중에게도 바른 견해를 가져야 한다고 말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심하기 2년, 나는 고향에 내려가는 기회가 있어도 입을 열어 이야기 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무극대고를 막연히 따를 수도 없는 기로에 서 있게 되었다. 그런데 내가 이곳으로부터 떠나야 할 때가 다가왔다. 그것은 무극대도 자체내에서 커다란 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황새마을에 자리했던 무극대도(無極大道)는 이곳에서 약 2km 떨어진 태인쪽 통사동 이씨(李氏)재실을 빌어 본부를 옮기고 증산의 재림(再臨)을 선포, 그에 따른 엄청난 사업을 벌였던 것이다.
1923년 계해년(癸亥年)에 원평 구릿골(銅谷)에 있는 증산의 묘를 파 유골을 비단보에 곱게 싸서 모셔 놓고 소와 돼지 등을 잡아 날마나 치성을 올리며 이듬해인 1924년 갑자(甲子) 정월 초하룻날에 증산이 다시 오시어 도통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계해년(癸亥年) 9월부터 12월까지 4개월 동안 주로 전라도와 경상도를 돌아다니며 돈을 거둬들이는 것이다.
종교의 본래 면목이 무엇인지 모르는 대중들은 막연히 이들의 포교술에 녹아 있는대로를 다 바쳤고, 갑자년 1월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라리게 되었다. 이 때 거둬들인 돈과 물품은 이루 헤아릴 수 없지만 여자들의 은가락지만도 서말이 넘었다. 이렇게 하여 증산의 환생과 동시에 도통을 바라던 갑자년 1월이 다가왔다. 그러나 아무런 이적(異蹟)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 때 조철제(趙哲濟)씨는 대중들에게 3월이라고 연기함으로써 위험한 고비를 넘기고, 기다리게 했으나 역시 3월이 다 가도 아무런 변화는 없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은 속을 줄을 깨닫고 드디어 그 허망함에 분노의 함성을 터트렸던 것이다. 이들은 눈만 나오는 가면 모자를 둘러 쓰고 손에 손에 몽둥이를 들고 어느날 밤을 기해 본부를 향해 쳐들어 갔던 것이다. 그러나 다행이 조철제씨는 이 현장을 피해서 무사했지만 그의 아비지가 몽둥이에 맞아 팔과 다리가 부러지는 상처를 입게 되었다.
나 역시 무극대도의 간부였기 때문에 그날 밤 그곳에 있었더라면 틀림없이 맞았을 것이다. 그 당시 비밀문서나 돈 보따리는 나의 집에 보관되어 있었다. 조철제씨를 잡지 못한 그들은 대신 증산의 유골을 가져가 버리고 말았다. 모두 다 얼굴에 가면을 썼기 때문에, 더구나 어두운 밤이라서 누가 누구인줄을 몰랐던 것은 당연하다. 그러기 때문에 이들 중 대담한 사람들 몇몇은 그날밤 난리를 내고서도 다음날부터 낮이면 위문 한다는 핑계로 동정을 살피러 드나들었다.
나는 이 와중(渦中)에서 얼마가 들어있는지도 모르는 돈가방 3개를 나락섬 속에 감추어 두었다가 조철제씨가 숨이 있다는 산(상두산으로 기억됨)으로 가지고 가서 인계를 하고 돌아왔다. 이토록 나를 믿어주었던 조철제씨는 나에제 전 재산을 맡길 정도였고 또한 나 자신도 거기에 호리(毫釐)도 틀림없이 수행했던 것이다. 이렇게 돈을 옮긴 후 니는 바로 사건 당일 부상당했던 조철제씨 부친을 모시고 대구동산 기독병원으로 간호하느라 몇 달 동안 병원생활을 하게 되었다.
한편 증산의 유골 행방에 대해 수사를 하던 정읍 경찰서는 범인을 잡아 유골을 보관 했으나, 이 때 차경석씨가 이 유골을 다시 가져갔다고 한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 그 후 증산의 딸에게 넘어가 지금의 원평 오리알터에 있는지 자세한 것은 알 수가 없다.
이렇게 무극대도의 갑자년 사건은 무모한 가운데 끝났지만 갑자년을 택하게 된 것은 그럴만한 근거가 있었던 것이다. 증산 생존시 <나는 삼계대권(三界大權)을 주재(主宰)하여 선천(先天) 운도(運度)를 뜯어 고치고 후천(後天)의 무궁한 운수를 열어 선경(仙境)을 세우려 함이라. 선천에는 상극(相克)이 인간 만물을 지배하므로 세계의 원(寃)이 쌓이고 맺혀 삼계(三界)에 충만(充滿)하여 천지가 상도(常度)를 잃고, 세인의 모든 참화(慘禍)가 생기나니, 내가 천지도수를 정리하고 신명(神明)을 조화하여 만고(萬古)의 원(寃)을 풀고 상생(相生)의 도로써 후천선경을 열고 조화정부(造化政府)를 세워 세계 민생(民生)을 건지러 하노라>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것이 후일 증산천사공사기(甑山天師公事記)에 수록된 것으로 알고 있다. 이와 같은 선후천이 바뀌는 기점을 갑자년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에 앞서 갑자년 사건 전인 어느날 조철제씨는 힘 좋은 장정 10여명을 사 가지고 왔다. 조철제씨는 증산이 아껴썼던 약장과 둔괘가 차경석씨에게 있다는 소식을 증산의 동생 선돌댁이라는 분에게 듣고 그것을 가지려고 무력을 동원한 것이다.
그래서 이 장정들을 데리고 조철제씨는 밤을 이용, 정읍군 입암면에 있는 차천자교 본부를 습격하였다. 그러나 약장은 너무 커서 옮겨오지 못하고 둔괘만을 가져오는데 성공했다. 이 둔괘는 신묘한 천지도수를 재는 공부를 하는데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생각이 되며, 약장은 증산이 평소 병겁(病劫)을 예언한 일이 있었으며, 의통(醫統)을 알아두라고 했다 한다. 즉 의통이라 함은 미래운을 조정함에 있어 앞으로 개벽운도상(開闢運度上) 괴이한 병겁(病劫)이 다가와 인류는 순식간에 멸망하게 되는데 이 병마(病魔)를 제어할 수 있도록 하는 비전(祕傳)을 완전히 전수(傳受)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 한다.
이런 증산의 사상이 약장을 만들지 않았던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지만, 실제로 그 약장을 본 일이 없다. 다만 옮겨둔 둔괘는 보았다.
조철제씨는 둔괘를 앞에 두고 공부를 하였다. 때로 경상도 낙동강가 정자에 들어가서고 이 둔괘를 두고 공부를 했다. 그러나 그렇게 애지중지 하던 이 둔괘가 어느날 하수인에게 도둑맞고 말았다.
사실 둔괘를 열어보면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빈상자였지만 행여 별스런 신통이 나오는 것으로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고 그래서 결국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조철제씨는 다시 그 모양 크기대로 둔괘를 짜서 가지고 다니면서 공부했던 것이다. - 원불교 구도역정기 : 성산(誠山) 성정철(成丁哲) 법사(法師)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