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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도의 추적] 秘史 - 全國區 39년
신동아 2001년 09월 호
재력에는 비례, 민의에는 반비례
이병도 < 시사평론가 >
지난 7월19일 현행 선거법의 국회의원 비례대표(전국구) 의석 배분방식은 헌법에 어긋난다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내려졌다. 1인1표제도 “비례대표 배분방식에 적용하면 위헌”이라는 ‘한정위헌’ 결정이 내려졌다. 여야 정치권은 올 가을 정기국회 때 법개정을 목표로 당론을 모으고 있다. 정치권의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정치파행의 주범 전국구제도 39년을 되돌아보았다.
“세도정치가 나라의 기반을 어지럽히고, 가는 곳마다 매관매직(賣官賣職)이 성행하였다. 지방관리들까지 돈을 바치고 관리 노릇을 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익을 얻고자 하는 일은 권력자들이 모두 다 차지하여 백성들은 실직자가 되어갔다. 선비의 기운은 없어지고 사람들은 단지 자신의 이익만 도모하게 되고, 벼슬을 하거나 큰 사업을 위해 세력 가진 자에게 아첨이나 하니, 시시시비(是是非非)가 전도되어 정의로운 공론(公論)이 사라지고 있었다. 사대부들은 세력을 가진 자들이 해코지를 해올까 봐 친구간이라도 말조심을 하게 되었고, 진실된 언로는 막혔다.”
구한말, 패망 전야의 사회상을 생생히 증언한 민족사학자 박은식(朴殷植)의 ‘한국통사(韓國痛史)’ 중 일부다. 돈을 주고 벼슬을 사고 파는 매관매직의 성행과 권력자들의 세도정치가 가장 큰 망국병이었음을 이 기록은 보여준다.
박정희(朴正熙) 군사정권의 3공화국에서 이른바 ‘3김 보스정치’에 이르기까지 매관매직과 부패 정치권력 행위의 상징으로 비판받아온 전국구 국회의원 선출제도, 그 실상은 과연 어떠했을까. 문자 그대로 ‘전(全)국구’인가 아니면 ‘전(錢)국구’인가. 전국구 국회의원 제도와 그 내막에 대한 실태 점검은 한국정치 및 선거문화의 현주소를 가늠하는 시금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헌법재판소의 위헌판결을 계기로 대한민국 전국구제도 39년의 풍상과 비사(秘史)를 조명한다.
권력형 운용과 매관매직
우리나라에 비례대표제가 처음 소개된 것은 5·16 직후 제5차 헌법개정 때였다. 당시 전국구제도 도입 명분은 국회의 직능대표제적 성격 강화였는데, 각계 명사나 전문가를 국회에 진출시켜 국회의 질을 높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취지와 달리 전국구제도는 시행과정에 온갖 우여곡절을 겪는다.
6공화국 이전까지 정권의 정통성이 취약했던 집권여당은 전국구를 정권 기반 강화용 혹은 ‘정치시녀’ 확보용으로, 이에 맞서 싸우는 야당은 전국구를 정치자금 마련 통로, 즉 ‘공천 장사’에 활용했다.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부터 오늘의 ‘3김시대’에 이르기까지, 그 경중에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전국구 제도의 폐습은 시정되지 못한 채 지속되고 있다.
그러면 이 제도의 도입과정부터 살펴보자. 박정희정권은 5·16 군사쿠데타 후 개헌을 위한 전국 공청회에서 전국구를 포함한 국회의원 선거구제에 대한 국민 여론을 물었다. 명분은 국회를 전문화한다는 것이었으나, 실제 의도는 크게 달랐던 것으로 드러난다. 5·16 직후 국가재건최고회의에 관여했다가 야권으로 돌아섰던 한 인사의 증언.
“박정희 의장이 전국구제도 도입을 구상한 것은 자신의 권력기반을 강화하고, 무엇보다 국회를 무력화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여야 정치권의 기존행태를 국가이익과 무관한 당쟁으로 간주, 대단한 거부감을 갖고 있던 박의장은 쿠데타 직후 국회의원 선출 구조부터 뜯어고쳐야겠다는 발상을 했다. 의원 정수를 대폭 줄이고, 전체 의석의 4분의 1을 자신이 직접 지명하는 전국구 의원으로 충원한다는 복안을 이미 세워놓고 측근들에게 준비를 지시했다.
이로써 전국구 제도는 1963년 11월 실시된 6대 총선에서 처음으로 선보이게 된 것이다. 그 후 박대통령은 권력기반 강화를 위해 국회를 사실상 자신의 시녀로 만드는 방책으로써 갈수록 전국구제도에 집착했다.
박대통령의 이런 구상에 따라 9대 국회에 이르러 전국구 제도는 다시 ‘유신정우회(유정회)’라는 이름으로 뒤틀리게 된다. 유신헌법에 근거한 유정회 의원은 전체 국회의원 정원의 3분의 1에 해당했는데, 유정회 후보는 대통령이 일괄추천하고 이들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케 함으로써 무소불위 철권정치의 전위대로 전락시켰던 것이다.”
박대통령은 전국구 의원들을 자신의 권력 전위대로 적극 활용한 셈이다. 전국구 제도를 이용한 박대통령의 권력 행보가 어떠했는지에 대한 이 인사의 추가 설명.
“박대통령은 전국구제도를 정국 주도권 장악을 위한 사실상의 동력(動力)으로 삼았다. 즉 제도정치권을 장악, 모든 정국현안을 강제로 타개하려 했다. 전국구가 도입된 6대 국회에서 야권과 재야, 학생운동권의 극심한 반발 속에서도 한일협정비준 동의안을 단독 의결로 밀어붙였던 것이 이를 잘 말해준다. 이어 7대 국회 때는 3선개헌안까지 통과시켰다.
절대권력의 절정기인 1973년 2월 실시된 9대 총선에서는 ‘새로운 전국구’인 유정회 의원이 의원 정수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기형적인 국회가 만들어졌다. 유정회 발족 직후인 10대 국회에서 박대통령은 YH사건을 빌미로 당시 야당총재였던 김영삼(金泳三) 신민당총재의 의원직을 강제로 제명하는 역사적 오점을 남겼다. 모두가 전국구제도란 정치권 장악의 방편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박대통령은 전국구제도를 독재 권력행위와 통치드라이브에 긴요하게 활용했다.”
이로써 박대통령의 권력행위에 적극 협력하며 ‘방탄막’ 노릇을 하는 ‘전국구’들이 수없이 탄생했다. 그 대표적 인사가 백두진 전국회의장이다. 그는 7,8대 공화당 전국구를 거쳐 9,10대에는 유정회 의원을 지내는 등 박정권의 ‘임명직 전국구’로서 승승장구의 길을 걸었다. 1971년 국무총리에서 물러난 직후 8대 국회의장에 선출됐으며, 유정회의장(9대)을 거쳐 1979년 10대 때는 “지명된 전국구 국회의원은 의장으로 선출될 수 없다”는 야당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히는, 이른바 ‘백두진 파동’의 소용돌이에서 끝내 국회의장에 다시 선출되기도 한다.
그는 결국 1979년 9월 제1야당 총재인 김영삼 당시 신민당총재의 의원직을 제명하는 악역을 맡아, 박정권을 위한 ‘전국구 방탄막’으로서 정치 인생에 피날레를 장식한다.
당시 야당 출신의 원로 정치인 Y씨는 백씨의 정치 족적에 대해 이렇게 평가한다.
“박정희씨에 의해 전국구의원에 거듭 발탁된 백씨는 유신 이후 정치적 자유 허용이 혼란을 초래하고, 이는 곧 적화(赤化)를 의미한다는 논리로 무장해 야당과의 타협을 거부하는 독선을 보여 ‘유신학교 교장’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백씨처럼 전국구의원으로서 박정권의 정권안보에 헌신한 인물도 드물 것이다. 그는 국회의장 때 민주국가의 의회 기능을 사실상 마비시키는 일을 했다.”
이 밖에도 유정회 창출에 핵심 브레인 이었던 인사로는 한태연(韓泰淵) 갈봉근(葛奉根)씨 등 전직 유정회 의원이 꼽힌다. 건국 이후 헌법학의 기초를 닦았다는 평을 듣는 한태연씨는 일본 와세다대 법학부를 졸업한 후, 서울대와 한양대 법대 교수를 지내다 1963년 공화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정치권에 들어섰다. 그는 유신헌법을 기초해 후학들로부터 지금도 “헌법학계에 역사적 과오를 남겼다”는 말을 듣는다.
유신헌법은 ‘항가리 헌법’
또 독일 본대 법학박사 출신인 갈봉근 전 중앙대 법대 교수도 유신헌법을 찬양하는 헌법교과서를 저술했으며 그 후 유정회 국회의원을 지냈다. 이 때문에 당시 세간에서는 유신헌법을 한태연 갈봉근 교수와 당시 권력실세인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이 합작한 작품이라 하여 ‘항가리(韓葛李) 헌법’이란 비어(卑語)로 지칭했다.
동국대 법대 한상범(韓相範) 교수는 이 법학 교수들의 당시 행위에 대해 “그들이 배운 법학의 뿌리가 일본 제국주의 법학이거나 그 영향을 많이 받은 식민지 법학인 탓이 크다”고 분석했다. 한 중견 변호사는 “유명 법학자들의 이런 행위로 인해 박정희 시대 전국구제도의 삐뚤어진 모습은 법이 현실정치 발전의 필수품이 아니라 권력의 기능적 장식품으로 떨어질 수도 있음을 잘 보여준 것”이라고 말한다.
박대통령은 유신헌법과 유정회라는 ‘새 전국구제도’를 통해 국회의석의 3분의 1을 무조건 자신이 지명한 사람으로 구성할 수 있게 한 다음, 이를 통해 새로운 친위세력을 발굴 구축해 권력의 철옹성을 다져나간다. 유정회 발족 전후 박대통령의 청와대 비서실장을 역임한 김정렴(金正濂)씨의 회고.
“유정회는 1972년 10월 유신으로 탄생한 새로운 전국구제도다. 3분의 1에 해당하는 국회의원을 대통령이 임명함으로써 대통령이 정국운영을 주도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내가 비서실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박정희 대통령은 1971년 8대, 1973년 9대, 1978년 10대 등 세 차례 총선에서 공천을 지휘했다. 유정회 의원은 여러 분야에서 발탁되는 만큼 박대통령은 분야별로 추천 창구를 정했다.
군 현역은 국방장관, 검사·판사는 법무장관·검찰총장, 경찰은 내무장관, 교육계는 문교장관, 학계는 정무수석, 언론계는 공보수석, 여성계는 정무·공보수석 등에게 추천을 맡겼다. 비서실은 인재를 고르기 위해 학계·언론계 등 5개 분야별로 인사파일을 만들어 참고했으며 여기에 수록된 인사는 약 3000명이었다.
박대통령은 유정회 정원(77명)의 3배 정도가 되는 200명 내외를 추천받았고 자신이 직접 낙점했다. 그렇지만 이들 중 특히 (실질적 권력기반이 될) 혁명주체 인사나 퇴역장성 등 군 계통과 전직 장관 등은 추천창구 없이 직접 고르고, 명단을 내려보냈다. 박대통령은 낙점받은 인사에게 통보하는 일을 나에게 맡겼다.
나는 내가 통보해주고 당선자들이 나중에 ‘사전에 비서실장이 알려주더라’고 소문을 내면 괜한 잡음이 생길 것 같아 담당수석들로 하여금 통보작업을 맡도록 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아주 친하거나 잘 아는 몇몇 사람에게만 직접 통보했다. 예를 들면 이웃에 사는 김신(金信) 장군이나 이승윤(李承潤) 서강대교수 등이다. 박대통령과 참모들은 유정회에 인재를 많이 집어넣으려 했으며, 고사하는 사람들을 설득하기도 했다. 1973년 첫 유정회를 구성할 때 당시 홍성철 정무수석은 박대통령으로부터 ‘여성계 인사 중에는 이범준 이화여대 정외과 교수를 꼭 넣으라’는 분부를 받기도 했다.”
‘전국구 최고실세’ 차지철
박대통령은 이처럼 독재 권력기반 강화를 위해 전국구제도에 집착했다고 할 수 있다. 실제 박정권에서 전국구제도가 얼마나 악용되었는지 다음의 일화가 잘 보여준다. 관계인사가 전하는 ‘박정희 권력의 핵’ 차지철(車智澈)의 제도정치권 등용에 얽힌 증언기록.
“5·16 쿠데타 과정에 차지철 대위는 물불 가리지 않는 혁명의 전위대였다. 거사 당일 새벽 장도영 참모총장의 지시로 공수단 지휘부가 주춤거리자 차대위는 무기고·탄약고를 부수고 동료들과 함께 서울로 진격해 들어와 박정희 소장을 놀라게 했다. 박소장은 혁명 성공 후 박종규 소령과 차대위를 최고회의 경호대에 배속시켜 반혁명인사를 잡아들이는 특명활동을 시켰다. 그리고 1963년 11월 민정이양과 동시에 처음 도입된 전국구제도에서 차대위는 집권 공화당 전국구후보 24명 중 22번으로 지명돼 금배지를 달게 된다. 박대통령의 각별한 총애 속에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국회의원이 된 차대위는 국회에서 박대통령을 보위하고 방어하는 친위대의 선봉에 나섰다.”
차의원의 의정활동을 옆에서 지켜본 동료의원 K씨의 증언은 더욱 구체적이다.
“박대통령은 가히 용병의 귀신이었다. 청와대에는 꾀 많고 치밀한 모사 이후락(李厚洛) 비서실장과 저돌적 완력대장 박종규를 앉혔다. 국회도 전국구제도를 활용해 묘하게 구성, 구정치인을 대거 포진시키면서 요소요소에 친위 행동대원을 심었다. 차의원이 대표적인 사람이다. 박대통령은 차의원의 저돌성과 충직성을 높이 평가했고, 차의원은 이에 부응하려 최선을 다했다. 입심 좋은 야당의원들이 박대통령에게 가시돋친 공격이라도 하면 차의원은 그냥 두지 않았다.
6대 국회 국방위에서 있었던 일이다. 야당인 자유민주당의 김준연 의원이 박대통령을 비난하자 차의원은 눈을 부라리며 금방 주먹질이라도 할 듯이 달려갔다. 그는 무쇠 같은 주먹을 하늘로 쳐들고 완력시위를 했다. 29세의 초선이 막무가내로 나오니 5선의 70세 노인인 김의원은 어이가 없어 말문을 닫았다. 본회의장에서도 야당의원이 박대통령을 공격하면 같은 군 출신인 권모 의원 등과 함께 연단으로 달려가 주먹을 흔들며 소리를 쳤다. 차의원에게 혼쭐난 사람은 야당의원뿐이 아니었다. 공화당의 이효상 국회의장이나 장경순 부의장이 미지근한 태도라도 보이면 사무실로 쳐들어가 ‘혁명과업을 방해한다’며 주먹으로 책상을 쳐댔다. 정말 그는 박대통령의 ‘혁명수비대’ 같았다.”
차의원의 오랜 측근이었던 H씨도 “당한 사람은 이런 차의원을 눈엣가시로 보았겠지만 박대통령에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부하였다. 박대통령은 이런 방식으로 국회를 장악했다”고 했다. 차실장의 국회의원 시절을 잘 아는 동료의원 L씨는 “차의원은 의정생활을 약 11년이나 했는데, 그야말로 무풍가도요 승승장구였다. 박대통령이란 절대적인 ‘빽’이 있으니 거칠 것이 없었다. 6대 전국구로 국회에 들어왔던 차의원은 7대에 박대통령 지시로 경기도 광주·이천에서 출마해 해공 신익희 선생의 장남 신하균씨를 거의 3배차로 누르고 당선됐다. 그 여세를 몰아 1969년 11월엔 35세로 의정사상 최연소 상임위원장까지 됐다. 차지철은 사실상 국회 내 박대통령의 정치특사였으며, 최고 실세였다”면서 “사정이 이러했는데 전국구제도가 국회 전문성 제고와 어떤 관련이 있는가”라고 반문했다.
박대통령은 새로운 친정인맥을 발탁하고 키우는 데뿐만 아니라 사람을 버릴 때도 전국구제도를 활용했다. 정치권내 한 소식통의 설명.
“대표적인 것이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다. 박정권 시절 정보부의 대공사건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1967년 7월의 이른바 ‘동베를린거점 간첩단 사건’이다. 음악가 윤이상, 화가 이응로씨와 교수·학생 등 104명이 구속된 1960년대 최대규모의 간첩단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정권안보의 일환으로 김형욱 중정부장 주도하에 면밀히 추진돼 소기의 성과를 올렸다. 마침내 김형욱 정보체제의 강력한 가동하에 1969년 12월 3선개헌이 완료되고 박정희 권력이 착근했을 때, 박대통령은 자신의 권력 내부의 치부를 너무 잘 알고 있는 김형욱을 버리기로 결심한다. 박대통령은 김형욱을 버리는데 1971년 공화당 전국구라는 감투를 활용했다.
그러나 김형욱은 정신병에 가까울 정도로 불안을 느꼈다. 지은 죄가 많아 보복을 두려워한 것이다. 그는 결국 1973년 4월 미국으로 망명했고, 배신자의 길을 걷다 1979년 10월 파리에서 의문의 실종을 당하고 만다.”
이런 식의 권력형 ‘전국구 활용’ 폐단은 전두환·노태우 정권기에도 답습됐다. 6공화국 때 정호용 의원의 거세를 위해 노대통령이 정의원에게 전국구를 종용했던 것도 비슷한 사례로 볼 수 있다.
특히 5공화국 정권은 이른바 신군부가 쿠데타를 통해 태동시킨 정권이었기 때문에 출발부터 비민주적이었다.
5공 정권은 ▲대통령선거에서 선거인단을 통해 간접선거를 했고 ▲야당의 힘을 분산시키기 위해 다당제 전략을 썼으며 ▲제1당이 전국구 의석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지역구선거를 1구 2인으로 하는 등 제도적 편법으로 국회를 장악했다. 5공은 군부엘리트가 국정을 주도했으며, 군사문화가 정치·행정문화를 지배했고 통치는 있으나 정치가 없는 체제였다.
12·12 주역들, 대거 전국구로
실제 10·26 이전부터 이미 권력의 핵심에 위치해 있던 ‘신군부’ 세력에 수많은 관료 학자 등 민간인이 가담했지만, 이들은 거의 ‘기능인’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실권은 50명에 이르는 현역 군인에 집중돼 있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그후 전국구 이름을 달고 정치현장에 등장, 전국구 본래의 취지를 다시 한 번 무색케 한다.
5·17 당시 최고 권력기구였던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 멤버는 모두 14명. 이들 중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대통령을 제외한 12인 가운데도 전국구에 기용된 인물은 상당수다. 가장 꾸준히 요직에 기용된 인물은 12·12의 주역인 유학성씨(당시 육군중장). 5공 출범과 함께 안기부장에 발탁된 유씨는 12대 민정당 전국구를 정치권 진입의 발판으로 삼았다가 13대 때는 지역구(경북 예천)로 진출했고 국방위원장까지 지냈다.
당시 해군참모총장이었던 김종곤씨는 5공 때 주중대사를 지내다가 13대 민정당 전국구로 발탁됐고, 당시 해병중장이었던 김정호씨도 11대 민정당 전국구의원에 기용됐다. 국보위 상임위원을 지냈던 김인기씨(당시 공군소장)는 1987년 공군참모총장을 마지막으로 예편한 뒤 곧바로 13대 민정당 전국구의원으로 국회에 진출했으며, 당시 해군준장이었던 정원민씨도 11대 민정당 전국구의원을 지낸 뒤 1988년까지 석탄공사사장으로 일했다. 전두환 ·노태우 정권도 전국구를 자신의 권력기반 강화수단으로 활용했다.
특히 전·노 두 전직 대통령은 같은 군인정치 기반 위에서 권력을 이어받았다. 따라서 두 대통령은 처음엔 권력기반유지의 이해를 같이하며, 전국구에 관한 한 인맥을 공존·활용하려 한 흔적이 역력하다.
‘권력 안전판’으로서 전국구를 이용한 것은 박정희정권의 유정회 제도가 물론 정점을 이룬다. 이런 제도가 전두환씨의 5공 정권에서는 제1당에 전국구의 3분의 2를 나눠주고, 노태우씨의 6공 정권 13대 선거에서는 2분의 1 보장으로 가다가, 14대 선거를 앞두고 이른바 여당 프리미엄이라 불리는 ‘보장장치’가 제거돼 점차 개선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실제 그 내부운영에서는 여전히 구태를 물려받고 있음이 확연했다.
13대 국회의원선거를 앞두고 집권 민정당이 발표한 전국구후보 62명을 직능별로 분류해보면 ▲정계=윤길중 의원 등 25명(40.3%) ▲관계=강영훈 전 대사 등 6명(9.7%) ▲법조계=이병용 변호사 등 2명(3.2%) ▲학계=나창주 건국대 교수 등 3명(4.8%) ▲언론계=손주환 중앙일보 이사 등 2명(3.2%) ▲사회직능분야=김동인 노총 위원장 등 6명(9.7%) ▲군=이광노 전 수도군단장 등 3명(4.8%) ▲여성계=이윤자 소비자보호단체협의회장 등 6명(9.7%) ▲공공직능분야=박태준 포항제철 회장 등 5명(8.1%) 등 겉으로는 비교적 다양한 분포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그 실제 내면에 대한 분석은 다르다. 당시 관계자의 분석.
“13대 민정당 공천내용은 전국구 공천이 최고통수권자의 ‘친위부대’ 강화에 어느 정도로 이용됐는지를 한눈에 알 수 있는 것이었다. 당선자 38명 중 13대 대통령선거 때 노태우 대통령후보의 사조직인 월계수회에 깊숙이 관여했던 박철언(朴哲彦) 의원 등 월계수회 관계자 10여 명이 ‘당선 확실권’인 앞순위를 모두 차지한 것이 그 명백한 사례다. 이들은 그후 무난히 금배지를 달았고, 6공 최강의 권력핵심 집단이자 노태우 권력의 안전판인 월계수회 태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또 이때 여당의 전국구 공천이 직능대표성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반증은 의정활동 과정에 잘 드러난다. 5·6공 시절에도 노동·농민·학계 대표로 등원했다는 이 전국구의원들이 각 상임위에서 자신들이 속한 직능단체를 대변하기는커녕 행정부를 두둔하기 일쑤였고, 심지어 몸싸움과 날치기의 ‘전위부대’ 노릇을 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박정희 정권을 시작으로 전두환·노태우 군인정권기의 권력안전판으로서의 낙점식 전국구 운용행태는 이른바 ‘3김시대’에서도 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3김시대에 접어들어 전국구제도는 한국정치의 폐단을 더욱 깊게 했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현대정치 30여 년을 나름의 위력으로 재단해온 ‘3김’은 박정희식 정국운영을 비판하면서도, 그들 특유의 카리스마를 이용, 내막적으로는 박정권식의 전국구 운용폐습을 답습해 왔다는 지적이다.
정권 바뀌어도 전국구 놓치지 않은 이만섭
박정희시대와 3김시대에 걸친 ‘기형적 전국구 운용’의 증거로 정치학자들은 이만섭(李萬燮) 현 국회의장의 사례를 거론하기도 한다. 유권자의 뜻과 관계없이 개인적 이해관계에 따라 수시로 당적을 바꿔도 전국구 공천을 받기만 하면 국회의원이 되고 경력이 쌓이면 국회의장도 되는 현실이 전국구제도가 왜곡된 대표적 예라는 것이다. 이의장의 40년 정치생애와 전국구 의원생활에 대한 K대 정치학과 S교수의 심층 분석.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명에 따라 공화당 전국구의원에 발탁된 이만섭 의원의 정치생명은 살벌했던 전두환 정권 시절에도 끊어지지 않았다. 한때 혁명주체인 차지철보다 전국구 앞순위에 배정해주었다고 감읍했던 공화당을 떠나 집권 민정당의 ‘제3중대’로 불린 한국국민당으로 당적을 옮겨 국회의원직을 이어갔다.
노태우·김영삼·김대중으로 정권의 주인이 바뀌었지만, 그때마다 어김없이 전국구 공천을 받아 국회에 진출했다. 정권이 바뀌면 인적 청산이 뒤따르는 게 관례 아닌가. 그런데 이를 뛰어넘어 민자당 신한국당 새천년민주당 등 3대에 걸쳐 집권당의 전국구의원이 되고, 국회의장을 두 번이나 지냈다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명예가 될지 모르나, 자신이 몸담았던 정당에 등돌린 대가였다면 문제가 되지 않겠는가. 그런 이의장이 국회가 벼랑 끝 대치에 부딪힐 때마다, 눈물을 흘리면서 40년 정치인생의 명예와 양심을 들먹이는 것을 보면 오히려 측은해 보인다.”
김대중·김영삼 진영에 정통한 정치권 유력 소식통 K씨. 그는 지난 30여 년 가까이 양김씨 진영의 핵심에 접근해 있던 직업 정치인으로, 지금도 현역 지구당위원장으로 뛰고 있는 인물이다. 다음은 그의 실토.
“전국구제도의 활용에 불공정성과 독재성을 보여온 것은 3김씨도 비슷하다. 이른바 동교동·상도동계의 집사 노릇을 한 권노갑·홍인길 두 전의원이 한때 한보사건과 같은 정경유착 사건에 함께 휩쓸린 것은 이를 잘 말해준다. 양대 정치 인맥의 관리를 맡은 이들이 돈을 ‘독식’했다고 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 자금과 돈을 한손에 장악하고 인맥을 관리해온 ‘오너정당’에서 이들은 양김 보스정치의 ‘희생양’일 뿐이다.
전국구 공천장사는 그들이 오랫동안 답습해온 보스정치의 대표적 단면이다. 총선 때마다 공천헌금은 선거자금의 젖줄 구실을 했다. 1992년 실시된 14대 총선만 보더라도 당시 김영삼·김대중 진영은 자파의 전국구 후보를 공천하면서 낙점과정에 일부 인사를 제외하고, 1인당 평균 20억∼30억원의 ‘헌금’을 이른바 정치자금으로 받았던 것이 사실이다. 김종필씨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공천헌금을 내지 않은 전국구 후보는, 자파 세력확충을 위한 선전용 또는 간판급 인물들이다. 우리나라 보스정치는 일본을 빼닮았다. 일본에서 록히드, 사가와규빈, 리쿠르트사건 등 대형 정치자금 스캔들이 터지는 것도 보스정치, 계파정치 탓이다. 그러나 3김 시대의 실제 상황은 일본보다 더 노골적이고 음성적이며 독단적으로 진행되었다고 본다. 박대통령이나 3김 모두 전국구제도를 잘못 뿌리내리게 한 원인 제공자들이다.”
이어지는 세도정치의 악습
양상은 이른바 3김이 현실 권력의 명실상부한 축으로 부상하면서, 더욱 기승을 부렸다는 것이 일반적 진단이다. 앞서의 소식통 K위원장의 계속되는 전언.
“공천신청 공고를 내고, 신청을 받고 심사위를 구성해 심사를 벌이지만 이것은 요식절차에 불과했다. 최종 낙점권은 여야를 가리지 않고 당 수뇌부에서 행사하는 것이 3김시대의 정치 현실이었다.
때문에 선거철이 되면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싶은 사람은 당원이나 지역주민들에게 잘 보이기에 앞서 유력정치인의 집을 문지방이 닳도록 찾아다니며 ‘눈도장’을 찍어야 한다. 총선 때만 되면 연초부터 유력 정치인의 집이 어느 때보다 문전성시를 이루는 것도 이런 비민주적 공천제도와 무관하지 않다. 양김씨가 이른바 민주화의 화신처럼 국민 앞에 나섰지만, 실제 내부 정치행태는 이율배반적이었다.
낙점받기 위해서는 명성이 있는 자는 있는 자대로, 없는 자는 없는 자대로 막대한 헌금을 내거나, 충성을 맹세해야 했다. 3김씨 중심으로 치러진 각종 선거 때도 공천은 일반당원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일부 힘있는 측근 실세들의 뜻대로 결정되었다. 3김시대에도 금권 타락의 한국적 공천제도의 폐해가 가장 짙게 나타나는 것이 바로 전국구제도라 할 수 있다. 지역구의원은 당 지도부가 불합리한 공천을 하더라도 지역구민의 최종심판을 받는 보완장치가 마련돼 있지만, 전국구의원은 일정범위 안에만 들면 ‘공천이 곧 당선’으로 직결되기 때문에 파행이 심했다. 원래의 취지는 퇴색한 채 3김시대 역시 대한민국 세도정치의 악습이 더욱 지능적 형태로 지속되어 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김과 계파 보스들 간의 물밑 ‘전국구’확보 쟁투는 매우 치열했다. 자파 세력과 권력 교두보를 확충하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물고 물리는 전국구 확보 접전을 벌였는지, 그 정황은 곳곳에서 드러난다. 전 민자당 의원 C씨는 3당 통합에 따른 민자당 내분과정에서 있었던 사례를 소개했다.
“1990년 민정·민주·공화당 간의 3당 통합 후 박태준(朴泰俊) 최고위원과 허화평(許和平)씨 사이에는 ‘악연’이 있었다. 허화평씨는 5공화국 초 허삼수·허문도씨와 함께 소위 ‘스리허’로 불리던 실세였다. 잘 나가던 전두환 정권시절 허씨는 박최고위원을 12대 전국구 공천에서 탈락시켰다. 당시 신군부에게 정치자금을 주지 않았다는 이유 등으로 허씨가 박씨의 전국구 공천을 결사 반대했기 때문으로 안다.
그러나 6공이 들어서자 두 사람의 처지는 바뀌었다. 박태준씨는 집권당의 최고위원이었다. 허씨는 14대에서 민자당 공천을 받기 위해 박최고위원에게 접근했다. 물론 박최고위원은 냉정하게 거절했다. 대신 자신의 측근인 이진우 의원을 이 지역에 공천했다. 이번에는 허씨의 감정이 상했다. 허씨는 무소속으로 출마, 이진우씨를 물리치고 당선됐다. 총선과정에 허씨가 박최고위원을 비난한 것은 물론이었다. 허씨는 ‘박최고위원은 포항제철을 경영하면서 엄청난 축재를 했다’고 주장했다. 두 사람은 서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버린 것이다.
9월 하순에 접어들면서 민자당에 허씨가 입당한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이에 이진우 지구당위원장이 김윤환(金潤煥) 의원을 찾아가 ‘허씨는 그 동안 민자당과 박최고위원을 엄청나게 씹은 사람이오. 그런 사람을 어떻게 입당시킬 수 있느냐’며 따졌다고 한다.
이에 김의원은 ‘잘 알았다. 허의원이 박최고위원을 찾아가 사과하기 전에는 절대로 입당시키지 않을 것이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당시 민자당 대표로 민정계와의 당내 투쟁에 골몰하던 YS가 당시 계파갈등 과정에 탈당의사까지 보였던 박최고위원을 만류하기는커녕, 허의원의 입당을 일방적으로 발표해버리자 박최고위원의 불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박최고위원은 다음날 허의원의 입당식에 불참했음은 물론이다.”
전국구 공천을 둘러싼 갈등이 정치세력간의 치열한 다툼으로 번져갈 수도 있다는 것을 박태준 허화평 두 사람의 악연에서도 엿볼 수 있다.
3김이 현실정치권력을 행사하면서 전국구는 ‘친위 인맥 심기’보다는 공천헌금 명분의 정치자금조달 창구로 변해간다.
이른바 ‘정당 오너체제’가 굳어지면서 여야를 망라한 가신 및 측근실세를 중심으로 한 사당(私黨)화의 폐습이 여기저기서 고개를 내밀게 된 것이다. 다음은 김영삼 정권기의 선거제도 운용과 전횡에 관한 소식통 M씨의 증언.
“15대 국회의원 공천이 한창이던 지난 1996년 1월25일, 신한국당 의원총회에서 김윤환 대표가 ‘공천 희망자를 공모하겠다’고 밝혔다. 그러자 부산 출신 곽정출(郭正出) 의원이 ‘이미 다 결정해 놓고 무슨 공모냐, 쇼하지 말라’고 소리쳤다. 아니나 다를까, 그로부터 1주일 후인 2월2일 신한국당은 전국 253개 지역구 중 92%인 233개 지역구의 공천자 명단을 발표했다. 1월31일 오후 8시부터 다음날 오전 11시까지 서울시내 한 호텔에서 공천심사위를 열어 공천 후보자를 심사하고 2월2일 오후 당의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당무회의에서 공천자 명단을 확정한 것이다.
공천 희망자를 공모하겠다고 한 지 불과 1주일여 만에 명단을 발표하는, 초특급으로 진행된 공천에 탈락자들의 불만이 폭발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탈락자인 박제상 의원은 ‘200명이 넘는 후보자를 불과 몇 시간 만에 심사하는 공천심사가 애들 장난이 아니고 뭐냐’고 반발했다. 신한국당이 이처럼 속전속결로 심사를 끝낼 수 있었던 것은 당 총재인 김영삼 대통령이 이미 3개월 전부터 비선라인을 중심으로 공천자를 내정해 왔기 때문이다.
김대통령은 당시 공천 후보자를 직접 청와대로 부르거나 전화를 걸어 일일이 낙점했다. 이 과정에 참여한 사람은 핵심 측근인 강삼재(姜三載) 사무총장과 이원종(李源宗) 청와대 정무수석 정도였다. 그 뒤의 공천심사위원회나 당무회의는 모두 형식적인 통과의례에 불과했다. 여야를 막론하고 공천권을 장악한 정당 오너는 ‘황제’와 같은 권력을 누린다. 정당마다 ‘공천심사위에서 민주적 심의’ 운운하지만 실제로는 오너인 총재와 그 핵심 측근이 막후에서 낙점하는 게 현실이다. 공천권을 장악한 당 총재의 의중에 따라 국회의원 목숨은 살았다 죽었다 하는 ‘파리 목숨’이 되는 것이다.
지역구가 이러했으니 전국구 공천은 말할것도 없었다. 정당 오너의 손에 순번이 뒤바뀌고 사람이 교체되기 일쑤였다. 당시 국민회의도 사정은 비슷했다. 9명의 공천심사위가 구성됐지만 김대중 총재의 ‘대리인’으로 불리는 권노갑(權魯甲)씨가 심사위원으로 참여, 김총재의 의중에 따라 공천자를 결정했다. 공천에 목숨을 건 후보자들은 권의원에게 ‘줄’을 대려 난리였다. 공천심사위원들은 이를 피해 서울의 리베라호텔과 워커힐호텔로 옮겨다니다가 나중엔 서울 외곽인 기흥의 콘도까지 가서 작업 했다.
상위순번은 20억∼30억원
결국 ‘거점지역 물갈이’ 차원에서 호남 현역 의원 9명이 탈락했다. 이들은 ‘왜 하필이면 나냐’며 읍소도 하고 반발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탈락한 한 중진 의원은 ‘우린 파리 목숨이야’라며 자조했다. 선거 때마다 밀실 공천, 줄대기, 탈락자들의 반발과 잡음이 되풀이되는 것이 우리 정당의 현실이다. 모든 게 오너 한 사람이 결정하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또 다른 증언. 1996년 4월 총선에서 국민회의 전국구 후보로 당선된 한 의원의 말이다.
“전국구로 국회에 들어오고 보니 동교동계 일부 가신 의원들의 눈초리가 매섭더라. 어떤 사람은 노골적으로 ‘당신은 공천 헌금 한푼 내지 않고 금배지를 달았으니 당을 위해 더욱 몸을 바쳐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더라. 가신 출신 의원들을 만날 때마다 어찌할 바를 몰라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양김씨와는 다르지만 이회창(李會昌) 한나라당 총재에게도 그런 측근이 있다. 이총재가 3김 정치 청산을 외치자, 당내에서는 ‘이총재도 3김처럼 측근 중심으로만 움직여 당을 사당화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는 것이 현실이다.”
3김 시대의 전국구를 둘러싼 공천헌금 폐단은 13대 총선 때 제1야당으로 부상한 평민당의 전국구 공천이 선명한 사례로 꼽힐 수 있다. 이에 관련된 한 정치권 소식통의 증언내용.
“당시 평민당은 재야에서 영입한 박영숙 총재권한대행을 전국구 1번으로 내세우고 김대중 문동환 최영근 조승형 후보가 11번부터 14번까지 포진했다. 이때 2번부터 10번까지가 공천헌금을 내고 전국구 후보자리를 따낸 케이스다. 당시 2번부터 5, 6번까지의 상위순번은 평균 20억원의 헌금을 냈다. 14번까지를 당선권으로 보았기 때문에 15번과 16번을 받은 당료출신의 정기영·조희철 의원은 공천헌금을 내지 않고 원내 진출에 성공하는 행운을 누리기도 했다.
13대 때 제2, 제3야당이 된 통일민주당과 공화당의 전국구 공천 및 헌금액수 도 평민당의 경우와 비슷했고, 그 이전의 야당들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지금까지 야당은 사실상 전국구를 팔아 마련한 자금으로 선거를 치르다시피 해왔기 때문에 당 총재나 대표 또는 계파보스가 측근을 배려할 경우에도 다른 후보와의 형평을 고려, 공천헌금을 일부 대납해주거나 ‘성의’를 표시하도록 하는 방법을 썼다. 3김씨 주도의 정당들에서 전국구 운영실상의 치부를 극명하게 노출시킨 사건들이 한국 정치사에서 줄이어 터져나온 것은 이와같은 왜곡된 정치풍토를 대변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물론 야당의 경우 이에 대해 “전국구 공천 순위를 헌금 액수에 따라 결정하는 것은 정치자금의 99% 이상이 집권여당에 몰리는 현실에서 돈 없는 유능한 후보를 지원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불가피하다”는 점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관행이 정치불신 풍조를 더욱 조장해왔을 뿐 아니라 공천과 관련해 금품을 수수할 수 없게 한 정치자금법을 명백히 위반했다는 점에서 정치권 한편에서는 오래 전부터 전국구제도를 비롯한 정치관계법의 일대 혁신을 요구했다.
16대 국회에 들어서도, 비례대표로 발탁된 전국구의원의 국회 내 위상은 여전히 문제를 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예비역 육군소장으로 재향군인회장을 지낸 민주당 장태완(張泰玩) 의원은 금융감독원을 주된 소관기관으로 하는 정무위원회에 배치돼 있다. 직능대표성과 특정분야의 전문가 발탁이라는 명분으로 비례대표 의원이 됐지만, 실제 의정활동에선 엉뚱한 상임위에 배정됐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또 국회 안의 내부적인 차별도 문제다. 비례대표 출신으로 비교적 전문성을 잘 활용하고 있다고 평가받는 한나라당 김홍신(金洪信) 의원은 “국회 본회의의 대정부 질문, 당내 발언권, 당직배려 등에서 전국구 의원이 차별을 받고 있다”고 밝혔다. 재력 있는 비례대표 의원의 경우 등원 이후에도 당이나 실력자들로부터 직·간접적인 ‘재정적 기여’를 요구받고 있는 게 현실이다.
공천헌금과 함께 이들을 ‘봉’으로 여기는 이러한 인식도 정치권 안에서 비례대표 의원들의 이미지와 위상을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현역 전국구의원들이 인정하는 대목이다. 이들 전국구의원들은 향후 개선책으로 ‘비례대표제 폐지’보다 ‘1인2표제 도입’을 압도적으로 선호하고 있다. 그들은 “1인2표제를 통해 비례대표 의원들이 유권자로부터 직접 선택받게 되면 고질적인 차별대우와 공천헌금 등의 폐습이 줄어들 것으로 본다”고 밝히고 있다. 그렇지만, 역시 ‘칼자루’는 여야 정당의 최고권력자가 쥐고 있는 것이 엄연한 한국정치판의 생리다.
어느 전국구의원의 고백
상황이 이러한데도, 헌법재판소가 나서기 전까지 여전히 ‘전(錢)국구’ 악습이 고쳐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전문가들은 이를 수요와 공급의 원리에서 찾는다. 즉 전국구제도의 개혁을 아무리 외쳐도, 돈을 주고서라도 ‘금배지’를 달겠다는 수요층이 공급을 초과하여 끝없이 몰리고 있기 때문이란 진단이다.
헌법재판소의 위헌판결이 있은 후 제기된 한 전직 전국구의원(15대)의 허심탄회한 고백을 인용해 본다. 그의 고백은 우리 정치사회의 전국구가 왜 매관매직의 ‘전(錢)국구’가 될 수밖에 없는지, 그 배경과 냉정한 현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나는 원래 건설업자 출신이다. 당선 안정권의 번호를 받는 조건으로 당에 돈을 냈다. 30억원이 넘는 거액이었다. 이른바 ‘공천헌금’이다. 공천을 대가로 한 헌금은 위법이라고 해서 요즘엔 특별당비란 이름으로 바뀌었다. 당시만 해도 주변사람들은 나를 힐책했다. ‘배운 게 모자라고 돈은 많으니, 돈으로 벼슬풀이를 하나 보다’하는 눈초리였다. 그러나 내 계산은 달랐다. 충분히 수지가 맞는 장사라고 보았던 것이다. 우선 10억원 이상을 확실히 되돌려 받을 수 있다는 게 나의 셈방식이었다. 따져보니 틀리지 않았다. 16대 국회의원의 경우 달마다 750만원 가량의 세비를 받는다. 나의 세비는 연평균 7000만원이 넘는다. 4년을 모으면 3억원이 된다. 보좌진 인건비도 나온다. 의원 1명당 4급 2명, 5,6,7,9급 각 1명씩 모두 6명의 보좌인력을 쓸 수 있다. 이들의 급여 합계는 연간 2억원 가까이 된다. 운전기사, 여직원을 포함해 보좌진을 전부 내가 운영하는 건설회사 직원으로 채웠다. 그 동안 내 주머니에서 나가던 월급을 국회가 내도록 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나는 4년간 인건비 8억원 이상을 챙겼다.
후원회도 중요한 환급수단이다. 의원 한 명이 연간 3억원까지, 4년이면 12억원을 합법적으로 모금할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되어 있다. 정치적 영향력이나 인맥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어쨌든 나는 열심히 노력했다.
물론 ‘플러스 알파’도 있었다. 국정감사 때나 상임위에서 중요 현안을 다룰라치면 소관기관이나 관련업계에서 나를 찾아왔다. 이들은 ‘살살 다뤄달라’며 봉투를 놓고 갔다. 수시로 의원외교란 이름으로 해외여행을 가는 보너스도 있었다. 출장비 나오고 장관급 예우를 받아 공항 귀빈실을 이용하며 현지 주재 공관원들을 몸종 부리듯 할 수 있었다. 국회 상임위에서 책상 쳐가며 장·차관을 꾸짖는 것만큼 스트레스 풀기에 좋은 방법도 없다.
하지만 나는 주판알을 다른 곳에서 튀기고 있었다. 바로 법안과 예산심의였다. 내가 건설교통위나 예결위에서 건설 관련 법규와 예산을 다루면서 ‘조금만’ 방향을 바꾸면 내 건설업체에 적지 않은 이익이 굴러떨어졌다. 후원금이나 세비가 문제가 아닐 정도로 규모가 컸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다. 어떤 동료의원은 교육위원회에서 학교정원과 관련한 규정 등을 손보면서 자신이 경영해온 사학(私學)을 무럭무럭 키워갔다.”
이 전직 의원은 정권교체기의 혼란 속에서 ‘줄을 놓쳐’ 재선에 실패했고, 17대 총선에 다시 여의도에 입성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그의 이어지는 고백은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제17대 총선에서는 확실한 배팅으로 반드시 여의도 의사당에 들어가겠다는 것이 나의 다짐이다. 여당이건 야당이건, 큰 당이건 작은 당이건 가리지 않을 생각이다. 당연히 정책이나 노선은 솔직히 나의 관심 밖이다.
이런 나의 신경을 긁는 소식이 최근 들려오고 있다. 헌법재판소가 1인1표로 지역구의원과 비례의원을 결정토록 한 현재 방식은 위헌이라면서 비례대표 공천의 비민주성도 문제 삼았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밀실에서 돈 받고 공천하면 안 된다는 얘기’라는 설명에 나는 긴장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나는 선거법 개정을 여야 정치인들이 맡는다는 소식에 안심했다. 현재의 정치권도 그들의 이해를 충족시키는 범위 안에서 새 제도의 협상을 할 것이다. 그들은 분명히 내가 금배지를 달 수 있는 길을 다시 열어놓을 것이다.
나는 17대 국회에 반드시 나타난다. 한국 검찰이 공천헌금과 정치자금 수사를 어디 제대로 한 일이 있는가. 검찰이 권력의 울타리 안에서 노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한국정치와 권력의 속성은 정말 어쩔 수 없다.”
또 한 차례 수술의 기회는 다가오고 있다. 헌법재판소의 위헌 판결이 시작이다. 이번에는 여야 수뇌가 당리당략을 떠나 얼마만큼 정치 발전의 건실한 디딤돌을 놓을 수 있을 것인지에 국민의 눈길이 쏠리고 있다.
헌재는 특히 이번 판결에서 비례대표 결정과정의 비민주성을 강조해 고질적인 측근공천, 돈공천의 폐단도 수술해야 할 형편임을 공개적으로 경고했다. 법을 고칠 수밖에 없다. 여야 협상은 초읽기에 몰리고 있다. 여야 모두가 치열한 계산법에 분주할 것이다. 대한민국 의정사를 얼룩지게 한 ‘전국구제도’가 또 한 차례 역사적 시험대 위에 오른 셈이다. 구한말의 역사는 오늘도 이를 지켜보고 있다.
< 전국구제도의 연혁과 변천 - 거듭된 개정, 퇴색하는 취지 >
전국구 국회의원선출제도는 득표비율에 따라 의석을 배분하는 비례대표제의 한 종류. 이 선거구에서 선출된 의원을 전국선거구 비례대표 국회의원(전국구 국회의원)이라 하고, 이에 대립되는 선거구를 지역선거구라 하며, 여기서 선출된 의원을 지역선거구 국회의원(지역구 국회의원)이라 한다.
1994년부터 발효된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은 선거구를 지역선거구와 전국선거구 2종으로 나누고, 국회의원 정수를 전국구 국회의원과 지역구 국회의원을 합하여 273인으로 하고 있다(20 ·21조).
일반적으로 전국선거구는 국가 전체를 1선거구로 하기 때문에 전국에 걸친 지지기반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고급관료·노동조합간부·업계대표 등과 같이 전국적으로 지명도가 높은 사람에게 유리하다. 따라서 전국선거구에는 직능대표적 요소가 짙다.
그러나 현재 전국구 국회의원의 의석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지역구 국회의원의 총선거에서 5석 이상의 의석을 확보했거나 유효투표 총수의 100분의 5 이상을 득표한 각 정당에게 지역구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얻은 득표비율에 따라 배분한다.
전국구 당선자는 미리 제출된 정당별 전국구 국회의원 후보자명부에 기재된 순서에 따라 각 정당별로 배분된 의석만큼 확정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다만, 지역구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유효투표총수의 100분의 3 이상 100분의 5 미만을 득표한 각 정당에 대하여는 비례대표 국회의원 의석 1석씩 배분한다.
우리나라에 전국구제도가 처음 도입된 것은 5·16 직후인 1962년 11월 제5차 헌법개정 때. 그러나 이 제도는 영욕으로 점철된 한국헌정사와 함께 비례대표의 성격과 규모를 둘러싸고, 거듭 수술대 위에 오르는 수난을 당해야 했다. 출범 초기엔 기존 다수대표제에 비례대표제를 추가하면서 6대와 7대 국회의원 175명 가운데 44명이 전국구로 당선됐다. 8대 때는 의원정수 204명 중 전국구가 51명을 차지했다.
유신헌법에 의한 9대 국회 때는 유정회라는 기묘한 형태로 변질된다. 의원정수 219명의 3분의 1인 73명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하되 후보자는 대통령이 일괄 추천했다. 임기 3년(지역구는 6년)인 유정회 후보자에 대한 당시 통일주체국민회의의 찬성률은 물론 99%를 넘었다. 유정회는 10대 때까지 3차례 구성됐다.
이어 5공화국의 11대·12대국회 전국구 의원 수는 유정회 때와 같이 지역구의원 수(184명)의 절반인 92명이었다. 13대 들어 전국구의원 수는 지역구의원(224명)의 3분의 1 수준인 75명으로 줄었고, 2000년 2월 관계법 개정에 따라 현행 16대 국회에서는 전체 273석 가운데 전국구는 12.5%인 46석을 차지하고 있다.
한국 정치에서 ‘전국구’로 일컬어지는 비례대표 국회의원제는 1891∼1892년 스위스의 일부 칸톤(현) 의회에서 채택된 이후, 이탈리아 스웨덴 핀란드 덴마크 벨기에 등 주로 서구에서 실시하고 있다. 비례대표제는 학술적으로는 300여 가지나 되고 실제로 의석 배분방법은 나라마다 천차만별이다.
6대 국회부터 실시된 우리의 비례대표제는 각당의 당선자 수에 비례하여 의석을 추가하는 단순 혼합방식. 비례제는 원래 소수당에도 의회진출의 기회를 주고 사표(死票)를 방지, 표의 가치를 극대화하려는 취지에서 나온 것이지만, 우리의 경우는 그 의미가 퇴색된 지 오래다.
입력 2005-03-22 16:18: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