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심사로 옥석(玉石)을 구분하여 억울한 피해자를 위한 진정한 추념을 해야…
제주4·3사건을 한마디로 정의하거나 규정하기엔 너무나 엄청난 사건이다. 그러나 "4·3사건은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중앙당과 남로당 전남道당의 지령을 받은 남로당 제주島당 공산주의자들이 대한민국 건국을 저지하고 북한 김일성 정권의 노선에 따라 공산 통일을 위하여 일으킨 폭동·반란으로서, 1957년 4월 2일 사건을 완전히 종결할 때까지 만 9년간 이를 진압하고 교전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도민이 무고하게 희생된 사건이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요약하면 첫째, 남로당이 대한민국 건국을 저지하여 공산 통일을 위한 폭동·반란이고, 둘째, 진압과 교전 과정에서 선량한 도민 다수가 무고하게 희생된 사건이다. (前 제주경찰서장 김영중 著 「제주4·3사건 문과 답」 30쪽)
역사가 존재의 기록이라면 사실과 허위는 구별되어야 한다. 로마 시대 정치가 키케로는 “歷史家의 제1계명은 결코 거짓을 적어서도, 편견과 아집이 가미되어서도 안 된다”라고 했다. 그런데 좌익에 불리한 사실들이 너무 많기 때문일까. 첫째, 4·3사건을 ‘최초의 통일운동’ 시각에서 접근한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정부보고서). 둘째, 부적격 4·3폭동을 주동한 남로당 수괴급들이 희생자로 등재. 셋째, 공산 폭동을 미화시키는 제주 4·3 평화기념관. 넷째, 공산 폭동을 민중항쟁으로 규정한 제주 4·3특별법 개정안 등 크게 4대 쟁점 사항이 문제가 되고 있다. 독일의 역사가 레오폴트 폰 랑케도 “있었던 그대로의 과거를 밝혀내는 것이 歷史家의 사명”이라고 하여 객관적 사실을 강조했다.
헌법재판소(주심 송인준)는 2001년 9월 27일 예비역 장성 모임인 성우회 등이 낸 ‘제주4·3사건 특별법’ 위헌 심판에서 ‘각하’ 결정을 내렸다. 다만 이 심판 결정문에서 4·3사건 희생자 심의 대상에서 제외되어야 할 대상을 명시하고 있다. 그 대상으로 첫째, 수괴급 공산 무장병력 지휘관 또는 중간 간부. 둘째, 4·3사건 발발의 책임이 있는 남로당 제주도당의 핵심 간부. 셋째, 무장 유격대와 협력하여 진압 군경과 동인들의 가족, 제헌 선거 관여자 등을 살해한 자. 넷째, 경찰 등의 가옥과 경찰관서 등 공공시설에 대한 방화 등 폭동 행위에 적극 가담한 자. 다섯째, 기타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와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심각한 훼손을 초래한 자 등이라고 제외 대상을 명문화하고 있다.
어쨌든 4·3사건의 명암은 분명히 존재한다. 폭동·반란을 진압할 당시 군경의 과잉 진압도 그 연장선에 있다. 역대 정부는 본질이 훼손되지 않은 범위에서 화해와 상생을 위한 특별법 제정, 진상조사보고서 발간, 대통령 공식 사과, 평화공원 조성, 추념일 지정 등 진정성을 보였다. 따라서 대량 피해자 발생의 직접 원인은 남로당에 의해 일어났으므로 관련 누군가 공식 인정하고 사과해야 한다. 김대중 대통령도 CNN방송(1998.11.23.)에서 “4·3은 공산 폭동으로 발생…” 주장했다. 친일파를 독립유공자로 둔갑시키면 안 되듯 4·3사건 폭도·반란자를 피해자로 둔갑시키는 것은 ‘역사 만행’이다. A급 전범 합사 야스쿠니 신사참배는 안 되고, 4·3사건 남로당 수괴급 참배는 된다는 말인가.
올해로 4·3사건이 발발한 지 76년이다. 4·3의 완전한 해결은 말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 앞에서 화해와 상생을 강요하고 뒤에서는 정당, 단체, 교육, 언론기관 등을 이용하여 ‘좌편향 성역화’하고 있다. 이런 이중적 해법으로는 요원할 뿐이다. 여전히 4·3평화공원 위패봉안실과 추모비에는 무고한 민간인 피해자와 이 사건의 주동자인 남로당 제주도당 핵심 간부, 제주 인민해방군사령관, 인민군사단장, 남파간첩 등을 함께 봉안·추모하고 있다. 언어도단이다. 부적격 피해자 재심사로 옥석(玉石)을 구분하여 억울한 피해자를 위한 진정한 추념을 해야 한다. 냉전시대 이데올로기의 마지막 희생양이 된 무고한 민간인 피해자의 명예 회복을 위해서 4·3사건은 반드시 정립(正立)되어야 한다. (끝)
작성자 : 오을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