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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마음, 물질과 사람이 서로 다름을 알 수 있는 슬기를 어떻게 갖출까요?
물질과 틀리는 물건을 알면 ‘이것은 계집이다.’ ‘아름다운 계집’, ‘내가 바라는 계집’으로 아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어둠(모름), 바람(탐냄), 달라붙음, 업이 됩니다.(될 겁니다.)
이런 것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사람과 마음.물질이) 서로 다름을 알아 슬기로 아는 것이 빠린냐, 빠린네야입니다.
바람(탐냄)과 달라붙음을 쫓아내고(쫓겨났음을) 슬기로 아는 것이 빠하타바입니다. 참은 바람(탐냄)과 달라붙음을 쫓아내야 알아집니다.
우빠다루빠(달라붙는 물질)를 루빠(물질)로 아십시오.
‘이것이 물질이다.’하고 알아차리세요. 물질을 알면 괴로움이 없어질 겁니다. 말미남(빠띳짜 사뭇빠다)이 이어지지 않을 겁니다.
모름(어둠, 아윗짜)이 없으면 상카라가 없을 것입니다. 상카라가 없으면 다섯더미를 일으킬 윈냐나(다시 태어나는 앎)가 없을 겁니다.
윈냐나가 없으면 괴로움(우빠다나칸다)이 없을 것입니다.
괴로움이 없으면 니로다 담마, 고요함이 있을 것입니다.
이 고요한 요소 빠라마타가 이어지고 한결같아 지면 이것이 괴로움이 없어지는 거룩한 참, 닙바나를 얻는 것입니다.
닙바나 나타남은 자취없는 나타남(아니미따 빠쭈빠타남)입니다. 닙바나는 아무 자취가 없습니다.(아니미타) 루빠를 ‘나’, ‘남’, ‘사내’, ‘계집’으로 생각함은 큰 니미따 알아봄입니다. ‘얼굴’, ‘머리’, ‘허리’, ‘발’, ‘손’으로 생각함은 작은 니미따 알아봄입니다. 붓다는 이 둘, 큰 니미따 작은 니미따들에 달라붙어서는 안된다고 말합니다.
물질은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루빠(물질)를 제대로 알아차리지 않으면 탐냄, 달라붙음, 업이 일어날겁니다. ‘나’, ‘남’, ‘사내’, ‘계집’으로 보면 탐냄, 미움, 어리석음이 일어날 겁니다. 이것이 붓다가 인드리아 삼바라실라(느낌문지키기)에서 말한 것입니다.
물질을 그저 물질로 아세요. 그것을 ‘나’, ‘남’, ‘사내’, ‘계집’으로 보지 마세요. 그것을 ‘안 있음’(존재아님)으로 보세요.
그 때에만 ‘사내’, ‘계집’으로 보는 안 밝음(어둠, 모름)이 없어질 겁니다. 안 밝음(어둠, 모름)에 따라 상카라(마음지음)가 일어납니다.
상카라에 따라 앎이 일어나고, 마음, 물질과 다섯더미가 일어날 겁니다. 다섯더미에서 여섯느낌문은 안에 있는 느낌바탕입니다. 그것들도 여섯느낌문(살라야따나)이라고 합니다.
느낌대상들(아라마나)은 여섯 바깥느낌바탕이라 합니다.
상카라는 안 팎 느낌바탕이 닿게(파사)합니다. 그러면 여섯느낌문(Salayatana) 닿음(파사), 느낌(웨다나), 바람(딴하), 달라붙음(우빠다나), 달라붙는 무더기(우빠다나칸다)가 있을 겁니다. 그러면 괴로움참(둑카사짜)이 있을 겁니다. 어둠(안밝음, 모름, 아윗짜)이 없을 때만 달라붙음이 없을 것이고, 고요함이 있을 겁니다.
들을 때에도 소리는 물질입니다. ‘이것이 물질이다’하고 알아차리세요.
물질을 알아차리지 않으면 물질너머로 갈 게고, 생각이 ‘(그가) 이렇게 말하고 있어’, ‘(그는) 나한테 이렇게 하라는군’, ‘(그가) 나에게 창피를 주고 있어’라며 일어날 겁니다. 잘못보면 바람이 일어날 것이고, 그러면 ‘(나는) 그걸 좋아해’, ‘(나는) 그걸 싫어해’, 따위로 (생각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면 바람/달라붙음, 미움, 어리석음(딴하, 도사, 아윗짜)가 일어날 겁니다. 말미남(빠띳짜 사뭅빠다)이 이어지지 않도록, 바람, 달라붙음, 깜마(업)가 일어나지 않도록 ‘이것이 소리이다’로 들리는 물질을 알아차리세요.
끝참물질(빠라마따루빠)을 어떻게 알아차리는지를 알 때 아니미따 닙바나(자취나 꼴이 없는 닙바나), 일어나고 사라짐(아니짜)이 없는 닙바나를 얻을 겁니다.
볼거리(루빠라마나)를 볼 때, 그것이 달라붙는 물질이므로 ‘이것이 물질이다’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루빠라마나(볼거리)는 큰요소(마하부따)에 따릅니다. 큰 요소물질(마하부따루빠) 없이 볼거리가 있을 수 없습니다.
빛이 없으면, 불을 끄면 대상물질을 볼 수 없습니다. 빛이 있을 때만 봄이 있을 수 있습니다. 보이는 것은 물질인 볼거리입니다.
볼거리 우빠다루빠를 다시 말해 ‘희다’, ‘붉다’, ‘풀빛이다’ 따위로 알아차리지 않을 때 ‘사내’, ‘계집’, ‘남’ 따위로 볼 것입니다. 그러면 꼴이나 모습인 빤냣띠를 보게 될겁니다. 빠라마따루빠(끝참물질)를 알도록 붓다는 물질너머로 알아차려서는 안된다고 말합니다.
눈으로 보는 건 다 물질임을 아세요. 왜? 눈은 낯설 으니까요.
아비담마성질은 참 낯설어요. (대상을) 볼 때 만져보세요.
보이는 건 만질 수 없어라.
만져지는 건 ‘나’, ‘남’, ‘사내’, ‘계집’, ‘있음(존재)’으로 생각되어요.
눈은 슬기가 높지 않은 이들을 속이고 어쩔 줄 모르게 하지요.
알 수 없는(깊어서)게 눈이라요.
아주 옛날 슬기로운 분이 이걸 말했죠.
볼거리 물질은 만질 수 없어요.
만질 수 있는 건 단단하고 부드러운 성질을 가지 땅 요소입니다.
만질 수 있는 것은 뜨겁고 차가운 불요소입니다.
만질 수 있는 것은 밀고 움직이는 공기요소입니다.
앎이 높지 않은 사람들은 큰 요소를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한 계집’, ‘한 사내’를 만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물질에 속고 속이는 눈에 속습니다.
눈과 볼거리가 만나면 우빠다루빠(달라붙는 물질)가 일어납니다.
먹을 때, 마실 때, 닿을 때, 생각할 때, 아직도 우빠다루빠입니다.
아직 달라붙는 더미에서 오는 괴로움(우빠다나 칸다 둑카)은 아닙니다.
바람과 달라붙음이 있을 때만 ‘할일’, ‘갈곳’, ‘말할 것’이 있게 될 겁니다.
우빠다나가 일어날 때, 바람과 달라붙음과 업도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나서 달라붙는 더미(우빠다나 칸다)가 있을 것입니다.
(다섯더미를) ‘나’라고 생각하는 잘못 봄(디티)이 있을 때만 달라붙는 더미에서 오는 괴로움(우빠다나 칸다 둑카)입니다. 곧, (대상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바람(딴하)이 있을 때 우빠다나 칸다 둑카입니다. 달라붙음(우빠다나)이 있을 때 달라붙는 더미(우빠다나칸다)입니다. 그러면 우빠다루빠(달라붙는 물질)와 우빠다나칸다(달라붙는 더미)가 다름을 알 것입니다.
더미마디(칸다빳방)는 다섯더미 알아차림입니다.
네 가지 마음현상을 알아차리기 앞서 물질(루빠)을 알아차릴 때, 빠라마따(끝참)를 알아야 합니다.
루빠는 담마(자연)입니다.
그러면 담마누빠사나는 루빠빠라마따(물질끝참) 알아차림입니다. 빠라마따를 알아차리지 않으면 주의가 빤냣띠에 있을 것이고 그래서 삼요자나(달라붙음/굴레)가 될 겁니다.
빤냣띠를 알아보면, 바람, 달라붙음, 깜마(업)가 뒤따릅니다.
(죽고 다시 태어나는) 거듭나기바퀴가 굴러갈 겁니다. 끝참물질(빠라마따루빵)을 알아차리면 슬기(냐냐)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도 위빠사나(안 보기)입니다. 슬기(냐냐)로 알아차릴 때만 위빠사나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마디(마음 모음)와 사마타(고요함 닦기)가 될 뿐입니다.
빤냣띠(개념)로 바라봄은 마음모음(사마디)을 기릅니다.
닙바나는 빤냣띠로 주의를 보내지 않는 슬기로 얻어지게 됩니다.
빤냣띠로 주의가 가서 빠라마따를 알아차리지 않으면 달라붙는 더미(우빠다나칸다)가 될 것이고, 괴로움(라는)참이 그 열매가 됩니다.
(대상들을) 루빠로 알아보지 않고 ‘나’, ‘남’, ‘사내’, ‘계집’ 같이 있음(존재)으로 알아보면 (세속)앎이 일어날 겁니다.
바람, 미움, 어리석음이 있게 될 겁니다.
물질(루빠)을 알면 빠라마따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물질로 알지 않고 ‘나’, ‘남’, ‘사내’, ‘계집’ 처럼 있음(존재)으로 알아보는 것이 빤냣띠입니다. 빤냣띠와 빠라마따가 다름을 헤아려 알아야 합니다. 이 빠라마따 앎을 기르면 바라고 달라붙어 업을 짓는 사무다야(괴로움말미)는 끝나고, 닙비나를 얻을 것입니다.
보는 것이 빤냣띠일 뿐인 있음(존재)에 있어서는 안됩니다.
봄이 빤냣띠가 없고 우빠다나가 없는 담마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물질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물질을 알면 빠라마따 슬기가 길러집니다. 그것이 담마누빠사나입니다.
그것이 ‘봄에는 봄만 있다(디테디타마땅)’입니다.
모르고 보면 또 빤냣띠로 보면 달라붙음이 일어납니다.
끝내 괴로움을 갖고 오는 달라붙는 더미(우빠다나 칸다)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닙바나로 이끌어 줄 담마가 되지 않을 겁니다. 아픔이 있을 때 닿음은 몸 느낌에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아파’, ‘다리가 아파’, ‘손이 아파’, ‘배가 아파’라고 생각하면 그러면 달라붙는 더미 곧 괴로움참(우빠다나 칸다 둑카사짜)인 빤냣띠가 아픈게 됩니다.
물질을 알면 바뀜(아니짜)과 일어나고 사라짐을 압니다. 상카타빠라마따는 일어나고 사라지는 성질이 있습니다.
물질을 알 때 슬기가 됩니다. 슬기는 어리석음(모름, 모하)이 없을 때만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밝음없이(아윗자) 아는 것, 어리석게(모하) 아는 것, 나, 남, 사내, 계집 처럼 있음(존재)으로 아는 것, 이 모든 어리석음을 일으키는 것들을 비켜가야 합니다.
앎이 밝지 않아서가 아니고, 어리석어서가 아닐 때, 빠라마따를 알 때, 슬기로 아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물질이다. 이것이 물질이 일어나는 말미(참)이다. 이것이 물질이 없어지는 말미다.
이와 같이 알아차려야 합니다.
어둠(안 밝음, 모름), 바람, 달라붙음 없음이 물질이 없어지는 말미(까닭)입니다. 보이고, 들리고, 냄새맡고, 맛보고, 닿는 것이 무엇이든 ‘이것은 물질(루빠)이다’하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앉아 있건, 일어나건, 서 있건, 걸어가건, 먹고 있건, 자고 있건, 깨어나서 잠들때까지 ‘이것이 물질(루빠)이다’하고 알아차리세요.
‘나’라는 생각이 들어오게 하지 마세요.
그러면 이것이 빠라마따 슬기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물질이다’하고 알아차리는 동안은 ‘나’, ‘남’, ‘사내’, ‘계집’이라는 개념은 들어오지 않을 겁니다. 있음(존재)이라고 알아보지 않으면 바람, 달라붙음은 없을 것이고 업을 짓지 않을 겁니다.
슬기가 있을 겁니다. 그러면 안 밝은 앎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아윗자 니로다 아사와 니로도(안 밝음이 없으니, 마음더럼이 없어지네) 아사와는 바람(탐냄), 잘못 봄, 어둠(로바, 디티, 모하)으로 이뤄진 안 밝음(모름)입니다. 있음(존재)으로 보면 아윗자사와 (안 밝은 마음더럼)입니다. ‘이것이 물질이다’라고 알아차릴때만 바로 봄(삼마디티)이 됩니다.
아사와에는 네가지가 있습니다.
1)까마사와 : 느낌을 즐기고 싶은(인박힘이 이어짐)
2)바와사와 : 생겨남
3)디티사와 : 잘못 봄
4)아윗자사와 : 안 밝음(모름, 어둠)
첫 세 더럼(아사와)이 일어나면, 넷째 더럼 아윗자사와가 일어납니다.
안 밝음(아윗자)를 쫓아내면, 슬기가 일어납니다. (윗자 우다빠디) 안 밝음(아윗자)이 없을 때 바른 생각(삼마 상까포)이 되고, 바로 봄(삼마 디티)이 됩니다. 붓다는 (우리에게) 루빠(물질)를 알기를 바랍니다.
루빠를 알아차릴 때, 아나따락카나 숫따(나없음 성질 가르침)를 압니다.
눈이 보는 것은 빠라마따(끝참)입니다.
귀가 듣는 것은 빠라마따(끝참)입니다.
코가 냄새 맡는 것은 빠라마따(끝참)입니다.
루빠(물질)를 알아 볼 때만 마음더럼을 뿌리 뽑습니다.
로끼야 빠라마따(세속 참)를 볼 때만, 로꿋따라 빠라마따(세속을 떠난 참)를 봅니다. 슬기는 물질이 일어남을 압니다.
슬기는 들리는 소리를 압니다. 곧 슬기로 아는 것이 빠라마따입니다.
끝 참(빠라마따)은 슬기로만 알아 봅니다. 그것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물질은 금세공사가 금을 아는 것 처럼 알아야 합니다.
어린아이는 금을 노랗다고 압니다.
어른은 금이라고 압니다.
금세공사는 금과 금 함유량, 금순도를 압니다.
붓다 때에 ‘이것이 물질이다.’하고 아는 동안에 닙바나를 얻은 분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괴로움참(둑카사짜), 바라고 달라붙는 괴로움일어남 참(사무다야 사짜)이 되게 이어지지(나아가지) 못했고, 그래서 깜마(업)이 일어날 수 없었지요.
그러기는 커녕 괴로움없음참(괴로움이 없어지는참)(니로다 사짜) 쪽으로 가서 니로다사짜가 일어났고, 그래서 닙바나를 얻었습니다.
물질을 알아차리는 것은 몸을 알아차리는 것(까야누빠사나)이 아닙니다.
그것은 칸다빳방(무더기 마디)이라 불린 담마 알아차림(담마누빠사나)입니다. 이띠루빵(이건 몬(=물질)이야) 이띠 루빠사 사무다요(이건 몬(=물질)이 일어나는 말미야, 이것이 담마야) 하고 붓다가 알아차렸죠.
물질(몸)이 있을 때 병이 있습니다. 닙바나에는 병이 없습니다.
알아차리는 동안 볼거리(보는 대상)로 알아차려서는 안됩니다. 물질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띠루빵(이것이 물질이다) 에타깡 루빵(물질일 뿐이다. 물질만이다) 물질 너머로 가면 안됩니다.
(대상을) ‘나’, ‘남’, ‘사내’, ‘계집’으로 알아보면, 거듭 태어남이 이어집니다.
괴로움 참(둑카사짜)이 있을 겁니다.
눈이 볼 때 ‘이건 물질이야’하고 알아차리세요.
귀가 들을 때 ‘이건 물질이야’하고 알아차리세요.
냄새 맡고, 먹고, 살고, 가고, 모든 것이 ‘이건 물질이야’하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루빤짜 빠자나띠 (물질인 줄 아세요), 그러면 어리석음이 없을 것이고 안 밝음(모름)이 없을 것입니다. 아윗자 니로다 아사와 니로도 닙바낭 (안 밝음이 없어지니, 마음더럼이 없어지고, 마음더럼이 없어지니, 닙바나네요)
언제나 ‘이건 물질이야’라고 말해서 바로 보도록(삼마디티) (스스로를) 일깨우세요. (스스로를) 일깨움은 바른 생각(삼마상까포)을 일어나게 합니다. 바른힘씀, 바른 알아차림, 바른 고요함(삼마 와야모, 삼마사띠, 삼마사마디)과 하나가 되어 다섯겹 길이 될 것입니다.
붓다는 말합니다.
이띠루빵 - 이건 물질이야
에따깡 루빵 - 그건 물질일 뿐이야
이띠루빠사 사무다요 - 이것이 물질 일어남이야(일어나는 말미야)
이띠루빠사 아탕가모 - 이것이 물질이 없어지는 말미야.
이것들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나’, ‘남’, ‘사내’, ‘계집’으로 알아보면 안 밝음, 바람, 달라붙음, 깜마(업)가 있을 것이고 죽고 다시 태어나는 돌고 돌기가 이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