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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카시에 관한 일곱 가지 변주곡
0. 탄생 : 새로운 신화의 창조
기대와 달리 디지털 이념이 실현된 사회가 그리 아름답지 않다. 꿈이 조작되거나 완벽하게 사산된 시대를 상상할 수 있는가? 모든 의미의 체계를 완벽하게 삼켜버린 폐허의 어디쯤에 당도해 불평등이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회가 형성된다. 한 시대가 그렇게 정리돼 망각의 강을 건넌지 이미 오래고 그로 인해 환멸에 이른 듯도 했다. 매너리즘에 빠진다. 그러나 시대는 그렇게 무의미하게 소멸해 사라지지 않는다. 아니 시대는 칸트가 주장했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통해서 전혀 다른 관념의 세계를 창조하는 것으로 자기 혁신의 세계를 정초하게 되는데, 어쩌면 그것은 무수한 반복 속에 매개된 혁명의 시간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념도 철학도 이익이라는 함수 밑으로 소거되어버린 각박한 디지털시대에 새로운 꿈의 서사를 몽상하거나 상상할 수 있는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이스라엘과 아랍을 둘러싼 저 원한감정의 종족적 비극은 어떤 이념을 구현하는 21세기 현실인가? 환멸의 어디쯤에 당도해 절망의 주체로 몰락하게 된다.
신화의 탄생이 요구된다. 신화는 새로운 미적 양식으로부터 시작한다. 정치적 생산력은 삼류로 추락해 자본의 주구가 된지 너무도 오래고, 분열을 과대포장 하는 고도의 산업문명사회는 이익이라는 함수에 매몰되어 비인간화의 극단적인 전형인 계급화를 자본의 이념으로 재차 봉인하고 있다. 희망이 사라진 디지털 시대에 신화의 탄생은 가능한가? 그대 아직도 디지털 이념이 우리 모두의 유토피아를 만들 수 있다고 상상하는가? 불평등이 보편화된다. 디지털왕국은 불평등을 꿈의 서사로 봉인하는 환상의 알레고리이자, 너와 나의 균형감각을 마비시키거나 치명적인 중독증상을 일으켜 시대현실을 망각하게 만든다. 현실이 저와 같다면 우리는 어떠한 매체를 통해 더 나은 삶의 현실을 만들거나 불합리한 현실을 개혁 가능하겠는가? 불가능하다. 한편에선 알고리즘의 신화에 편승해 호모 데우스를 부르짖고 또 다른 한편에선 조금 더 유토피아에 가까워진 것처럼 느껴지게 만든 디지털 이념이 보편화된 시대적 환경에도 불구하고, 시대의 현실은 20세기와 크게 다르지 않게 늘 전쟁 중이다.
불평등이 보편의 이념으로 고양된다. 분명 표면적으로 디지털이념이 정치경제학을 비롯한 문화 전반에 걸쳐 혁신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문화를 지배하는 일련의 서사는 고도의 자본 합리성으로 무장해 인간학 전체를 잔혹극으로 묘사하는 비인간화의 전형적인 모습을 고착화시켜가고 있다. 어쩌면 디카시의 탄생은 새로운 신화를 구축하는 의미화과정, 즉 인간학과 세계 사이의 거대한 균열을 봉합하는 지고한 의식의 성과물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차가운 절대이성의 온도로 중무장한 0과 1의 조합을 인간학적 온기로 회감하는 디카시는 전운이 감도는 21세기 욕망의 체계를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최고의 예술 양식 중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1. 서곡 : 윌리엄 텔의 신화
디카시의 출현은 극적이다. 영기어린 빌헬름 텔의 신화가 숨 쉬는 스위스의 어디쯤을 떠올려본다. 여율은 잔잔한 듯 웅장하게 첼로의 현 위에 탄주됐고, 음율의 마티에르는 프란츠 폰 주페의 『경기병서곡』처럼 강렬하게 이 세계의 의미와 호응했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전야인 듯도 했고, 적막에 휩싸인 황야에 이른 듯도 했다.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그러나 신화는 그렇고 그런 알량한 서사를 통해서 완성되지 않는다. 아니 하나의 신화가 창조된다는 것은 작곡가 로시니의 『윌리엄 텔 서곡』으로부터 완료되는데, 이는 프리드리히 쉴러를 경유해 새로운 양식으로 정초되는 신화의 간접화법, 즉 의식의 우회로이다.
따라서 하나의 새로운 예술적 전망이 창조된다는 것은 시대의 이념과 적극적으로 조우하게 될 때 비로소 가능한데, 그것은 작곡가 로시니를 통해서 육화된 첼로의 음율이다. 때론 오케스트라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어 인간학 전체를 여여롭게 탄주하면서 때론 절체절명의 위기를 변증법적인 통일의 힘으로 교차시키면서, 하나의 장르를 시대의 명제로 고양시키기에 이른다. 따라서 디카시의 출현은 윌리엄 텔의 전설과 비견되는 상서로운 신화적 징조인데, 이는 한 시대의 운명을 새로운 방식으로 정립할 수 있는 예술의 새로운 전형이라 하겠다.
말하자면 디카시는 윌리엄 텔의 전설처럼 예술적 창조력이 폭발하는 하나의 신기원이자 현대성을 성찰하는 새로운 미적 구상력의 보고이다. 마치 스위스에서 구전되는 빌헬름 텔의 전설이 쉴러와 로시니에 의해 새로운 예술로 선명하게 부조되었듯이, 디카시도 고대 가야문명의 체취가 아직도 살아 숨 쉬는 경상남도 고성의 어디쯤에서 발원해 극적으로 시말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이를테면 경상남도 고성은 현대의 신화가 부활하는 전초기지이자, 디카시의 메카이기도 한데, 이는 하나의 예술 장르가 지역을 기반으로 해서 보편적인 시말운동으로 전개하는 전무후무한 사건성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경남 지역의 변방인 고성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되는 디카시운동은 지역성의 한계 범주에 머문 특수자의 외로운 운동이 아니라 역사 및 문화사적 지평을 온몸으로 체현한 시대의 표현물이자, 보편성을 담지한 인류 최대의 문제적 사건이다. 왜냐하면 디카시는 디지털 문명으로 인해 점점 물화된 문화만을 양산하는 디지털 이념을 인간의 리듬으로 복원하는 아날로그적 정서를 함양하는 최고의 예술 양식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디카시의 출현은 로시니의 『윌리엄 텔 서곡』처럼 오페라의 시작을 알리는 전주곡의 역할, 즉 새로운 시대정신의 메신저이자, 한 시대의 예술이 지역을 기반으로 보편의 운동으로 성장해 갈 수 있는 유일한 예술의 양식임을 증명한 최초의 사례라 하겠다. 따라서 경상남도 고성은 디카시의 신화가 살아 움직이는 정령의 도시이자, 예술혼이 숨 쉬는 시혼의 도시이다.
2. 변주곡 : 일곱 개의 디카시집들
첼로와 오케스트라 선율이 절묘하게 앙상블을 이루는 차이코프스키의 『로코코에 의해 변주곡 작품번호33』을 들으며 예술의 진경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다. 지휘자는 당대 최고였고 또 지휘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우아한 카리스마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었다. 은발을 흩날리며 지휘에 몰두 중이고, 첼리스트는 로스트로포비치 아니면 미샤 마이스키나 요요마가 오케스트라와 절묘하게 협연이 이루어지는 과경을 상상해본다.
현재 디카시의 전개과정은 저와 같다. 둔중한 듯 애절하고, 가벼운 듯 하지만 이내 진중하게 변주돼 이 세계의 다양한 의미들과 상호 공명하고 있다. 첼로와 조응하는 로코코 선율이 아름답게 흐른다. 여율의 흐름은 이미지와 상호 조응해 유려하게 흘러내렸고, 시말은 인간학과 세계 사이의 거대한 균열을 보듬어 안아 서정의 향기를 서사화하고 있다.
다음의 일곱 시인, 즉 디카시의 비조인 이상옥 시인을 비롯해 이운진, 김종회, 김영빈, 천융희, 김남호, 김왕노 시인 등의 작품집을 살펴보는 것은 의미 있는 행위라 하겠다. 왜냐하면 이들은 한국 디카시단을 대표하는 시인들의 현재 위치이자, 한국 디카시의 시적 경지를 알아볼 수 있는 시금석이기 때문이다.
이미지의 여율은 유려하게 굽이쳐 흘러내렸고, 시말의 변주곡은 다양한 차이를 생산해냈다. 현재 디카시의 흐름은 루카치 식으로 말해서 특수자를 보편자로 고양시켜 세계의 시문학으로 대중화와 세계화를 겨냥 중이다.
◎ 이상옥 『고흐의 해바리기』 : 풍경이 되어가는 존재의 구경
이상옥 시인은 “사람도 풍경으로 들어앉은”(「장산숲 야외 갤러리」중) 깨달음에 이르고 있다. 말하자면 인간학적인 삶의 과정이 “풍경”(「감동 저수지」중)이 되어 자연과 동화되는 오묘한 이치를 “운명”(「길강아지 복실이」중)의 이미지와 조응을 통해 도가의 선경에 도달한 듯 보인다. “가난한 영혼”(「새」중)의 노래 혹은 “무목적성의 목적”(「상부 형님」중)에 응고된 인륜성. 시말은 이미지의 “바닥”(「4월」중)을 “꽃길”(「거류산성 가는 길」중)로 읽어내며 “미인도”(「묘작도」중)를 그려내는데, 그것이 바로 순간 포착된 이미지에 “답신”(「깊은 침묵」중)하는 언어의 존재론적 “뜻”(「디카시연구소」중)이다. 때론 “영화 주인공”(「레드 카펫 혹은」중)처럼 “환상”(「심야의 카공족」중)에 빠지기도 하면서, 때론 상실의 “아픔”(「정원수를 이식하며」중)을 “계명”(「시내산에서」중)의 울림으로 상호 공명시키면서, 시인은 “슬픈 눈”(「고흐의 해바라기」중), 즉 “선한 눈망울”(「다시 연화산에서」중)의 “약속”(「梨花」중)을 “고운 마음”(「섭리」중)으로 읽어내고 있다. 이를테면 『고흐의 해바리기』는 이미지와 시인의 시선 사이를무한히 좁혀 다양한 “점묘화”(「연화산에서」중)로 그려내는 것은 물론 “추억의 계단”(「SUN SET」중) 여기저기에 색인된 “피와 살”(「입춘」중)의 서사를 “푸른 발자국”(「조춘」중)의 시말로 승화시키고 있다. 어디선가 마음을 평화롭게 만드는 “풍금소리”(「겨울비」중)가 들리는 듯하다. 마치 이미지의 천국이 “시향”(「가을」중)으로 피어나 “청춘의 민낯”(「봄날」중)을 세밀하게 부조시키는 것처럼, 이상옥 시인은 『고흐의 해바리기』 전체를 “눈빛”(「정주동물원의 수사자」중), 즉 “푸른 눈”(「구도構圖」중)의 편광렌즈를 달고의미의 공간을 탐색 중이다. 의미는 순간순간 발견 포착되는 것이지, 선험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시인의 눈과 셔터를 누르는 손은이미지의 제의를 풍경의 시말로 고양시켜 노자의 도법 자연의 경지를 추구하는데, 어쩌면 이는 디카시가 도달해야만 하는 최고의 시적 경지인지도 모른다.
◎ 이운진 『당신은 어떻게 사랑을 떠날 것인가』 : 사랑의 변주곡 혹은 멀티플렉스
우선 작품론적인 관점이 아니라 형식의 문제에서 볼 때, 이운진 시인의 『당신은 어떻게 사랑을 떠날 것인가』는 매우 독특하게 멀티플렉스한 구성을 하고 있다. 종래의 디카시 형식에 자작시 해설이 더해지고 바로 그 뒷장에 삶을 성찰하는 아포리즘적 에피그램을 배치한 멀티플렉스이다. 관심이 있는 분은 한번 만나보기를 권한다. 시인의 추구하는 일관된 시적 주제는 “사랑”(「할머니의 실꾸리」중)과 그에 관한 의미를 다양한 감성의 방식으로 변주하는 것이다. 예의 따스하고 서정적이다. 다시 말해서 이운진 시인의 『당신은 어떻게 사랑을 떠날 것인가』에 묘파된 서사는 당신과 나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을 “순간과 우연”(「글을 시작하며」중)의 도정 위에서,진지하게 사랑의 참된 의미를 되묻는 것인데, 어쩌면 그것은 “사랑의 연루”가 만들어낸 “눈물”의 서사이거나 “미련” 가득한 “무서운 사랑”(「신발 한 켤레중)이다. 때론 “기다림”(「빈 집의 우편함」중)의 “간절한 마음”(「시간의 법칙」중)을 “어둠의 속도”(「전봇대가 있는 골목」중)로 가늠하면서, 때론 “외로움”(「아직 이 가을 더」중)의 감성을 무한히 증폭시키면서, 이운진 시인은 자신과 당신 사이 가로놓인 사랑의 의미를 진지하게 되묻고 있다. 아픈 듯 황홀하고, 황홀한 듯 아프지만 이내 쓸쓸해진다. 왜냐하면 시인에게 사랑은 항상 가닿을 수 없는 미지의 대상에게 열려진 “삶의 체온과 슬픔”(「기선셋 증후군2」중) 같은 무엇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시인은 “꽃을 보내는 마음”(「꽃비」중)으로 부재한 당신에게 향해있다. 설령 사랑의 메시지가 “당신의 등”(「뒤의 초상2」중)에 가닿을 수 없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고 그로 인해 “심장의 상처”(「두 개의 침묵」중)가 너무도 치명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어둠속의 영혼을 깨우는 일”(「우화(羽化)」중)에 침잠하며 “혼례의 날”(「기이한 밤」중)을 “운명”(「기원의 방식2」중)처럼 기다린다. 오로지 “당신 열어주는 지름길”(「물길」중)을 따라 “눈보라 같은 슬픔(「삶의 폭죽」중)을 견디어내고 있다.
◎김종회 『징검다리』 : 행복의 시학 혹은 순수성과 역사성의 변주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가 “불모지”(「용암바다」중)로 점점 변해가 “자연의 형용”(「푸른 사자머리」중)을 훼손하지만, 시인은 시가 있어 행복하다. 시말은 맑고 투명했고, 삶은 행복으로 점철된 몽상의 연속이다. 일단 “맑은 얼굴”(「연달래」중)의 “소녀”(「여름 초입」중)가 저편 “무지개”(「무지개 동심」중)를 타고 오는 모습이 “소년의 눈”(「징검다리」중)에 얼비치는 듯했다. “그리운 날”(「가을 소나기」중)의 “순백의 세상”(「순백 설경」중) 혹은 “첫사랑”(「소년 말하다」중)의 “추억”(「갈밭머리 쉼터」중). 총 4부중 1,2부는 시집 『징검다리』라는 제목에 걸맞게 “동심의 순수”(「쪽빛구름 쉼터」중)를 소년의 시선점에 웅고시켜 “책과 꽃의 마음”(「책과 꽃」중)을 “따뜻한 표정”(「봄이 오는 길목」중)으로 그려내고 있다. 여기저기 자연의 “함성”(「작은 입술들」중)이 들리며 행복이 전이된다. 말하자면 김종회 시인의 그것은 “붉은 열망”(「함평 용천사 꽃무릇」중) 가득 찬 “예술”(「묵포 문학박람회 수변무대」중)을 아무것에도 훼손되지 않은 “초록 숨결”(「고성 장산숲」중)로 그려내고 있는데, 이는 시가 견지해야할 순수성이다. 때론 시말운동 전체를 “행복한 만남”(「이병주문학관」중)으로 가득 채우면서, 때론 “하늘빛 물빛”(「와이키키 해변」중)을 삶의 “낙원”(「바닷가 야자수길」중)으로 소묘하면서, 시인은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를 새롭게 깨달아가고 있다. 제 3,4부는 여행모티브가 주요 테마이고, 미국과 중국을 여행했던 체험들이 구체적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시인에게 여행은 “지구의 속살”(「감숙성 칠채산」중)을 어루만지며 “생명의 근원”(「명사산 오아시스」중)을 추적하는 존재의 근원행이다. 특히 중국여행은 한국의 고대 역사와 근현대사의 아픈 현실에 주목하고 있는데, 이는 “역사의 눈물”(「안중근 의사의 저리」중)을 “삶의 광전”(「갤리포니아 오로라」중)으로 되살리는 행위이자, “어두운 역사의 기억”(「장춘 관동군사령부」중)을 반성하는 성찰 행위이다. 따라서 김종회 시인에게 역사는 강렬한 “느낌표”(「샌디에이고 미항」중)를 제공하는 “삶의 보화”(「어떤 실루엣」중)이자, “선진들의 세계”(「광개토왕릉 가는 길」중)를 이해하는 의식의 통로, 즉 “최강국의 형상”(「집안 장수왕릉」중)을 현실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보고이다.
◎김영빈 『pause』 : 이미지의 다성악 ― 반어, 풍자, 유희
김영빈 시인의 주목할 점은 이상옥 시인의 『固城 假道』가 2004년 상재되고 2016년 국립국어원에서 공식 문학용어로 승인된 후 디카시 공모전에서 당선된 시인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은 디카시가 하나의 시 장르로 자리를 잡았고, 대중에게 관심의 대상되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점은 김영빈의 『pause』가 아주 잘 만들어낸 항아리처럼 세련되게 자신만의 시세계를 구축했다는 점이다. 관행처럼 굳어진 제목―이미지―시의 배열관계를 이미지―시―제목의 관계로 전복시켜 시적 효과를 배가시키고 있다. 그리고 더 중요한 점은 완벽하게 디지털이미지가 주체처럼 시각을 장악하지만, 시를 읽고 난후 제목을 본 순간, 한 편의 디카시가 후치된 제목으로 인해 그 자체로 자기 충족적으로 부족함이 없이 완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짧지만 풍요롭고, 어딘지 미완성품 같지만, 제목이 시와 이미지를 장악해 완성된 하나의 세공품을 탄생시킨다. 이는 단순하게 이미지가 디카시 전체를 지배하는 원리 때문만은 아니다. 아니 역으로 김영빈 시인이 시의 완결성을 위해 시의 배치 구성법을 의도적으로 전복한 것이다. 따라서 제목은 시의 시작이 아니라, 마지막에 주어지는 시말의 결론이다. 발상이 재미있고, 이미지가 펼쳐내는 울림은 다성적이다. 때론 알레고리와 아이러니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면서, 때론 현실의 모순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면서, 시인은 유유자적하게 언어놀이를 감행하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가볍게 보이지만, 결코 가볍지 않게 시의 탄력성을 견지하면서, 시인은 자신의 보폭으로 시말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그리고 김영빈의 『pause』에 간과해서 안 되는 하나의 특별한 장이 있다. 그것은 부록의 형식을 취한 <펜은 거들 뿐>인데, 이는 이미 고정 틀로 정형되어가는 디카시의 변형생성문법을 예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금 더 노력하면 디카시 2기 시문법이 생성될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김영빈 시인이 예리한 관찰력을 통해서 오브제, 즉 자연의 대상과 사물을 카메라 렌즈 앞에 놓기 위해 집요하게 찾고 애썼기 때문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천융희 『파노라마』 : 세상의 모든 것들에 대한 의미의 발견자
온 세상이 시이고 의미이다. 까닭은 시인이라는 영매처럼 그저 “순감의 느낌”을 받아 적는 “대리인”(「시인의 말」중)이기 때문이다. 쉬운 듯하지만, “어렵고 힘든 길”(「알고 싶어요」중)이다. 아니 세계라는 “원고”(「두 번째 시집」중)를 이미지의 언어로 포착해 시말화하는 작업은 이 세상의 “상처”(「별」중)를 매만지는 행위인데, 이는 “또 하나의 우주”(「시인의 말」중)를 발견하는 “시”(「자화상」중)의 “꿈”(「우주여행」중)이자, 사명이다. 오늘도 “햇볕”(「기대」중)이 쏟아지는 “소문”(「바닷가 끝 집」중) 자자한 거리를 “인생의 등불”(「필사」중)을 밝히기 위해 걷는다. 대저 “정보의 바다”(「핑계」중)를 “육감”과 “직감”(「디카시」중)의 언어로 포착하는 이미지의 운동은 어떤 “연유”(「막내」중)를 읽어내야만 하는가? 우리는 “문명의 도시”(「꼭두새벽」중)를 어떤 “곡조”(「익명」중)로 노래하며 생의 “험지”(「봄의 초입」중)를 건너는가? 천융희 시인의 『파노라마』가 아름다운 이유는 “푸른 본능”(「천 개의 바람」중)의 다양한 “비경”(「파노라마」중)을 “신의 인도”(「새옹지마」중)로 이끌면서,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그 나름의 “목숨 값”(「떡볶이 1인분에 김밥 한 줄」중)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애끓은 “심장 한 덩이”(「세월호―검은 리본」중)가 매만져지는 것 같다. “어머니”(「유언」중)가 살아오신 삶의 서사와 더불어 “눈칫밥”(「퇴임」중) 먹던 “세상 근심”(「꼭, 있다」중)의 어디쯤을 위무하면서 천융희 시인은 우주 공간의 “적요”(「빈집」중)를 온몸으로 체감 중이다. 때론 “붉은 노을”(「그해 여름」중)이 지는 생의 어디쯤을 반추하면서, 때론 “착시”와 “착란”(「마馬」중)으로 점철된 젊은 날의 초상을 성찰하면서, 시인은 화려한 생의 “봄날”(「독거」중)을 몽상 중이다. 물론 오늘도 시인은 생의 “암초”(「앨범을 넘기며」중)를 헤아리며 이미지와 사투 중이다. 지금 조용히 모든 시름을 “운치”(「중년」중)있게 덮어주는 “안개비”(「산벚나무」중)가 내렸으면 좋겠다고 하면서. 파노라마 같은 천변만화경이 펼쳐진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이 다 시이다.
◎김남호 『고단한 잠』 : 나를 찾아가는 존재의 여정 혹은 티벳 사자의 길
시의 목적은 자신과의 화해이다. 나의 위치가 시의 존재론적 의미를 결정한다. 다 읽고 먹먹했다. 시의 여정 전체가 나를 참구하는 존재의 여정인 동시에 그 길이 스스로를 제도하는 티벳 사자의 길과 유사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삼시세끼의 길”(「고단한 잠」중)도 나의 “흔적”(「자화상」중)이고, “늙은 작부”(「역린逆鱗」중)의 처연함도 “어느 生의 나”(「길고양이」중)와 닮아있다. 생명의 “참혹함”과 “숭고함”(「생명에 대하여」중)을 “백수”(「퇴직」중)의 시선점에 머무르게 하였고, “저승”과 “이승”(「이장移葬」중) 사이에 매개된 모든 사태가 또 다른 나를 발견하는 의식의 통로가 되고 있다. 특히 김남호 시인의 『고단한 잠』은 생의 여기저기에 색인된 “낭떠러지”(「절벽」중)와 “가시”(「경계에 피는 꽃」중)를 이미지의 운동으로 확인 중인데, 그것은 바로 “나의 식민지”(「마스크」중), 즉 시인 자신의 초상이다. 때론 생의 외로운 “그림자”(「도망자의 바람직한 자세」중)를 “뜨거운 연대”(「사랑의 열매」중)로 결속시키면서, 때론 “방생”과 “포획”(「방생」중) 사이에 매개된 삶의 “짐”(「업業」중)을 숙명의 기호로 읽어내면서, 김남호 시인은 “사랑한다는 말”(「팔의 백서」중)의 진실을 깨달아가고 있다. 문득 나라는 존재를 키웠던 “집”(「어머니라는 집」중), 즉 어머니가 그립다. 까닭은 생의 “노을”(「치통」중)에 당도해 “앞길”(「참, 편안하다」중), 즉 “다음 생”(「호텔 델루나」중)의 의미를 물어야하기 때문이다. 설령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가 “기계”(「샤파」중), 즉 AI에 의해 점점 납작해져만 가지만, 어찌 “핏줄 혹은 힘줄”(「심줄」중)의 의미는 물론, “동병, 상련”(「낮술」중)하는 마음의 깊이를 헤아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오늘도 시인은 “전 생애”(「어떤 해후」중)의 의미를 참구하면서 “온 우주”(「장마」중)가 생명의 여율이었음을 깨달아가고 있다. 갈등을 표상하는 “죽창”(「죽순의 꿈」중)이 아니라, “부음訃音!”(「나의 시詩·1」중), 즉 “죽음”(「애도」중)과 “악수”(「시인의 말」중)하면서, “내 등의 오지奧地”(「나의 시詩·2」중)에서 들려오는 “빛들의 피곤함”(「빛의 음계」중)을 “동정”(「극빈」중)의 시말로 위무하고 싶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삼베옷”(「임종」중) “수의”(「수壽」중), 즉 “끝”(「뱀의 꼬리」중)을 향해 질주한 후 종국에는 천국의 “열쇠”(「열쇠」중)를 열겠기 때문이다.
◎김왕노 『아담이 오고 있다』 : 천개의 고원을 위를 질주하는 이미지의 운동
이미지는 유려한 듯 가볍게 의미를 터치하고 시말은 의미의 심연을 관통하는 듯했다. 그리고 시인에게 시란 ‘곳’의 운동임 명백하다. 아니 시인이란 태생적으로 보들레르의 산책자처럼 저주받은 운명 속에 이리저리 배회하며 자기 숙명과 맞서는 자이다. 그런데 김왕노 시인의 『아담이 오고 있다』는 특이하게 이미지의 출처가 어디인지를 명백히 밝히고 있다. 왜 그런가? 왜 시인은 악양, 평사리, 삽교천, 만해 마을, 서울, 석모도 등등 이루 말할 수 없이 다양한 공간을, 오브제를 주목하면서, 사랑과 그것의 서사를 행복의 기억으로 기록하는 것일까? 말하자면 이미지의 생산력은 공간의 작용이 만든 낯선 효과를 의미의 공간에 재배치하는 운동이자 이는 탈근대지식인이 처한 운명의 서사를 파편화하는 것과 같은데, 이는 어떤 의미의 공식을 만족시키는가? 다만 어느 곳에도 쉽게 안주하지 못했으며, 이 도시 저 도시 떠돌아다니며 미지의 기호들과 마주서게 된다. 오늘도 김왕노 시인은 “사랑”(「시인의 말」중)을 찾아 떠나는 노마드처럼 이 세계 도처를 배회하고 있다. 천개의 고원을 이리저리 떠돌며 새로운 만남을 시도 하는 중이다. 말하자면 『아담이 오고 있다』는 한 공간에서 또 다른 공간으로 자유자재 이동 중인데, 이는 이미지가 리좀처럼 자유롭게 증식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지의 생산자가 공간의 의미를 포착하여 그것을 의미화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괄호 안에 명기된 장소는 시인의 영혼이 거주하는 존재의 장소-곳, 즉 현재의 “사랑을 위해”(「숙고」중) 머무는 삶의 현주소이다. 때론 “자본주의 계략”(「카멜로운 인간」중)에 침전된 음모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 때론 내 “사랑의 체위”(「사랑의 롤 모델」중)가 무엇인지 성찰하면서, 김왕노 시인은 이 세계 전체를 사랑과 행복의 전언으로 가득 채우고 있다. 시가 있어 행복했고, 시를 씀으로 해서 “천년의 꿈”(「강아지의 꿈」중)에 다가가고 있다. 설령 가끔은 “덜 익은 사랑”(「발효」중)으로 인해 “참수 직전”(「모순」중)에 이르는 경우가 없지 않아 있지만, 어찌 그 사랑의 모순을 부정할 수 있겠는가? 그저 시인은 사랑으로 인해 행복할 뿐이다. 그게 전부다.
3. 피날레
디카시 콘체르토가 우주와 더불어 공명하는 것 같다. 이미지의 총합은 이 세계의 본질을 지시하는 의미의 총합이다. 합창교향곡으로 잘 알려진 베토벤의 『심포니 9번』을 듣는 것처럼, 7인의 시인은 각자 자신만의 고유한 시적 개성을 마음껏 발산하면서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듯 했다. 때론 소년의 순수성을 시말과 이미지의 유비를 통해 육화시키면서, 때론 시간의 총체적 현상을 한 컷의 이미지 속에 응고시키면서, 시인들은 자신만의 특수한 세계의 이해를 보편의 향기로 끌어올리고 있다.
합창이 이루어진다. 테너의 독창도 있고, 메조소프라노의 우수어린 목소리도 있다. 물론 가장 완벽하게 첼로의 음률과 닮아있는 시들도 있었다. 이들은 단지 한 개인의 역량의 발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청년 디카시의 훌륭한 자산이자, 함께 공명해 미래를 이룩할 위대한 뮤즈의 울림이다. 7인의 시인 외에도 열심히 디카시를 쓰는 분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함께 공명해 디카시의 신기원을 만들고 현대의 신화로 남기를 염원해본다.
더불어 말러의 천인고향곡이 베토벤의 합창교향곡에 화답해 전 우주를 아름다운 여율로 공명하는 바로 그 지대에 디카시가 우뚝 서 있는 과정을 상상해본다.
김석준/ 충남 아산 출생. 1999년 《시와시학》 시 등단. 2001년 《시안》 평론 등단. 시집 『기침소리』.
미네르바 작품상(평론)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