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낭당
본 뜻
서낭은 마을의 터를 지켜주는 신(神)인 서낭신이 붙어 있는 나무를 가리키는 말이다.
서낭신은 원래 성황(城隍)에서 온 말로서 한 나라의 도성을 지켜주는 신이었으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토속신으로 변하여 마을의 수호신이 되었다.
이 같은 유래 때문에 아직도 마을 어귀에 서낭신을 모셔놓은 곳을 서낭당, 성황당, 성황단 등의
여러 이름으로 부르기도 하는 것이다.
바 뀐 뜻
우리 조상들은 서낭신을 마을과 토지를 지켜주는 신으로 믿고 섬겨왔는데,
마을 어귀 큰 고목나무나 바위에 새끼줄을 매어놓거나 울긋불긋한 천을 찢어 달아놓고
그 옆 작은 집에 서낭신을 모셔놓은 당집을 서낭당이라 했다.
때로는 당집 없이 큰 고목나무에 울긋불긋한 천이나 새끼가 매어 있는 것만도 서낭당이라 부르기도 한다.
사람들이 서낭당 앞을 지날 때는 서낭신에게 행운을 빌며 돌을 하나씩 쌓아놓기도 하고,
잡귀가 달라붙지 말라는 뜻에서 침을 뱉고 가기도 한다.
출처 - '우리말 1000가지' | 이재운외 | 예담
서낭당(성황당)
마을을 수호하는 서낭신을 모셔 놓은 신당(神堂), 성황당
마을 어귀나 고갯마루에 원추형으로 쌓아 놓은 돌무더기 형태로,
그 곁에는 보통 신목(神木)으로 신성시되는 나무 또는 장승이 세워져 있디고 하다.
이곳을 지날 때는 그 위에 돌 세개를 얹고 세 번 절을 한 다음 침을 세 번 뱉으면 재수가 좋다는 속신이 있다.
서낭당은 서낭신을 모신 신역으로서 신앙의 장소이다.
이곳을 내왕하는 사람들은 돌·나무·오색·천 등 무엇이든지 놓고 지나다녔다.
물론, 그곳의 물건을 함부로 파거나 헐지 않는 금기가 지켜짐은 말할 나위가 없다.
서낭이 경계를 표시하기 위해서, 또는 석전(石戰)에 대비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설도 있으나,
민간에서의 서낭은 종교적 의미가 농후하다.
우리 나라에 서낭신앙이 전래된 것은 고려 문종 때 신성진(新城鎭)에 성황사(城隍祠)를 둔 것이 서낭의 시초라 한다.
그 뒤 고려에서는 각 주부현(州府縣)마다 서낭을 두고 이를 극진히 위하였는데, 특히 전주서낭이 유명하였다.
고려 고종은 침입한 몽골병을 물리치게 된 것이 서낭신의 도움 때문이라 하여 서낭신에게 신호흫 가봉하였던 일도 있었다.
수호신으로서의 서낭은 조선시대도 널리 신앙되었다.
조선시대의 서낭은 국행(國行)서낭과 민간에서의 서낭으로 나누어진다.
국행서낭은 호국(護國)이라는 두 글자를 붙였다.
이성계(李成桂)는 즉위 후 여러 산천의 서낭을 제사하였으며,
태종은 백악(白岳)서낭과 송악(松岳)서낭을 신도(新都)서낭으로 모셨다.
그 밖의 조선시대의 이름남 서낭으로는 해주·괴산·현풍·양산·신성(新城)·밀양·전주·고성서낭 등이 있었다.
이러한 서낭에서는 정기적인 제사뿐만 아니라, 국난이나 가뭄이 있을 때
서낭제를 거행하여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하려 하였다.
서낭형태는 크게 다섯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① 서낭나무에 잡석을 난적(亂積)한 누석단이 있고,
이 신수에 백지나 청·홍·백·황·녹색 등의 오색 비단 헝겊을 잡아맨 형태,
② 잡석이 난적한 누석한 형태,
③ 서낭나무에 백지나 5색 비단 헝겊 조각을 잡아맨 형태,
④ 서낭나무와 당집이 함께 있는 형태,
⑤ 입석(立石) 형태 등이다.
이 다섯 가지 중에서 가장 보편적인 것이 ①의 형태이며,
②의 형태는 ① 형태의 서낭나무가 퇴화되거나 길 옆에 누석단이 먼저 생긴 것으로 볼 수 있다.
③의 현태는 수목신앙(樹木信仰)에 후기적으로 서낭나무에 오색 비단 헝겊을 잡아매는 헌남속(獻納俗)이 복합되거나
또는 처음부터 서낭당의 신수 헌납속만 강조된 형태로 볼 수 있다.
⑤의 형태는 높이 120~200cm 안팍, 폭 90~120cm 가량의 자연석을 세워놓고
'수구매기(水口막이)'·‘돌서낭’·‘선돌’등으로 부르는데, 이것은 중부, 남부 지역에서 간간이 발견된다.
신수에 당집이 복합된 ④의 형태는 중부 내륙 산간지역과 태백산백 동쪽의 영동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출처 - 한민족문화 대백과사전
서낭당
서낭당의 명칭은 지방에 따라 선왕당·천왕당·국수당·국시당 등으로 불리며 한자로 표기하여 성황당(城隍堂)이라고도 한다.
서낭당은 보통 마을 어귀나 고갯마루에 원뿔 모양으로 쌓은 돌무더기와 마을에서 신성시되는 나무(神樹) 또는 장승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형식은 5색 헝겊을 걸어놓은 서낭나무와 돌무더기를 쌓아놓은 누석단(累石壇)이 결합된 것이 일반적이나 누석단 또는 서낭나무만으로 구성되기도 한다.
이 밖에도 서낭나무와 당집이 함께 있거나, 입석(立石)의 형태인 것도 있다.
서낭의 유래는 분명하지 않으나 한국 전래의 천신(天神)과 산신(山神)이 복합된 것으로 여기에 중국에서 유입된 성황신앙(城隍信仰)이 융합되었다고 한다. 성황신앙은 성읍의 둘레에 못을 파놓고 그 못에 깃든 신(神)이 성읍을 지켜준다고 믿는 풍습에서 비롯된 것으로 중국에서는 송대(宋代) 이후 보편화되었다.
이 성황신앙이 재래의 서낭신앙의 마을수로하는 기능과 일치하고 서낭과 성황의 발음이 유사하다는 점에서 서로 혼합되어 전해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서낭당은 지역간의 경계를 표시하거나, 전쟁시 석전(石戰)에 대비하여 쌓아놓은 돌무더기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이와 같은 실제적인 기능보다는 마을수호·액운퇴치·소원성취 등을 기원하는 민간종교로서의 의미가 강하다.
서낭당과 관계된 것으로, 서낭나무에 입던 옷의 저고리 동정이나 5색 헝겊 조각을 걸고 치병과 무병장수를 기원하거나,
새 집으로 이사할 때 옛 집의 잡귀들이 따라오지 못하도록 옷을 찢어 걸어놓기도 하는 속신이 있다.
이밖에도 서낭당을 지날 때에 누석단에 돌 3개와 솔개비를 얹어놓고 침을 3번 뱉은 다음 왼쪽 발꿈치로 땅을 3번 구름으로써 행로의 안전과 행운을 기원하는 등 민간에서 전해지는 여러가지 형태의 풍속이 있다.
서낭당에 올리는 제의(祭儀)에는 마음수호와 질병의 예방을 위하여 마을굿의 형식으로 해마다 지내는 서낭제와 집다한 개인적인 소망을 기원하는 개별적인 제의가 있다.
또한 서낭신은 무속에 수용되어 무신의 하나다 되었으며 서낭굿이 굿의 한 마등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출처 - 다음백과
성황
Ch'eng Huang , 城隍
중국 신화에서 전해지는 영혼의 판결관이며 마을의 수호신.
(병). Cheng Huang. (웨). Ch'eng Huang.
죽은 사람의 혼령은 그의 판결에 따라 신에게 자신의 선행과 악행을 보고해야 한다고 알려졌기 때문에
믿음이 깊은 사람들은 성황묘(城隍廟)에 메물을 바치면 후히 보답받는다고 믿었다.
성황숭배 의식이 일반에 널리 퍼진 이유는 나라에서 그것을 장려했기 때문이며
1382년에 나라는 성황묘의 관리를 맡으면서 수호신에게 제물을 바치라고 명령했다.
전통적으로 지방관리들은 부임하러 갈 때 성황묘에서 하룻밤을 지내며 그의 인도를 구했다.
또한 어려운 법률상의 문제가 발생했을 때에도 성황이 꿈에 나타나 해결책을 주리라고 기대하며 이곳에서 밤을 지냈다.
사람이 죽었을 때에는 친척이나 친구가 성황묘에 찾아가 그 사실이 제날짜에 기록되도록 성황자에게 보고했다.
또한 1년에 1~2번 신상(神像)을 밖으로 내어와 성황이 마을을 감시할 수 있도록 거리를 순례하게 했다.
이때 그의 보좌관들이 앞에 서게 되는데 밤과 낮으로 마을을 수호하는 키 큰 흑노야(黑老爺)와
키 작은 백노야((白老爺)도 그중에 있었다.
당(唐:618~907)의 관리들은 성황과 다른 신들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오래된 신들의 족보를 만들어냈다.
그결과 성황은 선사시대에 요(堯)임금이 제사지냈다는 8신 가운데 하나인 수용(水庸)과 동일하게 여겨졌다.
그러나 실제 중국 문학에서 성황에 대해 언급한 글귀는 6세기까지는 찾아볼 수 없다.
사실상 지난 날 선정을 편 지방관이 죽으면 그를 신격화하여 성황으로 삼은 경우가 종종 있었다.
어떤 도시에서는 원래의 성황은 없애버리고 새로운 수호신을 성황묘에 다시 성황으로 받드는 일도 얼마든지 있었다.
한국에서도 성황을 모셨는데 서낭이라고도 했다. 한국의 서낭은 본래의 마을수호신 신격이 여타의 신격과 결합되어
복합적 신앙대상으로 변화된 신격이라 할 수 있다. 서낭은 마을수호신·풍요신·조상숭배신앙을 함께 다루는 데 있어
중요한 신앙형태로 여겨지고 있다.
출처 - 다음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