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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窩家狀/相奎
竹窩(權相奎):純廟己丑1829.12.14-甲午1894.11.20 향년 66세
妻 善山金氏致兼之女申丑1841.8.11-甲戌1874.5.13 향년 34세
府君諱相奎,字景文號竹窩,貫安東太師權公諱幸卽肇祖也. 九世而諱守洪尙書左僕射.三世諱漢公號一齊呂泉府院君諡文坦生.諱仲達封花原君諡忠憲生.諱嗣宗吏曹判書生.諱執德軍器正生.諱時梁山軍事生.諱繼福生進生.諱永仝軍資監正生.諱敬義尙衣院別坐生.諱光國奉直郞別坐生.諱玉衡都事生.諱鍤承仕郞生.諱三變號鶴山當壬亂有忠孝懿跡始居密陽定軒李先生鍾祥撰行狀.性齋許先生傳撰墓碣銘.生諱爾矩有隱德高祖考.諱大徵號華庵贈判尹.曾祖考諱楫號石泉贈承政院左承旨.曾祖妣中和楊氏命和之女贈淑夫人.祖考諱貞義號希賢以孝友學行聞有遺稿贈戶曹參判. 祖妣綾州具氏處士昌彦之女贈貞夫人.考諱洙字士爲刻薦曰,齒德具部學行尤篤.丙寅除知事.戊辰棠伯吳取善亦薦曰,齒部德降安貧樂道已已.陞崇政知中樞貤贈三代吏判南公性元書梧谷板本,兪侯致長洪侯宣謨李侯敬稙諸公撰齋記,承旨南公錫熙撰詩集序,梁山君事李公能和撰,行狀性齎先生挽曰,恩推父祖曾龍光 溢南國世業餘詩書永爲子孫則 生死遙相望嶠南而漢北有遺稿六券. 妣貞敬夫人晉州河氏,處士繼淸之女.遯齋沖後. 純廟乙丑十二月十四日巳時生.府君于位良里,第其夜考妣兩位夢仙童二人, 自天而下坐於庭上,吹雙玉笛而去. 梧谷公得夢有詩曰天降仙童玉笛持蹲蹲庭舞坐而吹必也,此兒形短小. 況然日樣夢中儀府君生而明敏賦性剛直自츤髫不好遊戱.入謂之老成.丙申年八歲始受業於親庭其夜夢兩仙童持貫珠於手舞於庭上而去. 是年夏始綴句苦雨詩曰箴角兩,鈴鈴千日睡詩曰,一枕度三年驚人,語多此類也.有幼有根天地之孝惟以笞悅親心爲事而一無違忤暫不離側山樵水魚以事兩親供極誠力及至十四五學問自修藻思漸就程文各體盡成矩度經傳子史之流莫不融通. 歲丙辰梧谷公避暑於同君新基朴氏慕先亭輿疾而還委席踰年試藥百方有可無減破永沐洛作文禱星不有其身而盡誠極力至朞復常人謂之孝感所致前後知密者稱之曰,孝廉皆分俸餽肉如李侯敬稙李侯承臣李侯象億兪侯致長南侯廷顯是也.隣倅則沈公樂正柳公敎祚鄭公顯德鄭公顯奭洪公憲述是也.往師于性齋許先生定軒李先生兩公之門從親命也. 自是每從兩先生講業而至於經義疑難之處輒必應對如流以及天人性理之說無不沈潛曉鮮先生重之丙寅本倅李道潭염(炎+刂 새기다 염)薦曰,業受師門家貧履道鄭軒先生致書於王考梧谷公曰,允友之業염雖未必有實效亦可見一方公云.其後連登道염銓曹雷巖南公性元薦曰漢世孝豹宋朝賢能,左相韓公啓元薦曰李杜詩衡韓柳文體疑諸注仕而竟不得志.丁卯往見忠州李道潭而留宿數日講梅山洪公直弼所編易鮮文難之義因以上洛遊伴後歸鄕里洛中諸搢紳皆詩以送別先考於善行居三而伯考夭而無育仲考出爲伯,王考湓池亭公后府君侍奉兩親惟以養志爲務而未嘗見憂戚怒詈之容定省之節溫淸之具一無爲違嘗,與我先妣金氏約曰,父母侍奉之日雖得萬金勿營産業盡爲供養O親之心蓋如此. 哲廟癸亥六月十四日 丁先夫人憂哀毁蹂制幾至滅性其後辛未二月十一日遭先府君喪擗踊號泣水不下咽者數日而附於身棺者極從誠信枕處靈几衰經不去於身哭泣之饋奠之誠少無惰慢之容鬯.翌壬申四月二十日癸酉合葬于大山先塋下.負丑之原從遺命也.逐日展墓以至服闋而哀至則上塚傍哭擗朔望展掃終老不廢每遇先忌必前期齋戒一遵家禮或靜坐獨居之時於及先考妣常含畏流涕至若水滋所及之書口澤所被之物不忍輕忽而常哀愛重之終六十六年而感慕之心如力一日也. 先是性定兩先生歿皆作文以祭之晩年尤全力於朱子之書而及讀退陶李先生之書曰我東道祖也. 常語人曰,欲學朱子先學退陶或聞有修己志道之士,不擇遠近而必造訪聞人有善如己有之而必推如每過學宮賢院則必瞻詠諮嗟或聞先賢墳墓則必登省展拜,其尊賢衛道之誠若是平生志在爲己之學而以辯異闢邪爲務故其曰,奉祭儀曰,愼言儀曰,篤學儀曰,懲忿儀曰,窒慾儀曰,改過儀曰,忠孝儀曰,友愛儀曰,敦睦儀曰,直諒儀,凡此十條出於彛倫日用之節警發則深矣. 其曰心性情理氣辨曰,學道辯曰,言仁錄曰,心箴曰,升箴銘曰,書算銘曰,盡筆讚曰,四友傳曰,靈臺記曰,睡魔論凡此幾篇爲是勸學開牖之目而捃摭則大矣. 察訪金公命基致簡推稱曰,韓博士之怪物,進士朴公章錫見詩集題之曰始見竹窩先生乃知聖世秘書閣知,府元公世徹下車先問曰,竹窩丈非特權門之望士乃一鄕之望士非特一鄕一道之望士.當丙子之兇以其月俸分餽之歲壬午敎理鄭公寅協致書曰,先生之門門徒雲與啓蒙牖後此是吾林之처事當時名類皆愛慕之築小廬於大山下東山之嶺顔之曰,竹窩卽府君少時講學之所也. 李侯象億書竹窩板本撰.竹窩記梁山君事沈公樂正撰, 追感錄跋知府兪公致長,進士李公在0,晩坡宋公鍾泰文案,孫公翌龜,日省李公章表,東河李公齊永,竹厓孫公亮緖,杏村孫公振華參判 宗人永秀, 進士李公學運, 參奉李公鼎相, 參奉李公龜相, 應敎韓公喆愚, 君守南公廷友, 承旨黃公仁夏, 府使李公文永, 注書洪公永祚, 晩松朴公起永, 李公觀潤, 李公顯潤, 族人世淵, 參奉成公浩圭, 朴公龍德, 朴公光軾, 成公守鎬, 河公發運, 李公志憲, 黃公稔,金公漢方監役,蔣公漢龍, 進士元公,拭 承旨南公錫熙, 進士李公觀熙, 進士成公浩民, 進士裵公克紹諸賢和竹窩原韻而契誼爲密府君與三從弟, 華南公相祜, 追慕先祖鶴山公之懿跡重創齋舍藏儲書籍以爲子孫隸業之資遠近聞風負芨從之常常滿座講論不怠自是永廢功令之文潛心於性理之學立志於道義之域雖顔瓢屢空神思常恬淡不營産業性操益,堅剛不趨名繈利鑰以尙志書以寓樂或知舊勸之遊京答曰人之欲爲立揚者皆爲親榮養令父母俱不在 吾何爲此逐隱不出世自題所著書曰竹窩江南漫錄凡二十五券不肖五男妹罪逆遍深早見慈闈之棄歸府君居鰥二十餘年撫育畢婚常戒之曰易得者財也.難得子兄弟也 詩不云乎貳相好矣 無相猶矣. 古人不云乎只緣花底鶯聲巧忍使天邊雁影分 汝曹勉之聞者歎美癸巳歲大饑鷄林尤甚士民流散四方 定軒先生從子在殷氏以率看몰命 密州之意來言於府君 府君曰願君勿慮率看來我死生同之其翌日不肖以家貧歲飢不能周求而恐傷契誼乘間言於府君府君痛責不肖曰若汝輩則世上焉 有朋友之義也 平安無事之時則有友困窮患難之時則無友乎 以是怒不釋不肖累日請罪得鮮不幾日在殷氏率眷來抵府君心歡喜斗升之穀必分居未數月府君遘病大漸乎 見仲兄不言家事惟托在殷氏妻子而卒在殷氏哀慟不已 文以祭之曰轉向滋州非無望走一鄕知舊百代宗親 公曰李殷 此何行色來 則來我更勿 向他亂中同 閑亦不易事 株玉難繼計 日先憂呼兒 豚幼生於膝 下晨飯暮粥 後先必嘗此 雖細微仁愛 所及此其大略也 今上甲午十一月二十日昧爽病漸平明敎第二男孫泰鳳書其夜人定就枕以卒享年六十有六葬于長嶝山負丑之原配善山金氏致遷之女 籠巖0后有至行至德敬事,先考常執如賓之禮,其孝行實跡載,王考梧谷公孝婦傳,先先考二十一年,均又甲戌五月十三日葬于大山下甲坐之原, 生四男一女, 長男重琦,二男重舜,三男重魯出爲伯考后,四男重周,女李文和,李男守,坤. 重琦男,泰道泰吉泰永泰殖,重舜男,泰應泰駿泰元.出重魯男,泰用泰喆泰民,重周男,泰元.嗚呼.府君之嘉言善行多遺淚不盡者不肖之罪也. 姑就耳之目之之事敍次約干,雖恨疏略然,府君之心迹言行槪見於此云云 不肖男 重魯 謹識
出典:竹窩集 券之五六 附綠
譯者註: 츤髫(츤초): 이를 갈 나이 7곱살 나이
一無違忤(일무위오); 한번도 거스르거나 어김이 없음
윤우지읍(允友之邑 친구간의 신의와 애정이 지극) 邑(邑憐의 준말로 근심하고 불쌍히 여김)
可見一方(一方之藝) 한 방면에 뛰어난 재주 있어 가히 우러러 볼 지고
文章에는 韓柳: 韓愈와 柳宗元으로 唐代의 文章家에 비유
洛中 諸搢紳 :낙동강을 중심한 영남지방에서 이름난 선비들
憂戚怒詈之容 :근심하고 슬퍼하거나 성내어 꾸짖는 모습
定省之節: 아침에 문안인사와 저녁에 치침자리 방이 춥거나 덥지않은지 빠지지 않고 살핌
彛倫日用之節:(이륜일용지절) 사람이 지켜야 도리다
滅性(멸성) 性은 생명 곧 돌아가시다
喪擗踊(상벽용) 상을 당해 가슴을 치며 통곡
諮嗟(자탄) 묻고 감탄
捃摭(군척) 책을 읽고 요점 정리
恬淡(염담): 恬淡 虛無의 준말 곧세상명리를 떠나 공부에 정진
名繈利鑰(명강이윤) 질긴 포대기나 자물쇠로 名利 봉쇄함
O 은 인쇄가 흐려 해독을 할 수 없거나 활자가 없는 글자이며, 원문에는 띄어쓰기가 없다.
독자를 위해 편의상 쉼표나 띄어 쓰기했음을 밝힌다.
家狀(竹窩 相奎) 國譯
아버님의 諱는 相奎, 字는 京文, 號는 竹窩이시다 貫鄕은 安東泰師 權公인 諱가 幸이 시조이시다. 그로부터 9세에 諱 守洪은벼슬이 尙書左伏射上將軍(상서좌복야상장군)이셨고 3대 후에 諱 漢功 은 號가 一齋는 벼슬이 右政丞인 呂泉府院君이시며 조정에서 내린 시호(諡號)는 文坦으로 휘 仲達을 낳아 벼슬은 花原君으로 봉해졌으며 시호는 忠憲이시다. 그는 諱 嗣宗을 낳았으며 벼슬은 吏曹判書였다. 諱 執德은 軍器正이였으며 휘 忖을 낳았으며 그는 梁山郡事를 엮임하였으며, 휘 繼는 福과 進을 낳았으며 諱 永은 仝軍資監正벼슬을 했으며, 諱 敬義는 尙衣院別座 벼슬한 이를 낳았으며, 諱 光國은 벼슬이 直郞別坐였으며, 諱 玉衡은 都事벼슬을 한 이를 낳았으며 諱 銖는 承仕郞을 낳았다. 朝鮮朝에 내려와 諱 三變은 號가 鶴山인데 公은 임란 당시 국가에 대한 忠節과 부모에 대한 孝行으로 명성이 높았으며 江城(丹城 지금의 山淸)으로부터 密陽에 처음 移居 위양에 정착하게 되었으며, 公의 훌륭한 의적(懿跡)의 자취가 定軒 李先生 鐘祥이 지은 그 분의 行狀과 性齋 許先生이 지은 墓碣銘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공의 손자인 爾矩는 벼슬이 嘉善大夫였으며, 이분이 선친의 6代祖이다. 高祖考이신 諱는 大徵이며 호는 華庵은 判尹과 曾祖考이신 諱는 楫이요 號가 石泉은 承政院 左承旨였다. 曾祖妣中和 楊氏는 命和의 딸로 淑夫人으로 봉해졌으며, 祖考의 諱는 貞義요 號는 希賢인데 孝友와 學行으로써 戶曹參判에 봉해졌으며 그의 文集이 전해오고 있다. 祖妣 陵州 具氏는 處士 昌彦의 女息으로 貞夫人으로 봉해져 대대로 名望높은 家門으로 내려왔다.
조부님은 諱가 洙이며 字는 士源이며 號는 梧谷으로 문집이 있으며 性齋 許先生과 定軒 李先生과 더불어 함께 공부하시며 서로 도덕과 의리로써 交際하신 사이다. 乙丑년 判書 李參鉉 公인 本道按節이 조부님 비석에 소개하시기를 壽와 德을 고루 겸비하시고 學行이 敦篤하셔 丙寅년에 知事를 除受하셨다. 戊辰年 棠伯 吳取善이 평하시기를 壽와 德에다 평소 어려운 가운데도 항시 편안한 마음으로 자신 의 분수를 지키신 분이라 하여 己巳年에 崇政知中樞 직함을 올리셨다. "내리 3대에 걸쳐 연이어진 경사였다." 고 吏判으로 계셨던 南公 性元께서 梧谷 文集에 평했다. 유후 치장 홍후 선모 이후 경직 여러 공들께서 쓰신 재실 현판에 기록되어져 있다. 承旨 南公 錫熙가 지은 詩集 序文에도 기록되어 있으며 梁山郡事 李公 能華가 지은 行狀에도, 性齋선생이 조부님 葬禮 追悼文에서 이르시기를 은혜가 증조로부터 조부 아버지 대까지 선대 3대에 걸친 君子의 德이 嶺南 전역에까지 알려졌으며 대대로 전해질 그분들의 시와 글들이 자손들에게는 길이 전해 질 가풍이라고 찬양하셨다. 생과 사의 죽음의 길은 아득하기만 하나 우뚝 솟은 가문의 위업인 문집 6권이 있다.
貞敬夫人인 晉州河氏는 處士 繼淸의 女息이다. 이름이 沖이요 호가 遯齋의 後孫이다. 純廟 己丑 十二월 二十四일 巳時 生이다. 선친과 어머님 양위분이 하루는 위양 집에서 꿈을 꾸셨는데 仙童 二人이 하늘에서 내려와 뜰에 앉아 쌍피리를 불고 가자 梧谷 公이 꿈에 들은 시를 이르시되 하늘에서 내려온 仙童이 옥피리를 지참하고 뜰에서 춤을 추며 피리를 불고 나더니 "이 아이는 반드시 키가 작을 것이라. " 라고 했다. 그런 연후 꿈에 본 모습대로 선친께서 태어 나셨다. 타고난 稟性이 밝고 明敏했으며 剛直하셨다. 7세인 어린 나이인 데도 놀기를 멀리하며 勉學에 힘써 이미 사물에 노련한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 병신년 8세 때 부모로부터 학업을 전수받던 어느 날 저녁 꿈속에 두 仙童이 손목에다 구슬을 꿴 팔지를 끼고 나타나 뜰에서 춤을 추고 돌아간 적이 있었다. 그해 여름 시구를 지을 적에 장마인 '苦雨' 시에 이르기를 瞻角雨鈴鈴(첨각우령령) 처마 끝에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千日睡詩에 이르기를 一枕度三年(일침도 삼년)단 한번 눕는 것도 삼년이라 했으니 驚人語多此(경인어다차) 우리들에게 경계한 말이 얼마나 매서운지를! 어릴 때부터 지극한 효성으로써 매사에 부모님의 뜻을 기뻐함으로써 섬겼으며 명을 거스르거나 어김이 없었다. 더구나 부모님 곁을 잠시라도 떠지 아니하며 산에가서 땔감나무를 하거나 아니면 물가에서 고기를 잡아 부모님을 지극한 정성으로 봉양하셨다. 14,5세에 이르러. 자기 스스로 학문을 익히시고 시문에 재능이 뛰어났으며 거기다 과거장에서 쓰이는 일정한 양식의 글(程文)과 그 이외의 문체에도 진력하였으며 특히 四書五經의 경전을 표준으로 삼아 子史類인 壯子 列子인 諸子百家들의 책은 물론이요 史記와 漢書에도 막힘이 없었다.
丙辰년 梧谷 公이 密陽 初同 面 新基里(새터)에 있는 朴氏들 齋室인 慕先亭에 피서 가셨다가 몸이 불편하여 가마에 실려 귀가하셔 자리에 누워 계셨기에 백방으로 약을 구해 처방했으나 효험은커녕 더 심해져 얼음을 깨 목욕齋戒하고 글을 지어 기도하며 그 자신은 돌보지 않고 정성을 쏟은 결과 근 한 달 만에 정상인으로 회복이 되자 이런 일은 부모에 대한 자식의 극진한 효성에 감응한 바 전후 사정을 엄밀히 아시는 이가 일러 말하기를 효의 본보기인 至極한 情誠과 補養 食으로 病 수발했기 때문이라고 李侯 敬稙 李侯 承臣 李侯 象億 兪侯 致長 南侯 庭顯 여러분께서 말씀하셨다. 근처에 계시는 沈公 樂正 柳公 敎祚 鄭公 顯德 鄭公 顯奭 洪公 憲述 이 분들도 같은 말씀이었다. 돌아가신 스승이셨던 性齋 許先生 定軒 李先生 두 분의 문하생으로 부모님 명을 받들 듯이 따랐다. 이로부터 두 스승님의 강론이 있을 때마다 “빠지지 않고 경청했다. 자연 현상이나 인간의 본성에 관하여 다소 이해되지 않은 부문이 있으면 반드시 질문하여 그 이론에 물 흐르듯 막힘이 없을 때까지 대충 넘기지 못하는 學究的인 성격의 소유자” 라며 두 스승 모두가 그것을 칭찬하셨다.
丙寅년에 아버님께서 갑자기 돌아가시자 李道潭께서 비석 돌에 새겨 이르시기를 ‘受業師門 家貧履道’ ‘높은 스승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았으며, 비록 가난했으나 특히 允友之邑 (친구간의 신의와 애정이 지극한분)이라’고 하셨다. 定軒先生이 조부님 梧谷公에 대해 평하시기를 염(炎+刂번적이다) 염雖未必 有實效亦 可見一方(一方之藝) “친구 간에 신의가 있고 근심하며 아껴주며, 비록 광채는 번적이지 못했으나 실적이 있는 바 또한 본받을 일이며 한 방면에 뛰어난 재주 있어 가히 우러러 볼 지고”라며 여러 公께서 이처럼 비평하였다. 그 후에도 연이어 평들이 있었으며 비석에 새겨 지기도 했다. 銓曹(인재들을 전형하던 관청)에 있던 雷巖 南公인 性元께서 소개하시기를 漢世의 孝廉과 宋代의 傑出한 분이라 했다. 左相이었던 韓公이 先親을 가리켜 이르기를 詩는 당나라의 李杜(李白과 杜甫는 唐의 詩宗이었음)와 겨루어도 기울지 않는다고 했으며, 文章에서는 韓柳(韓愈와 柳宗元으로 唐代의 文章家)라고 극찬했다. 주석(注釋)을 붙여 놓았으나 끝내 이해되지 않은 부문이 있어 丁卯 년에 忠州 李道潭을 찾아가 며칠을 묵으며 講論한바 梅山 洪公이 어그러진 부문을 바로잡은 책자를 통해 이해가 안 되는 어려운 뜻을 쉽게 이해하고는 함께 낙동강에 노닐다 귀향했다. 洛中 諸搢紳 (낙동강을 중심한 경상도 지방 뛰어난 선비들이) 부친을 송별하며 시에 이르기를 선대의 좋은 행적이 三代에 걸쳐 연이어졌고 백부가 일찍 여의고 血肉이 없으므로 중고(仲考)가 맏이가 되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 湓池亭 公의 祭祀와 府君(돌아간 養父)과 함께 두 부모님을 모시며 봉양함으로써 그 분들의 뜻을 따르고 본분을 다 했으며 근심하고 슬퍼하거나 성내어 꾸짖는 모습(憂戚怒詈之容)을 한 번도 본적이 없다. 거기다 부모님께 定省之節은 말할 것도 없고 온갖 용품을 장만하여 冬溫夏정 즉 겨울은 따스하게 여름은 시원하게 한점 소홀함이 없었다. 한번은 돌아가신 어머님께서 저에게 당부하여 이르시기를 “부모님을 모시는 한 만금이 생겨도 사업은 경영하지 말고 오로지 부모 봉양에 진력 하여라.” 고 하셨으니 애정으로 길러주신 어머님의 심정이 아니고 무엇이랴?
아버님의 스승이신 *性齋 許先生과 定軒 李先生 두 분이 모두 돌아가시자 글을 지어 올렸으며 만년에는 주자의 글에 전심전력하였으며 退陶 李退溪선생의 글을 읽고는 우리나라의 道祖(정치 예악 학문 등 전 부문에 걸쳐 뛰어난 분)라 하셨다. 항상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주자를 배우고 싶거든 먼저 退陶를 배워라."아니면 자기 자신의 재능을 알고 뜻있는 길을 가고자 하는 인물이 있다는 정보가 있다면 遠近을 가리지 말고 맨 먼저 찾아가 들은 바와 같이 옳게 여길 만한 사람이거든 반드시 그를 숭배하여 높이 받들며 그와 더불어 훌륭한 교육기관이나 높은 관청을 지나는 일이 있거든 반드시 우러러 보고 '아 이런 곳도 있구나 하며 놀라야 하고 先賢들의 무덤이 어디 있다는 것을 들으면 반드시 찾아 가서 적어 놓은 行蹟들을 살펴보라.' 비록 간략하게 기록 되어 있지만 거기에는 개인의 의도한 바의 뜻을 위해 그 사람의 한 生涯가 들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런 것을 통해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여 주어진 책무를 다 하라. 사람이 지켜야할 책무란 곧 제례의식이다. 1)언행을 삼가며 2)학업은 돈독히 3)분은 다스리고 4)욕심은 절제하며 5) 실수는 한 번으로 족하며 6)국가에는 충성을 7)부모에게는 효도를 8)형제간에는 우애로써 9)사람을 대함에는 인정으로 10)매사에 정직하고 성실하라. 위에서 제시한 열 가지가 이륜일용지절(彛倫日用之節) 즉 사람이 지켜야 도리다. 警發則深矣 두려움이 생기면 깊이 감추게 된다. 그것을 일러 心性情理氣辨 즉 천성인 인정과 도리가 氣分에 따라 快와 不快로 판별되어지며 學道辨 즉 배움의 길은? 선택하는 기준도 다르다. 1)선행이 위주냐, 2) 정신세계냐, 3)마음 다스림이냐, 4)평탄한 길이냐, 5)수학(數學)이냐, 6)글이 아니면 글씨냐, 7)梅蘭菊竹 같은 四友들의 인품이냐, 8)천문학이냐. 어렴풋한 理想론으로 모두가 학문에 힘쓰기를 깨우치는 항목들로 요약 정리한 것이다.
察訪이신 金公 命基께서 편지를 읽고 옮겨 이르시기를 韓博士는 괴물이다. 라 했으며 進士이신 朴公 章錫께서 시집 제목을 보고 이르기를 이전에 竹窩 先生의 글을 보고 이내 聖世의 비밀문서를 보관하던 곳을 알았으며 본도 관찰사이신 府元公 世徹이 거마에서 내려 먼저 묻기를 竹窩 어르신은 權氏 門中의 명성이 높은 선비 아닌가? 그 분은 곧 한 고을의 名士가 아니라 한 고을은 물론 한 道의 명망 높은 선비요, 이 나라의 명망 높은 선비시다. 丙子년에 민심이 몹시 수선스러울 때 자기의 祿奉을 보내어 구제해 준 어른이다. 임오 년에 교리 정공 인협이 편지를 보내어 이르기를 “先生의 門下에 文徒들이 구름처럼 모여 들었다.” 고 했듯이 배우고자 모인 그들에게 열심히 깨우쳐 주었다. 당시 여러 文徒들이 스승을 思慕하는 뜻을 기려 大山 밑 東山 언덕에다 작은 집을 지은 것이다. 그곳이 바로 竹窩 즉 府君 少時 적 講義도 하며 學文을 연구한 곳이 바로 이 집이다.
李侯 象億이 竹窩 板本을 썼으며 竹窩記는 梁山郡事 沈公 樂正이 썼다. 追感錄의 跋文은 知府兪公 致長이 지었다. 進士李公 在선 晩坡孫公 鍾泰 文案孫公 翊龜 日省李公 章表 東阿李公 濟永 竹厓孫公 亮緖 杏村孫公 振華 參判宗人 永秀 進士 李公 學運 參奉李公 鼎相 參奉李公 龜相 應敎韓公 喆愚 群守南公 庭友 承旨黃公 仁夏 府使李公 文永 注書洪公 永祚 晩松朴公 起永 李公觀潤 族人世淵 參奉成公 浩圭 朴公龍德 朴公光軾 成公守鎬 河公發運 李公志憲 黃公棯 金公漢邦 監役蔣公漢龍 進士元公 拭 承旨南公 錫熙 進士李公 觀熙 進士成公 浩民 進士裵公 克紹 여러 諸賢께서 竹窩 原韻으로 서로 화답함으로써 부군의 정의를 위해 契를 만들었다. 府君께서 三從弟인 華南公 相佑와 같이 先祖이신 鶴山公의 懿蹟과 齋舍에 보관된 여러 서적들을 重刻하여 후손들이 훌륭한 先代들의 威業을 기리고 保存하기 위하여, 그것을 본보기로 삼을려고 遠近 各處에서 冊箱子를 짊어진 學徒들이 항시 이어졌고 그로부터 수많는 학도들이 齎舍 마루를 꽉메운 가운데 講論이 쉼없이 이어졌다.
당시 없어진 功令之文(學事에 관한 학령) 性理學의 立志나 道義 영역이 마치 頹瓢屢 허무맹랑한 恬淡(염담) 恬淡 虛無의 준말 곧 세상명리를 떠나 공부에 정진이지만 생산 활동은 하지 않고 性操益堅剛不趨(本性만 志操를 지킨다고 예도를 따를 수야!) 名繈利鑰곧 명리를 떠나 儉約으로 뜻은 학문에 두고도 오히려 윤락에 빠지는 이가 있다. 아는 친구들에게 농담으로 대처에 가서 노는 이유를 물으면 立身揚名하여 美服甘旨로 부모님을 봉양하고 싶은 욕심이다. 지금 부모가 모두 살아 있으면 몰라도 없는 나는 어찌하랴? 逐鹿者不顧兎 즉 사슴을 쫓는 자는 토끼를 보지 않듯이 그렇게 할 바에야 출세하여 무엇 하랴?제가 제목을 붙인 책이름 竹窩江南漫錄凡二十五권 못난 五 男妹 죄다. 그 많은 책의 글들은 모두가 일찍 어머님을 여의고 귀가하시어 홀로 이십여 년 간의 삶을 엮은 것들이다. 오남매를 손수 키워 출가시켰다. 항상 경계하여 이르기를 '재물은 얻기 쉬워도 형제는 얻기 어렵다.'고 詩에 말하지 않았는가? 서로 삼가고 사랑하라. 망서리지 말라. 옛 성현들은 이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只緣花底鶯聲巧 忍使天邊雁影分 "꽃나무 아래에서 형제들끼리 시끄럽게 싸우는 꾀꼬리를 닮지 말고 저 먼 하늘에 줄을 지어 날고 있는 기러기 형제처럼 형은 앞에서 인도하고 아우들은 형을 따라 비록 그 길이 외로와 보일지라도 그게 사람이 가야할 길이다." 라고 하셨다.
癸巳 1893년 온 나라가 대기근으로 인해 백성들이 사방으로 만주나 북간도로 떠돌이 하던 때였다. 定軒先生 從者였던 在殷氏가 食率들을 거너리고 목숨을 버리겠다는 소문이 알려지자 부군께서 이르기를 그대들이 원하거든 아무 염려말고 우리집으로 데리고 와 生死苦樂을 함께해야 한다고 이르셨다. 그 다음날 못난 제가 가빈한데다 해마다 주리며 살고 있는데 주변까지 어찌 구할 수 가 하며 행여 옛친구분의 두터웠던 정분을 해칠까 두려운 마음으로 부군께 여쭈었더니 저를 痛責하시며 만약 너희들 같은 생각이면 세상에 어찌 朋友之義가 있으랴? 平安無事할 때는 친구가 있고, 어렵고 힘들 때 외면하는 친구 있어 무엇하라? 하시며 노를 풀지않으시기에 제가 여러날을 잘못했으니 용서를 빌었더니 며칠 후 在殷氏가 食率들을 데리고 저희 집에 오자 부군께서 매우 기뻐하시며 곡식을 말 아니면 되로 나누어 주며 수개월간을 한 집에서 함께 기거 했다.
부군께서 병환으로 점점 깊어지자 仲兄을 불러서는 집안 가사에 대해서는 일체 말 한마디 없이 오직 在殷氏 가족들만 부탁하고는 돌아 가셨다. 在殷氏가 매우 서럽게 痛嘆해 하면서 祭文에서 이르기를 轉向滋州非無望 走一鄕知舊百代宗親" 참다운 인생관을 모범으로 보였으니 宗親들에 알리어서 세세토록 이어가세" 라고 했다. 李殷 公이 이르기를 "此何行色來 則來我更勿 向他亂中同 閑亦不易事 株玉難繼計 이런 행색으로 무슨 일로 왔느냐? 이렇게 오려거든 다시는 오지말라. 사람 만나 교제하면 어려운 일도 풒리나니 마을앞의 閑門인들 쉬이 막을 일이 아니다."라고 했으며, 선친게서 "日先憂呼兒 豚幼生於膝 下晨飯暮粥 後先必嘗此 雖細微仁愛 하루는 수심에찬 음성으로 나이 어린 자식들을 무릅에 앉혀놓고 아침에는 밥이지만 저녁에는 죽이었다. 차후에는 이런 일 기필코 아니 하마 아주 작은 것에도 사랑으로 키웠다." 라고 譬喩(비유)하셨다.
高廟 1894년11월 20일 먼동이 틀 무렵 병이 심해져 해가 뜰 무렵 둘째에게 일러 孫泰鳳에게 편지를 쓰라고 한 후 그날 저녁 10경에 취침하시자 殞命하셨다. 享年 육십육여년 葬地는 長嶝 丑之原에 안장하였다. 배필은 先山 金氏 致豹의 女息으로 籠巖0 의 后로 至行至德이 있어 先考를 항상 손님 접대하듯 공경하여 섬겼다. 그 孝行實跡이 王考이신 梧谷公孝婦傳에 실려 있다. 先先考께서 운명하신 二十一年 만에 甲戌 五月十三日에 于大山下甲坐之原에 안장되었으며 膝下에 四男一女를 두었다. 長男重琦,二男重舜,三男重魯는 伯考后로 입적하고 四男重周에다 女息은 李文和에게 시집을 가 아들 李男守와 坤이 있으며 重琦의 男은 泰道 泰吉 泰永 泰殖이며 重舜의 男은 泰應 泰駿 泰元이며 伯考앞으로 간 重魯의 男은 泰用 泰喆 泰民이며 重周男은 泰元이나 애석하게도 일찍 그만...... 府君의 嘉言과 善行등 많은 遺輯들이 없어진 것은 不肖한 저의 죄다. 듣고 본 것을 두서없이 간략하게 쓴 것이 비록 한스럽지만 府君의 心迹과 言行을 간략하나마 본대로 적었다. 不肖男 重魯 謹識
國譯者註:性齋 許傳과 定軒 李鍾祥
性齋 許傳(1797년 정조 21∼1886년 고종 23).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시조로부터 30세손이다. 자는 이로(而老), 호는 성재(性齋) 포천에서 악록공 허성의 9세손으로 출생했으며 정언 허형(許珩)의 아들이다. 황덕길(黃德吉)의 문인으로 성호학파(星湖學派)의 계승자가 되었다. 1835년(헌종 1) 39세에 늦게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1840년 기린도찰방(麒麟道察訪) 1844년 전적(典籍)·지평(持平)을 거쳐 1847년에 함평현감으로 나갔다가 1850년 교리· 경연시독관(經筵侍讀官)·춘추관기사관을 역임하였다. 이로부터 경연에 참여하여 국왕에게 유교경전을 해설하는 학자적 관료로서의 구실을 하게 되었다. 1855년에 당상관이 되어 우부승지와 병조참의, 1862년 진주민란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민란이 일어났을 때 3정책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1864년(고종 1) 김해부사에 부임하여 향음주례를 행하고 향약을 강론하여 유도(儒道)를 크게 일으켰다. 또, 공무의 여가를 이용하여 젊은 선비들을 모아 직접 교육을 하였고, 임기를 마치고 서울에 돌아와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이어 1876년 정헌대부(正憲大夫), 1881년 이조판서에 제수되고 1886년에는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이르렀다. 이익(李瀷)·안정복(安鼎福)·황덕길로 이어지는 기호(畿湖)의 남인학자로서 당대유림의 종장(宗匠)이 되어 영남 퇴계학파를 계승한 유치명(柳致明)과 더불어 학문적으로 쌍벽을 이루었다. 그의 사상은 주로 경연에서 경의(經義)와의 관련에서 항상 실심(實心)·실정(實政)을 강조하였을 뿐 아니라 현실에 투철하여 구체적인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1852년(철종3)에 양천허씨 족보 서문을 쓰셨고 1866(고종3)에 김해도호부사로 있으면서 김수로왕 재실당호를 숭선전(崇善殿)으로 정하도록 고종에게 진언하여 허락을 받게 하고 숭선전 비문(崇善殿 碑文)을 지었으며 1868년(고종5)에는 양천허씨 세고 발문 등 많은 문헌을 남기신 분이다.
* 定軒 李鍾祥(1799 정조23∼1870고종7)
조선조 문신 학자 본관은 여주(驪州). 호는 정헌(定軒). 경상북도 경주출신이며 父는 정설(鼎說)이며, 母는 영양남씨(英陽南氏)로 경희(景羲)의 딸이다. 백부 정약(鼎若)에게 입양되었으며 조부 헌석(憲錫)에게 수학하여 1831년(순조 31) 진사시에 합격하여1836년(헌종 2) 장릉참봉에 임명되었으며, 이어 돈녕부주부·한성부판관·용궁현감·강원도사 등을 역임하였다.1862년(철종 13) 還弊 結弊 軍弊의 시정대책을 올렸을 때는 왕으로부터 책자를 상으로 하사받았다.편지로써 김매순(金邁淳)과 태극치성설(太極穉盛說)을, 남고(南皐)와 인도심사칠변(人道心四七辨)을, 한운성(韓運聖)과 심성설(心性說)을 논하였다. 가선대부 사헌부 대사헌 겸성균관좨주에 추증
* 湖巖 이병철(1910-1987)은 경주 이씨 집성촌인 의령 정곡에서 아버지 이찬우와 어머니 안동 권씨 사이의 2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찬우는 이곳에서 4대째 내려오는 천석꾼 지주였다. 조부 이홍석(1838~97)이 만년에 세운 서당(문산정)에서 한학을 배우기 시작했다. 서당은 지금까지 그대로 보존돼 있다. 생가에서 산으로 난 오솔길 산속 깊이 숨어 있는 서당(문산정)이 있다. 조부는 학문에 소양이 있어 당시 영남의 거유(巨儒)로 일컬어지던 許性齋의 문하생으로 시문·성리학 등에 능했다.
* 家狀(竹窩 諱 相奎) 權相奎(1829-1894)와 湖巖 조부 이홍석(1838~97)과 함께 영남의 거유(巨儒)로 일컬어지던 許性齋의 문하생이었음
* 麗澤堂:산청군 신등면 평지리 법물마을에 있는 고건축물로 벗끼리 서로 도와 학문을 닦고 수양에 힘쓰는 집이란 뜻의 이름이 붙은麗澤堂(이택당)은 조선 후기 성호학파의 학문을 계승한 性齋 許傳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제자들이 건립한 것이다. 곧 이택당은 1890년 만성 박치복을 중심으로 하는 이 지역 선비들이 모여 ‘성재선생문집(性齋先生文集)’을 간행하기 시작해 1년만에 완성하고 세운 건물로 성재의 학문을 계승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