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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의 고전영화 마니아들이 손꼽아 기다리던 <란: 크라이테리언 컬렉션>(크라이테리언 일련번호 316)이 지난 11월 22일에 발매됐다. 앞서 발매된 <카게무샤>(2005년 3월 발매)가 ‘역대 크라이테리언 발매 타이틀 중 최고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지라, <란>에 거는 팬들의 기대는 가히 ‘측정 불능’의 수준이었다. 과연 이번 <란> 역시 <카게무샤> 정도의, 아니 그 이상의 출중한 완성도를 지니고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Yes!’이다. 약간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크라이테리언이 앞서 발매한 <카게무샤>는 이번 <란>을 위한 ‘거대한 예고편’이었다고까지 볼 수 있다. 한 마디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스스로 “내 일생일대의 역작이며, 나의 ‘유언’과도 같은 영화”라고 칭한 작품에 어울리는 ‘명품 DVD’이다.
<카게무샤>때도 그랬듯, 본 타이틀을 보다 재미있게 감상하기 위해서는 영화에 관련된 몇 가지의 배경지식을 미리 ‘예습’해둘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과는 달리 <란>은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을 일본식으로 각색한 작품’이 아니다. 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아키라 감독은 자신이 이전에 구상한 전국시대 영주의 이야기를 보다 흥미진진하고 극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리어왕>의 플롯을 차용한 것이다. 즉, <란>은 처음부터 ‘<리어왕>을 일본식으로 개작한 작품’이 아니라 ‘일본 작품에 <리어왕>의 구조를 도입한 것’에 가깝다. 따라서 (서양 희곡을 각색한 작품답지 않게) 영화의 플롯 전반에 일본식 정서가 뿌리 깊게 배여 있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영화를 보신 분들은 할리우드 산 스펙터클 영화에서는 좀처럼 맛보기 힘든 ‘불가사의한 연극적’ 색체를 뚜렷하게 느끼셨을 터, 그 원인 역시 바로 여기에 있다. 즉, 아키라는 서양영화의 문법이 아닌, 일본 노극(能劇) 및 민속극의 형태를 빌려 <란>의 스타일을 구축해 나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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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DVD는 이런 <란>만의 독특한 영화 수사학을 ‘시청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완벽한 텍스트 자료라고 할 수 있다. (타이틀을 구입하신 분들은) 기왕 비싼 돈을 주고 산 타이틀 인만큼 디스크를 수차례 반복감상하시길 권하며, 좀 더 시간이 나시는 분들은 ‘정지해 있는 듯 끊임없이 움직이는’ 놀라운 장면들의 구성 상태를 프레임 단위로 분석해보시길 바란다. 어떤 할리우드 영화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오묘한 ‘미학’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여력이 되는 분은 비평가 스티븐 프라이스의 음성해설 역시 반드시 경청하시길 권한다.
아키라 감독이 <란>의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구상하기 시작한 것은 1975년경이었다. 당시 그가 구상한 것은 ‘히데도라’라는 16세기 영주의 비극적인 이야기였다. <카게무샤>와는 달리 이 이야기는 완전한 허구이며, ‘판타지’에 가까운 것이었다. 아키라는 자신이 구상한 이야기에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의 플롯을 접목시켜 보다 아기자기하고 스케일이 큰 이야기로 개작해 나갔다.
하지만 (<카게무샤> 때 그랬듯) 당시로서는 이 이야기를 영화화 할 방법이 전무했다. 아키라는 (언제 올지 모르는) ‘때’를 기다리며 <카게무샤> 때처럼, 자신이 구상한 이야기를 여러 장의 삽화(혹은 ‘잠정적 스토리보드’라고 보아도 좋다)로 그려 나갔다. 물론 이 그림들은 아키라가 “나는 어쩌면 죽을 때까지 <란>을 영화로 찍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최소한, 후세 사람들에게 내가 머릿속에 그린 비전이 어떤 것인지라도 보여주고 싶다”라는 처절한 심정으로 그린 것들이다. 이 삽화들은 DVD의 부록 디스크에 삽입된 영상물 “Image: Kurosawa's Continuity"에서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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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게무샤>(이 영화는 당시만 해도 일본 영화사상 가장 많은 제작비가 투입된 작품이었다)를 능가하는 ‘부담스러운’ 스케일 때문에, 오랫동안 <란>의 제작은 지연될 수밖에 없었는데, 프랑스인 제작자 세르쥬 실베르만이 ‘물주’를 자처하며 나서면서 극적으로 영화 제작에 청신호가 켜졌다. 당시 아키라는 <란>의 제작 총 지휘를 맡은 하라 마사토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건내며 <란> 프로젝트에 관한 집착을 원색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나에게 있어, <카게무샤>는 <란>을 만들기 위한 ‘연습 과정’이었소. <란>은 나의 일생일대의 역작이 될 것이오!”
스스로 ‘드림 프로젝트’라고 칭한 작품인 만큼, <란>을 제작하며 아키라는 어느 때보다도 철저하게 사전 준비를 했다. 아키라의 연출 스타일은 매우 독특하다. 그는 촬영에 앞서 수없이 많은 리허설 과정을 거치지만, 정작 본 촬영은 모든 것들이 갖추어진 상황에서 ‘단칼에’ 끝내곤 한다. 일생일대의 ‘매머드급’ 영화였던 <란>에서, 그의 이런 작업 패턴은 완전하게 확립됐다. 머리 속에 그린 것들이 찰나의 영감을 매개로 카메라에 포착되는 순간을 그는 절대 놓치지 않으며, 배우와 스탭들에게 그 영감을 고스란히 전달하는 노하우 역시 탁월하기 이를 데 없다.
이런 부분은 부록 디스크에 담긴 첫 번째 영상물인 <A.K.>(<란>의 촬영장을 주된 배경으로 찍음)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다. 74분에 달하는 이 영상물은 프랑스의 유명한 사진, 영화, 시나리오 작가인 크리스 마르께가 만든 것으로, 정확히는 ‘다큐멘터리’라기 보다는 ‘거장에게 바치는 찬양시’라고 볼 수 있다. 딱딱한 내용의 다큐멘터리와는 달리, 이 영상물은 매우 시적인 분위기를 띠고 있으며 편집과 촬영 역시 대단히 사색적이어서, 동양의 전설적인 감독에 대한 마르께의 존경심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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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부록 디스크에 담긴 두 번째 영상물인 <구로사와 아키라: It is wonderful to create>에서는 <란>이 영화화되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시간 순서대로 확인할 수 있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 영상물은 (<카게무샤>에 실린 메이킹 다큐멘터리처럼) 일본에서 방영된 TV용 다큐멘터리 ‘Toho Masterworks Series'의 한 에피소드다. 영화 제작에 관련된 스탭과 배우들이 총출동하여, 당시의 회고담을 실감나게 들려주며 귀중한 자료화면도 수없이 포함돼 있다. 아키라의 팬이라면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할 영상물이다.
크라이테리언의 타이틀이 늘 그랬듯, 이번 <란>에도 30페이지에 달하는 근사한 부클릿이 제공된다. 여기에는 비평가 마이클 윌밍턴의 글과 1985년 10월에 ‘뽀지티프(Positif)’ 지에 실렸던 구로사와 아키라의 인터뷰 기사, 그리고 1985년 9월에 ‘라 르뷔 뒤 시네마(La revue du cinema)’지에 실렸던 다케미츠 토루(<란>의 음악)의 인터뷰 기사가 차례대로 실려 있다. 셋 모두 흠잡을 데 없는 훌륭한 글이므로, 반드시 읽어보시길 바란다. 또, 영화 본편 디스크에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열렬한 팬인 시드니 루멧 감독의 인터뷰도 실려 있다.
“크라이테리언의 명성 그대로 - 놀라운 화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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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라는 이미 <카게무샤>를 통해 ‘동양식 컬러 영화 미학’의 정수를 구현해 세계를 놀라게 한 바 있다. 하지만 후속작인 <란>에서 그는 전작의 아성마저 무너뜨리게 된다. 전술했듯, <란>은 <카게무샤>와는 달리 ‘판타지적’ 색체가 강한 영화다. 따라서 <카게무샤>에 비해 색감이 보다 다채롭고 초현실적인 느낌을 띤다.
특이하게도 이 영화에는 클로즈 업 신이 거의 없다. 대부분의 신은 롱 쇼트와 익스트림 롱 쇼트로 구성돼 있으며, 일반적으로 ‘클로즈 업’으로 찍혀야 할 장면들이 <란>에서는 ‘미디엄 쇼트’로 표현됐다. 아키라가 이런 극단적인 스타일을 택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을 두 가지 들면, 다음과 같다: 1. ‘좀도둑의 시선’에서 주요 사건이 전개되는 <카게무샤>와는 달리 <란>은 ‘전지적 작가 시점’이 주를 이루는 영화다. 즉, 아키라는 하늘에 있는 신(神)이 지상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내려다보는 듯한 느낌을 부여하기 위해 이런 스타일을 택한 것이다.
2. <란>에서 주인공에 해당하는 히데도라의 역을 맡은 배우 나카다이 타츠야는 (자신의 실제 나이보다 스무 살 이상 더 ‘늙은’ 노인의 역을 맡았기 때문에) 늘 짙은 분장을 하고 촬영에 임해야 했다. (분장에만 매번 3~4시간이 걸렸다고 하니 이 배우의 고충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으랴!) 문제는 이런 타츠야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포착할 경우 관객이 분장한 부분을 쉽게 알아챌 수 있다는 것이었다. 결국 <란>의 ‘거리 두기’ 스타일은 ‘미학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리얼리티’의 측면에서도 불가피한 선택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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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크라이테리언 판 <란> DVD는 이런 마술과 같은 영상의 힘을 피부로 직접 느낄 수 있을 정도의 빼어난 퀄리티를 자랑한다. 이전에 Fox Lorber에서 출시한 <란> DVD의 경우는 컬러 타이밍이나 선명도 면에서 약간의 아쉬운 점이 있었는데, 이번 크라이테리언 판에서는 이런 약점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MTI 디지털 복원 시스템과 HD 트랜스퍼를 거쳐 화려하게 복원된 이번 <란>은 세계를 놀라게 한 그 ‘경이적인 색감’을 100% 재현하고 있다.
‘정중동’의 미학이 절정에 달하는 전투 신(<카게무샤>와는 달리 <란>에서는 전투 장면이 직접적으로 묘사된다)에서는 색감이 마치 ‘생물’인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감상자는 붉은 갑옷을 입은 군대와 푸른 갑옷을 입은 군대가 뒤엉키는 장면을 ‘인간 대 인간의 전투 장면’이 아닌 ‘색 대 색의 전투장면’으로 착각하게 될 것이다. 입자의 표현 상태 역시 대단히 안정돼 있어, 타이틀을 감상하는 중 ‘시각적 피곤함’을 호소할만한 부분이 전혀 없다. 디테일의 표현 상태 역시 빼어나 (‘클로즈업 신’이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답답함이 느껴지는 부분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 영화의 전반적인 스케일과 ‘거리 두기’ 스타일 등을 고려할 때, 가능하면 대형화면에서 타이틀을 감상하실 것을 적극 권한다. (아무리 DVD가 잘 만들어졌다지만, 32인치 이하의 디스플레이에서는 아키라가 의도한 ‘불가사의한 느낌’이 도무지 구현되지 않는다. 영화가 2.35:1이 아닌 1.85:1 비율로 찍힌 것 역시 두고두고 아쉽지만, 이것은 ‘태생적 제약’에 해당하는 부분이니 굳이 따지지는 않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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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비 디지털 2.0 사운드트랙 역시 훌륭한 퀄리티를 자랑한다. 이 영화의 음향 디자인은 <카게무샤>보다도 훨씬 세련되고 양식화 돼 있다. 특히, 영화의 ‘감정적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10번 챕터(넋을 잃은 히데도라가 불타는 성을 뒤로 하고 터벅터벅 내려오는 장면)에서는 ‘사운드 몽타쥬’의 미학 역시 절정에 달한다. (이 부분은 도저히 글로 표현할 방법이 없으므로, 직접 ‘눈과 귀로’ 확인해 보시길 바란다). 크라이테리언의 <란> DVD는 이런 기막힌 음향 디자인의 매력을 유감없이 재현해낸다. 대사의 전달상태도 대단히 만족스러우며, 동양적 색체와 서양적 색체를 동시에 담은 다케미츠 토루의 스코어 역시 훌륭하게 재생된다.
크라이테리언의 <란>은 모든 면에서 ‘명품’ 소리를 듣기에 부족함이 없는 타이틀이다. ‘역시 크라이테리언!’이라는 평가를 받은 이 타이틀로 인해, 향후 크라이테리언이 새로 발매할 다른 아키라의 타이틀들에도 ‘살인적인’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명품 컬렉터’를 자처하는 분들 중 아직도 이 타이틀이 없으신 분은 주저하지 말고 ‘지르시라’. 결코 후회 없는 선택이 될 것이다.
첫댓글 한글자막은 없나요? 공동구매 하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