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계서원의 누정인 공극루의 현판이다. ‘공극’ 이라는 말은 《논어》‘위정편’ 의 “ 덕으로 정치를 하는 것은 마치 북극성이 제자리에 머물면 뭇별들이 그 별로 향하는 것과 같다.”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또 공극루의 ‘극(極)’자는 북극성을 의미하는 말로, 이수형의 집인 공북헌과 의미가 상통하는 것이다
공북헌(拱北軒)
공북헌(拱北軒)에 걸려 있는 편액이다. 공북헌은 이수형(李秀亨, 1435~1528)이 세종의 왕위 찬탈 후 낙향한 뒤 거처하고자 지은 집이다. 이수형은 17세에 음서로 벼슬자리에 나갔으며, 21세(1555년)에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는 불의를 참고 보며 세조의 조정에 머물러 있을 수 없어서 관직을 버리고 관란(觀瀾) 원호(元昊), 어계(漁溪) 조여(趙旅)와 함께 원주 치악산에 있는 바위에 충절을 맹세하며 나란히 이름을 새겨 놓고, 순흥 땅 도지리(현재의 봉화읍 도촌리)에 은거하였다. 거실을 지었는데, 3면이 벽이고, 북쪽에는 창을 두었다. 북쪽은 영월인데, 단종의 능침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이수형은 자가 영보(英甫), 호는 도촌(桃村), 공북헌(拱北軒)이다.
공북헌(珙北軒) 봉화읍 도촌리(奉化邑 都村里) 사제(沙堤) 마을 동산 서쪽에 所在하며
도촌 이수형〈桃村 李秀亨 朝鮮 第4代 世宗 17年(1435)~第11代 中宗 23年(1528)〉이 조봉대부 평시서령(朝奉大夫 平市暑令)을 지내고 단종(端宗) 때 이곳으로 내려와 平生을 숨어 살던 옛집이다.
도촌(都村)의 지세(地勢)는 동남향(東南向)으로 집을 짓는 것이 마땅한데 북향(北向)으로 집을 지었고
당실(堂室)의 제도(制度)는 방이 1間이고 마루는 배(倍)로 하였으며 3面은 벽이고 오직 北쪽에만 창문(窓門)을 둔 것은 단종(端宗)의 능침(陵寢)이 영월(寧越)에 있는 까닭이라 한다.
창설 권두경(蒼雪 權斗經). 눌은 이광정(訥隱 李光庭)의 유기(有記)와 시(詩)가 있다.
丈室沈沈小以盤 길집이 적고 침침함은 소반만 같고
開門惟見越中山 문 열면 오직 영월 중산만 보이네.
東遊白馬何時返 동쪽으로 백마 타고 간 님 어느 때 돌아올까
獨魄啼聲夜夜寒 두견새 우는소리 밤마다 차갑고야 -千 仞 室-
避地何年寄此間 도성을 피해 찾아온 땅 그 몇몇 해에 부딛쳤는고
巋然丈室想盤恒 높고 깊은 길집의 반반함을 다시 생각하노라
遣風曠世違相感 세상에 끼친 그윽한 유풍 서로 느껴서
高處會將翠壁看 높이 처한 뜻 저 푸른 벽 밑에 서려있네 - 拱 北 幹- 李光庭
拱北軒重修記
嗚呼此桃村李先生舊宅也先生年二十一棄平市署令爰宅于南土實 端廟東巡之乙亥歲其爲宅堂北而室南堂占三之二室壁其東南牗其上僅以納明堂亦東西壁而虛其北堂室之交紙以障之中置一戶通出入揭其紙如複窟然矯首遐觀惟天北是瞻村之面勢蓋東南向人之居宜背幽面陽今其湫隘陻鬱乃如此有非常情所可曉者蒼雪權公論其世而悲其志曰此壁立千仞底氣節也命其室爲千仞軒爲拱北訥隱李公從而記之曰先生是時纔入仕不與於集賢託孤之列其所自靖行遯罔僕而已猶不敢以平人自處平日所處甚於拘囚坐臥起居惟對越中之山蓋自以爲不死君之臣也亦意之耳及雉嶽題名一帖出然後先生之心與跡始炳然彰於世噫觀爛元公漁溪趙公卽世所稱生六臣者而先生之同二公題名實在景泰丙子六臣立槿前若干日則先生所居實之制卽六臣者安於死之心也良亦苦矣但訥翁記室時已言堂今無東壁尙有跡蓋先生未嘗自言其意故後之居者病其沉壅而去之也遠近眺廳咸以爲慨迺者先生而孫宗永諗于宗中曰世吾祖遺居者必也復吾祖舊制方不負古人堂搆之義遂因其跡而塗墍其東壁繚以周垣而設門以關之於是堂若室一如先生之舊而蓁蓁百粵之山况若几案而羹墻焉悠然而入望者其辰居之所耶橢然而徒倚者其拜鵑之樓也奧然而方丈者其羲皇民之北牕耶鄕之人士卽舊宅數弓地畏壘而尸祝之顔其樓曰拱極其亦風百世而興起者耶吁其可悲也夫其可敬也夫仁行生也後竊嘗升先生之堂而幸舊制之重新也遂不揆機僣妄叙其顚末如是云 時戊子陽復節前行翊衛 眞城 後人 李仁行 謹記
공북헌 중수기
오호라! 여기가 桃村 李先生이 사시던 구택이다. 선생은 二十一세의 나이로 平市暑令을 버리고 살 곳을 남쪽 지방으로 옮겨 왔으니, 端宗이 寧越로 안치되던 을해년(一四五五)이었다. 거처할 집을 짓는데 마루를 북쪽으로 하고 방은 남쪽에 마련하여 마루가 삼분의 이를 차지하였다. 방은 동남쪽은 벽이고 엇창살을 그 위에 설치해 겨우 채광만 하도록 하였으며 마루도 또한 동서쪽은 벽이고 북쪽은 비워 두었다. 마루와 방 사이는 종이를 발라 가리워졌고 그 중간에 종이로 문을 만들어 출입하게 하였으니 흡사 두 개의 굴같이 되어 있어서 머리를 들고 멀리 바라보면 오직 북쪽 하늘을 바라보게 된다. 村鄕의 지세는 대개 동남향이고 사람이 사는 집은 북을 등지고 남향이라야 마땅한데 집이 낮고 좁을뿐더러 너무나 옹색함이 이와 같으니 보통 사람들로서는 깨달을 수 없다. 蒼雲 權公은 선생 재세시의 세태를 논하고 선생의 뜻을 슬퍼하면서 말하기를 「이벽은 천길 절벽 밑에 서 있는 의기와 절조이다」 라고 하여 그 방을 천인실(千仞室)이라 이름 짓고 집을 공북헌(拱北軒)이라 하였으며 訥隱 李公이 그 뒤에 지은 글에서 「선생은 이때에 겨우 벼슬길에 나섰고 집현전 제위의 文宗 託顧之列에 참여하지도 않았으니 그저 자기의 처신을 깨끗하게 하기 위하여 숨어 살면서 세조 밑에서 신하 노릇하지 않으면 그 뿐이었으나, 감히 평인으로 자처하지 않고 평일에 처신하는 것을 죄수보다 더 심하게 하면서 늘 오직 寧越의 산을 바라보는 것으로 일삼았으나 대개 자신을 군주를 위하여 죽지 못한 신하라 생각하고 그렇게 생활하는 것이 선생의 뜻이었을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雉嶽山에서 쓴 題名 小帖子가 발견된 후에 선생의 지조와 행적이 비로소 완전하게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으니 슬프도다! ①觀灁 元公과 ②漁溪 趙公은 곧 세상에서 일컬어지는 生六臣이고 선생이 二公과 같이 題名한 것이 실제로 景泰 병자년(世祖 원년 : 一四五六) 六臣이 슬픈 변을 당하기 약간일 전이니 선생이 거처하시던 방의 제도가 곧 육신이 후회없이 죽은 마음이라 진실로 또한 괴로운 일이었을게다. 다만 訥翁이 집의 구조를 설명할 때 「이미 마루는 없어졌지만 동쪽 벽은 아직도 그 흔적이 있다」 고 하였는데, 대개 선생이 일찍이 집을 그렇게 지은 연유를 스스로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후대 사람들이 생활하는데 침침하고 옹색함이 괴로워 헐어버린 것이었겠으나 이것을 보고 들은 원근 사람들이 한결같이 개탄하였다. 이에 선생의 八세손 宗丈이 宗中에서 공론하기를 「조상의 遺居에서 세거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조상의 舊制를 복구하는 것이 고인이 집을 지을 때의 뜻을 저버리지 않는 의리이다」 라고 하여 드디어 그 자리에 동쪽 벽을 세워 흙으로 바르고 담장을 두르고 문을 만들어 잠궈 두니 비로소 마루와 방이 선생이 계실 때와 같이 되어서 초목이 무성한 ③百粵의 산세가 어렴풋이나마 책상 앞에 나타나 이 방에서 거처하시던 선생을 그리는 마음이 저절로 일어날 것이다. 한가롭게 이 방에 들어와 바라보는 사람은 端宗이 안치당했던 영월 땅을 바라볼 것이며, 편하게 의자에 기대어 바라보는 사람은 자규루에 경의를 표할 것이며, 그윽한 신선의 방에서 바라보는 太昊氏와 伏羲氏 시대와 같은 태평시대에 사는 백성의 북쪽 엇살창이 아니겠는가. 향리 사람들이 舊宅 가까운 곳에 선생을 숭앙하는 장소를 마련하여 그 樓를 拱極이라 하였으니 그 또한 본받아야 될 교화는 백세를 지나더라도 후인들에게 흥기시킬 것이 아니겠는가. 선생의 평생을 생각할 때 탄식하고 슬퍼할 일이오, 공경해야 할 일이다. 나는 선생보다 먼 후세에 태어나 이전에 남모르게 선생이 거처하시던 집을 가보았는데 옛 구조대로 집이 중수되었음을 다행하게 여겨 드디어 분수에 넘치고 망령스러움을 헤아리지 않고 중수한 전말을 위와 같이 서술한다. 때는 丙子年(一七六八) 十월 前 行翊 衛司 翊衛 眞城 後人 李仁行 삼가 씀
〈註〉 ① 觀灁 元公 : 元昊 ② 漁溪 趙公 : 趙旅 ③ 百粵 : 중국의 남쪽 지방으로 현재의 廣東省 지방. 진시황이 中縣의 백성들을 백월땅으로 옮겨 그곳 사람들과 雜居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는 端宗이 안치당한 寧越을 지칭함.
[출처] 봉화군 - 공북헌|작성자 허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