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과 볼거리가 만나면 두 몬〔물질〕이 한데 어울리고, 그래서 열매도 물질이어야 합니다. 물질이 물질과 한데 어울리면 물질이 생길 뿐입니다. 이렇게 볼 때만 바로 보게 됩니다. ‘나’니 ‘남’이니 ‘사내’니 ‘계집’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 때만 바른 답이 됩니다. 흰 빛을 보면 흼을 아세요. 잿빛이라거나 금속성이라고 하지 마세요. 노란 빛을 보면 노란 줄만 아세요. 노란 찔레나 노란 데이지로 보면 이미 바로 봄이 아닙니다. 더럼이 생겨난 게지요. 더럼이 생기게 하면 열매는 괴로움 참이 되고 닙바나를 얻지 못하지요.
겉으로는 물질만 있습니다. 마음-마음과 딸린 마음-성질은 이거다 저거다 하고 말합니다.
마음은 ‘나’다, ‘남’이다, ‘계집’이다, ‘사람’이다, ‘이 사람’ ‘이것들’ 하고 생각합니다. 마음은 ‘아름답다’ ‘보기 좋다’ 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큰 베풂이신 순룬 사야도께서 산냐〔알아보기〕가 본 것을 ‘덮는다’ 고 하신 까닭입니다. 올곧게 본 것은 물질〔루빠〕입니다. 본 것이 물질임을 모르면, 이것이 이름〔개념〕과 함께 온 마음〔나마〕입니다.
그러므로 눈과 볼거리가 만나면 몬〔물질〕만 생깁니다.; 그러면 앎이 있습니다. 물질을 알 때 큰요소 물질과 달라붙는 물질 사이에 있는 다름을 가려내지 않아도 됩니다. 물질을 알면 마음닦기는 잘돼 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질을 알면 이름〔개념〕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물질이다. 이것이 붇다가 마음닦은 담마입니다.
물질을 있는 그대로 알면 깨끗한 올곧음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루빠를 알 때만 냐냐 빠린냐(마음·물질이 개념과 다름을 헤아리는 앎)가 됩니다.
눈이 볼 때 물질을 볼 때만 바른 봄입니다.〔바로 봅니다.〕이렇게 올곧게 봐야 합니다. ‘사내’ ‘계집’으로 보면 안 됩니다.
이런 앎이 슬기로 봄입니다.
이것이 물질 지켜봄, 물질 헤아려 앎입니다.(냐타 빠린냐)
이띠 루빵-이것이 물질이다. 에타깡 루빵-물질일 뿐이다.
이것이 물질임을 지켜봄은 개념 없이 지켜봄을 뜻합니다. 이것이 안보아 마음닦기, 위빠사나 닦기입니다.
눈이 보고 좋아하면 ‘빠아루빠’입니다. 귀가 듣고 좋아하면 사아따루빠입니다. 이 빠아루빠, 사아따루빠는 그림자 같은 물질입니다. 이것들은 빤냣띠입니다. 이것들은 바람, 달라붙음, 업을 일으키는 물질입니다. 끝 물질은 볼거리 물질, 달라붙는 물질, 큰요소 물질입니다. 이것이 빠띠삼비다(파고들어 꿰뚫어봄, 곧 다름을 헤아려 앎)에 따라 물질을 꿰뚫어 아는 슬기입니다.
달라붙는 다섯 다발을 마음·물질(나마 루빠)이라 합니다.
눈, 귀 코, 혀, 몸은 물질입니다. 닿음, 느낌, 앎은 마음입니다. 물질은 아주 크고 넓습니다. 루빠(물질)을 알면, 슬기가 생깁니다. 루빠〔물질〕를 알 때 달라붙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