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과 땅을 소통을 꿈꾸는’ ‘지천통地天通’의 정신을 찾자”
얼마 전 필자가 소속된 어느 문학연구회에서 오늘의 한국시를 대표하는 K의 시인의 시세계를 함께 공부하고 토로하는 자리에서였다. 오랫동안 한국을 대표하는 유명출판사와 문학잡지의 편집장을 역임하고 자타가 인정하는 세계유수의 H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는 K대학 이모교수가 문득 “우리가 뭔가 속은 것 같다”는 말을 내던졌다. 적지 않는 시간 동안 낯선 언어와 문학전통의 서구시 이론과 작품들을 깊이 있게 연구하고 탐독하고 내린 결론 중의 하나였다. 우리가 그동안 서구문학을 마치 반드시 배우고 뒤따라 가야할 표준이나 모범이 되는 정전正典처럼 금과옥조로 생각해왔던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적 문제제기였다.
물론 그렇다고 그가 한국시에 준 서구시의 영향력을 부인하고 있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 경위야 어떻든, 그 또한 서구의 시론이 한국시를 갱신하는데 과거는 물론 오늘날에도 그 영향력이 지대함을 인정하고 있다. 달리 말해, 우리시가 서구시에 본격적으로 접촉하고 그 영향력을 받으면서 한국시의 높이와 깊이가 더해진 것은 사실이다. 특히 서구의 문예정신과 현대사조의 서구적 시들이 대체로 한자적 교양에 갇혀 있던 한국의 시정신에 엄청난 충격과 자극을 준 것만은 분명하다고 할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그리 간단치 않는 서구의 시론과 동양의 시론, 그 가운데서도 성장한 한국 시론 사이의 차이나 비교우위를 논하자는 것은 아니다. 돌이켜보면, 하지만 우리가 서구문학을 통해 배운 것은 시의 본질에 관한 것이 아니다. 어쩌면 시적 방법론이 우세하다. 곧 ‘시만 무엇인가?’ 보다는 시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의 문제였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동양의 고전적 시론이라고 할 수 있는 『시경詩經』은 일종의 시집으로서 시라는 예술의 특징을 밝히면서 도덕과 정치의 연관성을 논한다. 특히 인간과 사물, 신과 인간의 관계나 만남을 총체적으로 파악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는 게 ‘시경’적 세계다. 반면에 서구를 대표하는 시론이라고 할 수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Poetics)』의 경우, 무엇보다도 시의 속성(nature)을 집중적으로 거론하고 있다. ‘Poetry’란 용어 자체가 인간이 갖는 기본적인 사고의 한 양식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처럼 시를 만들어 내는 사고 또는 만들어 내는 기술(poietike: the art of poetry)을 서술하고 있고 있는 게 곧 『시학』이다.
하지만 그런 예술론 배경 아래 시인을 이른바 제 마음대로가 아니라 천명天命에 따라 짓는 자로 명명하든, 아니면 단지 ‘시를 만들어 내는 장인匠人(Po+et)’의 시인(poet)으로 규정하든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동서양을 가릴 것이 없이 모든 시들이 ‘천지통天地通’의 정신, 곧 하늘과 땅을 하나로 잇는 것을 본질로 하는 예술정신을 망각해 왔다. 그 대신 점차 땅과 하늘, 인간과 신 사이의 단절을 당연시하는 ‘절지천통絶地天通’의 시적 흐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특히 누구나 하늘과 통하고 신과 인간이 서로 섞인 채 공존하던 ‘신인잡유神人雜糅’ 대신 신과 인간이 각지 따로 노는 ‘신인부잡神人不雜’의 시대를 당연시해왔던 게 사실이다.
최근 들어 기상 난동과 생태 위기가 심각해지고, 인류문명 자체의 존폐가 심심찮게 거론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되새겨봐야 할 점은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인간이 아닌 존재, 특히 무생물에서조차 생명성을 부여하고자 하는 일련의 거대한 움직임 속에서 서구의 체계화된 종교들과 근대의 선형적인 세계관이 낳은 폐해에 대한 성토聲討 내지 비탄어린 비판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하늘이 우위의 입장에서 지상적인 지상의 인간들과 소통을 꾀하던 신중심의 ‘천지통天地通’에서 땅와 인간의 입장에서 그동안 끊긴 하늘을 소통을 꿈꾸는’ ‘지천통地天通’의 정신이다.
예컨대 일연이 남긴 『삼국유사』의 한 대목을 보자.
신라인들이 향가를 높이 받들었던 것은 매우 바람직하다. (그런데) 대개 향가란 게 일종의 (頌)과 같은 종류였다. (특히) 그러기에 때때로 천지귀신을 능히 감동시켰던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비일비재非一非再].(羅人尙鄕歌者尙矣 蓋詩頌之類與 故往往能感動天地鬼神非一)
먼저 『시경』 에 따르면, 시는 ‘풍風’ ‘아雅’ ‘송頌’으로 나눌 수 있으며. 먼저 ‘풍’의 경우 오늘날의 ‘노래[謠]에 해당하는 것으로 뭇백성들이 즐겨 불렀던 민속악에 가깝다. 그런가 하면 ‘아’의 경우 시와 악곡이 결합된 것으로써 주로 식자층들이 향유한 장르이다. 이에 반해 ‘송’은 시와 노래와 춤이 하나가 된 것으로써 천지귀신에게 바치는 노래의 일종이다. 곧 신라인들에게 시는 단순히 향찰鄕로 만들어진 최초의 한국시가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천지귀신을 감동시킬 만큼 신비와 신앙이 결합된 일종의 주술시呪術詩라고 할까. 인간과 신 사이의 매우 높은 차원의 영통靈通을 꾀했던 시가의 하나가 우리의 향가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이러한 오늘날의 시들이 그때로 돌아가거나 행여 돌아갈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동서양 할 것 없이 오늘의 시인들이 잃어버린 시정신의 하나가 다름 아닌 ‘천지귀신을 감동시킨다’는 명제다. 모든 것을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인간적인 관점에서 해결할 수 있다는 오만이나 미신迷信이다. 언제부턴가 더 이상 신적인 것과의 소통을 시도하지 않는 것을 당연시하는 인본주의가 득세하면서 마치 월명사가 죽은 누이를 위해 향가를 부르자 ‘돈 모양으로 오린 종이[紙錢]’가 서쪽으로 날아갔다는 얘기 속에 들어있는 세계의 신비와 경외의 감정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그러나 자연이나 신의 모방을 벗어나 르네상스 이후 서구정신에 깃든 인간의 창조력과 예술적 갱신 노력은 아무리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을 수 것이다. 다만 그 가운데서 우린 어떠한 문화권이든 시의 뿌리가 ‘시가무詩歌舞’에 있다는 점이다. 특히 그 속에서 시인이란 존재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일종의 무당[巫人]이자 그 신령한 춤을 추는 무인舞人으로서 반신반인적半神伴人的의 중간적 존재자였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시의 기원이 고대인의 종교적 의식에 있으며, 그때 노래와 춤과 시로 외경畏敬의 대상인 제신諸神과 영통靈通할 수 있는 자가 다름 아닌 시인이었던 것이다.
얘기가 길어졌지만, 우리가 서구문학을 추종해오는 동안 ‘뭔가 속은 것 같다’는 말 속에 담겨 있는 속뜻은 바로 이것이라고 할 것이다. 즉 우리가 인간중심적인 시선을 넘어 인간과 비인간. 새로운 관계정립은 기본적으로 수직적 위계질서를 바탕으로 하는 고대사회의 ‘천지통’이나 서구중심의 근대 또는 탈근대적 기획에서 오지 않는다. 어쩌면 최수운이 대지적 인간의 입장에서 하늘의 뜻을 묻고자 했던 이른바 ‘지천통地天通’의 정신, 곧 뭇 존재들과 공속共屬을 꾀하면서도 영적인 능력의 회복에서 온다. 그동안 우리가 시를 써오면서 놓친 것은 다름 아닌 시인이 ‘시를 제작하는 자’만이 아니라 ‘자신도 모르는 어떤 영적인 부름에 응하는 자’라는 사실의 대오각성大悟覺醒에 있을지 모른다.
각설하고, 편집위원의 한 명으로서 이번호 실린 황인숙 고진하 이윤학 서정문 전윤호 강연호 김광기 최영규 허청미 천수호 송진권 정영선 유미애 김효은 윤진화 이주언 안성덕 김주명 김경애 정연탁 박병성 조미희 김혜천 김형정 강나루 서형국 변영현 등 경향각지의 중견과 신인 시인들을 가리지 않고 이에 부응하거나 그에 다가가려는 노력이 엿보여 먼저 감사의 말을 전한다. 서로 다른 주제와 소재,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만의 언어의식과 개성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시 짓기에 임하고 있지만, 이들의 시속에 매순간 달라지는 세계 속에서도 달라지지 않는 영원한 흐름으로서 서로 관계 맺고 소통하는 생명의 흐름이 공통적으로 느껴진다.
‘특집시’란에 초대된 김태상 시인이나 ‘오늘의 주목할 시인’란에 초대된 김완 이명훈 시인들, 그리고 ‘신인특집’에 초대된 김데이지 김창훈의 시들도 묵묵히 제 걸음의 속도를 지켜가는 본지의 창간 시 정신에 부합된 모습이다. 이들의 시에 대한 꼼꼼하고 정성스런 시 읽기를 감히 권하는 바이다.
‘기획특집’으로써 본지가 중심이 된 ‘디카시’의 존재의의와 그 현황을 다룬 김석준의 평문이나 문학평론가 김종회의 ‘디카시 평설’, 그리고 이윤근 이재철 선경님(이상 국내)· 손용상 박인애 김미희(이상 해외) 등의 디카시에 대한 이론과 실제를 한꺼번에 들여다볼 수 있다는 또 다른 재미를 주고 있다. 이밖에도 김유석 시인의 ‘시가 오다’나 권선희 시인의 ‘시인의 편지’도 시인들 특유의 산문에서 오는 그만의 글맛과 리듬을 느낄 수 있어 이번호를 더욱 풍성하고 깊이 있게 하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다시 한 번 이번호에 초대된 모든 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특히 앞으로도 더욱 본지를 아껴주시고 응원해주시기를 엎드려 기대한다.
임동확 《시와경계》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