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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선언문
선언 취지
지금 교회는?
지금 교회의 모습을 보면 교단이나 교파를 유지하는 지도자들은 자기만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하면서 서로 싸우고 자리다툼을 하는 것도 모자라 우주의 유일한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무시하고 세상의 재판자에게 그 옳고 그름을 가려달라고 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최고 기관이 하나님보다 세상의 재판자의 권위를 높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들이 사는 목적의 그 결국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고 믿게 하는 것이지만, 그래서 하나님을 모르는 비 신앙인에게 하나님을 믿어야 할 당위성을 훼손하고, 하나님을 믿고 구원에 이르러야 할 그들의 영혼이 살 길을 막고 있는 하나님의 대적자가 되어있다.
또 교회 안에서는 교파가 찢어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지만 교단에서 또 다른 교단으로 갈라지는 것이 비일비재하며 그 교단들을 하나로 통일 한다는 목표를 가진 교단 연합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기면서 이제는 서로의 이익을 위해 이전투구(泥田鬪狗) 하는 것들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교회가 세상을 변화 시켜야 한다는 취지를 가지고 정치경제 문화 등 다방면에 걸쳐서 인간의 윤리나 도덕 예절 공의 등을 앞세워 세상을 바꾸겠다고 하나, 역설적으로 건드리지 말아야 할 타인의 감정과 자존심을 건드려 다툼과 분열만 조장하고 있다.
해라 하지마라로 기록된 성경에 있는 행동지침에 관한 말씀을 지키려고 한다지만, 자기는 남에게 화를 내고 싸워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과 생각에서부터 거역하고 있으면서, 타인들에게는 행동과 말에 대해 시비하며 고치라고 요구하여, 그를 보는 타인 누구라도 인정하는 것이지만 스스로를 돌아보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몸으로 지킨다는 것은 절대로 할 수 없는 인간인 것만 드러나게 되어 지금 교회의 입지는 점점 좁아만 간다.
그리고 우리는 그 한계를 드러내어 교회의 지도자들이 벌이는 철저히 인간적인 발상을 바탕으로 하여 세상 사람들의 지탄을 받는 행동을 거침없이 하기에 이르렀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비 신앙인들과 같은 목적을 가지고 세상에서의 정의사회구현을 목적으로 하는 공의와 윤리를 주장하던 우리들은 인간의 성품이 주장하는 자기를 감당하지 못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뜻을 몸으로 지킬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우리들이 세상의 정화를 위해 외치는 모든 말에 대해 세상은 거짓말이라고 한다.
그리고 안티기독교에, 기독교를 말살하려는 단체들, 사이비들과 함께,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 개개인의 생각에는 점점 더, 신앙해야 할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게 만들고 있다.
그 이유!
그 이유의 첫째는 하나님이 정하신 법을 따라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할 때가 아직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의 둘째는 하나님이 정하신 것으로 인간은 그 누구라도 하나님의 법을 따르기 위해 자기의 마음 상태를 발견하거나 생각의 상태를 발견하지 못하는 자기중심의 자기감상에 빠지는 인간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이유의 셋째는 성경에 기록된 착한 행실 거룩한 행실을 사람이 보는 육체의 행실이라는 고정관념 때문에 중심, 마음, 성품을 보시는 하나님의 눈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유의 넷째는 사람은 그 누구나 신앙의 주체를 자신이 위로받고, 육신의 안녕과 편안과 편리를 위해 기도하여 신에게 그 응답을 받는다는 것으로 고착화 되어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 방식으로 만들어져 가라고 하는 하나님의 요구를 생각하지 못한 때문이다.
그리고 다섯째의 원인은 위에 있는 네 가지를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육신의 시각으로 성경을 풀어 이해하고 그 육신의 틀 안에서 신학의 틀을 형성하여 하나님께 보여야 할 마음과 그 마음 안에 있는 성품이나 개념 이념 신념 등의 생각을 알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고, 하나님이 보시는 육체로 드러나는 행동과 하나님이 보시는 영의 몸인 마음의 행동을 구분 할 수 없게 만든 것이 그 이유가 된다.
그 이유가 만든 상황
그 이유가 만든 상황이 비단 교회와 사회에서의 정의구현을 외치는 일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로인해 모든 목회자들은 성경 전체를 육신의 생각대로 풀어 하나님의 말씀을 보편적 인간이 추구하는 최상의 상태를 만들기 위한 말씀으로 풀어 하나님의 이상을 보편적 인간의 상식으로 만들어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이 무용지물이라는 판단을 내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마음중심의 교회는 눈에 보이는 교회로 옮겨져 하나님이 보시는 가정보다는 교회가 우선시되고, 가정의 구성원보다는 교회의 목회자가 우선이 되는 등의 부조리를 낳았다.
해결방법
성경의 목적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 받은 사람이 타인에게 자신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타인에게 보여주므로 타인이 사람을 변화 시켜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게 하게 하시길 원하신다.
그 하나님의 요구를 들어드릴 수 있는 비결의 시작이 몸으로 의로움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성품의 변화를 이룬 후 그 성품을 따르는 행동이 후에 나오는 것 역시 알게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성품의 변화가 자기가 변하자고 해서 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타인을 우선하는 하나님 성품과, 자기의 요구를 중심으로 하는 사람의 성품 차이에는 세상을 바라보는 자기중심의 개념이 있고, 신념이 있고, 행동이 있다.
그 성품은 마음에서도 가슴과 같지만 개념과 신념은 마음에서의 생각이다.
그 생각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동하게 하는 생각과 자기를 위한 생각의 차이에 존재하는 서로 다른 괴리를 이어주는 것이 자기를 위한 생각이 틀린 것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보기위한 노력을 하는 때와, 자기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자신의 생각을 버리려고 애쓰는, 서로 다른 자기의 생각을 하나님의 요구대로 타인을 위한 생각으로 바꾸기 위한 노력의 때가 있다.
자기의 개념이 틀렸다고 믿어 버리고자 하는 생각이 앞서게 되면, 그 다음 그 개념을 바꾸기 위한 신앙의 시간들이 필요하다.
개념이 바뀌면 자기중심으로 행하던 행동들이 멈춰진다.
그리고 그 후에야 자기의 성품들을 바꿔주시는 하나님을 만난다.
그 자신중심의 성품이 버려지고 하나님의 성품으로 변화를 받은 후에야 다시 그 생각이 온통 타인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 시키고자 하는 하나님을 따르는 타인을 위한 생각으로 가득 차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행동이 나오는 것이다.
성경해석의 기본 단서를 사람의 마음에 있는 성품이 하나님의 성품으로 변화 받는 것으로 풀어야 한다고 하셨다.
기록된 말씀대로 라는 뜻이 <문장의 맥을 따라>이다.
나는 그 뜻을 따라 신의 성품에 참예를 목적으로 하는 성경 전체의 맥 안에서 찾는 믿음의 바탕을 세우고자 하는 취지로 종교개혁 선언을 하고자 한다.
세상 모든 사람은 일차적으로 자신의 목적을 이루고자 하며 산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타인에게 자기의 감정이나 기분을 건드리지 말 것을 요구한다.
자신을 위함과는 또 다르게 서로의 입장에서 볼 때, 보편적 인간의 방법에 타인의 감정을 상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목적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천국의 삶을 동경하여 육신에서의 모든 것들을 집이 아닌 놀이터의 장난감으로 여기면서, 이 땅에서 사는 목적을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의 성품이 변화 받는 것으로 여기며, 하나님과 천국을 생각하며 성품변화와 행위의 온전함을 이루어 달라고 하나님께 마음으로 몸으로 기도하는 방법 밖에!!!
모든 인류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살고, 그 모든 인간의 요구를 들어주는 방법은 우주에서의 유일신이신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와 힘에 의해 사람이 변화 받아야만 한다.
세상 그 어느 신이라도 사람의 성품을 고칠 수 있다고 한 신은 없다.
그래서 나는 성경을 믿는 기독교가 종교라고 하지 않고 모든 인류의 요구를 이뤄주는 생활이라고 한다.
그래서 주제에 인류개혁을 위한 종교개혁이라고 했다.
또 하나 성현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이 말했던 철학에 인류가 말하던 윤리가 있음을 보고, 그 윤리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을 말하는 철학이라는 용어가 우리 대한민국의 고대 선조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경에 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 중심의 철학을 펴, 인류의 삶의 질을 좌우하는 사상에 있어 그 사상으로 보는 세계의 중심이 대한민국에 있음을 선포하고자 하여 인류개혁을 목적으로 종교개혁을 선언한다.
종교개혁의 주체는?
종교개혁의 주체는 성경말씀의 바른 해석에서부터 시작한다.
성경은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써내려간 긴 시처럼 기록된 하나의 문장이다.
시란 사실적인 표현이 아니다.
지구의 역사 속에 있는 사실을 기록한 성경도 마음에 있는 사람의 성품을 하나님의 성품으로 변화 받기위한 마음세상에서 일어나는 또 다른 말씀으로 풀어 나열하고 거기에서 목적과 방법, 이유 등을 찾아내야 한다.
그러나 큰 문장 안에서 그 육하원칙을 풀었다고 다가 아니다.
그 육하원칙 중 하나에도 또 다른 육하원칙들이 존재하며 가장 기본이 되는 문장에서조차 원인과 결과를 설명하고 있다.
그럼에도 지금교회는 가장 기초적 문장인 한 절에 있는 그 문장을 하나님이 주신 문장이라고 그 한 절에 목숨 걸고 그 말씀이 하나님의 목적이라고 한다.
가장 쉽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이 로마서 10장이다.
10절 말씀인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하여 많은 사람들이 입으로 예수를 시인하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8절에 <그러면>이라는 접속사를 통해 마음으로 믿는 믿음이 무엇인가라는 믿음에 대한 설명이 앞에 있다는 것이다.
6절과 7절을 보면 승천하신 예수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가 등장하고 승천하신 예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표현으로 끌어내리려는 믿음의 상태에서 하는 말과, 또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 믿음의 상태에 하는 말을 설명하고 있다.
이는 알아보기만 하여도 예수가 지신 십자가 사건을 현상이 아닌 마음으로 끌어들여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십자가의 죽음을 어떻게 믿는 것인가에 대한 해설로 이해가 된다.
이 말씀이 십자가 사건이라는 것은 믿음을 설명하는 10절 바로 앞에 있는 9절 말씀으로 알 수 있다.
하늘에 올라간다는 것은 마음의 뇌인 생각에 천국이 생긴다는 표현이며, 자기의 성품을 하나님의 성품으로 변화 받아 하나님의 심장을 가지고 살 수 있다는 것으로 이것을 믿는다는 것은 그런 자기의 미래를 하나님이 고쳐주심으로 이룰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믿는다는 것이다.
음부에 내려간다고 하는 것은 고생과 환난의 구덩이에 빠져서 가족과 이웃과 친척과 친구와 사업관계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통해 받게 되는 육이 당하는 고난을 통해 십자가에 몸을 죽이듯 자신의 육성을 죽이게 된다는 것이며 그 것을 믿는 것이 예수의 십자가사건을 믿는 것이란 해설이다.
그럼 10장 1절부터 설명되는 구원을 위한 믿음이 무엇인가?
이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며 그 믿음의 요지는 생활에서 자신이 고난을 당해봐야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고 거기에서 승천하는 믿음이 생긴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러면 10장이 말하는 전해야 할 복음을 모르는 사람이 들어야 할 복음이 무엇일까 라고 하는 답이 나왔다.
육신은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며 그 고난에서 하나님이 버리라고 하시는 자신을 발견하고 그 것들을 하나님께 고쳐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며, 그 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고쳐주시므로 성품까지 변화 받아 마음이 하늘을 사는 자가 되는 것이다.
이런데도 13절이 말씀하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고 하여 예수님을 입으로 부르게 할 것인가?
문제는 또 있다.
판단하는 죄인이며 그 판단을 가지고 타인을 정죄하므로 하나님을 정죄하는 악인인 로마교회 교인이 수신자인 로마서에서 그 구원하기 위한 대상을 이스라엘이라고 하셨을까?
이스라엘이 지금 로마의 상태로 사람과 싸우므로 하나님과 싸우는 자라고 하나님께 인정받은 것이고 그 하나님과 싸워 이기려고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진정한 이스라엘은 자신의 마음과 싸우라는 것으로, 세상에서의 모든 문제에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뜻과 어그러져있는 자신의 개념과 믿음을 말하는 신념이나 행동 성품을 발견하고 자기를 주장하고 싶어 하는 자신과 싸우는 것이 진정한 이스라엘로 문제의 답을 맞춰 하나님을 이기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사람 앞에 보여주는 아름다운 꽃잎이 없는 대신에, 열매로 사람 앞에서 꽃을 피우라고 무화과를 그 이스라엘의 상징으로 삼으신 것이다.
성경은 이런 문장을 가지고 있다.
보았다시피 이렇게 성경의 문장을 이해하고 나면 지금까지 우리 교회들이 말하던 신학이나 개별적으로 가지고 있던 신학의 엄청난 오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와 다투고자 성경의 말씀을 가지고 변론하자고 하면서 자신이 알고 있는 것만 주장하는 많은 분들에게 성경을 문장으로 이해하라고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나의 말에 토를 다는 분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만 주장한다.
나는 성경을 펴놓고 접속사나 문단나누기에 관한 이해를 시키려고 했었다.
그러나 그분들은 그 글을 보면서 이렇게 말씀했는데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냐고 했다.
믿음의 핵심이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비유로 하여 자신이 찾아야 할 십자가 사건을 어떻게 믿을 것인가가 답이다.
그래서 성경은 문맥을 맞추어 놓고 그 답을 찾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이라는 단어는 그 단어를 설명하는 정의를 찾아야 한다.
단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단어의 해석을 어느 것을 그 해석 단서의 근거로 하는가가 중요하다.
거기에 더하여 그 단어가 육신 중심으로는 어떻게 이해되고 영적으로는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를 생각하여야 한다.
그리고 버려야 할 인간성과 구해야 할 하나님의 방법이나 뜻을 찾아야 한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교회
현재 대한민국의 기독교 상황은 교단들의 분리 독립과 교단간의 분쟁, 그에 더하여 목회자의 타락에서부터 시작하여 교회의 대형화로 인해 대형교회와 소형교회의 목회자간 서로의 격 뿐 만 아니라 대형교회는 성공한 목회자 소형교회는 실패한 목회자라는 인식이 공식화 되고 있다.
또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세상의 빛이 되기는커녕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조롱을 받으며 그 입지는 가시적인 교회로 그 활동구역을 제한 받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지금 많은 목회자들과 단체들이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말을 가지고 결단을 위한 영성훈련에 박차를 가하며 세상의 빛이 되자고 한다.
돌이켜 보면 이는 사람 스스로 뭔가를 할 수 있는 존재라고 하여 사람에게 하나님과 같은 힘이 있다고 하는 교만이 그 시작이며 거만이 그 자세이며 오만 방자한 행동이었다.
성경, 행동지침서로서의 이해 어떻게 했나?
하나님이 율법이나 계명을 주신 이유가 사람은 악하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하셨다.
하나님이 계명을 주신 이유는 그 계명을 지킬 수 없음을 사람 스스로 할 수 없음을 고백하고 하나님이 그렇게 할 수 있게 하시는 은혜를 구하게 함이라고 하셨다.
이는 율법이나 계명을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그런 일들을 사람으로서는 절 대 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일을 하나님이 해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하나님이 모세에게 율법을 주심은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자이기 때문이요,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서를 이스라엘에게 주심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산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며, 예수님을 통해 마음의 법을 주심은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마음의 법을 모르기 때문이요, 서신서를 주신 이유들이 창조의 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들은 그 법들을 서로 지키자고 하여 하나님의 뜻과는 정 반대의 믿음을 가지고 행동했다.
성경의 핵심은 우리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받고 타인을 구원하는 자가 되기까지 자라가는 과정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이 지구에 왔다가 천국에 가시고 지구 멸망의 때에 재림하실 예수를 증거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성경 곳곳에 너희 믿음 또는 영을 자라게 하라고 하셨다.
그런데 디모데 후서 3장 14-17절을 보면 그 답이 있다.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마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이를 두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이 기록자에게 일러 기록한 것으로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데에만 정신을 썼지 성경의 기록목적을 말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성경을 기록하신 목적은 분명히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해 지게 하기 위해 기록하셨다.
그리고 그 시원은 예수그리스도에서부터 시작되고 그 결과는 구원이라고 했다.
이를 보면서 한 가지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목적을 따라 문서나 세상을 본다.
두 눈을 뜬 사람이 전철에서 신문을 보고 난 후 사물대에 올려 넣는다.
그런데 그 앞에 바로 (보고나신 신문은 올리지 마시오, 또, 가져가시다가 개찰구 앞 재활용 통에 넣어주시오)라는 의미의 글이 있다.
그럼에도 거침없이 올려놓는다.
그 순간 눈뜬 시각장애인이기 때문이다.
길을 가다보면 좌측통행 우측통행이란 글들이 길 바닥에 씌여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냥 정신없이 길을 다닌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대한 욕심이 그 눈을 가리고 있다.
또 있다.
개천절이 우리 대한민국의 시원이라 한다.
그래서 단군이 조선을 개국한 단기 4343년을 사용한다.
재미있는 사실!!!
고조선의 역사를 담은 글에 <개천 1565년 상월 3일 유 신인 왕검 자>라고 하는 문장이 있다.
조선의 역사를 말하려면 개천의 역사가 단군이 조선을 개국하기 전의 역사인 1565년을 더해야 한다.
그러면 단기로 해도 따지자면 5906년이래야 한다.
단군을 신으로 만들기 위한 욕심을 가진 분들의 욕심이 <개천 후 1565년>을 못 보게 했다.
마찬가지이다.
우리도 성경의 문맥을 보기보다는 단어나 하나의 문장에 감동받는 일들 때문에 그 문장을 왜 기록했는지에 관심이 없었던 것이 성경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우리의 눈을 가렸다.
또 하나님의 말씀을 육체가 행하는 의로운 행실로 알고 행하려고 하며 가르치고자 하는 그 믿음이 성경에 수도 없이 기록된 마음으로 믿어야 한다, 성품이다, 생각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마음에 있다는 등의 말씀을 못 보게 했다.
이제 우리는 그 사실을 인정하고 성경을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에서 자기중심의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받아 살아가는 온전한 사람이 되고 또 그 것을 가르치는 사람으로 온전하게 변화 받아 사람을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유업을 상속받는 후사가 되는 길을 알게 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인 것을 믿어야 한다.
예수그리스도
예수그리스도를 믿으라고 하는 것은 2000년 전에 인간의 모양으로 지구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고 죽고 부활하여 천국으로 올라간 그 사건을 믿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었다.
구원자 예수는 구약에도 여호수아라는 이름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구원하고자 가나안 정복전쟁을 하던 여호수아가 있었다.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뜻으로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이 있었다.
물론 물에서 꺼내는 세례를 베푸는 자도 물에서 건짐을 받은 자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지고자 했던 모세도 있었다.
복음서에서 실패한 사역자 그 모세의 사역은 세례요한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여호수아나 왕이나 선지자나 제사장의 실패한 사역은 예수라는 땅의 이름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으로서 신앙이나 지도자로서의 성공하는 길을 보여주셨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모양으로 오셨는데 그 사역의 하나는 다윗과 같은 육의 씨로 사는 죄에서 해방 받게 하기 위함이요, 둘째는 사도바울과 같이 가르치는 사역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라 함은 첫째는 자기 자신을 구원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기름을 부으시는 것으로 성막에 들어가는 짐승에게 바르는 기름부음 같은 것이다.
두 번째로의 기름부음은 타인을 구원하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기름을 붓는 것으로 기름부음을 받아 성막으로 들어가는 짐승을 죽이고 그 피를 지성소 뿔에 바르기 위해 지성소로 들어가는 대제사장과 같은 것이다.
천국에 계실 때에는 말씀으로 역사하시는 성자였다.
그 성자가 지구에 사람의 모양으로 마리아의 몸을 통해 태어날 그 때에 예수라는 이름을 받았다.
그러면 천국으로 올라 다시 하나님의 장자인 큰아들로 복귀한신 성자를 어떻게 불러야 할까??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라 함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죄와 사람을 향하여 자기의 욕심을 채우고자 하여 하나님을 향해 싸우고 있는 악을 발견하고 버리게 하는 것과 그 악과 죄 전부가 버려진 사람을 또 다른 타인을 위해 쓰시기 위해 보냄을 받는 사람의 이름이었다.
그러므로 이제 기독론도 변화해야 한다.
성경으로 하신 말이나 행동은 육체의 움직임이 아니다.
성경은 사람이 하나님이 정하신 율법의 계명들을 지킬 수 없다고 하셨다.
이유는 사람의 행동은 그 몸을 지배하는 뇌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며 그 뇌는 개인의 고정관념이나 신념을 따라 조종되는 것이며, 그 신념은 자신의 성품에 의해 움직인다고 하셨다.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이 있을 때, 생각을 결정하기 이전에 사람의 가슴에서 반발하고 싶은 그 무엇이 벌컥 하고 올라온다.
하나님은 마음을 보신다고 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마음에 있는 것들이 화내고 분내고 짜증내고 시비하고 분리하는 다툼들이 전혀 없어야 한다.
그리고 거기에 더하여 그 마음이 항상 기쁘고 기도하고 감사하며 타인의 영을 사랑하여야 한다.
마음이 하는 행동!!!
사람의 말도 입의 말을 다 말이라고 하지 않는다.
타인이 자신에게 사기를 친다고 생각하면 <나보고 속아달란 말이지? 웃기지 마>라고 하여 그 사람의 행동을 또 다른 말로 보고 자신도 속으로 또 다른 대답을 한다.
물론 그 말은 직설적으로 할 수도 있지만 그 입으로는 또 다른 말을 하기도 한다.
사람은 입의 말을 듣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몸의 행동이나 입으로 하는 말 속에 감추어진 몸으로 하는 그 마음의 말과 행동을 보신다.
성품의 일을 아는 것만 참 영의 눈을 뜨는 것이다.
베드로후서 1장을 보면, 성경의 예언은 사람의 성품을 신(하나님)의 성품으로 변화 받게(참예하게) 하는 것으로 풀어야 하며(4), 그것을 아는 자가 하늘의 보배를 가진 사람이며, 생명과 경건에 속한 자며, 영광을 목적으로 하여 사람을 부르신 하나님을 아는 자며(3), 눈을 뜬 자이다(9).
이것을 모르는 자들은 근시안적인 소경으로, 옛 죄(하나님을 안 믿었을 때의 죄)를 깨끗하게 하신 은혜를 잊은 자요(9), 정욕으로 썩어질 세상의 것을 구하는 자이며(4), 게으르고, 열매 없는 자며(8), 성경의 모든 예언을 사사로이 푸는 자들이며(21), 베드로서 2장으로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을 훼방하며, 호색을 좇아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인 거짓 선생들이다.
성경 곳곳에 숨은 내용들을 보면 성경은 한 영혼이 하나님의 입에서 불려 몸으로 들어오면서부터 천국에 가지까지의 과정을 적어놓은 것으로, 그 영들 하나하나가 자라가는 과정을 기록한 예언서이다.
물론 이렇게 성경의 말씀을 사람의 예로 보고 윤리를 가르치고 강조하며 보편적 윤리를 따라 사람을 판단하는 모든 것과 함께 보이는 현상에서 찾는 신앙의 모습은 다 하나님을 모르는 상태로서 어두움의 상태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다.
지금 우리는 보편적인 사람들과 똑 같은 행동규범의 윤리를 앞세웠다.
그래서 회개도 행동의 죄를 회개하고, 보편적인 인간이 주장하는 윤리를 올바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했다.
성품중심의 성경을 모른 또 다른 이유
이는 성경의 말씀을 오해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고 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하는 자신으로 보고 하나님이 지킬 수 있는 성품을 받기 위해 지금 있는 인본주의의 신념을 먼저 태워주시는 심판을 기다려야 하며, 신념이 태워지면 인본주의적인 신념을 따라 행하던 행위를 씻김 받아야 하며,
행위가 씻김을 받은 후에야 본성이 버려지고 하나님의 성품으로 교체되는 길을 가야하고 그 본성이 하나님의 성품으로 바뀐 후에야 비로소 자기중심이 아닌 타인을 하나님의 성품으로 변화 받게 하기위한 열정을 따라 그들을 사랑하는 행동이 나온다는 것을 믿고, 그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것으로 믿어야 한다.
예수님도 사람이 성품의 문제에 대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그래서 마음에 있는 성품의 일을 모르는 사람들은 전부, 자신은 항상 옳은 것이며 타인은 전부 악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살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인간의 본성 즉 하나님이 보시는 어두움의 일들이 한 번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에 대한 개념의 변화를 받을 때에는 개념의 잘못만 드러나 생각나고, 보편적인 사람의 행위가 전부 하나님께 죄에서 나오는 행위가 믿어질 때에는 인본주의적인 행동을 하는 자신만 보인다.
또 신념이 변화 받을 때에는 잘못된 신념만 드러나 생각나고, 행위를 멈추게 되는 씻김이 있을 때에는 자신의 행동 속에서 하나님이 보시는 또 다른 행동들이 보인다.
성경이 비밀을 감추고 있는 창조의 원리를 따라 순서적으로 잘 짜여 진 것처럼 우리들의 행위가 완전해지기까지는 엄청 많은 순서를 거처야 하며 그 기간은 내 경험에 십 수 년이 걸렸다.
그럼에도 사람중심의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성품으로 변화 받는 그 과정을 한 순간에 한 사람의 힘으로 이룰 수 있다고 믿는 오류를 범했다.
그것을 다시 살피면 하나님과 사람이 동급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며 사람이 할 수 있는데 왜 하나님이 필요하냐고 하면서 하나님을 배척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우주 속에 지구를 만드시고 그 지구를 사람의 육체로 비유하셨고, 또 다시 그 육체를 사람의 육적인 영의 상태로 비유하셨다.
우주속의 지구는 수많은 별들 중에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신앙인을 상징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핵심은 보이는 사람의 행위가 아니라 그 행동과 말로 미루어 볼 수 있는 것으로 행동하는 사람 그 자신도 알지 못하는 그 영의 의도에서 찾는 것이었다.
그래서 부록으로 창조의 비밀의 경륜(에베소서 3장 1-13절 참조) 즉, 지구를 창조하시는 그 모습으로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의 영을 온전한 상태로 만드시고(창세기 1장) 또 타인을 위해 일하는 교육자로 키워 가시는 과정(창세기 2장)을 비밀로 하고 그 비밀을 풀어 설명하는 로마서부터 계시록을 창세기 1장과 2장의 순서와 합일시켜 설교한 설교문을 싣는다.
그러므로 전체 성경은 자기중심의 성품으로 태어난 영이 하나님 중심의 성품으로 완전하게 자라야 할 영의 문제를 예언해 놓은 예언서이며 지침서로 보아야 한다.
두 번째의 오해는 용어 이해의 차이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신 이유가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이다.
하나님께 영광은 찬송, 찬미, 경배, 예배, 제사와 같은 의미이다.
우리 인간은 자신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것으로 영광을 돌린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받으시는 영광은 자신 하나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베드로서 전체가 설명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이 받으시는 영광에 대하여 하나님이 베드로를 통해 설명하시기를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들을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하나님이) 권고하시는 날에 (비방하던 자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벧전1:11-12).
라고 하셨고, 마태복음의 산상 수훈으로는
<이같이(13-15절의 내용)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고 하여 성경으로 말씀하신 하늘의 빛이 세상이 보게 하는 착한 행실이라는 것을 밝히셨다.
이러므로 한 사람을 통해 하나님이 받으시는 영광이란 자기 혼자만 하나님을 찬양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착함이 그 주위의 사람들에게 보이고 인정받은 후 그들이 하나님의 권능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위대함을 찬양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의 예를 들자면 마태복음 9장 1-8절에 있는 말씀이 예가 되거니와 말로만의 죄 사함에 대한 선포가 아니라 문둥병자를 고치심으로(물론 영적이 이야기이지만) 그 사건을 직시한 사람들이 그런 권세를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건으로 알 수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가 말하는 교회도 가시적인 교회 안에서 간음한 자를 멀리하려면 지구 밖으로 나가라(고전5:10)고 하시므로 나가 죽으라는 표현을 사용하시어 성경으로 말씀하시는 교회는 가시적 교회중심이 아니라 몸을 찢어 분해를 해도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의 마음을 교회라고 하신 것이다.
우상 숭배가 탐심이라고 하셨다.
간음도 인간끼리의 성적 간음이 아니라 마음에서 욕심을 이루기 위해 토색하고 우상숭배(탐심)하고자 하는 생각들이 간음이다.
육신적인 행위를 가지고 남들을 가르치고 싶어 하는 것이 하나님을 바알이라고 부르는 것이며, 육신이 사는 날 동안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구하는 것이 하나님을 우상으로 믿는 것이라고 했다.
심판이란 단어가 있다.
몸이 받는 심판이라면 굉장한 불행이다.
그러나 성품의 문제를 말씀하신 성경말씀을 바탕으로 본다면 성경의 모든 심판이 적용되는 곳은 몸이 아니라 인본주의의 개념이며 믿음이며, 행동이며 그 모든 것이 사라진 후에 발견되는 자신의 성품이며, 또 자신을 위한 성품 그 이후에 또 똑같이 발견되는 것으로 타인을 고치기 위해 가르치고자 하는 자기중심의 개념과 믿음과 행위와 성품들이다.
자신의 잘못된 인간성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불에 태워져 죽었다.
좋다고 보는가? 나쁜 것이라고 보는가??
저주라는 말이 하나님께 무릎을 꿇게 하기위한 하나님의 벌이라는 뜻이다.
진노라는 뜻이 자신의 상태를 알게 하기 위하여 주는 고통이라는 뜻이다.
복이라는 단어에서도, 때로는 육신이 잘되는 것도 복이라고 표현했지만, 태만함으로 육신의 평안에 안주하게 하기위해 영의 일을 알지 못하도록 영의 일을 가리어 놓는 하나님의 벌이다.
성경의 모든 인물들이 자신, 하나 안에 존재하는 모든 인성과 개념과 믿음이며 행동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단어임을 잊지 말라.
지금까지 우리는 천국의 언어를 전혀 사용할 줄 모른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
설교편에서도 성경을 풀어 설명하였지만 창조사건이 사람의 영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 받고 변화 받은 사람이 타인의 영을 살리기 위해 하나님께 배워가며 가르쳐야 할 내용들을 숙지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창조사건은 그 내용이 아니라 제목과도 같이 간단명료하다.
그런데 로마서에서 시작하여 계시록의 내용들을 자세히 보면 그 순서나 내용이 정확히 창조의 과정을 설명하신 창세기 1장과 2장의 순서와 일치하는 것을 본다.
그래서 우리는 서신서를 먼저 주목하여야 한다.
‘굳세다’라는 뜻과 함께 ‘욕심을 따르는 감정을 힘 삼아, 자기의 기준과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살인을 하는 믿음’
이란 뜻을 가진 로마서에 보면,
하나님과 예수의 역사 등 모든 기적을 믿지만 성령의 사역을 경험하지 못한 로마교회의 교인들에게 하나님은 판단하는 자들이라고 정죄하셨다(2장 1절).
로마서 1장으로 그 내용을 보면,
<하나님을 알되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1:21-23)>.
라고 서로 판단하는 사람들의 영적 상태를 설명하시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하나님의 그림자로 사람의 영이다.
그 형상은 자신의 앞에 있는 사람이다.
그 사람을 대하는 자세가 하나님의 관리를 받는 영이 아니라 자신의 말에 의해 그 행동을 바꿀 육체와 얼굴 표정과 그 입의 말만 보고 있다.
그래서 자신의 옳은 행동을 보고 자신을 고치신 하나님의 능력을 몸으로 보여주지 못하고 입으로 그 사람의 행동을 보면서 고치려고 한다.
타인에게 자기의 주장을 펴면서 그 사람의 행위에서 윤리를 집어넣고 자신의 의도를 따라 그에게서 윤리를 찾고자 하는 것은 세상이 자기 마음과 생각대로 자기의 주장대로만 이루어지길 소원하는 것이다.
그 소원의 대상은 타인이다.
그 대상이 자기의 소원을 들어줄 우상으로 섬기며 경배하고 있다는 칭찬(?)이다.
이를 두고 하나님은 자신 스스로 하나님의 권능을 무시하고 여자가 아들을 낳을 의무를 저버린 것이라고 하여 마리아가 예수를 낳듯이 새로운 믿음을 위한 기도를 통해 영으로 사는 아들의 삶을 동경하지 않는다고 비난하신 것이며,
믿음을 상징하는 남자는 새로운 믿음을 위해 기도를 하지 못하고 남을 위해 소리치는 믿음이 새로운 또 다른 상승의 믿음을 만든다고 하는 것으로 남색 하는 것으로 말씀하셨다(1:26-27).
여기에서 우리가 말하는 기도와 하나님이 보시는 기도의 극명한 차이가 있다.
사람은 언제든지 하나님을 향해 자기의 소원을 아뢰는 것이 기도라고 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행동 속에서 그 기도의 모습을 보신다.
하나님이 보시는 기도는 우리가 행동하는 그 몸의 행동 속에 감추어진 의도를 기도라고 하신 것이다.
그 기도를 모르고 지금의 교회처럼 서로의 행위를 보면서 고함치고 가르치려고 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완전한 섭리를 부정하는 것이며
우주의 통치자가 아니라고 하는 것이며,
자신 스스로도 영의 일은 모르는 것이며,
그 가르침 속에서는 하나님이 보시는 마음은 상관하지 말고 육체의 행위만 잘 보이라고 하는 것이며,
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말고 자신을 두려워하라고 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향하여는 <아버지의 뜻대로 마옵시고 나의 뜻대로만 세상을 움직여 주옵소서>, <세상을 주장하시는 하나님 왜 사람들을 저렇게 열등하게 만드셨습니까?>라고 외치는 것이 된다.
이는 모두 어두움의 상태를 설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로마서는 그 어두움의 상태에서 빛의 상태로 바뀐 삶을 사는 것 즉, 하나님의 법을 다 지키는 사람이라고 타인들에게 인정받는 신앙인이 되는 비결을 과정으로 설명하고 있다.
사람들도 입으로 하는 말을 다 믿지 않고 그 의도를 추리한다.
하나님은 거기에서 한 술 더 떠 의도가 가진 의미에서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를 찾는다.
우리의 신학이 이제 사람이 의도를 가지고 말하고 행동 하는 그 의미를 보며 하나님이 보시는 행동이라 말하고 성경의 모든 행위를 그 의미에 초점을 맞추는 새로운 개혁을 해야 한다.
그러면 로마서 1장 28-32절로 말씀하신 악한 행동이나, 2장 전체로 말씀하신 가르치는 자들의 행악이나 3장의 악행도 사람의 눈에 보이는 행동이 아닌 행동하고자 하는 그 의도가 갖고 있는 그 의미에서 찾는 행악인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죄에서 해방 받는 방법과 과정을 설명하는 로마서 전체를 이해하여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부도덕을 훈련하다’는 뜻을 가진 고린도서의 주제는 십자가의 도며 그 십자가의 도는 마음에 있는 성전의 문제로 귀결된다.
전술하였듯이 십자가의 도는 눈에 보이는 세상의 환경에서 움직이는 현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는 마음의 현상으로, 사람들이 정한 세상 용어 원리를 마음속에 있는 행동의 의도 그 안에 존재하는 그 의미에서 찾는 죄를 보며, 하나님께 죄를 청하고 용서를 구하며, 마음에 하늘의 집짓기를 소원하는 것이다.
지금 교회들이 개인을 교회로 생각하는가?
마음속에 갖고 있는 의도 안에서 찾는 의미를 생각하지 않은 로마교회적인 사람들은 교회에서 교인들과 다투면서도 지금 <당장 죽어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 들을 줄 모른다.
여기에서 생각해 볼 아주 중대한 문제가 있다.
창을 맞을지 칼을 맞을지는 모르지만, 몸으로나 지식으로나 사람을 구원하는 방법을 다 일러주시고 천국으로 올라가신 하나님의 아들을 만난 사도 바울은, 자신도 또 예수님의 제자였던 베드로까지도 개인을 받드는 일을 멈추라고 하며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을 <젖만 먹는 어린 아이같이 육신에 속한 자>라고 하며 심히 책망했다(고전3:1-9).
성경의 흐름상 그런 사람들은 어두움 가운데서 사는 사람들이란 뜻이다.
그런데 지금 교회들은!!!
예수님의 제자였던 베드로를 1대 교황으로 섬기는 로마 카톨릭이나, 그보다 더 못한 예수님을 만나보지도 못한 루터나 칼뱅에 더하여 죤 웨슬레 등, 사람이 만든 모임을 따라 그 학설들을 주장하며, 교과서인 성경보다 더하게 그 학설에서 벗어나면 서로 논리전쟁을 벌인다.
그리고 그런 신앙인들을 금 은 보석이 아닌, 하나님의 심판 앞에 태워져 없어질 풀과 짚과 나무로 공력을 세운자이며, 그저 자기 하나만 겨우 불 가운데에서 구원을 얻을 자라고 하셨다(3:10-15).
사도바울이 이렇게 기록했다. 아니 하나님이 사도바울을 통해 말씀하셨다.
<그리스도 예수만 참 신앙의 터다>.
말씀대로라면 이제는 교단도 교파도 파하여 없애고, 사람의 성품을 신의 성품에 참예하게 하는 도리만 전하는 그리스도 예수의 교회라는 이름 명칭 하나면 족하다.
고린도교회의 성도와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에게 바울이 전도를 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인정하고 교회에 나오게 하는 것을 전도라고 하지만 하나님방식의 전도는 인간의 사고에 존재하는 하나님을 전하는 것이 전도가 아니라 인가의 사고를 하나님의 사고로 바꾸게 하는 도를 교회에 나온 교인들에게 가르치는 것을 전도라고 했다.
또 그 전도라는 단어는 증거와, 순교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 자기가 죽은 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전도가 된다.
인간의 전도는 말로 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전도는 입이 아니라 행동이다.
그러므로 성품의 변화 없이 입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외치는 사람들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외치지만 행동으로는 “하나님보다 자기가 더 위대하다”라고 외친다는 의미가 없다고 말할 수 없다.
더 나아가 한마디 더 하면 불신자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불신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불신이란 남이 한 말을 믿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도와 전파를 몰이해한 지금 우리들의 모습은 말을 믿지 않는 불신과 존재를 믿지 않는 비신의 관계를 알지 못한 것도 어떤 연관성으로 볼 수 있다.
말은 잘해도 언어학에는 무지함 때문이라는 이야기다.
‘우유’라는 뜻을 가진 갈라디아서의 주제는 복이다(3:8-14).
그래서 사도 바울을 통해 내가 지금 구하는 것의 제목을 하나님은 하나님을 즐겁게 하랴 사람을 기쁘게 하랴(1:10)라고 하며 어리석은 갈라디아 사람들아(3:1) 라고 한탄과 책망을 하는 것이다.
마음에 있는 의미가 행동이며 그 행동이 기도인 것을 모르면 십자가의 도를 알 수 없다.
그런 사람들의 기도는 의도를 가지고 자기가 행동하는 그 영적인 의미를 알지 못하여 그 의미에서 찾는 죄도 모르고, 하나님의 요구는 육신이 잘 살아서 하나님의 본을 보이길 원한다고 하면서 육신의 부나 평안을 위해 기도하게 된다.
하나님의 소원을 모르고 자기마음의 소원만 입으로!!!
그러나 로마서가 말하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타인에게 보이는 행위의 온전함을 이루는 방법을 따르길 원하는 하나님의 소원이 무엇인지를 알고, 또 그 믿음을 따라 행동하는 믿음의 과정을 거쳐 자기가 버려지고, 행동이 멈춰지고,
성품을 변화 받고, 사람 앞에 자기의 욕심을 따라 살지 않는 자신을 보여주고, 또 그 사람들이 자신이 살아온 그 길을 따라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게 하기위한 열정을 가지고 행동하므로 세상에서 인정받고 하나님이 주시는 영화의 관을 쓸 날을 믿으면, 십자가의 도를 하나님이 그 마음에 넣어주신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도가 심어지면 그의 행동은 항상, 갈라디아서에서 구하라고 하신대로 성령의 열매를 하나님을 모르거나 알아도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사람으로 그 성품이 변화 받기를 위해 구하게 된다.
이는 입으로도 그렇게 기도하지만 행동으로 나타는 그 의미에서도 그렇게 보인다.
인내라는 뜻을 가진 에베소서는 행위의 변화이다.
믿음이 변했다고 기도가 변했다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중에 행하는 행동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갈라디아서로 말씀하신 그 행위의 기도가 시작되고 그 기도를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때부터는 사람과 만남 속에서 드러나는 자신의 행동이 보인다.
이 행동은 보편적으로 사람이나 하나님을 원망하는 몸의 행동이 아니다.
그 몸의 행동은 이미 로마서의 죄를 깨달으면서 버렸다.
에베소서가 말씀하시는 행동은 마음속에 있는 의미로 찾아볼 수 있는 영의 행동으로 이는 남들의 행동을 보면서 상처 받거나 뭔가를 가르치고 싶어 하면서 못 마땅해 하고 있는 자기의 속사람의 상태이다.
이때, 상처받아 울고 있는 자신의 행동들까지도 자신이 보면서, 세상이 자신의 맘대로 되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또 가르치고 싶어 하는 자신을 보면서 내 맘대로 변하지 않았다고 투덜거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는 육신의 행동을 멈추어야 했던 것의 2차적인 현상으로 자신의 영적인 행위를 발견하는 때이다.
그리고 그 행위 발견의 끝에서 역시 하나님께 죄를 청하며 그 행위를 멈추기 위한 참음이 있는 때이다.
죄를 짓지 않기 위해 참는 것, 이것은 거룩하고 싶고 의롭게 보이고 싶어 참는 것과 타인들에게 보이는 현상은 같지만 하나님이 보시는 관점으로는 의인과 악인으로 갈라지는 극명한 차이가 된다.
‘말 타고 달리기를 사랑한다’는 뜻인 빌립보서는 그리스도 예수가 되기 위한 목표를 세우고 달리라고 한다(1:6, 1:10).
그리고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져라(1:8)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 이는 하나님과 본체와 같은 것이지만 자기를 죽이는 것이다(2:5-8)라고 설명한다.
‘버려야 할 굳센 것’이라는 뜻을 가진 골로새서는 핵심이 버려야 할 우상 곧 탐심이다.
인간이 짓는 죄의 모든 근원이 탐심이다.
땅에 있는데 이제는 떠나라고 하신 것은 그 탐심이 원래 사람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으로 이것이 곧 버려야 할 마귀라고 하신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사건의 둘째 날에 마귀를 죽이셨다고 한다.
십자가를 지는 사람의 그 마지막은 마귀가 떠나는 것 즉 욕심이 버려지는 것이다.
‘성공의 수단’이라는 뜻을 가진 데살로니가는 예수그리스도의 강림이 그 주제인데 그 강림을 통하여 사람에게 이루어지는 것이 행위의 거룩함이다.
성경 전체에 나타나는 나팔은 사람이나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다.
부활을 강조하는 고린도 전서 14-15장의 내용 중 14장 전체가 말에 대한 내용이고 그 하는 말을 나팔로 비유했다.
그러므로 나팔은 사람들의 말이었다.
요한계시록 1장10절에도 사도요한에게 드려지는 말이 나팔 같다고 했다.
데살로니가에서 그 나팔이 울리는 중에 사람이 변화 한다.
이는 사람의 영적 상태가 변화 받아 타인들과 어울리는 그 중에 사람들이 하는 소리나 행동에 전혀 인간적인 반응이 사라지고 그 영을 사랑하기에 그 영혼이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한 행동들이 나온다는 뜻이다.
‘십자가에 죽었다’는 뜻으로 ‘대가가 지불된, 하나님을 공경하다’라는 뜻의 디모데서는 <너 자신>을 말하던 데살로니가서 까지 나온 흐름과 전혀 다르다.
디모데서에서 부터는 <가르침을 받는 자를 가르칠 너희들>이라는 문맥으로 그 흐름이 바뀐다.
이는 성경의 순서상 인간의 본질을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었고, 생활의 자세가 바뀌었고, 그럼으로 해서 하나님이 보시는 기도의 자세가 바뀌었으며, 행위를 돌아보는 관점이 달라진 후 자신의 행위를 씻기(도둑이 그 짓을 멈추었다는 뜻과 동일함) 위한 행동하는 신앙인이 된 후 하나님의 은혜로 성품을 변화 받고,
하나님의 기운으로 하나님의 영으로 사는 사람이 그 땅에 태어남과 같이 하나님의 영으로 행동하는 신앙인이 된 후 가르치는 자가 되기 위한 하나님의 훈련을 시작한다고 하는 의미가 있다.
창세기 1장과 2장의 사이에 안식일이 있다.
이 안식이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자가 만나는 시간이며 장소에서의 교육으로 설명된다.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는 “시작”이라는 뜻이고 창세기 2장 4절의 대략은 “새 생명을 낳기 위한”이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하늘은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이라는 뜻으로 사람의 몸을 통제하는 머리이고 땅은 그 머리의 조종을 받아 행동하는 몸이다.
창세기 1장 1절을 영적의미로 그 뜻을 찾아 해석하면
<천지창조를 시작하시니라>이다.
그러나 2장 4절은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를 통해 새로운 생명의 천지를 창조하심은 이러하니라>라고 해야 하므로 창세기 1장은 자신 하나의 변화를 목적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고, 2장은 하나님에 의해 변화 받은 사람이 다시 나가 자신이 걸어온 신앙의 길을 다른 사람에게 걸을 수 있도록 가르치는 사명을 위해 훈련받는 과정에서의 일들이다.
그래서 신앙성장의 순서를 틀로 하는 서신서의 흐름이 데살로니가와 디모데 사이에서 완전하게 달라지며 너 자신과 남을 가르쳐야 할 너희들로 그 서신서의 수신자가 바뀌는 것이다.
그러나 ‘디도’의 뜻에는 ‘하나님을 공경하다’라는 뜻의 ‘디모데’와는 다르게 하나님이 빠짐으로 해서 ‘십자가에 죽은 사람’이라는 뜻은 같지만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에 더하여 사람을 공경하다’라고 하는 의미가 있다.
그래서 디도서는 사람의 상대하는 자세에서 인간중심의 자기욕심을 바탕으로 사는 사람의 영적 상태를 그레데인으로 비유하시며, 그 그레데에서 장로를 세우라고 하신 것이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교인들의 행위를 비난하며 교인들과 싸운다.
이는 교인들이 자신의 믿음과 같다고 보는 데에서 기인하는 것이며 자신의 말 한마디로 교인들이 변한다고 믿는 데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성경의 순서가 신앙성장의 순서라는 것을 모르는 행위이다.
어린 아기를 때리는 것은 그 머리에 잘 못하면 안 된다는 것을 주입시키기 위함이다.
그럼에도 많은 부모들이 지금 당장 효과를 보자고 때리며, 다음에는 그런 잘못을 반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똑 같은 바보이다.
‘가슴, 머리, 애정 있는 사람, 친구가 되다’라는 등의 뜻을 가진 ‘빌레몬’서는 이성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세상 모든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품고 대하는 영을 위한 성경말씀의 교육자를 설명하고 있다.
이 교육자는 오네시모를 받아야 한다.
‘오네시모’는 ‘악명 높은, 빈정거리다, 조롱하다, 꾸중하다, 밤이 되다, 비난하다, 욕하다, 고생하다, 기쁨을 끌어내다, 만족하다’라는 뜻이 있어, 화평케 하는 자로, 가르치는 자가 되어 일하는데 아주 심한 딴지를 걸어 빌레몬이 빌레몬이 되기 이전에나 지금의 바울을 괴롭게 했으며 그 일로 인해 바울에게는 8복사건의 마지막 단계에 있는 복을 받게 한 자의 상태를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빌레몬서는 지도자가 사랑해야 할 대상이 어떤 사람들인가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디모데와 디도와 빌레몬은 지도자의 자격이다.
그러나 ‘경계를 넘어온, 물을 건너온’이란 뜻을 가진 히브리서는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에 대한 설명이다.
히브리는 하나님의 입에서 분리된 사람의 참 자아인 영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아들이 핵심이며 그 아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존귀와 영화의 관을 쓰는 날까지를 강조하고 그 관을 쓰는 장소를 안식의 주체인 대제사장이 되어 타인을 가르치는 장소인 지성소를 설명한 것이다.
히브리서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불법과 불순종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어 후사들을 돕는 천사들을 통해 들려주신다고 했다.
그 천사를 통해 주시는 말씀을 흘려보내면 구원이 없다고 했다.
생활에서 들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이 아니라 사람들을 통해 일깨워지는 자신의 잘못에 대한 심령의 깨우침이었다.
또 그 구원은 사람(육에게 미혹된 영)이 번제에서의 죽음 이후에 다시 예수가 죽듯이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서 죽어야 할 성품을 죽이고서야 이루어지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히브리서는 믿음의 핵심을 설명하는 것이다.
‘발꿈치를 잡다’라는 뜻을 가진 ‘야고보’는 생활에서의 신앙인이 가질 자세를 말하는데 사람의 눈에 보이는 행위에서 선한 것이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조차도 하나님이 보시는 선악과를 먹은 죄인인 것을 알고,
선과 악은 타인이 아닌 자기 속을 먼저 보면서 마음에서 그 착하고 선함을 찾고, 그 자기를 중심으로 생활하여 타인과의 마찰이 전혀 없는 사람으로 살아가면서 타인들과의 온전한 화평을 이루라고 하는 것이 생활의 자세를 가르침의 주제이다.
‘반석에서 떨어진 돌 조각, 반석에서 떨어진 작은 반석’이란 뜻을 가진 베드로 서는 사람의 속에 있는 죄들을 찾아 짐승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하나님 앞에 버려야 한다고 하는 것이 가르침의 주제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께 받아 가진 사람이라면 자기를 발견해야 한다.
이 말씀은 이미 히브리와 야고보서를 가르치는 교육자에 의해 배우는 사람들이 숙지한 것이다.
영이 찾아야 할 믿음의 문제와 생활 자세를 배웠다면 이제 자기의 속에 잠재한 자신의 죄들을 찾아야 한다.
이는 마귀적인 요소들로 그 성품들이며 그 마음에 숨었던 것들이다.
이것들을 하나님께 드려야 하나님이 고쳐주신다.
또 하나의 문제는 가르치는 자를 선별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가르침은 베드로 후서를 통해 육신의 예나 윤리나 육신의 평안이나 육신의 치료와 회복을 가르치는 자들은 이단에 미혹된 거짓 선생인 것을 알고 떠나라고 하는 명령이다.
과도기 적인 문제는 있지만 어떻든 교회의 목회자들이 이제는 육신의 눈으로 보이는 모든 것을 위해 하나님을 섬기라고 가르치는 그런 교육을 이제는 버리고 목회자가 먼저 마음중심의 신앙을 다시 배워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목회자’를 상징하는 장로 요한을 통해 우리에게 보내신 요한서신은 사랑이 대전제이고 그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에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육체로 드러나는 것을 믿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성품이 바탕인 믿음의 문제를 배우고 화평이 주제인 행동요강을 배운 후 자신이 버려야 할 것의 종류를 배운 사람에게 가르쳐야 할 것이 그런 믿음의 행동을 하면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성품을 고쳐주시고 행동으로 그 성품을 따라 행동하게 되는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있음을 숙지시켜야 한다.
지도자가 가르쳐야 할 이 네 가지 신앙의 핵심에 가르침을 받는 자들은 그 가르침에 항상 반발 할 수 있는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유는 그들은 그레데 사람들이고 오네시모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비난하거나 정죄하지 말고 그들을 교육하라고 하신다.
지도자나 사람의 요구를 듣는 사람이 육체의 행동인 그 율법을 임의로 다 지킬 수 있다고 말하고 생각하고 요구하는 모든 지도자(?)는 다 하나님의 기름부음으로 인해 행동하게 하신다는 것을 믿지 않는 거짓선지자에 적그리스도이다.
‘찬양’이라는 뜻의 유다서는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의 상태를 가만히 들어온 자 몇으로 비유하며 그들의 상태를 유다서 전체로 설명하지만 그들을 대하는 자세에서는 마귀를 훼방하지 못하는 미카엘을 비유하시는 9절의 말씀으로 그들을 꾸짖거나 다투지 말고 가르침을 받는 자들에 대한 시시비비는 하나님의 판결에 맞기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판결에 맡긴다는 것은 교육하는 지도자는 묵묵히 사랑으로 가르치는 일에만 열중하라는 것이며, 몸으로 그 본을 보이는 것으로만 만족하고, 가르치는 것은 그 대적하는 행위나 육신의 모습이 아니라 영이 자라가는 과정만 가르치라는 분부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올리는 지도자의 찬양이란 자기를 대적하는 행동을 하는 피교육자일지라도 사랑으로 그 행동에 대하여 말하지 않고 영의 일만 가르치는 것이다.
육신의 일을 가르치면서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들에게 화를 내고 자신의 생각으로(좋은 취지라고 할지라도) ‘좋다, 틀렸다, 옳다, 그르다’를 생각에서 평가하는 사람도, 지도자도 다 마귀의 일을 버린 사람이 아니다.
요한계시록의 계시라는 말이 “벌거벗기다, 드러내다, 벌거벗겨 세워주다”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 벌거벗겨야 하는 이유를 천국의 삶의 그 목적을 두게 함이었다.
지금 교회는 천국을 하나로 생각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가는 영원한 세계에서의 땅을 지옥이라고 한다.
틀렸다.
영원 세계에서의 천국은 하나이지만 그 사는 모습은 다 다르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가는 곳은 지옥이 아니라 불 못이라고 한다(계20:11-15).
그들은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이 아니었다.
이기는 자들이 가는 천국이 있다(계21:7).
그 천국은 어린양의 생명책에는 기록되지 못하였으나 생명책에는 기록된 자들이다.
이기는 것이 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통해 보면 회개와 세움이지만 봉인을 떼는 천사의 사역이다(6:1-2).
그들은 세상에 살 때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산 영이 사망한 자들이었으며, 세상살이가 고난의 연속이라고 눈물을 흘렸고, 애통하였으며, 곡하였으며, 아파하며 살았다(21:4).
그들은 둘째 사망을 겨우 면한 자들이다(21:8).
그러나 일곱 대접의 재앙을 만난 사람들은 이미 세상에 사는 날 동안 어린양의 신부였으며(21:9), 성에 들어 갈 자격이 부여된 자들이었으며(21:10), 생명책이 아니라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이다(21:27).
그리고 또 하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이 가는 천국은 <우라논>이지만 천국의 왕성은 <바실레이안 톤 우라논>으로 그 이름이 이미 전혀 다른 장소이다.
이렇게 문장으로 찾아보는 영원세계의 장소가 서로 다른데에다 또 아시아의 일곱 교회의 상태로 돌아가서 보면 이기는 자들이라도 에베소 교회에서부터 사데 교회까지는 그 열린 성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나 이긴 후의 빌라델비아 교회는 그 성의 기둥이 되고 더하여 이긴 후의 라오디게아 교회는 그 성에 들어가 하나님과 같은 자리에서 먹고 마신다.
그러나 어린양의 신부와는 또 다른 격이 있다.
이를 두고 설명하자면 이는 성막의 모형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성막을 외부에서 보면 울타리 안에 있는 성소밖에 안 보인다.
다시 말하면 성막을 외부에서 보면 성소에 있는 자와 성막의 문 밖, 광야에 있는 자들과, 성막의 문 안뜰에 있는 자들과 하나의 천막에 싸인 성소에 있는 자들로 구분된다.
그러나 성소의 안으로 들어가면 성소의 밖에 있는 자들과 성소 안에서는 성소와 지성소에 있는 자들로 나누어진다.
핵심을 설명하면 성소는 생명의 양식을 먹는 곳이다.
지성소는 성삼위 하나님과 만나 타인을 가르치며 회개시키는 장소이다.
20장과 21장의 모습에 밖에서 보는 성막이 보인다.
그러나 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축으로 하여 그들이 변화 받는 과정을 거치고 하늘의 양식이 있는 대접의 재앙(고치고 회복시키기 위해 하늘의 것으로 채우시는 재앙)을 통해 완전하게 변화 받는 과정으로 본다면 요한계시록 전체에서의 모습은 성소를 기점으로 볼 수 있는 천국이 보인다.
일곱 나팔은 일곱 번째 봉인을 떼는 과정에 있다.
일곱 번째 봉인을 떼는 그 한 번의 과정에 일곱 나팔 사건이 있는 것이다.
여섯 번째 봉인까지는 잘못된 신앙의 개념 즉 신념을 인간중심에서 하나님중심으로 바꾸시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곱 나팔은 전쟁의 표현으로 믿음의 신념을 바꾸어주시는 그 과정에 있는 사람에게 존재하는 보편적 인간성중심의 개념을 모조리 불태워 없애버리시는 것으로 신앙인에게는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고 그 나팔 사건은 엄청난 복이며 은혜이다.
인간중심의 것들이 없어지고서야 비로소 하나님은 하나님의 것으로 그 사람의 땅에다 부으신다.
이것이 계시록의 비밀이다.
천국에서 성에 들어가는 자들로 어린양의 신부가 되어 성에 들어갈 자격을 이 땅에서 갖추는 과정을 설명하는 것이 요한계시록이며, 그 과정을 거친 자들로 이미 이 땅에서 어린양의 신부의 자격을 갖춘 상태를 천년 왕국이라고 한 것이다.
천년왕국의 모습을 보라 죽은 자들이 가지 못하는 곳이다.
죽은 자들이란 누구일까?
영과 분리된 시체??
그들에게 인격을 부여한다면 사람을 둘로 보는 엄청난 과오이다.
그럼 산 자는???
그때까지 지구상에 살아있는 자들????
그렇다고 말한다면 성경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이 보시는 산자와 죽은 자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몰상식한 이론가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한 사람 안에 있다.
그 나라가 어떤 상태일까?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그 나라는 눈에 보이는 국가나 세상이 아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
우리 교회의 지도자들은 어디를 목적으로 성경과 신앙을 가르치는가??
우리 예수그리스도를 목적하는 교회들이 생각 속에 그 천국에서의 생활을 아는가???
지금 교회의 지도자들이나 신학이 그것을 말하는가????
요한계시록은 그 천국의 생활을 목적하게 하여 인간의 죄들을 까발려 놓아도 자신의 죄가 까발려졌음에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즐거워 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들라고 하시는 것이다.
<GOOD TV(C3TV) 인터넷판 목회정보 플러스에서 강해설교 자료 참조요망>
c3tv 목회정보 플러스는 장신대, 서울신대 감신대 침신대 등 국내 유수의 신학교에서 설교학과 성경해석학을 가르치시는 교수님들이 설교를 검증하여 등록시켰는데 선언문 내용과 동일한 설교들을 그 교수님들이 검증하고 등록시켰음
c3tv에 전화로 문의 하셔도 무방함
그렇지 못한 이유
성경을 그렇게 믿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그 첫째는 하나님이 보시는 착한 행실이 사람이 말하는 윤리와 도덕과 예절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을 인간의 행동규범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면 성경의 내용이 마음이라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자기의 일로 보고 말하지 못한다.
그래서 성경의 인물이 다른 사람의 일이며 그들의 행동에서 교훈을 찾게 된다.
그리고 그 둘째의 이유는 예수에 관한 이해이다.
예수에 대하여 구약에는 구원할 자 메시아로 예언이 되어있다.
그러나 그 예언들을 자세히 보면 주전과 주후를 구분하게 되는 그 사건의 주인공인 하나님의 아들을 설명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
이사야 7장 10절부터 보면 오히려 그 메시아가 오면 아람과 사마리아 왕의 땅이 폐한다고 하여 사람의 마음에 존재하는 교만이나 거만이나 오만함이 사라진다는 표현이다.
두 나라가 망하는 것을 역사적 현실에서 말하는 분들이 있다.
웃긴다.
그 역사의 연결이 어떻게 되나??
아이가 자라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버터와 꿀을 먹을 때에 두 나라가 망한다고 하여 이스라엘과 아람이 앗수르에 망하는 때를 예수 탄생 후 2-4년 정도의 때가 되었어야 한다.
예레미야도 마찬가지다.
내용은 사람이 하나님의 의중을 알고 사람의 본성과 태생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알면 사람과 다툼이 멈출 수 있고 그 다툼이 멈춤으로 인해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이 사라져서 항상 밝은 빛에서만 행하게 된다는 뜻으로 예레미야 31장 35-37절을 기록하셨고, 예수가 길표가 되어 그 길을 예비한다는 것으로 이는 생활에서 타인과의 관계에서 있는 예수 탄생을 예언한 것이다.
누가복음 2장의 예수도 같다.
1장으로 설명된 어두움에서 해방되는 구주가 나셨다.
강보에 쌓여 누운 아기가 그 표시다.
아기가 구주일까???
표시였다.
그럼 구주란?
예수의 행적이나 가르치는 말씀이 우리의 구주였고 그 말씀을 하나님의 아들이 죄 있는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사람의 몸으로 태어났으며, 우리는 그 가르침과 비밀의 말씀을 풀어야 한다.
로마서는 예수의 사역을 둘로 구분한다.
하나는 다윗의 씨로 설명된 육신적인 사람으로 죄인의 모습으로 죄에서 해방되는 길을 가야 하는 사람의 본을 몸으로 보이는 사역이며, 또 하나는 성결의 영으로서 완전하신 하나님이 우리들을 교훈으로 인도하시기 위한 인도자의 사역이다.
그래서 로마서 1장 3절에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을 강조하고 4절로는 성결의 영으로서 죽었다가 부활한 예수를 증거 하였다.
그리고 그 상황을 사도직분으로 받아 이방을 순종하게 할 사명을 5절로 설명하고, 6절로는 그 가르침을 받아야 하지만 육체의 행위만 보고 판단하는 죄인의 상태에 있는 ‘너희들’을 설명한 것이다.
로마서 8장 3절은 또 다시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셔서 죄 있는 교회 교인들이 믿어야 할 예수의 상태를 설명한다.
고린도의 예수는 타인들과의 말다툼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람방식의 대응이 멈춰지고 하나님의 방식을 따라 대응하는 부활의 상태부터 시작해서 전 서신서에 우리들이 따라야 할 예수그리스도의 모습과 우리들이 이루어야 할 상태를 예수그리스도로 비유하셨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성품으로 변화 받고 그 성품을 따라 타인을 사랑하므로 그들에게 그 사랑을 몸으로 표현하는 행위의 거룩함이 저절로 표출되어 그들이 다시 가르치는 자가 된 그 사람의 전철을 다시 밟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주제이며, 그것이 예수그리스도를 몸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경은 예수그리스도로 사역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증거 하기 위한 말씀을 넘어 우리 인간을 예수그리스도로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작업내용이므로 그 주체는 우리 신앙인이다.
우주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물을 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믿어야한다.
그러나 신앙 안에서 <예수를 누가 믿어야 하는가?>라고 물으면 그 예수는 성삼위 하나님을 우주의 주재자로 믿는 교인들이 믿어야한다.
그래서 지옥이 사람의 판단을 받으며 하나님이 주시는 고통을 받는 시간과 장소를 말하는 것이 된다.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란 말은 교인들에게 해당되는 것으로, 하나님이 우주의 주재자이심을 믿어 교회에 나오고도 어린 아기와 같이 하나님의 뜻을 아니 믿는 ‘금지의 뜻’으로의 불(不)신자가 아닌, 하나님의 존재를 안 믿는 ‘부정의 뜻’인 비(非)신자들이 믿어야 할 대상이 아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기독론이다.
기독론의 핵심은 신앙인이 온전하신 하나님과 같이 온전해 지는 것이다.
그 온전함이란 성품의 온전함과 행위의 온전함에 있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신 목적이 하나님이 받으실 영광에 있다.
그 영광은 사람 하나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 때문에 타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목적은 타인에게 하나님을 증거 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것을 알지 못한 우리 믿음의 선진들이 자신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람의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겠다고 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그리고 그들의 열심이 바탕이 되어 표준이 되고, 신학이 되었다.
그들이 죽인 간음한 자, 창녀, 음녀, 술주정뱅이들은 하나님이 보시는 간음한 자나 창녀나 음녀나 술주정뱅이가 아니었다.
에브라임을 책망하는 호세아의 의미를 풀면 오히려 육신의 행위에서 올바름을 가르치려고 하며 그 범위를 넓히려고 하는 것이 고멜과 같은 창녀였다.
그들을 말하자면 육신의 행위의 올바름을 구했지만 그들은 개인적으로 보면 살인자들이다.
물론 육신을 죽이는 살인자를 살인자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낙심하게 하며 그 영이 자라지 못하도록 육체에 관한 말을 타인의 머리에 집어넣으려고 하는 것을 살인이라고 했다.
그럼 그들의 요구는 영을 위한 것이었나?????????
그들은 영으로 살인을 했고 육으로도 살인을 했다.
그럼 그들이 죄인일까????
하나님은 마지막 때에나 하나님의 말씀의 비밀을 풀어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비밀을 몰랐다 그래서 읽혀지는 대로 들려지는 대로 하나님의 명을 따라 살려고 애쓴 것이다.
그렇게 말하고 보면 사람이 사람을 죽인 것일까 참새도 하나님이 관리하시면서 그 생명을 주관하신다.
사람의 감정도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따르는가에 따라 그에 걸 맞는 감동이나 감정을 주신다.
하나님이 그 때에는 그렇게 그만큼만 하셨다고 믿게 되는 논리이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원리에서 공경해야 할 부모를 현실이 아닌 가상의 공간에서는 지금의 나보다 못한 신앙을 가진 분들이기도 하며, 예수님 이래로 지금까지 교회를 이끌어 온 모든 분들이라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는 나에게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를 알게 하고 믿을 수 있는 교회를 이곳 포천에까지 세울 수 있게 해준 그분들에게 엎드려 백배 천배 만 배로 절하며 감사해도 그 고마움을 다 표현 못한다.
이를 다시 설명하면 육체로 말하면 자녀는 어린 자를 말하지만 문화나 기술 사상 등을 말할 때면 부모의 세대가 자녀의 세대보다 못한 것이 당연하다.
그래서 로마서에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잘 못 되었으나, 이삭이 태어날 것을 믿는 믿음을 인정하는 의로 말씀하시고 이삭을 낳은 것은 새로운 믿음을 위해 행동하는 의를 야곱을 말할 때에는 의로움을 이룬 것으로 말씀하셨다.
그렇게 보면 지금 우리들이 사는 세상에서도 우리 기독인들이 섬겨야 할 영의 사람들은 각자의 신앙보다 더 좋은 신앙이나 지위의 높은 자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모르고 다투자고 오는 안티기독교인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을 모르는 자, 신앙을 비난하는 자, 하나님을 모르는 타 종교인, 신앙이 어린 자 등,
지금 우리가 비난하는 모든 사람들 전부가 우리를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날까지 섬겨야 할 그 대상이다.
성경을 성품의 문제로 이해하기 시작하면 구원이나, 예수의 재림이나, 심판이나 저주나 지옥이나 천국이나 나라나 교회나 그 어느 것이라도 우리들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로 볼 수 있다.
구원의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구원이란 죄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 다는 말이, 존재했던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모양으로 오신 후 예수라는 이름으로 살았던 그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성경의 비밀을 모르는 무지의 소치이다.
그 예수로 보여주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 갈 때에 비로소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표현이다.
틀렸다고 말하며, 칼빈주의 안에서는 이단이라고 말한 분도 있었다.
그러나 문장을 보자 그 구원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
구원이란 단어가 등장하는 그 모든 상황이 신앙인에게서 발생될 수 있는 상황이며 그 상황에서 찾아야 할 죄들이 있고 또 사람들이나 환경에서 당하는 고난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예수를 믿습니다>라고 입으로 말하면 이루어지는 허상의 구호가 아니라 우리들이 예수가 되기 위한 과정을 넘으면서, 매 순간 만나고 발견되는 죄를 가진 자신을 발견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힘겨운 상황에서의 해방이 구원이라는 말씀이 된다.
그러므로 존재가치로서의 하나님과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를 더 말하자면 우리가 말하는 영의 일이 있다.
보이는 환경에서 말하자면 영의 일이란 무속인들이 귀신을 만나면서 이야기 하며 사람에게 닥칠 미래의 일을 알게 되는 것과 같이 우리들이 마음을 모아 입으로 기도하며 육신의 복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세상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마음에 있는 영의 상태를 하나님과 같이 온전한 영으로 변화 받기 위한 것이 참된 영이 추구하는 일이 된다.
그러므로 인성중심의 영이 신성중심의 영으로 변화 받기위해 살아가는 것을 말하는 영성은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발전이다.
영의 일이란 귀신을 만나듯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성품을 하나님의 성품으로 변화 받기 위한 일이다.
다시 원론으로 돌아가서 말을 해보자
하나님은 우리들의 성품이 하나님의 성품으로 변화 받길 원하신다.
그 과정에 인간적인 괴로움이 따른다.
인간적 괴로움 없이 영의 일을 할 수 있나?
마음에 숨은 마귀중심의 인성을 발견하기란??
또 자신의 행동을 주장하는 의도 속에 하나님이 보시는 의미를 발견하기란?
사람이 자신을 괴롭히지 않으면 절대로 볼 수 없고 찾을 수 없는 일이다.
영성운동은 육체가 고달파 봐야 한다.
사람의 주체는 영과 육체이다.
이유는 육체는 흙으로 지으셨고 영은 하나님의 입에서 불려져 나온 숨으로 지음 받아 육체는 지구에 속해있고 영은 하늘에 속한 것이다.
천국을 소망하는 사람들의 시각이나 인식은 영의 문제에 모두 쏠려 있어 고달픈 육체 안에서 자신의 육적 성으로서 하나님이 보시는 악을 찾는다.
그러나 천국을 모르고 이 지구에서의 삶에서 하나님의 복을 찾고 행복을 추구하는 신앙인들은 육신에게 주는 괴로움을 기쁨으로 알지 못하고 육신의 행복을 위해 사람과 하나님께 구하며 자신의 성품을 구하라고 하신 그 사건에서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 그 원인을 돌리며 다투고 싸우게 되어있다.
그런 사람은 죽을 때 하나님의 천사가 와서 잘 못 된 삶을 지적하기 전까지는 항상 삶을 괴로워하며 타인들과 다투는 삶을 산다.
천국의 삶이 동경되어 그 삶을 바라며, 죄인으로 사역하신 예수가 되어 하나님 앞에 마음에 천국을 이루기 위해 보이지 않는 영이 짓고 있는 악을 발견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은,
남들이 자신을 괴롭혀도 좋다.
자신의 영적 상태를 발견할 수 있게 해주니까!!
그 사람은 자기의 본성이 올라와 나쁜 짓을 해 봐도 감사하다.
남을 통해 할 수 없는 자기의 욕구충족을 위한 자신의 성품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생활에서 고난이 와도 감사한다.
새로운 것으로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복이 기대되니까!!!
영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은 고난이 와도, 괴로움이 닥쳐도, 성품이 들고 일어나도, 남에게 자기의 것을 빼앗겨도 자신의 영을 살리기 위해 죄인이며 악인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에 기뻐한다.
또 그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목적을 이루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권면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런 사람은 그 자세 자체로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받길 원한다고 몸으로 항상 기도하고 있다.
그런 사람은 세상의 모든 환경이 고맙다.
자신의 모든 것 중 그 어떤 것을 빼앗는(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사람도 고마워 할 줄 안다.
그 사람은 모든 일에서 먼저 하나님을 생각하고 자신의 기분이나 감정보다 하나님의 말씀과 자신의 기분이나 감정의 관계를 생각하고 자신의 악을 발견하길 원하는 생활을 한다.
그런 사람은 보편적인 인간의 방법으로는 절대 하나님의 법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항상 하나님을 찾으며 기쁨을 유지한다.
다시 말하지만 또 그런 사람은 이 세상에서의 삶이 행복해하며 즐거워하고 기쁨이 가득한 세상이라고 말하며 자신을 대하는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는 사람으로 섬길 수 있다.
모든 문제에서 생각이 먼저 하나님을 만나는 그런 사람은 마음에서 타인을 향해 화를 내고 싶어도, 싸움을 하고 싶어도, 소송을 하고 싶어도, 남의 것을 빼앗고 싶어도,
남의 것을 자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이용하고 싶어도, 자신을 자랑하고 싶어도, 자신만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것처럼 말하고 싶어도,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없는 죄인임을 알고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또 그런 죄인의 상태인 것조차 생각이 돌아보지 못했다면 자신의 생각에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여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한 죄인인 것을 고백하게 된다.
그러나 생각과 마음에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사람보다 그 먼저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죄 때문에 행동하는 자신이 있다.
생각 속에서 타인을 계속 판단하고 있고, 불평, 불만에 원망과 다툼이 계속 일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면 자신 스스로 그 사람을 옆으로 보내고 붙여주신 하나님을 원망하고,
그 하나님을 향해 원만 불평과 불만 다툼에 더하여 세상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싸우되 하나님을 불의한 분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은 자신의 믿음의 상태를 따라 하나님이 사람을 붙이기도 하시며, 떨어지게도 하시며, 옆에 있는 사람에게 악한 생각을 가지게도 하시며, 그 생각에서 그 악을 소멸시키기도 하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그런 믿음의 사람은 가정의 삶을 소중히 여긴다.
자신을 괴롭게 하는 모든 말을 자신의 속에 있는 것을 발견하기 위한 최고의 수단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 가정에는 항상 웃음이 있다.
부모들은 자신을 잘 못 된 것을 알게 하는 배우자에게 감사하며 그들의 자녀들은 그런 부모의 모습을 보며 자라 그런 문화는 저절로 후대를 이어가며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는 문화가 만들어진다.
또 그런 믿음의 사람은 자신이 변하면 그 환경을 지배하시는 하나님이 그 옆에 있는 사람들도 자신을 인정하도록 변화시켜주신다는 것을 믿는다.
이유는 베드로 전서 2장 11-12절 말씀과 같이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은 타인과 절대로 그 어떤 종류의 다툼이라도 다툴 수 있는 행동을 할 수 없다.
사람들은 자기의 욕심을 따라 세상사람 모두가 움직여주길 바란다.
하나님의 요구를 따르면 남을 괴롭게 하지 말라고 하시는 율법이나 하나님이 주신 모든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로 넘치게 되어 자신의 요구를 강조하는 사람들이 사라지게 된다.
그런 생활의 문화가 지구에 있어 항상 웃으면서 남들을 괴롭히지 않는 세상이 올 것이다.
세상 기독교인 전부 중에 나 하나가 내가 먼저 변화받길 원하면 나 하나 변화 받는 시간이면 전부가 변화 받지만, 자신은 생각하지 않고 타인의 행동이 변화 받길 바란다면 그 사람도 자신은 문제없다고 생각하여 서로 다툼만 있을 뿐 그 아무도 변화 받지 못한다.
결론
히브리서 9장 10절에 개혁이 나온다.
그 개혁은 가시적인 공간에서 일어나는 행동지침서인 율법을 따라 양심의 예배를 드리는 것에서 마음교회를 상징하는 온전한 장막교회에서의 예배로 그 예배방법을 전환하는 것이다.
율법은 행위에서의 선악을 구분하여 행위를 옳바로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복음은 사람의 마음 속 성품을 신의 성품으로의 변화를 목적으로 자기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어둠의 행위 즉 마귀의 요구를 따라 자신이 자신의 행동을 조절하겠다고 하는 고백이다.
에덴에서 마귀는 네가 할 수 있으니 선악을 구별 할 줄 아는 지식나무의 열매를 먹으라고 요구했다.
그 요구를 듣고도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느껴지는 마음의 욕심을 따라 하나님의 법을 잊은 하와나 그의 요구를 거침없이 수용한 아담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을 주장하는 것 처럼 자신들이 주장 할 수 있는 행동의 조절을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는 것으로 생각하었다.
그것이 이유가 되어 그들은 짐승이라는 이름의 가죽옷이 입혀지고 에덴에서 추방되었다.
그들의 후손인 우리가 이제 그 가죽 옷을 버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의의 옷, 생명의 옷을 입어야 한다.
그 옷은 영의 몸으로 살고 있다는 증표가 된다.
그러므로 개혁이란 육신의 방법으로 살던 가죽옷을 벗어던지고 다시 에덴으로 돌아가 벌거벗은 상태에서 하나님의 성품으로 산다는 증표인 영의 사람이라는 증거의 옷으로 갈아입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참 종교개혁이다.
루터나 칼빈의 개혁을 살펴보자.
그들이 타인과 싸우면서 행위의 선악에서 행위의 옳바름을 주장했나 아니면 남들과 싸워 이기고 싶어하는 자신의 마음과 싸우기 위해 마음으로 돌아가 자기의 성품을 살피며 하나님 앞에 죄를 회개했나?
루터나 칼빈 그들의 종교개혁은 참 종교개혁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신앙의 유산을 이어받은 지금 교회가 세상의 지탄을 받고 교회들이 분열되는 것은 마음세상의 성품변화가 목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성경해석의 원리를 바로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과 육의 분리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성경으로 보면 지금 교회는 육신적인 생활과 영적인 생활의 법을 모르고 하나님이 보시는 죄와 악의 구분도 무엇인지도 모른다.
또 지금 교회는 하나님을 만나는 법도 모르고, 하나님과의 동행에 대한 정의도 모른다.
지금 교회의 교리나 신학에는 성경 66권(시편을 다섯 권으로 인정하면 70권)의 내용들이 각권마다 하나의 주제로 연결되고 그 주제를 따르는 6하 원칙으로 이어져 설명되는 것을 모른다.
그래서 성경전체가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흐르는 순서이며 그 순서가 구역으로 나누어지고, 그 나누어진 구역의 순서가 예수그리스도의 출생에서 승천의 과정과 일치하는 것도 모르고, 그 예수의 일생과 성막이 같은 뜻을 가지고 있는 것도 모르며, 그 성막이 창세기 1장과 2장에 대한 설명서이며, 성경전체를 설명하는 것도 모른다.
또 마음을 중심으로 가르치신 예수그리스도의 사역이 구약에서 이미 존재했던 사역으로, 구약에서 구원 받기위한 것과 구원하는 사역을 했던 예수그리스도들이 육신의 환경에서 그 목적을 이루고자 했기 때문에 실패 했던 예수그리스도들을 잊었다.
그들은 왕이며, 선지자이고, 제사장들이었다.
그럼에도 그 구약의 예수그리스도들을 대단한 신앙인으로 표현하고 그들의 행적을 신앙의 모본으로 삼고 있다.
이제는 서신서에서 버려야 할 신앙의 모본으로 비유되는 구약의 역사에 존재했던 인물들의 모습을 찾아 그릇된 신앙방법이라고 말하자.
이제는 서신서에서 우리가 찾아야 할 비유로 설명되는 예수그리스도의 일을 개념에서 믿어야 할 예수라 말하지 말고 그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예수가 되어 자신의 모든 죄와 악에서 하나님께 구원 받고, 또 사도의 모본으로 일하신 예수그리스도의 비유를 보며 타인을 구원하는 길을 찾아야 하는 지도자의 모본으로 삼아야 한다.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성경은 ‘기록된 대로’라는 뜻이 아니라 ‘맥을 따르는 문장으로’라는 뜻이다.
그리고 원문의 뜻을 문장에 맞는 뜻으로 맞추어 성경의 문장을 해석해야 한다.
그래서 이제는 신학이 성경해석의 단서인 행위중심이 아닌 성품중심으로 바뀌고 문장을 따라 쉽게 하나의 목적을 따라 설명되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신학자나 목회자들의 모습을 보면 다는 아닐지라도 정말 하나님을 향한 열정을 가지고 세상사람 전부가 하나님을 알 수 있게 하기기 위한 노력을 하며 또 그 방법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던 것을 안다.
그러나 문제는 드러난 대로 성경의 진짜 의미를 알지 못하여 그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못했고, 말하지 못하면서 오히려 그 반대적인 목적이 우리 인생의 목적인 냥 말을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아는 대로 말을 하여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지만 목적의 결론으로 본다면, 신학, 신앙, 설교, 강의, 철학, 사상을 포함하는 지금까지의 모든 말은 결국 거짓말을 한 것 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한 사람의 성품 변화보다 보이는 세상의 변화가 더 크다고 하여 우주의 환경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위대함을 거기에서 찾으면서도 사람의 본성은 변화하지 못한다며 자기를 정당화 시키면서 하나님이 지극히 작다고 말하는 사람의 성품 하나도 못 고치시는 무능력한 하나님이라고 그 몸으로 말한다.
그렇게 자신을 변론 할 때에는 하나님의 능력을 최소화 시키고서도 남의 행동을 지적할 때면 자신 스스로는 하나님이 할 수 없는 사람의 본성을 사람은 또 스스로 고칠 수 있는 냥 고치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더 큰 문제는 하나님의 이상을 사람의 이상과 같이 취급하면서 하나님을 비하시켰고, 하나님이 할 수 없는 것을 사람은 할 수 있다고 말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인간 이하로 취급했으며, 타인에게는 자신이 하나님처럼 요구하고, 또 타인을 향하여는 자신의 소원을 들어줄 우상으로 믿어 섬기고 경배하였다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그래서 어두움을 벗어나지 못했던 상태이고, 우매한 지도자며, 거짓된 지도자였으며, 하나님의 법을 목적에 적용시키지 못한 이단이었으며,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의 법을 알지 못했던 적그리스도였으며, 타인을 정죄케 하는 마귀조차 내보내지 못하였고, 사람이 지은 영적 죄들을 벌거벗길 줄 몰랐던 미련한 지도자들이며 신앙인이었음을 고백해야 한다.
* 그러므로 나는 행위중심이나 환경중심, 육체중심의 성경해석법을 이제는 뒤로 하고 마음이라는 세상에 존재하는 하늘과 사람과 하나님이 보시는 땅인 몸의 행동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설명하는 성경의 해석법을 강조하기 위해 인류의 개혁을 바라며 종교개혁 선언을 한다.
* 나는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목적을 바로 알게 되기를 바라며 종교개혁을 선언한다.
* 나는 신앙인의 생활방법을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방법대로 자신이 변화 받는 참 예배가 세상의 대세가 되기를 바라며 종교개혁을 선언한다.
* 나는 교회의 목회자들이 사람이 보는 육체가 아닌 하나님이 보시는 영의 몸이 하는 행동이나 생각이 하나님의 기준에 부합되어 듣는 사람이 생활에서 자기의 영적 죄들을 돌아보게 하는 설교와 강의가 대세가 되길 바라며 종교개혁을 선언한다.
* 나는 신학교수들이 사람의 논리가 아닌 하나님의 논리를 목회자 지망생에게 바로 가르치게 되기를 바라며 종교개혁선언을 한다.
* 나는 모든 교회의 기둥을 세우는 교리나 사상이 틀렸음을 인식하여 지금까지의 모든 교리적 사상의 틀 을 벗어던지고, 마음이라는 세상을 중심으로 새로운 신학을 인정하길 바라며 종교개혁을 선언한다.
* 나는 세상이 바라며, 나라가 바라며, 사회가 바라며, 가정이 바라며, 개인이 바라는 모든 소망이나 기대를 이뤄줄 모든 것이 마음중심의 신학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믿어 종교개혁을 선언한다.
* 나는 예수그리스도가 사람이 가야 할 신앙의 길로 인정하므로 사람이 가야 할 영적 신앙의 길을 보여주는 본으로 처음 오셨던 그 예수가 사람 각자의 마음에 임하여, 하나님에 의해 사람을 예수그리스도를 만들어주시는 것을 믿을 때, 하나님의 이름이나 재림예수를 빙자하는 모든 사이비들이 스스로 소멸되는 것을 믿어 종교개혁을 선언한다.
선언문의 내용은 앞에 이미 설명된 것을 요약하는 것이다.
종교개혁 선언문
교과서인 성경 해석의 문제에서
1. 성경은 사람의 성품이 하나님의 성품으로 변화 받아 다른 영을 살리는 마음중심으로 풀어야 한다.
2. 글이란 원문으로만 그 참 뜻을 제대로 알 수 있다.
성경해석의 원칙에 원문을 바탕으로 삼아야한다.
3. 성경은 모두 단어들을 설명하는 어떤 단서들이 있다.
그 단서들을 먼저 찾아 설명하여야 한다.
4. 성경해석의 근본에 성경의 모든 문장에서 육하원칙을 찾고 그 해석을 바탕으로 전해야 할 내용을 뽑아야 한다.
5. 성경은 모든 단어의 목적과 이유나 방법이나 목표 결과 정의가 모두 흩어져 있다. 용어의 참 뜻을 찾게 하는 흩어진 내용들을 하나로 모은 후 그 목적과 방법 등을 바르게 해석해야 한다.
6. 성경의 짝이라 함은 내용은 풀어진 문장에서 찾는 의미에서 찾아야 한다. 장문이 아닌 단문의 짝은 하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내용의 전부가 아니기 때문에 정답이라 말할 수 없다.
성경 이해의 문제에서
7. 성경 이해의 기본은 성경해석의 단서를 따라 성품의 변화를 중심으로 구성되었음을 이해해야 한다.
8. 성경을 이해하는 데에서 기본적인 것이 하나님이 지구인 땅을 창조하시고 그 땅을 사람의 육체로 비유하시고 그 육체는 또 다시 사람의 육적인 성품이나 행동, 또는 생각들로 비유하셨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9. 또 성경에서 예수의 사역과 어긋나는 구약의 역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평가 문제로 구약역사에 등장한 모든 인물들이 예수그리스도로서의 사역을 마음에 있는 성품에 맞추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사람의 일에서 그 사역을 시행하여 성품의 변화를 목적으로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린 잘못된 사역으로 이해하고 그 안에서 인성을 따라가는 사람의 사역을 발견하고 찾아야 할 신앙보다 먼저 버려야 할 인성을 찾아 말해야 한다.
10. 신앙의 핵심을 설명하는 로마서에서 사람의 행실 그 안에 존재하는 그 의미를 하나님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로 보신다. 그리고 사람과 다투는 사람은 세상이 자기중심으로만 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라 한다. 그러므로 앞으로는 보이는 사람의 행실을 보고 옳다 그르다 말하기 전에 먼저 타인은 타인대로 하나님의 복을 받도록 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오직 자신의 마음을 보게 하기위한 것으로 이해하라.
11. 십자가의 도는 사람의 예대로 하나님의 법이 맞추어진 것이 아니라 사람의 예대로 사용되는 모든 문자는 하나님이 보시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전혀 다른 현상이나 인간이 추구해야 할 신앙에 대한 설명으로 이해하라.
12.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란 마음이 하나님의 성품대로 변화를 받아 세상의 본이 되게 하는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한 결단을 앞세워 하나님께 소원하는 것으로 그 기도의 핵심이 몸으로 보여지는 그 의미라고 이해하며, 육신을 위한 기도는 육신의 삶이 목적이 된 신앙인으로 천국의 삶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라.
13. 성경의 기록 목적이 한 사람이 예수그리스도로 시작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성품의 변화를 중심으로 기록되었음을 상기하며, 의를 행하여 사람에게 보이려는 것을 멈추고 하나님이 보시는 죄를 짓지 않기 위해 욕심대로, 내 맘대로 행동하고 싶음을 참는 것을 인내로 알면서, 죄 된 행위의 멈춤을 주제로 하는 성경의 말씀을 자신의 행동 속에 얼마나 하나님을 배반하고 배척하고 있는 가를 돌아보라는 말씀으로 이해하라.
예배의 문제에서
14. 예배의 핵심인 교회는 사람의 마음이다. 그러므로 예배도 제사도 모두 다 한 개인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그 예배는 생활에서 일어나는 자기중심의 모든 것이 죄나 악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예배라 해야 한다.
15. 그래서 가시적 교회는 불가시적인 마음교회의 예배를 가르치는 교회로 말하여야 한다.
16. 예배의 필수인 헌물은 자신이 가진 인성의 요소들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십일조는 십을 이루는 그 마지막으로 타인을 위한 온전한 삶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말씀을 따라 가시적인 교회에서 육과, 생활에서 영이 드려야 할 헌물과 십일조 모두를 드리게 해야 하지만 가장 우선순위를 생활에서 자신을 드리는 헌물과 타인과의 관계를 하나님의 방법으로 온전히 화평을 이루게 하는 일인 십일조를 강조하고 가르쳐야 한다.
17. 신앙은 생활에서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한 예배가 핵심이다. 그 교회에서 있는 예배를 통해서만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으로 변화 받는 기적이 있다.
18. 그 심령교회의 예배 핵심은 기도에 있다. 그 기도는 마음을 모아 입으로 하는 것 보다 먼저 행동 자체가 기도이다. 그래서 그 기도는 어떤 행동이 말하는 의미라고 한다.
이제 교회는 기도의 핵심을 행동으로 가르치고 지금까지 입으로 하는 기도나 마음으로 하는 기도는 자기의 결단으로 표하는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19. 기도는 하나님께 사람의 소원을 아뢰는 것이지만 사람의 요구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원을 들어드리기 위한 것을 구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제 우리 교회들은 어느 일에서나 자신의 소원을 구하는 기도를 버리고 하나님의 소원을 들어드리기 위한 기도의 법을 말해야 한다.
20. 찬양의 정의에 신앙인은 악기를 연주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그 악기가 되었다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몸짓을 보여주는 것으로 타인을 가수로 세우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사람의 눈에 보이기에 완전하게 변화 받은 모습으로 보여주는 신앙인을 행위를 보고 타인이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하게 하는 것을 찬양이라고 이제는 말해야 한다.
21. 성경이 마음중심이면 금식도, 성찬도, 죽음도, 심판도, 모두 생활예배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또 다른 현상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제 그 모든 것을 몸으로 먹고 마시고 죽음으로 이어지는 몸이 하는 것이라 말하지 말고 마음에서 일어난 것이라 말해야 한다.
설교의 문제에서
21. 설교는 지식전달이 목적이 아니라 생활에서 예배 방법을 가르치는 수단으로 사용해야 한다.
22. 설교의 내용은 인간의 행위나 마음에 품은 것에 대한 죄에 대한 것 보다 먼저 그 품은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하나님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에 대한 죄와 악을 구분하고 설명해야 한다.
하나님이 보시는 죄는 인간의 눈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3. 또 설교의 내용은 인간의 행위규범을 버리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이 보시는 영이 하는 행위에 대하여 알고 그 행위에 대하여 교육해야 한다.
24. 설교의 방법은 성경 원문의 단어들을 해석하고, 그 단어 속에 있는 영을 위한 뜻들을 찾아 문장으로 연결하고, 원문의 뜻을 절대 벗어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그 내용을 쉽게 전달해야 한다.
25. 설교의 대상은 보편적 사람의 눈에 보이는 사람이 아닌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을 그 대상으로 하여 영이 자라는 것을 설교해야 한다. 천국에서 영원히 살아야 할 주체는 영이기 때문이다.
26. 배우는 자의 입장에서 볼 때 가시적인 교회에서 조용하듯 사람 앞에서 잠잠해야 하는 것을 배우고, 교회에서 기도하듯 생활에서 드리는 몸의 기도를 배우고, 교회에서 반주자의 반주에 맞추어 찬양하듯 자신이 반주자가 되어 세상 사람들에게 찬양할 수 있게 하는 것을 배우고,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듯이 생활에서 타인이 주는 괴로움에서 자신의 인간성을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27. 설교도 말로 하는 설교보다 설교자의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해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몸으로 하는 설교를 우선해야 한다(사람은 말은 듣기 싫어해도 몸의 행동은 저절로 몸이 배워 익혀지고 따라하게 되어있기 때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28. 그런 믿음을 갖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괴롭히는 소리에도 마음을 내놓으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으며, 자신을 권고하는 소리도 오죽하면 사람을 통해 자신을 권고하시는가? 라고 생각하며, 하나님의 소리를 사람을 통해 환경을 통해 듣는 귀를 가질 수 있다.
29. 하나님은 바벨론이나 앗수르 갈대아 등 욕심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치는 자들을 그들과 같은 죄를 가진 자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매라고 했다. 이방을 통해 주는 고통에서 그 죄와 악에서 돌이키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다. 하나님의 소리는 성경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주 전체를 움직이시는 그 안에 고루 존재한다.
성경은 그런 생활 신앙을 갖게 하는 교과서이며 권면하는 자의 소리는 권면하시는 대로, 괴롭게 하는 사람들이나 환경에서는 자신을 책망하는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믿어야 한다.
30. 그러므로 우리 신앙인은 가장 중요한 교회는 자신의 마음이지만, 가시적인 교회는 배우는 교회이며, 살아가는 모든 세상은 자신을 고치게 하시고 세우시기를 원해 말씀을 주시는 또 다른 포괄적 교회로 이해해야 한다.
31. 교회의 가르침은 영을 위한 교육으로 끝을 내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라가는 곳은 세상으로 인정하고 세상에서의 생활에서 하나님이 보시는 열매 맺기를 소원하며 살아야 한다.
교회 교육에 대하여
32. 신앙생활의 목적을 분명히 해야 하는 바, 그 목적에 천국을 두고 인생에 마지막에서야 회개하고 천국을 가는 것과, 이 땅에 살면서 마음에 천국을 이룬 후 가는 천국의 차이를 가르쳐야 하며, 그 천국이 이 땅에 살면서 사람의 성품을 하나님의 성품으로 변화 받는 것임을 확실히 교육해야 한다.
33. 교회 교육의 목표는 교회중심의 생활에 충성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를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답게 꾸미게 하므로 교회에서의 배움을 중요하게 생각하게 하며, 일상생활에서의 개인적 의무에 충실하게 교육해야 한다.
34. 사람의 말은 타인이 들으라고 하는 말이며, 생각은 자신이 듣기위한 말이며, 몸이 하는 의미적인 말은 하나님이 들으시는 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보시는 사람의 행위에 대하여는 몸이 아니라 사람의 행위의 상태로 유추하여 생각할 수 있는 그 의미를 하나님이 보시는 마음의 행위라고 가르쳐야 한다.
35. 교인의 생활 자세는 하나님을 비 신앙인에게 소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들이 실시하는 교회의 교육이 사람들과의 모습에서 하늘의 삶을 고귀하게 여겨 자신이 추구하는 육을 위한 모든 가치관을 죽이는 십자가를 질 수 있게 가르쳐야 한다.
신학의 문제에서
36. 지금까지 모든 신앙인이 전혀 성경적인 생활 자세를 갖지 못하고, 목회자들이 성경의 말씀대로 성품의 변화를 중심하는 하나님이 보시는 행위로 찾아보는 몸의 말을 가르치지 못한 것은 철저히 신학에서의 그 오류로 인해 발생된 것으로 알고 신학자라고 생각하는 모든 분들이 하나님을 생각하고 새로운 신학형성을 위해 하나님께 헌신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37. 이 모든 문제는 지금까지의 신학이 가시적인 현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찾았기 때문이다.
또 이런 것들을 교회가 알 수 없었던 것이 보편적 인간의 상식이 바탕이 된 신학을 바탕으로 하여 그 범주를 벗어나면 이단시하고 정죄하였기 때문이다.
38. 그리고 그 기준에 교단의 정체성 논란이나 형성되는 세력이 바탕 되었음은 어느 누구도 부인 할 수 없다.
그 신학을 배운 분들이 목회자이고 그 목회자들에게서 배운 분들은 절대 이 신앙을 배울 수 없다.
이제 이 땅의 모든 신학자들이 지금까지의 기득권이나 모든 권위나 명예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가를 성경을 보면서 바로 연구하여, 세상의 모든 사람이 성경을 보면서 그 문맥으로 연구하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39. 히브리서에 율법은 육체의 예법만 되었다, 율법으로는 아무 것도 거룩하게 할 수 없다, 라고 했다. 지금까지 신학은 성경에 있는 해라 하지마라고 하는 하나님의 명령을 육체가 지켜야 하는 법으로 설명하며 그 법을 기준으로 신학이 형성되었다. 그 결과는 아무도 하나님 앞에 거룩하다 말할 수 없다. 지금까지의 신학이 율법이었기 때문이다.
40. 이제 신학은 영과 육의 문제를 버려야 할 성품과 구해야 할 하나님의 성품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41. 앞으로의 신학은 세상의 모든 가르침에서 완전한 분리가 이루어져야 한다.
42. 인본주의적 육신의 눈에 보이는 육체의 행동과, 환경에서의 변화를 목적으로 하는 개념과, 사상과, 철학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 지금까지의 신학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궁극적으로는 거짓이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마음중심의 신학을 인정하라.
43. 이제 신학은 사람들의 신앙과 관련 있는 기독론으로부터 시작하여 구원론, 종말론, 재림론, 천사론, 교회론, 인간론 등 신학 전반에 걸쳐 대 수술을 해야 한다.
목회자의 자격
44.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들을 아들과 종으로 구분하셨다.
그리고 아들을 통해서 일하시는 것을 완전한 것이며 아들에게만 하나님이 주시는 완전한 복을 약속하셨다.
예수적인 믿음을 섬기기 위해 종으로 비유되는 모세를 따라 육신의 예법만 강조하고 하나님의 치료와 회복을 육신에게만 맞추어 영의 일을 전혀 모르는 목회자는 <히브리서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법이 마음에 없고, 생각에 기록함을 받지 못한 종>이라 아니할 수 없다.
45.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목회자는 절대적으로 타인을 비난하는 행동이나 말이나, 생각이나 성품 그 아무것에서조차 없어야 한다.
46. 그러므로 이제 새로운 신학을 바탕으로 하는 목회를 지향하고픈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법이 마음두어지고, 생각에 기록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날까지> 영으로 시작하는 새로운 신앙의 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
47. 앞으로 배출되어야 할 신학자나 목회자는 하나님이 정하신 자기를 온전히 버린 자이어야 하며, 그 행위에서 타인을 위하는 온전한 의미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앞으로의 신학생의 기준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한 결단과 타인을 배려 할 줄 아는 자세를 가진 자가 되어야 한다.
48. 성경은 지상 최고의 문법 분해와 문장 분해와 재조립에 더하여 비밀로 기록된 하나님의 암호를 풀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앞으로의 목회자 후보생인 신학생 영입의 또 다른 조건에는 성경의 내용뿐만 아니라 세상 최고의 문법과 문장을 분해할 수 있고, 복잡한 것들이라도 이해가 빠른 지성을 갖춘 자들로 선발해야 한다.
생활의 문제에서
49. 성경의 교회는 세상 전부이다. 그중에 제일이 하나님이 성경으로 말씀하신 한 사람의 마음이다. 하나님은 그 교회가 깨끗하길 원하시며 하나님이 보시기에 하나님의 성품으로 가득 찬 아름다운 교회가 되길 원하신다.
그 마음교회를 아름답게 만드는 곳이 세상이라는 교회이다.
그 교회에는 사람이나 환경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 그 말씀을 잘 들어야 마음교회를 깨끗하게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교회를 아름답게 할 수 있는 교육을 받는 곳이 목회자에게 말씀을 배우는 건물교회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 전체이며 그 중에 가장 귀한 교회는 각자 개인이라는 것을 항상 생각하여 교육받는 교회를 귀하게 여겨야 한다.
50. 그러므로 한 사람이 지구에서 사는 일생의 생활은 우리 신앙의 결전장임을 알아야 한다. 이는 자신의 인성과 싸우는 전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몸으로 지키려는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여 인간성이 일어나는 자신을 보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것을 알고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지 않으려고 치루는 인내의 전쟁인 것을 잊지 말고 항상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51. 생활에서 만나고 같이 존재하는 가족 친지 이웃 등 세상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신의 영을 위해 붙여주심을 믿고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일군으로 믿어야 한다.
52. 그리고 그 사람들과 어울리며 육신은 괴로움을 당하지만 자신의 영이 하나님의 법을 따르게 하기 위한 일을 하는 고마움의 대상으로 믿어야 한다.
53. 그러므로 세상을 육의 눈의 보면 괴로움이며 고생과 고역이라고 하지만 천국에서 영원히 살아야 하는 영의 눈으로 보며 자신을 고치시고 변화시켜주시는 세상으로 믿어 즐겁고 행복한 세상이라고 믿고 말해야 한다.
54. 그런 믿음을 가지고 누군가가 자신의 잘 못된 그 무엇을 말 할 때에는 그런 말을 해 주는 대상에게도 고마움을 표할 줄 알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자신의 행위가 악함을 알고 그 악의 근원이 죄를 찾으며 하나님이 보시는 악을 찾아 하나님께 기쁨으로 드리기 위한 신앙을 찾아야 한다.
55. 사람의 본성 중에 가장 나쁜 것은 가장 나쁜 상황에서 나오게 된다. 그러나 그런 마음중심의 신앙을 찾으면 세상사람 모두에게 악을 행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 아니 나 아닌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악을 행하기 위한 죄를 먼저 발견하기 위해 하나님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56. 지금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세상의 정의 사회구현을 외치는 많은 단체들이 있다. 세상의 정의는 우리 크리스챤들이 먼저 하나님의 공의를 따라 그들 때문에 자신 속에 있는 애굽적인 가르침을 앞세운 죄인임을 먼저 알았음을 고백해야 한다.
57. 또 세상의 공의는 그리스도 예수의 교회들이 모두 천국의 삶을 동경하는 마음의 법을 따르며 실천 할 때에 하나님이 만들어주시는 것 역시 믿어야 한다.
58. 그리고 이제는 그들에게 몸으로 하나님의 모습을 보이지 못한 죄인이라고 믿어 세상을 정죄하므로 하나님을 대적하던 그 모든 행사를 중단해야 한다.
59. 국가는 국민이 바꾸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음을 믿어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의 교회들이 정치를 바꾸려고 하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전권에 도전하는 것으로 믿고 그 모든 행사를 중지해야 한다(개별적 정치인들에게 하는 말이 아님).
60. 세상은 하나님이 만드시고 운영하신다. 그리고 참새 한 마리의 목숨까지 관리하신다. 세상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이 세상을 통해 교회를 핍박하는 것조차도 세상의 잘못이 아닌 교회들의 잘못을 책망하시기 위해 사용하신다는 믿어야 한다.
지금의 모습에서는 예수그리스도의 교회들의 총체적 난국이다. 그러나 그 난국에서 사람이 헤쳐나길 거부하고 그 속에서 세상과 다투어 이기고 싶어 하는 스스로의 마음속을 돌아보며 싸워 이기고 싶은 생각을 죄와 악으로 깨닫고 회개를 해야 한다.
결론
61. 성경은 제일 처음 교육을 받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 교육은 성경의 말씀에서 찾되 문장을 기초로 하며 철저히 보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세상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
62. 이런 신학과 신앙은 십자가 앞에서의 예수가 빌라도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보이는 세상나라가 아님을 천명한 것으로 드러난 사실이며, 이 마음중심의 십자가를 지는 법이 아니면 그 어느 것도 하나님과 같이 온전해지는 하나님의 법을 따를 수가 없다.
63. 우리가 이제, 사람은 절대 변할 수 없다고 하는 사람 각자 자기중심의 성품이 하나님의 성품으로 변화를 목적으로 신앙과 신학과 생활의 개혁을 하면, 세상 모두가 사람이 추구하는 복보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기대하게 될 것이며, 생활의 목적은 천국에 사는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나님께 인정받길 바랄 것이다.
64 가정에서 이 개혁이 이루어지면 남편들은 하늘을 지배하시는 하나님과 같이 가정을 위해 최선을 다해 일을 하며 자신의 노력과 땀으로 가정을 위해 일하는 것을 최고의 기쁨으로 여기며 일 할 것이며, 아내들은 사람의 마음에 하늘의 집을 짓는 성령님과 같이 가정의 문화를 아름답게 하기위해 가정으로 돌아가 자녀를 많이 낳을 것이며 자녀들은 부모님께 순종하여 부모의 기쁨이 되는 것을 가장 기쁘게 여길 것이다.
65. 사회에서 이 개혁이 이루어지면, 강절도 사건 등 자유주의 사회질서를 파괴하는 범죄와 윤리를 파괴하는 성범죄가 사라질 것이다.
66 세계에 이 개혁이 이루어지면 외부의 개혁을 통해 세계평화를 이루자고 폭력을 쓰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먼저 변화 하자고 하여 세계의 평화는 저절로 이루어 질 것이며, 역사를 거짓으로 꾸며 남의 땅 빼앗거나 자신을 정당화 시켜 타인을 울게 하는 일이나 세력으로 그 거짓을 덮는 지도자들이 없을 것이다.
67. 경제 논리를 가지고 사람의 행복지수를 앞세워 사상을 논하는 세계의 정치권에 이 개혁이 이루어지면, 하나님이 보시는 의를 만들기 위해 세상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경제논리를 알게 되어 더 이상 경제 논리를 위한 사상전쟁이 종식될 것이다.
68. 신의 권위와 경(經)의 논리적 우월성을 강조하며 사상전을 벌이는 종교계에 이 개혁이 이루어지면, 복의 근원과, 자신의 욕구충족이 어디에서 이루어지는지를 바로 알아 더 이상의 종교전쟁이나 논리전쟁이 사라질 것이다.
69. 대한민국의 근본 신앙사상인 삼일신고에 기록되었고 성경의 중심 인간 사상과 같이, 성품이 하나님의 성품으로 변화 받기위해 사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사람의 요구가 있어도 사람은 남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감추고 싸우기 위한 전쟁만 준비할 뿐, 그 아무도 자기의 기득권을 놓지 않고, 얻기 위한 욕심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의 성품으로 변화를 받아 지상 최고의 복과 영원한 천국에서의 최고자리와 최고의 행복을 보장 받는다면 그 누구라도 기쁨으로, 보이는 세상에서의 자기가 추구하는 복이나 욕심을 포기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자살이나 이혼, 폭력, 사기, 절도, 다툼, 전쟁이 없이, 개인의 행복이나, 다산이나, 가정의 질서나, 사회에서의 안녕이나, 자유와 평화와 평등이 보장되는 국가나, 세계의 평화를 온전히 이룰 수 있는 길은, 오직 한 사람이 자기중심의 성품을 하나님의 성품과 같이 타인을 위해 존재하기위한 사랑이 가득한 성품으로 변화 받고 행동하는 성경의 법, 하나님의 법을 따르는 이 종교의 개혁에서 시작하여 세상 모든 인류가 개혁되어 기쁨과 행복만 가득하여, 하나님의 복으로 사는 후손들이 살 수 있게 지구의 문화를 물려주어야 한다.
70. 교회의 모습을 따라 하나님이 세상을 움직이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모든 교회는 세상과의 모든 다툼을 죄라고 여기고 하나님께 죄를 고하며,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향하던 손가락을 자신에게 돌리고 먼저 보여주지 못함을 미안해하면서 이 개혁에 동참하라.
세상 모든 사람들에 앞서 지상에 사는 모든 사람이
최고의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게 하는 그날을 위하여!!!!
2010년 11월 11일
선언자 / 기독학술원 생명의 강
원장 / 류현수 목사
이 논리를 부정하거나 의문을 가지고 변론을 요구하고 싶은 분들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되나 우리 신앙의 교과서인 성경을 먼저 보고 이해 할 수 있기를 바라며, 성경의 정확한 근거를 제시할 수 없이 무작정 따지는 분들의 변론을 하지 않습니다.
다만 성경의 정확한 근거를 제시하신다면, 그 근거를 겸허히 수용할 것입니다.
저는 제가 제일이 아니라 다만 성경을 그렇게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이 신앙의 사상을 거부하려는 분들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다만 말하고 싶은 것은 우주 최고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요구가 어떤 결과를 만들어야 완전할 것인가를 생각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신앙을 가지는 것이 하나님을 우주 최고의 하나님으로 받드는 것인가를 생각하시길 바랄 뿐입니다.
그러나 바라기는 논리를 따지기 이전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상이 어떤 세상일까 하는 의문을 자신 스스로에게 먼저 던져보시길 바라며, 이 세상 사람들을 포함하는 자신 스스로도 어떤 세상에서 살고 싶은가를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또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에 잘 못한 사람,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에게 손가락질하고 야단을 치면서 다른 사람들의 자존심을 긁어 놓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 받으라고 하는 것이 좋은가? 아니면 우리의 행실을 보며 그들 스스로 사람마저 변화시켜주시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따라오게 하는 것이 좋은가를 생각해야 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 개인이 하나님을 우주에서 최고로 받든다고 최고가 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들을 우주에서 최고로 섬겨줄 때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바꾸어주신 그 능력의 하나님을 우주에서 최고라고 치켜 세워주게 함으로서 하나님을 우주에서 최고의 하나님으로 섬기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본인 소개서
성명 / 류현수
직위 / 목사
이력
예장 개혁총회(총회장 백병룡) 인준 신학
성민 신학원(학장 정학봉) 신학부 수료
동 신학원 신학연구원 수료
예장합동 대신(정통) 총회 신학 대한 신학교 편목, 석사과정 이수
예장 (합동개혁)총회 총회장 역임.
한국 장로교 연합회 사무국장 역임.
인터넷 방송 NCC라이프(장로교 연합 신문) 보도본부장 역임.
예장 합동 대림총회(합동개혁+대림총회 연합) 총회장 역임.
(전) 대한신학교 교수
대한민국 안보와 경제 살리기 국민운동본부 서기 역임.
현 <기독학술원 “생명의 강”> 원장.
현 생명의 강 교회 시무.
저서
천국까지 세워놓은 성경 시리즈
1권/ 창조시대로 보는 하나님의 계획
2권/ 족장시대로 보는 신앙성장의 길
3권/ 예수 그리고 십자가
4권/ 마음에 지어지는 하나님의 집 성막
5권/ 마음 세상의 종말 요한계시록
* 정말 재미있고 쉬운 로마서강해
* 그리스도의 삶을 찾는 신앙간증집 <하늘집의 문으로>
취재 요청문
수신 / 대한민국 방송, 언론사 종교국(부), 문화담당국(부)
발신 / 기독학술원 “생명의 강”
연락처 / 010-2303-0675. 031/ 531-0675
일시 / 2010년 11월 목요일 11일 11시
제목 / 인류개혁을 목적하는 종교개혁 선언
장소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봉원동 51번지
한방랜드 24시 숯가마사우나
02/ 365-2700 <봉원사 정문 옆>
내 용
안녕하십니까?
귀사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내용은 다름이 아니라 현 시대 지구에서 최고의 베스트셀러라고 하는 성경을 가지고도 그 뜻을 몰라 서로 싸우고 다툼이 끊이지 않는 현실에서 성경의 바른 이해를 위해 지금까지 오해 했던 성경의 문제와 생활의 문제를 드러내어 개인의 마음과 생각, 행동에서의 참 자유를 바탕으로 사회와 국가와 세계의 평화를 이루기 위한 종교개혁을 선언하고자 합니다.
주된 내용을 요약하면,
14세기 종교 개혁 그 이후로 지금까지 기독교는 세계의 종교로 발전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말씀을 눈에 보이는 세상의 일로 이해하므로 인해 성경을, 자신 하나의 생각과 성품과 행동을 타인중심인 하나님의 사상중심으로 바꾸려고 하시는 것을 몰랐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는 바꿀 것도 틀린 것도 없다고 생각하며 육신이 행해야 할 도덕 예절 공의 정의는 오직 타인에서만 구하여 세상에서 오직 자기 하나만 독야청청한 사람이라고 그 몸이 말하게 되어 있다고 합니다.
성경의 말씀을 육체의 행위중심으로 이해한 지금까지의 기독교도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여 신앙의 핵심은 자기의 욕심을 위해 하나님께 구하고 옳은 행동은 항상 타인을 비난하는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타인과 다투는 문제거나 비난 받는 문제거나 또 가르침을 받는 모든 문제에서 먼저 자신의 속에서 타인을 배려하지 못하고 비난하고 싶고 싸우고 싶고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싶어 하는 등, 타인의 모든 것을 틀렸다고 말하고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모든 생각과 성품과 개념 등을 돌아보고 하나님께 기도하게 하는 것으로 축약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으로 자신의 성품을 변화 받기 위한 과정에 타인의 괴롭힘(어떤 형태로든)이 없으면 자신의 속에 있는 것으로 자기조차도 그 끝을 알 수 없는 자기중심의 성품이나 성격 감정 기분과 또 그 것을 다라 할 수 있는 행동의 그 끝을 발견 할 수 없게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은 자신을 하나님의 성품으로 변화 받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 있는 조건을 발견하게 하는 고맙고 감사한 사람들이라고 성경은 기록하면서 그런 사람들을 붙여주신 분도 하나님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들이 요구하는 모든 자신중심의 요구들을 충족시켜주는 길이 사람의 법에는 없습니다.
이는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목적에서 타인의 요구를 들어주는 비결은 자신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것을 하나도 찾지 않으면서 전부를 포기하고 남을 위해 살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는 그 목적이 이 땅에 사는 날 동안 하나님의 성품으로 변화를 받아야 천국에서 가장 좋은 자리를 예약하는 것으로 되어있어, 그 자리를 약속 받기 위해 이 땅에서 자신의 것을 모두 포기 할 수 있습니다.
그 이론의 결국에는 죽어야 천국을 가는 것으로 자신을 죽이거나 자녀가 죽어도 천국을 가는 것으로 이해하며, 사람이 아닌 참새를 죽이고 태어나게 하는 분도 하나님이심을 믿어 사람의 죽음도 하나님이 천국으로 영전시키는 것을 믿는 것으로, 자신의 목숨이 끊어져도 천국을 위해서라면 타인을 위해 사는 것을 최후의 목적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단순한 천국이나 신앙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사는 날 동안 자신이 타인을 위한 사람으로 얼마만큼 변화를 받는 것이냐 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그 목적을 이루는 그 방법대로 사는 사람은 육신이 당하는 고난 전부가 자신의 성품으로 고치기 위한 하나님의 일로 이해합니다.
그런 이해를 가진다면 세상살이를 고난이나 고생이라고 생각할 방도가 전혀 없어,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에게 고마워하며 살게 됩니다.
감사의 조건을 찾는 것이 아닌 인간의 생활 자체가 행복한 세상!!!
그 세상은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개념의 변화 이며 그 개념의 변화를 위해 하나님이 성경을 기록하여 우리들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교훈이 성경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놀라운 사실이 한 더 있습니다.
우리 배달국의 역사에 존재하는 천부경과 삼일신고, 삼신오제본기 등에 기록된 사람이 살아가는 법을 우리 대한민국의 선조들에게 주신 같은 이름의 하나님의 말씀에도 성경의 요구와 똑 같이 사람의 개념과 성품을 위해 사람들과 다투지 말고 그 성품의 조화를 만드시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반 진 일신)고 하고 있습니다.
그에 더하여 마음이 어떻고 기분이 어떻고 행동이 어떻고 하면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고 망령된 생각과 생활을 하는 것으로 설명하며 사람에게 내려지는 하나님의 벌이, 자신의 성품과, 사람의 중심사상을 말하는 목숨과, 타인을 어떤 눈으로 보는 가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 하나님을 향하지 않고 사람을 보면서 정의와 윤리와 공의를 찾는데에서 기인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우리 대한민국의 기본 신앙사상인 그 삼일신고에는 사람이 자기를 돌아보며 하나님의 성품으로 돌아가는 법을 찾는 것을 참 철학이라고 하여, 지금까지 성현들이라고 칭하던 서양이나 중국 철학자들의 모든 논리를, 하급으로서의 저질철학으로 정의 하고 있습니다.
성경이나 우리 고조선 이전 거꾸로 1565년(실제 개천은 5906년)에 세워진 나라 배달이 가지고 있던 신앙사상과 인간이 추구해야 할 참 철학은, 인간의 전(全) 생활에서 자기중심의 자신을 발견하여 하나님을 바라보고, 타인중심의 하나님의 성품으로 변화 받기를 소원하는 것이며 마음에 타인으로 인해 상처받고 슬퍼하며, 또 세상을 자기중심으로 바꾸자고 타인에게 빌기를 원하는 모든 것이 마음속에 있는 성품에서나 기분에서나 생활에서 전혀 생각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그런 것을 알 수 없어 말하지 못했던 기독교가 있었고, 대한민국의 철학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성품의 변화를 목적으로 하는 하나님 성품중심의 성경을 생활에서 육신과 육신중심의 생각과 성품과 행동이 당하는 고통들과 함께 하나님께 배워가며 나를 고쳐가는 중에 성경을 마음중심으로 풀어놓고 설교하며,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먼저 한문해석을 중심으로 풀었습니다.
고린도 후서 3-5장을 중심으로 베드로 후서 1장을 바탕으로 하는 성경에는 행위중심으로 성경을 이해하면 마음중심의 진짜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시각장애인이며, 가난한 거지이며, 거짓 선지자이며, 적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우매한 자이며, 하나님을 비난하는 자이며, 하나님이 세상을 주관하는 것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자, 어두움에 거하는 자, 밤에 있는 자 등,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마귀적 요소들을 벗어버리지 못한 자라고 하고 있습니다.
나 하나가 하나님의 성품을 받자고 살아가면 그 한 과정 안에 모두가 서로를 위하는 사람으로 변할 수 있지만, 나는 의로운데 너는 불의하다고 서로 손가락질 하며 비난하는 사회는 절대로 변할 수 없고 서로간에 싸움만 있어 그 원수 된 골만 깊어 갈 뿐입니다.
또 신앙의 핵심을 육신의 안녕과 편안과 편안을 위해 신에게 비는 것으로 각인된 세상을 따라 기독교도 고대 신앙을 따르는 한국의 신앙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성품을 변화 받고 세상이 변화하는 길인 하나님께 눈을 돌리는 <반 진 일신>을 거부하고, 세상을 자신의 생각과 기분대로 획일적인 세상으로 만들어 달라고 땡깡을 부리는 세상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기도의 예를 따라 자기가 아닌 타인들에게도 자기의 목적을 구하여 타인들이 자기의 소원을 들어줄 우상으로 만들어 놓고 자기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줄기차게 자기의 소원을 들어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행위 중심으로 풀어 놓아 행위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윤리를 외치며 눈에 보이는 사회에서 정의사회 구현을 외치는 것으로는 세상이 절대로 행복하게 변할 수 없어 성경을 알게 되고 지켜 행해보고 세상을 보는 눈을 바꿔 세상은 고난도 고생도 괴로움도 환난도 다 저를 위한 하나님의 뜻으로 보고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 고대의 신앙사상이나 성경이 말하지만 자신이 타인을 위한 삶이 되기 위해 먼저 타인과 다투는 경쟁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면 그 믿음의 생활만큼 하나님이 복으로 채워주어 그 마지막에는 타인들에게 공경을 받고 귀하게 여김을 받게 하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잇습니다.
사람의 성품이 신의 성품으로의 변화를 인간에게 가장 존귀한 것으로 설명하며 그 성품의 변화를 목적으로 하는 생활이 아닌 모든 것을 허망한 일생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지금까지의 성경해석의 오류에서부터, 지금까지 존재하는 모든 허구적 교리들의 모순과 사상과 인생관 철학 등 인류 전반에 걸친 모든 행동양식의 개념을 바꾸기 위한 종교개혁을 선언하고자 합니다.
이 선언은 다툼과 사기 절도, 이혼과 자살 등 개인적인 것을 넘어 국가나 종교를 포함하는 모든 전쟁과 테러를 잠식시키며 자신의 생각과 몸, 가정과 사회 국가와 세계의 완전한 자유를 바탕으로 하는 평화에 기여하게 될 것은 자명한 것입니다.
취재는 자유이나 불참 시 세상이 존재하는 동안에 최고의 특종을 노칠 수 있습니다.
잠간이지만 아주 작은 단체에서 운영하는 신문사를 포함한 인터넷방송의 보도본부장을 지낸 경력이 있던 제가 죄송스러워 하는 것은 제 개인의 사정상 거마비를 제공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언식이 끝나면 오찬이 준비됩니다.
세상의 평화, 국가의 평화, 사회의 평화, 가정의 평화, 개인의 온전한 평화를 이루어 서로를 고마워하며 서로가 행복하게 되는 하나님의 법을 따르게 하는 종교개혁 선언식에 꼭 참석해주시기를 기대합니다.
행복하세요
2010년 11월 5일
기독학술원 “생명의 강”
원장 / 류현수 목사 드림
* 추신/ 더 궁금하신 것이 있다면 전화를 주시거나 다음카페 <요한계시록 전문 강해의 집 생명의 강>으로 오셔서 저의 설교자료나 고조선에 대한 자료들을 보아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