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십이시가(趙州十二時歌)
축시(丑時)야(夜)1~3
닭우는 축시 잠에서 깨어나 초라한 내 모습을 근심스레 바라보네. 속옷도 웃옷도 하나 없고 가사만 겨우 모양만 남았네. 속옷은 허리가 없고 바지도 주둥아리가 없네. 머리에는 푸른 재가 서너 말은 되네, 도 닦아서 중생 구제해 보려 했건만 누가 알았으랴! 이렇게 변변찮게 어그러질 줄을<雞鳴丑 愁見起來還漏逗 裙子褊衫箇也無 袈裟形相些些有 褌無腰褲無口 頭上靑灰三五斗 比望修行利濟人 誰知變作不喞溜>
인시(寅時)신(晨)3~5
황량한 마을, 부서진 절 참으로 형언키 어렵네, 재 올릴 공양 죽은 끓일 쌀 한 톨 없구나. 무심한 창문, 가는 먼지만 괜히 바라볼 뿐, 참새 지저귀는 소리뿐, 친한 사람 없어, 홀로 앉아 이따금 씩 낙엽 지는 소리만 듣네. 누가 말했던가, 출가자는 애증을 끊는다고, 생각하니 무심결에 눈물이 수건을 적시네. <平旦寅 荒村破院實難論 解齋粥米全無粒 空對閑窗與隙塵 唯雀噪勿人親 獨坐時聞落葉頻 誰道出家憎愛斷 思量不覺淚沾巾>
묘시(卯時)조(朝)5~7
해뜨는 묘시, 청정이 도리어 번뇌가 되고, 애써 지은 공덕은 세상 티끌에 덮이니, 끝없는 전답은 일찍이 쓸어본 바가 없네. 눈썹 찌푸릴 일은 많고 마음에 맞는 일은 없는데, 참기 어려운 건 동쪽 마을의 거무튀튀한 황씨 늙은이, 공양 한번 가져온 적 없으면서, 내 방 앞에다 나귀를 놓아 풀을 뜯기네. <日出卯 淸淨卻翻爲煩惱 有爲功德被塵幔 無限田地未曾掃 攢眉多稱心少 尀耐東村黑黃老 供利不曾將得來 放驢喫我堂前草>
진시(辰時)조(朝)7~9
공양 때의 진시, 사방 인근에 밥하는 연기 부질없이 바라보네. 만두와 빈대떡은 작년에 이별하였는데, 오늘 생각해보니 공연히 군침만이 돌뿐. 생각도 잠깐이고 한탄만 잦네. 백집을 뒤져봐도 좋은 사람은 없고, 오는 사람은 그저 마실 차나 찾는데, 차를 마시지 못하면 발끈 화를 내며 가네.<食時辰 煙火徒勞望四鄰 饅頭餠子前年別 今日思量空嚥津 持念少嗟歎頻 一百家中無善人 來者祇道覓茶喫 不得茶噇去又嗔>
사시(巳時)오(午)9~11
오전의 사시, 머리 깎고 이 지경에 이를 줄을 누가 알았으랴, 어쩌다가 청을 피해서 촌 중이 되고 보니, 굴욕과 굶주림에 죽을 지경이네, 오랑캐 장가와 검은 얼굴 이가는 공경하는 마음은 조금도 내지 않고, 방금전 에도 불쑥 문 앞에 와서 고작 한다는 말이, 차 좀 꾸자, 종이 좀 빌리자는 말뿐이네.<禺中巳 削髮誰知到如此 無端被請作村僧 屈辱飢悽受欲死 胡張三黑李四 恭敬不曾生些子 適來忽爾到門頭 唯道借茶兼借紙>
오시(午時)정오(正午)11~1
해가 남쪽을 향하는 오시, 차를 마시고 밥을 먹음에 정한 순서가 없고, 남쪽 집에 갔다가 북쪽 집에 들렀더니, 마침내 북쪽 집에 이르렀더니 내치지도 들이지도 않네. 쓴 소금덩이에 보리 초장, 기장 섞인 쌀밥에 절인 상추 내주며, 말하기를 공양은 등한히 할 일 아니라며, 스님이라면 모름지기 도심이 견고해야 한다네.<日南午 茶飯輪還無定度 行卻南家到北家 果至北家不推註 苦沙鹽大麥醋 蜀黍米飯虀萵苣 唯稱供養不等閑 和尙道心須堅固>
미시(未時) 오후(午後)1~3
해기우는 미시, 이때 그늘지는 땅을 밟으며 밥 빌러 다니지 않네. 일찍이 듣자하니 한번 배부르면 백번 굶주림을 잊는다더니, 오늘 이 노승의 몸이 그러하네. 선(禪)도 닦지 않고 경(經)도 논하지 않나니, 다 헤어진 자리 깔고 햇볕 쐬며 낮잠을 자네. 생각컨데 저위의 도솔천이라도 이처럼 등 구워주는 햇볕은 없을 것일세.<日昳未 者回不踐光陰地 曾聞一飽忘百飢 今日老僧身便是 不習禪不論義 鋪箇破蓆日裡睡 想料上方兜率天 也無如此日炙背>
신시(申時)오후(午後)3~5
해저무는 신시, 오늘도 향 사르고 예불하는 사람은 있어, 노파 다섯에 혹부리 셋이라, 한 쌍의 부부는 검은 얼굴은 쭈글쭈글, 유마차(油麻茶) 공양이라니 참으로 진귀하네, 금강역사여, 애써 힘줄 세울 필요 없다네, 내년에 누에 오르고 보리 익거든, 어린 라훌라에게 돈 한 푼 주려하네.<晡時申 也有燒香禮拜人 五箇老婆三箇癭 一雙面子黑皴皴 油麻茶實是珍 金剛不用苦張筋 願我來年蠶麥熟 羅喉羅兒與一文>
유시(酉時)오후(午後)5~7
해지는 유시, 쓸쓸함 외에 달리 무얼 지킬까? 운수 난자(衲子)의 고매한 발길 끊어 진지도 오래인데, 절 마다 다녀가는 사미승은 언제나 있네. 단 한마디 말도 격식도 내지 못하고, 석가모니를 잘못 잇는 후손이로구나! 한 가닥 굵다란 가시나무 주장자는, 산에 오를 때뿐만 아니라 개도 두들겨 패네.<日入酉 除卻荒涼更何守 雲水高流定委無 歷寺沙彌鎭常有 出格言不到口 枉續牟尼子孫後 一條拄杖麤楋藜 不但登山兼打狗>
술시(戌時)석(夕)7~9
황혼녘 술시, 컴컴한 빈방에 홀로 앉아 있으니, 너울거리는 등불 본 지도 오래 이고, 눈앞은 온통 깜깜한 칠흑일세. 종소리도 듣지 못하고 그럭저럭 날만 보내니, 들리는 소리라곤 늙은 쥐 찍찍대는 소리뿐. 어디 다가 다시 마음을 붙여 볼까나, 생각다 못해 바라밀을 한차례 떠올려보네. <黃昏戌 獨坐一間空暗室 陽燄燈光永不逢 眼前純是金州漆 鐘不聞虛度日 唯聞老鼠鬧啾喞 憑何更得有心情 思量念箇波羅蜜>
해시(亥時)석(夕)9~11
잠자리에 드는 해시, 문 앞의 밝은 달 누가 사랑하는가? 방안에서 잠자러 갈 때가 제일 걱정이라. 한 벌 옷도 없는데 무얼 덮을까? 법도를 말하는 유가(儒家)와 계율(戒律)을 논하는 조가(趙家), 입으로는 덕담을 하나 정말 이상도 하다. 내 걸망을 비게 하는 건 그렇더라도, 모든 인연법을 물어보면 전혀 모르네.<人定亥 門前明月誰人愛 向裡唯愁臥去時 勿箇衣裳著甚蓋 劉維那趙五戒 口頭說善甚奇怪 任你山僧囊罄空 問著都緣總不會>
자시(子時)하오(下午)11~1
한밤중의 자시, 마음경계가 잠시라도 그칠 때 있던가? 생각하니, 천하의 출가인 중에, 나 같은 주지가 몇이나 될까? 흙 바닥에 낡은 갈대 돗자리, 늙은 느릅나무 목침에 이불도 하나 없고,
부처님 존상에 피울 향(安息國香)조차 없어, 잿더미 속의 쇠똥 냄새만 맡고 있네.<半夜子 心境何曾得暫止 思量天下出家人 似我住持能有幾 土榻床破蘆蓆 老楡木枕全無被 尊像不燒安息香 灰裡唯聞牛糞氣>
조주선사(趙州禪師) 십이시가(十二時歌)는 하루 24시간(時間)을 옛적 육십갑자(六十甲子) 십이지지(十二地支)에 두 시간씩 열두 때로 나누어서 칠언절구(七言絶句) 매시(每時) 7행(行) 84행(行)으로 게송(偈頌)을 지어서 조주선사의 수행담화(修行談話)를 노래를 하고 있다. 속옷도 웃옥도 하나 없고 가사만 겨우 걸치고 사니, 잠방이는 허리도 없고 바지는 주둥이도 없다고 푸념이다. 출가할 때 뜻은 도 닦아 중생 구제하려고 했는데, 머리는 비듬이 서 말이나 되어 초라한 모습 촌 중이 되었다고 탄식(歎息)을 한다. 부처님께 공양 올릴 쌀 한 톨이 없는데 창 밖엔 참새떼 지저귀는 소리뿐 찾아오는 인적은 뚝 끊겨 홀로 앉아 가을 찬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 소리만 듣는다고 했다. 청정(淸淨)이 도리어 번뇌(煩惱)가 된다고 했다. 청빈 가난이 뼈저리게 아픈 심정을 실토(實吐)하고 있다. 배가 불러야 도(道)도 논할 수 있지 열흘만 굶어보면 알 일이다. 흡족하는 마음은 없고 눈살 찌푸릴 일만 많아 동쪽 마을에 사는 황씨 노인네 공양미 한번 가져온 일도 없으면서 나귀를 놓아 절 앞에서 풀을 뜯게 해서 성가실 일만 생기는데 절 아래 마을 에서는 밥 짓는 굴뚝 연기만 바라보니, 작년에 먹었던 만두 빈대떡 생각에 군침만 돈다고 했다. 기껏 찾아오는 사람은 차 마시려고 절에 왔다가 차 마실 것이 없는 것, 보고는 화만 내고 가니, 백사람 중에 한 사람도 착한 사람이 보이지 않으니, 머리 깎고 이 지경이 될 줄 꿈에도 몰랐다는 자탄(自嘆)이다. 오랑캐 장가와 얼굴이 검은 이가는 불쑥불쑥 찾아와서 공경하는 마음은 조금도 없이 무례하기 짝이 없고, 차(茶)를 꾸어달라고 성화를 부려 귀찮게 한다. 양식이 떨어져 탁발을 나가면 짜디짠 소금 덩어리에 보리 초장에 기장 섞인 쌀밥을 주면서 공양을 등한히 할 수 없다, 스님들은 도심이 견고해야 한다, 쓴, 소리까지 듣는다. 겨우 향 피우는 다섯 노파와 한 쌍 부부 찾아왔으나 별볼일 없고 그렇게 많이 찾던 운수납자도 발길 끊긴지, 오래되어 절 찾은 사미도 없어 부처님 후손으로 잘못될까 걱정이 들고,
밤이면 캄캄한 방에 홀로 앉아 너울거린 등불도 본지 오래라고 하면 밤에 켤 초도 없다는 말이다. 혼자 지내는 종 칠 사미도 없고 절 방에 캄캄한 방에 앉아 있다 보면 늑은 쥐들만 찍찍 소란을 피워 잠도 못자는데, 덮고 잘 이불 하나 없으니, 천하에 이런 주지가 없다 한탄이다. 조주 선사하면 중국 천하에 알려진 고승인데 12시가를 보면 궁핍에 쪼들린 선지식이다. 법이 높은 고승도 이러할 진데 공부하지 않는 수행자는 말해 무엇하겠는가? 코로나 이후 우리나라 사찰에도 신도들 발길이 끊겨 먹을 양식이 떨어져서 어렵다고 하소연이다. 코로나 이후 앞으로 더욱 어려워질 것이라는 세평(世評)이다. 세속(世俗)에도 고물가(高物價) 고금리(高金利) 고환율(高換率)로 다 죽겠다고 하는 사람은 늘어나서 시장경제(市場經濟) 민생경제(民生經濟)가 바닥을 친다. 먹고 살기도 힘든 세상에 종교를 찾은 사람이 있겠느냐이다. 조주의 십이시(十二時)를 부린다. 조주에게 한 스님이 물었다. “십이시(十二時)에 어떻게 마음을 쓰십니까?” 조주가 말했다. “그대는 십이시(十二時)에 부림을 받지만, 노승은 십이시(十二時)를 부린다.” 그리고는 말했다. “형제들이여, 오랫동안 서 있지 마라. 일이 있다면 상량해보고 일이 없다면 의발(衣鉢) 아래 앉아서 이치(理致)를 궁구하는 것이 좋으리라. 노승(老僧)이 행각(行脚)할 때에 두 때 죽 먹고 밥 먹는 것을 제외하고는 잡스럽게 마음을 쓰는 곳이었다. 이밖에는 다시 달리 마음을 쓸 곳이란 없다. 만약 이와 같지 않다면 아주 멀리 있는 것이다.” <趙州因僧問。十二時中如何用心。師曰。汝被十二時辰使。老僧使得十二時。乃曰。兄弟莫久立。有事商量。無事向衣缽下坐窮理好。老僧行腳時。除二時粥飯。是雜用心處。除外更無別用心處。若不如是。大遠在> 조주선사(趙州禪師)가 12시가(詩歌)를 읊은 세상과 같은 세상이 되었는가 보다.
여여법당 화옹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