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석가.-다카하시 신지-
제 1 장 출가와 성도.
13. 출가와 반성,
고타마의 불안한 마음을 자극하는 일이 마침내 일어났다.
계모가 난다를 낳고, 난다에게 부왕의 뒤를 잇게 하려고 한다는 말을
여관의 입을 통하여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성에 있는 한, 부왕의 입장을 난처하게 하며,
계모에게 쓸데없는 신경을 쓰게 한다.
출가(出家)를 하면, 모든 일이 원만하게 해결된다.‘
라는 생각이 들어, 고타마의 출가의 동기가 싹트기 시작했던 것이다.
물론 출가의 동기는 이것만이 아니었다.
이미 밝힌 것처럼, 이웃나라의 침략,
빈부의 차이,
카스트 제도의 모순,
고타마를 에워싼 여성끼리의 상극 등이 서로 얽혀,
인생에 대한 무상을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출가하겠다는 최초의 발심(發心)은,
역시 왕위계승 문제에 있었으며,
얼굴도 모르는 생모, 마야에 대한 애집(愛執)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날이 갈수록 출가에 대한 생각이 점점 마음속에서 넓어져 갔다.
바라문교의 베다도 열심히 공부하였다.
외래(外來)의 수행자가 카필라에 들리면, 그의 말에 열심히 귀 기울였다.
성안에서 계모와 얼굴이 마주칠 때가 있어도, 되도록 그것을 피했다.
고타마의 마음은 언제나 불안정하고 초조하였으며,
베다에도 열중해 보았지만 조금도 안심을 얻을 수 없었다.
어릴 때의 천진난만하던 성격은 차츰 내성적이 되어,
쉬 가까이 할 수 없는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부왕의 눈이 이것을 놓칠 리가 없었다.
고타마가 열아홉 살이 되자,
계모의 오빠이며 데바다바 성의 성주(城主)인 스크라부다의 장녀
아쇼다라를 정처(正妻)로 맞아들이게 했다.
이렇게 하면 고타마는 출가를 단념하고, 성에 머물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이미 기술한 대로이다.
그러나 고타마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부담으로 되었다.
부왕의 기분이나, 성(城)의 정치적 관계 등을 고려하면,
점점 그 자유가 얽매여졌기 때문이다.
필연적으로, 그 배출구를 다른 데서 구하게 되었다.
일시적 도피를 위해서, 육체적 향락에 젖기도 했다.
몇 사람의 여인들이 고타마의 총애를 받았다.
걸어서는 안 될 길인 줄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었다.
아내를 맞이하고 오히려 육체적 번뇌가 더 쌓여,
자포자기가 된 자신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잠자리에서 여인들의 불화 갈등을 들으면,
자신의 행위에 화가 남을 느꼈으나.
시간이 지나면 그것도 잊고, 열락에 잠겼다.
여인들은 자유로웠다.
즐겁게 봉사해주었다.
생각한 대로 되는 방자한 마음은,
출가하고 싶다고 하는,
가장 엄한 자기의 내면에 조명을 비치는 행위의 태동과는 반대로,
슬슬 넓어져 간 것이었다.
고타마는, 지난날을 되돌아보면,
자신이 걸어온 그 상념과 행위는,
자기보존의 에고밖에 보이지 않는 것을 안 것이었다.
그래서 마음의 편력에 대해서,
중도(中道)라고 하는 불법(正法)의 조명으로 비추어 가면,
닿는 곳마다, 검은 구름이 소용돌이 칠 뿐,
정법에 맞는 행위가 전무했음에 아연하는 것이었다.
아버님과 계모에 대한 태도,
부하와의 경쟁의식,
동물 애호에 있어서도 거의가 독선적이었거나, 자기주장의 표현이었다.
이제까지 6년간의 산중 수행에서도,
하루라도 빨리 깨닫고 싶다고 하는 자신의 욕망이 앞서서,
외견(外見)에 사로잡힌 겉치레의 수행이었다.
깨달음에의 중요한 과정은,
마음의 내면에 대한 반성이며,
정법이라고 하는 대자연의 섭리에 비추어 보고,
사물을 보는 법,
사고방식.
이해하는 방법,
그리고 그것에 기준을 둔 행동이,
과연 올바른 것이었던가 아닌가를, 반성하는 것이 결정적 열쇠가 된다.
그래서 옳지 않은 면이 드러나면, 두 번 다시,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상념과 행위상으로 나타내는 일이었다.
고타마는 과거를 되돌아보고,
반성함으로서, 마음의 구름을, 하나씩 하나씩 제거하여 갔다.
여기까지 와서,
출가 그 자체에 대해서, 옳았던가 아니었던가를 생각해 보았다.
부왕의 희망을 받아들이지 않고,
출가할 때 태어난 아들 라후라를 두고, 출성 했던 것이다.
팔정도(八正道)의 <올바르게 도에 정진> 정정진(正精進)은,
부부, 부모 자식. 형제 등의 조화에 있었다.
현재의 고타마는 가정을 떠나서 혼자 살고 있다.
가정의 조화에 있어서는 완전한 무자격자이며,
그 무자격의 길을 선택한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아쇼다라의 비통해 하는 얼굴이 눈에 떠올랐다.
라후라는 아비없는 자식으로서 고생하겠지.
그러나 출가에 대해서는, 아쇼다라와 라후라를 제외하면,
카피라에 있어서, 결코 손실이 되는 일이 아니었다.
부왕은, 의모와의 사이에 난 아들 난다를, 왕의 후계자로 결정하지 않았지만,
난다의 성장과 더불어,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에 있었다.
왕의 처인 프라자파티의 발언권은, 왕이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서,
강해져 갔기 때문이다.
당연하게 고타마의 존재는,
카필라의 전도에 분쟁의 씨가 되었을 것이다.
고타마의 출가는,
부왕과 의모에 있어서, 소극적인 의미로 보아서는 다행이었을 것이다.
왕위 계승이란 고민의 씨가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만일 고타마가 그대로 카필라에 남아, 왕자로서의 책임을 다하려고 하면,
장래는 프라자파티와의 충돌은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난다의 출생은 파라자파티의 입장을 강대하게 하고,
육체적으로 늙어가는 부왕의 발언권은 약해져 갔기 때문이다.
문제는, 아소다라와 라후라였다.
독신이면 문제는 없다.
문제는 처자(妻子)를 버리고 출가했다는 점이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거기에는 변명의 여지조차 없었다.
출가에 의한 고난보다,
지아비없는 여자의 슬픔 쪽이 더욱 클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고타마는 라후라의 출생으로 얼마나 고민했는지 모른다.
그 이름을 장애물(障碍物=라후라)이라고 한 것도 그 표현의 하나다.
불안과 위선이 뒤섞인 카필라의 생활과,
생로병사의 해결을, 저울에 걸었을 때에,
라후라나 처의 모습이 햇살처럼 대기에 동화하여 간 것도 사실이다.
처자는 언젠가 자신의 곁으로 데려 오겠다.
그 동안은, 정신적인 고통을 주겠지만, 결국 그때가 와서,
정도에 마음이 열렸을 때의 기쁨과 안심을 생각하면,
한 때의 슬픔은 깨달음에의 큰 도약대가 되리라.
작은 것을 버리고 큰 일을 위해,
고타마의 출가는, 이렇게 해서 결행된 것이다.
‘정진(精進)이라고 하는, 사람과 사람의 조화는,
우선 자기 자신, 나아가서는 가정, 그리고 사회로 파급되어 가는 것인데.
가정을 버리고서는 조화의 기반이 붕괴되고 만다.
그런 의미에서는 현재의 혼자 입장에서는,
남에게 말할 자격도 없지만,
그 시기가 오면 처자를 맞아들이고,
그때까지의 부조화했던 집착심을 정도(正道)로 수정하면,
그동안의 공백을 메꾸는 것이 가능하리라.
고타마는,
‘정진’ 과 출가에 대해서, 이와 같이 반성했다.
그리고 후회는 없었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밤은 더욱 깊어갔다. 모닥불의 불이 꺼져 갔다.
서둘러 마른 가지를 얹고, 대나무로 만든 대롱을 불어 불을 피웠다.
재(灰)가 사방에 흩어지고, 불길은 피식피식 소리를 내며, 타 올랐다.
보리수의 잎이 환하게 밝아졌다.
36년간의 과거를 되돌아보고, 그 상념(想念)과 행위에 대해서,
흑백을 가려 가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흑백을 가리기 위해서는,
중도(中道)를 근본으로 한 제3 자의 입장에서
자신을 바라보지 않으면 안 된다.
(주;
중도의 척도 (= 팔정도)...
나는 영원불멸의 영혼이다.
영혼의 존재로서,
육신을 남의 몸을 보듯이.
주인으로서 종을 보듯이.
육신을 기준으로 생각하고 행했던 것들의 잘못을,
영혼의 입장에서 다시 보기...)
자신에게 편파적이어서는 의미가 없다.
그래서는 반성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만큼, 반성이 엄정하면 엄정할수록, 어리석은 자신이 더욱 드러났다.
남에게 말할 수도 없다.
반성하여 나빴다고 자인(自認)했다고 해도, 그 사실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요는 그 사실을, 이제부터의 인생의 과정에 있어서,
고쳐가는 길밖에 없는 것이다.
또, 과거의 그 선악에 대해서, 그것에 집착을 가지면,
앞으로의 행동이 속박되어 간다.
본래의 자유성이 망가져 버린다.
특히 악(惡)의 행위에 대해서,
‘잘못이었다....’
라고 인정하는 것까지는 좋으나,
거기 사로잡히면 어두운 상념을 만들어 내고 만다.
이런 경우에도 중도의 마음이 중요하다.
과거의 모든 체험은, 혼 수행의 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반성의 공덕(功德)은 반성 후의 중도의 실천에 달려 있다.
반성의 공덕은 심신의 조화라는 결과로 나타난다.
고타마는 36년간의 과거를 반성하고, 개안한다.
그리고 개안 후의 실천에 의해,
개안의 영역과 내용을, 더욱 충실한 것으로 키워나가는 것이다.
모닥불의 활활 타오르는 불길은,
그대로, 지금의 고타마의 마음의 넓이를 의미하고 있다.
그는 망고를 한 입 가득 넣고 먹었다.
달콤한 즙이 입안 가득 퍼져, 식도를 통해 위로 내려갔다.
새빨갛게 타는 화염은 생명을 표상하고 있는 듯이 ,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었다.
인간 석가.-다카하시 신지-저
(주;
수행이란.
실수를 줄이는 과정.
10번의 실수를 9번으로,
9번의 실수를 8번으로,
한 번의 실수로 인하여,
내 마음이 얼마나 ,
안타깝고, 슬픈지...
한번의 실수가 바로 번뇌,
즉시 반성으로 바로 수정...
반성의 공덕은 곧 심신의 조화
심신의 조화는 건전한 마음과 건강한 몸.
심신의 조화는
바른생활.
바른생활은 마음의 기쁨....)
* * * * * * *
깨달음을 이루신 부처님의 일상 생활에 대해서 , , , ,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 끝마칠때까지의 일상생활 !
하루 종일의 생활은 팔정도의 7가지 규범
정견, 정사, 정어, 정명, 정업, 정진, 정념, 에 맞추어서 생활하시고,
저녁에는,
모든 제자들과 함께 반드시 하신 일과는,
정정 !
먼저 부처님께서 대중들에게 하신 말씀이,
여러분 중에서,
내가 오늘 하루 중...
나도 모르게 잘못하는 것을 본 사람은
부디 나를 위하여 지적하여 주십시오.
라고 시작하셨다고 합니다.
하루 일의 반성을 먼저 시작하셨답니다.
그리고 차례 차례 반성을 하였지요.
( 자기 자신이 한 것을 스스로가 제 3자의 시선으로 점검하는 것이기에,
자칫 자기 변호로 잘못볼 것을 경계하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 고를 멸하는 길에 대한 답변.
< 고집멸도,>
" 고를 멸하는 도는 팔정도이다. "
라는 답변의 일상 생활화를 실천하셨습니다.
잘못보아서 생기는 괴로움은
올바르게 보아서 없어지는 것이다라는 정견..
잘못 생각하여 생기는 괴로움은
올바르게 생각하면 없어지는 것이다라는 정사..
잘못 말하여 생기는 괴로움은,
올바르게 말하면 없어지는 것이다라는 정어..
등등의 팔정도
여덟가지 올바른 길..
그리고 참선..
반성하지 않고 참선에 드는 것은,
비유컨데 소독하지 않고 수술하는 것과 같은 위험한 일입니다.
* * * * * * * * *
첫댓글 정말 좋은 내용 이네요,,실수를 줄이는 것이 수행이라..^^
순간순간의 사념과 행동이 팔정도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것이 해탈의 경지라면,,,마음에 구김이 없는 (부처님과 같은 수준의...)경지가 바로 해탈의 경지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