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에 나타난 환자에 대한 필자의 태도.
이 글은 표면에 드러나는 만큼만 곧이곧대로 이해해서는 안 될 것 같다. 글쓴이가 흥미로운 표현들을 다양하게 구사하고 있지만, 자신의 심경이나 환자에 대한 태도를 직접적으로 언급한 부분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양한 표현들을 중심으로 그 안에 숨겨진 글쓴이의 태도를 유추해야 할 듯하다.
일단 1번 단락에서 글쓴이는 이미 병원의 기이한 인간관계를 전제하고 있다. 의사는 문에 기대서서 환자를 지켜보고 환자는 그런 의사를 쳐다보지도 않는, 그런 관계다. 앞으로 서술할 그와 환자와의 관계도 그에 따라 표면적으로는 기이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2번 단락에서부터 그러한 큰 흐름에 따른 꽤나 흥미로운 표현들이 이어진다. 2번 단락에서 환자의 모습을 묘사하면서 분재(bonsai)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두 다리가 절단된 환자의 모습이 난쟁이 같은 분재의 모습을 닮았다는 것이다. 또한 19번 단락의 그루터기(stumps), 'when he was whole', 썩은 통나무(a rotting log)와 같은 표현도 큰 맥락에 편승하여 환자에 대한 냉소적이고 비인격적인 묘사를 보여준다. 49번 단락에서 환자를 ‘542번 방’이라고 표현하는 데서도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는 환자에 대한 묘사를 볼 수 있다.
10번과 11번 단락에서 글쓴이의 몸 좀 어떠냐는 물음에 당연히 의사일 것임에도 불구하고 누구냐는 말로 답하는 환자는, 병원의 기묘한 인간관계처럼 자신이 세상과 단절되어있음을 암시한다. 31번 단락에서 환자가 맹인인데도 전혀 개의치 않고 음식접시를 앞에 놔주고 떠나버리는 간호사의 모습에서도 환자의 철저한 고립상태를 엿볼 수 있다. 그러한 상태는 48번 단락에서 도와줄 것 없냐고 묻는 의사인 글쓴이에게 또다시 누구냐고 묻는 환자의 모습에서도 나타난다.
이렇게 글 전반에 고루 퍼져있는 비인간적인 묘사와 냉소적인 표현들은 그대로 글쓴이의 태도를 완전하게 반영한다고 볼 수 없다. 이는 복잡한 장치에 해당한다고 본다. 즉, 겉으로 드러나는 병원의 비인간적이고 비정상적인 관계와 냉소적인 태도 이면에는 글쓴이의 안타까움 또한 내포되어있다. 그러한 태도는 글 여기저기서 찾아볼 수 있다. 비록 나의 주관적인 판단에 따른 것이기는 하나, 한 명의 독자가 이렇게 이해한다는 것은 이 글 자체의 독특한 해석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4번 단락에는 환자의 병실에 병실이라면 꼭 있을법한 쓸데없는 것들조차 없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나는 건조하게 서술된 이 문단에서 글쓴이의 안타까운 마음을 느꼈다. 2번 단락에서만 해도 환자를 분재로 묘사하는 등 비인격적인 표현을 쓰던 글쓴이가, 오히려 건조한 서술을 통해 환자에 대한 은근한 동정심 또는 주위에 아무도 없고 삶의 의욕조차 없는 환자에 대한 안타까움이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루터기, 썩은 통나무 등의 표현을 연발한 19번 단락에 이어지는 20번 단락에서는, 그가 마치 선원이라도 되었었다는 것처럼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이 표현은 일견 냉소적으로 보이지만 글쓴이의 한탄 섞인 안타까움이 나타나있다고 본다. 34번 단락에서도 환자가 던진 스크램블 에그의 소리가 암도 치유할 수 있을 법했다는, 너무나 명백하게 과장법이 가미된 냉소적인 표현이 등장한다. 나는 이 문장도 철저히 고립된 상태에서 음식접시를 가지고 원반던지기 흉내를 내는 환자에 대한 한심함과 안타까움이 고루 버무려져 있는 복합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결정적으로 글쓴이는 38번 단락에서 공모자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환자를 비인간적으로 만들고 있는 병원의 인간관계와 분위기를 인지하고 있으며 그것을 안타까워한다는 것을 은근하게 보여준다. 마지막인 50번 단락의 ‘그 벽은 매우 깨끗하고 매우 하얗게 보였다.’라는 표현 또한 충분히 냉소적이라는 설명과 안타까움이 담겨있다는 설명이 모두 가능한 표현이다. 일단 너무 강조되어있어서 냉소적일 가능성이 있고, 어쩌면 스크램블 에그를 던져서 그 부분의 벽만 깨끗하게 닦도록 한 일이 전부인 환자의 말년이 비인간적인 인간관계가 가득한 병원, 그 속에 있는 자신보다 나을지 모르는 환자의 죽음에 대한 멍한 느낌이 담겨있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