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혹과 야밤의 도주 - 김사수~"레오나르도"가 씀
★2019년 기해년 양력 초하루가 엊그제 같았었는데 금방 두어 달이 지나
초봄 을 맞게 되었다. 세월이 유수같다 한다지만 고희(70세)가 지난 후
에는 1년이 하루 처럼 흐르는 것 같다. 눈 깜짝할 사이에 5년이 지나가
버렸다. 그런데 죽음은 조금도 두렵지 않은데 세월의 흐름에 비례해서
저승길은 멀기만 한 것 같다. 수 없는 죽음의 고비를 넘어가면서도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을 보면 무슨 조화속인지 모르겠다. 한 순간에 이승을
달리할 수 있는 순간들이 여러 번 있었음에도 죽지 않고 살고 있음은
하느님의 조화속인가 보다. 그래서 이승을 달리 할 수 있는 일은 내 마음
대로 할 수 없음이니 분명 하느님의 신비 인 것 같다. 노년의 육신의
고통이란 “生, 老, 病, 死”의 당연한 과정으로 神이 내려 주신 선물이라
할진데 하느님의 은총이라 생각되어 그 또한 깊이 감사드려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노탐을 버리지 못하고 탐욕에 사로잡혀 있으니 왜 그러 한가?
천주교 전주교구의 주보 “습정이”에 실린 "유혹이 크다하지만"이란
훌륭한 말씀을 묵상해 보고 이를 내 카페에 기록하여 남겨 보겠다.
  ◈유혹이 크다 하지만! (실은 인간의 마음에 달려있다)
  *인간의 욕심은 뼈에 붙은 힘줄과 같아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육신이 소멸된다면 몰라도 살아있는 한 욕심을 버릴 수 없을 것만 같다.
  그래서 유혹은 자연 사람의 마음을 괴롭히는 덫이 되고 그 안에 잡힌
  사람은 여느 사람이라도 별수 없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욕심 없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유혹도 덫이 아니다. 그것은 잘못이고 죄악일 뿐이
  다. 사람의 마음에서 욕심의 끈을 잘라 내야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다.
  유혹이 크다 하지만 실은 마음에 달려있다. 옳게 살려거든 탐욕에서
  벗어나야 한다. 하느님께서 주신 법도를 생명의 길로 삼고 살아야 한다.
★나는 얼마 되지 않는 나의 전 부동산과 동산의 일부를 가족들에게 이전 시
켜 놓았다. 그럼에도 걱정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내가 넘겨준 재산을 사후
유족들이 관리하지 못할 것 같아서 생각할 필요도 없는 불필요한 걱정에 시
달리고 있다. 왜 그런가 하면 예전에 돌아가신 조부님께서 군산 옥구 뜰녁
(現-공장지역)에서 영농으로 보유햇던 답(5필지=7천5백평)을 조부님 께서
하늘나라로 가시자(6.25전재중) 말자 부모님께서 한 순간에 팔아버렸으며
그것도 모지라서 3년 후에는 살고 있던 군산 신영동 집도 팔아 버리고 쫄딱
망하여 빚만 산더미처럼 지고 있다가 어느 날 밤에 덮을것과, 간단한 그릇,
수저 등을 포장하고 있기에 무슨 일인가 궁금하였는데 알고 보니
“야밤-도주”를 준비하고 계셨든 것이었다. 그 다음날인가 한 밤중에 기차를
타고 도망갔든 것이다. 그때가 휴전직후인 1950년대 중반인 인 것 같았다.
도망 간곳은 서울역 앞 남산에 가까운 “도동”(후암동) 이라는 난민들이 사는
판자촌 동네였든 것이다. 그곳은 6.25 사변 때 미군 폭격기에 의해 폭격당한
지역으로 피난민들이 천막을 치고 생활하는 빈민촌 이었다. 주변에는 포탄
종류의 불발탄 들이 산재해 있어서 주민들 일부가 그것들을 만져보고 충격을
가하여 쇳덩이 들을 골라 수집하는 과정에서 폭팔에 의한 사상자가 빈번히
발생하여 그 동네에는 팔, 다리 등이 절단된 장애자 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나 또한 그 동내 개울 가에서 불발탄(수류탄)을 건져 만져 보기도 하고, 갖고
놀기도 했으니 만약 돌 등으로 그 물건에 충격을 가하는 행위를 하였을 시
본인은 물론 주변의 구경꾼들도 너나 할것 없이 파상을 입고 죽든지 장애자
로 전락할 수 밖에 없는 그런 행동을 겁 없이 했고 죽을 고비도 여러번 겪였다.
우리 가족이 그런 위험 지역에 천막을 치고 생활했든 것이다. 혹독한 겨울철
에 허름한 천막촌에서 살고 있었으니 동상에도 시달렸고, 피를 빨아 먹는 이
(기생충)들이 옷에 줄줄이 메 달려 피를 빨아 먹어 온몸이 간지러움에 시달렸
던 것이었다. 그 난민촌의 생활은 얼마나 혹독했든지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
는 것이었다. 야밤-도주 일 년 조금 넘어가는 동안에 온 식구가 고생한 일을
생각하면 진절머리가 난다.(그러나 얼덜결에 군삼 촌놈이 서울 덕수궁 인근
태평국민학교 저학년 한해를 조금 넘어 수학할 수 있는 행운도 있었다.)
어느 날 군산에서 우리 가족의 소문을 듣고 빚 받으러온 어떤 작자가 우리가
사는 거주지를 탐문해서 알아내 가지고, 천막촌에 찾아와 부모님에게 빚진
돈을 내 놓으라고 독촉했지만 가진 것이 없으니 어머니는 본인 머리카락을
짤라 남대문시장에서 팔아 푼돈을 마련하고, 시집올때 가지고 오셨든 예물
(당시로는 고가인 인조견) 한필을 팔아서 그 작자에게 쥐어 주면서 군산에 내
려가 있으면 돈벌어서 빗진돈을 반드시 갚아 주겠다고 달래 겨우 내려 보낸
사실도 있었다. 나중 일이지만 귀향후 빗진돈을 다 갚았지만 서울로 빗받으러
왔든 그 작자가 화투로 돈놀음하다기 한 순간에 急死(급사) 했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어머님은 “천벌을 받을 놈! 돈만 밝히다가 제 갈길로 갔구만!"라고
말씀하시며 아주 시원해 하셨다. 결국 일 년 반을 조금 넘어 부모님은
서울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먼저 형님고 나를 군산으로 먼저 귀향 시켰는데
두 형제는 군산에서 이모님 댁과 외삼촌댁을 유랑 걸식생활 하다시피 하면서
지냈는데 두어달 후에 부모님도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어린 동생 3명과 함께
귀향하여 모두 같이 살 수 있게되었으나 무슨 재주로 그 많은 빚을 갚을 수
있었는지는 의문 이지만, 군산에서 우리가족은 집도 절도 없이 걸식하다
시피 하면서 지냈든 것 같았다. 내 기억으로는 군산 신영동 이화철공소
사이드의 가건물 임시상가에서 온 식구가 생활한것 같았다.
부모님은 낮에는 그 가게에서 미곡장사를 하셨고 밤에는 도로변에서 가게의
문짝들을 깔아놓고 엄동설한에 우리 식구들은 덮을것도 없이 하늘을 지붕
삼아 겨울밤을 지세우고 있었는데, 군산 신영동 사무소에 근무하는 “영동”
이라는 아들을 둔 동-서기 아저씨가 그 어려운 상황을 지켜보시고는 우리
가족을 자기 집으로 데리고가 방 한 칸을 내어주시어 우리는 그분의 집에서
이불을 덮고 따듯한 잠을 잘 수 있었다. 내 기억으로는 그날 밤의 잠자리가
내 평생에서는 가장 행복한 잠디리였다고 단언한다.. 호텔의 어느 숙소 보다
훨신 달콤한 잠을 잘 수 있었다.
그날의 따듯한 잠자리는 내 머릿속에 길이-길이 남아 있었다.
나중에 반드시 베풀어 주신 그분 가족들에게 식사 대접 이라도 해 드리고
싶었으나. 그 집안이 비운으로 행방이 묘 현 하다는 소문만 있었고, 후로는
그분 가족들의 소식을 접할 수 없었다.
비운의 시작은 그 집 아들 “영동”인가 하는 친구가 군 셍활 중 무장한채 탈영
하여 군산으로 내려와 고무신을 바꿔 신은 애인 문제로 다방에서 총질을
하며 농성 하다가 군경에 의해 사살 당했다는 불행한 소식이었다.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인물이 훤하여 나도 잘 알고있는 미남인 후배였는데
그 친구의 사건만을 생각하면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에도 마음 한쪽 구석이
아려오고,슬퍼진다. 그건 그렇고 무엇 때문에 우리 집안이 한 순간에 쫄딱
亡하였는지 그 이유를 나는 확실히 모르겠다. 다만 당시에는 해방직후라서
인지 금융기관 문턱이 너무 높아 시중에 돈이 쉽게 돌지 못하여 “계”라는
사작인 서민금고가 성행하여 어머님이 거기에 몰두해서 왕 주 노릇을 하다
보니 “계”가 깨져 본의 아니게 빚을 진 것 같다고 추측되지만 우리 맡兄은
그 사연을 알고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야밤에 도주한 부모님의 전철을
밟지 않고자 평생동안을 돈을 빌려본 일도 없고, 빚을 져본 일도 없었으며,
빌려준 일도 거의 없었기에 약간의 재산을 모을 수 있었는데 이것이 오히려
내 末年에 짐이 되고 있는 것이다.
정부로터 받고 있는 연금 등 만 가지고도 절약하면 먹고 살 수 있었는데도
저 높은 곳(천국)으로는 절대 가지고 갈 수 없는 사소한 짐 덩어리 들이
나를 괴롭힌다. 그래 보았자 서울 변두리의 소형 아파트 한 채 값도 안되는
사소한 재물인데도 나한테는 그것 또한 욕심이 지나쳤던 결과로 남겨진
재물이라고 생각되어 ‘끝’이 보이는 데도 그것 때문에 末年의 마무리를 하지
못하고 있는것 같다. 내 死後에 미흡한 아들놈과
경제문제에 대헤 전혀 무뢰한인 내자가 유산관리를 하면서 먹고 살 수 있을
는지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이것이 나의 苦痛(고통)이기도 하다.
내 인생의 마무리를 하고자 욕심을 버리자 하면서도
이런 사소한 짐 덩이들이 나를 괴롭게 한다.
분명, 살아 있는 자는 살것 이다만, 내가 어찌 하면 편안히 저승에 갈 것인가
하는 게 문제로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
모든 걸 버려야 하면 서도 절대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유족들도 나중에
먹고 살아야 하니까 그러하다. 그러나 끝’이 자꾸만 가깝게 보인다.
우리 모두는 다 끝을 지니고 있는데도 유독 나한테만 끝이 있는 것으로 생각
하고 있으니 이것 또한 과욕 인 것 같다.
그러나 과욕으로 오버된 재물이 있다면 반드시 버려야 할것 같다만 버릴 수
있는 방법을 나는 모르겠다.그러나 성경말씀에서는 재물보다는 우리 이웃을
사랑하고 나누면서 살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나누면서 사는 것이 욕심을 버릴 수 있는것임을 분명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사랑하고 나누면서 살면 모든 욕심을 버릴 수 있다" 하기에 오버된 재물
은 반드시 버려야 할것이지만 절대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
전자대로 살면 우리 모두는 마지막에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살면서 각자 믿고 있는 성인말씀에 의지하고 열심히 살면 사후에
天國이든 極樂이든 다음 세계에서 다시 반갑게 만나 웃고 幸福하게 지낼 수
있다. ~ 하니 얼마나 좋을 것인가!
하지만 현실과는 거리가 너무 멀 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 가는 것 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라고 제자들에게 말씀 하셨든
것이다. 그런데 나는 정부의 도움을 받으며 건강을 유지하면서 생명을 연장
하고 사는 주제에 죽음에 대하여 논함은 이율배반 이지만
성경의 *시편-90편을 읽어보면 나 또한 곧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을 것 같다.
성경 *시편(90-10)의 말씀을 묵상해 보자.....
“人生은 기껏해야 칠십년, 筋力(근력)이 좋아야 팔십년, 그나마 거의가
苦生(고생)과 슬픔에 젖은 것, 날아가듯 덧없니 사라지고 맙니다.”
위의 *성경 말씀 은 항상 내 마음에 와 닿지만 인생이 영원할 것 같은 헛된
꿈에 살고 있는 우리 소인배들은 이 시편의 말씀이 괴롭기만 한 것이다.
이웃을 사랑하지도 못하고,니누지도 못하면서, 욕심을 과감히 버리지도
못하는 우리 소인배들은 성인은 되지는 못 할 지라도 성인들의 반의반만큼
이라도 이를 본받고 나누면서 산다면 반드시 천국에 갈 것 이라 생각되지만
천국이 있는지 없는지 조차 의심하고 있는 “크리스찬” 들의 상당수는
무신론자인 것 같다. 말년인 요즘에는 오히려 성불하고자 하여 깨달음에만
몰두하고 증생 구제에 전력하고 있는 불자들의 신심에 상당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나이가 들어 가면서 세계사를 공부하면 할수록 공격적인 서양의 기
독교적 사상에 의문을 갖게 된다. 근본 바탕인 “권선징악”과 같은 말씀은 똑
같이 강조 하면서 역사적(11~13세기)으로 “이슬람교”를 대상으로한 서양의
“십자군전쟁”과 조선末 천주교도 박해를 빌미로 한 프랑스군의 강화도에
침략한 “병인양요”(1866년)와 / 5년후 미국인들의 "신미양요"(1871년)와 같
은 공격적인 사실들이 반대급부적 으로 천주교를 배교할 정도는 아니지만
나를 동양의 불교사상에 상당한 관심을 갖게 하고 있다.
어찌 되었든 모든 종교를 떠나서라도 오버된 욕심(과욕)은 빨리 버려서 나
본인 末年의 마지막을 정리하여 편한이 눈을 감을 수만 있다면 최후 만년의
복을 받았다고 생각될 것 같다. ~ The End / 2019.01.25.
|
첫댓글 낮추고
낮추고
내리고
내려도
부족한건 한이없습니다.
사랑하며 평생을 살아도
부족한건 마찬가지라고
지금부터라도 새마음으로 사랑하고 살아가려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