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元)나라 황제(皇帝)도 인정한 신궁(神弓)
고려(高麗)후기는 원(元)나라의 내정간섭으로 왕실의 주체성은 상실되고, 왕권은 극도로 쇠퇴하였다. 북으로는 중국 남방에서 일어났던 홍건적(紅巾賊)이 점차 북상하여 원나라를 밀어내고, 고려의 변경을 넘어 수도 개경(開京)을 함락하기도 하였다. 또한 남으로는 일본(日本)의 남북국시대 초기부터 흥기(興起)한 왜구(矮寇)가 경상남도 연안을 약탈 하였고, 1350년부터는 본격적 활동으로 내륙 뿐 아니라 예성강 입구까지 진출하여 개경을 위협하였다. 고려가 이처럼 남, 북으로 외침의 위기에 직면해 있을 때 최영(崔瑩, 1316~1388)을 비롯한 명장들이 출연했는데 회성부원군(檜城府院君) 황상(黃裳, 1328~1382)도 그중에 한 사람이었다.
용맹무쌍(勇猛無雙)으로 공민왕(恭愍王)의 총애를 받다.
황상은 본관(本貫)이 의창(義昌, 지금의 창원시)이며, 창원황씨 회산부원군계(檜山府院君系) 시조(始祖)인 문하시랑 동중서문화평장사(門下侍郞 同中書門下平章事) 황석기(黃石奇)의 장자(長子)이다. 『고려사』 권114 ⸢황상열전⸥에는 그가 충혜왕(忠惠王)(1330~1332, 1339~1344) 때에 호군(護軍)에 제수되었다고 한다.
그 연령을 아무리 낮추어도 17세 전후한 때의 일이다. 약관도 되지 않은 그가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밀직사지신사(密直司知申事, 정3품)였던 아버지 '황석기'가 조적(曺頔) 일당을 제거하고 시종하여 1등공신에 책봉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충혜왕'은 “1등공신의 초상을 공신각에 걸도록 하고, 아들 1명에게 7품직을 줄 것이며, 아들이 없으면 조카나 사위에게 대신 8품직을 주도록“ 교지(敎旨)를 내렸다. 호군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고려시대의 정4품의 관직 이었다면 교지에 내용과 다르다. 그가 초임에 호군에 제수된 것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대단한 특전에 해당 한다. 이것은 그보다 12살이 많은 최영(崔瑩, 1316~1388)은 수차례에 왜구를 토벌한 공적과 1352년에 조일신(趙日新)의 난(亂)을 평정하고 나서야 37세에 호군이 되었고 31세가 많은 이방실(李芳實, 1298~1362)은 원나라에서 충목왕(忠穆王)을 호종했던 공으로 47세의 중랑장(中郞將)이 되었다가 호군이 되었다는 것에서도 잘 알 수 있다.
그는 공민왕 초기에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역임하였고, 1354년 6월에 원나라가 남쪽의 홍건적을 토벌하기 위해 고려(高麗)에 원정군을 요청할 때 지명되기도 하였다.
1356년 5월에 부원(附元) 권신(權臣)이었던 기철(奇轍) 세력을 제거한 후에 관제를 복구할 때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에, 1358년 2월에는 추밀원사(樞密院使)에 임명되었다.
또한 1359년 6월에는 기철(奇轍)을 제거한 공으로 1등공신에에 판추밀원사(判樞密院事)를 임명 받으며 승승장구 하였다. 1357넌 9월, 공민왕(恭愍王)이 양부(兩府)를 불러 사방에 전쟁이 빈발하고 민생이 대단히 어렵지만 권신들이 논밭에 개와 매를 놓아 사냥을 즐기며 나라를 걱정하지 않는 것을 질책하는 일이 있었다. ‘황상‘도 질책의 대상이었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추밀원사로 승진하였다 뿐만 아니라 1359년 7월에는 어사대(御史臺)에서 황상은 판밀직(判密直) 신귀(辛貴)의 쳐 강씨(姜氏)와 사통하여 풍속을 어지럽혔으므로 국문하기를 청한다는 탄핵(彈劾)을 받았다. 그와 함께 강씨를 간음했던 양백연(楊伯淵)은 탄핵으로 파직되어 금고에 처해졌다. 하지만 그는 '공민왕'이 그 용맹과 뛰어난 무공을 아끼고 지난날의 공로를 감안하여 면직시켰을 뿐 다른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홍건적‘의 침범으로 1361년 11월에 ’공민왕‘이 남쪽으로 파천(播遷)을 결정하자, 근신 중이던 ’황상‘은 ’공민왕’의 파천 대열을 따랐다. 그는 이때 교주강릉도 도만호(交州江陵道 都萬戶)로 임명되었다. 1362년 1월에는 총병관(摠兵官) 정세운(鄭世雲)이 개경을 수복할 때 참전하였고 3월에는 참정(參政)으로 평장사(平章事) 이공수(李公遂) 등과 개경의 방비를 담당하였다. 전쟁이 종식되자, 찬성사상의(贊成事商議)였던 ‘황상’은 그동안 공로가 인정되어 1363년 윤3월의 ‘신축(辛丑)년 피난 호종 공신’과 ‘개경을 수복한 공신’을 녹훈할 때 모두 일등공신의 반열에 들었다.
그 결과 참지문화정사(參知門下政事)를 거쳐 찬성사(贊成事) 임명되고, 회성부원군(檜성府元君)에 책봉되었다. 또한 1365년 3월에는 ‘원나라‘에서 홍건적을 평정했던 그를 봉훈대부 경정감승(奉訓大夫 經正監丞)에 재수하자, 1371년 8월에 고려 조정에서는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추충보리익찬공신(推忠奮義輔理翊贊功臣)이란 칭호를 더해 주었다. 우왕(禹王) 때인 1377년 3월과 1381년 3월에는 서강도원수(西江都元帥)로 임명되어 개경까지 침범한 왜적의 방어에도 여러 차례 공적이 있었다. '공민왕' 때부터 홍건적과 왜구(矮寇)의 방어에 뛰어난 공적을 보였던 ’황상’이 1382년(우왕8년)에 사망하자 조정에서는 공정(恭靖)이란 시호(諡號)를 하사하였다. 그의 묘소는 아버지 ‘황석기’, 아들 ‘황윤서’ 것과 함께 황해도 수안면(黃海道 遂安郡)에 조성되어 있다.
북으로 홍건적(紅巾賊)을 남으로 왜구(倭寇)를 토벌하다.
‘황상‘의 뛰어난 무공은 고려에서 뿐만 아니라 원나라 황실까지 알려질 정도였다. 용맹했던 그는 특히 궁술(弓術)에서 발군의 실력을 보였다. 일찍이 원나라 순제(順帝)는 ’황상’의 명성을 듣고, 그가 장사성(張士誠)의 토벌을 위해 원나라 수도인 대도(大都)에 갔을 때 친히 불러 그의 팔뚝을 살펴보고 칭찬 하였다고 전한다. 『태조실록』에서도 이성계(李成桂, 1335~1408)가 당시 천하의 명궁으로 명성을 떨쳤던 ‘황상’과 덕암(德巖)에서 150보 밖에 과녁을 설치하고 시합해서 이겼던 것을 전한다. 실록에서는 태조(太祖)의 무공을 돋보이게 하려고 ‘이성계‘가 이겼다고 했지만 ’황상’이 경쟁자로 지명되었다는 것만으로도 그가 당시 최고의 궁사 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가 활약했던 원(元)말, 명(明)초에 중국 대륙에는 겨울 혹한과 전국의 오랜 가뭄으로 백성의 삶은 도탄에 빠져있었다. 특히 1351년 황하유역의 큰 홍수 피해를 복구하기 위하여 조정해서 백성의 여건을 고려하지 않고 노동력과 재원을 대규모로 정벌함으로써 민심의 이반은 더욱 심화되었다. 전국 각지에서 민중봉기가 일어나고, 억압으로 잠재되었던 한, 몽(漢, 蒙)간의 민족 갈등이 더해져 원나라 타도를 위한 봉기는 더욱 격화되었다.
원나라 승상인 톡토(脫脫)는 1354년 6월에서 사신으로 갔던 채하중(蔡河中)을 통해 황명으로 남쪽을 원정할 것이니, 고려 국왕은 정예군을 파견하여 도와줄 것을 요청하였다. 얼마 후 다시 이부낭중(吏部郎中) 카라노카이(哈刺邦海) 등을 파견하여 남쪽의 장사성을 토벌 할 것이니 장수와 서경(西京)의 수군 300명, 또한 용감한 군사를 모집하여 8월 10일까지 원나라의 대도에 집결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원나라에서 요청했던 장수 40명 중에는 ‘황상‘을 포함하여 고려 8대명장으로 알려진 유탁(柳濯), 안우(安祐), 최영(崔瑩), 이방실(李芳實)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원나라에서 고려에 8대 명장 중에 5명을 직접 선정했는데, 그중에 젊은 ’황상‘이 포함 되어 있다는 것은 거의 무용이 이미 원나라에도 알려져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토벌군에 참가했던 ’황상‘을 비롯한 고려군은 승상 '톡토'의 선봉이 되어 고우, 사주 등지에서 장사성군대를 평정하는데 일조하였다.
’황상’은 그 후로도 고려를 침범 했던 홍건적 토벌과 '공민왕'의 왕권 보위에도 공로가 있었다. 먼저 홍건적을 북쪽으로 세력확대 하다가 퇴로를 차단당하자 2차(1359년12월, 1361년)에 걸쳐 압록강을 건너 고려를 침범하였다. 1361년 10월에 홍건적의 위평장(僞平章), 반성(潘誠) 등이 10만명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삭주를 침범하였다. 적이 수도 개경을 위협하자, ‘공민왕‘은 남쪽으로 피난하며 한편으로 군마와 물자를 징발하여 점차 대열을 정비하였다. 복주(福州, 현재 안동시)에서 총병관(摠兵官)에 임명된 정세운(鄭世雲)이 각지의 병사 20만 명을 징발하여 1362년 1월에 개경에 동쪽 교외 천수사(天壽寺)에 주둔하고, 수도를 수복 하려는 전투를 펼쳤다, 이때 ’황상‘은 9명의 원수(元帥) 중 한 사람으로 참전하여 승리를 거두는데 일조 하였고, 그 후로 개경의 방비를 담당하였다. 이러한 그의 공로는 원 나라에서도 인정 되어져 앞에서 본 것처럼 1365년 3월에 관계(官階)가 하사되고, 고려 조정에서는 이전에 비해 공 신호를 더해 주었다.
다음으로 원나라에서 기황후(奇皇后)를 중심으로 한 부원세력이 '공민왕'의 자주정책에 불만을 품고, 2차 홍건적의 고려 침략을 틈타 그를 폐위하고 덕흥군(德興君)을 옹립 하려 하였다. 원나라에 있던 최유(崔濡)등은 1364년 1월에 ‘덕흥군‘을 따라 원병 1만 명과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공략하고, 선주(宣州)에 주둔하였다. 당시 공민왕은 ’최영’을 도순위사(都巡慰使)로 삼아 모든 군대를 통합지휘 하게하고 ‘황상’을 동북면도순토사(東北面都巡討使)로 삼아 대비하였다. 당시 동북면은 선주와 고개를 하나 사이에 두고 있는데, 18일에 ‘황상’은 ‘이성계’와 수주(隨州)의 달천(㺚川)에서 매복으로 ‘덕흥군‘의 군대를 전멸시켜 공민왕의 폐위를 무산 시키는데 지대한 공을 세웠다.
이외에도 ‘황상‘은 고려말 ’우왕(禑王)‘ 때 수차례에 걸친 왜구의 방어에도 공로가 있었다. 고려시대 왜구의 출몰과 관련해서는 『고려사』 권22 고종 10년 5월 22일조에 “왜구가 금주(金州, 현재 김해)를 노략질 하였다.“는 기록이 최초의 것이다. 그 후로 13세기에 왜구 관련의 기록은 모두 금주, 거제를 포함한 경상남도 연해가 활동 지였다. 1350년부터는 서쪽으로 전라도를 거쳐 강화도 교동과 예성강 입구까지 진출하여 조운선(漕運船)을 불태우고 약탈을 했을 뿐만 아니라 개경도 수차례 위협하였다. 그 결과 조정에서는 연해의 창고를 내륙으로 옮기고 왜구를 방어했지만, 1357년부터 간간이 조운이 통하지 않아 하급관리에게 녹과(祿科)와 녹봉(祿俸)이 지급되지 않기도 하였다. 그 후로 왜구의 침입이 더해지자 결국 1376년 9월에는 조운(漕運)을 폐지하였다.
14세기 중후반부터 이처럼 왜구의 침탈이 빈번하고 격렬하여 민심이 동요되자, 고려 조정에서는 1377년 3월에 군의 지휘부를 개편하여 방어체계를 구축하고자 하였다. 당시 ‘황상‘은 서강도원수로 임명되어 이성계, 양백연, 등의 10명의 부장을 거느리고 개경 방어에 참가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왜구의의 침략에 대한 불안을 잠식 시킬 수 없자, 5월에는 내륙의 철원으로 천도할 계획을 세웠지만 ’최영‘의 강력한 반대로 무산되기도 하였다. ’황상‘이 1381년 3월의 군부개편 때도 동강도원수(東江都元帥) 나세(羅世)와 함께 서강도원수(西江都元帥)로 재임되어 개경 방어에 큰 공적을 남겼다.
남북으로 왜침을 방어하고 국난의 수습에 공적이 있던 황상이 사망하자 조정에서는 공정(恭靖)이란 시호(諡號)를 사하였다. 이외에도 함안 칠원읍 유원동의 와룡제, 회원사 진주에 동산제 등지에 후손과 유림(儒林)들이 공적을 기리며 현재까지 매년 봉사(奉祀) 하고 있다.
【참고문헌】고려시대 경남 사람들
【출판사】도서출판 선인
【저자】남재우, 배상현, 신은제, 안순형, 이종봉, 최연주
【발행】초판 1 쇄 발행 2019년2월28일
- 22세손 경제학 석사 황재우 감수 -